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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6화 (126/135)

126.

한참을 내달리던 말이 도착한 곳은 작은 호숫가 주변의 오두막이었다.

카시안은 하얀색 말을 근처 나무 기둥에 단단히 묶어두었다. 여기까지 두 사람을 태워 오느라 고생한 말이 나무 주변의 무성한 풀을 허겁지겁 뜯어 먹기 시작했다. 카시안은 투레질을 하는 말의 머리털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뒤돌아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오두막 안에서 소피아와 펠릭스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싶어 근심 걱정이 밀려들었다. 초조해하던 낯빛의 펠릭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왜 안 올까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데…….”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카시안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겠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심드렁한 말투로.

“어린 애들도 아니고.”

“그래도…….”

“걱정하지 마.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게다가 소피아 엘링턴은 의사잖아. 펠릭스는 어엿한 기사고.”

카시안의 한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네. 너무 안 오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해서요.”

“네가 신경 쓸 건 그런 게 아닐 텐데.”

“…… 네?”

“여기에 너랑 나랑 있다는 거잖아. 아무도 없이, 딱 우리 둘이.”

뺨을 간지럽히던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입술로 내려갔다. 이 모든 순간에도 카시안의 눈은 오직 나를 향했다. 한참이나 내 입술을 응시하다가, 또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나른하고 그윽한 카시안의 시선이 나를 꽁꽁 옭아맸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더운 열기에 귓불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래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에 걸며, 카시안이 눈을 접어 웃었다. 입술을 매만지던 손길이 조금 더 내려와 목과 쇄골을 쓸었다. 손이 닿는 부위 하나하나에 화산처럼 뜨거운 열이 올랐다.

“나는 준비됐는데.”

느릿한 그의 목소리가 붉어진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어때?”

“무, 무슨 준비를……!”

“나 지금 너한테 키스하려고.”

이 남자가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툭툭 던지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에도, 두 뺨이 제멋대로 달아올랐다. 카시안이 내 목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힘에 이끌려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내렸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질끈 눈을 감았다. 피부에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선연했다. 입 맞추는 일이 처음도 아닌데도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나와 달리 카시안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이상한 기분에 슬쩍 눈을 뜨자 장난스레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가까이서 느껴졌던 온기는 뒤로 한 뼘 물러선 상태였다.

“뭐…… 뭐……, 무슨…….”

“기대했어?”

황망한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맴돌았다.

“비, 비켜요! 기, 기대는 누가 했다고!”

그의 장난에 민망해진 내가 입술을 꾹 깨물며 허리를 바로 했다. 그러자 카시안이 낮게 쿡, 웃으며 내 무릎 위에서 일어났다.

“미안. 그렇게 기다리고 있던 줄도 모르고.”

“아, 아니라니까요……!”

열심히 항변하는 내게 비스듬히 다가와 내 어깨를 부드럽게 툭, 밀쳤다. 등이 바닥에 닿으며 모포 위에 내 몸을 의지했다.

“시작하면.”

잔잔한 호수 같던 그의 눈동자에 파도가 일었다.

“못 멈출 것 같아서.”

그의 시선처럼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귀하디귀한 내 아가씨야.”

카시안은 짧은 입맞춤 후 고개를 들었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누…… 누가, 누가 멈춰 달랬어요?”

“시아라.”

“나도 멈출 생각 없는데.”

그대로 그를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당황하여 바닥을 지탱하던 그의 팔에 조금씩 힘이 풀렸다. 조심스러웠던 입맞춤이 뜨겁게 변모하기까지는 아주 찰나면 충분했다.

호흡이 가빠지며 온몸에 작은 열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셔츠 깃을 붙잡고 있던 내 손이 카시안의 목덜미로 옮겨졌다. 끌어안으며 피부에 닿는 그의 체온도, 뜨거웠다. 나처럼.

사방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옭아맸던 그의 손가락이 뜨거워진 귓불을 쓸었다. 그리고는 턱을, 그다음으로는 목을. 온몸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열기에, 이상한 감각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시아라.”

그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뜬 숨결이, 고요한 오두막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문 틈 사이로 우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어떠한 열기도 식히지 못했다.

우리를 스치고 간 그 바람이 오두막을 둘러싼 단풍나무 잎마저 우수수 떨어트렸다. 그 편안한 온기에 기분이 좋았는지, 근처 나무에 묶여있던 하얀 말조차 히이잉 소리 내 울었다.

한참을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열기를 더했다.

그리고, 카시안은 나를 두 팔로 안아 물가 바로 옆에 박혀있는 평평한 바위로 이끌었다. 그의 겉옷을 펼쳐 바위 위에 깔고, 나란히 앉았다. 말을 놀라게 했던 그 바람이 조금 더 선선하게 변해 되돌아오고 내 원피스 끝자락을 흔들었다. 그제야 얼굴에 피어올랐던 열감이 차분하게 식어 갔다.

“여기 어때?”

카시안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는 펠릭스와 소피아를 걱정하느라 보이지 않던 숲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한낮 내리쬐는 햇볕이 둥근 에메랄드빛 호수 위에서 조각나 부서졌다. 호수 언저리에 줄지어 늘어선 노란 버드나무들이 수면과 맞닿아 넘실거리고, 느지막이 떨어진 꽃잎은 은하수를 뿌려놓은 듯 물 위에 수 놓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입이 헤, 벌어진 것도 모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요. 정말…….”

“예전에 자주 왔던 곳이야.”

머리 위로 우뚝 솟아오른 단풍나무에서 붉은 낙엽 하나가 툭 떨어져 내 이마 위로 떨어졌다.

“시아라, 널 만나기 이전에는 늘 그랬었지만.”

카시안은 맑게 웃으며 그 낙엽의 끝자락을 잡았다.

“이따금 견딜 수 없게 외로워지는 날이 있었어.”

밝은 얼굴과는 다르게 차분한 어조였다.

“그럴 때면 말을 타고 여기에 왔었지. 몰래. 아, 나중에 알버트는 알게 되었으니 아무도 모른 건 아니었겠네.”

“그 오래전부터 알버트도 함께 지냈던 거예요?”

“응. 알버트의 네블라딘 가문은 대대로 아델트의 비서를 도맡았었거든. 물론 알버트랑 내가 지금처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으음……. 카시안과 어색한 알버트라. 별로 상상이 안 되는데요.”

“그야 너도 잘 알잖아? 알버트가 얼마나 꽉 막혔는지.”

카시안의 말에 슬그머니 알버트를 떠올렸다. 제 주인이 게으름 피우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잔소리하던 그 모습을. 그러자 입술 사이로 풉,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필 그 자식이 제 부친을 따라 저택에 왔던 첫날. 나는 가출을 하려고 했어.”

“가출이요?”

“응.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었거든. 아버지 말을 잘 들으면 조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요?”

“너를 찾으러 가는 일.”

시린 눈이 나를 마주했다.

“내가 약속했었잖아.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꼭 다시 찾으러 가겠다고.”

“카시안…….”

“그런데…… 내가 공작 저택으로 돌아간 그 순간부터,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

“보육원을 가려고 할 때마다 실패했어. 어찌나 감시가 심하던지. 승마 연습을 핑계로 이 숲을 잠시 오가는 것을 제외하면 나는 어디도 갈 수 없었어. 그 거대한 저택에서 만들어낸 꼭두각시 인형, 그게 나였거든.”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너무 답답하고 짜증나서…… 말을 몰고 어디든 도망치려고 했어. 일단 여기서 벗어나서, 그다음에 너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그냥 말에 올랐지. 그런데…….”

“그런데?”

“걸린 거야. 알버트한테.”

손에 쥐고 있던 낙엽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카시안이 입으로 후, 바람을 불었다. 그 바람에 날아간 낙엽이 잔잔한 호수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알버트는 그걸 제 부친에게 이르겠다고 악을 썼고, 나는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어.”

“그래서, 성공했어요?”

“아니. 기어코 가서 말하더라.”

“…… 저런.”

“당시의 나는 그렇게 비열한 놈과 절대 일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는데.”

수면 위에서 느리게 유영하는 낙엽을 응시하던 카시안이 슬쩍 미소 지었다.

“내가 자꾸 비뚤어지니까. 아버지도 어쩔 수 없으셨던 모양이었는지, 약간의 자유시간을 허락하셨지. 여전히 감시가 붙었지만.”

“그게 알버트였구나.”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놈이 감시하겠다고 따라왔다가, 저 물에 빠졌어.”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호수의 한가운데였다.

“내가 저기로 뛰어들었거든.”

“네?”

“물론 너처럼 말고. 수영하러, 수영.”

혹시 나와 같은 이유로 물에 뛰어들었던 걸까, 그를 마주했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나를 구한답시고 수영도 못하는 놈이 뛰어든 거야. 잔뜩 오해한 채로. 발버둥 치는 그 꼴이 어찌나 짠하던지. 얄미운 놈이었지만 구해줬더니, 그때부터 고분고분하더라.”

카시안이 내가 신고 있던 플랫슈즈를 조심스레 벗겼다.

“그 뒤로 나는 매일 여기 왔어. 알버트는 저 구석에, 나는 이 바위 위에.”

카시안도 어느새 맨발이었다. 그가 먼저 물속에 발을 담갔다. 잔잔했던 수면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사뿐하게 일렁거렸다.

“이렇게 가만히 발을 담그고 있을 때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나아졌거든.”

그를 따라 물속에 발을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차가웠지만, 금세 체온과 비슷해져 오히려 포근했다. 물살을 따라 힘차게 헤엄치던 작은 물고기 떼들이 내 발을 간지럽혔다. 그게 기분이 좋아 한참이나 발을 동동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아래서 물장구를 치자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마음이 천진해졌다.

“이 자리에 앉아서.”

카시안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찌르르 울렸다.

“너를 생각했어.”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코끝을 스치던 맑은 바람도 멈춘 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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