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4화 (124/135)

124.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유 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거실에 나와 놀고 있는데, 미카엘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는 엘리안에게 물었다.

“엘리안, 미카엘은 어딨어?”

“형아는 방에 있어.”

“왜 같이 안 놀고?”

“몰라. 형은 지금 눈사람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안 움직여.”

아리송한 엘리안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미카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혼자 여기서 뭐 해? 무슨 고민 있어?”

미카엘은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책상을 쏘아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책상 위에 올려있는 아주 두꺼운 책을.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미카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나……. 모욕죄가 뭐야?”

“응?”

나는 머리를 갸웃갸웃했다.

“그럼…… 법전은? 이거 뭐 하는 책이야?”

그제야 그의 앞에 놓인 책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책 한가운데에 ‘제국 법전’이라 적혀있는 것을 보고 내가 경악했다.

“이런 책을 어디서 구했어?”

한참을 망설이던 미카엘이 새빨개진 얼굴로 답했다.

“처……, 천사가 주고 갔어.”

모호한 그 말에 더욱 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외부인이 보육원에 들어와서 이 어린아이한테 법전을 건네고 갔다는 말이야? 두 가지 상황 모두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뜨악하며 보안에 더 많은 힘을 쏟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나저나 여덟 살 난 아이에게 이 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담. 나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말이야.”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았다.

“네가 너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야.”

“내가 나답게?”

“응. 너도 이 세상에서 남들과 똑같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

“아무도 너를 무시할 수 없도록, 그렇게 지켜주는 책.”

“나를 지켜주는 책…….”

표지를 쓰담 쓰담 매만지며 저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그럼 이 책을 준 사람은 내 수호천사야?”

“음……, 그런 셈이지.”

미카엘의 녹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 무거운 책을 품에 안고 책상 아래서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그거 사실 조금 어려운 책인데.’라고 말하려다가, 잔뜩 기뻐하는 아이에게 물었다.

“그 책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응! 나, 이거 다 읽을 거야.”

“정말?”

눈까지 꼭 감고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얼른 제국어 공부 다 끝내고, 끝까지 다 볼 거야!”

나는 기특한 미카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들뜬 마음이, 내 손끝에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

학교를 연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고,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으니.

오후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집에 보내고 나면, 곧바로 보육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오늘 하루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챙기거나 시설을 관리하고. 아무 문제가 없었는지 전부 점검해야만 했다.

새벽녘부터 시작된 일과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너무 늦어 보육원에서 자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카시안이 들을 리 없었다. 그는 피곤한 와중에도 매일같이 나를 데리러 왔다.

마차에 나란히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곤 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그의 향기라던가,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 소리라던가. 도착할 때까지 맞잡고 있던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까지. 마차를 타고 귀가하는 시간은 퍽 짧았지만, 하루 중 가장 소중했다.

그리고 내일!

일주일을 쉼 없이 달렸던 나에게 첫 휴식이 주어졌다.

그 기념적인 날을 그냥 침대 위에 누워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아주 특별한 데이트를 준비했다.

무려 더블데이트!

소피아와 펠릭스는 좋은 생각이라며 입을 모았다.

조금 툴툴거리던 카시안도 ‘그게 꼭 하고 싶어?’하고 묻더니, 단번에 수락했다.

[“대신 앞으로 일주일은 내 방에서 자야 해.”]

엉큼한 조건 하나가 붙기는 했으나.

*

대망의 아침 해가 밝아왔다.

펠릭스와 소피아는 시간에 맞춰 저택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아직도 어색한 듯 아닌 듯 애매한 거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물론 이것조차 크나큰 발전이었으니…….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들 준비됐어?”

내 물음에 소피아는 아주 가볍게, 펠릭스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언니는 말 타본 적 있어?”

“아니, 없어.”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카시안의 향기를 맡으며, 사뭇 당당하게 말했다.

“공작님이 나 안 떨어지게 잘 잡아주시겠지. 그렇죠?”

카시안을 올려다보자 그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물론이죠, 아가씨.”

펠릭스는 긴장된 낯빛이었다. 그 역시 나처럼 말을 몰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소피아, 너도……. 나 안 떨어지게 잘 잡아줄 거지?”

어느새 다시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로 머리를 자른 소피아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끝을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거야. 오빠가 하기 나름이죠.”

“응?”

“나를 아주 꽉- 잡으면, 안 떨어지는 거고. 아니면 뭐.”

소피아는 펠릭스를 향해 손바닥을 펼친 뒤 좌우로 흔들었다.

“쿵- 떨어지면서, ‘이 세상아 안녕- 나는 먼저 갈게.’ 하는 거지.”

조곤조곤. 천연덕스럽기까지 한 소피아의 목소리에 펠릭스가 흠칫 놀랐다.

과연 그는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나는 내심 걱정스러워졌다.

“우리…… 꼭 살아서 만나. 알겠지?”

내 말에 소피아가 싱긋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준비된 하얀색 말 위에 올라탔다.

카시안이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탁탁 두드렸다. 그 출발 신호에 맞춰 말이 걷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느릿한 말발굽 소리가 힘있게 울려 펴졌다.

저택 뒤편으로 이어진 숲을 빠져나가자 황금빛 들판이 펼쳐졌다. 땅을 박차는 말발굽에도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카시안의 앞에 앉은 나는, 그의 단단한 팔 사이에 갇혀 말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말이 더 빠르게 달릴수록, 안장 깊숙이 앉은 그가 나를 더욱 끌어당겼다. 목덜미와 귓불에 카시안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뜨거웠다. 차가운 바람을 아무리 쐬어도, 그 열기가 도무지 식지 않을 만큼.

*

카시안과 반대로, 소피아는 처음부터 속력을 내서 달렸다.

덕분에 펠릭스는 소피아의 허리를 으스러질 정도로 힘껏 끌어안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체구가 훨씬 작았던 탓에, 오히려 그녀가 제 품에 쏙 들어간 기분이었다. 펠릭스 본인이 소피아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지금 그들의 자세를 생각하면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다 살기 위해 그런 거니까.

말이 빠르게 흔들릴수록 칼날처럼 반듯했던 소피아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짧은 머리 때문에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검은색 머리카락과 확연히 대비되는, 하얀 피부가.

펠릭스는 아찔해졌다.

주변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제 형태를 잃고 빠르게 스쳐 갔다. 그러나 오직 소피아만큼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그녀의 움직임은 느리게 보이고, 그 주변은 빛나기까지 했다. 곧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 와중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감상이라니. 펠릭스는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으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나 이제는 눈을 감아도 아른거렸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소피아가 펠릭스에게 물었다.

“그날…… 미술관에서 우리가 만났을 때요.”

그러나 악단의 음악처럼 정열적인 말발굽 소리와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가 한 데 뒤섞여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응? 잘 안 들려! 더 크게 말해줘!”

“미술관에 있던 게 나라서…… 좋았어요?”

소피아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혹여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봐, 그녀는 마음을 졸이고 또 졸이고 있는데도. 침묵은 거절보다도 더 무서웠다. 혹시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소피아는 일부러 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고 있다는 것.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드디어, 펠릭스가 답했다.

펠릭스에게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소피아에게는 억겁의 세월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

“…… 당연한 거 아니야?”

소피아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쉴 새 없이 질주하던 말이 주인의 명령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진짜요?”

소피아가 놀란 눈으로 뒤돌았다. 이제야 그녀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서, 펠릭스는 반갑게 웃었다. 양 볼에 깊은 보조개가 우물지도록.

“미안. 잘 안 들려서, 네가 했던 질문이 그게 맞나 한참 생각해야 했어.”

그녀가 입술을 샐쭉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뭐, 맞는지 아닌지 고르고 생각까지 할 문제였나…….”

“네가 너무 당연할 걸 물었으니까.”

“…… 네?”

“그 자리에 네가 있어서 좋았어.”

소피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펠릭스의 눈을 마주했다.

“그날 네가 했던 말 기억나?”

그녀가 끄덕끄덕했다. 잊을 리가 없다. 그와 나눴던 대화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니까.

*

펠릭스의 엄마가 막 깨어나 회복하던 무렵.

소피아는 즐거운 마음으로 전시회 티켓을 준비했다. 지금껏 애써왔던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한 장 남은 티켓이라며 펠릭스에게 건네기는 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와 함께 가고 싶어서 두 장을 샀었으니까.

그녀는 같이 전시회에 가지 않겠냐는 말을 연습했다. 일주일 내내.

그러나 펠릭스의 앞에만 서면 왜 자꾸 연습하지도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오는 건지. 그녀는 헛소리와 함께 티켓을 건네고 돌아선 순간부터 후회했다.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바보. 다른 일은 잘만 하면서.

결국, 소피아는 이틀을 꼬박 전시회장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주말에 열리는 전시회였으니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에 보러오겠거니 하면서.

혹여 그가 오지 않거나 엇갈린다면……. 그때는 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인연이 아닌 사람을 홀로 붙잡고 있기엔, 살짝 지쳐있었으므로.

토요일.

그날따라 해가 쨍쨍한 게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펠릭스는 오지 않았다.

출입문은 하나가 분명한데, 저도 모르는 다른 문이 있는 게 아닐까? 소피아는 안내원들에게 물었다.

“입구는 여기 하나입니다.”

벌써 스무 번도 넘게 들은 대답이었으나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엇갈렸을까 봐, 무서웠다.

일요일.

집에서 나올 때는 맑았던 하늘에 잔뜩 먹구름이 몰려왔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전시회장이 문 닫기 한 시간 전.

그녀가 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때,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오늘도,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