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제페토가….”
시종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카시안의 눈빛이 날렵해졌다. 그는 시아라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고 시종을 응시했다.
“제페토가 깨어났습니다.”
카시안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자신이 자랐던 보육원의 원장 제페토. 그 파렴치한이 정신을 차리다니. 그새 마법이 풀린 건가?
카시안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허락을 구하듯 눈을 마주 보았다.
“잠깐 내 방에 올라가 있을래요?”
“공작님 방이요?”
“응. 집무실도 좋고. 금방 갈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뒤돌았다. 응접실을 빠져나온 카시안은 곧장 마법수식을 외웠다. 그러자 복도 끄트머리에 희미한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점차 선명해져 어느새 벽면에 입구를 그려냈다.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카시안은 주저 없이 컴컴한 내부로 들어갔다. 돌계단을 밟을 때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지하의 기다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빠르지만 차분한 발걸음은 감옥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일순 까마득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스멀스멀 들려오는 얕은 숨소리를 향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나이든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다 죽어가는 몰골에도 생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만큼은 어찌나 절실해 보이는지. 핏발 선 눈을 희번덕거리며 숨을 헐떡이는 남자를 보며 카시안은 조소했다.
그는 남자가 갇힌 방 바로 앞에 의자를 끌어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감청색 제복바지 아래로 살짝 드러난 발목마저 싸한 분위기를 풍겨냈다.
그 위로 지하 감옥의 스산하고 축축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대어 앉은 그의 동작에는 상대를 지켜보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얼굴 위에는, 치미는 구역질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불쾌한 표정이 드러났다.
“제페토.”
그의 부름에 남자가 대답하려 애썼다.
하지만 마른 먼지로 콱 막혀있는 것처럼, 목구멍으로 어떤 말도 토해낼 수 없었다. 제페토는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제 발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이미 망가진 한쪽 다리 탓에 그의 몸은 그를 지탱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처절한 몸부림을, 카시안은 가만히 앉아 응시했다.
이 자를 잡으려고 지금껏 몇 년을 허비했던가. 케케묵은 옛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슬그머니 똬리를 틀었다.
카시안이 그의 친부를 처음 만난 것은 열 살이 되던 해였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아비가 누구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애초에 본 적이 없으니까. 그에게 가족은, 그와 함께 자란 시아라 뿐이었다.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친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는 보육원으로 찾아와 당연하다는 듯 카시안을 데려갔다. 마치 맡긴 물건을 돌려받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린 시아라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아라는 그때…. 보육원장으로 인해 그와 철저히 격리되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카시안은 친부의 손을 뿌리치고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달려갔다.
[“시아라! 시아라!!”]
애 끓는 심정으로 굳세게 잠긴 철문을 쾅쾅 두드려보았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카시안의 뒤를 따라온 친부가 그런 그의 팔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가자꾸나.”]
[“제발요. 제발. 절 데려가도 좋으니까. 여기에 동생이 갇혀있어요. 구해주세요. 네?”]
그러나 제 아비란 자는 서늘한 눈을 부릅뜰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페토는 간교한 웃음을 흘리며 부자를 배웅했다.
보육원을 빠져나오는 마차에서 선대공작이 했던 말은 딱 하나였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말거라.”]
그리고는 모든 것을 잊도록 종용했다. 그의 전부나 다름없던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도 모조리.
아이가 무사한지 알고 싶다고 물을 때마다 친부는 매를 들었고, 보육원에 한 번만 다녀오겠다 말을 꺼낸 날에는 하루 종일 감시를 당했다.
두어 번 운 좋게 저택을 탈출해 시설로 가는데 성공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부친에게 상당한 돈을 건네받은 제페토가 그를 다시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시아라가 잘 지내는지, 그것만 얘기해줘요!”]
[“글쎄, 나는 우리 보육원에 그런 아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카시안의 간절한 부탁에도, 제페토는 비웃음을 흘리며 그를 내쫓았다.
제페토는 카시안의 부친에게 그가 몰래 찾아왔음을 일러바쳤다. 부친은 마법으로 카시안의 입을 잠가버렸다. 그의 입에서 두 번 다시 그곳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그러나 어린 카시안이 제일 무서워했던 것은 그러한 체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지내던 모든 기억을 다 지우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는 그 저택에서 무력하게 자라 원치 않던 후계를 물려받아야만 했다. 철저한 감시와 두려움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 되어서야 친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제야 카시안은, 시아라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보육원은 이미 망해 문을 닫았고 원장 제페토는 종적을 감춘 뒤였다. 겨우 사정을 알고 있는 관계자를 찾아 그녀의 행방을 물었으나, 돌아온 것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죽음의 이유 또한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계속 제페토를 수소문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하나 어디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존재가 지워진 사람처럼, 그는 사라졌으니까.
그런 제페토를 지하 감옥으로 잡아 온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호박이 알아서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처럼, 그것은 전혀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
*
한동안 아델트 저택에서 머무르던 시아라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저택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다 찢긴 허름한 종이는 구정물로 얼룩덜룩했다. 아무렇게나 개발새발 갈겨 놓은 글씨를 알아보는 일은 어찌나 수고스러운가.
게다가 방금 시아라를 집에 보내고 난 뒤라 카시안의 심사가 퍽 뒤틀려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으레 있던 장난으로 여기고 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봉투에 적힌 발신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알버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제페토?”
“뭐?”
“제페토라고 적혀있는데요? 어라? 이 남자…. 그동안 각하가 찾던 남자 아닙니까?”
카시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뒤로 편지를 살폈다.
“크흠.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알버트의 마법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 이 자가 각하를 만나고 싶다는데요? 거래를 하자고….”
“확실해?”
“예. 글자나 문법이 다 난장판이긴 해도. 확실합니다. 영지 끝에 있는 알몬트 항구로…. 내일 저녁에 보자는데요?”
“…….”
“돈을 들고 오랍니다.”
“흥미롭네.”
뻔뻔하고 어처구니없는 편지내용에 카시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툭 터뜨렸다.
“이 사람 각하한테 뭐 맡겨놨나요?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죠?”
“글쎄. 나도 궁금하네.”
“가실 건가요?”
“물론.”
카시안이 웃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모르는 모호한 표정을 내비쳤다.
“편지에 언급한 대로 돈을 준비해 줘.”
“예. 알겠습니다.”
*
호리한 체격의 한 남자가 알몬트 항구의 부둣가 근처에 자리한 허름한 술집의 문을 열었다. 지팡이를 짚은 그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지나 제일 구석진 곳에 앉았다.
값비싼 브랜디 한 잔을 시킨 남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열기가 드러났다. 욕망의 불꽃에서 비롯된 아주 진득하고 뜨거운 열기가.
그가 테이블에 올려있는 갈색의 액체를 홀짝이며 히죽거렸다. 이런 술로 호사를 누리는 것이 얼마 만인가! 어차피 이 술은 약속 상대가 계산할 테니 그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제페토 아르게모나.
그가 운영하던 보육원은 몇몇 귀족들의 후원이 줄줄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눈먼 돈을 몰래 빼돌리는 것만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일개 평민에 불과하던 보육원장은 그 돈으로 가문을 샀다. 비록 보잘것없는 남작 지위였대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는 그렇게도 바라던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몇 해 전 시설이 망한 뒤로, 그는 모아두었던 돈을 싹 챙겨 해외로 도망쳤다.
물론 그곳에서도 흥청망청 써댄 탓에 쫄딱 말아먹긴 했지만. 어디 귀족 명함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망한 인생. 길거리 부랑자라 불리는 것보다야 몰락 귀족이 훨씬 그럴싸했다. 또한, 형편과는 달리 말끔한 차림새로 돌아다니는 그를 대놓고 얕잡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돈이었다. 그러나 교활한 아첨꾼인 그가 사람을 꼬드겨 돈을 뜯어내는 일만큼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전혀! 그의 세 치 혀는 그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었으니.
헤르본 제국으로 돌아온 제페토는 사기칠 만한 적당한 대상을 찾기 위해 알몬트 부둣가를 어슬렁거렸다.
본래 항구는 흥미로운 인간들이 모이기 딱 좋은 장소가 아니던가. 쓸 만한 정보를 공짜로 얻어내기에도 적합하고!
제페토는 귀를 쫑긋 세워 행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때마침 그의 앞을 점잖은 갈색 양복을 빼입은 두 신사가 지나쳤다.
“자네도 신문 봤지? 엘리나 트리탄이 자택에서 죽었다는 거.”
“그럼. 요새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다던가?”
“그게 내가 들었는데 글쎄, 그 여자가 아델트 공작의 저택에서 죽었다더군!”
“뭐? 아델트? 그게 진짜야?”
“쉿! 조용히 말해! 물론 헛소문일지도 모르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테지.”
낯익은 이름을 들은 제페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델트?’
그가 신사들을 불러 세웠다.
“거, 잠깐 궁금한 것 좀 묻겠소.”
“예?”
“지금 아델트의 가주가 누구요?”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이십니다.”
제페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카시안?
카시안이라면 자신의 보육원에 버려졌던 그 꼬맹이가 아니던가!
아델트의 선대공작이 시설로 찾아왔던 날. 그는 제페토에게 그의 아들이 그곳에서 자랐던 것을 비밀로 해 달라 부탁했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쥐여 주면서.
제페토는 부친의 손에 끌려가던 소년을 떠올렸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에 울상인 얼굴. 무기력하게 마차에 오르던 그 모습은 절대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어쩌면 한탕 크게 뜯어먹을 수 있겠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곧장 카시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 제페토는 그 약속 장소에 앉아 만족스럽게 술 한 모금을 더 들이키고 있었다.
술집의 문이 열리고 그가 기다리던 남자가 들어왔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장한 풍채의 사내였다. 기억 속의 아이는 분명 또래보다 키만 컸지 소심하고 나약한 아이였는데?
“제페토.”
테이블 위로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에 보육원장이 살짝 당황하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큼 다가온 카시안이 섬뜩하게 웃었다.
“드디어 만나네.”
사내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에, 제페토가 지팡이를 쥐었다 풀었다 반복했다. 어느새 그의 손은 땀으로 축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