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칠흑 같은 어둠이 성큼 다가왔다. 노란 달빛만 희미하게 거리를 비추는 밤이었다.
도떼기시장처럼 야단법석이었던 골목에도 적막이 찾아왔다. 다수의 사람들은 치안대에 끌려갔고, 위협 없이 소란만 떨었던 이들은 그 자리에서 훈방이 되었다.
그러나 풀려난 사람들 또한 슬금슬금 눈치만 보다가 줄행랑쳤다. 가만히 버티고 있다가 잘못하여 똥이라도 밟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으랴.
상황이 종료되자 긴장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카시안은 휘청거리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네. 덕분에요.”
“언제부터 이랬던 거야.”
“모르겠어요……. 그냥 볼일 보고 돌아오니까 이미…….”
카시안이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보다 치안대는 여기에 어떻게 왔을까요?”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카시안을 불렀지 치안대를 부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카시안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부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그때, 저쪽에서 한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시아라, 괜찮아요?”
“아…… 한나! 혹시 한나가 신고했어요?”
“네. 분명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너무 걱정돼서……. 혹시 저 때문에 더 곤란해진 건가요?”
“그럴 리가요. 고마워요, 정말…….”
나는 한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내 품에서 벗어난 후에야 한나도 카시안을 인지했다.
“아…, 공작님. 안녕하세요.”
카시안은 가볍게 눈인사했다.
“근래 레스토랑이 어려울 텐데.”
“… 괜찮습니다. 멀쩡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가겠지요.”
“한나. 오늘 일은…… 내가 나중에 설명할게요.”
“그래요. 오늘은 어서 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나도 이만 들어가 볼게요.”
한나가 들어가고 집 앞에는 나와 카시안, 쓰러진 펠릭스가 남았다.
“여기는 위험하니까 저택으로 가자.”
“설마 저 혼자요?”
“그럼?”
나는 펠릭스를 곁눈질했다. 잔뜩 멍이 들고 부어오른 얼굴로 쓰러져있었다. 벌써 굳어버린 핏물은 상처 위에 남아 그대로 딱지가 져버렸다.
“저 때문에 대신 두들겨 맞고 얼굴이 이렇게 됐는데……! 펠릭스 혼자 두고 못 가요. 저도 여기에 있을게요.”
“오늘 하루 동안 치안대를 배치할게. 거기 친구, 너는 내일 나를 찾아오고. 그럼 됐지?”
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자 카시안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어제 하루 아델트 저택의 별채에서 묵었던 펠릭스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나는 낸시가 전한 소식을 듣고 일층 응접실로 후다닥 내려갔다.
“왔어?”
“여기서 하루 잤다고 공주님 같네. 얼굴이 반짝반짝해.”
“뭐라는 거야……. 잘 잤어?”
“응. 근데 나는 집이 편하더라. 불편해서 못 있겠어.”
펠릭스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맞아. 나도 그래. 참, 공작님은 뵈었어?”
“아직. 언제와도 만나줄 것처럼 말하더니 바쁘다고 자리를 비웠다나.”
“결계 때문에 진짜로 바쁘셔서 그래. 온 제국이 난리잖아.”
입술을 삐죽거리는 펠릭스에게 내 나름대로 소박하게 카시안을 변호했다.
펠릭스의 얼굴에는 아직도 상처가 가득했기에, 나는 낸시에게 약 상자를 가져와 달라 부탁했다.
“이리 봐. 약 발라줄게.”
연고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따끔한지 몸을 파드닥거리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오히려 툴툴거렸다.
“너는 위험하게 총을 들고 나가냐.”
“어차피 겁만 주려고 했던 거야. 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자꾸 시비를 거니까…….”
“그래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
내 딴에는 혼을 내는데도, 펠릭스는 뭐가 좋은지 자꾸만 싱글벙글 웃었다.
“걱정해주니까 좋다.”
“… 미안해.”
“그런 말 듣자고 앞에 나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그의 보조개도 보이지 않을 만큼 밴드까지 덕지덕지 붙여주고 나서야 그나마 안심했다.
“이거 하루 만에 안 낫겠지? 집에 약은 있어?”
“아니. 아무것도 없어. 나 내일 또 올까?”
“뭐? 됐어, 귀찮게 무슨. 이걸 가져가 그럼.”
“싫어. 내일 다시 올 테니까 그때 또 발라줘. 아, 남의 집이라 좀 그런가? 그럼 내가 저택 정문에 있을게. 누나가 나와서 발라주고 들어가면 되겠다.”
잔뜩 장난기를 머금은 펠릭스의 표정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도 내 비밀을 털어놓을 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펠릭스, 나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뭔데 그렇게 무게를 잡아?”
“어제 그 사람들. 왜 우리 집 앞에 그렇게 몰려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 안 궁금하면 거짓말이지.”
“그러니까 그게…….”
“근데 누나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사실, 로또 당첨됐어.”
한참의 정적 후에 펠릭스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아? 저번처럼 또 장난치는 거지?”
“… 아니야. 진짜야.”
내 진지한 목소리에 펠릭스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저번에도 진짜였고, 이번에도 진짜고.”
“그럼 그 사람들이 돈 달라고 찾아온 게 정말…….”
“응. 소문을 들은 거지.”
“어디서?”
“내 생각엔…… 예전에 나를 찾아왔던 남자 기억해?”
“그 전 남자친구라던 빨간 머리?”
“응. 아무래도 걔 같아.”
“하아…….”
“공작님이랑 라튼 레트랑을 제외하고는 이 사실, 아직 아무도 모르거든.”
펠릭스는 펄쩍 뛰었다.
“와아- 그 미친놈! 성격 진짜 이상해 보이더니!”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야?”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펠릭스가 좀처럼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거렸다.
“죽을 만큼 해보고 싶었던 거. 그렇지만 엄마가 아파서,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던 그런 거. 혹시 그런 게 있었어?”
펠릭스는 한참을 고민했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럼 이번에 생각해볼래?”
그 뒤로 점심을 함께 먹고, 펠릭스는 다시 되돌아갔다.
*
저택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델트 공작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펠릭스는 내일 다시 오겠다 전하고 밖으로 나갔다.
‘로또 당첨…….’
사실 어제 있었던 일이 하도 경악스러워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아무 눈치도 못 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러나 펠릭스 본인 스스로 묻기는 싫었다. 시아라가 밝히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먼저 말해준 것이, 한편으로는 고맙고 좋았다. 그만큼 시아라가 자기를 믿는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정원을 따라 걷고 있는 도중,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아델트 공작이 등장했다. 정말 갑작스러웠다. 분명 아무도 없는 공간에 불쑥 나타났으니까.
‘어라? …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마법이라도 쓰는 거야 뭐야?
펠릭스는 눈을 끔뻑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 연두색 머리카락의 남자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혼자였잖아. 어떻게 갑자기 둘이 됐지?’
지금 헛걸 보는 거야?
어쨌거나 공작이 자신에게 볼일이 있음이 분명했으므로,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두 남자는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고, 공작님. 애, 애써 심어 놓은 씨앗을 마음에 안 든다고 다, 다 망쳐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네가 심은 게 죄다 해괴망측한 걸 어떻게 해.”
“공작님께서 고쳐 놓으신 겨, 결계도 망측하긴 마, 마찬가집니다!”
“하아…. 한마디도 못 하고 쩔쩔매던 게 바로 어젠데. 그새 알버트한테 물든 거야 뭐야?”
카시안이 주름진 이마에 손을 짚었다.
펠릭스는 잠시 멈칫했다. 아델트 공작을 보자마자 저 남자가 어제 그 난리를 한순간에 정리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랴. 정작 시아라를 지키겠다며 나섰던 본인은 사람들에게 얻어맞기만 했는데. 저 남자는 옷에 먼지 한 톨 달라붙지 않고 시아라를 데려갔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다. 라튼 레트랑이 시아라를 찾아와 협박했을 때도, 펠릭스는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엘리나 트리탄의 별장에서 시아라를 처음 만났던 날은 또 어떠했던가. 물속에 뛰어든 자신을 구하던 시아라에게 짜증만 냈었지.
‘하아…. 이 머저리. 누나를 위해서 어떤 짓도 할 것처럼 굴어놓고… 도망만 쳤네.’
그러나 펠릭스는 두려웠다. 아득바득 버티며 겨우 이어온 자신의 삶에, 조금의 변화라도 찾아오는 것이 무서웠다. ‘하고 싶은 게 뭐야?’라고 묻던 시아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다 구멍 난 양말 같은 인생인데. 그 구멍을 남들이 모르게 애써 기우고 또 기워서 신고 다니는데. 하고 싶은 게 있냐니. 설령 있다 해도… 그걸 어떻게 말해. 입 밖으로 내뱉으면, 욕심날 게 뻔하잖아.
그러나 눈앞에 아델트 공작을 보자마자, 문득 스스로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 하고 싶은 거라.’
펠릭스는 주먹을 한 번 움켜쥐고 다시 카시안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일어났네. 잘 잤어?”
“예. 바쁘셨나 보네요.”
“보다시피. 할 일이 많았거든.”
“저한테 할 말이 있으셨던가요?”
“아.”
아델트 공작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고마워.”
“예?”
“어제 네가 도와줬다고 들었어.”
예상치도 못한 감사에 펠릭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펠릭스의 얼굴을 죽 훑어보던 카시안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손짓했다.
“마르쿠스.”
“네, 공작님.”
“식물이 아니긴 하지만…. 이 정도 상처는 네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지?”
“예, 예? 뭐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그때, 펠릭스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상처를 황급하게 가렸다.
“마법으로 치료? 안돼요!”
“왜. 당장 치료해 준다니까.”
“아뇨! 이거 다 시아라 누나가 붙여준 거란 말이에요!”
“뭐?”
카시안이 한쪽 눈을 치떴다.
“그걸 누가 붙여줘?”
“누나가요. 시아라 누나요.”
아주 짧은 순간에, 아델트 공작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노려보았지만, 펠릭스는 그 상황이 나름대로 즐거웠다. 펠릭스가 히죽 웃었다.
“제 얼굴 치료해 주시는 거 말고.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말해.”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선 아델트 공작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저, 강해지고 싶어요.”
“뭐? 니가?”
“네.”
“그 말에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그만큼 강해지고 싶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그 말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카시안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