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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99화 (99/135)

99.

저택 밖으로 끌려 나온 낸시가 팔을 놓아 달라 외쳤다.

“하녀장 님! 아파요!”

“낸시, 너 자꾸 왜 이러느냐! 주인님이랑 아가씨가 오냐오냐한다고 다 네 친구인 줄 아느냐!”

“아이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런 거란 말이에요.”

“시끄러워! 어서 가서 일 하거라!”

린다의 불호령에 낸시는 툴툴거리며 저택 별채로 들어갔다. 동료 하녀들과 함께 바닥을 쓸고 닦고. 세탁된 침구류를 빳빳이 다림질까지 마친 이후에야 겨우 허리 한 번을 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고생하는 ‘척’만 했다. 일부러 더욱 끙끙거리며 일에 몰두하는 척했지만, 낸시는 언제라도 더 중요한 것을 알아보러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달리기 준비 자세를 취하듯 들썩들썩하던 엉덩이가 하녀장이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떨어졌다. 어찌나 감시가 삼엄하던지! 이러다가 늦겠어!

곧장 이 층에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처음 예카틸리나가 치료받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낸시는 확신했다. 예카틸리나에게 무언가 의심쩍은 것이 있다고. 다과를 내놓으러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홱 돌리던 그 여자! 자신의 도발에 짜증스레 눈을 치켜뜨고, 결국에는 당황한 듯 멈칫하던 바로 그 여자! 간밤의 추측이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반쯤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 여자가 아나스타샤일지도 몰라! 기대와 달리 목소리는 맛이 가서 확인 불가능했지만, 수차례 아나스타샤와 싸워왔던 낸시는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그늘진 파란 눈동자. 그 눈이 자신을 향해 늘 분노를 내뿜어댔었으니.

그러니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이 배신자! 용케 살아있었구나?’하고 한 방 먹여줄 바로 그런 증거가!

낸시는 서둘러 방을 뒤졌다. 그러나 몸뚱어리 하나 달랑 들고 온 불청객에게 이렇다 할 짐이 있을 리 없었다. 가방도, 그 흔한 주머니도 하나 없었다.

‘진짜 치료받겠다고 맨몸으로 온 거야?’

염치도 없지!

혀를 끌끌 차며 눈에 보이는 곳을 전부 뒤졌다. 마지막으로 베갯잇 안에 손을 넣었을 때, 드디어 질량이 있는 무언가가 손끝에 걸렸다.

“!”

살짝 잡아당겨 꺼내자 보라색 사파이어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도 크고 반짝반짝 빛나는 게…….

‘이거 꽤 비싸 보이는데?’

아나스타샤가 이런 걸 하고 다녔던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척 보기에도 일개 하녀가 가지고 있을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예카틸리나랍시고 돌아다니는 처지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이었다. …… 설마 훔친 건가?

낸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녀의 정체를 추궁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나스타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 애는 비밀이 하도 많아 좀처럼 자기 속을 털어놓는 법이 없었고, 그나마 동료들에게 으스댔던 것도 전부 거짓이었다. 이편, 저편 붙어먹으며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바꿔대는 탓에,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거짓이 아닌 말을 고르는 게 훨씬 어려웠다.

‘정보를 얻으려면…….’

벽시계를 살펴보니 아직 점심 전이었다. 곧 있으면 오전 업무를 마친 하녀장이 다시 별채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 그건 좀 위험한데.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낸시는 새끼발로 살금살금 발을 놀려 서류를 모아놓은 창고 앞에 도착했다. 하녀장의 침실 바로 옆에 자리한 이 창고는 늘 잠겨있어서, 린다의 방에서 열쇠를 꺼내다 열어야만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눈 딱 감고 린다 방으로 들어갔다. 대의를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열쇠를 찾아 그 옆 창고문을 열었다.

책꽂이에 수많은 서류가 꽂혀있어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마침내 낸시의 손에, ‘아나스타샤’라고 적힌 서류 한 장이 들려있었다. 이력서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았으나 뻔한 내용이었다. 본인이 엘리트 하녀라며 우쭐거렸던 대로, 나름 전문학교도 다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성적도 우수했다. 장학금은 물론이고.

쳇, 낸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음 장을 들춰보았다. 그런데, 바로 앞 장의 서류와 사뭇 달랐다. 누군가가 다시 조사한 듯 다른 필체의 만년필로 이것저것 휘갈겨져 있었다. 학교 이야기는 물론 전부 거짓이었다. 남작 가문에서 일하다 주인을 배신해 쫓겨나고, 그 뒤에 엘리나 트리탄 밑에서 일하고. 여기 온 것도……. 트리탄 영애의 추천이었네? 그 결말은 또다시 배신이었고.

‘인생이 배신 그 자체였네.’

거짓과 배신, 타인을 깎아내리고 조롱하던 아나스타샤. 으, 끔찍해라.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에 양팔을 손으로 재빠르게 쓸어내렸다.

아나스타샤는 왜 그렇게 엘리나 트리탄을 쫓아다닌 걸까? 트리탄 영애가 돈을 준 건가? 혹시 이 보석도? 왜? 아나스타샤가 뭐라고?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기란 어려웠다. 낸시는 입술을 쭉 내밀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어떻게 죽은 거지? 한바탕 난리가 났던 통에 그들의 죽음을 모르는 이 없었으나,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대다수는 아델트 공작이 두 여자를 모두 처단했다고 말했다.

진짜 공작님이 죽였다면……. 설마 복수하려고 찾아온 걸까?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의식의 흐름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즈음,

“낸시! 너 정말……!”

“하, 하녀장 님. 이건 정말로 오, 오해에요!”

린다가 등장했다.

“너 이제 도둑질까지 하러 온 것이냐!”

“그, 그게 아니라…….”

낸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손님이 아무래도 아나……, 아나스타샤 같아서요.”

“뭐야?”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는지 린다의 호통이 더욱 커졌다. 낸시는 한쪽 눈을 찔끔 뜬 채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내보였다.

“이, 이게 그 손님 방에서 나왔어요.”

하녀장이 눈을 부릅뜨며 안경을 추어올렸다.

“도둑질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저는 단지 증거를 잡으려고…….”

린다는 그제야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린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왜요? 뭘 좀 아세요? 정말 아나스타샤 거예요?”

“…… 도둑질한 게 아니라면 어서 제자리에 가져다 놓거라. 곧 그녀가 돌아올 테니.”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낸시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다시 손님방으로 가 목걸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두고 뒤돌았다. 예카틸리나가 방으로 돌아온 것도 딱 그즈음이었다.

“뭐야?”

걸쭉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낸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방긋 웃으며 뒤돌았다.

“오셨어요? 침구 정리를 좀 하느라.”

예카틸리나는 나긋이 말하는 낸시를 죽일 기세로 흘겨보았다.

“저기 예카틸리나 님?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낸시가 태연한 척 물었으나 그 손님은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베갯잇 속에 자리한 목걸이를 꺼내어 손에 쥐고, 짜증스럽게 방을 나섰다. 아직 방 한가운데 서 있던 낸시는 예카틸리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붕대 사이로 보이는 입술이 뒤틀렸다. ‘꼴사납긴.’ 예카틸리나는 그 길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뭐? 꼴사나워?’

낸시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거 저 싹수없는 것 좀 봐. 아나스타샤 맞다니까?’

하!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아가씨가 무사한지 확인해야지!

낸시가 서둘러 본채로 달려갔다.

*

틸다 레트랑이 깨어난 것은 다음 날이었다. 틸다는 언제 기절했었냐는 듯 멀쩡히 눈을 떴다. 방안은 어둑했다. 창가에 어슴푸레 들어오는 빛으로 방을 둘러보았으나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에 누구 없어?”

틸다는 목청껏 하녀들을 호출했다. 복도에 서 있던 하녀 하나가 재빠르게 들어왔다.

“마님, 깨어나셨네요!”

“물 가져와.”

하녀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정신이 들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하루를 꼬박…….”

“근데 왜 내 옆에 아무도 없는 거야. 라튼은 어디 갔지? 이 엄마가 쓰러졌는데 도대체 왜 코빼기도 안 보여?”

“그, 그게 도련님께서…… 술에…….”

웅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하녀를 향해 틸다가 일갈했다.

“똑바로 말해!”

“술에 취하셔서 방에 계세요…….”

“뭐? 제 엄마는 이 지경이 됐는데, 아들은 술이나 마시며 놀고 있었다는 소리야?”

공포에 질린 하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틸다는 씩씩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여 가만둘 수가 없었다. 발을 디디다가 잠시 휘청거렸지만, 크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살짝 기운이 없을 뿐.

잔뜩 인상을 쓴 채 라튼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도 전에 풍겨오는 술 냄새에 틸다가 코끝을 찡그렸다.

“라튼.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문을 열어 마주한 아들의 모습에 어미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여기저기 풀어헤친 셔츠에 헝클어진 머리. 붉게 충혈되어 핏발 선 눈. 울었는지 얼룩덜룩한 얼굴. 바닥에 굴러다니는 넥타이나 양말, 장갑, 그 외 잡동사니들이 술 냄새와 어우러져 틸다의 정신을 사납게 했다. 심지어 근위대 입단을 축하한다고 그녀가 선물했던 최고급 칼도 쓰레기통에 쳐박혀 있었다.

틸다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라튼.”

그러나 엄마의 부름에도 라튼은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눈에 초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틸다는 아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라튼! 너 이 엄마가 무슨 꼴을 당한 줄이나 알고 지금 이러는……!”

그제야 라튼이 한마디를 던졌다.

“오지 마세요.”

“뭐?”

“가까이 오지 마시라고요. 할 말 있으면 거기서 하세요.”

대화를 나누기엔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 틸다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한 걸음 더 떼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아, 진짜 짜증나네.”

“…… 아들?”

“말을 못 알아들으세요? 거기서 말씀하시라고요.”

아들의 말이 비수같이 날카로웠다.

“너……. 엄마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 줄이나 알고 이러는 거야?”

“글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까요. 엄마는 아무것도 말씀 안 하시는데.”

“시아라. 시아라 그년이 날 공격했어!”

“아아-.”

틸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라튼이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다.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냥 아득했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 하하하하. 도대체 언제까지 그 애를 들먹일 거야? 엄마는 언제까지 내 인생을 방해할 생각이야?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전부 다였다. 그 애를 잃은 뒤로 끝없는 미로 속에 갇혀버렸다. 답도, 앞도 보이지 않는. 꽉 막힌 감옥이었다.

“나는 엄마가 미워요.”

“너, 너……!”

“당신을 정말로, 증오해.”

틸다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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