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카시안에게 시아라가 없는 아델트 저택은, 텅 빈 집이나 다름없었다. 가신들이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도 시아라가 부재중일 때는 들리지 않았다.
집무실 가죽 의자에 앉은 카시안의 얼굴에 따분한 기색이 흘렀다. 정말 같이 가고 싶었으나, 선약이 있어 수도에 함께 가지 못함이 짜증스러웠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이 열렸다.
“왔군.”
“예.”
아리안이 공작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시안이 조소하며 물었다.
“어떻게 할지 벌써 결정했나 봐?”
아리안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이것도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레트랑 가문을 박차고 나와 아델트 공작을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이미 가문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었으니. 틸다에게 다시 돌아갈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는 이미 그곳을 나왔습니다. 이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할 일이라. 일단 나에게 신뢰를 줘야지.”
“예?”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말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두루뭉술한 아델트 공작의 요구에 아리안이 되물었다.
“틸다 레트랑과 그 여자의 가문에 대한 모든 것. 그게 남들은 모르는 비밀일수록 좋겠지?”
아리안은 잠시간 망설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지금 이 질문에 답은 존재하는 걸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이곳에서 밝혀야 할 사실은, 딱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틸다 레트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흐음.”
아델트 공작의 한쪽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공작은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 그녀의 어머니를 죽였어요.”
“그녀라면?”
“시아라 에벨 영애의 어머니 안네마리 에벨을…….”
비웃음 가득했던 카시안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어둠이 드리웠다. 굳게 다물린 공작의 입술은 떨어지는 법을 몰랐다. 아리안의 꿇린 무릎 사이에 땀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분노한 공작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더욱 긴장되었다. 아리안은 더욱 납작 엎드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말릴 새도 없이 틸다 그 여자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도, 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에벨 부인을 끌어들여서……!”
시선을 두리번거리던 아리안이 자기가 가지고 왔던 가방을 끌어당겼다. 가방을 열자 차곡차곡 담긴 지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시아라 양의 어머니를 만났던 날 틸다 레트랑이 내밀었던 돈입니다.”
카시안은 시아라와의 세 번째 만남을 떠올렸다. 일일 호위기사로 임명되고, 함께 틸다 레트랑을 만나러 갔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전, 시아라는 수북한 돈을 챙겨갔다. 그 돈을 모욕을 일삼으며 돈을 갚으라 요구하던 틸다의 면전에 집어 던졌고, 그녀로부터 차용증을 빼앗아 불태웠다.
그런데 그게 전부…….
사기였다는 말이군. 애초에 돈을 빌려준 적도 없으면서.
“이 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부인을 강 아래로 밀어버렸습니다.”
“하.”
“…… 눈 깜짝할 새였어요! 저, 저는 정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레트랑 부인을 말려보았지만, 이미 사건이 벌어진 이후였습니다.”
아리안은 고개를 조아리며 호소했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는군.”
“핑계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 여자를 말리지 못하고 그저 방관한 것만으로 제게 죄를 물으신다면 그건 할 말이 없으나…….”
흘긋 고개를 들어보았다. 아델트 공작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피부를 스치는 살기에, 아리안의 팔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돈을 가져온 이유가 뭐지? 증거랍시고 들고 온 건가.”
“그게……. 주인마님, 아니. 틸다 레트랑 그 여자가 이 돈을 입막음용으로 주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돈도 돈이라 이거군. 네 알량한 자존심은 그 돈이 필요했나 봐? 버리지도 못하고 여태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아하니.”
“욕심이 나서 버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차마 쓸 수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델트 공작이 다리를 꼬고 앉아 제 앞에 무릎 꿇은 아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공작의 눈에는 멸시까지 더해졌다.
“…… 혹시 시아라 양이 이 돈을 받아 준다면 얼마든지 줄 겁니다. 이건 그녀의 돈이니까요.”
“그건 지금 나를 웃기려고 한 말인가?”
“아닙니다.”
“그녀의 돈이 아니라 어머니의 목숨 값이지.”
“…….”
“그런데, 돈을 건네면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오나?”
“…… 죄송합니다.”
“넌 이미 알고 있었어. 틸다 레트랑이 그날 에벨 부인을 죽이고 말 것이라는 걸. 그런데도 가만히 지켜만 보았겠지. 주인 스스로 한 짓이니 너는 죄가 없다 합리화하며 말이야.”
공작의 말에 아리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네가 정말 죄가 없을까?”
정곡이 찔리자 어떤 말도 반박할 수 없었다. 죄가 없냐고? 그럴 리가. 정말 죄가 없었다면 자신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린 시아라를 떠올렸을 리 없다. 집에서 청소하며 뛰노는 자식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죄책감이, 벌써 아리안은 죄를 지었다 말하고 있지 않던가. 그는 그것을 애써 무시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을 앞지르는 감정은 다른 것이었다. 아리안은 노심초사했다. 혹시라도 공작의 마음이 상해 자신과 가족들의 앞길을 책임지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정말 죄송합니다.”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안는 그런 아리안을 하찮게 응시했다.
“라튼 레트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아니요. 레트랑 가문의 누구도 모릅니다. 심지어 백작님까지도요.”
“좋아.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을 알려주지.”
아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목울대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지금 당장 레트랑 저택으로 가서 라튼 레트랑에게 이 사실을 전해.”
“예?”
“제 어미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가서 똑똑히 전해.”
“그, 그건…….”
“약속한 대로 네 가족은 외국으로 가서 살게 해주지. 너는 모르겠지만.”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아리안은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카시안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응시했다.
*
마차를 타고 황궁을 빠져나오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빨간 드레스에 그보다 더 새빨간 머리카락의 여자. 라튼 레트랑의 모친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마주해서 좋은 일이 없으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할 테니. 그러나 저 여자가 내가 로또 당첨자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던 것이 떠올랐다.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그랬겠지. 그 이후에 한동안 저택에만 갇혀 있던 것만 생각하면……! 나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마차가 틸다 레트랑의 앞을 지나칠 때,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틸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찰나에, 그녀의 입 모양이 말하고 있었다. ‘저, 저년이 왜 저기에!’ 벙 찐 그녀의 표정에 피식 웃으며 맞은편에 앉은 알버트에게 눈을 돌렸다.
“알버트 님.”
“예, 아가씨.”
“잠시만 세워주시겠어요?”
“예? 여기서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마차가 멈췄다.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틸다 레트랑을 응시했다. 마차는 생각보다 높아서, 벤치에 앉아 있는 틸다를 아래로 깔보기에 충분했다. 레트랑 부인은 표독스러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참으로 익숙한 눈빛이었다.
“저……. 잠깐 볼일 좀 보고 와도 괜찮을까요?”
알버트는 밖에 있는 여자를 흘긋 살펴보더니,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아가씨, 저 여자 기운이 이상합니다.”
“알아요.”
“그러니 위험하다는 말이에요. 안 됩니다. 저는 오늘 아가씨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요!”
“그럼…….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위험한 일이죠? 다 압니다! 안 돼요! 아시잖아요. 혹시라도 다치시면 각하께서 제 모가지를 날리실 거라는 거.”
“아이참, 괜찮대도요.”
나는 알버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엣말했다.
“사실 오늘 말이에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어쩐지. 어디서 자꾸만 향기가 난다 했더니.”
담담하게 웃어 보이자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아주 잠깐입니다. 너무 오래는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요.”
“네.”
나는 알버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잠자코 기다려달라는 내 부탁에 알버트는 마지못해 머리를 주억거렸다.
내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틸다는 나를 한껏 비웃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돈벼락을 맞았다더니, 돈으로 산 게 마차뿐만이 아닌 모양이구나.”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뒤 그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틸다 레트랑에게 물었다.
“저랑 대화 좀 나누실까요?”
여전히 벤치에 앉은 그녀가 거만하게 팔짱을 꼬았다.
“너는 좀처럼 부탁하는 법을 모르는 애구나. 하기야, 배웠을 리가 없지. 제대로 교육 한번 못 받은 몰락 귀족이니까.”
“기품이 없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듯합니다.”
“뭐야?”
“아, 죄송합니다. 암만 봐도 부인의 언행이 귀족의 것으로 들리지는 않아서요. 참, 제 말이 부탁으로 들리셨나요? 착각도 유분수지.”
틸다는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뒤틀며 나를 노려보았다.
“쯧, 천박하긴.”
“혹시……. 제가 일전에 돈다발을 던졌던 행동을 사과드린다면, 이제 그만하실 거예요?”
“물론이지. 대귀족의 넓은 아량을 베풀어 너를 이해해주지.”
“아아…….”
“다만 내 앞에 무릎 꿇으렴.”
하도 얼토당토않은 말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꿈도 크셔라.”
“뭐?”
“꿈 깨세요. 라튼 어머니.”
“이게 뚫린 입이라고 지금!”
조롱 섞인 웃음에 틸다가 벤치에서 일어나 펄쩍 뛰었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 여전한 독기와 노기가 일렁거렸다. 나는 웃음을 뚝 멈추고 틸다를 향해 쏘아붙였다.
“마지막으로 저랑 만났던 찻집 기억하시죠? 거기서 뵙도록 하죠.”
“좋아. 네가 거기서 어떤 꼴을 당하든 내 탓을 하지 말렴.”
“제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부디 걸음을 서둘러주시겠어요?”
뻐근하지도 않은지, 그녀는 쫙 째져 뱀 같은 눈을 연신 부라렸다. 그런 그녀를 나는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마차에 올라탈 준비를 했다.
“아, 저는 마차로 가볼게요. 보시다시피, 귀한 몸이라. 그럼 이만.”
마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창문 옆으로 틸다가 씩씩거리는 것이 보였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목에 차고 있던 목걸이를 매만졌다. 수호천사가 지켜주는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