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06화 (106/135)

106.

급한 마음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으나 그가 없었다. 집무실도 마찬가지였다. 3층 복도 끝에서 끝을 다 돌고 난 뒤에 2층도 살폈으나 카시안의 검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곧장 일 층으로 내려가 응접실 문을 열었다.

“…… 어디 간 거야.”

혹시 혼자 밥 먹고 있나? 식당을 기웃기웃 해보았으나 여기에도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퉁퉁거렸다. 꼭 이렇게 찾으면 안 보인다니까? 보고 싶어 죽겠는데. 나도 ‘사랑해요.’ 이 한마디 당장이라도 하고 싶어 죽겠는데.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돌아서려던 그 순간. 주방이 소란스러웠다. 와장창 주방용품들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요리사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은 뒤이어 들려온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숱한 탄식과 하소연에도 굴하지 않고 뻔뻔한 남자의 목소리. 내가 한참을 찾아 헤매던 것이 아니던가. 그것도 이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는 두 귀를 의심하며 주방 입구에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큰 키에 바다처럼 너른 어깨를 가진 남자. 새까만 머리카락에 고양이 같이 앙칼진 눈을 한 그 남자. 걷어 올린 하얀 셔츠 소매 아래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들까지 멋진 완벽한 내 남자가, 커다란 믹싱볼을 품에 안고 열심히 거품기를 휘젓고 있었다. 알버트가 골라준 것이 분명한 깜찍한 토끼 앞치마를 입은 채로.

“꺄아아악! 공작님! 설탕이 아니라 소금을 넣으시면 어떻게 해요!”

“아, 소금이었어? 하얘서 설탕인 줄.”

“…… 이러다 아가씨가 케이크 먹고 다시 기절하시겠어요!”

요리사의 말에 카시안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냥 제가 하면 안 될까요?”

“그것도 안 돼.”

카시안은 믹싱볼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 붓고 다시 달걀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잘 할게.”

“아니……. 그냥 제가 만들고 아가씨한테는 공작님께서 직접 하셨다고 하면 충분히 감동…….”

푸스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거의 애걸복걸하는 지경이 된 요리사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두 번째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쉿!’ 하자 요리사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설탕을 넣고 머랭 치는 것에 집중하던 카시안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안 돼. 그건 거짓말이잖아. 난 거짓말 안 해. 그러니까 직접 만들어 줄 거야.”

이 남자는 늘 정답만 말한다니까.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카시안의 등 뒤에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단단하게 힘줬던 그의 팔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 시아라?”

빙그르르 돌아 그의 앞에 서서 웃어 보였다.

“안녕, 공작님.”

“언제 깼어?”

“아까요.”

“진작 알았으면 내가 방으로 갔을 텐데.”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요. 귀여운 토끼 씨.”

“…… 응?”

카시안은 그제야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토끼는 새초롬하게 윙크 중이었다. 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이, 이거는……!”

조리대 위에 믹싱볼을 내려놓고 허둥대는 그의 모습에 나도 요리사도 킥킥거렸다.

“괜찮아요. 진짜 잘 어울리니까. 나 주려고 케이크 만들고 있었어요?”

“…… 응.”

“소금 케이크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는데.”

“그건 실수로 그런 거야.”

“설탕이 여기 있잖아요.”

나는 온몸을 배배 꼬며 카시안의 토끼 앞치마 자락을 살포시 손에 쥐었다.

“하아……, 너는 진짜-.”

카시안이 내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맞췄다. 주방에는 요리사들이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모두가 못 본 척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힐끔 스쳐보는 곁눈질에 뿌듯한 미소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 얼굴도 달아올라서, 푹 고개를 숙였다. 확 바뀌어버린 주방 온도에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요리사마저 꽃게 걸음으로 슬금슬금 주방을 빠져나갔다.

“케이크 같이 만들까요? 내가 도와줄게요!”

“내가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같이 하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일전에 한나가 알려주었던 레시피를 떠올리며 밀가루의 양을 세심하게 계량했다. 고소한 아몬드 가루를 섞어 곱게 체 쳐 준비했다. 카시안이 힘껏 만든 머랭에 가루를 넣어 부드럽게 섞어주고, 마지막으로 버터와 우유를 넣어 케이크 반죽을 완성했다.

케이크 틀에 반죽을 쏟아 붓고 오븐에서 굽는 동안, 우리는 장식할 재료를 손질했다. 나는 딸기와 청포도를 깨끗이 씻어 손질하고, 카시안은 열심히 생크림을 휘저었다. 힘들지도 않은지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하였다. 흔들림 없는 그의 팔 근육을 잠시 감상하면서, 조리대 위에 올려 있던 술에 절인 체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 그의 손에 이끌려 밀가루 범벅인 조리대 위에 풀썩 걸터앉았다.

“!”

갑자기 변한 위치에 놀란 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카시안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이 나를 거미줄처럼 꽁꽁 옭아매서, 나는 한 손에 체리를 든 채로 정지했다. 그때였다. ‘헤-.’ 벌린 내 입술에 차가운 체리의 감촉이 느껴진 것은.

“나도 먹고 싶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체리를 문 입술에 힘을 줬다. 훅 다가온 카시안이 반대편을 베어 물었다. 체리가 너무 작아서, 서로의 입술이 포개지듯 닿았다 떨어졌다.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네가 더 달다.”

“…….”

“체리보다.”

우리가 호흡할 때마다 알싸한 체리 향이 입안에 맴돌았다. 카시안의 셔츠 단추가 하나씩 풀어졌다.

*

“백작님 앞으로 편지가 한 통 도착했습니다.”

줄곧 안더스 트리탄 후작의 협박 편지에 시달렸던 레트랑 백작은 두 눈을 홉떴다. 이제는 편지의 ‘편’ 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이 나고, 모골이 송연했다.

“편지? 내가 내 앞으로 온 편지는 죄다 갖다 태우랬잖아!”

울컥 치솟는 짜증에 레트랑 백작은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던 두툼한 이불을 걷어찼다. 트리탄 후작에게 사기를 당한 이후로 백작의 일상 대부분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아무 생각 없이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던 참이었다.

머리털이 희끗희끗한 노령의 집사가 몸을 한껏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나 트리탄 후작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전하며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왜인지는 도통 모르겠으나, 요즈음 트리탄 후작의 서한을 받아들 때마다 주인이 노발대발했기에, 집사는 한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누가 보냈는데?”

“안타깝게도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걱정되신다면 제가 먼저 확인해볼까요?”

‘보낸 사람이 없어?’

레트랑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혹시……. 제페토 그 자식이 보낸 건가!’

어디로 내뺀 것인지, 제페토는 그 사건 이후로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썩을 놈의 자식! 저 혼자 도망치고 나서 내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쓴 게 분명해! 레트랑 백작이 씩씩거리며 집사의 손에 들린 편지를 낚아챘다.

“됐어. 이리 내! 이만 나가고 방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

“…… 예.”

조용히 등 돌린 집사가 문 앞에서 나가기를 망설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당장 나가지 않고?”

“저…… 백작님. 요새 마님 상태가……. 한 번 신경을 써주시는 것이 좋지 않은가……. 헙……!”

와장창. 레트랑 백작이 던진 꽃병이 집사의 얼굴 앞에서 문에 부딪혀 조각났다. 힘을 잃은 집사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집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지금 나한테 그따위 훈계를 하라 했지?”

“죄, 죄송합니다.”

“나가.”

백작은 겁을 먹고 뒤꽁무니 빼는 집사를 분기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다가, 편지 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제페토 그 자식……. 나한테 그런 모욕을 주고 혼자 도망치다니! 잡히기만 해봐라. 산 채로 고문할 테니!

그때, 다급히 편지 봉투를 찢으려던 백작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주방에서 시작된 우리의 키스는 카시안의 침실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품에 안고 내려간 주방에서는 잔뜩 기대했던 케이크가 맛볼 수도 없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뒤늦게 들어온 요리사가 해탈한 듯 웃었다. 나는 민망함에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죄송해요……. 괜히 재료만 낭비하고…….”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죠. 이 오븐보다 뜨거운 것이 있다면야.”

낯 뜨거운 그녀의 말에 내 얼굴이 홧홧거렸다. 나는 잠자코 있는 카시안의 옆구리를 콕콕 질렀다. 뭐라 대신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그래. 아주 뜨거웠지.”

“아니, 진짜……! 그런 말은 좀……!!”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아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케이크를 다시 준비하도록 하지. 오늘은 다 같이 파티라도 여는 것이 좋겠어.”

“예, 알겠습니다.”

카시안의 명령에 저녁 식사는 야외 정원에 차려졌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알버트와 렌도, 요리사들과 하녀들. 심지어 훈련을 마치고 온 펠릭스까지. 테이블이 부러질 정도로 차린 음식들을 실컷 먹고, 밤새도록 음악에 맞추어 춤을 췄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피곤하면 먼저 들어갈까?”

고개를 끄덕이고 카시안의 손을 잡고 걸었다. 걷는 내내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이게 뭘까. 몽글몽글 간지럽고, 보고만 있어도 뭉클한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정원 여기저기 자란 세 잎 클로버들이 달빛 아래서 반짝거렸다. 나는 알버트와 렌이 선물했던 유리구슬을 떠올렸다. 내가 거머쥐었던 행운 옆에 무수히 늘어선 것들.

아아-. 이게 행복인가 보다. 나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드는 이들은, 내 가족인가보다. 앞으로 내 옆에 있어 줄. 나를 지키고 내가 지킬 그런 가족. 내게도 진짜 가족이 생겨버렸나 보다.

나는 그 밤에 카시안의 팔을 베개 삼아 아무런 악몽도 꾸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오늘따라 상쾌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불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을 홉, 들이마신 뒤에 복도에 있는 낸시를 불렀다.

“뭐 도와드릴까요?”

“커다란 봉투 하나만 가져다줄래?”

“물론이죠. 그런데 그건 왜요? 뭐 담으실 게 있으세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버릴 게 아주 많아. 이제부터 쓰레기를 치울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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