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전쟁 같은 날들이 지나갔다.
예카틸리나와 틸다로 인해 벌어졌던 대소동 이후, 카시안과 나를 포함한 저택의 가족들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늘따라 새파란 가을 하늘을 만끽하며, 낸시와 정원에 나와 책을 읽던 도중이었다. 낸시는 내게 호신술을 배우겠다 선포했다.
“호신술?”
“네!”
“물론 당연히 좋지만……. 갑자기?”
“이번 일 겪고 나서 보니까, 제가 바보 멍청이가 된 것 같더라니까요!”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는 낸시를 보며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참. 웃지 마세요, 아가씨.”
“미안. 너무 귀여워서.”
낸시는 ‘흐응.’ 거리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네가 왜 바보야. 아니야, 얼마나 똑똑한데. 예카틸리나가 아나스타샤였다는 걸 처음 밝혀냈던 것도 다 낸시 너였잖아.”
나는 엄지를 추어올렸다.
“그건 물론 그렇죠!”
낸시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 그래서 더 바보 같다는 거예요.”
“뭐가?”
“다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못 했잖아요. 요리사들도 다 쓰러졌고, 아가씨도 못 지켰고……. 심지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 애랑 대화까지 나눠놓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낸시의 입꼬리를, 내 손가락으로 지긋이 끌어올렸다.
“공작님이 요리사들을 구했던 것도, 펠릭스가 내게 왔던 것도. 다 너의 덕분이었는 걸.”
“…… 제가 직접 때려눕혔어야 했어요. 처음 의심이 들었을 때 그 애를 쥐어 팼더라면! 아오. 진짜 열 받아!”
속마음을 털어놓듯 푸념하던 낸시가 헙, 입을 가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거칠었죠?”
“아니야. 그래서 좋아.”
“네?”
“어떤 말이든 당당히 할 수 있는 너라서 좋아.”
“…… 아가씨도 참.”
낸시가 내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어! 저기 알버트 님 오시네요!”
알버트는 양손 보따리 가득 짊어지고 경보하듯 다가왔다.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답니다.”
“이게 다…… 뭐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가씨를 위험에서 구했던 건 제가 선물했던 마법 구슬 덕분인 것 같아서요! 이거 다- 드리려고요.”
알버트는 호기롭게 커다란 천 주머니를 열었다. 마법 구슬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수백 개는 되는 듯했다.
“…… 이, 이걸 다요?”
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언제 다 쓰라고…….”
“아, 그거야 나중에 우리 귀여운 공주 왕자님 태어나면 가보로 물려주면 되죠!”
그 말에 내 얼굴이 홧홧거렸다.
“겨, 결혼도 하지 않은 걸요!”
알버트는 짓궂은 표정과 함께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에이- 곧 하실 거면서.”
나는 귀까지 새빨개져 그대로 책에 얼굴을 묻었다.
“참, 지금 각하께서 펠릭스 방에 가신다더군요.”
“아! 정말요? 그럼 저도 가볼게요. 다들 이따 봐요!”
두 사람을 향해 힘차게 손바닥을 흔들며, 저택 안으로 활기차게 달려갔다.
펠릭스를 생각하자 마음이 시큰거렸다.
예카틸리나가 뿌렸던 독약을 맞고 기절까지 했었던 펠릭스는, 꼬박 하루가 지난 뒤에야 깨어났었다. 깨어나서도 어찌나 고통을 신음하던지. 날마다 죄책감이 밀려들어 한동안 나는 그의 침대 곁에 앉아 밤잠을 설쳤다.
화상 흉터가 워낙 광범위하고 심했던지라 카시안의 보호막만으로는 회복이 느렸다. 카시안은 손님방에 머무르고 있던 펠릭스를 직접 찾아가 그를 치료했다. 나 역시 그때마다 함께였다. 나를 지키다 그리되었으니.
오늘 마지막 치료를 마치면, 남아있던 흉터는 이제 말끔하게 사라질 터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펠릭스가 우물쭈물했다. 침대에 등을 딱, 대고 누워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답답했는지 카시안이 핀잔을 줬다.
“뭐해. 옷 안 벗어?”
“아니, 그게…….”
“뭐, 왜.”
“아니 그러니까……. 그게 좀…….”
카시안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의 인내심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펠릭스가 눈을 질끈 감고 털어놓았다.
“저 오늘 치료 안 받을래요.”
이번에는 내가 놀라 물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흉 진단 말이야!”
민망한지 머리를 박박 긁던 펠릭스가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 올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귀가 토끼 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흑……. 소피아…….”
“…… 응?”
뜻밖의 대답에 나는 눈만 깜빡거렸다. 카시안은 잔뜩 인상을 썼다.
잠시 후 펠릭스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얼굴에도 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완전히 다 나아버리면…… 소피아한테 치료를 못 받잖아.”
나는 완치 기념으로 들고 왔던 마카롱 상자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경악한 내 턱도 같이 떨어졌다. 그건 카시안도 마찬가지였다.
“…… 시아라.”
“네…….”
“나 토할 것 같아.”
나는 말없이 카시안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튼……. 그러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소피아가 오늘 근무한다고 했거든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펠릭스가 바닥으로 재빠르게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갑작스레 단둘이 방에 남은 카시안과 나는 황당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시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쟤 진짜 바보 아니야?”
“맞아, 바보예요. 그냥 가서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되는…….”
“진작 말했으면 상처를 더 내줬지. 영영 안 낫게 해줄 수도 있었는데.”
쯧, 혀를 내두르는 카시안을 응시하며, 나는 초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카시안이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는 오늘 뭐 할까?”
“으음……. 데이트할까요?”
“좋지. 어디로 갈까. 내 방? 네 방?”
내 앞으로 훅, 들어온 그의 얼굴에 나는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 진짜! 오빠도 똑같이 바보예요!”
카시안이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 무슨 데이트가 하고 싶으신가요, 우리 아가씨.”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같이…… 수도에 가고 싶어요!”
“그래. 텔레포트로 다녀올까?”
“아니요. 기차 타고 가요.”
*
우리는 나란히 기차에 올랐다.
모처럼의 수도행에 괜스레 가슴이 설렜다. 카시안과 함께여서 더욱 그랬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멀거니 창밖을 응시하던 내가 카시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런 데이트가 하고 싶었어요.”
“데이트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거 아니야?”
“거봐,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나는 카시안의 손에 손깍지를 끼고, 팔을 쭉 뻗어보았다.
“얼마나 설레요. 이렇게 손도 잡고. 처음으로 둘이 함께 기차에 앉아보고.”
“진작 말하지.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카시안이 내 어깨를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평범한 연애.”
“평범한 게 어떤 건데?”
“마법으로 꽃다발이 짠- 하고 나타난다거나, 텔레포트로 먼 거리를 짠- 하고 이동한다거나.”
그 말에 카시안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런 거 말고.”
다시 축, 가라앉았다.
“그 사람에게 전해줄 선물을 고를 때면 상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미치겠고. 같이 거리를 걸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연극을 보고 쇼핑을 하고. 여유롭게 차 한 잔을 마신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거요.”
나는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내가 너무 대단한 사람을 만나고 있어서 그런 걸 바래도 될까 모르겠지만요.”
카시안은 내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사락 넘겨주었다.
“나는…… 어떤 마법을 쓰던 널 생각해. 그게 꽃 한 송이를 만드는 것이든, 널 닮은 별을 따다 주는 것이든.”
“…….”
“사실 그건 마법이랑 상관이 없어. 내 머릿속은 이미 너로 꽉 차서, 그냥 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치겠거든.”
“…….”
“그래도 그렇게 하자. 네 말대로 함께 오래오래 걷고, 가끔은 이렇게 같이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나고. 나도 좋아. 너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카시안…….”
“왜 안 되겠어. 내 삶은 너로 인해 존재하는데.”
나는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내 머리카락은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의 속삭임을 달콤한 자장가 삼아.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로지 아줌마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아줌마께 카시안을 꼭 소개해드리겠다 약속했었으니.
그리고……. 카시안을 처음 만났던 장소가 바로 이 잡화점 아니었던가.
짤랑-. 종소리가 여전했다.
나는 잡화점 안쪽으로 달려가 로지 아줌마를 꼭 끌어안았다. 나와 카시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줌마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아줌마는 카시안을 향해 정성어린 인사를 건넸다.
“우리 아이를 만나셨군요. 만년필 공작님.”
카시안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아줌마께 내 근황을 이것저것 알려드렸다. 회복한 유모가 나의 엄마가 되어주기로 했던 일이라든지, 보육원을 인수하게 되어 곧 아이들을 맞이한다는 일 같은.
그밖에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하며 한껏 수다를 떨었다. 로지 아줌마는 특히 학교 사업에 관심이 많으셨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 로지 잡화점의 문구를 우리 학교에 납품하고 싶어요. 정식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어떨까요?”
내 제안에 로지 아줌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니?”
“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이 이렇게 가득한걸요. 품질이 좋은 것은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아이고, 물을 필요가 뭐가 있니. 두말하면 잔소리인걸.”
“정말요?”
“물론이지. 걱정하지 말렴. 이 아줌마가 우리 원장님 뵈러 아주 멋진 옷으로 갖춰 입고, 정식으로 학교에 찾아갈 테니. 계약서는 그날 쓰자꾸나.”
나는 아줌마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기특하다며 껄껄 웃으시는 아줌마를 뒤로하고, 카시안과 나는 잡화점을 나왔다. 함께 시장 골목을 걸으며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났던 장소로 가요!”
카시안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게 어딜까?”
“에이. 벌써 까먹은 거예요? 황궁 앞에! 골목에서 만났잖아요. 내가 당첨금 찾으러 갔던 날.”
“아닌데.”
“어라? 그럼요?”
걸음이 우뚝 멈췄다.
“여기.”
“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시장 골목이었다. 물론 썩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라튼과 소피아가 선을 보았던 레스토랑 바로 앞. 그 자리였으니.
“여기서 우리 만난 적 없는데.”
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맞아. 만난 적은 없어. 내가 널 본 거지. 여기서 네가 라튼 레트랑의 뺨을 때렸었거든.”
“…… 그것도 봤어요?”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아…… 못살아 진짜…….”
“괜찮아. 그때 또 반했었으니까. 통쾌했거든. 망설임 없이, 저지르던 네 모습이.”
“나는 정말 화가 났었다고요.”
“알아. 그 당시 나는 겁쟁이였어. 부딪히는 법이 없고 일단 회피하기 바빴지. 내가 관여했다가 무언가 잘못되거나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 내 세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잿빛이었는데, 네가 그 남자의 따귀를 내려쳤던 그 순간 확신했어.”
“…… 뭐를요?”
“너로 인해 그 세상이 반짝일 거라고. 지금처럼 말이야.”
순간,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카시안의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은하수를 흩뿌려놓은 듯, 그렇게.
나는 그의 손을 꼭 힘주어 잡았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아가씨! 다음 장소로 가실까요?”
“이번에는 어디예요? 황궁 맞죠?”
“자자, 아무것도 모르시는 아가씨는 그냥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카시안이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말츠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