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틸다는 입을 벌리고 공작이 선사한 경이로운 순간을 눈에 담았다. 나중에는 아예 턱을 내려놓고 경탄했다. 온몸으로 빛을 내뿜는 저 남자는 그녀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마법사’라는 단어로 공작을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절대자나 다름없었다. 세상의 빛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러나 순식간에 두려워졌다. 저 거대한 힘으로, 곧 저를 벌하리라. 틸다 레트랑은 쥐죽은 듯 몸을 웅크렸다. 처음부터 이곳에 없던 사람처럼, 조용히 찌그러졌다. 어차피 첫 제물은 예카틸리나일 것이 분명했다.
틸다 레트랑의 예상대로, 아델트 공작의 시선이 예카틸리나를 향했다. 비명이 나올 정도로 끔찍하고 차가운, 그 시선이.
예카틸리나는 한쪽 구석에 처박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불현듯 아델트 공작의 시선이 저를 향하자, 저절로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살면서 경험해본 적 없던 극한의 공포였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력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패배감. 예카틸리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게 뭔 줄 알아?”
공작이 비릿한 조소를 띄며 뒷짐을 졌다.
“너를 그때 안더스 트리탄에게 넘겼던 일.”
예카틸리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내가 직접 심판했어야 했어.”
예카틸리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사방이 가로막혀 도망칠 곳은 어디도 없었다.
“차가운 지하감옥에 갇혀 매일 같이 살이 뜯기는 고통을 느끼게 할 걸.”
한 걸음.
“불구덩이에 던져 넣고 지옥을 맛보게 할 걸.”
또 한 걸음.
“살이 에는 듯한 추위 속에 너를 가둬 둘걸.”
천천히 걷던 카시안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예카틸리나의 코앞이었다.
“그랬다면 네가 이따위 추잡한 일을 벌이지는 못했을 텐데.”
예카틸리나는 이제 너무 두려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의 구두 코앞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죽여 달라고. 이대로 사라지게 해달라고. 이번에는 조잡한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이 남자가 무서웠다. 그러나 목이 턱, 막힌 듯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야만 했다.
“…… 저, 저, 정말 자, 잘못했어요. 주, 죽여주세요. 그냥 저를 죽여주세요.”
“너희들은 왜 자꾸 나한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할까.”
카시안은 느긋하게 말했다.
“나는 사람 죽이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그는 세상을 관망하는 신처럼 예카틸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어쩌면 하찮은 벌레를 보는듯했다. 그만큼 초연했다.
카시안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가락을 길게 그었다. 그와 동시에, 예카틸리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었다. 허공을 느릿하게 부유하는 먼지. 그것이 남아있는 전부였다.
이제 남은 것은…….
카시안이 천천히 뒤돌았다.
여전히 소파 뒤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틸다 레트랑은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바로 앞에서 그녀를 가려주던 커다란 소파가 한순간 사라졌기 때문이랴.
그녀는 벌거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몸을 아무리 둥글게 말고 말아도, 제 몸뚱어리 하나 숨길 공간이 없었다.
딸꾹.
아델트 공작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딸꾹질이 나왔다.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아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딸꾹딸꾹.
딸꾹딸꾹, 딸꾹.
딸꾹질이 멈추질 않고 더욱 거세지기만 하니 괴로웠다. 틸다는 저 스스로 목을 움켜쥐었다. 있는 힘껏. 숨이 막히는 고통을 손수 선사하고 나서야, 모든 순간이 후회되었다.
라튼과 시아라의 사이를 방해했던 일. 시아라의 엄마를 죽였던 일. 사기를 쳐서 돈을 이중으로 뜯어냈던 일. 주제도 모르고 아델트를 뒤져 시아라를 괴롭혔던 일. 라튼이 그녀가 사과할 마지막 기회를 알렸을 때, 무시했던 일.
“아아…….”
틸다가 볼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시아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 아아…….”
뒤늦은 사과를 전하려 했으나 목에서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삼켰던 독차의 효력이 온몸으로 전달된 탓이었다.
“…… 아아아…….”
틸다는 소리 없이 통곡했다. 그러나 이제 와 후회해본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모든 것을 잃었으니. 남편도, 자식도, 가문도. 심지어 제 몸뚱이도.
시아라의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의 최후가 어찌 될지, 미리 예견한 사람처럼.
*
예카틸리나는 눈을 떴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공간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바닥은 온기 하나 없이 싸늘했다. 미지의 공간에 소름 끼치는 적막이 흘렀다.
‘…… 살았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듬거렸다.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혹시 꿈일까?’
그러나 꿈이라기엔 얼굴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너무도 선연했다.
한참이 지났지만, 어둠 속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카틸리나는 내심 안도했다. 아델트 공작을 마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말 죽이지는 않은 모양이지?’
공작이 저를 죽일 생각이 없다 선언했으니 목숨만은 부지했다 여겼다.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했던 순간도 있었으나, 공작만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살고 싶었다.
그녀는 이곳이 오래전 갇혔던 지하감옥쯤 일거라 생각했다. 곧 관리인이 올 테고, 부족하지만 끼니를 챙겨줄 것이다. 엘리나 트리탄과 벌였던 멍청한 짓거리를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불편해도 죽을 일은 없을 터였다. 어차피 혼자 갇힌 듯하니 남들과 싸울 일도 없을 테고.
최대한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조용히 삶을 이어가면 되겠지.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죽은 척 빠져나갔었던 전적도 이미 있지 않았던가.
예카틸리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빛 한 줄기가 그녀의 앞을 밝혔다. 헛된 망상에 빠져있던 예카틸리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끔찍하고, 흉측했다.
처참하고, 구역질이 났다.
예카틸리나가 마주한 것은 거울이었다.
다시 녹아내린 거죽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 그녀가 얼굴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전보다도 더욱 초라했다.
“……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잖아.
이번에는 그녀의 뒤쪽이 밝아졌다.
예카틸리나는 뒤돌았다. 거기도 거울이 있었다. 방금 마주한 모습과 똑같았다. 정말이지 잔인하게도.
“…… 거짓말. 꿈이야. 꿈인 거지?”
꿈이잖아……! 이건 다 망상이잖아!
그녀가 발악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공간에 하나둘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끄……, 끄아아아악!!”
온 사방천지가 거울이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봐도, 반짝이는 유리가 그녀를 비췄다. 거울 속에 거울이. 그 속에 또 거울이. 곳곳마다 그녀의 흉측한 얼굴이 가득했다.
예카틸리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어서 이 역겨운 꿈에서 깨어나길 바랐다. 그녀는 거울 하나를 들어 바닥으로 세차게 집어 던졌다.
와장창-, 조각난 유리 파편이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그중 가장 커다랗고 날카로운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제 목에 콱, 찔러 넣었다. 무수한 거울이 그 장면을 생중계하듯 반사했다. 붉은 피를 뒤집어쓴, 허영심 가득한 여인의 말로를.
*
틸다 레트랑은 레트랑 백작과 등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차디찬 지하감옥 바닥의 감촉은 고귀하게 자라왔던 귀족 부인으로서는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고독. 그것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이 감옥에 갇혔던 것이 어제였던가.
틸다는 저보다 먼저 이곳에 갇혀 있던 남편을 상봉하자마자 울컥 울음을 터뜨렸었다.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적응을 마친 사람처럼 보였다. 초점을 잃은 눈에선 어떠한 희망도 느껴지지 않았었고, 끌려온 틸다를 보고서도 눈길 한 번 던지고 말 뿐이었다.
어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레트랑 백작은 틸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탐욕스러웠던 제 아내를 탓하거나, 그녀에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틸다는 남편에게 매달려 울고 싶었다. 하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으니 어떠한 감정도 내비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등 돌린 채로 있었다. 그곳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
시간이 조금 흘러 레트랑 백작과 틸다 레트랑이 아델트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받아서가 아닌, 제대로 된 벌을 받기 위함이었다.
시아라와 카시안이 백작에게 강압적으로 서명을 받아냈던 서류는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레트랑 부부가 석방되기 전, 라튼이 이미 제 아비인 백작의 사업 비리가 낱낱이 적혀 있던 장부를, 증거로 황실에 제출했었으니.
백작의 침실에서 그 장부를 발견하기 전까지, 라튼은 몰랐었다. 제 아비가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그런 파렴치한이었음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하마터면 그때 시아라도 팔려갈 뻔했다는 것도, 그녀에게 모든 나락을 선사했던 것이 제 아비, 제 가문이었다는 것도.
레트랑 백작의 비리가 밝혀지면 라튼 역시 모든 것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제 손으로 가문을 벌하는 길을 택했다. 라튼은 백작의 판결까지는 차마 보지 못하고 제국을 떠났다.
라튼의 고발 이후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레트랑 백작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레트랑 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있던 그들 소유의 재산은 전부 황실에 몰수되었다.
틸다는 광장의 끝에 서서, 남편의 마지막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뒤로 그녀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길거리를 헤매며 방긋방긋 웃기도 했고, 어쩌다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는 날에는 주저앉아 울부짖기도 했다. 마땅히 지낼 곳이 없어 길거리에서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 황실 근위대의 제복을 갖춰 입은 근위병이 틸다 앞으로 지나갔다. 틸다는 그게 라튼이라고 착각했다.
“…… 아들?”
그녀는 양손을 허우적대며 근위병의 뒤를 쫓았다. 좁은 골목을 지나고, 말츠강 다리를 건너고. 마지막으로 큰 대로변을 건넜다. 그녀를 향해 마차 한 대가 달려왔다. 하지만 아들을 찾아 헤매는 틸다에게 말발굽 소리는 뒷전이었다.
쾅-.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쓸쓸하고 비참했다.
마지막까지 근위병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