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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08화 (108/135)

108.

“내리세요.”

“내가 왜 여기서 내려! 아니, 그 전에. 어디다 대고 명령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왜 모르겠어요. 그 유명한 레트랑 백작님 아니신가요?”

“그걸 알면서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까부는 거야?”

“대접받고 싶으셨다면 백작님도 처음부터 저를 존중하지 그러셨어요?”

금발의 여자가 힘껏 비웃었다. 레트랑 백작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다. 뭘 믿고 이렇게 당돌한 건지. 여자의 정체를 모르는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 네가 지금 이 보육원이 어딘 줄 알고 와?”

“와아-. 그 말은 동업자도 똑같이 하시더라고요.”

“도, 동업자?”

“제페토. 그 남자 말이에요. 트리탄 후작님께 된통 당한 뒤로 어디로 갔을까요. 백작님은 혹시 아세요?

여자는 자신과 제페토가 후작의 꾀에 걸려 넘어간 것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 백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네가 그걸…….”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여자가 허리를 숙여 레트랑 백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이 보육원 주인이랍니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백작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백작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그저 헛소리로 치부하는 것 외에는. 레트랑 백작의 얼굴이 살짝 뒤흔들리고, 표정은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아직 제 이름을 모르시죠?”

여자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시아라 에벨. 에벨 가문을 일으킬 가문의 주인입니다.”

“!”

레트랑 백작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 네가 에벨의 딸이라고?”

“네.”

“헛소리. 그 가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시아라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제 보육원에 찾아온 두 번째 손님께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지?”

“그저 대화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

“저는 아주 많습니다. 제 아버지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부터.”

백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겨우 쥐방울만한 계집애에게 왜 이렇게 휘둘리는 건지. 저 스스로가 한심해 참을 수가 없었다.

레트랑 백작의 분노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마차에서 풀쩍 뛰어내린 시아라가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백작은 일단 하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기서 되돌아가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 또한 없을 테니.

보육원은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 낡았던 건물은 부서지고, 커다란 새 건물이 들어섰다.

‘이게 다 내 것이었을 수도 있는데……!’

가만, 저깟 계집애 하나가 뭐라고 내가 이렇게 겁을 먹어? 저 주먹만 한 게 뭘 할 수 있다고? 내가 이기면 이 보육원을 뺏어오는 것도 수월하잖아!

시아라의 그림자를 밟으며 걷던 백작이 히죽거렸다. 어쩐지, 제게 유리하게 잘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쓸데없는 망상을 품으며,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장실의 공기는 차가웠다. 한여름임에도 서릿발 같은 칼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백작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저 여자를 때려눕혀야 할 지,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앉으세요.”

여자는 백작이 앉기도 전에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것도 소파 정 한가운데에 두 팔을 쫙 펴 쿠션을 짚고. 정말이지 이곳의 주인처럼 굴었다. 레트랑 백작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혹시 네가 내게 편지를 보냈느냐?”

“편지라니요?”

시아라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백작이 그제야 안도했다.

‘이 계집이 보낸 건 아닌 모양이군.’

“아……. 혹시, 제페토의 영상이 담긴 편지요?”

“…… 뭐, 뭐라…….”

시아라 에벨.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 영상을 보고 겁먹고 도망치시던 중이셨나요?”

정곡에 찔린 백작이 시선을 외면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그깟 돈에 눈이 멀어 겁도 없이 저를 태우시다니.”

“…….”

“정말……. 레트랑 가문은 전체적으로 다 멍청하군요.”

가문을 모욕하자 레트랑 백작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이 번쩍, 빛나며 보이지 않는 형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으니.

백작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대로 테이블에 얼굴을 박아 코피가 철철 흘렀다.

시아라가 손수건을 내던졌다. 공중에서 천천히 떨어진 손수건이 레트랑 백작의 구두코 옆에 사뿐히 착륙했다.

치욕이었다. 저 여자 앞에서 고꾸라져 고개를 처박고 있는 일도.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울 뻔한 일도.

“워, 원하는 게 뭐야!”

시아라가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레트랑 가문에 원했던 것은. 예전부터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

“진심 어린 사과. 그거 하나뿐입니다.”

“사, 사과라니?”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백작님의 가문은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작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선량한 아버지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도 모자라서.”

여자의 눈빛과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레트랑 부인은 제 어머니를 죽였어요. 돈을 빌려준 적도 없으면서 사기를 쳤고.”

백작은 처음 듣는 소리라며 몸부림쳤다.

“거, 거짓말……! 누가 누굴 죽였다는 거야? 게, 게다가 네 아비도 자기가 알아서 죽은 거야!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직감적으로 위험함을 알았다. 그러나 발은 여전히 바닥에 꽉 붙들려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시아라 역시 막상 이 상황에 깊게 들어갈수록 가슴에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나 참아내야 했다. 자신의 학대받던 어린 시절과 엄마의 죽음을 기억해냈다. 시아라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당신이 죽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평안하게 사신 거겠죠. 결백하다고 생각하시니.”

“마, 맞아. 나는 죄가 없어……!”

“제 부모님도, 저도. 아무런 죄가 없었답니다.”

“…….”

“그렇지만 저희는 함께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죄지은 사람도 없고. 크게 뭔가 잘못한 사람도 없는데. 도대체 왜, 저는 고통스러웠을까요?”

백작은 입을 열면 열수록 심장이 옥죄여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 공포감은, 여자가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발버둥 쳤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오싹한 느낌이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차라리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나을 만큼 싫었다. 마지막 남은 그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시아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백작님도 사과할 생각 없으신 것으로 알고 제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뭘 진행한다는 거야?”

“선물을 좀 준비했어요. 사실 저도 마음을 좀 졸였답니다.”

“…….”

“애써 준비했는데 김빠지게 사과라도 하실까 봐.”

쾅!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레트랑 백작의 얼굴이 다시 한번 테이블에 처박혔다. 보이지 않는 미지의 힘이 그를 내리눌렀다. 고개를 들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완력이었다.

시아라는 그런 백작의 눈앞에 서류 한 장을 내려놓았다.

“자, 여기에 사인하세요.”

“뭐, 뭐야?”

상황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백작의 손에 이미 펜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손을 펼쳐보았지만 착 달라붙은 펜은 떨어지지 않았다.

“저리 치워!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나긋한 목소리로 서류의 내용을 읊었다. 그간 레트랑 가문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그녀의 부모님을 해한 내용도 상세히 적혀있었다.

백작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에 서명하는 순간 저의 인생은 끝이 난다는 것을. 이 서류가 족쇄가 되어 앞으로 그의 가문을 멸문시키리라는 것을.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여자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저 목을 움켜쥐고 숨통을 끊어놓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도망치는 것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백작은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시아라의 목에 손가락이 닿으려던 그 순간.

저만치 큰 몸뚱이가 날아갔다. 손 쓸 새도 없이. 온몸의 뼈가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레트랑 백작이 고통을 신음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아델트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레트랑 백작이 앉아있던 바로 옆자리에 태연하게 앉아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는 아델트 공작의 갑작스런 등장에 오금이 저렸다. 그리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혹시 제페토의 죽음에 공작이 관여된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오히려 협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제 주변을 떠올려보아도 불가능임을 알았다.

레트랑 백작이 드디어 시아라의 제안을 떠올렸다.

“…… 서명만 하면 보내줘? 정말로?”

“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시아라가 초승달처럼 눈을 접었다.

백작은 엉금엉금 기어 테이블 가까이 다가왔다. 살아나갈 방법은 딱 하나였다. 백작은 자포자기하며 펜을 잡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의 미래처럼 새카만 잉크가 종이 위로 퍼져나갔다.

“됐지? 이, 이제 날 내보내 줘!”

동시에, 백작의 손에 마법으로 만든 수갑이 채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카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지.”

“뭐…… 뭐야? 내보내 주겠다며!”

“네. 그게 물론 당신의 집은 아닙니다.”

“…… 그럼…….”

“지하 감옥으로 가실까요?”

“…….”

“평생은 아닐 테고……. 외롭지도 않을 거예요. 레트랑 부인도 곧 함께 들어갈 테니.”

*

틸다 레트랑은 케네다 백작 부인이 소개했던 병원에 예카틸리나를 데려갔다. 말이 병원이지, 허가도 내지 않고 운영하는 불법 시술소나 다름없었다. 외관에서부터 느껴지는 찝찝한 분위기에, 예카틸리나는 눈을 부릅뜨고 틸다를 노려보았다.

“정말 이런 데서 제대로 고칠 수 있는 거 맞아요?”

“그렇대도. 내가 의원도 미리 만나보았으니 걱정 말거라.”

내부 역시 허름하고 위생적이지 못했다. 온갖 곳에 벌레가 들끓고 묘한 악취가 진동했다. 영 께름칙했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곳 말고는 아무 곳에서도 치료할 수 없다고 못 박았으니.

틸다 레트랑은 자신의 보석 몇 개를 팔아 수술비를 마련했다. 남편이 집을 나간 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만,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튼이 황실에서 일하니 죽기 직전까지 연금이 나올 테고, 급할 때면 이렇게 보석을 하나씩 팔아치우면 됐으니. 물론 죽기보다 싫었지만.

의사는 수술의 성공을 장담하지는 못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도, 여차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예카틸리나는 단박에 동의했다. 이 지경으로 평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으니까.

며칠 뒤, 예카틸리나의 얼굴에 차가운 메스가 닿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가죽을 덧대고 덧대어. 그녀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나긴 수술 이후 의사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예카틸리나는 울지 않았다. 그녀의 파란 눈에 분기가 일렁거렸다.

그 이후 두 여자는 고요 속에 숨죽여 지냈다. 예카틸리나의 얼굴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두문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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