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화
따사로운 햇볕이 머리 위를 달구고, 여기저기서 풀벌레 소리가 윙윙거리는 그런 여름날.
카시안 폰 아델트와 시아라 폰 아델트.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났다.
아델트 공작 저택은 이보다도 평화로울 데가 없었고, 시아라가 관리하는 보육원과 학교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아델트의 주인인 카시안과 시아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들이 일구었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두 사람은, 일주일 중 하루는 온전히 비워두기로 약속했다. 함께 보내는 하루가, 사실은 가장 소중했으니까.
주말마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공작 부부가 오늘 향한 곳은 아델트의 상업지구였다. 인파로 가득한 상업지구를 남편과 함께 걸으며, 시아라는 과거의 어느 날을 회상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데이트하던 남녀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었던 그 날을.
꼭 마주 잡은 두 손을 흘긋 응시하던 시아라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뭐 좋은 일 있어?”
“네.”
“뭐가 그렇게 좋아?”
“당신이랑 여기에 있는 거요.”
주변 사람도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미소. 카시안 역시 아내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의 시야에 사람들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선 것이 보였다. 시아라는 주변 사람들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자마자 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제국 로또 발표를 앞두고 있나 봐요.”
그 말에 카시안이 줄의 시작점을 슥 확인했다. 곧, 그의 시선이 제 아내에게 향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복권에 당첨됐을 때 말이야. 무슨 꿈이라도 꿨었어?”
뜬금없는 질문에 시아라가 갸웃거렸다.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요?”
“응. 왜, 어떤 사람들은 꿈에서 본다잖아. 너도 그랬나 싶어서.”
“으음……. 꿈이라.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시아라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에요. 제 꿈은 아니……. 어라? 잠……, 잠깐……!”
그녀가 상업지구 한복판에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무슨 일이야?”
카시안은 그런 아내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새로 오픈한 카페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보이는.
“시아라?”
“아델트에도 드디어……. 로버슨 아이스크림 가게가 생겼어요!”
“로버슨 아이스크림?”
“네!”
그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뭔데? 저기가 그렇게 맛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그뿐이 아니에요.”
수수께끼 같은 아내의 답에 카시안은 어리둥절했다.
“저한테는 빛, 그 자체라고요.”
“너의 빛이 저 아이스크림이라고?”
“네!”
“내가 아니라?”
시아라는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벌어지는 입을 막느라 잠시 놓았던 남편의 손을 다시 잡았다.
“물론 당신도 빛이긴 한데…….”
“한데?”
“여기도 빛은 맞아요.”
“허…….”
그 말에 카시안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카시안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아까 궁금하다고 했죠?”
“…….”
“여기서부터 시작이에요. 제 행운은.”
로버슨 아이스크림 카페.
바로 그곳에서, 행운의 씨앗이 힘차게 발아되었다.
*
이 이야기는 이 년 전 여름의 끝자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니까 시아라가 로또에 당첨이 되기도 전, 수도에 살았던 바로 그때.
그녀의 하루는 다람쥐 쳇바퀴와 다름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값싼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잡화점에 출근한 뒤, 노을이 질 무렵 퇴근하는. 그런 평범한 나날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몇 주 내내 소식 없던 라튼 레트랑이 이른 시각부터 잡화점에 찾아왔으니까.
“시아라, 미안해. 내가 그동안 너무 바빴어.”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할 만큼?’
시아라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질문을 꾹 눌러 삼켰다. 어차피 물어보아야 변명만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그녀 앞에만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뿐, 라튼이 지난 한 달 동안 수도 시장에 자주 출몰했었음은 자명했다. 잡화점을 방문했던 손님들이 빨간 머리 미남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얼마나 집중했었던가.
“가문을 위해 처리해야 할 일이 어찌나 많던지…….”
“으응.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이렇게라도 봐서 좋다.”
찡그림 한번 없이 해사하게 웃어 보이는 시아라의 뺨을, 라튼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고마워. 너라면 이해해줄 줄 알았어.”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라튼이 조금은 미안한 감정을 담아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저녁에는 우리 데이트하는 게 어때?”
“정말? 설마, 밖에서?”
“응.”
“……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괜찮아. 그게 뭐 어때? 너도 곧 내 가족이 될 텐데.”
가족……. 시아라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기대도 하지 않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남자친구가 고마워 애써 힘차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수도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예약해놨어. 저녁 일곱 시까지, 여기로 오면 돼.”
로지 아줌마께 부탁해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시아라는 옷장 문을 열어 가장 예쁘고 비싼 옷을 골라 들었다. 그러나 어떤 옷을 걸쳐본들 어색하기만 했다. 수도에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이라니. 그런 곳은 꿈에서조차 방문해본 적이 없는걸.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다. 처음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니까.
시아라는 약속 시각보다도 일찍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고급 레스토랑답게 입구에서부터 하얗게 반짝거리는 은빛 샹들리에가 그녀를 압도했다.
혹시 라튼이 미리 와있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시아라에게 지배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어서 오시죠, 레이디. 예약은 하셨나요?”
“아, 네. 네! 라튼, 라튼 레트랑이요.”
“레트랑 백작 후계자 님의 일행분이셨군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아라는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끝끝내, 라튼 레트랑은 오지 않았다. 이미 다 식어 빠진 찻잔의 물을 계속 갈아주느라 들락거리던 종업원들도 점점 시아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시아라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한 시간 반이 넘어갈 무렵, 침울한 표정의 지배인이 들어왔다.
“저……. 레이디. 방금 레트랑 후계자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네? 그게 무슨…….”
“급한 사정이 있어 저택에 귀가하셔야 한다고…….”
지배인이 전하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눈을 깜빡이던 시아라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지배인 역시 난처한지 그녀의 눈을 피해 먼 산만 응시했다.
제 신세가 처량하고, 창피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한 라튼 레트랑이 죽도록 밉고 짜증 났다. 그런 남자를 놓지 못하는 저 자신까지도.
시아라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 속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비싼 곳이니까…… 라튼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보태려고 했었는데.
죄지은 것도 없는데 잘못한 사람처럼 발끝만 내려보던 시아라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제일 비싼 거 주세요.”
“…… 예?”
“괜찮아요. 저 혼자 먹고 갈게요.”
그녀가 싱긋 웃자 지배인도 예의 있게 답했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곧이어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사슴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 옆으로는 듣도 보도 못한 휘황찬란한 곁들임 음식들까지.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몰라 눈이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화려한 음식들 덕분일까.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음식들이 조금씩 비워질수록,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나쁜 자식!”
내일 만나기만 해봐라. 당장 헤어지자고 할 거야!
오른손에는 포크를, 왼손에는 나이프를 단단히 쥐고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그때, 방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시아라는 와인 한 모금을 입으로 넘기며 쓴웃음을 삼켰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옆방이었다. 그녀가 있던 방이 아니라.
“응.”
“한참 찾았습니다!”
“…….”
“어쩐 일로 오늘은 수도에서 저녁을 드세요? 볼일 마치시면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
쾌활한 목소리의 남자가 쉴 새 없이 말을 내뱉었다. 반면, 상대방은 대꾸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처음에 낮게 들렸던 ‘응.’ 한마디를 제외하고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드셔야지요.”
“…….”
또 침묵.
시아라는 자기라도 대신 대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답답한 남자네 진짜. 상대가 말을 하면 재깍재깍 답을 해야지.’
저런 남자랑 결혼할 여자는 화병 나서 어찌 살아?
혀를 한 번 쯧, 내차고 다시 스테이크 써는 것에 집중하려던 때.
“저, 또 봤습니다.”
쾌활한 남자가 말했다.
“뭘.”
“번호요.”
“그러니까 무슨 번호.”
중저음의 목소리가 관심도 없다는 듯 대꾸했다.
“삼 개월 뒤에 있을 헤르본 제국 복권 당첨 번호요!”
시아라는 스테이크를 썰던 손을 멈췄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벽을 응시했다.
“저번에도 제가 거의 다 맞춘 거 아시죠? 이번에도 그때랑 비슷합니다.”
“…….”
“어제 꿈을 꿨는데. 아직도 생생해요!”
쾌활한 남자의 목소리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한층 작아졌다. 시아라는 양손에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살포시 내려놓고 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날은 분명. 5월 6일. 아주 화창하게 햇볕이 내리쬐던 오전이었습니다.”
묘한 긴장과 확신으로 가득 찬 남자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덩달아 옆방에 있던 시아라도 조마조마해졌다.
“저는 저택 정원에 나와 잔디를 뽑고 있었지요.”
이 중요한 순간에 접시 위에서 칼질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옆방에 있는 상대 남자는 저 경이로운 이야기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시아라는 한 마리 거미처럼 벽에 착 달라붙어 있는 지경이었지만.
“그때였습니다! 저택만 한 크기의 아주 거대한 드래곤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11마리나요!”
그 말에 중저음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집채만 한 드래곤이었다며? 그걸 또 세고 있었어?”
“아, 꿈이잖습니까. 꿈. 다 할 수 있다니까요?”
쾌활한 남자가 큼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 정원 위로 드래곤의 알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드래곤의 숫자보다 세 개나 더 많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