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알버트의 발언으로 내 귓등이 홧홧거리기 시작했다.
“다, 다시 주세요!”
나는 카시안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드림캐처를 빼앗으려 팔을 쭉 뻗었다. 그러나 카시안이 그보다 더 빠르게 손을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까치발을 들어 콩콩 뛰어보았지만, 그의 어깨만치 오는 내 키로는 역부족이었다.
“더 좋은 것으로 드릴게요. 그건 그냥 주세요. 네?”
“싫어.”
“이건 정말 만들면서도 이상했다니까요? 그냥 좀 주세요. 예쁜 거로 다시 드릴 테니까…!”
내 절절한 애원에도 카시안은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다만 알버트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파리해져만 갔다.
“가만…. 저 해괴망측한 것이 그러니까…….”
나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무자비한 팩트폭행범을 슬쩍 노려보았다.
“…….”
“아가씨가 직접 만든……. 허어억!”
알버트가 양 손바닥으로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들이켰다.
“저-언혀 해괴망측하지 않습니다! 이 물건의 쓰임새는 도통 모르겠지만, 아니 알겠는데, 그러니까 이건……!”
“… 괜찮아요.”
방울토마토가 된 나와 쩔쩔매는 알버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카시안이 풋, 웃음을 흘렸다.
“네가 준 건, 하나도 빠짐없이 다 좋아.”
“이것 때문에 더 나쁜 꿈을 꿀지도 몰라요.”
“그럼 더 좋네. 내가 악몽을 꿀 때마다 네가 옆에서 같이 잠들면 되니까.”
“네?”
“그것만큼 좋은 꿈이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이건 못 줘.”
귓등을 타고 흐르던 열감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나는 나에게 예쁜 말만 해주는 이 남자가 고마워 그의 너른 가슴팍에 한쪽 뺨을 폭 가져다 댔다. 집에 돌아가면 일단 펠릭스부터 한 대 쥐어박아야겠다 생각하며, 그의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진짜로 예쁘고 좋은 것만 드리고 싶었는데.”
“예쁘대도.”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자꾸 터져 나오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알버트 역시 그랬다. 그 또한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왜 제 앞에서 이러시는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알버트는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알리려 애썼다. 그런 그에게, 카시안은 그제야 눈길을 돌렸다.
“왜 안 나가고 아직도 그러고 서 있어?”
“아! 드릴 말씀이 있어서 들렀다가 그만 본분을 잊었군요.”
“뭔데.”
“원로 귀족들이 곧 도착한답니다.”
“하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예. 즉시 회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알겠어.”
알버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카시안과 나, 단둘이 남자 그가 물었다.
“수도는 잘 다녀왔어?”
“네. 오랜만에 로지 아줌마도 뵙고. 재밌었어요.”
“잘했어.”
“아줌마가 나중에는 공작님도 꼭 같이 오라 하시던데.”
“나를?”
“네. 물론 싫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남자친구… 라고 했더니…….”
“남자친구.”
카시안이 단어를 반복해 중얼거리며 헤벌쭉 웃었다.
“얼마든지. 근데 그 주인댁은 이미 나를 알 텐데.”
“네?”
“아니야. 그리고 또? 오랜만에 수도에 간 건데 잡화점에만 있다가 왔어?”
“으음…. 말츠강에… 엄마한테도 다녀왔어요.”
“말츠강이라…….”
잠시 고민하던 카시안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그러고 보니까 그날. 설마 죽으려고 했던 거야?”
“말츠강으로 걸어 들어갔잖아. 네가 직접.”
“네에……?”
“심지어 한가운데서 가라앉기까지 하던데. 미쳤다고 거기서 수영연습을 했을 리도 없고. 그렇게 추운 겨울에. 죽으려고 한 게 맞아?”
“그걸 공작님이 어떻게 아세요……?”
목격자가 있을 줄이야! 그것도 하필 카시안이라니!
“시아라.”
“네네, 네?”
카시안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게 가라앉은 적은 처음이라, 나는 바짝 긴장해 말까지 더듬었다.
“한 번만 더 네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날카로운 조각 같은 카시안의 얼굴이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내 옆에 묶어둘 거야.”
“아, 아니. 그, 그게 그러니까…….”
“내 옆에 꽁꽁 묶어두고, 어디도 못 가게 할 거야.”
코앞에 선 그가 단호하게 경고했다.
“평생 너를 지킬 거니까.”
내 손등 위로 카시안의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 이제 절대 안 그럴게요. 진짜, 약속!”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시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나는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무슨 일 있었어요? 피곤해 보여.”
“그냥 좀…. 요새 영지에 신경 쓸 일이 많았거든.”
“도움이 못 되어드려서 어쩌죠, 공작님.”
카시안의 눈과 뺨을 훑는 내 팔을, 그가 조심스레 잡았다.
“이름 한 번만 불러주면 피로가 싹 가실 것 같은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짜야.”
“… 오빠. 카시안.”
“하아… 진짜.”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미치겠네.”
“…….”
“너무 좋아서.”
똑똑.
이번에는 신사답게 노크를 시도한 알버트가 문 뒤에서 외쳤다.
“각하.”
“또 뭔데 방해해?”
“귀족들이 도착하셨습니다.”
“… 아이 씨… 저걸 그냥 영지 밖으로 보내버리든가 해야겠어.”
카시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 슬쩍 웃어 보였다.
정문까지 배웅해주겠다는 카시안을 만류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
틸다 레트랑은 제 맞은편에 앉은 아들을 유심히 응시했다. 그런 틸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라튼은 애먼 대리석 바닥만 훑었다. 그는 저번에 엄마에게, 시아라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을 나름대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반성까지는 아니고.
그 후회는 물론 시아라, 그녀에 대한 걱정에서 시작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의 신변과도 관련 있었다. 자신이 약속을 어기고 엄마에게 모두 털어놓은 사실을 아델트 공작이 알기라도 한다면……! 라튼은 손등에 화상처럼 남은 상처 자국을 눈으로 흘기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들, 이제 말하렴. 그 계집애가 사는 집이 어디지?”
“…….”
“네가 말 안 하겠다면 이 엄마도 다 방법이 있단다.”
라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틸다를 바라보았다. 형형한 눈을 번득이는 제 엄마와 다르게, 그의 눈은 겁에 질려있었다.
“잡화점 주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아델트에 산다더군. 오늘부터 열심히 그곳을 뒤지면, 그 애가 사는 집 하나 알아내는 것쯤이야 아주 손쉬운 일이란다.”
“어, 엄마!”
“안 그래도 요새 네 아빠 사업이 골치 아픈 일로 가득한데. 도대체 왜 너까지 말썽을 부리는 거니?”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냥… 이제 그쯤 하시면 안 될까요?”
“라튼. 내가 벌써 몇 차례나 말했잖니. 나는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그래도…. 벌써 오래전 일이잖아요. 제발 아량을…….”
“그년이 내 얼굴에 돈다발을 집어 던졌던 것을 무릎 꿇고 사과하기 직전까지는, 절대 그만둘 생각이 없단다. 게다가 꼴랑 몇 푼 되지도 않는 그 당첨금을 거들먹이면서 나한테 모욕을 줬다고? 하! 기가 차서 정말.”
독기로 가득 찬 틸다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었다. 더 이상 피해갈 곳이 없음을 직감한 라튼은 결국,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남은 사실마저 실토했다. 본인 자신만은 무사하기를 부단히 바라면서. 그는 떨리는 몸을 웅크린 채 터덜터덜 방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어디 사는지도 알아냈으니까. 독 안에 든 쥐 꼴이잖아?”
제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틸다가 느긋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도 단번에 쥐를 잡는 건 재미없지.”
어떻게 괴롭히는 게 제일 즐거울까?
싱글벙글거리며 단꿈에 젖은 틸다 레트랑이 응접실 바깥에 서 있던 호위를 불렀다.
“루카스.”
“예.”
“외출을 준비해. 기분이 너무 좋네? 오랜만에 옷을 좀 사야겠어.”
“알겠습니다.”
“참, 아리안은 아직 소식이 없나?”
“벌써 며칠이나 자리를 비우셨으니 곧 돌아오시지 않을까요?”
“좋아. 나가서 준비해 둬.”
루카스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나 원 참, 정보 몇 개 알아오는데 뭐 이리 오래 걸려?’
못마땅하게 눈을 치뜬 틸다가 느긋한 발걸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고급 부티크가 줄지어 늘어선 수도 상업지구에 마차가 멈췄다. 루카스의 에스코트로 틸다가 땅에 착지하려던 찰나, 그 앞으로 자전거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탓에 틸다의 드레스 위로 흙탕물이 튀었다.
루카스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기이한 감각이 틸다의 몸을 타고 흐르며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자신의 팔을 거세게 잡아채던 한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랴. 시아라의 모친, 안네마리 에벨이 다리 아래로 떠밀리기 직전, 틸다의 옷과 팔을 부여잡고 늘어졌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면서.
한동안 잊고 있던 그 외침이, 틸다의 머릿속에 왕왕 울렸다. 갑작스레 떠오른 생의 마지막 목소리에 틸다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루카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
“이거 놔!”
“조심하십시오.”
틸다는 곧바로 제 드레스를 살폈다. 하도 화려해서 치마 앞섶에 흙탕물 몇 방울이 튄 것으로는 얼룩이 티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장 마부에게로 가서 그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감히 이런 진흙탕 앞에 나를 내려놓다니! 이 옷이 얼마짜리인 줄은 알고 네가 이런 짓거리를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당황한 어린 마부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틸다 레트랑이 짜증스럽게 등을 돌렸다.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다니! 제일 비싼 옷을 사서 돈 자랑이나 해대려고 했던 그녀가 계획을 바꿨다. 그녀의 목적지는, 근방에 있는 부티크 중 가장 고객의 왕래가 적은 곳이었다. 옷도 고객도 애매한 부티크에서 주인의 용도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문이 열리자 뱁새눈의 여자가 맨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레트랑 백작 부인! 오랜만에 오셨군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내가 요새 좀 바빴거든.”
“세상에… 이 피부가 고운 것 좀 봐.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신지! 백작님 사업이 여전히 잘 되나 봐요?”
그 물음에 틸다가 거만하게 코웃음 쳤다.
“늘 어려운 법이 없지.”
“그럼요! 레트랑 가문이니까요!”
주인은 알랑방귀를 뀌어가며 연신 굽신거렸다. 오늘 같은 날은, 부티끄의 옷 따위를 파는 것보다 이 오만한 귀족 부인에게 잘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었다.
“저도 좋은 정보 하나만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틸다는 기다렸다는 듯 주인을 향해 미소지었다.
“내가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여자 하나를 잘 알고 있는데.”
“정말요?”
“소개해줄까?”
부티끄의 주인이 세차게 긍정하자 틸다는 특급 비밀이라는 듯 귀엣말을 했다. 귀한 소식을 전해 들은 여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마 앞으로 며칠 이내에 온 제국에 그 계집애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지겠지!
틸다가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