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3화
아델트의 기사양성 아카데미를 일 년 만에 수료하고 난 뒤, 펠릭스는 공작저의 어엿한 기사가 되었다.
비록 작위도 하나 없는 하급 기사에 불과했지만, 처음 훈련을 시작한 지 이 년도 되지 않아 정식으로 입단했으니 놀랍도록 빠른 성장이었다.
검을 들어보고 나서야 그것을 다루는 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몇 번 만져보지도 않은 총은 특출나게 잘 쐈다. 사냥꾼이었던 제 아빠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확실했다.
그가 오전 훈련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기사단장 렌이 그에게 다가왔다.
“펠릭스 루크 경.”
“아, 단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힘든 건 없나?”
“예, 없습니다.”
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웬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읽어봐. 너한테 좋은 기회일 것 같아서.”
단장은 펠릭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곧장 되돌아나갔다. 펠릭스는 렌이 내민 종이를 천천히 읽어내려가다가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가방 속에 구겨 넣었다.
오후 훈련까지 전부 마친 뒤. 공작저를 빠져나온 펠릭스가 자연스레 향한 곳은 아델트에 있는 소피아의 집이었다. 병원 근처에 있는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문 뒤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신가요?”
“저, 펠릭스입니다.”
철컥 열린 문 뒤로 소피아의 하녀 로젤리아가 보였다.
“어서 오세요.”
“네, 소피아는요?”
“지금 병원에서 급히 연락을 받고 나갈 준비를 하시느라…….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펠릭스가 응접실 소파에 막 앉으려던 찰나.
“로제, 누구야? 혹시 오빠 왔어?”
“예, 아-.”
‘가씨.’라는 말을 채 끝맺을 새도 없었다. 소피아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단발머리를 흩날리며 방에서 뛰어나왔으니까. 로젤리나가 펠릭스에게 내어줄 찻물을 불 위에 올리기도 전이었다.
이미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는 펠릭스를 보고 더욱 빠르게 달려가려던 소피아는, 제 하녀가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다소곳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로젤리나가 펠릭스와 소피아의 만남을 눈감아 주는 대신 소피아가 지키기로 약속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녀 로젤리나가 소피아와 함께 한 지 벌써 십 년이 지났다. 비범하고 똑똑한 소피아의 재능을 몽땅 무시해버리는 엘링턴 백작저에서, 로젤리나는 유일한 소피아의 편이었다. 물론 꿈 많은 소피아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용인들이 더러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똑똑하기는 하지만, 좀 유별나지 않아?’
‘늦게 얻은 막내딸이라고 엘링턴 백작님이 너무 오냐오냐해줘서 그런 거지 뭐.’
그러나 소피아는 자신에 대한 평가들을 고칠 마음이 없었다. 똑똑한 거 맞고. 또래에 비해 유별난 것도 맞고. 심지어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라기까지.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그런 소피아가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델트로 떠나올 때, 유일하게 그녀 뒤를 따라온 이도 로젤리나였다. ‘제가 아가씨랑 함께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후로 줄곧, 소피아는 제 하녀와 단둘이 살았다.
가문을 떠나온 것 치고 대체로 평탄한 생활이었으나, 얼마 전부터 로젤리나에게는 커다란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다름 아닌 제 아가씨가 만나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평민이라던가 하급 기사라는 직업이라던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아가씨가 선택한 남자이니 그가 좋은 사람일 것은 분명했다.
다만, 제 아가씨가 저 남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 그건 아주 큰 문제였다!
가문에서 쫓겨나다시피 했을 때도 예의 그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소피아는, 집에 펠릭스만 왔다 하면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쪼르르 달려 나왔다. 마치, 지금처럼.
그에 비해 펠릭스는…….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맞기는 한 거야?’
소피아는 오늘도 여전히 얼굴에 떠오른 벅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펠릭스는 태연했다. 몇 차례 소피아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이기는 하나, 원래 저렇게 표현이 서툰 건지. 아니면 마음이 없는 건지.
로젤리나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소피아는 로젤리나의 눈치를 한 번 쓱 보고 재빨리 응접실로 들어갔다.
“펠!”
“천천히 와. 넘어져.”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그의 너른 품에 안겼다.
“곧 병원 가야 한다며? 시간 없는 거 아니야?”
“괜찮아. 준비 거의 다 했는걸. 오늘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는데.”
“내일 또 보면 되지. 내가 끝나면 곧장 올게. 오늘처럼.”
그 말에 소피아가 펠릭스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응! 같이 나가면 되겠다! 기다려, 나 금방 올게.”
“아, 소피. 우체통에 이게 와 있더라.”
펠릭스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 하나를 보며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
“응. 네 아버지가 보내셨어.”
소피아의 표정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아빠가?”
“응.”
그녀는 넌덜머리 난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냥 버려.”
“소피.”
“뻔하지 뭐. 이제 그쯤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거나, 얼른 결혼 준비나 하라던가. 매일 똑같은 레퍼토리. 거기에 지금 내가 한 말 그대로 적혀있을걸?”
“…….”
“오빠도 한번 볼래? 우리 아빠가 얼마나 지긋지긋한 사람인지.”
소피아는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편지 봉투를 응시했다.
“아니지, 이런 고통은 나만 겪는 게 나아. 오빠까지 충격 받게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버려. 괜찮아.”
그녀가 펠릭스의 손에서 봉투를 뺏어 아무렇지도 않게 휙 던졌다. 툭,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종이를 펠릭스가 가만히 주시했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간 뒤 응접실에 홀로 남은 펠릭스는 조심스레 그 봉투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열어 읽어보았다.
- 내 귀한 딸아,
얼마 전 네가 나 몰래 평민 남자나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귀족의 대접만 받고 살아도 모자란 네가, 이제는 하다 하다 평민 나부랭이를 만나다니!
진정 너의 삶에 가문의 명예란 중요하지 않은 것이더냐?
소피아. 이 아비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주렴. 그 남자는 너의 미래를 위해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단다.
부디, 옳은 결정을 하길 바란다.
아빠가. –
“…….”
펠릭스는 눈을 느리게 감으며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댔다.
언젠가는 맞이할 일이라고 예상했었으나, 그게 이렇게도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 아직 어떤 준비도 못 했는데.
귀족 여식과 평민 남자의 연애.
제국에서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환영받지는 못했다. 여자들은 죄다 가문을 박탈당했고, 그 탓에 밖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니 모든 사회활동을 포기하고 숨어 살거나 다른 나라로 도망가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펠릭스는 소피아가 그런 진창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누가 견딜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잃는 꼴을 지켜보는 것을.
하지만 소피아와 이별하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보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존재였으니까.
고뇌에 빠진 펠릭스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로젤리나가 찻주전자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기다리는 동안 차 한잔…… 히이익……!”
찻잔에 찻물을 따르려다 우연히 펠릭스가 읽고 있던 편지를 곁눈질한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거 서, 설마 백작 주인님께서…….”
로젤리나의 팔이 덜덜 떨렸다. 찻잔에는 이미 물이 한가득 넘쳐흘렀다.
“로젤리나? 괜찮아요?”
“죄, 죄송해요. 다 저, 저 때문이에요.”
“네?”
“제가 며칠 전 수도 본가에 방문했을 때 친한 하녀에게 몰래 아가씨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한다는 게 그만…….”
“…….”
“우연히 주인님도 들으셨어요…….”
아가씨에 대한 고민 상담이란 당연히도 연애 문제였고, 창고 복도를 지나던 엘링턴 백작이 두 하녀의 속닥거림을 듣고 로젤리나를 추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저 편지였을 것이랴.
로젤리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편지 안에 쓰인 평민 나부랭이를 지칭하는 사람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다가, 친구에게 아가씨의 뒷얘기를 하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었으니. 소피아에 대한 의리는 지키지 못할망정 그녀를 배신한 꼴이 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정말 죄송해요. 절대 탄로 내려던 의도는 아니었어요…….”
펠릭스는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괜찮습니다. 늘 생각했던 문제였으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편지는 소피아에게 보여주지 마시고 태워주세요. 아버지와 더 큰 갈등이 생기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로젤리나가 응접실을 나가고 그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킬 무렵, 준비를 마친 소피아가 등장했다.
“펠! 가자!”
그를 보며 예쁘게 미소 짓는 소피아를, 펠릭스는 한참이나 응시했다. 잿빛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이 다이아몬드처럼 하얗게 반짝거렸다.
그는, 그녀를 절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근심하던 펠릭스가 낮에 기사단장이 건넸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종이를 빳빳하게 펼치자 아까는 신경 쓰지 않았던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 틴다르 왕국, 전쟁 파병 용사 모집 –
틴다르 왕국은 헤르본 제국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국가로, 제국과 동맹 관계였다. 요즈음 왕국 주변으로 적국의 침입이 잦아져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제국의 군사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전쟁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밑에 쓰인 말이 그를 멈칫하게 했다.
공을 세워 돌아올 시 그에 상응하는 작위를 수여하겠다는 것이었다.
펠릭스는 종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줬다. 그의 팔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유혈이 낭자 하는 전쟁터. 실력이 출중한 용병들도 쉬이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게다가 언제 다시 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동안 소피아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곧 생각을 굳혔다. 참전하기로.
싸우고 이겨서 살아남아 돌아오는 것. 간단하고 쉬운 일 아니던가? 펠릭스에게 지금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것이었다. 소피아의 부친을 설득해 그녀와 당당히 결혼하는 것.
펠릭스가 갈색 눈동자를 부릅떴다.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다시 돌아오는 날에는 소피아의 옆에 당당하게 서겠노라고. 그녀의 인생을 망치지 않을 남자가 되겠노라고. 펠릭스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