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문을 열자마자 조잡하게 쌓여있던 상자 더미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 이게 다 뭐야?”
뜬금없이 벌어진 일에 놀란 내가 그 자리 그대로 굳어있기도 잠시, 상자들의 정체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노란색 귀여운 리본이 매달린 이것들은, 누가 보아도 선물상자였다.
“왜 내 방 앞에 이런 게 있는 거지?”
게다가 한두 개도 아니고 높은 산을 이루고 있었기에,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일어나신 거예요?”
“낸시!”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던 낸시의 발걸음에 힘이 실린 것도 그때였다. 낸시는 문 앞에 선 나를 보자마자 그 넓은 복도를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 앞에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어찌나 다행인지 몰라요.”
“미안. 많이 걱정했어?”
“말도 마세요! 속이 타들어 가서 제가 다 죽는 줄 알았어요. 혹시라도 잘못되실까 봐, 엄청 걱정했다고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아련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집안일을 하면서 저택을 돌아다닐 때나, 별관으로 이동 중에 정원을 거닐 때나. 하물며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쉴 때조차도. 어디를 가나 아가씨가 바지런히 돌아다니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말끝을 흐리는 낸시의 목소리에 물기가 내려앉았다. 낸시는 울먹거리면서도 벌게진 눈가에 힘을 주며 배시시 웃었다.
“특히 오늘처럼 햇살이 반짝거리는 날이면, ‘아가씨도 이 멋진 광경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내일은 꼭 일어나시길.’ 그렇게 기도했단 말이에요.”
“낸시…….”
“그러니까 이제는 아프지 마시고 좋은 것만 보셔야 해요. 아셨죠?”
“응. 안 아플 게. 울지 마. 누가 보면 한 달 내내 쓰러져있던 줄 알겠다.”
그러자 낸시가 기겁했다.
“한 달이요?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돼요!”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 제발 아프지 말아 달라 부탁하는 사람. 나는 그런 그녀의 품에 쏙 안겼다.
“고마워. 이제 진짜로, 안 아파.”
천천히 내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귓가에 울리던 낸시의 훌쩍거림이 점차 잦아들 무렵, 내가 물었다.
“이 선물은 다 뭐야?”
“아! 저희가 아가씨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린다는 것이 이렇게 많아졌지 뭐예요?”
“이게 다…… 나한테 주는 거라고?”
낸시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방에 두지 왜 이렇게 밖에다가…….”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절대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으응?”
“혹시라도 안정을 취하시는 데 방해되면 안 된다고, 복도를 지날 때도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니까요?”
그제야 깨어났을 때 느껴졌던 적막이 나를 위한 배려였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렇게 조용했구나.”
“네. 그 덕분에 아가씨께서 이렇게 깨어나신 게 아니겠어요?”
“맞아. 모두가 나를 아껴준 덕분에.”
나는 만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채 낸시를 더욱 끌어안았다. 낸시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러실 게 아니라 선물을 살펴보셔야지요.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정성껏 준비했으니까요.”
제일 위에 올려 있는 연두색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뚜껑을 열자 향긋한 허브향이 물씬 풍겨왔다.
“제 선물이에요!”
“향이 너무 좋아!”
그 말에 낸시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갖은 허브와 장미꽃잎을 말려 만든 포푸리 향주머니에요. 침대 맡에 두고 산뜻한 향기를 맡으면, 무섭고 끔찍한 기억은 다 사라지고 행복만 남을 거예요.”
나는 주머니를 코에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쌍둥이 레아와 레오를 데리고 피크닉을 떠났던 일이 떠올랐다. 분홍 벚꽃잎이 흩날리던 그 봄에, 노란 꽃밭을 마음껏 뛰어놀던 아이들. 우리의 모든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하던 펠릭스. 불쑥 찾아와 활 쏘는 법을 가르쳐주던 카시안. 그날의 추억이 몽글몽글 되살아났다.
당장이라도 해맑게 웃던 쌍둥이의 입속에 달짝지근한 케이크를 넣어주고, 펠릭스의 그림을 감상하며 마음껏 수다 떨고. 함께 활을 쏠 때 목덜미에 다가왔던 카시안의 숨결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돌이켜 보니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들이 아니던가.
“…… 맞네. 진짜 행복만 남았어.”
낸시는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자, 다음 선물은-. 이건 요리사들이 직접 만든 초콜릿이네요! 달콤한 게 아주 일품이랍니다. 이건 거품이 풍성하게 나는 비누고요. 그리고 이건…….”
이 상자 저 상자를 다 열어보던 나는, 바닥에 데구루루 굴러 떨어진 아주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 속에는 투명한 유리구슬이 들어있었는데, 예전에 알버트가 내게 건넸던 마법 구슬과 비슷해 보였다. 다만, 구슬의 가운데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것이 들어있었다.
“네 잎 클로버?”
“알버트 씨와 렌 씨가 직접…….”
낸시가 설명하려던 그 순간, 열어두었던 창문 틈 사이로 두 남자가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렌! 그렇게 마구잡이로 뽑으면 꽃이 다 망가지잖아!”
나는 창문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내 방 창문 아래 있는 화단에서, 알버트와 렌이 무언가를 열심히 탐색 중이었다. 한 손에 돋보기까지 챙겨 들고서는.
“쉬이잇! 조용히 해! 시끄럽게 굴다가 아가씨 깨신다고!”
렌이 알버트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는 알버트의 모습에 참았던 웃음이 그대로 터져 나왔다.
“저분들은 오늘도 저러고 계신다니까요? 글쎄, 시간이 날 때마다 화단에 들어가서 네 잎 클로버를 찾겠다고 어찌나 야단법석이었던지.”
낸시가 유리구슬 속 클로버를 응시했다.
“다행히 하나는 찾은 모양이에요.”
때마침 알버트가 렌에게 물었다.
“야, 근데 오늘은 세 잎 클로버를 따는 게 어떠냐? 여기 이렇게 많잖아. 지금 시아라 아가씨한테 필요한 건 네 잎 클로버 같은 행운이 아니라고.”
“알버트…….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고…… 나는 진짜…….”
렌이 감동한 듯 입을 틀어막자 알버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또다시 꿀밤이었다.
“나는 진짜 네가 귀찮아서 그러는 거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당장 찾아!”
알버트는 얻어맞은 이마를 매만지며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끝까지 화단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나를 향한 애정이 담뿍 느껴져서, 이제 더는 슬프거나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몸이 가벼웠다. 날개가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훨훨 날아오를 정도로.
나는 몸을 돌려 창문가에서 멀어졌다. 마주한 낸시의 품에는 노란색 프리지어 꽃이 한 아름 안겨있었다. 누구의 선물이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펠릭스지?”
낸시는 긍정했다.
“이 꽃 말고도…… 펠릭스 씨는 이걸 준비하셨네요.”
가장 큼지막한 선물이었다. 종이 포장지를 벗겨내자 커다란 캔버스가 위용을 드러냈다. 그 캔버스에 정성껏 그려진 것은…….
“하, 진짜…….”
나는 벅차오른 눈물을 참아내는 법을 몰랐다.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그림 속에서, 꽃밭에 앉은 나와 레아, 레오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아까 내가 상상했던 장면 그대로.
봄날의 내가 한여름의 나에게 위로를 건넸다. 다 괜찮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웃으라고.
그림과 함께 들어있던 쪽지에는 짤막한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 아프지 말라니까. 말 더럽게 안 듣네, 진짜. 또 아프면 이제 누나라고 안 할 거야. 내 동생이다, 동생! –
편지까지 펠릭스다워서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음……. 그게 마지막인데…….”
나는 촉촉해진 눈가를 정리하며 우물쭈물하는 낸시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게…… 왜 공작님 선물은 없는지…….”
낸시는 당황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괜찮아. 선물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그래도…….”
나를 대신해 아쉬워하는 낸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도리어 그녀를 위로하고, 우리는 함께 선물을 정리했다. 낸시를 보내고 혼자 방에 남아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카시안은 어디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2층 복도를 쉼 없이 누비고 다녔을 텐데.
선물보다도 당장 그가 눈앞에 보이지 않음이 더욱 아쉬웠다. 멋대로 찾아갔다가 일하고 있을 그를 방해할까 걱정스럽기도 했고.
‘저녁 먹을 즈음이면 볼 수 있겠지?’
아쉬움을 달래며 베개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런데, 머리맡에서 조금은 생경한 감촉이 느껴졌다. 폭신하지 않고 단단했다. 곧바로 베개 아래를 확인하자 노트 한 권이 보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바빴던 카시안을 대신해 나 혼자 매일매일 쓰고 있던 일기장이었다. 분명 책상 위에 뒀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트를 펼쳤다. 라튼을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썼던 일기 뒷장에, 카시안이 빼곡히 적어 내린 글이 있었다.
‘언제 이렇게…….’
나는 사흘 밤 내내 나를 간지럽혔던 손길을 떠올렸다. 약 기운에 정신이 없었지만, 아스라이 풍겨오던 카시안의 포근한 향기를 모를 리 없었다. 카시안은 밤마다 내 방으로 찾아와 내 곁에 있었다. 언제 왔는지, 언제 그의 방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달빛 어스레한 새벽에 잠에서 깰 때마다, 고개를 돌리면 늘 그가 있었다. “가지 마요.” 혹여 내 옆에서 사라질까 무서워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나지막이 호소했다. 나는 무거운 눈을 들어 올리려 애썼고, 그때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눈을 가렸다. “더 자. 옆에 있을게.” 그 말에 안도한 나는 다시 까무룩 단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내가 잠들면, 내 곁에 앉아 혼자 일기를 썼던 거구나. 그 생각에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가 남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 이렇게 보고 있는데도 자꾸만 눈에 담고 싶고, 곤히 잠든 너를 깨워 목소리를 듣고 싶고. 자꾸만 입 맞추고 싶어. 너를 만난 뒤로 나는 왜 이리도 허기가 질까. 그 크던 인내심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내 눈앞에 네가 보이지 않을 때면 온 세상이 슬퍼져. 네가 슬퍼할 때면 내 세상이 무너져. 시아라, 나는 이런 내가 너무 낯설어. 혹시 어린아이가 된 걸까? 이제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겠는걸.
예쁜 것만 보여주고 좋은 소식만 들려주고 싶은데 왜 자꾸만 그게 안 될까. 아마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라. 그런데 있지. 나는 이렇게 모자란 사람이지만 또 욕심은 너무 많아서, 내 부족함을 너로 채우고 싶어. 너만 해줄 수 있어. 나는 너를 통해 세상을 배우니까.
무슨 말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건지 모르겠다.
사랑해.
사실 이 한마디가 하고 싶었는데. –
일기장을 덮었다.
나는 달음박질로 카시안의 방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