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예카틸리나를 만나고 돌아온 뒤로, 나는 전쟁이라도 치르는 심정으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작은 주머니에 모조리 챙겨 넣고,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고 대항할 만한 말을 연습하고. 활과 화살이라도 챙길까 한참을 만지작거렸지만, 그건 제외하기로 했다. 너무 커서 티가 나면…….
그러나 어쩐지 자꾸만 밀려드는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카시안이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은 덜 되었지만. 예카틸리나는 종종 예상 가능한 범주를 뛰어넘지 않던가.
손바닥에 자꾸만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카페에서 그녀에게 보였던 패기는 밤이 되며 모습을 감춘 태양과 함께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나는 침대 위에 풀썩 걸터앉았다.
바로 이 저택에서 엘리나 트리탄이 죽었다. 예카틸리나가 칼을 휘둘러서.
그 끔찍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더욱 겁이 났다. 혹여 이 일로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기라도 한다면.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죽음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고개를 들자 벽에 걸어두었던 진검이 눈에 들어왔다. 아델트 저택으로 짐을 옮길 때, 내 원래 집에 있던 것 중 제일 멋지고 늠름한 검으로 골라왔던 것이었다. 매끈하게 잘 닦인 검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내 속도 모르고.
복권에 당첨되고 아델트로 이사와 신나게 검을 사들였을 때를 떠올렸다. 그다음으로는 겁도 없이 목검 하나 들고 당첨금을 찾으러 갔던 순간이나, 내 몸은 내가 지키겠다며 그렉 아저씨의 체육관에서 열심히 검을 휘둘렀었던 더 먼 과거까지.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던 시절이었다. 잃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나는 겁쟁이였다.
사랑하는 것과 소중한 것. 지켜야 할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내 편이 많아지면 그게 곧 나의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이 생겨버린 지금, 어쩐지 더 나약해진 기분이었다.
시선을 돌려 책상 위를 응시했다.
카시안과 내 하루가 빼곡한 일기장. 화병에 풍성하게 꽂혀있는 노란 프리지아. 네 잎 클로버가 담긴 유리구슬까지. 나를 응원하는 그 마음들을 한참이나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잃을 게 너무도 많았다.
그때, 창밖에서 카시안과 알버트가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내내 이어졌던 원로회의가 이제야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두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무기력했던 내 몸에 다시 힘이 돌기 시작했다. 그 해사한 미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카시안은 알버트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내 방 창문 아래에 섰다. 그의 시선이 가만히 나를 향했다.
“안자고 뭐해.”
힘차고 다정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적셨다.
“기다렸어요.”
“내가 오기를?”
“응. 당신이 오기를.”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게.”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요.’라는 말을 전할 새도 없었다. 이 남자는, 그보다 더 빠르게 내 방 창틀 위에 앉아있었으니.
“이건 너무 빠른데.”
“그 순간조차 참을 수가 없었어.”
카시안이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입 맞추고 싶어서.”
나는 푸스스 웃었다.
“언제부터요?”
“좀 전에 너를 마주했던 순간부터.”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떨어졌다.
“아니, 어쩌면……. 너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그랬을지도.”
“뭐야……. 그때는 우리 둘 다 너무 어렸는데. 완전 응큼해.”
“너는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꼭 노란 병아리 같았어. 건드리면 금방 부서질 것 같은. 그때부터 결심했는지도 몰라.”
“뭐를요?”
“네 옆에 평생 있겠다고.”
카시안이 귓가에 속삭였다.
“매일매일 사랑해줄게.”
“진짜요?”
“응. 부서지지 않도록.”
“…… 그럼 나 두고 어디 가지 마요.”
“안가. 약속할게.”
“나보다 먼저 죽지도 마요.”
“응. 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네가 죽고 딱 30초 뒤에 나도 따라갈게.”
“…… 그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것도 너무 긴가. 벌써부터 견뎌낼 힘이 없네.”
나는 그대로 카시안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내 얼굴 위로 카시안의 그림자가 졌다. 그의 감긴 눈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 감미로움에 취해 있을 때, 카시안이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감겨주었다.
“너도 감아야지.”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카시안이 쿡, 낮게 웃었다.
“내가 더 사랑해.”
이 나른한 목소리에도 마법이 걸려있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다. 침대에 홀로 걸터앉아 떠올렸던 생각들이 전부 부질없다 느껴질 만큼.
*
다음 날.
나는 예카틸리나를 기다리며 카시안과 함께 집무실에 있었다.
가신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응접실보다는 아무래도 조용한 집무실이 낫겠지 싶었다. 그녀와 마주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테니.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 너머로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
알버트가 문을 반쯤 열었다. 그러나 퍽 난처한 표정이었다.
“저……. 그 손님이…….”
카시안이 눈썹을 치켜떴다.
“뭐야?”
“예카틸리나가 아니라…….”
열린 문 뒤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틸다 레트랑이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여자가 여기를 왜 왔지?’
카시안도 나도, 심지어 아직 문밖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알버트까지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얼이 나간 표정으로 틸다를 응시했다.
기대했던 손님이 아니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틸다 레트랑은 문이 열리자마자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사죄하기 시작했다.
“시아라. 내가 너에게 정말 몹쓸 짓을 저질렀다.”
“!”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 네가 내게 저질렀던 모든 무례를 용서하지.”]
틸다 레트랑이 내게 요구하던 것들이었다.
그 행동들을 지금 틸다, 그녀가 내 앞에서 하고 있었다. 그러니 집무실에 있던 우리가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황당한 상황에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리자 틸다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지금 네 심정도 이해한단다. 제 어미를 죽인 여자가 찾아와 용서를 구하는데, 혼란스러울 테지.”
“…….”
“하지만 진심이란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나 역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단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고, 죄책감이 온몸을 짓눌렀지.”
저 말이…… 진심일까?
아니면 이 여자의 간교한 꾀에 속아 넘어가는 걸까?
나는 틸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고개를 거의 바닥까지 처박고 있던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 그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틸다 레트랑이 내 앞에 무릎을 꿇다니. 도대체 그 의도가 뭐지?
“…… 일어나세요.”
“용서해 주는 거니?”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이미 너무 큰 죄를 지으셨는걸요.”
“…… 알고 있단다. 용서받기 힘들다는 거.”
틸다가 맥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 이러시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드디어 일어선 레트랑 부인이 카시안과 내 앞에 섰다.
“아델트 공작님을 뵙습니다.”
그녀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카시안에게 인사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공작님께 안부를 묻는 것보다 시아라 양에게 사죄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혹 기분 상한 것은 아니신지요.”
“…… 됐습니다. 어차피 레트랑 부인과 안부를 묻고 지낼 사이는 아닌 듯하니.”
그 말에 틸다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부인께서…… 여기를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내가 예카틸리나를 후원했다는 사실은 시아라 너도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에게 부탁했단다. 한 번만 너를 만나게 해달라고. 그런데 마침 오늘 너를 만나기로 했다는구나. 내가 대신 가면 안 되느냐 사정했지.”
“…… 왜요?”
“너에게 사과하고 싶었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꽤 오랜 기간 안 보이셨던 걸요. …… 예카틸리나와 함께 숨어계셨던 거 아닌가요?”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 뭐를 인정하셨는데요?”
“내가 너에게 저질렀던 잘못 말이다.”
혹시 내가 뭔가에 홀린 걸까? 아니면 이 여자가 완전히 미쳐버린 걸까?
틸다 레트랑은 완벽하게 다른 사람 같았다. 전에 알던 표독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제는 정말 헷갈릴 지경이었다. 진짜 나한테 사과하고 싶은 거야?
“너도 알다시피, 처음에는 네가 미웠단다.”
“…….”
“순진한 내 아들을 네가 유혹했다 생각했거든. 그 오판이 나를 이리도 괴물로 만들었구나.”
“…….”
“그 뒤에 네가 내 얼굴에 돈을 집어 던졌을 때도. 몇 달 전 나를 공격했을 때도. 나는 내 잘못은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단다. 미안하다.”
“…… 진심이세요?”
“그래. 진심이야.”
틸다가 이번에는 카시안에게 호소했다.
“공작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뭡니까.”
“시아라 양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지요.”
“아델트 공작님……. 저는 그간 있었던 일로 남편도, 아들도 전부 잃었습니다. 여기서 저 아이를 또 괴롭혔다가는 그나마 남은 제 인생마저 잃을 것이 뻔한데. 제가 감히 그런 우매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부디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아주 잠시면 됩니다.”
틸다는 다시 한번 무릎 꿇었다.
카시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5분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그 전까지 마무리 지으시길.”
“네, 감사합니다.”
카시안이 나가고, 틸다가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우리 둘만 남았구나.”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예요?”
“말했잖니. 사과하고 싶다고.”
“…… 이미 충분히 하셨잖아요. 그게 공작님을 내보낼 만한 일도 아니고요.”
레트랑 부인의 얼굴이 한층 여유로워졌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아 앉았다. 벽시계를 흘긋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시간이 이렇게나 많은데.”
“…….”
“여기는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 안 하니?”
“역시……. 이러시는 목적이 따로 있으셨군요.”
틸다가 한쪽 입꼬리를 힘껏 끌어올렸다.
“차가 오면 천천히 대화하자꾸나. 할 말이 많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