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치안대에 가려던 라튼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아리안이 지껄이는 헛소리를 듣고 있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두통이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기사 루카스는 여전히 틸다의 침실 앞에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엄마는 좀 어떠셔.”
“…… 아직 눈을 뜨지 않으셔서 방금 막 의원을 부른 참입니다.”
“이 멍청한 자식들. 아까 불렀어야지, 이제야 불렀단 말이야? 누굴 죽이려고 그래?”
“그게…… 레트랑 백작님께서 가만히 경과를 지켜보라고 하셔서…….”
“아버지가?”
“어디 가서 귀부인이 맞고 돌아다녔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가문의 명예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하신 탓에…….”
라튼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상황에서도 명예 타령이라니. 제정신이면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나? 가족이 맞기는 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버지 어디 계셔.”
“백작님 방에 계십니다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문을 걸어 잠그셨습니다.”
라튼은 헛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의 침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단단히 잠긴 문고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쾅쾅 두드려도 보았으나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개판이네. 집안 꼴이 개판이야.’
저 안에 처박혀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겨우 삼켜내며 엄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간호 중인 하녀들에게 나가 보라고 전하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눈을 감고 차분히 누워 있는 엄마를 보자 마음 한구석이 시리듯 아팠다.
엄마가 말을 거칠게 하는 편이라고는 해도,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악한 사람은 아닌데. 그녀의 진심을 몰라주는 이들이 야속했다.
라튼은 옆에 놓인 물수건으로 틸다의 이마를 닦아냈다. 닦고 또 닦고. 계속해서 그 행동을 반복했다. 가만히 있으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만 같았다.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아리안이 남기고 간 말 때문이랴.
당연히 아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가문을 박차고 나간 배신자가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저 혼자 망하려니 억울했나 보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제 엄마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잡는걸. 그런 사람이 사람을 죽여? 웃기지도 않아.
그러나 드문드문 드는 막연한 불안함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진짜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럴 리 없겠지만, 시아라의 어머니를 죽인 게 엄마라면……. 그러면 나는…….
연신 틸다의 얼굴을 닦아내던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면…….’
소피아 엘링턴과 맞선을 봤던 당일. 그러니까, 라튼이 시아라에게 뺨을 맞고 정말로 헤어지게 되었던 그 날 아침. 라튼 역시 그녀의 어머니가 그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도에 소문이 쫙 퍼졌으니 자신의 귀에 들어온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라튼이 놀란 것은 엄마, 틸다의 태도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시아라에게 왜 이런 일까지 생겼는지……. 라튼는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틸다에게 그 비참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제 엄마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일찍 발견했잖아?”]
[“…… 네? 엄마, 지금 뭐라고…….”]
틸다는 혀를 쯧 내두르며 손을 휘휘 저었다.
[“머리 아프니까 이만 나가렴.”]
[“저 오늘 선보러 안 갈래요. 그 애가 많이 슬퍼하고 있을 거예요.”]
[“그 계집애까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니?”]
그 말에 라튼이 펄쩍 뛰었다.
[“……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이제 하다못해 그 천박한 모녀 걱정까지 하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당연히 사람이 죽었는데……!”]
[“라튼. 그 애 어미가 우리 가문의 돈을 빌려 가놓고는, 갚지도 않고 죽어버렸단다.”]
[“엄마!”]
[“그런데도 너는 어째서 돈을 돌려받지 못한 이 어미가 아닌 그 모녀를 걱정하는 거니? 너에게 우리 가문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냐?”]
[“…… 가문도 중요하지만…… 시아라가…….”]
한심한 눈으로 제 아들을 응시하던 틸다가 만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네가 오늘 계획대로 선을 보고, 그 계집애를 설득해서 이 엄마 앞에 데리고 오거라. 그러면 그 어미가 돈을 빌린 것은 없던 일로 생각해보마.”]
물론 소피아와 선을 보던 와중에 시아라에게 걸려 끝이 나버렸지만…….
어쨌건, 엄마의 반응은 좀처럼 평범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람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이 태연했고, 오히려 슬퍼하는 아들을 타박했으니. 그날의 대화를 상기하는 라튼의 팔에 털이 곤두섰다. 그게 만약……, 엄마가 진짜로 에벨 부인을 죽여서 그런 거라면…….
라튼이 들고 있던 물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겨우 천 쪼가리 하나 떨어지며 난 소리가 무게추처럼 쾅, 하고 무겁게 울렸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엄마가 살인자라고? 그것도……. 시아라의 엄마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휘몰아침과 동시에 아리안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델트 공작이 이 사실을 안다.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아리안의 말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끝까지 엄마 편에 서서 엄마를 지키거나, 아니면 시아라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죽을 때까지 사죄하거나. 라튼은 둘 중 하나를 무조건 골라야만 했다.
속이 타들어 갔다. 살인자의 자식이 황실 기사로서 일하다니. 이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은 순식간 일터. 게다가 어느 쪽을 골라도 라튼 그 자신에게 득이 되는 쪽은 없다는 것이 명확하지 않던가. 아델트 공작은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다. 아니지, 어디 제 목숨 하나가 문제인가? 레트랑 가문 전체를 박살낼지도 모르지. 소리 소문도 없이 몰살당해 족보에 이름 하나 남지 않을지도……!
끔찍한 결말을 예상하자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이 막혀왔다. 온몸이 덜덜 떨려 도무지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침대를 내려다보자 조용히 눈 감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공포스러웠다. 안 돼. 아니어야 해. 엄마가 그랬을 리 없어. 제발 누가 좀 아니라고…… 범인이 아니라고 해줘, 제발……!
그러나 싹 튼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엄마를 향한 신뢰는 원망과 증오로 변모했다. 손바닥 뒤집듯 아주 빠르게.
‘왜 대체 왜. 엄마가 뭔데 나를 이렇게 만들어?’
내 인생을 자꾸만 망가뜨리는 이유가 뭐야. 도대체 왜…….
라튼은 기절한 엄마를 흔들어 깨우며 소리쳤다. 그러나 굳게 다물린 엄마의 입술 사이로 어떠한 변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라튼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생각을 마칠 겨를도 없이 곧장 뒤돌아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리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야만 했다. 아델트 공작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했다.
라튼은 달음박질로 아리안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전에도 누구 하나 살지 않았던 것처럼.
*
나는 아델트 저택 2층에 있는 손님방을 쓰고 있었다. 카시안이 자신의 침실 옆으로 방을 옮기자고 했지만, 어차피 소문이 가라앉으면 내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미루고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손님방이라고 딱히 불편한 것도 없고, 카시안과 결혼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손님이 맞지 않던가.
서로의 옆방을 쓰지 않더라도 카시안과 같은 집에 함께 있고, 매일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덕분에 카시안의 2층 출입이 잦아져 같은 층을 쓰는 알버트의 볼멘소리는 더욱 늘었지만.
카시안은 지금도 내 방으로 와서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를 물었다.
“수도에서 레트랑 부인을 만났어요.”
생글생글 웃던 카시안의 얼굴에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내 몸을 살피며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는 카시안에게 목걸이를 풀어서 보여주었다.
“일이 있기는요. 마법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걸어놓으면 어떻게 해요. 진짜 엄청 놀랐잖아요.”
손바닥 위에 놓인 파란 보석이 언제 그렇게 날뛰었냐는 듯 새초롬히 빛났다.
“마법이 발현했다는 건…… 그 여자가 너를 건드렸다는 소리고?”
“건드리긴 무슨. 털끝만큼도 안 닿았어요. 갑자기 목걸이에서 뭔가 튀어나와서 사람을 죽일 기세로 내팽개치던데.”
“알버트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조금 화가 난 말투였다.
“저도 알버트 님도 공작님을 믿었으니까요. 뭔가 있겠구나, 하면서. 게다가 용기도 주시고 위로도 해주셨는걸요.”
“…… 역시 나도 같이 갔었어야 했어. 어쩐지 자꾸 신경 쓰이더라니까.”
“아무 일도 없이 이렇게 무사하잖아요. 공작님이 주신 선물 덕분에.”
“시아라……. 틸다 레트랑 그 여자가 말이야.”
“네.”
한참을 뜸들이던 카시안이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 아니야, 못들은 걸로 해. 근데 왜 또 공작님이야?”
갑작스레 화제를 돌리는 그를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공작보다 네 오빠가 더 좋으니까.”
“뭐라고 부르던 다 똑같은 거 같은데. 이것 봐요.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딱 하나잖아요.”
카시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달라. 카시안- 하고 나긋이 불러주는 건 더 좋고.”
피식, 하고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그의 소원대로 ‘카시안-.’ 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려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주무세요?”
“낸시? 아니, 아직. 무슨 일이야?”
“저기…… 아가씨를 찾아온 손님이 계세요.”
“응? 손님?”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노란 초승달이 어슴푸레 창을 비출 뿐이었다.
“이 밤에? 공작님도 아니고 나를?”
“네. 정문에서 경비서는 보초들이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오라고 거듭 말했지만 돌아가지 않고 막무가내라……. 죽어도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답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시안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혹시 펠릭스가 급한 일로 나를 찾아왔나? 아니면 소피아? 유모? 그게 아니면 누가 이 저택으로 나를 찾아와?
“찾아오신 분 성함이 …… 라고…….”
“…… 뭐?”
나는 목걸이를 화장대 보석함에 잘 넣어두고 카시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정문이 어수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