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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3화 (123/135)

123.

레트랑 백작의 최종재판을 향한 제국민들의 관심은 엄청났다.

한때 이름을 날렸던 가문의 주인이 당장 최고형에 처할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그래서였을까, 레트랑 백작의 가족들은 누구 하나 그곳에 오지 않았다. 틸다도, 라튼도. 라튼의 여동생도. 일가친척들까지 백작을 외면했다.

재판장에 백작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악인이 죄를 달게 받길 바라는 방청객들만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판사는 백작의 죄가 적힌 종이를 읽어 내려가며 만천하에 그의 죄를 알렸다. 동시에, 그의 뒤를 봐줬던 인물이 트리탄 선대 후작이라는 것 또한 밝혀지고 말았다.

방청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선대 후작이 죽었으니 안더스 트리탄 후작이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와, ‘그 일과 무관한 후작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을 이뤘다.

하나 제국에서는 연좌제가 폐지된 지 오래였다. 따라서 트리탄 후작은 제 아비의 일로 죄를 뒤집어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날 재판에, 후작이 등장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후작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고개 숙이며 제 아비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또한, 완전히 달라진 발르테르 보육원을 보여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트리탄 가문의 투명하고 지속적인 후원이 있을 것을 맹세하며.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마음껏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쓰고, 등록금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리탄 후작의 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지금껏 제국을 대표하는 교육기관들의 교육의 질은, 학비가 얼마나 비싼가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그런 제국에서 학비도 받지 않고 아무 평민들이나 다 교육하겠다니. 재판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혀를 끌끌 찼다. ‘이제 트리탄 후작가도 곧 망하려나 보지?’ 귀족들의 수군거림에도 후작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당당하고 밝아진 얼굴로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날을 떠올리며 어려운 결정을 내려준 후작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트리탄 후작이 담담하게 맞받아쳤다.

“끔찍한 과거는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뭘요?”

“제 아버지와 누이가 했던 행동들, 모든 것을.”

이제 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더스 트리탄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그의 잔에 한 방울의 커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에벨 원장님.”

“네, 저도요.”

*

오후에는 한나가 쌍둥이를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레아와 레오를 부둥켜안았다.

“잘 지냈어?”

“응! 레아랑 레오도 이제 이 학교 다닐 거야!”

두툼한 책을 가슴팍에 끌어안고 있던 레아가 방방 뛰며 즐거워했다.

“정말? 그럼 이제 매일매일 레아랑 레오 볼 수 있는 거야?”

“응, 누나! 누나는 엄청 좋겠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한껏 기대하고 있는 레오의 얼굴을 보자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왜 좋을까?”

“아, 그거야! 우리가 있어서 누나가 행복하니까!”

“어라? 우리 레오 똑똑하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레오는 까르르 웃으며 내 품에 달려와 안겼다.

“아침에도 만나고 저녁에도 만나면 하루에 두 번이나 행복하겠네?”

“응. 레오랑, 레아 덕분에.”

나는 기특한 말만 해대는 레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이들은 한참이나 재잘거렸다.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한 보따리였기에.

어느새 모든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창밖으로 우르르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보던 쌍둥이가 한나에게 졸라댔다.

“엄마. 우리도 밖에 나가면 안 돼요?”

“물론 되지. 엄마가 나가서는 어떻게 해야 한댔죠?”

“마차가 오는지 꼭꼭 확인하고, 뛰지 말고. 모르는 사람 쫓아가지 말아야 해요!”

“그럼, 금방 돌아와야 한다?”

아이들이 재빠르게 달려 나갔고, 덕분에 원장실은 한층 조용해졌다.

그러자 한나가 가방 속에서 분홍색 봉투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이 보육원에 물건을 기부하고 싶다는 시장 상인들의 목록이에요!”

“…… 네?”

전혀 뜻밖의 답에 놀란 내가 되물었다.

한나는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재촉했다.

“얼른 뜯어보지 않고 뭐해요? 나 그거 받아내느라 진짜 고생했는데.”

봉투를 뜯어 그 안에 든 종이를 펼쳤다. 앞뒤로 빼곡히, 검은 잉크로 채워져 있었다. 한나의 프란츠 레스토랑부터 그 옆에 청과물 가게. 맞은편의 정육점, 생선가게, 약국, 빵집 등등. 시장에 자리한 거의 모든 상점의 목록이 적혀있었다. 발르테르 보육원과 학교에 꾸준한 기부를 하겠다는 서명과 함께.

도무지 믿기 힘들어 몇 번이고 편지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에는, 보육원 옆에 무슨 학교냐고. 누가 그런 곳을 보내겠냐며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나 역시 모르지 않았다. 시설을 홍보하기 위해 상업지구와 시장에 나갔을 때마다 수군댔으니.

[“그런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서 우리 애들이 뭘 배우겠어?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원장이라는 여자도 그 보육원 출신이라더군!”]

내가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인 줄도 모르고 떠드는 사람들의 곁을 지나치며,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춰야만 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원해서 그렇게 된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밝은 아이들인데.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했다. 나 또한 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단단히 준비 중이었다. 한데 시장 상인들의 기부 약속이라니…….

나는 한참이나 종이만 바라보았다. 한나에게 너무 고마워서, 지금 내 마음을 그대로 꺼내 보여주는 것을 제외하면, 무슨 말로도 이 벅찬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선물이에요, 원장님.”

“선…… 물이요?”

“그동안 내가 바쁠 때마다 우리 애들 봐줬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도와줬고. 나랑 같이 산딸기 숲도 가줬잖아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보답.”

“한나……!”

“우리 레아, 레오. 잘 부탁해요.”

한나가 예쁘게 웃었다.

“나는 시아라를 믿으니까.”

그녀의 웃음은 전염병 같은 것이었다.

나 역시 따라 미소 짓게 만드는.

*

“레아야 어디가?”

“서점!”

“여기에 서점이 있었어?”

“응. 정문 옆에. 아까 엄마랑 들어올 때 봤어.”

이미 두툼한 책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또 서점에 간다는 말에 레오가 질색했다. 레오는 제 동생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했지만, 서점은 사랑하지 않았다.

“거길 꼭 가야 해? 오빠랑 여기서 놀자 레아야.”

“싫어.”

단호한 동생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거리던 레오가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는 아이들 발견했다. 레오는 헤- 입을 벌리고 그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오는 공놀이 해.”

레오의 등을 토닥거리며, 레아는 서점으로 향했다.

시장이나 상업지구에 있는 것보다 크기가 작았지만, 있을 만한 책은 다 있었다. 앞으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이곳이 제 천국이 될 거란 생각에, 레아의 마음이 콩닥거렸다.

힘차게 서점을 쏘다니던 레아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때, 정문 앞에서 웬 소년 하나가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가운데에 있는 갈색 머리 소년도, 둘러싼 아이들도 전부 제 또래였다. 갈색 머리 소년을 제외한 아이들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교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 이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레아가 그 옆을 지나칠 무렵, 무리의 아이들이 갈색 머리 소년에게 말했다.

“야! 너 이 학교 다녀?”

“…….”

“심지어 여기 사나 봐!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여기 돈 없고 엄마 아빠 없는 거지들만 다니는 데래!”

온갖 조롱을 받고 있던 소년, 미카엘이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그러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참았다.

‘여기서 싸우면…….’

시아라가 본인을 이곳에 데려온 걸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계속 견디고 견뎠다.

그때, 미카엘의 옆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웬 노란 머리 소녀였다.

“흠흠! 다들 내 말 잘 들어.”

“얘는 또 뭐야?”

무리의 아이들이 한껏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소녀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제 할 말만 했다.

“제국 형법 제300조. 모욕죄.”

“……?”

미카엘에게는 도무지 어려운 말이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멍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노란 머리 소녀는 연이어 말했다. 제 몸보다도 커 보이는 책을 펼쳐 양손으로 받쳐 든 채로.

“난데없이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에 처한다.”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벌금……?”

“모욕……?”

“1년 이하의 징역……? 징역이 뭔데?”

그 뒤로 레아는 별다른 말없이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아이들은, 알쏭달쏭한 소녀의 말을 추리하느라 바빴다. 저들끼리 심각하게 토론을 했다. 기어코, 정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그거 무서운 거 아니야?”

“…… 맞아! 감옥…… 감옥에 가는 거야!”

“헉……! 야, 얼른 도망가자!”

작은 소녀의 행동에 겁먹은 아이들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바보들.”

그들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레아가 혓바닥을 메롱-, 하고 내밀었다. 그리고는 빙그르르 돌아 미카엘을 향했다. 레아는 못마땅하게 미카엘을 응시하다가, 들고 있던 책을 소년의 가슴팍에 부딪쳐 건넸다. 워낙 두툼한 탓에 몽둥이로 때리듯 팍, 소리가 났다.

“자, 너도 이거 읽고 공부해.”

“…… 응?”

“너 혹시 말 못 해?”

“아니.”

“그럼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면 안 돼!”

당황한 미카엘이 이번에는 진짜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아까처럼 말을 참은 것이 아니라, 아예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노란 머리의 소녀가 쫄래쫄래 사라졌다.

미카엘은 소녀가 움직이는 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소녀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미카엘은 제일 첫 장을 펼쳤다.

‘레아.’ 소녀를 닮아 똑 부러지는 글씨로 적혀있었다. 그 이름을 반복해 읊었다.

책이 닿은 가슴팍이 불에 댄 듯 뜨겁고, 찌르르 전기가 오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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