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수도에 있는 카산드라 리첸스의 부티크에 모처럼 종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제 몸처럼 작은 노란색 양산을 손에 쥐고 있는 여인이었다. 손톱다듬기용 사포로 자신의 손톱을 매끈하게 정리하고 있던 카산드라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제 주변에 쌓인 먼지들을 후후 불어 재낀 후, 버선발로 달려나가 손님을 마중했다. 천성이 태만한 카산드라가 제일 바삐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양산을 접자 그 아래 있던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눈, 콧구멍, 입술만 제외하고 미라처럼 붕대로 얼굴을 칭칭 동여맨 안타까운 사연의 여인.
“어머나, 세상에! 당신은 저번에 그……!”
놀라움에 커다랗게 벌어진 카산드라 리첸스의 입은 양 손바닥으로 다 가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카산드라의 태도가 역겹다는 듯, 예카틸리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던 대로 해. 볼썽사납게 굴지 말고.”
“이런. 그렇게 티 나디?”
카산드라의 얼굴 위에 가식적으로 매달려있던 측은함이 단박에 사라졌다. 카산드라는 정색하며 예카틸리나에게 쏘아붙였다.
“너는 언니를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니?”
“언니는 무슨. 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쯧, 말버릇하고는. 어쩌다 이렇게 짐 덩어리 같은 게 찾아와서는. 하, 내 신세야!”
카산드라 리첸스는 혀를 끌끌 차며 입술을 비틀었다.
예카틸리나와 카산드라는 이복자매였다. 어릴 적 같은 집에서 함께 자란 두 여자의 사이는 가깝고도 멀었다. 조금 더 확실히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를 무척이나 증오하면서도 필요로 했다. 그 사이에 애정이나 우정 따위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두 여자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었고, 각자의 이득을 위해서만 돕고 살았다. 그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따로 흩어져 소식도 모르고 살았지만, 만신창이가 된 예카틸리나가 어느 날 불쑥 카산드라를 찾아왔다. 돈도, 명예도, 집도. 무엇 하나 가지지 않은 채로.
‘저런 도움도 안 되는 년을 거두다니. 내가 미쳤지!’
그때, 예카틸리나가 얼굴에 감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흉터로 가득한 맨얼굴이 나타나자 카산드라는 경악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붕대를 왜 풀어? 손님들이 지나가다가 네 징그러운 얼굴을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차피 장사도 하나 안 되는 부티크나 운영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유난이야? 나라고 뭐 풀고 싶은 줄 알아? 답답해 미치겠는 걸 어떻게 하라고!”
‘재수 없긴.’ 팔짱을 낀 채 떨떠름한 눈으로 예카틸리나를 노려보던 카산드라가 코웃음을 쳤다.
“하긴, 어쩌겠어. 답답하시다는 데. 알겠어, 예카틸리나. 아니, ‘카티아.’라고 해줄까?”
“허, 카티아? 그따위 이름이야말로 징그러우니까 두 번 다시 부르지 마!”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카산드라의 말투에 예카틸리나가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카산드라는 그 목소리가 듣기도 싫다는 듯 들은 채 만체하며 다시 손톱 정리에 매진했다. 기다란 손톱 가운데를 뾰족하게 만들어 첨탑 모양을 만들었다. 그 위로 새빨간 매니큐어를 정성스레 칠하고, 통통한 제 손가락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얼마 전 부티크를 찾았던 틸다 레트랑의 손톱 또한 이처럼 붉은색이었다.
‘틸다 레트랑.’
그 여자가 이번에는 도움이 되는군!
틸다의 말마따나 로또 당첨자는 정말로 아델트에 살고 있었다. 이게 웬 횡재인지! 틸다 레트랑이 하는 말 중 절반은 헛소리로 걸러 듣던 카산드라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상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그 금발 머리 여자에게 돈을 뜯어내는 일이 단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급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차근차근 접근하면 그 돈을 거머쥐게 되는 날이 오겠지! 오늘따라 이 빨간색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연기 잘 하더라?”
카산드라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제 이복동생을 흘긋 살폈다. 아픈 동생을 걱정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저년이 비싼 제 물건을 훔쳐 도망가지는 않을지. 카산드라는 은연중에 집중하고 있었다.
“뭐라고 했더라? ‘저는… 예카틸리나라고 해요…….’였던가? 아니지, 아니지. ‘가족들을 구하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얼굴이 이렇게……!’ 그게 압권이었지.”
카산드라가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거리며 예카틸리나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러나 곧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이기죽거렸다.
“어찌나 절절하던지.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니까? 누가 보면 진짜 그런 일을 겪은 줄 알겠어.”
“알게 뭐야. 다들 속아 넘어가서 울고 자빠졌던데.”
예카틸리나는 그날 밤 골목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이 우습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혀 깔깔거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웃음을 뚝 멈추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제 이복 언니를 응시했다.
“근데 언니는 그런 정보를 어디서 다 알아냈어?”
“니가 그게 왜 궁금해?”
“아니, 기특해서 그렇지. 우리 망할 언니가 먹고 살 궁리를 했다는 게.”
“예카틸리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널 거둬준 건, 그나마 네가 그따위 허접스러운 연극이라도 할 줄 알기 때문이야. 똑똑히 알아둬.”
“왜, 무서워? 멍청하다고 무시하던 동생이 제 언니 것을 다 훔쳐갈까 봐?”
칭찬인 듯 욕인 듯. 두 여자는 계속해서 날 선 대화를 이어갔다. 태연자약하게 발가락에까지 매니큐어를 칠하던 카산드라가 고개를 들어 눈을 치떴다.
“근데 너 말이야, 그 당첨자라는 여자랑 아는 사이야?”
“뭐? 아니. 그 날 처음 보는데. 그건 왜?”
“흐음…. 그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그냥 좀 놀란 표정이길래.”
“처음 보는 거 맞으니까 눈 좀 그렇게 뜨지 말아 줄래?”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카산드라에게 예카틸리나가 물었다.
“이제 어쩔 셈이야? 그 여자 집에 없던데. 집 근처에는 치안대가 쫙 깔렸다고!”
“가만있어 봐.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보다 너, 그 여자한테 돈 받으면 나랑 나누기로 한 거 잊지 않았겠지?”
“잊었을 리가.”
“나 때문에 네 얼굴도 고칠 수 있는 거니까. 이 언니한테 늘 감사하며 살라고.”
예카틸리나는 아델트 병원에서 시아라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할 리가 있나. 그걸 알면 돈만 밝히고 허영심 가득한 카산드라가 어떻게 굴지 뻔히 보이는걸. 어떻게든 시아라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어 한 몫 챙기려고 할 것이 분명하지!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 여자에게 돈을 뜯어내는 건 오직 나여야 하니까.’
언제부터 지가 내 언니였다고. 언니 같지도 않은 모자란 여자한테 내 돈을 왜 나눠? 기가 차서 정말.
예카틸리나는 부티크의 한쪽 벽을 차지한 커다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아무 보잘것없는 차림새 속에서도 커다란 보라색 사파이어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만은 반짝거렸다. 지금 그녀가 가진 유일한 희망. 아마 제 몸값보다도 비쌀 터였다. 이 아까운 보석을 팔아치워야 하나 했는데, 어쩐지 든든한 물주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딘가 맹해 보이는 게, 다루기 쉬운 여자처럼 보였으니까.
목숨줄과도 다름없는 보석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얼굴 위로 올라갔다. 무수한 흉터를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러나,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흉측한 얼굴도, 곧 있으면 사라지겠지.’
예카틸리나는 병원 정원에서 만났던 시아라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기다랗고 윤기가 흐르는 금색 머리카락.
‘그러고 보면 걔도 나처럼 파란 눈이잖아?’
거울을 마주한 예카틸리나가 시아라의 표정과 말투, 행동, 걸음걸이를 하나하나 떠올리고 따라 했다. 관리라고는 하나도 되지 않아 어두컴컴한 부티크의 문을 열고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님, 아델트 공작의 모습을 상상했다. 시아라를 구하기 위해 등장했던 그 날처럼.
그 남자를 생각하자 예카틸리나의 입꼬리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
나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아델트 저택의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뒤죽박죽 엉켜있는 생각들이 구체화 될 줄 알았건만……. 상상을 실현으로 만드는 일은 꼭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그러니까, 나랑은 전혀 관련이 없는 그런 이야기.
아무래도 그 상상이 너무 막연해서겠지. 원대한 계획도 아니고, 내 목표는 그저 ‘다 같이 행복하게 살기.’ 그거 하나였으니까.
‘너무 뜬구름 잡는 생각일까.’
두툼한 책 위에 얼굴을 묻었다. 오래된 책 냄새는 포근하고 아늑했다. 나는 잠시만 눈을 감기로 했다. 진짜 잠시만… 이었는데……! 어느새 도서관 내부는 캄캄했다. 유리창 너머로 비집고 들어오는 어스레한 달빛을 제외하면, 빛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내 어깨 위에 올려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두툼한 담요였다.
‘담요?’
나는 옆자리를 휙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카시안이 있었다. 피곤했던 건지 책상 위에 뺨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로.
마음이 놓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나 역시 책상 위로 뺨을 누이고 카시안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 남자의 곁에서는 책 향기보다도 포근한 향기가 났다. 게다가 그 향기는 아찔하기까지 해서, 내 손가락은 그의 얼굴 위를 유랑 중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천천히. 기다란 속눈썹과 높은 콧대. 날렵한 턱선, 그리고 여기는… 두툼한……. 입술이네.
그의 입술을 톡, 두드렸지만 카시안은 기척도 없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굴곡진 그 위를 쓸었다. 그 감촉이 부드러웠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만 더, 더, 더.
어느새, 서로의 코끝이 닿을 거리였다. 그의 숨결이 단숨에 느껴졌다. 덕분에 내 심장은 제멋대로 요동쳐서, 그 소리를 듣고 카시안이 깨기라도 할까 숨을 죽였다.
그렇게 천천히, 내 입술이 그의 입술과 맞닿을 즈음. 카시안이 눈을 떴다.
“언제 올 거야? 너무 느리잖아.”
나른하게 풀린 그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리고, 내 입술 위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맞닿았고, 금세 떨어졌다. 입맞춤은 찰나였다. 그러나 내 시간은 정지한 것처럼 더디게 흘렀다. 귓속에서는 정체 모를 삐- 소리가 왕왕 울렸다.
“미안. 기다리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어서.”
“… 자던 거… 아니었어요?”
“깼어. 네 손가락이 닿았을 때부터.”
그제야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마, 말하지…! 저, 나는 안 일어나길래…….”
“피곤해 보여서 기다리다가 나도 잠든 거야. 그런데 자꾸 만지길래.”
나는 연거푸 책을 읽었다. 똑같은 문장만 수차례 읽고 있었지만, 단어가 전부 흩어져 머리 위를 붕붕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