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지하감옥 관리인이 헐레벌떡 계단을 올랐다.
“고,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말해.”
“에, 엘리나 트리탄 영애가 주, 죽었습니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카시안은 별일 아니란 듯 시계를 살폈다.
“두 시간?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리탄 후작가에 서신을 보내야겠군.”
관리인이 지하감옥의 문을 열었을 때, 엘리나 트리탄은 이미 생을 달리했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였다.
그녀의 옆에는 아나스타샤가 기절해있었다. 얼굴이 죄 망가졌음에도, 용케 숨을 헐떡거렸다. 물론 얇은 실처럼 툭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두 사람의 주변에는 작은 유리병과 피 묻은 칼자루가 나뒹굴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사건을 이해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안더스 트리탄 후작은 다음 날 오후 무렵 도착했다. 그는 제 누이의 시신을 확인하자마자 침음을 삼켰다. 귀족이 자신의 밑에서 일하던 하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만큼 창피한 죽음이 또 있을까.
결국, 트리탄 후작가는 재판 대신 침묵을 택했다.
이튿날, 엘리나의 죽음은 신문 끄트머리를 장식했다.
‘자신의 별장에서 자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
평소에 지병이 있었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귀족들 대다수는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병? 그 여자는 약에 취해서 죽었을 거라고!”
“평소 행동을 보게나. 원한을 산 누군가가 죽였다 해도 믿을 테지!”
“쯧. 벌을 받은 게 분명해.”
아나스타샤 역시 엘리나의 시신과 함께 트리탄 가문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숨만은 부지할지, 혹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휘몰아친 아델트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딱 한 사람, 라튼 레트랑을 제외하면.
별채 숙소로 돌아온 라튼은 캐리어에 닥치는 대로 짐을 쑤셔 넣었다. 지긋지긋한 이 아델트를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는 다 찢어진 손등을 연거푸 매만지며 마차에 올랐다. 곧, 아델트 저택이 그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희뿌옇게 변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는 짜증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세, 세상에! 누, 누가 내 아들을 이렇게 엉망으로…!”
수도 저택으로 돌아온 라튼을 제일 먼저 반긴 이는 그의 엄마 틸다였다. 그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으로 마중 나왔다.
그러나 마차에서 내린 아들의 얼굴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원래도 하얗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눈가는 짓물렀으며, 얼굴 곳곳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아, 아들. 혹시 아델트 공작님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몇 주 사이 몰라보게 핼쑥해진 아들의 모습에 틸다는 아연실색하여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니! 공작님이 널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분명해! 얼굴 상한 것 좀 봐. 안 되겠어. 이 엄마가 공작가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마!”
“그런 거 아니니까 가만 좀 계세요.”
라튼은 애써 차분하게 읊조렸다.
“너는 이 엄마만 믿으렴.”
“제발 그만….”
“가만있자. 어디다 도움을 요청해야 하지? 트리탄 후작가? 호페….”
“그만. 그만하시라고요!”
인내심이 동한 라튼이 꽥 소리를 지르자 틸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라도 공작가에 찾아가서 일을 더 키우신다면. 그냥 콱 죽어버릴 거예요!”
“라튼. 어, 어떻게 이 엄마 앞에서 그런 말을…!”
“이제 더는 제 인생에 관여하지 마세요!”
날카롭게 쏘아붙인 아들이 제 엄마에게 등을 돌렸다.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하나 한참이 지나도록, 틸다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라튼은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그러자 다시금 악몽이 선연하게 그려졌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시아라의 눈에 띄지 않겠다는 조건. 그것으로 이번 사건은 무마되었다.
아델트 공작은 자비라도 베풀 듯 제안했지만, 라튼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협박이라는 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황실근위대 자격 박탈을 시작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
“재수 없는 자식!”
그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절규했다.
그리도 애타게 찾아 헤맸던 시아라는 로또에 당첨되어 도망친 것이었고, 오만하기 짝이 없던 공작은 마법사였다.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라튼 레트랑은 그저 억울했다.
처음부터 그녀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더라면. 그녀가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러면 자신과 시아라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 텐데!
그러나 그는 또한 무서웠다.
비열한 마법사의 저주가 걸린 이 몸뚱어리로 살아가야 한다니! 온몸이 저릿해짐과 동시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제 겁먹은 라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방에 처박혀 고통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일. 그뿐이었다.
당연하게도 틸다 레트랑의 눈에 비친 아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라튼은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도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지 않았다. 식사할 때도, 차를 마실 때도. 그의 손에서 거지같은 천 쪼가리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오빠. 손등에다가 가족들 몰래 좋아하는 여자 이름이라도 새긴 거야? 웃겨, 정말.”
보다 못한 여동생 라멜리의 핀잔에 라튼이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렸다.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뜨는 아들을 보며, 틸다는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 밤. 그녀는 제 호위에게 은밀하게 지시했다.
“아리안. 조만간 아델트에 가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아봐. 아무도 모르게.”
“예. 알겠습니다.”
“감히 내 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절대 용서 못 해!”
독살스러운 틸다의 음성에 긴장한 아리안이 고개를 바짝 숙였다.
“시아라 그 계집애는 아직도 못 찾은 거야?”
“그게…….”
“멍청한 놈들. 됐으니까 나가 봐!”
시종이 나가자 틸다는 화장대 위에 있던 진귀한 보석들을 잡히는 대로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거울이 산산이 조각났다. 짙은 빨간색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얼굴이 날카롭게 깨진 거울 새로 비틀려 더욱 표독스럽게 보였다.
*
나는 무려 사흘 만에 집으로 향했다.
사건을 마무리하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카시안의 저택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곳에서 몸이 편했던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기쁜 일로 초대받은 것이었다면 좋았으련만. 하녀들은 한때 동료였던 이를 잃었고, 그녀가 또한 배신자였음이 밝혀졌으니.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나 하녀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수심의 그림자를 나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 나까지 신세를 지게 된 것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만큼은 조금 가벼웠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
카시안이 준비해 준 마차에 오르자 그도 따라 올라탔다.
“공작님도 같이 가시게요?”
“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걱정돼서 그래요.”
엘리나의 습격 이후로 카시안이 내 옆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물론 단둘이 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시종들뿐만 아니라 그의 비서 알버트가 늘 우리 주변을 서성였기 때문이다.
나를 주시하던 알버트의 눈빛은 꽤 날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사건의 원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 뭐….’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마차에서 내렸다. 활기차게 대문을 열어 재끼고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 내 집…! 아니 내 집이 왜…!”
엘리나 트리탄이 들이닥친 그 날 밤. 두 동강 난 것은 그녀의 기사들만이 아니었다. 현관 문짝은 다 휘어지고 바닥 카펫은 흙 묻은 군화 자국으로 난장판이었다. 드레스룸의 문짝은 다 부서져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턱이 빠진 사람처럼 경악했다.
사건 당일에, 카시안이 자신의 코트로 나를 감싸 안고 나간데다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던 탓에 집이 이런 꼴일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그러나 엘리나도, 그녀의 심복들도 이미 죄다 죽어버렸다. 이 수리비를 도대체 어디다 청구해야 할까? 이 나쁜 사람들…! 선량한 시민의 집을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나는 잔뜩 울상인 얼굴로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공작님…. 이거 어쩌죠. 공작님이 손수 꾸며주신 집인데….”
“괜찮아요. 고치면 되니까. 그나저나 여기서 잘 순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야겠네요.”
“아뇨!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어요. 잠잘 곳은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요? 그럼 거기에 저도 같이 가면 되겠네요.”
“네?”
“혼자 안 둘 거니까.”
카시안이 훅 내뱉은 말에 벙 찐 내가 눈을 끔뻑거렸다.
“선택해요. 저택으로 가든지. 아니면 나랑 같이 방을 잡던지.”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세요…!”
“그런 말이 어떤 말인데요?”
“아, 아니…. 정말 너무해요!”
우리는 그 뒤로도 계속 입씨름을 했다. 그러나 카시안의 고집을 꺾을 길이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애처롭게 물었다.
“혹시…. 이런 건 마법으로 뚝딱뚝딱 못 고치겠죠?”
“네. 안 돼요.”
“그쵸? 아무래도 힘들겠죠….”
“그런 건 아니지만. 싫어, 아니. 맞아요. 힘들죠.”
체념한 채로 급하게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 들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시아라. 왜 말 안 했어요?”
“뭐를요?”
“복권 당첨자라고.”
“그거야…. 그냥 그렇잖아요. 제 입으로 나 당첨자라며 떠벌리고 다니기가 좀 웃기기도 하고…. 괜히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어찌 될지 뻔하기도 하고….”
카시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불행을 몰고 온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네.”
“이런 행운은 따, 딱 한 번이었거든요!”
당황한 나를 보며 그가 피식거렸다.
“저택에서는 지낼만했어요?”
“네. 다 좋았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요.”
그래. 아주 잠깐 객식구가 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앞서 벌어진 일들이 아직도 꿈을 꾼 듯 믿어지지 않았다.
나를 죽이려 했던 여자가 죽었다. 나를 데려가겠다던 남자는 만신창이가 되어 홀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된 원인은 정말 나였을까? 어쩐지 알버트가 나를 불편하게 여겼던 것도 쉽게 이해되었다.
힘차게 달음박질하던 말들이 천천히 멈춰 서고 저택 정문의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곧이어 카시안을 마중 나온 알버트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다시 되돌아온 나를 보자마자,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