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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96화 (96/135)

96.

“찾아오신 분 성함이……. 에카틸리나라고……. 카티아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했어요.”

“…… 뭐?”

나는 낸시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예카틸리나가 여기를 왜 와? 그것도 이 오밤중에. 내가 여기 있는 줄은 또 어떻게 알고?

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문득, 아델트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다녔던 일이나 예카틸리나를 마주치며 나도 모르게 했던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가 얼마든지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아찔했다. 더 조심 할걸……. 아직 정체도 제대로 파악 안 된 사람이 이곳을 찾아오게 만들다니…….

안일했던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카시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정문은 소란스러웠다. 낸시의 말대로 예카틸리나는 굳게 닫힌 정문 너머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귀를 틀어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발……. 제발 시아라 좀 보게 해주세요. 네? 저 진짜 시아라랑 친구 맞다니까요?”

“누차 말했지만,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왜요? 이 저택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예?”

“아니잖아요. 지금은 별다른 일도 없으면서! 그냥 시아라한테 물어봐 주세요. 저를 아는지. 그것만큼 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러면 답이 나오잖아요.”

예카테리나는 정문에선 보초 두어 명과 줄기차게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이미 지친 기색이었다. 낸시에게 듣기로는 벌써 한 시간 넘게 저러고 있었다고 하던데……. 끈질기고 집착이 강한 예카틸리나의 성격을 경험해 본 나로서는 병사들의 심정이 퍽 이해가 되었다.

카시안이 근처에 서 있던 또 다른 병사에게 물었다.

“내 병사들이 난데없이 쳐들어온 불청객 하나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던가?”

병사는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그런데 저 숙녀 분이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탓에…….”

“손대지 말라 하면 가문을 빼앗으러 온 첩자에게도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가문을 몽땅 넘겨줄 생각인가 봐?”

“……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숙녀 분 온몸이 짓물러서 함부로 손을 대기가 좀…….”

“뭐?”

“제발……. 다시 한번 시아라를……. 시아라……? 시아라! 역시 나를 보러 온 거죠. 그렇죠? 지금 당신의 친구가 너무 걱정되어서 온 거잖아!”

병사가 미처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나를 발견한 예카틸리나가 꽥꽥 소리쳤다. 정문에 있던 가신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쏠렸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스르륵 벌어지는 입을 양손으로 꾹 막아야만 했다.

‘남의 집 앞에서 지금 이게 무슨……!’

내가 당첨자라는 소문을 듣고 우르르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사람을 피해 도망 다녀도 결국 다 찾아내는구나. 이제 도망갈 곳도 없고, 여기를 떠나고 싶지도 않은데.

나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으로 예카틸리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 카티야. 도대체 여긴 무슨 일이에요?”

“시아라. 내, 내 몸이! 몸이 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아요! 너무 아파서……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요.”

“이 밤중에 병원도 문을 닫았고, 그나마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돈을 감당할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해요!”

예카틸레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을 호소했다. 그녀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닌지, 얇은 민소매 원피스 사이로 드러난 팔다리의 피부가 울긋불긋했다. 박박 긁었는지 군데군데에서는 붉은 생채기가 선연했다.

“어디 하나 의지할 곳이 없었단 말이에요! 저, 저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네? 부탁해요. 너무 고통스럽단 말이에요!”

“저는 의사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 밤중에도 의사를 부를 능력 정도는 있겠죠! 당신은 다 가졌으니까!”

예카틸리나가 내게 쏘아붙였다. 나는 난처한 기색으로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카시안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잡고 있던 내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일단 손님 방으로 데리고 가. 시끄럽게 여기다 둘 수는 없으니. 이러다 온 마을 사람들이 저 여자가 아픈 걸 다 알겠어.”

“예. 아가씨 친구 분이 맞다면 아가씨 옆방으로 모실까요?”

“아니. 본채 말고 별채로 데려가.”

“예, 알겠습니다.”

카시안의 명령에, 뒤따라 나온 하녀 두 명이 예카틸리나를 부축해 별채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예카틸리나는 하녀들에게 제 몸에 손대지 말라며 성질을 부려댔다. 소란의 주체가 떠난 곳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 어쩌죠?”

“의원을 부를게.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야?”

“예카틸리나라고 하는데……. 사실 저도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알게 된 거라 잘 몰라요.”

“왜 얼굴을 붕대로 다 가리고 있는 거지?”

“어릴 적에 사고로 화상을 심하게 입었다고 해요.”

카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한참이나 전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저렇게 짓무를 수가 있나?”

“글쎄요. 본인 말로는 형편이 어려워 제때 치료를 못 받았다고 하던걸요.”

그러나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뭔가 익숙한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목소리도 그렇고 말하는 투도……. 꼭 예전에 들어 본 듯하단 말이지.”

“아! 저번에 집 앞에 소문 듣고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예카틸라나도 거기 있었어요. 그때 본 거 아닐까요?”

카시안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면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잖아.”

나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예카틸리나는 도무지 파악이 힘든 사람이었으므로.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한숨만 푹푹 내쉬며 멍하게 서 있는 나를 카시안이 잡아끌었다.

“가자. 방에 데려다줄게.”

“네? 예카틸리나는 어쩌고요.”

“너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내가 의원이랑 이야기해 볼 게.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

“…… 저택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어쩌죠. 괜히 저 때문에 이 밤중에 이런 고생을 하고…….”

“그게 그렇게 걱정이야?”

“네…….”

카시안이 옅게 미소지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남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주니 더욱 미안한 감정이 샘솟아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카시안이 허리를 굽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 눈을 마주하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시아라.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

“너를 찾아내지 못한 세월의 죄를 갚으려면, 나는 너를 사랑해 주는 것만으로도 모자라니까.”

“…… 카시안.”

“너는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돼.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마음껏 만나고, 맛있는 것만 먹고. 남들은 상상도 못 해볼 만큼 네가 가진 돈도 마음껏 써보고. 그렇게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런 고민도 없이.”

“…….”

“그러다가 가끔 인생이 지루해지고 힘들면 나한테 기대고.”

카시안이 내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사실 지루해질 리가 없지.”

“그게 무슨…….”

“나랑 있는데 어떻게 인생이 지루하고 힘들 수가 있겠어?”

그의 손에 잡힌 내 양 볼이 위로 쭉 당겨졌다. 그러자 입꼬리도 함께 자연스레 하늘을 향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웃어. 알겠지?”

내 이마에 살짝 입 맞춘 카시안이 생긋 미소 지었다. 방에 도착한 뒤에도 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 그리고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곤히 자라며 내 어깨까지 차분히 두드려줬다. 아이를 재우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카시안은 내가 잠들었나 확인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가고 나서도 수차례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예카틸리나의 표정이 정말로 고통스러워 보이기는 했으나……. 카시안이 했던 의심들이 정말 합리적이라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가 정말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카시안은 예카틸리나를 데려간 별채로 향했다. 아델트의 공작으로서, 저택에 찾아온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러다 저 여자가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더욱 귀찮아질 테니. 하여, 어쩔 수 없이 저택에 들이기는 했으나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앞서 시아라에게 말했듯 여전히 아물지 않은 흉터 자국이며, 묘한 기시감이며. 게다가 여자가 보초병들에게 그러지 않았던가. ‘이 저택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이 저택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겠지. ‘일’이라 하면 무도회 이후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말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저 여자는 무도회에 참석했던 여자일까? 초대했던 귀족 손님 중 저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니 혹여 있었다고 치자. 그래도 어디 저 여자의 말투가 귀족의 것이던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던걸.

그러나 손님 방에 도착할 때까지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태가 어떤가.”

이미 진료를 마친듯한 의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독한 수면제를 먹고 막 잠이 든 참입니다.”

카시안이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녀 분 온몸에 화상을 입으셨나 봅니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여기저기 짓무른 듯해요.”

“이제 괜찮다는 말이야?”

“연고를 발랐으니 차도가 있을 겁니다. 다만…….”

의원이 소리를 낮췄다.

“얼굴도 마찬가지일 텐데. 절대 붕대를 풀지 못하게 하더라고요. 엄청 고통스러울 텐데, 얼굴은 그냥 두랍니다. 너무 징그러워서 남들 앞에 보이면 혀를 깨물어 죽겠다나.”

카시안이 피식거리며 조소했다.

“아파 죽겠다고 찾아왔으면서 따질 정신이 있나 보군. 아직 살만한 모양이야.”

“어떻게……. 그냥 억지로라도 치료할까요?”

“됐어. 본인이 싫다는데 우리가 왜. 고생했으니 가 봐.”

의원이 방을 나가자 뒤이어 소식을 들은 마르쿠스가 찾아왔다.

“여기 다친 사람이 있다고 해서요.”

“…… 너는 봉사 활동하러 왔어?”

“네? 그게 아니라 아가씨 친구 분이 다쳤다고 들어서…….”

방으로 들어와 예카틸리나의 상태를 확인한 마르크스가 기겁했다.

“히이익! 공작님도 이제 어느 정도 치료 방법을 쓰실 수 있으시면서 저런 숙녀 분을 그냥 두신 건가요?”

마르쿠스의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내 손으로 고칠 일 없어.”

“그럼 제 마법으로 하겠습니다.”

“아니. 네 손을 써서도 안 되고.”

“왜요? 혹시…….”

“응.”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당인 것 같아.”

‘히이이익!’ 마르쿠스가 또 한 번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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