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너도 느껴봐.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
예카틸리나가 작은 유리병을 내 앞에서 기울였다.
“이게 뭔 줄 알아?”
“…….”
“엘리나 트리탄이 나를 죽이려고 했을 때 썼던 독약이야.”
손의 움직임을 따라 유리병 속의 검은 액체가 느릿하게 출렁거렸다.
긴장한 내 얼굴을 보며 예카틸리나는 즐겁게 미소 지었다.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밀쳤다. 그러나 완력이 어찌나 세던지. 몸부림칠수록 내 뒷머리를 옭아맨 그녀의 손아귀 힘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예카틸리나가 다시 한번 내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나를 책상 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책상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친 충격에 정신이 아득했다. 반격을 시도해볼 새도 없이, 그녀는 곧장 내 목을 짓눌렀다. 그 탓에 상반신이 뒤로 꺾이며 책상 위로 등이 닿았다.
“이 독약을 확!”
“흐읍……!”
잇새로 작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얼굴에 끼얹었지.”
“…… 그래서, 지금 그걸 나한테 뿌리겠다고?”
“응. 안 돼?”
오싹, 등골에 전율이 돋았다. 목울대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내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집무실 문을 향했다.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작은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순간 예카틸리나가 했던 말들 머릿속에서 요동쳤다.
[“그 남자는 못 와. 힘을 잃었거든.”]
두려웠다. 당장 이 여자로 인해 내가 죽게 생긴 것이. 하지만 그 원초적인 공포보다도 더욱 무서웠던 것은 카시안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카시안이랑 내가……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이제 겨우 행복하려고 하는데…… 겨우 너 같은 게 방해를 해……?
두려움, 억울함, 분노. 온갖 감정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그 무수한 감정의 소용돌이 끝에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퍼뜩 피어올랐다.
나는 기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책상 반대편에 올려 있는 작은 도자기 화분 하나. 그것이 당장 쓸만한 도구 중 가장 가까이 놓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손을 길게 뻗어야 닿을까 말까였다.
예카틸리나는 여전히 여유만만하게 이기죽거렸다. 제 승리를 확신하듯,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나는 화분 쪽으로 조금씩 몸을 뒤틀었다. 이제 조금만 뻗으면…… 조금만 더……!
“죽어.”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유리병의 뚜껑을 열려던 찰나, 나는 있는 힘껏 손을 뻗어 화분을 집어 들었다. 쾅, 그 화분을 그녀의 머리 위로 냅다 내려쳤다. “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도자기가 산산이 조각났다. 흙더미가 우수수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유리병 속의 액체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바닥에서 거품을 만들어내다가 바닥을 녹여냈다.
예카틸리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휘청거렸다. 그녀가 고통을 토해내는 사이, 나는 예카틸리나의 어깨를 홱 밀치고 몸을 비틀었다.
숨을 옥죄는 긴장감 때문일까, 눈앞이 캄캄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집무실 문을 향해 달려가는 그 짧은 와중에도 자꾸만 발이 꼬여 휘청거리기를 몇 번. 결국, 찻주전자를 운반해 온 트롤리에 부딪혀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삐끗한 발목이 시큰거렸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어느새 정신을 차린 예카틸리나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그녀의 이마 위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번득이는 두 눈은 기괴하리만큼 섬뜩했다. 그리고 이내, 유리병 속의 남은 액체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나는 팔을 치켜들어 얼굴을 가렸다. 최대한 방어하기 위해 온몸을 웅크렸다. 질끈, 체념하듯 눈이 감겼다.
쾅-!!
그때였다.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린 것은.
“안 돼!”
단박에 안으로 뛰어 들어온 사내가 쓰러진 내 몸 위로 제 몸을 덮었다.
“으윽……!”
번쩍 뜬 눈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페…… 펠릭스……!”
펙릭스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나지막이 고통을 신음했다. 그러면서도 내게 물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아래위로 재빠르게 흔들었다.
“너…… 너 어깨가……!”
상황파악을 위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펠릭스가 양팔로 바닥을 지탱하고 나를 제 품에 가둔 탓에 나는 독약을 피할 수 있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나를 대신해 온몸으로 독을 맞은 이는 펠릭스였다. 공중에 흩뿌려졌던 검은 액체가 펠릭스의 어깨와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곧, 그의 등 뒤로 하얀 거품이 일더니 연기가 푸스스 피어올랐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나고, 피부와 셔츠가 서로 엉겨 붙었다.
내 몸은 충격으로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았다.
“누나가 괜찮으면…… 됐어.”
“…… 왜…… 도대체 왜…….”
“공작님 곧 올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버티자, 응?”
펠릭스가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게 먹먹한 미소를 보이더니,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뒤도는 순간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며 예카틸리나를 향해 겨눴다.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에 예카틸리나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녀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살폈다. 이윽고 나를 해치려던 제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고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쨍그랑,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빈 유리병이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펠릭스의 검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베어버릴 듯 가까웠다. 날렵한 칼날이 목 앞에서 번쩍거리자, 위협을 느낀 예카틸리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자, 잘못했어요. 사, 살려주세요.”
그녀의 가증스러운 입을 다물게 하려는 듯. 펠릭스는 허공에서 검을 휘둘렀다. 예카틸리나의 얼룩덜룩한 머리카락이 댕강, 잘려나갔다. 그 와중에 슬쩍 베인 목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검붉은 핏물과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응시하던 그녀의 낯빛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져 갔다. 예카틸리나는 바닥으로 고개를 떨구며 바짝 자세를 낮췄다.
“제, 제발……. 제발요……!”
펠릭스는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고쳐 잡았다. 그의 어깨와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독으로 인한 화상의 고통을 겨우 견뎌내고 있는 것이리라.
“으윽…….”
휘몰아치는 통증에 펠릭스가 잠시 방심한 그사이. 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예카틸리나가 펠릭스를 슬쩍 곁눈질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동작으로. 그것은 끝이 예리한 단도였다. 그녀는 펠릭스의 발등을 단도로 찍으려 했다!
“…… 멈춰!”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예카틸리나에게 달려들었다. 높게 들어 올린 그녀의 팔을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 예카틸리나가 쥐고 있던 쇠붙이가 멀리 날아가고, 그녀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버티고 있는 펠릭스를 서둘러 벽에 기대 앉혔다. 괴로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를 으드득 갈고, 이번에는 내가 펠릭스의 검을 틀어쥐었다. 그러자 펠릭스가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걱정하지 마.”
펠릭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양손으로 그의 검을 쥐고 일어났다. 양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날아간 단도를 줍기 위해 엉금엉금 바닥을 기는 예카틸리나를 낮게 불렀다.
“야.”
그녀가 움직임을 멈췄다.
“너 진짜 사람 잘못 봤어.”
나는 칼끝을 그녀의 턱밑에 가져다 댔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 내 죽음이야?”
그 물음에 예카틸리나가 답했다. 정말이지, 순진한 표정으로.
“응.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 너 진짜 미쳤구나.”
“그래서 네 주변 사람들이 전부 불행했으면 좋겠거든.”
“…… 끔찍해.”
그녀가 히죽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니? 근데 있지. 설마, 그걸로 내 목이라도 베려고?”
나는 손가락에 더욱 힘을 줬다.
“응.”
“너 사람 죽여본 적은 있니?”
“곧 생기겠지. 이 검으로 널 죽일 테니까.”
칼날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자 여전히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낮잡아보고 있었다.
“무서워라. 이제 곧 공작부인이 될 아리따운 귀족 아가씨가 나를 죽이고 살인자가 되겠다고?”
“응. 아리따운 공작부인 이전에 나도 사람이거든. 당한 것은 절대 못 참는.”
“그러기엔 칼이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들고 있는 것도 벅차 보여. 네가 그걸 휘두를 수나 있을까?”
예카틸리나의 말대로 기사의 검은 너무 무거워서, 지탱하고 있는 것도 힘에 부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칼을 그녀의 목 깊숙이 박아 넣는 것이 전부일지도 몰랐다. 그조차도 엄청난 힘을 쏟아 부어야 하겠지만. 하나, 최대한 의연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예카틸리나는 그 와중에도 엉덩이를 살금살금 움직여 떨어진 단도를 주우려 애썼고, 내 칼은 그런 그녀를 끈기 있게 뒤쫓았다.
그리고 그때.
소파 뒤로 틸다 레트랑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탓에 시선이 차단된 예카틸리나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그다음으로는 양발을 꿈틀거리던 틸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 바퀴 상황을 살피며 예카틸리나를 발견한 틸다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노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트롤리 위에 올려 있던 찻주전자를 손에 쥐고.
제 위로 드리운 또 다른 그림자에 예카틸리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히…… 히익……!”
귀신이라도 본 듯 몸서리쳤다.
“이 배은망덕한 년.”
잔뜩 갈라져 쉰 목소리였다. 틸다 레트랑은 거칠게 호흡했다. 그때마다 매캐한 먼지가 한 움큼씩 쏟아져 나오듯 했다. 그와 동시에, 예카틸리나의 머리 위로 독이 든 찻물을 거침없이 쏟아 부었다.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예카틸리나는 제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바닥 위로 뚝뚝 떨어지는 찻물을 멀거니 응시했다. 한참이나 눈을 끔뻑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어……, 이…… 이게 지금 무슨…….”
더듬더듬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고,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손바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틸다가 들고 있는 주전자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다음으로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몇 차례나, 반복적으로.
“어…… 어……?”
까슬한 감촉에 그녀의 입이 점점 벌어져갔다.
“…… 끄…… 끄아아아악!”
예카틸리나의 얼굴이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