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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75화 (75/135)

75.

펠릭스는 저택에 매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나도 펠릭스를 날마다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인사만 겨우 나눌 뿐이었다. 수다를 떨 새도 없이 어딘가로 쏜살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랴. 그래서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나는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조만간 펠릭스와 대화를 나눌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정원으로 나갔다.

아델트 저택의 장미정원에는 새빨간 장미가 가득 만개했다. 사실 이 빨간 꽃을 볼 때마다 라튼과 그의 엄마 틸다 레트랑이 떠올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미워하기엔 이 꽃은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정원 안으로 들어가 장미 한 송이를 꺾으려 했다.

“악!”

그러나 미처 살피지 못한 가시에 찔려 엄지손가락 위로 붉은 핏방울이 송골 맺혔다.

“괜히 꺾으려고 했다가…….”

하얀 손수건으로 핏방울을 닦아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닌지라 피는 금방 멈췄지만. 죄 없는 장미를 꺾으려 하니 꽃도 놀라 움츠린 모양이다.

하려던 행동을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뜨거운 볕 아래에서 나른한 기지개를 쭉 켜던 찰나,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펠릭스를 발견했다. 아침에 잠깐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또 말도 없이 사라질까, 재빠르게 펠릭스의 뒤로 달려가 그를 불렀다.

“펠릭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제 이름이 불리자 놀란 펠릭스가 우뚝 멈춰 뒤돌았다. 그런데 어쩐지…… 예전보다 몸이 커진 느낌이랄까? 마냥 동생처럼 귀여운 이미지였는데, 갑자기 듬직한 성인 남자가 된 듯했다.

나는 의아해졌다.

“너 요새 뭐해? 키도 훨씬 커지고…. 덩치도! 얼마 전보다도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아!”

훌쩍 커버린 키를 재보려고 한 걸음 다가가자 펠릭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설마 지금 나 피한 거야?

낯선 모습에 낯선 행동까지.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펠릭스……?”

“오해하지 마. 땀 냄새나서 그런 거니까.”

“땀 냄새?”

“응. 누나가 생각해보라고 했잖아. 내가 원하는 거. 죽도록 하고 싶은 거. 그래서 그거 하는 중이야.”

“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운동 중인 거야?”

그러자 펠릭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비슷해.”

“운동이라니! 멋지다……!”

뭣도 모르고 그렉 아저씨 체육관을 불쑥 찾아갔던 때가 떠올랐다. 거기서 수련하던 학생들도 제법이었는데. 그 날렵함에 반해 나도 한때 검술을 배웠던 거니까! 나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은 나도 구경하러 가면 안 될까?”

“내일? …… 안 돼! 싫어!”

“왜!”

“내일은 싫어. 다음번에. 알겠지? 그럼 난 간다! 안녕, 누나!”

“아니, 잠깐만 기다려!”

그러나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홱 뒤돌아 가버렸다.

‘저 봐. 쟤 변했다니까!’

*

다음 날 저녁, 나는 침대 위에 누워 또 하나의 엑스 표를 일기장 위에 그려 넣었다. 이로써 세 가지.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학문 탐구. 그리고 방금 추가된 비서까지.

‘우씨……. 다 실패라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문득 자기는 다 잘했다던 카시안의 당당한 대답이 떠올랐다. 나는 볼이 빵빵해지도록 바람을 넣고 베개 위로 내뱉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 건가?’

그래도 오늘만큼은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비서 말이다.

나는 오늘 하루 카시안의 비서가 되기로 했다. 물론 카시안은 모르는 일이었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대신 알버트와는 어제 논의를 마쳤고, 카시안의 주요 업무를 미리 보고받아 머릿속에 완전히 저장해두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은 정말 정말 잘하고 싶었다.

평소와 다르게 단정한 제복을 갖춰 입고, 치렁치렁한 긴 머리는 위로 틀어 올렸다. 새벽녘부터 저택에 배달된 우편물을 품에 한 아름 안아 들고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카시안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나는 몇 차례 목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알버트. 오늘부터 마르쿠스가 저택에서 씨앗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어. 필요한 재료가 부족하지 않도록 재고 정리를 확실하게……. 응? 시아라?”

한참이나 보고서에 집중하던 카시안이 뒤늦게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네가 지금 이 시각에 왜 여길……. 게다가 그 옷차림은 또 뭐고…….”

“안녕하세요, 카시안 폰 아델트 공작님. 오늘 하루 비밀 임무를 부여받은 공작님의 비서 시아라입니다.”

“뭐? 비서?”

“마르쿠스 린데베르크 씨의 씨앗 연구가 오늘부터 시작된다고요? 잘 메모해서 알버트 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그 밖에 제가 또 알아둬야 할 사항이 있나요?”

내게 화학을 알려주던 소피아처럼, 나도 짐짓 똑 부러지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카시안이 킥킥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여기서 살짝 귓등이 달아오르는 듯했지만, 나는 잘 참아냈다.

“아, 미안. 아니지. 죄송합니다, 비서님.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저는 이렇게 아름다운 비서를 옆에 둔 기억이 없는데요.”

음……. 이건 좀 기분이 좋았다.

나는 품에 가지고 있던 편지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카시안에게 한 장씩 내밀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서신들입니다.”

“감사합니다.”

“트리탄 후작가의 안더스 후작님께서 공작님을 뵙고 싶다 하십니다. 아무래도 결계가 정상화되면서 상태를 보고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좋아요, 조만간 약속을 잡도록 하죠.”

“수도의 성당에서는 아델트 공작가에서 보낸 후원금에 대한 감사 편지와 함께 사용결과보고서가 왔고요. 알버트 님과 미리 살펴봤는데, 문제 되는 부분은 없어 보입니다.”

“네, 완벽하군요.”

그 밖에도 로아커 백작이라던가 주변 영지의 귀족들에게서 이번 결계 수정에 대한 감사편지가 줄을 이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내려놓았음에도 아직 내 손에는 한 뭉텅이의 편지봉투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이 편지들은 말이죠. 정말이지 쓸데없는……. 그냥 태우시면 될 텐데요.”

“무슨 편지길래 잔뜩 화가 나셨나요?”

“화가 나요? 제가요?”

“네. 비서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졌거든요.”

나는 손에 들린 편지들을 노려보며 앙다문 입술에 힘을 줬다.

“전- 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열렬한 구애 편지가 열세 통. 이웃 나라 공주와 혼인하자는 혼약제안서가 한 통. 아! 이 공주님들은 글쎄 자매지간이라 둘 중 누구와 결혼해도 흔쾌히 승낙하시겠다던데. 세상에, 이건 두 통이라고 쳐야겠네요.”

“…… 네?”

“저런. 벌써 모두 열다섯 통의 연애편지를 받으셨지 뭐예요? 우체부가 조금 있다가 또 온다던데. 어디, 그때 한 번 더 할까요?”

그 순간, 내 손에 쫘르륵 펼쳐져 있던 편지봉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우리 공작님은 아주 현명한 분이시라니까?”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가늘게 뜬 눈으로 카시안을 응시했다.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

“네, 비서님. 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래, ‘너무 잘난 게 죄다.’ 이 말을 마음속으로 외치며 저 편지들을 기억에서도 소멸시켰다. 어차피 알버트에게 미리 들은 바에 의하면, 카시안은 저런 것들에 관심도 없었다. 열어보지도 않고 지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 거의 다였으니까. 다만 내가 직접 보니 기분이 좀 묘했을 뿐.

“비서님, 다음 일정은 뭡니까?”

“이십 분 뒤에 기사단 업무 보고가 있을 예정입니다.”

“취소해주세요.”

“네?”

단호한 카시안의 말투에 놀란 내가 되물었다.

“그렇지만 이건 알버트 님께서 분명 중요한 일과 중 하나라고 하셨는데요……!”

“더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요.”

“중요한 일이라니…….”

“제가 데이트가 있을 예정이거든요.”

“…… 데이트라뇨?”

카시안은 뻔뻔하게 답했다.

“새로운 비서님이랑 오붓하게 아침 식사나 할까 해서요.”

“글쎄요.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요.”

“제가 듣기로는 제 비서님이 요새 자꾸 밥을 안 먹어서 살이 좀 빠지신 것 같다던데.”

“그, 그럴 리가요! 여기서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오히려 쪄, 쪘는데……!”

진심이었다. 이 저택의 요리사들은 정말이지 최고였으니까.

“찌다니요. 하나도. 그리고 제 몸의 두 배가 된대도 저는 변함이 없을 텐데요.”

“뭐가 변함이 없어요?”

“제 마음이요.”

그의 헛소리에 민망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기사단장 렌이 올 시간이었다. 나는 카시안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카시안도 나를 따라 일어섰다.

“공작님은 여기 계셔야죠.”

그러나 내 손을 잡고 일층 식당으로 가 자리에 앉혔다. 카시안이 도착하자마자 주방은 착착 아침상을 차렸고, 나는 그의 일정을 확인할 틈도 없이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아침 업무뿐 아니라 그 뒤로 있던 업무들을 모조리 다 취소해버렸다. 나랑 있겠다는 핑계를 대며. 카시안은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누가 비서고 누가 주인인지 대체.

곧이어 알버트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준비한 것들을 펼칠 새도 없이 모조리 취소당한 나는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와 있었다. 그런 나를 보던 알버트는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각하.”

“뭐가.”

“역시 저라서 그렇게 부려먹으셨던 거군요. 제가 일정 하나라도 취소하면 그렇게 쥐잡듯 잡으시던 분이! 하루 일정을 다 날려버리세요?”

카시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대- 단하십니다. 예?”

불만 가득한 알버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시아라 아가씨가 어제 얼마나 노력하셨는데……. 안 되겠습니다. 앞으로 일하는 시간에 두 분이 만나는 건 자제해야겠어요.”

알버트가 팔을 걷어붙이고 카시안과 나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예? 알버트 님,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졸지에 남자친구 얼굴까지 못 보게 생긴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씨,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각하의 등쌀에 시달리는 가신들이 어디 한 둘인가요. 애초에 이 힘든 고생을 시키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알버트, 지금 뭐 하는……!”

어서 방으로 올라가 쉬라며 내 등을 떠미는 알버트를 카시안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일정이 다 꼬여버려 잔뜩 화가 난 알버트가 제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각하. 오늘 질코 데트로프 후작 영지에 방문하셔야 합니다만.”

“응, 취소했는데.”

“네! 근데 그 후작이 보통 성질머리의 인간입니까? 자기를 무시했다면서 아침 댓바람부터 줄기차게 서신을 보내고 있다고요!”

“…….”

“제가 실수라고 했으니 당장 다녀오셔야 합니다.”

“… 알겠어.”

어깨가 축 처진 카시안의 뒷모습이 이제 물에 젖은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심히 다녀오라 인사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게, 지금 침대 위로 몸을 던져 엑스 표시를 그리고 있는 이유였다.

‘하아……. 다 망했어.’

문득 한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돈이 많으면 침대 위에서 온종일 뒹굴뒹굴하겠다던 그 말.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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