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드디어 만나네.”
“카, 카시안?”
제페토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그때 그 어린아이처럼 보이나?”
“무…,”
“예의를 갖춰.”
한겨울 서릿발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허름한 술집을 가득 메웠다. 당황한 제페토의 어깨가 움찔 떨리고 얼굴은 홧홧거렸다.
제페토는 인정해야만 했다. 눈앞의 사내는 그가 한때 만만히 여겼던 꼬맹이가 아니었음을.
그러나 그 와중에도 데굴데굴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장성했다면 더욱더 좋은 먹잇감이 아니던가? 게다가 카시안의 친부는 말이 꽤 잘 통하던 사람이었다. 그 피를 물려받았다면, 카시안 역시 말귀를 잘 알아듣겠지!
“당신이 먼저 나한테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큼큼, 왠지 네가 나를… 아니, 공작님께서 저를 찾으실 것 같아서요.”
“맞아. 그렇게 찾을 때는 안 보이더니. 갑자기 연락한 이유가 궁금하군.”
“그야, 제가 고급정보들을 많이 가지고 있거든요. 이를테면 공작님이 예전부터 궁금해 하시던 걸 대답해드릴 수도 있지요.”
“내가 궁금해 하던 거?”
“아이를 찾고 계시잖아요?”
카시안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
“그걸 제가 알거든요.”
“도대체 그 애가 왜 죽었는지. 보육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호오.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계시는군요?”
제페토가 과장되게 능청을 떨었다.
“… 이유를 말해.”
“아델트 공작 각하. 알만하신 분이 왜 이러실까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편지에 언급했던 것처럼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주십시오. 제가 분명 거래라고 했잖습니까?”
제페토는 오히려 뻔뻔하게 굴었다. 깊게 팬 볼이며 어두 칙칙한 피부색이 그를 더 비열해 보이게 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앞으로 내밀어 공작의 주변을 살폈다. 그의 행동에 카시안이 비소를 흘리며 돈이 든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여기. 요구했던 액수보다도 많아. 그러니 어서 대답부터 해.”
다 죽은 동태눈깔 같던 제페토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수북이 쌓인 지폐를 탐스럽게 확인하고 군침을 삼켰다.
“말해, 이제. 그 애가 왜 죽었지?”
카시안의 되물음에 제페토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걸 저라고 알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시안이 제페토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제페토는 그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자신의 잡힌 옷가지를 흘끗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능글맞게 웃으며 세치 혀를 놀렸다.
“마차 사고로 마차가 불에 다 타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죄다 죽었습니다.”
“뭐?”
멱살을 잡고 있던 카시안의 손아귀에 시뻘건 핏줄이 돋아났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질문을 이어갔다.
“누가… 도대체 누가 그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글쎄요. 뭐, 다양했죠. 공작님이 찾던 아이보다 더 어린 애들도 있었고….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언급하기가 힘드네요. 그러고 보니 시아라 그 계집애도 거기에 타고 있었던가? 잘 모르겠는데, 이거 어쩌지요?”
“… 똑바로 말해.”
“아니었던 것도 같고. 흐음,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무거운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제페토는 빙그레 웃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카시안이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 하나뿐이었으니!
카시안은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그의 손은 제페토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다.
“공작님.”
“…….”
“저는 그저 그 애들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려 했을 뿐입니다. 멀쩡히 달리던 마차에 불이 붙은 것이. 그게 제 잘못입니까? 난 아무 잘못 없어요.”
제페토는 그 말을 끝으로 카시안의 손을 탁 쳐냈다.
겉옷 앞섶을 여미며 돈 가방 앞으로 팔을 내밀었다. 지팡이 탓에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의 머릿속에 온통 앞으로 펼쳐질 사치스러운 앞날이 그려졌다.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방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려던 순간. 카시안이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마차에 타고 있던 애들이 다 죽었다는 거지?”
“우리 공작님이 말귀를 좀 못 알아들으시나? 네, 모두. 전부 다 죽었습니다.”
제페토의 조롱 섞인 어조에 카시안의 속이 울렁거렸다. 아연실색한 그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제페토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교활하게 웃으며 카시안의 표정을 관찰했다.
“… 너는…. 어른으로서 그 애들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카시안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그러나 최악만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미안하냐고요?”
“그래. 일말의 죄책감도 없냐는 말이다.”
“제가 왜요? 오히려 그 애들이 나한테 고마움을 느껴야지. 어차피 버려진 애들 거둬다 키워줬는데. 게네는 나 아니면 그만큼도 못살았어요.”
“… 쓰레기 같은 새끼.”
카시안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 참!”
그때, 제페토가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시선을 끌었다. 가늘게 웃으며 카시안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 애가 죽은 건 공작님 때문이었네요.”
“… 뭐?”
“애초에 알고 계셨지요? 공작님을 향한 대우가, 보육원의 여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는 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모른 척 잡아떼실 건가요?”
“알아듣게 설명해.”
그러자 제페토의 눈이 광기로 번득였다.
“너도 좋았잖아. 내가 잘해줘서. 음식도 옷도. 네가 쓰던 방이나 침대, 하물며 이불까지도. 제일 좋은 것들로 당연하다는 듯 받아갔잖아?”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네 모친이 널 맡기며 그러더군. 높으신 귀족 어르신의 자제이니 그에 걸맞은 귀한 대접을 해달라고! 게다가 넌 마법사였어. 내 인생 최고로 비싼 상품이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됐더라? 그깟 계집애 때문에 네가 다쳤지. 대단한 능력도 잃었다지? 그 애는 그래서 거기에 갇힌 거야. 너 때문에! 네가 다쳤으니까!”
쿵.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 윙윙거렸다. 카시안은 무슨 말이라도 해보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목구멍에 복숭아씨라도 박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잊고 살았던 두통이 머리위로 세게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확실히 기억나는군. 그래! 시아라 그 계집애도 그 마차에 탔었지!”
카시안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싹둑 잘려나갔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던 손을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말해봐.”
갑자기 달라진 공기의 흐름에 제페토의 두 눈알이 허공을 배회했다. 그의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아,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실까요?”
카시안이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한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벽으로 밀쳐진 제페토가 켁켁 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자, 잠깐만요. 이, 이것 좀 놓고 대화를 하시….”
“다시 말하라고 했잖아.”
“뭐, 뭐를….”
“그 애가 거기에 탔어?”
“… 아, 아니…….”
카시안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제페토는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변명하려다가, 곧장 꼬리를 내렸다.
“예……. 타, 탔습니다…….”
그 순간,
“헙… 으으으읅!!”
“으으아아악!”
어디선가 나타난 기다란 푸른빛이 그의 목을 꽁꽁 옭아맸다. 제페토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마, 마법? 언제 다시…?”
“네가 여태 살아온 모든 순간순간을 후회하게 해줄게. 아무리 소리쳐도 어느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죽으려 해도 절대로 죽지 못하게 될 거야. 생지옥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봐.”
카시안은 제페토에게 환영마법을 걸었다. 무고했던 어린아이들이 느꼈던 공포를 그대로 느끼기를 바라며.
그 환영 속에서 제페토는 불이 붙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 불은 꺼지지도 않았고 그는 그곳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을 하염없이 반복하여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환영마법에 걸리지 않은 일반 사람들이 그를 볼 때, 그는 그냥 평범히 자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니 그의 고통으로 점쳐진 비명을 아무도 듣지 못했고 도움 역시 받을 수 없었다. 이 마법을 풀 수 있는 건 카시안 폰 아델트. 오직 그 뿐이었다.
카시안은 널브러져 있는 제페토를 마차에 구겨 넣어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수많은 나무와 별들이 지나쳐갔다. 아름다운 그 밤의 풍경에도 그는 전혀 동요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제페토와 나눈 대화가 귓가에 맴돌았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바닥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윽고 저택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었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카시안이 결심한 듯 눈을 떴다. 제페토를 둘러메고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나는 카시안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기 위해 응접실을 나왔다.
그러나 아까 그의 시종이 찾아와 다급히 말했던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제페토’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재수 없는 계집애! 너 때문에 우리 전체가 불행해질 거다!”]
그는 늘 내 탓을 했었다. 보육원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게 다 나 때문이라며 나를 학대했다.
시종이 언급했던 제페토라는 자가 내가 아는 이와 같은 사람일까? 혹시 맞다면…. 카시안은 그를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순간 꿈에 나온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야. 설마…….
한참을 기다리다가 자라나는 의심을 한 움큼 품고 복도로 나왔다. 하염없이 걸었다.
그런데, 그 끝에 처음 보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 주변은 시공간이 뒤틀린 것처럼 일그러져있었다. 아델트 저택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다. 이런 문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홀린 듯 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문이 닫히자 동굴 속에 들어온 듯 스산한 찬바람이 몸을 감쌌다. 이유 모를 긴장감에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혹시 여기는….’
비밀 공간인가?
천장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바닥으로 톡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마터면 놀라 소리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여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복도의 한 가운데에서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 번 물을게. 아직도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죽었는데 저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그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사고가 정지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속이 토할 듯 울렁거렸다.
저 목소리는….
제페토, 그 남자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