34.
시아라가 떠나고 난 뒤, 아델트 공작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땅 위로 올라왔다.
단숨에 뛰어오르는 그 동작은 매우 가벼웠으며, 그의 옷자락에는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 봤을 때의 모습처럼 여전히 멀끔하고, 단정했다.
반면에 펠릭스는 탈출하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여댔던 탓에, 윗옷은 말려 올라가고 바지는 벗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곱슬곱슬하던 머리카락은 고무풍선을 비벼댄 듯 사방으로 뻗쳐있었다.
그는 이제 조금씩 제 신세가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달라고 하나 봐라.’
펠릭스가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공작의 눈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카시안은 그가 매달려 있는 나무 기둥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곧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어 순식간에 밧줄을 끊어냈다.
그 바람에 펠릭스는 준비할 새도 없이 바닥으로 쿵 추락했다. 동시에 붕 떠오른 흙먼지가 그를 뒤덮었다.
“아악!”
그가 꼬리뼈가 부서지는 고통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카시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사하다고 해야지.”
“네?”
무감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카시안을 보며 펠릭스는 약간 움찔했다. 그러나 최대한 아닌 척 입술을 삐죽거렸다.
“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카시안이 아직 바닥에 앉아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펠릭스는 그것을 한참이나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뭐해. 안 갈 거야?”
“아. 가요. 가.”
카시안의 손을 잡자 그가 힘을 줘 당겼다. 그리고는 일말의 감정도 없이 뒤돌았다.
두 사람은 함께 언덕을 내려왔다. 이번에도 앞서 걷는 이는 카시안이었다. 자전거 바퀴가 고장 나 그의 등 뒤에서 걷던 그 날처럼.
펠릭스는 자꾸만 그에게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이렇게 걷는 수밖에.
온통 시커먼 차림새인 아델트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펠릭스는 확신했다.
저 남자에게 잘못 걸리면, 자신의 인생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검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건 시아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
다사다난했던 피크닉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오랜만에 초코케이크를 먹기 위해 한나의 레스토랑을 찾았다. 달짝지근한 케이크를 입에 잔뜩 넣을 생각에 한껏 들떠서, 한나를 보자마자 활기차게 인사했다.
“한나!”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했다.
“저기…. 시아라.”
“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빨간 머리 남자가요….”
그 말에 나는 마시고 있던 오렌지 주스를 공중에 내뿜을 뻔했다.
“네?”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나는 한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라튼, 그가 다녀갔구나.
이제는 그 이름도 지긋지긋한 라튼 레트랑. 그는 정말이지 얼굴값을 했다. 제국 수도에서 그를 모르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라튼은 언제나 ‘우리 엄마가-’라는 말을 달고 살았지만, 사실 그보다 최악은 따로 있었다.
그 말을 방패막이 삼아 숱한 여자들을 만나러 다닌 것이었다. 그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엄마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댈 때마다, 나는 그를 용서했다. 그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었으니까.
잡화점을 찾는 여자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나누던 대화 중에는, 그에 관한 것도 있었다. 거의 모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빨간 머리 걔’.
그러면 나는 그 남자가 라튼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뒤로의 대화 내용은 치가 떨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나 사이는 비밀이었고, 나는 그의 그림자였으니까.
그래도 결국, 다시 나한테 돌아오니까. 그러니까 그걸로 됐어, 만족해. 라며 과거의 나는 그를 이해했었다.
진짜 그때는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아무튼, 그 ‘빨간 머리 남자’라는 단어를 아델트까지 와서 다시 듣다니.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소름이 끼쳐서, 나는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라튼이…. 아니, 그 남자. 눈도 빨간색이었죠? 피부는 시체처럼 하얗고.”
“맞아요!”
“… 여기에 왔었어요?”
한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도대체 왜….”
“그건 모르겠지만…. 분홍색 긴 머리의 여자와 함께였어요.”
그 말에 이제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엘리나 트리탄?”
“제가 그들의 이름은 전혀 알 길이 없어도…. 두 사람 모두 귀족처럼 보였어요. 여자는 엄청 비싸고 귀한 옷을 입고 있었고, 그리고 또….”
한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 여자가…. 시아라, 당신이 자기 자리를 빼앗았다고 했어요. 남자는 그걸 자꾸 되물었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이상한 소리를 해댔는데, 손님이 부르는 바람에….”
그녀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시아라.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아뇨! 그냥 좀…. 귀찮은 일이에요.”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나한테 말해줘요.”
“네. 꼭 그럴게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아델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 말에 나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하아…. 그 남자는…. 예전에 제가 만났던 사람이에요.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 왜 계속 쫓아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나보다도 더욱 노발대발하는 한나를 남겨두고, 나는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러나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라튼과 엘리나. 그 두 사람은 서로 어떻게 아는 걸까? 그와 함께 온 여자가 소피아도 아니고 엘리나라니.
저번 무도회에서 새로 만난 여자가 엘리나인 걸까?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러나저러나.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조합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걸 응원해야 하려나?
그래. 제발 가라. 가. 부디 내 앞길만 막지 말아다오.
*
새벽 동이 채 뜨기 전인 이른 새벽. 그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카시안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 상처….’
그는 시아라의 목에 남아있던 멍 자국을 떠올렸다.
분명 엘리나 트리탄의 짓이었다. 무도회가 열렸던 그 밤에, 그녀는 누가 보아도 수상쩍게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 자리에서 엘리나를 붙잡고 추궁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다.
‘곧바로 죄를 물었어야 했는데. 안더스 트리탄…, 그 물러터진 놈 때문에…….’
제국 동부의 트리탄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안더스 트리탄 후작. 엘리나의 동생인 그와 카시안은 절친한 친우사이였다.
카시안이 열두 살이었을 즈음, 그는 아직 후계를 물려받지 못한 소공작이었다. 그것은 그와 동갑내기인 안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델트 선대공작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멸시를 받아왔던 카시안과, 유약하고 소심한 성정 탓에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안더스. 두 사람은 첫 만남에 서로를 이해했다.
엘리나 트리탄이 벌써 수차례 안더스를 죽이려고 시도했음에도, 그는 매번 제 누이를 용서했다.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그에게 묻자 안더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카시안. 누이는 죄가 없어. 내가 누이의 것을 전부 빼앗았으니까. 그 죗값을 돌려받는 것뿐이야.”]
카시안은 그의 말을 회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더스,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 여자는 자꾸만 선을 넘으려 하고 있어.
작게 욕을 내뱉은 그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시아라의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위험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그녀가 일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불행을 몰고 오는 아이’. 정말이지 묘한 기시감이 드는 단어였다.
카시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에 있는 협탁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 올려있던 뒤집힌 액자를 들고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빠. 이거 보면서 절대 절대 나 까먹으면 안 돼. 알겠지?”]
금발의 아이는 그 말과 함께 이 그림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은 영영 이별했다.
잡화점에서 시아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 아이를 닮았기에.
황금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 보석을 박은 듯 새파란 눈. 하물며 매일 덤벙대다가 넘어져 얼굴에 매일같이 존재하던 상처까지도.
그녀는 자꾸만 이 아이를 떠오르게 했다.
두 번째 만남은 불쾌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계속 눈에 거슬렸으니까. 온 마음에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도 모르는 새 커져 버린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들.
카시안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지키다니. 내가 그걸 할 수 있나?’
그 아이의 이름도 하필 시아라였다. 너무 작고 말라 손에 쥐면 으스러질 것 같던, 귀찮게 굴지 말라고 화를 내도 매번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그런 아이였다.
‘… 그 애는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이 저주받은 능력 때문에.’
순간 피칠갑이 되어 바닥으로 추락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십 년이 넘도록 그 장면을 지우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선명해져만 갔다.
그것은 트라우마로 남아, 카시안이 마법사로 사는 삶을 거의 포기하게 했다.
그는 고통을 신음하며 또다시 헛구역질했다.
‘… 이번에는 너를 꼭…. 지킬 거야.’
카시안은 집무실을 향해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그 자리는 무언가 허전했다.
‘내 방에 들어와서 가져간 게….’
그가 미간을 잔뜩 좁히며 서랍을 탁 소리가 나게 닫았다. 호수처럼 가라앉아 차분한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카시안은 엄지와 중지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러자 소파와 책상, 책장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던 집무실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한 종이들이 책상 위로 산을 이루었고. 책장에 꽂혀있던 역사책들은 전부 마도서로 탈바꿈했다.
공간을 채운 것은 그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이었다. 검은색 기운이, 그의 몸 주변에서 곧 사그라질 불꽃처럼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책장에서 서적 몇 권을 빼든 카시안이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느새 그 방은 그가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득하였다.
그때,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 알버트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공작 각하…! 지금 저택에 이상한 기운이…!”
그는 마력으로 뒤덮인 방 한가운데에 아델트 공작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알버트는 쓰고 있던 외 알 안경까지 벗어들고 눈을 비벼 떴다.
“설마…. 마법 연구를 다시 시작하신 겁니까?”
카시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알버트가 손바닥으로 입을 탁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