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5화 (125/135)

125.

소피아가 펠릭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었다.

아델트 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했던, 바로 그때.

그녀의 주요 업무는 간호사들을 도와 잡일을 하거나 입원 환자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봉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귀족 대다수가 가문을 홍보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보여 주기식이라 생각했으니.

하지만 소피아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정성을 쏟았고, 환자의 아픔을 제 고통처럼 여겼다. 그러니 누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느 날 그녀가 비품 정리를 마치고 창고에서 나왔을 때, 접수대에 앉은 간호사들이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남자, 진짜 잘 생기지 않았어?”

“잘 생긴 것도 물론이지만. 나는 그 남자가 웃는 게 너무 예쁘더라. 어찌나 생글생글하던지. 보는 내가 기분이 다 좋아지더라니까?”

“아, 맞아.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것 하며.”

“성격도 온순하니 참 좋아 보이던데.”

“엄마가 그렇게 아프셔서 어쩐다. 어린 나이에 짠하기도 하지.”

조용히 듣고 있던 소피아가 물었다.

“누가 그렇게 멋있어요?”

“아, 소피아. 왔어? 그 왜, 3층에 마리아 루크 환자분 있지? 그분 아들, 펠릭스.”

“아들이 있었어요? 왜 한 번도 못 봤지?”

“그래? 매일 오는데. 시간이 계속 엇갈렸나 봐. 나중에 한번 봐봐. 진짜 사람 괜찮거든.”

그날 이후 소피아의 3층 출입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얕은 호기심이었다. 얼마나 잘나서 다들 저렇게 난리인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펠릭스의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었다.

‘매일 온다더니 왜 안 보여?’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도 호기심이었다. 아주 약간의 집착을 곁들인.

결과는 뻔했다. 또 허탕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계단을 내려가던 그때, 소피아는 위로 올라오던 남자와 부딪쳐 휘청거렸다. 앞을 보지 않고 계속 뒤돌아 병실 문을 기웃거렸으니 그녀의 책임이 크기는 하다만, 남자는 그저 무심하게 방관하듯 소피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해진 소피아가 먼저 사과했다.

“죄송해요. 앞을 못 봤어요.”

남자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사라졌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의 옷에서 알싸한 술, 담배 냄새가 났다.

아무 말 없는 남자의 태도에 짜증 난 소피아도 쾅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 남자가 간호사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했던 펠릭스 루크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채로.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은 이틀 뒤였다.

그는 꼬마 아이 하나와 함께 3층 복도 간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오빠, 나 오늘은 이 책 읽어줘.”

“이건 레아한테 너무 어렵지 않을까?”

“아냐! 레아는 똑똑해서 다 알아.”

“맞아. 오빠가 몰랐네, 그치?”

아이를 대하는 남자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 나는 그렇게 매정하게 노려봐놓고.’

소피아가 퉁명스레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성질이 날 것 같아 되돌아가려는데,

“펠릭스 오빠가 최고야!”

까르르 웃는 아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응? 펠릭스?’

설마!

소피아가 멈칫하며 다시 뒤돌았다. 웃음꽃이 만개한 남자의 얼굴에, 예쁜 보조개가 피어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남자가 도대체 뭐가 착해? 온순? 하! 다들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네!

그녀는 씩씩거리며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에 펠릭스가 매일매일 보였다. 거의 매 순간,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주변 환자들, 간호사, 의사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그게 소피아의 속을 박박 긁었다.

복도에서 잠시 쉬고 있던 펠릭스의 곁을 지나칠 때, 소피아가 샐쭉거렸다.

“저기요.”

“네?”

“병문안 오시면서 술 드시고 담배 피우시면 안 되죠. 아이랑도 자주 노시던데.”

“…… 저 그런 거 안 하는데요?”

펠릭스는 놀란 얼굴이었다.

“거짓말.”

소피아가 무표정으로 그를 지나쳤다. 그가 그랬듯.

그렇게 한마디 하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건만, 그녀의 머릿속에 그의 표정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아니라는 듯 당황스러움이 그득 묻어있던 바로 그 표정.

“소피아, 3층 그레타 할머니께 이 꽃 좀 전해드리고 올래?”

소피아는 곧장 할머니의 병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펠릭스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주 찰나였지만.

화병에 꽂혀있던 꽃을 새것으로 바꾸고 서둘러 나오려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요? 그 옷은 결국 못 찾으셨어요?”

“응. 전쟁이 난다고 빨리 피하라는데 그 옷을 챙길 새가 어디 있었겠어. 그래도 그게 영감이 줬던 마지막 선물일 줄 알았으면 입고라도 갈 걸 그랬어.”

추억을 회상하는 할머니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어떻게 생겼는데요?”

“분홍색 꽃 자수가 큼지막하게 있던 스웨터였는데. 그래, 소피아가 방금 가져온 이 꽃처럼 말이야.”

할머니의 말에 펠릭스의 눈동자가 꽃을 향했다가, 소피아에게 옮겨갔다.

그 순간, 그가 옅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펠릭스의 미소에 놀란 소피아가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왜……. 왜 웃어?’

인제 와서 웃으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여름이라 그런지, 너무 더웠다. 그래, 여름이라서.

다음 날 그레타 할머니의 병실 벽에 못 보던 그림이 붙어있었다. 분홍색 꽃 자수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할아버지.

“아…….”

소피아는 넋을 놓고 그림을 응시했다.

“잘 그렸지?”

“…… 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옷이었어. 너무 예뻐서 저 옷만 입으면 난 영감 손을 잡고 춤을 췄었지. 우리 영감도 살아있었다면 저 그림처럼 늙었을 텐데.”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에 축축한 추억이 일렁거렸다.

“어제 펠릭스 씨가 그렸나 봐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착한 애가 자꾸 고생만 해서 어쩌누.”

“고생이요?”

“제 엄마 병원비 벌겠다고 온갖 일을 다 하고 다니잖어.”

“…….”

“신문 배달부터 레스토랑 종업원에. 얼마 전에는 무슨 귀족들 파티에 가서도 일하고 왔대. 거기는 아주 난리 통이 따로 없었다더니만.”

문득 계단에서 그와 부딪혔던 날이 떠올랐다. 잔뜩 피곤해 보이던 얼굴. 옷 여기저기에 묻은 얼룩. 술과 담배 냄새. 그리고…… 자기는 그런 것 안 한다던 그의 말까지.

“하아…….”

그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수도 집에 돌아갔을 때, 소피아는 내내 부모님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어디 가문의 누구와 선을 보라는 둥. 당장 공부와 봉사를 그만두고 신부 수업을 받으라는 둥. 그녀가 거부하자 사흘간 내려진 외출 금지령까지. 언니들은 막냇동생 소피아에게 철이 없다며 어서 정신 차리고 살라 했다.

소피아는 나흘 만에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가문의 영식과 선을 보겠다고 약속한 뒤에.

다시 아델트로 돌아가 병원 일을 마치고 나왔는데, 그날따라 비가 왔다.

단정하게 입고가라는 언니들의 성화에 못 이겨 흰색 블라우스를 입었건만. 이대로 비를 맞으면 속옷까지 훤히 보일 것이 뻔했다. 안 그래도 선 자리에 나가기 싫어 죽겠는데. 비까지 쫄딱 맞고 가야 한다고?

이보다 처량한 신세가 또 있을까. 울컥 서러워졌다. 아무것도 제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그 집구석이. 이 날씨가. 하필 이런 옷을 입고 나온 저 자신이.

한참을 병원 정문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소피아가 결심한 듯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빗방울이 기다렸다는 듯 우두둑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을 때,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줄기가 자취를 감췄다.

소피아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우산을 든 펠릭스가, 어느새 그녀 옆에 있었다.

“…… 어…….”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 전혀 소피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거 쓰고 가요.”

“…… 네?”

“그쪽한테 더 필요한 것 같아서.”

“아, 아니…… 네. 아니, 전 괜찮은데.”

횡설수설하기까지.

“지난 번 실수하고도 무심했어요. 미안해요.”

“그, 그건…… 저도 부주의해서……!”

“며칠 밤낮으로 일했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랬어요. 그날은 유난히 더.”

펠릭스는 멋쩍은지 시선을 내리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소피아를 마주했다. 그가 예쁘게 웃었다. 양 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갈 정도로.

“괘, 괜찮은데! 진짜로!”

펠릭스가 소피아의 손에 우산을 쥐여 주었다.

“꼭 쓰고 가요.”

그녀의 어깨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펠릭스가 입고 있던 겉옷이었다.

“참, 오늘은 그런 나쁜 냄새 안 나요. 조심히 가요.”

“저, 저기요!”

소피아가 불러보았지만, 펠릭스는 벌써 저만치 뛰어간 후였다.

소피아는 그날 아무개와의 선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종일 펠릭스의 옷과 우산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것만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열병 앓듯 시작된, 그녀의 짝사랑은.

그 뒤로 2년.

펠릭스를 기다리던 전시회의 마지막 날.

오늘도 예상치 못한 소나기가 내렸다.

소피아가 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그때, 드디어 펠릭스가 나타났다. 오늘도, 우산을 씌워주면서.

“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펠릭스가 놀라 물었다. 그는 저 멀리서 소피아를 보자마자 달려온 듯했다. 숨이 찬지 호흡은 거칠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했다.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소피아는 일주일이나 연습했던 말을 그제야 전했다.

“이 전시회…… 나랑 같이 보면 안 돼요?”

펠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봐요. 같이.”

그녀는 뒤돌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환호성을 지를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전시회를 빠른 걸음으로 둘러보았다. 어차피 소피아에게 전시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와 단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 그게 중요했다.

이 한 시간이 지나면 이제 그와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바삐 걷던 발을 멈춘 그녀가 펠릭스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저기요.”

“네.”

“저, 오빠 좋아해요.”

“…… 네?”

“좋아해요.”

펠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기…….”

잠시 멍하게 있던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지 않던 말이 나올까 봐, 소피아는 양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만! 대답이 듣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그냥, 그것만. 내가 좋아한다고. 그것만 알아주면 돼요.”

댕-. 댕-.

때마침 전시회를 마치는 종이 울렸다.

용감해지는 마법이 걸렸었다 풀린 기분이었다. 소피아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아주 빠르게 전시회장을 벗어났다. 비가 그치고, 숲 너머로 찬란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다시 달아나려 하는 그녀의 하얀 손을 펠릭스가 살며시 잡았다.

“이거 같이 보기로 했으니까.”

“어…….”

“집에 가는 것도 같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손에 닿는 그의 온기 때문에.

‘같이’라는 그 이상한 단어 때문에.

달려와 준 그 때문에.

그냥 펠릭스, 그 때문에.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다.

*

말발굽 소리가 느릿하게 울렸다.

미술관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소피아의 눈동자를, 펠릭스가 그윽하게 응시했다.

“그날 네가 했던 말 기억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도, 네가 좋아. 소피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