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소피아가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집무실에 있는 카시안을 찾아갔다.
두말하지 않고 그에게 예카틸리나가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를 건넸다. 카시안은 의아한 눈으로 편지를 펼쳤다.
“이게 뭐야?”
“읽어보면 알 거예요.”
[…… 언니 나 소피아야. 이번 주마레 상…… 업 지구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쓰면 조켔어.보고 시퍼.]
이 짧은 문장을 읽는데도 카시안은 꽤 공을 들여야만 했다. 맞춤법은 다 틀렸고, 글씨체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엉망이었으니까. 귀족들의 정갈한 필체로 쓰인 서류만 읽던 카시안에게 이 편지는 수수께끼와도 다름없었다.
더듬더듬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카시안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걸 소피아 엘링턴이 썼다고?”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죠.”
“다행이네. 하마터면 헤르본 대학의 수준을 의심할 뻔했어.”
“소피아가 보낸 게 아니에요. 편지가 도착했을 때도 소피아는 제 옆에 있었는 걸요.”
책상 위에 편지를 내려놓는 카시안의 눈이 한층 날렵해졌다.
“그럼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예카틸리나. 저는 그녀가 보냈다고 확신해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카시안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서 꺼낸 것은 예카틸리나, 아니. 그녀가 아나스타샤였을 시절의 낡은 이력서였다. 우리는 편지와 이력서를 나란히 두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비교해 볼 것도 없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녀의 삶은 거짓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니. 새까만 잉크와 엉망인 글씨체. 여전히 변함없는 그것들로.
“…… 예카틸리나가 맞네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한동안 몸을 사리며 존재를 드러내지 않다가 갑자기 이런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보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를 괴롭히겠다는 신호인 건가?’
한동안 행복했는데. 즐겁고, 평온하고.
이번에는 내 앞에 어떻게 등장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지긋지긋해져서, 떨떠름한 한숨을 연거푸 내뱉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카시안에게 선언했다.
“만나러 나갈게요.”
“어디를? …… 설마 예카틸리나를 만나러 가겠다는 거야?”
“네.”
“안 돼.”
“그렇지만……. 제가 가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끝낼 생각이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저를 괴롭히겠죠. 어떤 수를 써서든.”
굳게 입술을 다문 카시안이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금 예카틸리나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그 여자는 내 모든 걸 아는데. 내가 어디에 사는지, 누구와 친분이 있는지. 내가 누군지.”
“…… 스토커가 따로 없군.”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불안에 떠는 거. 나 이제 그런 거 너무 싫어요. 안 할래요.”
“…….”
“그러니까 이번에 꼭 만나서 밝혀내야 해요. 그녀의 진짜 정체를.”
내 단호한 말투에 카시안이 작은 날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아. 그럼 같이 가.”
“물론 저도 공작님이…… 오빠가 함께 가는 것만큼 든든한 게 없겠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어요.”
“왜?”
“레트랑 백작을 처리할 때처럼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에요. 약속 장소가 상업지구 한복판에 있는 유명 카페인 걸요.”
“몸이야 숨기면 되지.”
그의 제안에 ‘그래요. 같이 가요.’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다. 예카틸리나가 저택에서 한바탕 난동을 부렸던 마지막 만남 이후, 상식을 벗어난 그녀의 행동들이 솔직히 겁이 났으므로. 그러나 침착함을 유지했다.
“몸을 숨기면…… 그다음은요? 사람이 엄청 많을 게 분명한데. 거기서 마법을 쓸 수는 없잖아요.”
“…….”
“이번에 나를 부른 건 나를 처리하려는 게 아닐 거예요.”
“상황을 살피고 경고를 하겠다는 건가.”
“네. 그다음 만남, 그때 일을 벌이겠죠.”
카시안이 턱을 매만졌다.
“그 여자를 저택으로 유인할게요. 그때 도와주세요.”
“알겠어. 대신 기사를 붙여줄게. 아무리 그래도 혼자는 불안해.”
“알겠어요. 저도 혼자보다는 그게 좋아요.”
나는 예카틸리나가 소피아와 내 사이에 끼어들어 생떼를 쓰고 거짓 눈물을 뽑아냈던 것을 떠올렸다. 병원 한복판에서 뻔뻔하게 연기하던 예카틸리나 때문에 얼마나 곤란했던가.
나를 호위하던 기사가 봉변당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신중하게 고민했다. 내 상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고, 적당히 뻔뻔한 사람. 내가 무슨 일을 겪어도 창피함을 느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아……! 펠릭스.”
“응?”
“펠릭스랑 같이 갈게요.”
*
아니나 다를까, 카페 구석에 앉아있는 여자는 예카틸리나였다.
그녀를 알아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뒷모습은 그녀가 확실했으나, 가까이에서 보이는 모습은 몇 달 전과는 확연히 달랐으므로. 얼굴 위를 감싸고 있던 붕대는 온데간데없고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가 하얀 천을 대신했다. 군데군데 아물지 않은 흉터가 보이기는 했다. 하나 예전에 비하면 완벽한 정도였다.
‘사라진 동안 치료를 받고 온 거야?’
사람의 됨됨이와는 별개로, 흉터로 고통받아왔던 그녀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잘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새 많이 자란 머리카락은 가슴팍 아래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래도 푸른색이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카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오늘따라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평소 내가 즐겨 입던 단정한 원피스라던가 굽이 낮은 구두. 팔과 목에 건 푸른 보석의 장식품들까지. 지금 내 모습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나를 따라 한 거야?’
……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가 예민한 건가 싶어 펠릭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펠릭스도 나와 예카틸리나를 번갈아 응시하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투덜거리면서.
“저거야? 소피아인 척하더니 웬 이상한 게 앉아있어?”
펠릭스가 경멸스럽고도 하찮은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예카틸리나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테이블에 앉았다. 뒤이어 펠릭스 역시 내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내 동생이에요. 소피아와 친한 친구라서 데리고 왔는데……. 소피아 대신에 당신이 나오기로 했었나?”
내가 태연하게 묻자 그녀가 조소했다.
“웃기지 마요. 이미 그 편지를 보낸 게 나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눈치챘다니 다행이네요. 모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거든요. 멍청해 보이니 제발 공부 좀 하라는 그런 쓴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싱긋 웃자 예카틸리나가 입술을 꿈틀거렸다.
“어차피 그런 편지로 속을 거라 생각도 안 했어요. 그래도 그 봉투에 소피아 엘링턴이라는 이름이라도 있어야 당신한테 편지가 가지 않겠어요?”
“성공했네요. 내가 이 자리에 나왔으니.”
어깨를 으쓱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 동생도 목 좀 축이고 가도 괜찮죠? 친구 만난다고 많이 들떴을 텐데. 실망했겠네.”
“좋을 대로 해요.”
예카틸리나가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처음에는 으르렁거리던 그녀가 곧 평정을 되찾고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잘 지냈나 봐요?”
“네. 얼굴 치료했네요? 그동안 왜 소식이 없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좋은 후원자를 만난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미리 말하지 그랬어요? 그럼 나도 도왔을 텐데.”
그녀가 콧방귀를 꼈다.
“저는 제 가치를 알아봐 줄 분이 필요했거든요. 당신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별 볼 일 없어요?”
“네. 다 망한 가문에 입양된 고아가 복권 한 번 당첨됐다고 그 가치가 올라가나요? 우아하고 고상한 척하기에 깜빡 속을 뻔했지 뭐예요? 나랑 비슷한 처지였던 주제에.”
“올라갔으니 우리가 이렇게 만났겠죠. 지금도 당신은 날 따라 하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찻잔을 손에 쥐는 모양새마저.”
내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나긋하게 웃자 예카틸리나가 정색했다. 그러나 곧, 내 표정마저 따라 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래 보이나요? 하긴, 편했거든요. 당신을 닮으려고 아주 약간의 노력만 하면 됐으니.”
예전의 천박했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예전처럼 생떼를 쓰며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예카틸리나는 최대한 고상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전했다.
“우린 어차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잖아요? 내가 굳이 따라 하지 않아도, 시아라와 나는 많이 닮았어요.”
그때였다. 펠릭스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린 것은.
“푸핫, 이 여자 말 진짜 웃기게 한다.”
“…… 네?”
“저기요, 닮긴 누가 닮아요? 그쪽은 우리 누나 발톱에 때만도 못해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기분 나빠서 못 들어주겠네.”
“신사분. 숙녀에게 그런 말은 실례랍니다. 신사분께서는 제 마음에 상처 내는 것을 즐기시는 건가요?”
예카틸리나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며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숙녀분. 제 귀에 피딱지가 생기다 못해 귀가 썩어버린 것은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답니다.”
펠릭스가 빙그레 웃자 여자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물을 들이켰다. 속이 아주 쓰린 모양이었다. 그런 예카틸리나에게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제 뒷조사를 많이 했나 봐요.”
“제 후원자가 당신을 잘 알고 있더라고요.”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녀를 치료해준 후원자. 그게 누굴까. 누가 이렇게 큰돈을 들여 이 여자를 위해 애썼을까.
“시아라는 생각보다 적이 많은가 봐요? 제 후원자도 참 안타까운 분이세요.”
“…….”
“당신 때문에 잃은 것이 한둘이 아니거든.”
돈 많은 귀족, 나를 적으로 여기는 사람. 나 때문에 잃은 게 많은 사람. 딱 하나잖아.
“…… 틸다 레트랑.”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자 예카틸리나가 히죽거렸다.
“그래서…… 틸다 레트랑이랑 손잡고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거구나.”
“제가 누구를 괴롭힌다고 그래요? 나는 오랜만에 친구나 보려고 한 건데.”
나는 코웃음 쳤다.
“친구……. 어쩌죠? 나는 당신 같은 친구 둔 적 없는데.”
“…….”
“아, 또 모르죠. 내가 어엿한 귀족이 되면, 당신을 고용해줄지도.”
“…… 뭐라고요?”
예카틸리나 앞에 아나스타샤라 적힌 이력서를 내려놓았다.
“다시 하녀로 고용해줄지도 모르잖아요? 평생 내 아래에서 무릎 꿇고 나를 받들어 섬기도록. 내 발이나 닦으면서.”
“…….”
“그렇게 나를 부러워하면서 살아봐요. 같은 처지로 알고 있던 여자가, 당신 위에 선 모습을 우러러보면서.”
예카틸리나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