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나는 자고 있던 카시안의 얼굴을 멋대로 만진 것이 괜히 민망해 쭈뼛거렸다. 그러자 카시안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요새 하루 종일 도서관에만 틀어박혀서 뭐해?”
“… 공부요.”
“우리 예쁜 아가씨께서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하실까요. 저는 보러오지도 않고.”
“그런 말 하지 마요…….”
“진짜 궁금해서 그래.”
나는 베고 잠들었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공작님은…… 처음부터 공작님이 되고 싶었어요?”
“응? 무슨 질문이 그래?”
내 질문에 카시안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기가 맡은 일 잘하지. 영지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지. 척척박사처럼 마법도 쓰지. … 공작님은 다 잘하잖아요.”
“맡은 일을 게을리했던 적도, 영지인들을 외면했던 적도. 마법을 끔찍이도 싫어서 멀리했던 적도 있는데.”
“정말요?”
“응.”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야……. 나는 다 잘했으니까.”
“… 어떻게요? 그걸 어떻게 다 잘 할 수가 있어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으나, 카시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해보니까 쉽던데.”
그 대답에 내 입술이 오리처럼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그게 뭐야. 잘난 척할 거면 가요. 나 책이나 더 읽을래.”
“안돼요, 아가씨. 밤이 늦었어요.”
카시안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 정수리 위로 카시안의 턱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잘난 척 아니야. 있지, 이렇게 종일 책만 읽지 말고. 직접 부딪혀봐. 그러면 알 거야.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직접 경험한 것만큼 와닿는 건 없으니까.”
*
‘직접 부딪혀봐.’
나는 며칠 전 카시안의 말에 용기를 얻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하긴, 내가 여태 로지 아줌마 잡화점에서 일해 본 것 말고 뭘 해봤다고.’
별을 따려고 해도 하늘을 먼저 보아야 하는 법! 나가자! 나가서 이것저것 경험하면 세상이 보이겠지.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낸시의 도움을 받아 외출 준비를 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오늘은 아델트 시장을 갈 계획인데, 누군가 내 정체를 알아보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이웃이 드문 집 앞 골목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과 시장 한복판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나는 평소와 달리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아 길게 늘어뜨렸다. 그 위로 모자도 깊게 눌러쓰고 스카프를 돌돌 감아 얼굴도 가리고. 내 나름대로 변장 아닌 변장을 하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이 층 복도를 서성이던 카시안과 마주쳤다.
“이 새벽부터 어디가?”
“한나네 레스토랑이요.”
“그 상태로?”
“별로예요? 애써 가린 건데…….”
카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시장에 가면…… ‘내가 그 소문의 주인공입니다, 어서 잡아가십시오.’하고 광고하는 거 아니야?”
“… 많이 티 날까요?”
“응. 누가 봐도 수상한데.”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집 금고에 돈이 수북하게 쌓인 억만장자면 뭘 해. 내 마음대로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걸. 자유가 없잖아!
“기사를 붙여줄게.”
“네?”
나는 뜨악했다.
“시장 한복판에 기사를 대동해서 나타나면……. 그게 더 위험하지 싶은데요. 이 팔찌도 있고, 괜찮지 않을까요?”
카시안은 잠시 고민했다.
“아, 그럼 이렇게 하자.”
그와 동시에 카시안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정수리부터 머리카락의 끝까지, 아이를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러자 어깨 위로 차분하게 내리 땋은 금빛 머리카락이 서서히 검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카시안의 머리색과 똑같이.
“머리가……!”
“이것도 예쁘네.”
카시안은 내 머리 위에 올려있는 모자를 벗기고 얼굴을 가린 스카프를 풀어냈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방에서 뒷정리를 마치고 나온 낸시는 내 머리카락 색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세상에! 그렇게 하시니까 두 분…… 꼭 쌍둥이 같아요. 사이좋은 오누이요!”
‘사이좋은 오누이…….’
나는 갑자기 바뀌어버린 머리색이 어색해서 머리카락 꼬랑지를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그리고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카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맞아요. 내가 좋아하는 오빠.”
그리고는 쏜살같이 저택을 빠져나왔다.
*
마차를 타고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한나에게 편지로 미리, 오늘 하루 레스토랑을 도울 수 있을까 물었더니,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고 고마워했다. 마침 주말이라 아주 바쁘다면서.
며칠 내내 했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시장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특히 저번에 집 앞을 찾았던 사람 중 시장의 푸줏간을 운영한다던 여자도 있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프란츠 레스토랑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푸줏간 앞을 지나야 했기에. 그러나 그 앞을 다 지나고 나서도,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푸줏간 주인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사람 많은 곳에 갈 때는 종종 이렇게 해야겠어.’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바삐 놀렸다.
내가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한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아라…… 머리가!”
“그냥 기분 전환 겸……. 잘 어울려요?”
“말이라고 해요? 무척 잘 어울려요. 평소보다 차분해 보이고.”
한나는 맑게 웃었다. 시장에 나도는 소문과 우리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한나 역시 내가 처한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편지로 그녀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언제든지 괜찮으니 혹시라도 급한 돈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산딸기 숲에서 괴로워하던 한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나는 괜찮다고 했다. 공작님이 힘써주신 덕에 상황이 차츰 나아지고 있다면서 오히려 내 신변을 더욱 걱정했다. 집 앞에서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괘씸해 죽겠는데, 어쩌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자신이 그렇게도 나약해 보였다면서. 편지의 끝에 한나는 덧붙였다.
- 시아라. 남들은 당신이 거머쥔 게 그저 행운이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또한 당신의 능력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나는 당신의 능력을 함부로 탐하거나 뺏고 싶지 않아요. –
그리고 드디어 한나를 마주한 오늘,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했다. 정갈하게 다림질한 앞치마를 내게 건네며 주방을 도울지 홀에서 서빙을 할지 골라보라 했다. 오랜 시간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주방에서 요리를 보조하기로 했다. 집에서 혼자 요리하기도 했고 꽤 자신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선택했는데…….
아주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빵을 구워야 했기에, 주방의 요리사들은 쉴 틈도 없이 재료를 준비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전문가들 틈에 섞여 나도 차근히 일을 거들었다. 커다란 볼에 깨뜨린 달걀만 수백 알. 내가 달걀 하나를 깰 때면, 요리사들은 두 개를 깼다. 두 개를 깨면 네 개를. 여덟 개를, 스무 개를……!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행동을 서두르다가 결국, 달걀 껍데기째 빠뜨려 다시 골라내느라 오히려 시간을 더 잡아먹고. 뜨겁게 달군 냄비를 뭣도 모르고 맨손으로 잡아 양 손가락에 미세한 화상을 입는가 하면.
본격적으로 점심시간이 되자, 밀린 주문지를 확인하랴 요리를 준비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에는 설거지를 담당하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섰다. 하지만 오늘 반나절 동안 이 주방에서 깨 먹은 접시 값만 해도 벌써 스테이크가 몇 덩어리인지.
일당을 받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도리어 내가 돈을 물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저녁이 될수록 일은 익숙해져서, 한나가 나를 내쫓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모든 뒷정리를 마치고 앞치마를 풀고. 레스토랑의 조명을 끄고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고 나서야 내 다리가 휘청거렸다.
“한나는……. 이런 일을 매일 매일 하는 거예요……?”
한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뭣 하러 이 고생을 해. 내가 시아라였으면 맨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할 텐데.”
그녀가 진심이라는 듯 맑게 웃으며, 처음치고는 아주 많이 잘했다고 나를 격려했다. 생각 있으면 다음번에도 또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로지 아줌마와 펠릭스 역시 내게 괜찮다고, 다 잘했다고 말하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과는 어땠더라. 나는 조용히 카시안에게 드림캐처를 선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알버트에게 한참 놀림 받았던 그 순간을.
그날 밤, 나는 일기장에 잔뜩 적어둔 할 일 목록에 조용히 엑스 표를 그었다.
*
다음 날 향한 곳은 아델트 종합병원이었다.
‘병원이라…….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오늘은 일찍 끝난다던 소피아는 마지막 진료 중이었다. 나는 그녀를 기다리며 복도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그때, 발을 다쳤는지 새빨간 피를 흘리는 남자가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고통으로 끙끙거리던 남자는 제 피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핏방울을 보자 과거의 잔상들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 있기를 한참, 익숙한 목소리가 내 등을 토닥였다.
“언니,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오늘도 고생 많았어.”
“그럼 우리 얼른 나갈까? 배고프다, 맛있는 거 먹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소피아의 팔짱을 꼈다. 곧장 뒤돌았는데, 우리 바로 뒤에 일전에 병원 정원에서 마주쳤던 예카틸리나가 서 있었다. 예카틸리나는 내게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소피아가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제가 제 친구 시아라에게 폐를 끼친 적이 있거든요.”
소피아의 질문을 가로채듯 대답한 것은 예카틸리나였다. 그녀의 답에 소피아가 나를 향해 의아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친구? 폐를 끼친 건 또 뭐야?”
“… 그런 거 아니야. 저번에 너 만나러 왔을 때, 병원 정원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거든. 그때 대화 몇 마디 나눴어.”
“아, 그렇구나. 그럼 얼른 가자.”
“응.”
예카틸리나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 여자가 위험하다는……. 물론 그저 직감일 뿐이었지만. 나는 예카틸리나에게 가볍게 눈인사하고 곁을 지나쳤다. 하지만, 예카틸리나는 나와 소피아 사이에 끼어들어 내 팔짱을 꼈다.
“두 분 어디 가시나 봐요? 저도 오늘 한가한데.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붕대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가,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