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4화
긴장한 손바닥에서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펠릭스는 차라리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우리 소피아가 만나는 그 평민이라고?”
소피아와 똑 닮은 검은 머리카락과 잿빛 눈동자가 펠릭스를 꿰뚫듯 응시했다.
“예, 엘링턴 백작님. 펠릭스 루크라고 합니다.”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닐세.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나를 찾아온 거지? 내게 어떤 소리를 들을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펠릭스 역시 엘링턴 백작의 시선을 마주했다.
참전하기로 마음먹은 뒤 그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소피아의 부친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모욕을 당하건, 그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곧 틴다르 전쟁에 출정할 예정입니다.”
뜻밖의 소식에 엘링턴 백작의 눈이 커졌다.
“어떤 의도로 말하는 거지?”
“비록 제가 물려받은 피는 소피아를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일지라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소피아의 옆에 당당히 설 만한 남자라는 것을요.”
“내가 소피아를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지 알면 자네는 이런 소리를 할 수 없을 걸세.”
백작이 단호히 말했다.
“압니다. 하지만 제가 얼마나 소피아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백작님도 모르시겠지요.”
백작은 하녀들이 속닥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우리 소피아가 이 자식을 더 좋아한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그가 눈을 삐뚜로 치켜떴다.
“내 딸을……. 그다지 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예?”
엘링턴 백자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펠릭스는 진심으로 놀라 되물었다.
“…… 내 딸이 더 안달 났다고 들었다네! 자네는 마음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펠릭스는 작게 호흡한 뒤 백작과 다시 눈을 맞췄다.
“전쟁에 나가서, 삼 년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뭐? 자네 전쟁이 장난인 줄 알아? 최소 5년! 10년도 걸린다고!”
“그렇게 좋아합니다.”
“뭐야?”
“그 말도 안 되는 삼 년마저 이 년, 일 년으로 줄여버리고 싶을 만큼. 그렇게 소피아를 좋아합니다.”
백작은 할 말을 잃었는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쳤다.
“아이고, 아이고 머리야.”
“당장 허락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온 거야? 내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온 건가?”
“제가 소피아의 미래를 망치지 않을 남자라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왔습니다.”
귀족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기세에, 엘링턴 백작의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비록 지금은 앞길이 보이지 않는 평민이라고는 해도, 전쟁에서 공만 세우고 돌아온다면, 못해도 백작위 정도는 받을 터였다. 어쩌면 틴다르 왕국으로부터 영토도 하사받을지도.
물론, 어디까지나 능력을 인정받아야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할 말이 없네. 이만 돌아가게.”
펠릭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다시 뵙겠습니다.”
“흠, 그거야 모르는 거지.”
그는 백작의 날이 선 말투에도 눈 깜빡 하나 안 하고 돌아섰다. 백작은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한편으로는, 이유 모를 기대감이 솟아났다.
*
“소피, 우리 어디 여행갈까?”
소피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오빠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펠릭스를 응시하는 소피아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같이 바다 보러 가자. 예전에 호페른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새파란 바닷가와 하얀 구름이 그려진 엽서를 보며 지나가는 말로 했을 뿐이었는데도 펠릭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심지어 거길 같이 가자니?
“좋아! 나는 좋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굴러들어 온 기회를 놓칠 만큼 바보가 아니었으니.
아무리 로젤리나가 소피아를 눈감아 넘어가 준다고는 해도, 집에 있을 때면 그녀가 늘 지켜보는 탓에 펠릭스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 여행은 기회였다. 펠릭스와의 관계를 더욱 진전시킬! 물론, 더 뜨거운 쪽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배시시 웃는 소피아의 얼굴을, 펠릭스가 가만히 눈에 담았다. 오늘따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도리어 당황한 소피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설마 나 얼굴에 뭐 묻었어?”
얼굴 이곳저곳을 손으로 닦아내던 그녀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그 찌푸린 표정조차 너무 귀여워서,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소피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훅 다가온 펠릭스 탓에 소피아는 그대로 정지했다. 숨을 훅, 들이마시며.
“아니.”
소피아 곁에서 달짝지근한 체리 향이 났다.
질끈 감은 그녀의 속눈썹은 긴장한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붉은 체리처럼 탐스럽고 싱그러운 소피아의 입술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 입술로 시선을 돌렸던 펠릭스가 이내 픽, 웃으며 다시 멀어졌다. 건드리면 깨질 유리 같아서, 너무 소중했다.
“그냥, 예뻐서.”
그 뒤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소피아가 한쪽 눈을 들어 올렸다. 목선을 따라 떨어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그의 손길이 부드러웠다.
“…… 펠.”
“응?”
“오빠야말로 얼굴에 뭐 묻었어.”
“정말? 어디?”
“여기.”
소피아가 펠릭스의 오른뺨을 대충 가리키자 그가 손바닥으로 그곳을 문질렀다.
“미안. 거기가 아니라 여기였는데.”
이번에는 왼뺨.
“흐음. 진짜 미안. 사실은 거기도 아니야.”
펠릭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이번에는 소피아가 성큼 다가왔다.
붉은 체리가, 그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달콤한 향기도 스르륵 물러갔다. 그러나 입술에 닿았던 따뜻한 감촉만큼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도록 머물렀다.
“여기였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넋이 나간 펠릭스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멈춰버렸다.
“오빠 입술이…… 꼭 체리 같아서!”
허,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당돌한 여자 친구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고, 이마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펠, 그럼 우리 정말로 여행 가는 거야?”
“응. 가자.”
“이번 주 주말! 주말에 가는 거 어때?”
“그래, 좋아.”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소피아의 모습을 보며 펠릭스 역시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나 사실, 속이 너무 쓰렸다.
얘를 두고 어떻게 가야 하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올 자신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 예쁜 얼굴을 하루라도 못 본다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
호페른은 아델트에서 꽤 멀었다.
제국의 남부와 북부 끝에 위치해 기차를 타고도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벌써 저녁 무렵이었으니.
이동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내내 들떠있는 소피아와 다르게 펠릭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계획대로면 이 주 뒤였을 출정식이 일주일이나 앞당겨진 탓이었다. 그러니까 당장 다음 주, 그는 이 제국을 떠나야 했다. 아직 소피아에게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낯빛이 어두워지는 펠릭스에게 소피아가 물었다.
“오빠, 어디 아파?”
“아니. 괜찮아. 배고프지? 밥부터 먹을까?”
“아니! 바다부터 보러 가자!”
따뜻한 남쪽의 관광지답게 호페른의 이곳저곳은 인파로 붐볐다.
소음을 피해 고운 백사장을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는 막 노을이 지고 있었건만.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캄캄한 밤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철썩, 파도치는 소리를 제외하면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은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바다 위로 하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이 검은 바다를 하얗게 적셨다.
시원하게 불어 드는 바람과 파도와 별. 그 낭만적인 공간에서,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어떤 말도 오 가지 않았다.
“소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펠릭스였다.
“언젠가 네가 왜 좋냐고 물었었지?”
그의 나른한 목소리에 소피아가 느리게 대답했다.
“응.”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그녀가 펠릭스를 응시했다.
“분명 나한테 성질만 부리던 여자였는데.”
“…… 그, 그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펠릭스가 낮게 웃었다.
“화만 내고.”
“…….”
“입은 또 얼마나 거친지. 다쳐오면 죽여 버릴 거라고 하질 않나.”
민망해진 소피아가 모래 위로 손가락을 헤집어댔다.
“소피, 미안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가?”
“내가 좀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네 예쁜 얼굴에 인상 쓰게 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 예쁜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일도 없었을 테지.”
“…… 그거야 그렇긴 하지.”
소피아가 쭉 내민 입술을 펠릭스가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아무튼, 넌 진짜 이상한 애야.”
“거칠고 괴팍한 것도 모자라 이상하기까지…….”
“아니지. 내가 이상한 거네.”
모래사장 위를 배회하던 그녀의 손을 펠릭스가 휙 낚아챘다.
“근데도 너만 보면 자꾸 떨려서 죽을 것 같으니까.”
“오빠…….”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맞나 봐.”
마주 잡은 손가락에 힘이 실리고, 펠릭스가 소피아의 시선을 마주했다.
“소피아.”
“응?”
“사랑해.”
파도가 쳐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그녀의 심장이 널뛰는 소리가 온 사방에 다 들렸을 테니.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낮췄다. 서로의 코끝이 닿고, 이마가 스칠 만큼. 그녀가 허락하듯 눈을 감자 천천히 입을 맞췄다. 바닷바람이 싣고 온 그녀의 체리 향이 밤공기를 적셨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이번에도 달콤했다.
“소피아.”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야만 했다.
“나는 일주일 후에…… 제국을 떠나려 해.”
수줍게 피어올랐던 그녀의 미소가 조금씩 자취를 감췄다.
“지금 뭐…… 라 그랬어? 떠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 전쟁에 출정하기로 했거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가긴 어딜 가?”
떨리는 목소리까지.
“빨리…… 아니라고 해. 장난이지? 응? 다 장난이라고 하라고!”
“소피아, 나는 정말로 잃고 싶지 않은 게 생겼어.”
“설마…… 그게 나야? 나 때문에 지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그 전쟁터에 뛰어들겠다는 거야?”
소피아가 주먹 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가냘프게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펠릭스가 부드럽게 붙잡았다.
“아니, 너 때문이 아니야.”
펠릭스가 고개를 숙여 울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온전히 나 때문에, 너와 함께 내가 원하는 미래를 잃지 않고 세상에 떳떳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가는 거야. 나를 기다려줄래?”
그 말에 소피아는 엉엉 울었다. 펠릭스는 그런 그녀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소피아. 나 그동안 진짜 열심히 훈련받았거든. 그러니까 약속할게.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나 소피아는 그 손을 탁, 쳐냈다.
“싫어. 이런 거.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고 약속을 해. 나 안 할 거야.”
“소피아…….”
“못가. 절대 못 가. 거기가 어디라고 가? 혹시 죽고 싶은 거야? 그럼 내가 해줄게! 가지 마!”
소피아는 펠릭스의 품에 매달려 그를 놓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등을 차분하게 토닥거렸다.
“가지 마…… 제발 오빠야…….”
“…… 맞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지.”
“…….”
“그런데 정식 기사가 되던 날, 검 앞에서 맹세했어.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내는 데 필요한 게 내 목숨이라면, 그쯤은 얼마든지 걸겠다고.”
소피아는 망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굳은 의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건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소피아를 보면서도 고개만 내저었다.
한 시간을 내내 울던 그녀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박박 닦았다.
“삼 년……. 그 안에 안 돌아오면 나 아무나 만나서 결혼할 거야. 오빠가 이렇게 날 떠나듯이, 나도 그냥 사라질 거야.”
소피아가 끅끅거리며 선언했다. 그런 그녀를 펠릭스가 다시 한번 당겨 안았다.
“걱정하지 마. 그 이상은 내가 못 견뎌.”
“흐으으윽. 미워. 너 진짜 밉다고.”
“얼마든지 미워해.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 오늘 여기서 파란 바다랑 하얀 구름 못 봤어. 그러니까 꼭, 나랑 여기 다시 와야 해.”
“응. 삼 년 뒤에는 꼭, 같이 보자.”
여전히 하얀 별이 바다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