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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98화 (98/135)

98.

“시, 시아라!”

우당탕 소리와 함께 예카틸리나가 내 앞으로 미끄러지듯 넘어졌다. 유난스러운 등장에 응접실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 하러 이렇게 뛰어왔어요. 넘어졌잖아요.”

“시아라, 나를 살려준 게 당신 맞죠?”

“내가 치료를 한 게 아니에요. 그보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아……. 어제 하도 소리를 질러 대서 그런지 목이 좀…….”

예카틸리나가 잔기침을 콜록거렸다. 응접실을 가득 메운 것은 사막의 모래 먼지처럼 건조하고 퍼석한 소리였다. 평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는 아주 달랐다. 그러나 자신의 목 상태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내 앞에 그대로 엎드려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정말 날 살려준 거예요?”

“그만 울어요. 그러다가 또 덧나겠어. 뭘 그렇게 맨날 울어요?”

“그렇지만……. 저 같은 아이를 구해준 게 시아라가 처음이라…….”

“내가 구해준 게 아니래도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공작님이 하셨대도 시아라가 부탁한 거잖아요. 다 알아요.”

울먹거리는 예카틸리나의 손가락이 내 구두코에 닿으려 했다. 그래, 차라리 건드려. 내게 손대서 이 목걸이가 반응하면, 혹시라도 네가 품은 악의가 드러날 테니. 날 건드려, 어서! 나는 무심결에 목걸이를 손에 꽉 쥐며, 은근슬쩍 그녀의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상처투성이인 그 손이 구두 끝에 닿으려던 찰나, 예카틸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피했다.

“죄송해요! 구두가 너무 귀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과장된 동작에 못내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기회였는데! 두어 번 목을 가다듬고 예카틸리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소파에 앉아요.”

“제가 감히 그래도 될까요?”

“그런 소리 말고 제발 그냥 좀 앉아요.”

훌쩍거리던 예카틸리나가 드디어 맞은편 소파에 자리했다. 딱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녀는 쉬지 않고 계속 쫑알거렸다. 그것도 울먹이며 말하는 통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미안해요. 고마워요. 내 친구 시아라.’따위가 전부였다. 나는 자조 섞인 한숨을 속으로 집어삼켰다.

곧이어 낸시가 다과를 내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예카틸리나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심지어 낸시의 눈치를 살살 보는 것도 같았다.

“아가씨는 차를 드릴까요?”

“응. 자스민차로 부탁해.”

“네, 손님은요?”

낸시의 시선이 사뭇 뾰족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예카틸리나는 고개를 돌려 못 들은 척했다.

“저기 손님. 차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한참을 침묵하던 여인이 아주 무겁게 답했다.

“차.”

여전히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어떤 차요? 녹차, 자스민차, 아, 민트차도 있어요. 정확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직업 정신 투철하게 묻는 낸시를 예카틸리나가 작게 흘겨보았다.

“같은 거로.”

내 앞에 놓인 잔을 턱 짓 했다.

“네. 그런데 목이 좀 안 좋으신가 봐요. 그럴 땐 민트차도 괜찮은데.”

이제 아예 대놓고 낸시를 째려보았다.

“싫으시구나. 여기 아가씨랑 같은 차요.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은 낸시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때마침 복도를 지나던 하녀장 린다가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목격했다. 린다는 낸시에게 달려와 우악스럽게 팔을 잡아끌었다.

“얘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두 분 부담스럽게 하지 말고 어서 나와!”

낸시는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험상궂은 눈으로 예카틸리나를 주시했다. 응접실에 둘만 남자 맞은편 여인의 입이 다시 열렸다.

“…… 무서워요!”

“뭐가요?”

“왜 저를 저렇게 사납게 노려보는 거죠? 내가 뭐 잘못했어요?”

“그랬나요? 나는 하나도 못 느꼈는데.”

“지금 저 하녀 편을 드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그렇다고 말한 건데.”

“시아라……. 나 서운해요……!”

나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보다, 내가 이 저택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누가 몰라요. 그렇게 티 내놓고 다니고선 아무도 모르길 바랐어요?”

“…… 하지만 카티아가 여기 찾아오는 걸 나는 허락한 적이 없잖아요.”

“그게 아파서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제일 먼저 할 소리예요?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어제는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충분히 알았어요.”

흥분해 언성을 높이는 상대에게 침착히 말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렇지만 다음은 없어요.”

“왜요? 나 같은 거 치료해 주기도 아까워서?”

“여긴 내 집이 아니잖아요. 혹시 치료비가 필요한 거라면, 차라리 돈을 빌려줄게요. 그러니 앞으로 이렇게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 맞은편 여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내가……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런다는 거예요?”

“카티아.”

“아무리 사람 자존심을 짓밟아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모욕을 할 수 있어요?”

예카틸리나가 화를 내며 일어섰다. 이를 악물고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나는 설핏 죄책감마저 들었다.

“시아라는…… 나를 친구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거야.”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난 그저…….”

갑자기 그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 버림받을 줄 알았으면 진작 죽어버릴걸!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할 거 살기는 왜 살아!”

예카틸리나는 소파 위를 나뒹굴며 자기 허리아래를 마구 때렸다. 나는 당황하여 그녀를 말리려 다가갔다.

“건들지 마!”

그러나 예카틸리나가 매섭게 소리 지르는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거니 서 있어만 했다.

“그렇게 동정할 거면 내 몸에 손대지 마!”

“동정이 아니라……!”

“웃기지 마. 애초에 이런 얼굴로 살아가는 게 말이 안 됐지. 너도 내가 불쌍하고 징그럽지? 혐오스럽지? 그래서 날 무시하는 거잖아!”

그녀는 손톱과 발톱을 뾰족 세운 짐승처럼 내게 쏘아붙였다. 점점 과격해지는 말과 행동에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너도 이렇게 만들어줄까? 내가 못할 것 같아?”

“…… 하, 하나도 안 징그러워요. 얼굴 때문에 멀리한 게 아니에요.”

핏발 선 매서운 눈이 나를 향했다.

“그럼?”

“혐오는커녕, 부담스러운 거라고요!”

“내가 왜 부담스러운데?”

예카틸리나는 정말 몰라 괴롭다는 듯 고개를 뒤흔들었다.

“생각해 봐요. 모르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집 앞에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 한 것도 화가 나는데. 거기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계속 친한 척하면서 접근했잖아요.”

“…….”

“그게 편할 리 있겠어요? 저는 정말 불편했다고요!”

그러자 예카틸리나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답했다.

“분명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땐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럼 대놓고 싫다고 해요?”

“그랬으면 이렇게 기대 안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다 내 잘못이라는 거잖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맞은편 여인은 조금씩 온순해졌으나, 그럴수록 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돈 주겠다 했던 건 정말 미안해요.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기분 풀어요.”

한참이나 자해하며 눈물을 쏟아내던 그녀가 소파 위에 쓰러졌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붕대 풀어요. 눈물 때문에 얼굴도 더 덧나겠네.”

“신경 쓰지 말아요. 어차피 관심도 없으면서 재수 없게 착한 척은.”

밖에서 내게 친한 척할 때보다 사나운 말투였지만, 차라리 저게 나았다. 그것이 가식 없는 본 모습일 테니.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응접실 문이 닫히고 드디어 나 혼자가 되었다. 하늘이 노래지는 답답한 심정으로, 이번에는 내가 소파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

지친 기색의 시아라와 달리 복도를 거니는 예카틸리나의 표정이 여유롭게 변했다.

응접실 밖에는 처음 보는 하녀 하나가 있었다. 자기가 모르는 아이인 것으로 보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하급 하녀인 것이 분명했다.

“거기 너, 이름이 뭐야?”

계단 난간을 걸레질하던 하녀가 갑작스레 말을 건넨 손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리, 리엔나입니다.”

“그래, 리엔나. 날 화장실로 안내해.”

“네? 네!”

‘하급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서 좋다니까?’

어리숙하게 행동하는 리엔나를 보며 예카틸리나가 조소했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기나긴 복도를 거닐면서 자신이 아델트의 하녀였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가 좋았던가? 물론 좋았지. 엘리나 트리탄에게서 떨어질 콩고물을 받아먹을 생각에 행복했었으니. 물론 다 망해버렸지만.

그리도 매몰차게 버려졌던 아델트에 다시 돌아왔다. 자신의 행복을 망친 장본인의 저택에, 그 장본인이 사랑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있다.

예카틸리나는 고민했다. 저년 얼굴에도 독약을 쏟아 부어서 나처럼 만들까? 아니면 엘리나에게 칼을 꽂았듯 단칼에 해치워버릴까? 이 저택 어딘가에 숨겨진 지하 감옥에서, 나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잖아.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행복해하고 있어?

예카틸리나는 화려한 황금 마차에 올라타 있던 시아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복하다는 듯 아델트 공작의 손을 잡고 있던 모습이라던가, 제 앞에서 돈을 주겠다며 당당히 말하던 표정이라던가.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래 놓고 나를 동정해? 네가 감히?’

부아가 치밀었다. 예카틸리나는 주변에 있던 아무 물건이나 집어 들고 바닥으로 내던졌다. 금색 조형물이 와장창 깨지며 바닥에 파편을 흩뿌렸다. 뒤따르던 하녀 리엔나가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마주친 눈이 기괴하게 웃고 있었기에.

그다음 들려온 말은 더욱더 끔찍했다.

“어머나,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뻔뻔한 예카틸리나의 말투에, 리엔나의 팔다리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물건을 내던진 범인이 조롱하듯 물었다.

“실수한 거니?”

“…… 네, 네?”

“네가 실수했잖아.”

“제, 제가 언제…….”

잿빛이 된 하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공작님께는 특별히 비밀로 해줄게.”

“이건 제가 그런 게 아니라 소, 손님께서……!”

예카틸리나는 방긋 웃으며 하녀의 따귀를 찰싹 내리쳤다. 리엔나가 제 뺨을 붙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게 비밀로 해준다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 저택에 있는 모든 것을 괴롭히고 뒤집어놓아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열심히 치워. 알겠지?”

예카틸리나가 뒷짐을 지고 우아하게 걸었다. 나긋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집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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