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5화
제국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왕국의 어느 항구.
“오늘도 옮겨야 할 짐이 좀 많네요.”
정박한 배에서 내린 한 일꾼이 앞에 선 붉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인사했다. 비록 남자의 얼굴은 푸석했지만, 어깨 남짓 내려오는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겨울의 태양 아래서 윤기 나게 빛났다.
“그런데 안 추우세요? 그렇게 얇게 입고.”
그리 묻는 일꾼 본인도 정작 민소매 셔츠 차림이기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아, 제 고향이 헤르본 제국에서 제일 춥거든요.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붉은 머리의 남자, 라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배에서 짐을 내렸다.
제국어가 통하지 않는 이 왕국에서, 잘못 배송된 물건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던 이 일꾼의 통역을 라튼이 도와 준 적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라튼만 보면 반갑게 아는 체를 해댔다.
“이번에 어찌나 일하러 오기가 싫던지.”
그의 푸념에도 라튼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갑판 위에 쌓여있는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꾼은 그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지금 제 고향에 축제가 열렸거든요.”
“…….”
“그래서 친구들은 다 놀러 갔는데. 저만 이렇게 일하러 왔다니까요?”
별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
라튼은 그의 말을 귓전으로 흘렸다.
“참, 제국에서 오신 거 맞죠? 고향이 어디예요? 전 아델트에 살고 있는데!”
아델트.
그 세 글자에 라튼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했다.
“…… 수도에 잠시 살았었습니다.”
“아, 그러면 아델트에 대해 잘 모르시려나? 이번에 공작가에서 공작부인의 생일을 맞이해 마을에 작물을 많이 풀었거든요. 작년에도 그랬고.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이면 늘 축제 분위기예요!”
“…….”
“재작년에는 공작저택에 가서 아델트 부인의 얼굴을 실제로 뵌 적이 있는데, 정말 아름…… 어라? 왜 갑자기 눈물을…….”
툭 떨어진 눈물에 저도 놀란 듯, 라튼이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만.”
“아니에요! 제가 너무 저만 떠들었네요.”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그 공작부인은…… 행복해 보였나요?”
그 뜬금없는 물음에 일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
“너무요! 부인뿐 아니라 공작님도요. 두 분이 마주 보고 계속 웃고 계셨거든요. 그게 행복이 아니면 뭐였겠어요?”
일꾼의 답에 라튼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일꾼이 잠시간 응시했다.
“저……. 그렇게 웃으니 보기 좋네요. 앞으로도 종종 그렇게 웃는 게 어때요?”
일꾼의 얼토당토않은 부탁에 그가 피식하고 웃었다.
“됐습니다. 일이나 하죠.”
라튼은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쇳덩이처럼 무거웠던 다리가, 조금 더 가볍게 움직였다.
*
펠릭스가 제국을 떠나기 전, 그는 소피아에게 스케치북 한 권을 건넸다. 그 스케치북을 차마 펼쳐볼 용기가 없던 소피아는 그저 꼭 끌어안은 채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펼치면 정말 현실이 되어버릴까 봐,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방안에만 꼭 틀어박혀 있던 소피아가 드디어 스케치북의 첫 장을 열었다.
첫 페이지부터 그녀가 그려져 있었다.
의사 가운을 입은 모습이라던가, 그녀가 말을 타는 모습이라던가.
그리고…… 그녀가 미술관에서 우산을 들고 있는 그림까지.
그 아래로 펠릭스가 남겨놓은 편지가 있었다.
- 우산 위로 떨어지던 빗소리가 멈췄어. 소피아, 너 때문에.
세상 모든 게 움직임을 멈췄는데 너만 움직이더라.
소피아, 네가 그 자리에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표현이 서툴지만, 그래도 노력할게.
벌써 보고 싶다.
정말로, 사랑해.-
“……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진짜.”
그렇게 울었는데도 또 눈물이 났다.
소피아는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다시 한번 엉엉 울었다.
그 울음에 로젤리나가 방으로 달려왔다.
제 아가씨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 역시 죄책감에 눈물을 떨궜다.
그러나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펠릭스가 떠나기 전, 로젤리나를 찾아와 부탁하고 갔었으니까.
[“저는 곧 제국을 떠납니다. 그리고…… 엘링턴 백작님께 그런 편지가 왔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울다가 열병이 난 소피아의 옆에서 함께 울어주는 일. 로젤리나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
소피아는 제일 먼저 달력을 꺼내 들었다.
펠릭스가 떠난 뒤로 이미 지나간 날을 큼지막하게 엑스 표했다.
벌써 닷새가 지났으니, 이제 앞으로 1090일.
눈 몇 번 감았다가 뜨면 그가 앞에 있을 게 분명했다.
1000일
멈춘 것만 같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창밖의 푸르던 숲은 어느새 하얗게 변모해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 남짓 자라있었다.
900일
성큼 봄이 왔다. 아직 펠릭스는 없는데.
800일.
소피아는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마다 달리기하고, 저녁이면 검술학원에 다녔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어색해 다시 자르려다가 내버려 뒀다. 하기 싫은 것도 한 번쯤은 참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그가 없는 시간이 자꾸만 흘렀다. 제국의 전쟁이 끝나간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딱 3년째 되던 날.
소피아는 집에서 하루 종일 펠릭스를 기다렸다. 혹시라도 나갔다가 엇갈릴까 무서워 집에만 있었다. 해가 뜨고, 곧 노을이 지고. 달이 어둠을 밝힐 때까지도.
그러나 펠릭스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로.
체념하고, 포기하고 싶었다.
사실 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또 다음 날.
아침 일찍 병원에 출근하려 현관문을 열었다. 여전히, 그는 오지 않았다.
자꾸만 미련이 남아 집 주변을 서성거리길 몇십 분째. 그냥 돌아섰다.
아쉬운지 땅만 보고 걷는 그녀의 앞을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가로막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소피아는 고개를 들었다.
“소피.”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에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채로.
소피아는 들고 있던 가방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 바보야. 이틀이나 늦었잖아…….”
펠릭스가 맑게 웃었다. 꿈에서나 그렸던 그런 미소였다.
“미안해.”
그녀가 달려가 안겼다. 그러자 펠릭스가 소피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나도. 나도 진짜…… 보고 싶었어.”
두 사람은 있는 힘껏 서로를 끌어안았다. 불어온 바람이 들어갈 틈도 하나 없이.
*
시아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원장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가족들이 전부 모이는 날이었으니까!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가려는데 보육원 선생님 중 하나가 갈색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원장님, 이제 집에 가세요?”
“네. 마무리 좀 잘 부탁드려요.”
“그럼요. 얼른 가서 쉬세요. 참, 이거. 올해도 또 왔네요?”
시아라는 그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여기 두세요. 지금 확인하고 갈게요.”
그녀가 나간 뒤, 시아라는 포장을 풀었다. 벌써 5년째,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익명의 이름으로 배달된 상자가 보육원에 도착했다. 보낸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외국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상자 안에는 늘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나 책이 빽빽하게 들어있었다.
- 시아라 폰 아델트 원장님, 부디 이 물건들을 좋은 곳에 사용해 주세요. –
이런 쪽지까지 함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을 보아 저를 아는 사람이 분명한데,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고마운 사람이긴 하지만 보답할 길이 없으니 그것 또한 걱정이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상자를 접으려던 찰나, 상자 구석에 아주 작은 글씨로 알파벳 하나가 쓰여 있었다.
R.
…… R…… 이게 누구지?
갸우뚱거리던 시아라의 머릿속에 불현듯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시아라.”
그러나 그 정체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카시안이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끝났어?”
“아, 응. 지금 나가면 돼요.”
“설마 이거 정리 다 네가 한 거야?”
“아니 그냥 몇 권…….”
카시안이 단호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줬다.
“시아라, 당신 지금 혼자 아니거든?”
“아이참, 책 몇 권 옮긴 거래도?”
“그것도 안 돼! 힘쓰는 일은 전부 나 부르라고 했잖아. 그러다가 뱃속에서 놀라면 어떻게 해?”
몇 년 내내 아이를 가질 생각 없다고 노래하던 카시안은, 막상 아이가 생기니 이렇게 유난스러울 데가 없었다. 그는 시아라가 걷기만 해도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저 멀리서 달려오고는 했다.
“하아……. 저기 공작님, 의사가 오히려 움직이는 게 더 좋다고 했거든요?”
“어떤 의사야 도대체. 소피아 엘링턴이지 그거?”
카시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펠릭스에게 붕대를 있는대로 감아 미라로 만들어 놓곤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문제가 많아. 아무튼, 얼른 가자. 다들 모여있대.”
“응. 가요.”
남편의 손을 잡자 순식간에 저택으로 이동되었다.
아델트 저택은 모처럼 시끌벅적했다.
꽤 긴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펠릭스와 소피아. 아니, 이제는 루크 후작 부부라고 해야 하려나.
적국 지휘관의 머리를 베어 돌아온 펠릭스에게, 헤르본 제국의 황제는 후작 작위를 하사했다. 전쟁영웅을 얕잡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그건 엘링턴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펠릭스가 제국으로 돌아오던 날. 백작은 할 수 있는 모든 예를 갖춰 그를 대접했다.
그리고 반년 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루크 부부의 옆자리에는 펠릭스와 시아라의 엄마가. 엄마의 옆자리에는 한나 부부와 레아와 레오가 있었다. 벌써 시아라의 어깨만큼 자란 아이들은 여전히 해사하게 웃었다. 비록 레오의 손에는 검 대신 축구공이 들려있었지만. 물론 레아는 여전히 책과 함께였고.
이제 레아를 지키는 건 레오뿐만이 아니었다. 미카엘.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소년이 소녀와 나란히 책을 펼쳐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형을 따르던 엘리안이 하늘로 불꽃을 쏘아 올렸고. 분홍색 불꽃이 미카엘과 레아의 머리 위에서 펑펑 터졌다. 엘리안은 까르르 웃었고, 그때마다 레오는 레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리안의 재능을 높게 산 마르쿠스는 그를 자신의 마법 제자로 삼았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수업이 끝나면 연구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힘을 연구했다. 엘리안이 저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던 작년. 마르쿠스는 두 형제를 자신의 밑으로 입양했다.
마르쿠스의 능력처럼 아이 둘을 낳아 살아보자던 아내의 말처럼.
모여있는 가족들 뒤로 낸시가 바쁘게 오 다녔다. 여전히 시아라를 돕는 낸시는 짝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다름 아닌……, 기사단장 렌이었다.
하도 알버트와 티격태격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생길 거라고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물론 알버트는 연애에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마지막까지 손님들을 챙기던 그도 이제 겨우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만찬이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알버트가 공작 부부를 향해 말했다.
“아마 뱃속에 행복이를 시작으로, 아기 천사들이 쑥쑥 찾아올 겁니다.”
“…… 네?”
“제가 꿈에서 봤거든요.”
“뭘요?”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저는 잡초를 캐고 있었죠.”
응? 뭔가 익숙한데?
시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채만 한 드래곤들이…….”
입을 턱, 틀어막았다.
“설마…… 알버트 당신이…… 그 점쟁이……?”
“예?”
시아라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드디어 은인을 만난 건가……!
그러자 카시안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의 볼록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어허, 저거 다 개꿈이라니까? 듣지 마. 우리는 행복이 하나로도 충분해.”
“각하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자자, 됐고. 이제 다들 이쪽으로 와. 사진 찍을 거니까.”
카시안이 테이블 맞은편에 있는 카메라를 가리켰다.
모두 한데 모여 사진을 찍으려던 그 순간,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오래전 시아라와 카시안의 결혼식에 내렸던 눈처럼 새하얗고, 포근한 그런 눈이. 갑자기 찾아온 선물에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카시안과 시아라는 서로를 마주 보고 두 손을 꼭 잡았다.
평생 사랑하며 살겠다고 선언했던 결혼식의 맹세처럼, 두 사람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서로가 가장 소중했고, 함께 하는 삶이 소중했다.
눈만 바라보아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지금처럼.
“자, 그럼 찍습니다. 웃으세요!”
찰칵.
우리의 행복이, 또 한 컷 액자 위에 남았다.
[외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