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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47화 (47/135)

47.

급작스레 싸늘해진 분위기에 소피아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펠릭스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의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로 병원에서 만났던 것도 신경 쓰이는데. 여기서 만날 건 또 뭐람?

그는 소피아 엘링턴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애꿎은 포크만 쥐었다 놨다 했다.

아니, 상추 한 장 던지며 이거나 먹으라더니. 자기가 먼저 시비 걸어 놓고 왜 자기가 상처받은 척하는 걸까.

‘하필 또 누나랑 친구라고? 이 여자가 대체 누구길래.’

펠릭스는 혼란스러웠다.

밤이 무르익자 사람들은 다 저들끼리 신나서 떠들어댔다. 하녀 하나와 대화를 나누던 시아라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아델트 공작은 쌍둥이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테이블 옆에서는 소규모 악단이 첼로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요리를 담당했던 요리사와 하인들은 흥에 겨워 몸을 덩실거렸다.

공작의 비서처럼 보이는 안경 쓴 남자가 흘깃흘깃 펠릭스를 쳐다보긴 하였으나, 그건 알바가 아니었다.

소피아라는 여자는 이제 당근 하나를 손에 쥐고 오도독오도독 씹고 있었다. 넋이 나가 보였다.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눈화장으로 눈 밑은 이미 새까맣게 번져있었다. 패기만만하던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팰릭스는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한숨을 한 번 내쉰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요.”

“아니요!!”

펠릭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피아가 대뜸 큰 소리로 외쳤다.

“… 예?”

“병원 직원 아니라구요!”

“네, 네?”

펠릭스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나중에 병원 일을 하겠지만…!”

그녀가 그를 빤히 응시하더니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병원비 때문에 자꾸 쳐다본 거 아니었어요.”

“그럼요?”

“… 그냥 위로해 주고 싶었어요.”

“네?”

“힘들어 보였거든요.”

예상 밖의 대답에 펠릭스가 눈을 깜박깜박했다. 위로라니. 이 여자가 나를 왜 위로해?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시아라가 보였다. 그녀는 커다란 쟁반을 품에 안아 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하녀가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라고 하면, 그녀는 “싫어! 내가 할 거야!” 라 답하며 투닥거렸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접시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피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녀는 엉겁결에 펠릭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불에 댄 듯 빠르게 떨어뜨렸다.

소피아가 잡았던 손을 멀뚱히 쳐다보던 펠릭스가 다시 시아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이미, 아델트 공작이 서 있었다. 자신보다 또 한 박자 빠르게.

“하아아…….”

그들을 시린 눈으로 응시하던 펠릭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구멍에 감기약이라도 털어 넣은 듯 씁쓸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이런 마음을 상상하지도 못하겠지. 괜히 심술이 났다.

그러나 시아라가 저 남자의 옆에서 웃고 있다. 더는 바랄 게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웃는다.

저 웃음은 펠릭스 자신에게 보이는 것과 다른 의미라는 것을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는 지난번에 갔었던 피크닉을 떠올렸다. 아델트 공작이 시아라의 어깨를 감싸 안고 활 쏘는 법을 알려주었을 때. 그녀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디 귀뿐이었으랴. 얼굴도, 목도. 수줍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부터, 사실 펠릭스는 짐작하고 있었다. 저 남자한테 마음이 있구나.

게다가 아델트 공작은….

펠릭스의 시선이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잘났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저 남자는 정말 잘났다. 하는 짓이 얄밉고 짜증나긴 해도, 그녀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픈 엄마를 병간호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신보다. 평민 나부랭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무시당하는 자신보다. 아델트 공작은 그녀에게 완벽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시아라를 저렇게 웃게 하니까.

펠릭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린 속이 더욱 쓰렸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어차피 그는 감정을 숨기는 일에 능숙했다. 밀려드는 미련쯤이야. 다시 삼키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면.

*

나는 낸시와 함께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파티가 시작하기 전에 저택 요리사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만든 것이었다.

크림과 함께 반으로 자른 딸기를 시트마다 두르고, 케이크 윗면에는 싱싱한 딸기를 듬뿍 올렸다. 그러자 모양만큼은 그럴싸한 디저트가 완성되었다. 일전에 한나가 알려주었던 레시피를 토대로 만들긴 했지만, 맛이 어떨지는 영 자신이 없었다.

레오와 레아는 제 엄마가 만든 케이크의 맛을 잘 알겠지? 꼭 심사위원이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낸시가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각자의 접시 위에 올려주자 모두가 포크를 들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언니! 이거 진짜 진짜 맛있어! 엄마가 만든 것보다도 맛있어.”

조그마한 포크를 야무지게 잡은 레아가 함박웃음을 띠며 외쳤다. 너무 분에 넘치는 칭찬이라 나는 멋쩍게 웃어넘겼다.

다행히 나머지 친구들도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마지막으로 카시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코케이크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마카롱을 사 왔던 날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딸기 맛으로 달라던. 그래서 딸기 케이크를 만든 건데…….

‘입에 맞았으면 좋겠다.’

커다랗게 한 입 베어 문 카시안이 눈을 사르르 접었다.

“맛있어요.”

“정말요?”

“네. 아무도 안 주고 내가 다 먹고 싶을 정도로.”

“단 것 안 좋아하신다면서요.”

“이제부터 좋아하지 뭐.”

정말로 그의 접시에는 크림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씰룩쌜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

비록 소피아와 펠릭스가 데면데면하기는 했으나, 저녁 식사는 나름 훌륭하게 마무리되었다.

나와 카시안은 모두를 배웅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매일 보게 될 얼굴들이었지만, 레오는 지금 함께 가자며 내게 떼를 썼다.

내 품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펠릭스가 번쩍 안아 들었다.

“오늘 밤만 자면, 누나는 집에 있을 거야.”

“진짜?”

“응. 진짜로. 근데 레오가 울면 안 온대.”

“앗! 그건 안 돼!!”

펠릭스의 너스레에 레오가 양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렸다.

“누나, 나 안 울었어! 하나도 안 울었어. 그러니까 내일 꼭 와야 해. 알겠지?”

“알겠어. 꼭 갈게.”

레오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하고 난 뒤에야 모두가 마차에 올랐다.

나는 마차의 뒤꽁무니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힘껏 손을 흔들었다.

정문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시안과 나는 함께 정원을 걸었다. 봄날의 밤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내가 설핏 몸을 떨자 그가 물었다.

“추우면 그만 들어갈까요?”

“아뇨. 더 걷고 싶어요.”

카시안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진한 그의 향기가, 코끝으로 물밀 듯 밀려들었다.

“공작님, 감사해요.”

“뭐가요?”

“이렇게 저 신경 써주셔서요.”

그러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해달라고 신경 쓰는 거 아닌데.”

“그럼요?”

“그러고 싶으니까.”

“왜요?”

나는 용기 내 물었다.

“저한테 왜 그러고 싶으세요?”

내 물음에 잠시간 침묵하던 카시안이 손가락으로 저택 뒤편을 가리켰다.

“저 뒤에 별이 잘 보이는 곳이 있는데. 나랑 별 보러 갈래요?”

“… 네.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저택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낮은 언덕을 올랐다. 그의 말대로 그곳은 사방이 탁 트여있었다. 밤하늘이 평소보다 가까워 보여서, 머리 위로 빛나는 별들이 손만 뻗으면 곧 닿을 듯했다.

사방이 별천지인 이 장면이 너무 예뻐 그저 헤- 하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들어요?”

“네! 이렇게 예쁜 건 정말로… 처음이에요.”

우리는 적당한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한참이나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지금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골랐다. 이런 별 하늘 아래에서는 어떤 말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목을 큼큼 가다듬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공작님, 있잖아요.”

“네.”

“사실은…. 공작님만 보면 자꾸만 심장이 뛰어요.”

“…….”

“요란하게 쿵쿵쿵 울려요. 그게 제 귓가에까지 전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막상 카시안은 조용했다. 내 고백에 그가 답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으나 조바심이 났다.

나는 괜히 구두 코끝끼리 콕콕 부딪쳤다. 시선도 그곳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한참 뒤에야, 나른한 그의 목소리가 빈 언덕을 메웠다.

“내가 뭐 보여줄까요?”

그 말과 함께 카시안이 허공에다 두 번째 손가락을 길게 뻗었다. 그러더니 위에서부터 아래로 대각선 모양으로 그었다. 동시에 입에서는 “휘이익.”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이제 저기 한 번 봐봐요.”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새카만 밤하늘에, 갑자기 하얀 섬광이 빗줄기처럼 길게 떨어졌다.

그게 꼭 별똥별 같았다.

한 번 더 허공을 휘젓자 이번에는 더 많은 유성이 쏟아져 내렸다.

“우와……!”

“시아라.”

“네?”

“좋아해요.”

나긋하게 들려오는 카시안의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숨을 집어삼켰다. 목울대로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귓가에 선연했다.

“정말로 좋아해요.”

“…….”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쏟아지는 유성 탓에 카시안의 눈에도 빛이 반짝거렸다. 내게 속삭이는 이 눈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너무 맑아서, 그대로 내가 비쳤다.

나는 또 한 번, 홀리듯 그에게 매료되었다.

혹시 꿈은 아닐까?

꼬물꼬물. 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머릿속으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내 방에 같이 갈래요?”

어떻게 해….

그의 한 마디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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