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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54화 (54/135)

54.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은 두 명의 꼬마들이었다. 하얀 피부의 소녀는 나인 듯했다. 저번에 카시안의 방에서 보았던 아이 그림과 너무 비슷해서, 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진짜 이상해…….’

이게 다 우연일까? 막연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소녀의 옆에는 내 피부보다 조금 더 까무잡잡한 검은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두 아이는 모두 해맑게 웃고 있었다. 비록 작대기 두 개로 찍 그려진 소년의 눈매는 퍽 사나워 보였지만.

동그란 밤송이 같은 얼굴 아래에는 서투른 글씨로 ‘시아라랑 오빠랑’이라고 적혀있었다. 가슴이 몽글몽글한 것이, 간지러웠다.

나는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일기는 조금 특이한 형식이었다.

내가 먼저 하루에 있었던 일을 적으면, 그 밑에 오빠라는 소년이 한 마디씩을 더 보탰다. 교환일기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으나, 그렇다고 오롯이 나 혼자 쓴 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그는 꼭 한 줄씩 코멘트를 달아놓았다. 아주 무심하게.

딱히 특별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에서는, 그날의 행복과 다음날의 설렘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를테면 우리의 하루는 이런 식이었다.

xxxx년 4월 15일. 맑음.

[오빠랑 풀밭에서 춤을 췄다. 그런데 내가 오빠 발을 너무 많이 밟아서 오빠 발은 코끼리가 됐다.]

[코끼리 아니었거든!]

[거짓말쟁이.]

xxxx년 5월 30일 해가 쨍쨍.

[오늘 나는 엄마였고 오빠는 아빠였다. 내가 열심히 요리해서 오빠한테 밥을 만들어 줬는데 오빠는 안 먹었다. 나빴어. 오빠는 바보야!!]

[흙을 어떻게 먹냐 이 바보야!]

[흥! 그럼 내일은 나뭇잎을 줘야지!]

그러나 다음 날도 먹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일기장에는 나의 투덜거림이 가득했다.

“안 되겠네, 이 오빠. 좀 먹어주는 척이라도 하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xxxx년 7월 10일. 더움.

[오늘은 다 같이 바닷가에 갔다. 오빠랑 모래성을 만들었는데 모리츠가 다 망가뜨리고 나를 놀렸다. 오빠가 일어났는데 모리츠보다 훨씬 더 컸다. 모리츠가 곧바로 도망갔다. 오빠가 좋다.]

[나도.]

xxxx년 8월 20일. 파란 하늘.

[오빠랑 언덕에 올라갔는데 쪼끄만 강아지가 있었다. 강아지가 내 볼을 핥았다. 너무 귀여워서 오빠한테 자랑했는데 오빠는 얼음이었다.]

[파트라슈.]

그 아래에 소년과 강아지가 그려져 있었다. 소년은 몸집이 아주 컸고 퍽 용감해 보였다. 그는 그 옆에 그려진 귀여운 강아지를 위풍당당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 스스로 그린 것이 분명했다.

xxxx년 9월 28일. 비가 옴.

[모리츠가 어떤 아저씨 손을 잡고 갔다. 울면서 나한테 손을 흔들었다. 모리츠는 나를 맨날 괴롭혔는데. 그래도 이제 못 볼지도 모르니까 슬펐다. 나도 저렇게 오빠랑 떨어지면 어떻게 해? 벌써 슬프다.]

[글쎄. 어쩔 수 없지.]

무심하다 무심해.

“그나저나 이 오빠는 도대체 이름이 뭐야?”

봄여름을 지나 가을날의 일기를 읽으면서도, 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그저 ‘오빠’라고만 불렀다. 알고 보니 나한테 이름도 말 안 해준 거 아니야? 소년이 남긴 짤막한 코멘트를 읽다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xxxx년 12월 29일. 눈!

[눈이 펑펑 내린다! 모든 곳이 하얗게 변했다. 내일 오빠랑 썰매를 타기로 했는데. 진짜 진짜 재밌겠지?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썰매는 시시해.]

[오빠는 아무것도 몰라!]

[너는 아직 어려서 몰라.]

[흥! 나 혼자 탈거야. 오빠는 타지 마라.]

“… 썰매…?”

내가 썰매를 타 본 적이 있던가?

그 단어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자꾸만 무언가가 떠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xxxx년 12월 31일.

[오빠가 없어졌어.]

글씨는 눈물에 젖어 다 번져있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일기에 더 이상 소년의 답장은 없었다. 오직 어린 나의 독백뿐이었다.

xxxx년 1월 3일.

[배고파.]

xxxx년 1월 4일.

[어두워, 무서워. 여기서 나가고 싶어.]

[오빠 보고 싶어. 얼른 와.]

xxxx년 1월 13일.

[열 밤이 지났는데 아직도 오빠가 없다. 나는 혼자야.]

그리고 마지막 일기는…….

xxxx년 1월 18일.

[오빠도 똑같아…. 이제 나도 안 기다려.]

이게 끝이었다.

나는 일기장을 그대로 내려놓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던 어린 시절의 내 환영은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심장 한가운데에 못질이라도 한 듯 숨쉬기가 힘들었다. 몸을 일으켜 아이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못이 더욱 깊숙하게 박혔다. 온몸이 비틀비틀 휘청거렸다.

아이의 얼굴에는 메마른 눈물 자국이 상처처럼 가득했다.

나는 그대로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정말로 눈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으스러지듯 껴안았다.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무서웠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너를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

나는 이 작은 아이를…. 나를 위로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 정말 미안해.

그러자 아이가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를 향해 웃으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어린 내 환상이 모래알처럼 부서져 사라졌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빛 한 줄기는 여전히 눈부셨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제 이 공간에는 오롯이 나 혼자였다.

그리고 그제야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갇히게 된 이유. 악몽 같던 그 날이.

*

그 날도 눈이 내렸다.

계속해서 이어진 추위에 실내 공기 역시 차가웠다. 창문에는 서리가 잔뜩 끼고 아이들은 모두 벽난로 앞에만 모여 앉아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데?”

바깥을 내다보던 소년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창 틈새로 들어오는 한기 탓에 코끝이 시렸다. 콧물 때문에 내가 자꾸 코를 훌쩍이자 소년이 미간에 잔뜩 힘을 줬다.

“이것 봐. 감기 걸릴지도 몰라.”

“하나도 안 추워!”

나는 손수건에 코를 흥 풀고 난 뒤에 숨을 딱 참았다. 솔직히 정말 추웠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오빠가 가지 않을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

“콧물 한 개도 안 나와. 그리고 약속했으니까 꼭 가야 해!”

“위험해.”

“나 진짜 썰매 한 번만 타고 싶은데….”

“그래도 안 돼.”

“… 잠도 안 자고 엄청 기다렸는데.”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퉁퉁거리는 나를 보던 소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딱 한 번만 타고 오는 거야. 알겠지?”

나는 생긋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보육원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매섭게 몰아치는 칼바람에 나뭇가지 위로 쌓인 두툼한 눈덩이가 와르르 떨어졌다.

썰매라고 해봐야 튼튼한 나무 썰매도 아니었다. 그저 지하 창고에서 몰래 주워온 큼직한 나무판자였다. 그래도 내 기분은 날아갈 듯 기뻤다. 그렇게 한 손에는 나무를, 다른 손에는 오빠 손을 잡고 숲의 언덕을 올랐다.

우리는 언덕의 절반 지점 즈음에서 멈추고 바닥에 나무판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잽싸게 그 위에 앉았다. 오빠는 자신의 것은 옆에 두고 내 썰매 위에 함께 올라탔다.

“잡아줄게.”

내 뒤에 함께 앉은 그가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발을 굴렀다.

슝-. 우리 주변으로 눈보라가 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에 언덕 아래였다.

나는 눈을 껌뻑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너무 짧아서 감질이 났다.

“오빠! 우리 한 번만 더 타면 안 돼?”

“재밌었어?”

“응! 진짜 재밌어!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더. 응?”

내 물음에 소년이 웃었다.

“그래. 딱 한 번만 더.”

난생처음 타 보는 썰매에 흥분한 나는 달리기하듯 단숨에 숲의 오르막을 올랐다. 쌓인 눈 탓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그것조차 신이 났다.

내가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소년은 나보다 한참이나 아래에 있었다. 나는 몸을 뒤로 돌려 그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 와중에도 내 발은 끊임없이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미소를 머금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시아라. 그만 가! 멈춰!”

“응?”

멈추라는 말에 다시 앞으로 되도는 순간, 꽝꽝 얼어붙은 바닥을 밟고 그대로 휘청거렸다. 나는 중심을 잃고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꽃잎이 떨어지듯 천천히, 천천히 흩날렸다. 소년이 부르짖는 내 이름이 귓가에 왕왕 울렸다. 그러나 메아리가 된 그 외침은 허공에서 흩어졌다.

나는 절벽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겨우 일곱 살 소녀의 짧았던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소년과 함께였다. 눈을 두는 곳마다 그가 있었다. 소년이 내 손을 잡고 앞서 걸을 때는 듬직한 어깨가 보였고, 뒤 돌면 언제나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란히 걸을 때마다, 나는 꼭 잡은 그의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면 소년의 발걸음도 함께 경쾌해졌다.

내 몸이 바닥으로 끝없이 곤두박질쳤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빠 말 들을걸. 위험하니까 여기에 오지 말걸. 무서웠다. 이제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시아라!!!”

어쩐지 오빠의 목소리가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미안, 오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서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오히려 푹신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둘러싼 차가운 대기의 흐름이 사뭇 따뜻하기까지 했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내 몸 주변으로 둥그렇고 투명한 유리막 같은 것이 보였다. 이미 죽은 걸까? 죽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상황이 가늠되지 않아 다시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곧바로 눈을 떠 확인해보았지만, 여전히 이상한 보호막 속에 있었다. 그것은 비눗방울 같기도, 유리구슬 같기도 했다.

나는 허공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내 시야에…….

소년이 보였다.

나대신 추락하고 있는 그가.

“오빠……?”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흘렀다.

나는 떠오르고 그는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 속에서, 소년과 내 눈이 맞닿았다.

나를 스쳐 지나던 소년은 소리도 없이 입을 뻥긋거렸다. 나는 그의 입 모양을 따라 말을 내뱉었다.

안녕.

… 안녕.

시곗바늘이 머릿속에서 아주 느리게 째깍거렸다. 째깍. 째깍.

바늘이 정각을 가리키며… 우리를 멈추게 한 시간의 마법이 풀렸다.

털썩. 무언가 바닥에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선연했다.

하얀 눈밭 위로 검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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