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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36화 (36/135)

36.

라튼이 나를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니가…. 니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어?”

말을 내뱉고 난 뒤에 깨달았다. 소피아와 내 뒤로 느껴지던 께름칙한 시선. 그게 너였구나.

나는 장탄식하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너 지금 나 미행한 거야?”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니가 이런 집을 무슨 수로 구해? 여기 정말 네 집 맞아?”

“뭐?”

“혹시 친구네 집에 얹혀사는 거야?”

기가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왜. 나는 한평생 구질구질하게 살 줄 알았니? 난 이런 데서 살면 안 돼?”

“… 그러니까. 내가 들었던 소문이 진짜라는 거야?”

“니가 무슨 말을 듣고 와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어. 근데 라튼, 나 잘못한 거 하나 없이 떳떳해.”

“떳떳하다고?”

“응. 나 너희 가문에 빚진 것도 다 갚았고. 이제 무서울 것도 없어.”

“…….”

“그러니까 제발 나 찾아오지 마. 이만 가줘.”

나는 그의 눈앞에서 돌아섰다. 현관에 열쇠를 꽂아 넣고 돌리려는 순간, 라튼이 내 팔을 끌어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손에서 놓쳐버린 열쇠가 짤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 보고 똑바로 말해.”

“도대체 뭐를?”

“너 정말 떳떳해?”

그리 묻는 라튼의 두 눈에 증오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얘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가 움켜쥔 팔목이 저릿했다.

무도회에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기라도 했지. 오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 앞 거리는 황량했다. 그래서 평소와 달라도 한참 다른 라튼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나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나 움직일수록 손아귀의 힘이 더욱 강해져만 갔다.

“이거 놔…!”

“말해보라고.”

“어. 떳떳해.”

그러자 그가 힘을 풀었다. 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주워들었다.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돌려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라튼은 웃고 있었다. 내 무력한 얼굴이 아주 기분이 좋다는 듯이.

“… 너 진짜…. 소름 돋아.”

“뭐?”

라튼이 불쾌한 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너 이러는 거. 끔찍하고, 무서워.”

“시아라. 나는 전혀 이해가 안 돼.”

나는 되물었다.

“우리가 뭘 더 이해해야 해?”

“그동안은 잘 참았잖아. 다 견뎠잖아. 근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 니가 참은 게 아깝지도 않아?”

“허…. 그러니까 니 말은. 내가 너 헛짓거리 하는 거. 그리고선 맨날 엄마 엄마 찾던 거. 그걸 더 참았어야 한다는 말이야?”

“앞으로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잖아. 근데 도대체 왜!”

라튼이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화가 났지만, 진정하려 애쓰는 듯 보였다.

“시아라. 나한테 확신을 줘.”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니가 돈에 눈먼. 그런 헤픈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

“하아…. 뭐라고?”

“내가 이렇게 널 오해하게 가만둘 거야? 제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라고!”

다시 내 앞으로 다가온 라튼이 내 양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돈에 눈먼 헤픈 여자?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다. 그냥 확 나 로또 맞은 여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니까 꺼지라고. 제발 좀 사라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한다고 얘가 나를 놔줄까?

나는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가라앉은 목소리 하나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누나.”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나온 펠릭스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평소 피어있던 보조개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집에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나왔더니.”

그는 나와 라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내 어깨를 쥐고 있던 라튼의 손을 떼어냈다. 라튼은 그게 황당하다는 듯 피식거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이 새끼는 또 뭐야?”

“언제 봤다고 새끼래.”

“지금 말 다 했어? 딱 봐도 평민 나부랭이처럼 보이는 게. 내가 누군 줄 알고. 너 미쳤어?”

“아아. 별 거지 같은 귀족 납셨네.”

“그만…. 그만해!”

내가 중간에서 저지하자 라튼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누나, 이 사람은 누군데 누나한테 화를 내? 아는 사람이야?”

그 질문에 갑작스레 창피함과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아는 사람이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야.

“아니야. 괜찮으니까 너는 들어가.”

“괜찮긴 뭐가 괜찮아. 고개 좀 들어 봐.”

펠릭스는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여린 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나는 더욱더 서러워졌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발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그는 내 등을 토닥이며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빼내 들었다.

“들어가자. 같이 들어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튼이 빈정거렸다.

“와아…. 그 말이 진짜였구나. 너 최악이다.”

나는 대꾸할 힘도 없어 그의 말을 무시했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그의 고성에도 그대로 뒤돌았다. 내가 현관의 문을 여닫을 때까지,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

처음에는 혼이 나간 듯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커다란 분노가 찾아왔다.

한참을 소파에 앉아 씩씩거리던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내 안색을 살피며 걱정하던 펠릭스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너네 집에 갔다 오자.”

나는 펠릭스의 집에서 커다란 도화지 한 장을 챙겼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거실 바닥에 그것을 깔아 놓고, 그 위로 빨간 물감을 덕지덕지 발랐다.

“뭐해?”

“저주 인형 만들어.”

“으음…. 붓 이리 줘봐.”

내 손에서 붓을 낚아채 간 펠릭스가 얼굴 부위에 눈, 코, 입을 그려 넣었다. 방금 라튼을 본 것이 처음이었을 텐데, 그는 꽤 정확하게 그리고 있었다. 라튼 얼굴에 물감을 칠해 종이에 찍어 누르면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오…. 완전 똑같아. 그래서 더 재수 없어.”

또 한 번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몸통까지 단번에 그려낸 그의 뒤를 이어서, 나는 그것을 모양대로 잘라냈다.

“그래서 이걸로 뭘 어쩌려고?”

우리는 팔랑거리는 종이 라튼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적당한 나무 한 그루를 찾아 나무 기둥에 단단히 고정해 붙였다.

피크닉을 다녀온 이후로 나에게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활을 쏘는 것이었다. 과녁을 명중시키던 짜릿짜릿한 손맛! 그 쾌감은 언덕을 내려와서도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발코니 수납장에 올려둔 활과 화살을 챙겨 들었다. 곧이어 도화지에 그린 라튼의 심장에 화살을 겨누었다. 현을 튕기자 힘차게 날아간 바늘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다음은 지긋지긋한 붉은 머리카락. 소름 끼치는 빨간 눈동자. 구역질나는 그의 입술.

마지막으로…. 비틀어 뜯어버리고 싶던 목까지!

한 발 한 발 정확히 명중시킬 때마다 우울했던 감정이 그나마 사라졌다.

내 안에 이런 잔인함이 숨겨져 있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나는 화살이 박힌 종이 라튼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아직 마르지 않아 아래로 흘러내린 빨간색 물감 탓에, 그가 정말로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두고 봐. 저게 니 미래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내 뒤로 다가온 펠릭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잘했어. 원하면 몇 개 더 그려줄까?”

“됐거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참, 저 활 쏘는 걸 보니 그때가 생각나서 그러는데.”

해맑게 웃던 그의 표정이 짐짓 진지해졌다.

“그때?”

“언덕에 놀러 갔을 때.”

“아, 응.”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그 공작님….”

“카시안?”

“… 이상해. 암만 봐도 이상해.”

덫에 걸린 두 사람의 모습을 잊고 있던 내가 가볍게 꿀밤을 때렸다.

“이상하긴 너도 마찬가지였거든?”

“아니! 아, 진짜! 이걸 어디에다가 말할 수도 없고!”

그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푸념했다.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릴 거야. 진짜라니까?”

*

아델트 공작 저택의 내부 경비는 날로 삼엄해져 갔다.

기사단장 렌의 지시하에 본관을 지키는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속에서 하녀들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루이자가 깨어날 때까지 그들은 어떠한 휴가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하녀 아나스타샤가 불만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일하다 쫓겨난 애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까지 쉬지도 못하고!”

그녀의 불평에 그녀와 친한 하녀 대다수가 동조했다.

“맞아. 감옥에 갇힌 것 같잖아.”

“요새 분위기 너무 험악해서 싫어!”

“이제 완전히 지쳤어.”

다들 자기편을 들자 기세등등해진 그녀는 더욱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건 너무 심하다 싶었는지,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며 힐끔힐끔했다. 기민하게 분위기를 파악한 아나스타샤가 양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그냥 장난이지! 다들 힘드니까 이런 생각 한 번쯤은 해봤잖아. 상상으로 말이야. 안 그래?”

그녀가 팔꿈치로 옆에 앉은 하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그 하녀가 마지못해 답했다.

“어? 어어…. 그렇지…. 다들 힘드니까.”

“마, 맞아. 나도 한 번쯤은…! 그냥 상상… 상상으로만 말야.”

그러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하녀 낸시가 아나스타샤에게 쏘아붙였다.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루이자가 그냥 쫓겨난 애야? 우리 다 친구였잖아!”

“참나. 친구? 그건 니 생각이겠지! 걔는 그냥 배신자야!”

“사정이 있었잖아.”

“내가 나쁜 년 사정까지 봐줘야 하니? 와아. 루이자는 아주 좋은 친구 둬서 좋겠다?”

“너 진짜…!”

“나는 그런 배신자들 딱 질색이라고!”

양 볼에 주근깨가 빼빼 박힌 아나스타샤가 일갈했다.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옆에 있던 하녀 하나가 그들을 말렸다.

“저… 아나스타샤. 너무 힘들면 하녀장께 부탁드려 봐. 그분은 너를 특히 좋아하시니까. 하루쯤 쉬는 건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그 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그야 그렇지. 그럼, 난 가볼게.”

그녀는 낸시를 새침하게 흘겨보고 방을 나섰다.

그날 저녁 아나스타샤는, 하녀장 린다로부터 특별 휴가를 승낙 받았다. 공작의 비서에게 요청 후 예외적으로 얻어낸 아주 귀한 휴가였다.

“아나스타샤. 이게 다 너를 믿어서 그런 거란다. 다들 너처럼 열과 성을 다해 제 할 일을 해야 할 텐데.”

린다의 칭찬에 한껏 우쭐해진 그녀가 짐을 챙겨 저택을 벗어났다.

곧장 시장으로 향한 그녀는 마차 한 대를 잡아탔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커다란 저택 내부는 대낮처럼 밝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쾌하게 문을 여는 그녀를 반긴 이는,

엘리나 트리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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