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50화 (50/135)

50.

“저 사람! 로또 당첨자야!”

식겁한 내가 그대로 정지했다.

… 뭐야, 누구야. 어떻게 안 거지? 날 아는 사람인가? 이제 정말 소문이 난 걸까?

내 뒤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등줄기에 마른땀이 흘렀다. 전율에 휩싸인 온몸에는 털이 쭈뼛쭈뼛 섰다. 혹시 라튼이 소문을……?

나는 왼손에 차고 있는 마법 팔찌를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여차하면…. 진짜 위급하면 이걸로 머리통을 깨부수는 거야!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뒤돌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행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등지고 있었다.

‘… 어라?’

나는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원을 그리고 서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앞에 있는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고개를 슥 내밀어 그곳을 살폈다.

원의 한가운데에는 노숙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거의 다 비워진 술병이 들려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수십 개의 빈 병은 바닥에도 나뒹굴어 다녔다. 이미 만취한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삶의 의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앞에 여자 하나가 팔짱을 단단히 끼고 섰다. 그녀의 얼굴은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했다. 여자가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사기꾼 양반아! 당장 내 돈 갚아!!”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으나, 남자는 들은 체 만체하며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젠장, 제기랄. 시끄러운 인간들.”

그러자 여자가 답답한지 제 가슴을 퍽퍽 치며 군중에게 하소연했다.

“여보시오 사람들. 제발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몇 해 전 이 남자가 찾아와 자기가 로또 당첨자라며, 돈 찾을 동안만 내 돈을 꾸어간다 하고는 이런 몰골로 나타났다오!!”

그녀의 말에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로또 당첨자?”

“아니 근데 그동안 뭘 했길래 저리되었담? 저건 완전 거지꼴이잖아!”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저 사람이 술 도박에 진탕 빠졌다는구만! 그깟 돈 좀 생겼다고 처자식도 버리고 그저 노름에 미쳤다더군. 쯧!”

주변의 술렁거림에도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쥐고 있던 병을 거꾸로 들어 입속에 탈탈 털어 넣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비워진 유리병에서는 단 한 방울의 술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쩝쩝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저 사람이 진짜로 당첨자였을까? 아무리 봐도 좀…….

그때, 몇몇 사람들이 속닥거렸다.

“쯧. 꼴을 보아하니 여직 살아있는 게 용하구먼.”

“그런데 말이야, 저 정도면 돈을 빌려준 사람도 모자란 거 아니야?”

“그러게. 저 여자도 괜히 빌려줬겠어? 자기가 더 벌어먹으려고 그랬겠지!”

“그럼 둘 다 똑같은 거지 뭐!”

그 말에 내 미간이 파싹 구겨졌다. 아니 도대체 왜 피해자가 저런 소리를 듣는 거야? 정작 사기를 친 사람은 저 남잔데?

연거푸 하소연하던 여자는 이내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소리가 시끄럽다며 귀를 막고 구시렁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났다. 술병을 쥔 손으로 군중에게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번 당첨자는 1억 드랑이나 받았다지!”

남자의 돌발행동에 무리를 이룬 원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물론 그의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벼랑에 선 듯,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품에 선물 가방을 바짝 끌어안고 연신 팔찌를 매만졌다.

“나는 겨우 육천 드랑이었는데!! 제기랄!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내가 천 드랑만 더 받았어도 지금 이렇게 안 살아! 이 더러운 세상. 퉷!”

그가 사람들을 향해 침을 뱉고 위협하자 또다시 주위가 술렁거렸다.

소동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치안대가 도착함으로써 끝이 났다. 남자는 양팔을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잡아가. 이러고 거지처럼 살 바에는 차라리 잡혀가는 게 낫지!”

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

“누나가 장난이 좀 심했네요.”

시아라가 나간 뒤로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펠릭스였다. 그는 멋쩍은 듯 말하며 나갈 채비를 했다.

“…….”

“저희도 이만 나가죠.”

“… 이대로 그냥 가실 건가요?”

소피아가 묻자 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요?”

“저는 이거 볼래요.”

“네?”

“연극. 그쪽이랑 같이 보고 싶어요.”

“저랑 이걸 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닥에 긁힌 의자가 드르륵거렸다. ‘제대로 된 숙녀라면 그런 소리도 내면 안 된다, 소피아.’ 문득 제 부친이 귀에 박히게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진절머리가 났다. 만일 자신이 제대로 된 숙녀라면, 이 남자가 자기를 봐주기나 한다는 말이야? 그것도 아니면서.

“싫으시면 말아요. 혼자 보면 되니까.”

소피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티켓을 들고 거칠게 돌아섰다. 나가기 위해 카페의 문을 열자 종소리가 딸랑 울렸다. 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곧장 걸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시아라를 보는 이 남자의 눈에, 자신은 알 리 없는 애틋함이 느껴졌던걸. 그녀가 나타날 때마다 그의 신경이 온통 곤두선다는 걸.

비록 이 상황은 꼬인 실타래처럼 거지같지만, 그렇다고 시아라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겠어. 이 매듭에 그녀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 수도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겠지.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해도 그게 꼭 아델트라는 확신도 없었다. 운이 좋아 자리를 얻더라도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다.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나올걸.”

쓸쓸한 한숨이 쏟아졌다.

그녀는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걸었다. 외투를 뚫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두 사람씩 꼭 붙어있다. 다들 봄이지. 아주 좋아 죽겠지.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나만 추워.”

짜증나.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던 그녀를, 누군가 돌려세웠다.

“그렇게 혼자 나가면 어떻게 해요.”

갑자기 나타난 펠릭스가 그녀의 손에 들린 티켓 봉투를 낚아채 갔다.

“가요.”

“네…?”

“연극 보러 간다면서요. 그게 뭐 힘든 거라고.”

어느새 저만치 앞서 걷는 펠릭스를 뒤따라가던 소피아는 또 한 번 결심했다.

저 남자의 양 뺨에 우물진 보조개가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할 거라고. 오직 그녀로 인해 빛나게 만들 거라고.

*

눈시울을 붉히며 작별인사를 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나는 또 아델트 저택 앞에 도착했다. 물론 저번처럼 오래 머무르려는 것은 아니고, 준비한 선물을 전하기 위함이었지만.

공공마차를 타고 온 탓에 정문에서 신분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내 얼굴을 기억하는 기사들이 금세 문을 열어주었다.

일 층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알버트와 청소 중이던 낸시가 나를 먼저 발견했다.

“시아라 아가씨!”

그러다 문득 곡소리 나게 울어 재꼈던 것이 떠올랐는지 두 사람이 큼- 헛기침했다.

“이렇게 빨리 뵐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그래서 싫으신 거예요, 알버트 님?”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런데 아가씨,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신가요? 이 짐들은 다 뭐고….”

“아, 사실 이걸 주고 싶어서요.”

나는 그들에게 선물 보따리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휘둥그레 뜬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이게 뭐예요 아가씨?”

낸시가 물었다.

나는 미리 정해둔 대로 그녀에게는 향수를, 알버트에게는 미스트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손에 쥐어진 선물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지금 풀어 봐도 괜찮은가요?”

“그럼요!”

내용물을 확인한 두 사람이 꺅꺅 소리를 질렀다.

“역시!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 향수는 뭐예요? 세상에…!”

“아! 이럴 게 아니라. 저는 공작님께 아가씨가 오셨다고 알려드려야겠군요.”

벌떡 일어난 알버트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그사이에 나는 렌이나 다른 하녀들, 요리사를 만나 나머지 선물들을 전해주었다.

할 일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응접실 소파에 앉으려던 찰나, 카시안이 내 눈앞에 갑자기 튀어나왔다.

“아, 깜짝이야!”

“말을 하고 오지.”

“겨우 집무실에서 텔레포트를 쓰신 거예요? … 계단으로 오시지 왜.”

“빨리 보고 싶었거든요.”

나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후후 심호흡했다. 이 남자를 만나려면 평소에 심신을 단련해둬야겠다. 숨이 멎을지도 모르겠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카시안의 얼굴을 보자 문득 꿈에서 스친 그가 떠올랐다.

“다음부터는 미리 알려줘요.”

“어떻게요? 편지라도 보낼까요?”

“팔찌는 뒀다 뭐해. 그거 두드리면 알아서 올게요.”

“네……? 이걸 두드리면… 신호가 가요?”

나는 팔찌를 쓱 내려다보았다. 이것 봐.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니야. 이러다 진짜 나중에는 내 모습도 보인다고 하는 거 아니야? 목욕할 때 푸르기로 한 선택은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계단으로 뛰어 내려온 알버트가 뒤이어 응접실로 들어왔다.

“각하. 아무 때나 그렇게 마법을 쓰시다니요.”

그러면서 카시안에게 내가 준 선물을 흔들며 자랑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아가씨가 저한테 이런 선물을 다 주시지 뭡니까? 누군 제 물건들 다 갖다버리라는 데 말입니다.”

알버트가 콧잔등에 내려앉은 안경을 위로 올리며 카시안을 흘겨보았다.

유리병 안에 든 투명한 액체가 그가 뒤흔들 때마다 찰박찰박했다. 카시안은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고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졌다.

“선물?”

나는 뜨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시안의 선물은 못 샀다. 아무리 고민해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고, 그 이후에 만난 이전 로또 당첨자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끌려가는 모습이 자꾸만 잔상처럼 남아서, 나는 기운이 축 빠진 채로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공작님 죄송해요.”

“뭐가요?”

“공작님 선물도 사고 싶었는데…. 뭘 사야 할지 정말로 모르겠어서…. 다음번엔 꼭 드릴게요.”

그러자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난 또. 무슨 소릴 하나 했네.”

카시안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단숨에 나를 안았다.

“내 선물은 여기 있는데.”

내 머리가 그의 가슴팍에 콕 부딪혔다.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맞은편에 서 있는 알버트와 눈이 마주친 나는, 황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른 선물은 필요 없어요.”

카시안이 쿨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자주 선물이 되어줘요.”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시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공작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인가?”

“그, 그게….”

뒤늦게 카시안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발견한 시종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나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본 카시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해.”

시종이 그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제페토가….”

카시안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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