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아델트 저택 별채 1층에 자리한 회의실. 그곳에 유난하게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길게 뻗은 테이블 양옆으로 인근 영지의 귀족들이. 제일 끝 한가운데에 그가 앉아있었다. 아델트의 주인, 카시안 폰 아델트가.
회의실에 앉은 귀족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짜증스러웠고, 매우 공격적이었다. 언제라도 꼬투리 잡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날카로운 눈을 부라리면서.
그 사나운 시선 속에서 아델트 공작, 그의 표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초연한 무표정. 시아라와 함께하며 웃음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그녀가 없을 때면 늘 이랬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숨기고, 타인을 대할 때는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쓸 것. 고작 이러한 것들이 아버지인 아델트 선대공작의 유일한 가르침이었으니.
그러나 카시안은 인정했다. 본받을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아버지였지만, 그 유일함이 오늘만큼은 퍽 도움이 된다고. 그 덕에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지 않던가.
위태롭게 버티던 결계가 결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일반인들의 눈에 그것은 그저 얇고 투명한 유리벽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결계는, 제국의 최전방에 있는 아델트를 적국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문장이었다. 그 얇은 유리 벽 하나가 전쟁을 매번 승리로 이끌었다. 어떠한 공격도 뚫지 못하는 아델트 가문의 방어 능력. 그 힘으로 가문은 굳건했다.
물론 이것은 밥 먹듯 전쟁이 일어나던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도 시시콜콜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나, 검 한 번 휘두르면 켁 하고 죽는 잔챙이들이 거는 시비에 불과했다.
헤르본 제국과 가장 많은 마찰을 빚었던 반터 왕국이 서로 평화협정을 맺은 십여 년 전부터 결계는 새로운 의미였다.
유리벽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그 주변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근간이었다. 헤르본 제국에서 가장 춥기로 유명한 아델트에서도 농작물이 잘 자라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보호막 안에서 제국민들은 평화로웠고 안전했으며, 또한 걱정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근심 따위들 말이다. 그러니 모든 이들이 아델트 가문을 두고 제국의 수호자라 칭송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결계가 무너졌다.
제국민들은 공포에 질렸다. 분 단위로 가뭄이라도 든 듯 쫙쫙 갈라지는 땅을 지켜보며, 이제는 제국의 수호가 끝났다며 절망했다. 이게 다 무능한 아델트 공작, 당신의 탓이니 어서 책임지라 소리쳤다.
그러나 카시안이라고 그러고 싶지 않을까.
그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카시안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완전하지 못한 마력 때문이기도 했다.
방어마법을 쓰려고 할 때마다 떠오르던 붉은 피를 뒤집어쓴 아이의 잔상. 그 아이는 본인 자신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시아라를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보호막을 휘둘렀다. 그 덕분에 시아라는 멀쩡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러나 카시안은 어떻게 됐더라. 바닥에 추락한 소년은 온몸을 새빨간 피로 뒤집어쓰고, 얼마 뒤 정신을 잃었다. 카시안의 몸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죽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을 만큼, 뼈마디가 전부 으스러지고 숨도 쉬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다시 깨어난 것은 기적 그 자체였다.
카시안이 추락한 직후, 시아라는 방어벽을 부술 듯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단단하고 견고한 그 벽은 수차례의 두드림 속에서도 온전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카시안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쥐어짜 냈다.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아무리 노력해도 빌어먹을 두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숨이 차츰 멎음을 느끼는 와중에도 카시안은 버텨야만 했다. 그의 마법은 아직 연약했기에 의식이 끊기는 순간 보호막도 사라질 게 뻔했다. 시아라가 안전한 위치로 옮겨질 때까지, 카시안은 그녀가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만 했다.
그 참담함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 뒤로 깨어났지만 시아라는 옆에 없었다. 그 대신 보육원장 제페토만 있었을 뿐. 시뻘겋게 충혈 된 눈으로 카시안을 노려보던 제페토가 윽박질렀다.
[“네 놈이 다쳐서! 그깟 계집애 때문에 네가 다쳐서, 내가 네 아버지에게 돈을 못 받을 뻔했잖아!”]
시아라가 보육원 다락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카시안의 아버지가 왔다.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
아버지와 제페토, 두 사람 중 누구도 카시안이 시아라를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시아라를 볼 수 없었기에,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은 눈이 감기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오열하다 결국 기절해버린 여린 소녀.
아델트 선대공작은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아들의 마력을 검증했다. 안타깝게도,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약한 마력이 흐르기는 하였으나 쓸모없었다. 하지만 어찌할까. 카시안을 제외하면, 그 흔한 자식조차 없었으니.
사라진 마력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되돌아왔다. 그러나 카시안은 아닌척했다. 그 빌어먹을 마법으로 가문의 명맥을 잇기도 싫었고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알버트만이 카시안의 마력을 알고 지켜줄 뿐이었다.
이후 시아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는, 마법을 차단해버렸다. 그건 재능이 아니라 저주였으니. 아무리 단단한 보호막을 세워 그녀를 구했다 한들, 자신은 그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카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카시안의 조상들이 공들여 세워놓은 결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대도,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냥 다 죽어. 그 애가 세상에 없잖아.
그렇게 방치되기를 8년. 끝에서부터 차근차근 금이 가던 방어벽이 기어코 부서졌고, 그것이 오늘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였다. 고치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벌써 며칠째 시간이 날 때마다 텔레포트로 곳곳을 누비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몇 년이나 이어진 마법 공백을 단번에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처음 말문을 연 이는 로아커 백작이었다. 아델트의 남서쪽에 있는 백작의 영지는, 결계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이었다.
“아델트 공작.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내 영지가 전부 메말라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썩어 들어가고 있소. 어디 입이 있다면 해명을 해보시오. 이걸 되돌릴 방법은 있는 거요?”
로아커 백작은 그나마 온유한 편이었다. 여태껏 아델트 가문의 도움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아 왔으니 좋은 방책이 분명 존재할 거라 믿었다. 아직까지도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가문과 척을 지는 것이 영 께름칙하기도 했고. 그러나 카시안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역정 가득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방법은 무슨. 그러니까, 애초에 마법도 못 쓰는데 후계자랍시고 영지 수호를 맡겨서 이 사단을 만드는지. 쯧!”
제국 서쪽 영지의 주인 질코 데트로프 후작이었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데트로프 후작. 조금 진정하시는 편이 좋겠군요.”
“안더스 트리탄 후작. 지금 이 상황에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오랜 친우라고 무조건 감싸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안더스는 자신의 누이 엘리나 트리탄과 똑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에 음울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졌지만, 훨씬 선한 인상이었다. 그런 그가 인상을 찡그릴 때면 더욱 섬뜩해 보였다.
“후작. 제가 지금 아델트 공을 감싸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저는 그저 아델트 가문의 능력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보여준 것이 있어야 믿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델트 공작을 신뢰할 수가 없군요. 지금 트리탄 후작은 저 바깥에 굶주리는 제국민들이 안 보이시나 봅니다. 아, 물론 누이를 잃은 슬픔이 크셔서 그렇다면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만.”
“굶주리는 이들이 불쌍해서 그런 거라면 후작의 곡식 창고를 열면 되겠군요. 거기에 수북이 쌓여있지 않습니까. 아, 그동안 몰래 뒤로 꿀꺽하신 세금이며 기부금도 다시 토해내시고요. 드신 게 많아서 좀 더럽겠지만.”
안더스가 차분하게 일갈하자 데트로프 후작의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결코 데트로프는 멈추지 않았다.
“큼, 크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불거리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후작! 게다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모함으로는 자명한 사실을 덮을 수 없습니다. 아델트 공이 공작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는 것! 그게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카시안을 향한 끝없는 모욕에 이번에는 알버트가 씩씩거렸다. 알버트는 제 주군을 향해 험한 말을 지껄이는 저 후작의 주둥아리를 어떻게든 꿰매고 싶었다.
“말씀이 좀……!”
그러나 카시안이 그의 가슴팍을 팔로 막아섰다. 아무 말도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신호였다.
“…….”
알버트는 자기가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시안의 얼굴이 너무 초연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시죠.”
그리고 드디어, 카시안 폰 아델트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제외하고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카시안의 정중한 사과에도 질코 데트로프는 비아냥거렸다.
“죄송하단 말로 끝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공작.”
“압니다. 더는 피해가 없을 것을 약속드리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상황이 심각해지면, 아델트 영지에 보관하고 있는 공물을 전부 풀어서라도 제국민을 도울 방책을 마련하겠습니다.”
“흠, 흠! 뭐 그렇다면야. 그 전에 결계가 수정되면 더없이 좋겠군.”
“노력하겠습니다.”
데트로프 후작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랴. 데트로프의 곡식 창고는 여전히 가득 차 있을 테지. 오늘도, 내일도!
그것으로 끔찍한 회의는 끝이 났다.
*
귀족들이 돌아간 뒤에도 카시안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도리어 알버트가 화를 냈다.
“왜 그런 모욕을 듣고도 가만히 계셨습니까? 예?”
“시끄러워.”
“아니! 이제 마력을 조금만 더 끌어올리면 결계를 고칠 수 있는데! 심지어 그 인간은 각하가 마법을 쓰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곧 알게 되겠지.”
“그 자리에서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하, 진짜!”
알버트는 답답한지 뒷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그러나 카시안은 단호했다.
“아니, 갖춘 다음에. 그 힘을 완전히 되찾고 밝혀야 해.”
“각하……!”
“내 한마디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고 있잖아.”
아무런 증명 없이 말을 내뱉는 것은 굶주린 늑대들 앞에 먹잇감을 던지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하아……. 그래도 그런 모욕, 저는 정말 싫어요. 각하를 욕하는 놈들!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요!”
“괜찮아.”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알버트를 위로했다.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
“그보다, 서둘러서 정화의 마법사를 찾아야 해.”
정화의 마법사 마르쿠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그 마법사를 하루빨리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