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의 죄
“전체 차렷!”
널따란 강의실엔 똑같은 제복 차림의 이병들이 가슴을 넓게 펴고 서 있었다. 누구 하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은 게, 꼭 장난감 병사들 같았다.
한 남자가 정갈한 걸음걸이로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의 왼쪽 가슴팍엔 녹색 테두리가 인상적인 명찰이 박혀 있었다.
[WO. 채시윤]
“경례!”
한 병사의 구호에 맞춰 모두 뒤꿈치를 착 붙였다. 그리고 손날을 날카롭게 세운 채, 오른쪽 집게손가락을 눈썹 끝에 바짝 붙였다.
사위에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윤이 그들을 천천히 훑어봤다. 다들 광대에 발긋한 열이 찬 게, 막 입대한 신병다웠다. 시윤도 입대한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었지만 괜히 마음이 푸근하고 간지러웠다.
똑같은 포즈로 경례한 시윤이 연하게 미소 지었다.
“준위 채시윤입니다. 입대를 환영합니다.”
시윤이 손을 내렸다. 3초가 지나자 병사들 역시 차렷 자세로 되돌아왔다. 시윤이 편히 앉으라며 손짓했다. 여기저기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시윤이 태블릿을 켰다. 그러자 강의실 한가운데에 파란빛의 홀로그램 로고가 떠올랐다.
[PHOS]
포스. 고대 그리스어로 빛을 뜻하는 포스는 인간의 나라, 즉 시윤과 병사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하는 조국의 이름이었다.
모두 찬란하게 빛나는 네 글자를 경건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잠시 로고를 바라보던 시윤이 홀로그램을 스와이프했다. 그러자 로고가 사라지고 시윤의 이름과 이력 등이 나타났다.
“저는 신병 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며, 본격적인 현장 투입 전에 클롭스의 종류와 취약점, 공격법 등을 가르쳐 드릴 겁니다.”
“…….”
“잘 부탁해요.”
시윤이 빙긋 웃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그것을 듣고 있던 시윤이 슬쩍 손을 들었다. 박수가 뚝 끊겼다. 그가 홀로그램을 가볍게 터치했다. 귀가 뾰족하게 곤두서 있고, 콧방울이 크며 등이 구부정하게 굽은 괴물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홀로그램 속 괴물은 손에 쥔 무딘 도끼를 흔들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반쯤 벌어진 입에선 누런색의 끈적한 타액이 떨어졌고, 우둘투둘한 피부에서는 고름과 썩은 피가 물집처럼 올라와 있었다. 눈알은 탁한 녹색이었으며 동공은 점처럼 작았다.
분명 인간처럼 눈 코 입과 사지가 달려 있는데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모두 턱을 안으로 당기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윤만 아무렇지 않게 홀로그램을 쳐다봤다.
“고블린입니다. 클롭스에서 가장 흔한 종이죠. 혹시 고블린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신병?”
시윤이 멀찌감치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여자가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시윤이 턱짓했다.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이병 크리스티나 페이지입니다.”
“네, 페이지. 말해 보세요.”
“고블린은 번식력이 높아 클롭스 중 가장 많으며, 지능이 40 정도입니다. 덩치는 작으면 1미터, 크면 3미터짜리도 있습니다. 피부가 딱딱하고, 힘이 좋으나 별다른 어빌리티는 없습니다. 고위 클롭스가 방패로 쓸 정도로 낮은 등급입니다.”
“어떻게 처리하죠?”
“피부가 딱딱하지만 총이나 칼로 죽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머리나 심장 부위를 공격하면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근거리에서 고블린의 도끼에 맞을 시 머리가 터질…… 수 있으므로 장거리에서 총으로 공격하는 게 좋습니다.”
“좋아요.”
시윤이 칭찬하듯 손뼉을 두 번 쳤다. 페이지가 뿌듯한 표정으로 앉았다. 시윤이 딱히 덧붙일 말이 없다며 홀로그램을 터치했다.
오크가 지나가고, 그렘린이 지나갔다. 그렇게 쭉쭉 열댓 개의 클롭스를 훑었다. 모두 하급에 속하는 클롭스들이었다. 교실 분위기가 느슨해졌다.
시윤이 특별할 것 없는 설명을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지척에 있던 남자가 난데없이 번쩍 손을 쳐들었다. 시윤이 그를 쳐다봤다.
“신병.”
“이병 윌 하퍼입니다. 질문 있습니다.”
“네, 하세요.”
“이렇게 클롭스를 하나하나 모두 배웁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클롭스는 방사능에 의한 유전 변이로 계속해서 새로운 종이 생겨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몇 종이나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데……. 이러다 저희 전투 한번 못 나가고 여기서 늙어 죽는 거 아닙니까?”
하퍼의 만면엔 지루함과 불만이 가득했다. 시윤이 검지로 눈썹뼈를 문질렀다. 오늘은 왜 이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그가 하퍼에게 다가가 살짝 허리를 숙이고 눈을 맞췄다.
“하퍼 이병.”
“예. 이병 윌 하퍼.”
“맞는 말이에요. 하퍼 말대로 클롭스는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습니다. 포스의 레이더가 닿지 않는 곳에선 빌딩 하나만큼 커다란 클롭스들이 왕국을 세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죠. 똑똑한 고위 클롭스들의 기술력이 인간의 기술력을 뛰어넘어 우주까지 번졌다는 소문도 있고요. 그 많은 클롭스를 다 꿰려면 정말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
하퍼가 자신의 말이 그 말이라는 듯 고개를 마구 주억였다. 그때, 시윤이 하퍼의 책상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자, 그럼 한 가지 예시를 들어 보죠. 만약 하퍼가 첫 전투에 나갔는데, 학습하지 못한 클롭스 종을 맞닥트렸다고 합시다.”
“예.”
“그 클롭스는 2미터 정도 되는 크기에 머리는 독수리의 형태였고, 몸뚱이는 해골과 비슷했습니다. 커다란 부리 밖으로 이빨이 턱 아래까지 자라 있었죠. 손에는 창, 도끼, 칼 같은 무기가 아니라 끝이 동그란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지팡이에서 불이 나올지, 물이 나올지, 아니면 독이 나올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됩니다. 듣도 보도 못한 종이죠. 그럼 하퍼 이병은 어떻게 싸울 겁니까?”
“어…….”
어려운 질문에 하퍼가 바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나오는 것이라곤 가느다란 신음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쩔 줄 모르고 무릎을 긁어 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적에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고 있던 시윤의 얼굴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방금 하퍼 이병은 죽었습니다.”
“예?”
“공격 한번 하지 못하고 변이 클롭스가 쏜 염산성 액체에 살과 뼈가 분리되며 녹아 죽었겠군요.”
시윤이 안타깝다는 듯 침울한 음성으로 하퍼의 죽음을 묘사했다. 하퍼가 멍청한 낯으로 뻐끔 입을 벌렸다. 그러다 파드득 어깨를 떨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 하지만 방금 지팡이에서 불이 나올지 물이 나올지 모른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제 에스퍼 어빌리티가 육체 강화 능력입니다. 지팡이에서 염산이 나오는 걸 알았으면 육체를 강화했을 겁니다.”
그 말에 시윤이 짧게 웃었다.
“하지만 몰랐잖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압니까? 문제를 낸 하사님만 알고 계시는…….”
“방금 말한 변이 클롭스를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아는 신병?”
하퍼의 말을 댕강 잘라 낸 시윤이 주위를 둘러봤다. 강의실 가득 꿉꿉한 정적이 차올랐다.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수 초가 지났을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병 박종우입니다.”
“네. 박종우 이병. 말해 보세요.”
“하사님이 말씀하신 클롭스는 동그란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동그란 지팡이는 아크 리치의 지팡이와 비슷합니다. 아크 리치는 염산성 액체를 뿌리며 공격하죠. 몸뚱이가 해골, 머리는 독수리라 하셨으니 아마 아크 리치와 그리폰의 변종인 것 같습니다. 이빨로는 그리폰 특유의 독을 뿜을 것…… 같고요.”
종우가 슬쩍 시윤의 눈치를 봤다. 시윤이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계속해 보세요.”
“취약점은 목일 겁니다. 아크 리치와 그리폰의 취약점이 목이니까요. 그러니 독과 염산을 피해 목을 찌르는 게 가장 좋은 공격입니다.”
시윤이 살풋 눈가를 어그러트렸다. 먹고살기 바쁜 현세에 선행 학습을 중요히 여기는 건 아니지만, 저렇게 준비된 학생을 볼 때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가 미소를 숨기기 위해 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잘했습니다. 박종우 이병.”
“감사합니다.”
종우가 뿌듯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시윤이 다시 하퍼를 쳐다봤다.
“하퍼.”
“이병…… 하퍼…….”
하퍼가 다 죽어 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리폰 알아요?”
“예, 압니다.”
“아크 리치는?”
“모……릅니다.”
눈을 가늘게 뜬 시윤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흘렸다.
“안타깝네요. 제 수업을 잘 듣고 전장에 나갔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퍼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시윤이 괜찮다는 뜻으로 하퍼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가 병사들을 크게 훑어봤다.
“나는 여러분들이 꼭 살길 바랍니다. 매일 적어도 수십 명, 많으면 수만 명이 죽는 이 시국에, 눈앞에 나타난 클롭스가 뭔지 몰라서 축복과 같은 에스퍼 어빌리티를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는 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
“여러분은 특별합니다. 부디 목숨을 소중히 여겨 주세요.”
시윤이 간곡히 부탁했다. 이들은 이병이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이병. 허나 당장 출전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쟁에 나갔다가 복귀하는 인원이 반도 채 안 됐다. 이 강의실을 떠나고 나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차분하게 내려온 앞머리를 한 번 훑은 시윤이 뒤를 돌았다.
“수업 계속하겠습니다.”
그가 홀로그램을 터치하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질문 있습니다.”
묵직한 음성이 뒷덜미를 간질였다.
“네, 신병. 질문하세요.”
시윤이 다시 등을 돌렸다. 노란 머리가 인상적인 이병이 어딘가 쌉싸름한 얼굴로 시윤을 보고 있었다.
“채시윤 준위님은 퓨어(Pure, 아무런 능력이 없는 민간인) 아닙니까?”
시윤의 어깨가 흠칫, 경련했다. 퓨어. 순수를 뜻하는 단어이나 이 공간 안에서, 부대 안에서는 썩 좋지 않은 의미였다. 민간인보다는 무능력자. 그 의미에 가까웠다.
“퓨어 맞습니다.”
시윤이 또렷한 음성으로 긍정했다.
“그럼 클롭스랑 한 번도 붙어 본 적 없으시겠네요.”
“……질문 의도가 뭐죠, 신병?”
“아니……. 클롭스랑 실제로 맞닥뜨린 적도 없는 분이 클롭스에 대해 가르친다는 게…… 조금 우습지 않습니까.”
노란 머리가 만면 가득 비소를 띤 채 말했다. 옆에 앉은 이병이 덩달아 큭큭거리며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시윤의 정체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올라왔다.
뭐야, 퓨어였어?
그러고 보니 명찰이 녹색이네.
근데 준위야? 어떻게 퓨어가 준위야?
왜, 채정원 원수. 그 사람 아들이잖아.
아…… 그 대단한 엘렉트라(Electra) 가문 아들이야? 그러니까, 낙하산?
소곤거리는 소린지, 아니면 부러 들리게 말하는 건지 모를 문장들이 시윤의 귓구멍에다 침을 뱉었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귓불을 꼬집었다. 가위로 자른 것처럼 반으로 갈라진 귓불이 손톱에 짓눌릴 때마다 아프다고 비명을 내질렀다.
낙하산. 그런 거 아닌데. 스물두 살에 석사는 물론 박사까지 땄는데. 클롭스에 관해선 전투에서 뼈가 굵은 병사들보다 훨씬 더 잘 아는데. 소령 이상만 참여 가능한 작전 회의에도 꼬박꼬박 불려 가는데.
할 말은 많았으나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에겐 사실이나, 이들에겐 변명으로 들릴 것 같아서. 등줄기에 땀이 뱄다. 눈알이 급속도로 건조해졌다. 시윤이 꽉 눈을 짓이기듯 감았을 때였다.
똑똑.
“채시윤 준위?”
누군가가 강의실 문을 두드렸다.
모든 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곳엔 초록색 눈이 매력적인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도 딱 벌어져 있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위엄 있는 에스퍼였으나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시윤의 눈썹이 들썩였다. 익숙한 얼굴에 눈가가 절로 휘었다.
“모건 대령님.”
주책맞게 아는 척을 하려던 시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시윤이 부른 방문객의 이름에 모든 병사가 벌떡 일어났다.
모건? 모건이라고? 진짜 모건 대령이야. 와, 모건 대령을 실제로 보다니. 내가 입대하긴 했구나. 좀 전과는 다른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모건은 군 연구실의 총괄 책임자다. 그는 에스퍼 연구실, 가이드 연구실은 물론 일반 병사와 무기, 또 의료까지 폭넓게 관리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모든 분야에서 책임자가 될 만큼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모건은 기이할 정도로 방대한 양의 지식을 품을 수 있는 에스퍼 어빌리티를 가졌다.
[COL 모건]이라 적힌 그의 명찰 테두리는 붉은색이었다.
부대 안의 명찰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초능력자, 즉 에스퍼는 붉은 테두리. 에스퍼의 안정을 도모하는 가이드는 노란 테두리. 무능력자 퓨어는 녹색 테두리였다.
시윤이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가 경례했다. 모건이 됐다는 듯 특유의 나른한 몸짓으로 손을 휘저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내가 채 준위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방금 톰 부대가 변종 클롭스를 잡아 왔거든? 근데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냥 존나 징그럽게 생기기만 했어. 이런 건 채 준위가 잘 알잖아. 좀 도와줘.”
모건이 생각만 해도 역겹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윤의 안색에 난처함이 스쳤다.
“어…… 제가 지금 강의 중이라…….”
“음…… 강의. 강의 중요하지. 포스의 미래가 될 이병들인데, 아무렴 중요하고말고. 근데 이거 명령인데.”
모건이 익살맞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시윤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가 놨다. 단어 사이마다 드글드글하게 낀 장난기가 느껴졌다.
시윤이 자신의 소매를 꼬집듯 매만졌다. 시답잖은 장난임을 알지만, 어쨌든 타인이 보는 앞에서 그는 한참 우러러봐야 하는 대령이었고, 자신은 그의 발끝도 못 미치는 준위였다.
명령 불복종은 죽음, 혹은 방출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하아……. 예, 알겠습니다.”
가볍게 묵례한 시윤이 빙그르르 몸을 돌리고 병사들을 바라봤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체력 단련실로 이동하세요. 내일 봅시다.”
시윤의 말에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그들은 강의실을 나가면서도 모건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포스의 전반적인 과학 기술을 비롯해 에스퍼, 가이드의 비밀, 유전 형질, 무기 등을 발견 및 발명한 모건은 알아주는 유명 인사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강의실에 텅 비었을 때, 시윤이 홀로그램 태블릿을 들고 모건의 옆에 섰다. 모건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발을 옮겼다. 시윤이 한 발자국 뒤에서 그를 따랐다.
“절 부르신 진짜 이유가 뭡니까?”
“응? 톰 부대가 새로운 클롭스를 잡아 왔다니까.”
“그건 이유가 못 됩니다.”
“어째서?”
“제가 가 봐야 클롭스의 모체가 무엇인지 정도만 가늠하겠지만, 대령님은 5분 안에 유전 변이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도 알아낼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흐응…….”
“더군다나 클롭스는 ‘존나 징그럽게’ 생겼다는 이유로 가까이 가지도 않으시잖습니까. 톰이 하위 등급 클롭스를 잡아 왔든, 부대 하나를 이끄는 고위 등급 클롭스를 잡아 왔든 내다보지도 않으실 거면서…….”
불평 같은 시윤의 말에 모건이 낄낄, 방정맞게 웃었다. 그의 입술이 옆으로 시원하게 찢어졌다.
“맞아. 거짓말이야. 티 났어? 똑똑하네, 채시윤 준위.”
“놀리지 마십시오. 거짓말도 좀 성의 있게 하시란 말입니다. 제가 안 나올 것 같으니 명령이니 뭐니 덧붙이신 거 아닙니까.”
“그런가?”
“진짜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그것도 수업 중에.”
추궁 같은 시윤의 질문에 모건의 얼굴이 대번 심각해졌다. 그가 휙 몸을 돌려 시윤을 응시했다.
“채시윤 준위.”
“예, 대령님.”
시윤의 얼굴이 덩달아 굳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전투 능력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제힘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일이? 클롭스가 수십만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그것도 아니면 어디서 응축되어 있던 방사능이라도 터진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모건이 살짝 허리를 굽히고 시윤과 눈을 맞췄다. 시윤이 흡, 숨을 들이마신 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비보와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일이 터졌어.”
“무슨 일입니까. 심각한 일입니까?”
“내가.”
“예.”
“심심하다.”
“……예?”
시윤의 음성이 위로 확 튀어 올랐다. 별별 이유로 시윤을 놀리는 모건이지만 이다지도 터무니없는 이유는 처음이었다.
모건이 배시시 아이처럼 웃었다.
“내가 지금 몹시, 많이, 아주 심심한 상태야. 그래서 말인데, 나랑 체스 둘래?”
“하아…….”
시윤이 자욱한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모건은 계급에 맞는 품행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체스……. 제가 대령님 상대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시윤이 알맹이 없는 미소를 띠었다.
“좋아, 좋아. 아주 좋은 자세야.”
모건이 삑, 휘파람을 불며 시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모건의 연구실은 복잡했다.
……사실 복잡하다는 건 순화한 표현이고, 더러웠다. 으레 연구실이라 하면 각종 서류와 실험 기구들이 여기저기 낭자해 있는 걸 상상하겠지만, 모건의 연구실은 커피가 말라붙은 머그잔이나, 반만 먹고 남긴 초콜릿 바나, 갈빛이다 못해 검은색으로 변한 바나나 껍질, 빈 페트병 따위가 굴러다녔다.
그런 모건의 연구실이 익숙한 시윤은 별다른 반응 없이 간이 의자로 다가갔다. 의자 위엔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천 조각과 작은 철 덩어리가 있었다.
태블릿으로 그것을 쓸어내리려던 시윤이 멈칫했다. 철 덩어리로 보인 것이 훈장이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공을 세웠을 때, 대원수에게 직접 받을 수 있는 대단한 훈장이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그것을 조심히 들어 모건의 책상 귀퉁이에 올려 뒀다. 며칠 후엔 바닥을 나뒹굴겠지만, 제 딴엔 그게 최선이었다.
“내가…… 체스를 여기 어디 뒀는데…….”
모건이 연구실을 뒤지며 체스를 찾았다. 그동안 시윤은 의미 없이 연구실을 둘러봤다. 그러다 문득 모건의 책상 위에 널브러진 홀로그램 바가 눈에 들어왔다. 전원을 끄지 않은 탓에 그가 보던 홀로그램이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시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충 이름과 사진, 그 아래로 막대그래프가 있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의 어빌리티 정보쯤 되는 듯했다. 근데 어째 그래프가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시윤이 아는 어빌리티 그래프는 신체 발달, 자가 치유 능력, 에스퍼 또는 가이드 어빌리티, 소유 능력 순이다. 어빌리티 등급은 순차적으로 A부터 C까지 있었다. 그 사이에도 +, -, 0로 세분된다.
A 이상의 계급인 S급과 SS급도 있었는데, 그들은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종(種)으로 분류됐다.
아무튼, 어빌리티를 나타내는 막대그래프는 대개 들쭉날쭉하다. 예를 들면 신체 발달은 B, 자가 치유 능력은 C, 어빌리티는 B라거나. 또는 신체 발달은 C, 자가 치유 능력은 B, 어빌리티는 C라거나. 대부분 병사가 엇비슷하게 B나 C를 유지했다.
헌데 눈앞에 있는 그래프는, 그래프라기보다는 하나의 사각형 같았다. 모든 막대가 그래프 끝까지 차 있었기 때문이다.
시윤이 흘끔 모건을 쳐다봤다.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쳐든 모건이 서랍장을 부술 듯 헤집고 있었다. 시윤이 슬쩍 홀로그램을 가까이 끌어왔다.
빼곡한 활자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래프 주인의 이름이었다.
[청호]
그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승모근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호. 감히 입에 몇 번 담아 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포스의 영웅이라 불리는 이. 핵전쟁으로 신이 몰살당한 이후, 또 다른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이였다. 뭐, 누군가는 괴물이라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시윤에겐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영웅이었다.
시윤이 그래프를 찬찬히 살폈다.
[이름: 청호]
[직위: 대장(General, GEN)]
[종: 에스퍼]
[어빌리티 등급: SS]
[신체 발달: SS]
[자가 치유 능력: SS]
[에스퍼 어빌리티: SS]
[소유 능력: 사이코키네시스(Psychokinesis, 염력)·중력 강화·원소 火와 氷 사용 가능]
시윤은 그래프를 몇 번이나 곱씹어 읽었다. 고작 활자에 불가한 것인데 등줄기에 소름이 다 돋아났다.
“SS등급…….”
청호는 최초의 SS등급이자, 유일한 SS등급이다. 포스의 개국 공신인 대원수와 원수들도 S등급이었다. 사실 그들의 어빌리티는 S가 아니었으나, 개국의 공을 치하하고자 A 위로 S등급을 만들어 붙인 거였다.
포스의 역사상 A를 뛰어넘는 어빌리티는 없었다. A 어빌리티를 가진 에스퍼나 가이드조차 몇 되지 않았다.
근데 청호가 나타난 것이다. 기존의 측정 방법으로는 능력치를 명명할 수 없는 존재가.
그를 A등급으로 두어야 한다, 혹은 새로운 등급을 만들어야 한다, 아주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다. 위협을 느낀 원수들이 ‘SS’라는 등급을 만드는 걸 몹시 꺼렸다고.
그러나 대원수는 SS등급을 만들었다. 이유는 청호에게 아직 각인한 가이드가 없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마흔을 넘기지 못한다. 그 말인즉슨, 청호는 시한부였고, 그는 사망 후에 또 다른 방식의 영웅으로 포스 병사들에게 귀감이 될 터였다.
그래서 대원수는 청호를 최초의 SS등급으로 명명한 것이다. 먼 훗날, 죽은 영웅을 또 다른 신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퍽 씁쓸한 이유였다.
“찾았다!”
모건이 다 으스러져 가는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3차 세계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러니까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체스판이었다. 병사 몇이 전장에서 주워 온 것이다.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병사들이 그것을 국가에 기증했고, 체스 상자는 돌고 돌다 모건의 손에 떨어졌다.
모건은 잉크가 다 날아간 설명서를 아주 긴 시간 동안 연구했고 끝내는 체스라는 게임을 부활시켰다. 포스 최초의 보드게임이었다.
신난 모건이 엉덩이를 씰룩이든 말든, 시윤은 그래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모건이 비스듬히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신기한 그래프지? 나도 볼 때마다 눈을 비빈다니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럴 만도 했다. 지적 능력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모건도 에스퍼 어빌리티 등급은 A이나 신체 발달은 B, 자가 치유 능력은 C였다.
“네.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청호 대장님의 위압감이 생생히 느껴지네요.”
“뭐, 위압감까지야. 아아, 채 준위는 청호를 한 번도 본 적 없나?”
“예. 제가 입대하기 직전에 전장에 나가셨거든요.”
“음……. 하긴 벌써 나간 지 3년이나 됐지.”
모건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체스판을 펼쳤다. 모서리가 닳은 체스판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했다. 시윤은 그와 체스를 둘 때마다 후세를 위해 박물관에 기증해야 한다, 강력하게 의견을 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모건이 코가 문드러진 나이트를 세웠다. 비숍과 퀸, 그리고 킹도 세웠다. 킹이라는 칭호답게 혼자 흠집 하나 없는 말이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청호 대장 오늘 복귀야. 운 좋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네? 오늘 돌아온다는 말씀이세요? 에로아스 부대가요?”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로아스는 청호가 이끄는 부대였다. 이름조차 에로아스, 영웅이란 뜻이다. 청호가 우두머리로 있는 만큼 최정예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클롭스의 사체로 길을 일구어 걷는다는 에로아스. 포스에 있는 그 어떠한 부대보다 강한 에로아스. 그 에로아스가 3년 만에 복귀한단다.
“응. 며칠 바쁠 거야. 사지가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겠지. 그래서 에로아스 부대원들 정보 좀 훑어봤어. 어빌리티 정도는 미리 알아 둬야 맞는 약물을 투약할 수 있으니까.”
“아…….”
에로아스 부대는 3년 전, 수만 킬로미터가 떨어진 G 구역으로 떠났다. 포스 레이더에 무언가가 걸렸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는 구 인도에 있는 핵 시설에 클롭스가 붙어 방사능을 빨아 먹고 있댔다.
약해진 방사능이 아니라, 날것의 방사능과 만난 클롭스는 극히 위험하다. 어떤 변종일지, 얼마나 강하게 변화했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로아스 부대가 간 것이다. 어떠한 위험이 도래하더라도, 그 위험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부대였으니까.
시윤의 어깨가 설렘으로 동그랗게 말렸다.
“드디어 돌아오신다니……. 저 청호 대장님 정말 존경하거든요.”
시윤이 앉은 채로 동동 뒤꿈치를 들썩였다. 간식을 앞에 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모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알아.”
“어떻게 아세요?”
“청호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게 어디 너뿐이겠냐. 대부분이 그렇지. 팬클럽 모집한다고 하면 전 국민이 다 나올걸.”
무심한 모건의 말에 시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의 손가락이 피아노 치듯 무릎을 두드렸다. 다리가 방정맞게 덜덜 떨렸다.
에로아스가 이번엔 어떤 승전보를 가지고 왔을는지. 어떤 클롭스의 머리를 베어 왔을는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모든 시민과 병사들이 그들의 복귀를 반길 터였다. 그리고 모건의 말마따나, 운이 좋으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윤의 만면에 기대와 긴장이 차올랐다.
시윤은 모건이 만족할 때까지 체스 말을 옮기고서야 그의 연구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개인 연구실에 처박혀 새로운 클롭스 홀로그램을 만들었다.
시윤의 주된 업무는 병사들의 보디캠에 찍힌 클롭스들을 분류하고, 연구하고, 새로운 종을 윗선에 보고하는 거였다. 구역별로 자주 출몰하는 클롭스를 나열해 전투 지휘 본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제법 중한 일이다. 퓨어가 하는 일치고는, 이례적일 정도로 중요했다.
한참 홀로그램을 노려보던 시윤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있었던 터라 눈알이 뻑뻑했다.
때마침 왼쪽 구석에서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익숙한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시윤의 안색이 화사하게 피었다. 화면을 왼쪽으로 스와이프하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채시훈 소령님.”
시윤의 둘째 형인 시훈이었다. 시훈이 화면 가득 얼굴을 들이밀곤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렸다.
―우리 막내, 어디야-아?
“저야 연구실이죠.”
―저녁은 먹었어?
“어…… 네.”
―또 또, 형한테 거짓말한다. 너 거짓말 되게 못한다니까. 눈알이 막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려.
시훈이 못마땅하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시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부대 밥이라고 해 봐야 희멀건 식판에 퍼석퍼석한 빵과 혀가 아릴 정도로 단 잼, 짠 버터, 영양소가 꽉꽉 뭉쳐 있는 알약 몇 개가 다일 텐데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다.
지구는 아직 방사능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했다. 청정 구역에서 각양각색의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으나 모든 이들이 먹을 만큼 넉넉한 양은 아니었다. 고작 준위에 불과한 시윤에게 돌아올 몫은 없었다.
―부대 밥 더럽게 맛없지? 집에 와. 오면 내가 파스타 해 줄게. 우리 막내가 좋아하는 베이컨 한 주먹이나 넣어서.
“소령님 집이세요?”
―소령님 말고 형이라고 해. 나 섭섭해.
“하지만 저는 지금 부대 안인걸요.”
―나는 부대 밖인데?
“푸흐……. 알았어, 형. 집이야? 일찍 나갔네.”
―응. 나는 항상 칼퇴야.
시훈이 익살맞게 웃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웃었다. 시훈은 부대에서 흔치 않은 ‘칼퇴’를 매일 실천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령이라는 높은 계급에 있었고, 에스퍼였으며, 어빌리티 등급도 A이기 때문이다.
A등급의 에스퍼, 가이드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몹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번 전투에 나가면 어마어마한 성과를 올렸으니까.
시훈뿐만 아니라 시윤의 형제 모두가 그 대단한 A등급의 에스퍼였다. 거기다 지금은 은퇴하신 어머니 역시 A급 가이드였다. 하물며 아버지는 개국 공신 원수(General of the Army, GA)로 S등급이다.
근데 시윤만 그 핏줄을 이어받지 못했다.
오로지, 시윤만.
포스의 모든 국민은 열여섯이 되면 종(種)을 판가름하는 도어(door) 검사에 참여한다. 피를 뽑고, 유전자를 관찰하고, 어빌리티를 끌어내는 검사. 사람에 따라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 걸리는 도어 검사는 자신이 국가에 도움이 될 능력자인지, 아니면 평범한 퓨어인지를 판가름했다.
시윤은 자신이 당연히 에스퍼일 줄 알았다. 아버지와 형들이 뛰어난 에스퍼였으니까. 정해진 수순이었다. 비록 어렸을 때부터 하늘을 난다거나, 물건을 띄운다거나, 매우 빠른 속도로 달린다거나, 다친 상처가 저절로 낫는다거나 등, 뚜렷이 나타나는 징후는 없었으나 당연히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데 퓨어가 뜬 것이다.
[신체 발달: D(퓨어와 동급)]
[자가 치유 능력: D(퓨어와 동급)]
[어빌리티: 無]
[소유 능력: 無]
[확정 종: 퓨어]
성적표 아닌 성적표를 받았을 때, 시윤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전장에 나가 싸우는 미래 말고, 다른 미래는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뭐 하고 살지. 내 존재 가치는 뭐지. 내가 이 나라에 바칠 수 있는 게,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가 있지. 이렇게 나약한 몸뚱이로 대체 뭘. 무엇을!
가족들이 절 버린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의 수치였다. 자신의 가문, 일명 엘렉트라 가문이라 불리는 제 가족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선과 소문이 따라붙는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들은 따스하게 자신을 품어 줬다. 괜찮다고 위로했으며, 사랑스러운 막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고민해 줬다.
덕분에 시윤은 금세 회복할 수 있었다. 악착같이 공부했고, 끝내는 연구진 겸 교수로 입대했다. 물론, 단숨에 준위까지 올라온 데에 아버지의 입김이 없었노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수치스럽진 않았다. 저는 매시간, 매분, 매초, 준위라는 직책에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으니까.
시윤이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시훈을 보며 쌉싸래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시훈이 고개를 옆으로 마구 흔들었다.
―그래서 집에 올 거냐고. 오늘 큰형도 일찍 온대.
“어……. 난…… 일이 많아서…….”
시윤이 말을 조각냈다. 사실 지금 하는 일이 그다지 바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늘 에로아스가 복귀한댔으니까. 시간을 보아하니 늦은 밤이나 되어서 올 것 같지만, 그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에로아슨데. 전설처럼 건너 건너 듣기만 하던 청호를 실제로 볼 기횐데.
청호는 포스에서 가장 바쁜 존재다. 이번처럼 긴 출전이 아닐 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다른 전투에 나간다고 했다. 선봉에 서기도 했고, 전멸에 가까운 병사들을 구출해 오기도 했고, 비밀 작전으로 홀로 나가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일이 많다고? 어떤 새끼가 너한테 일 시키냐? 모건 그놈이야?
시훈이 거센 콧김을 뿜었다. 책상을 내려치기라도 한 건지 홀로그램이 파르르 경련했다. 시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마. 형이랑 큰형이 자꾸 그런 말 하고 다니니까 아무도 나한테 일을 안 시키잖아. 매번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고. 일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뭐야. 그럼 지금 하는 일도 바쁜 거 아니라는 거네. 퇴근해.
“아, 싫어. 이거 다 하고 갈 거야.”
―아 시윤아아……. 우리 막내 얼굴 좀 보자아…….
“어제도 봤잖아. 끊는다.”
―나 나흘 후에 또 출전이란…….
시윤은 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홀로그램을 아래로 내려 버렸다. 그대로 통화가 끊겼다. 분명 내일 아침 부리나케 찾아와 툴툴거릴 게 뻔했지만,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게 응당한 이치 아니겠는가.
목을 한 바퀴 크게 돌린 시윤이 지척에 있던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컵이 텅 비어 있었다. 쩝, 입맛을 다신 시윤이 몸을 일으켰다.
준위쯤 되면 뒤를 보필하는 병사가 두엇 정도 붙는다. 잔심부름도 하고, 일을 돕기도 하고. 그러나 시윤은 국가의 배려를 거부했다. 제가 나가서 싸우는 군인도 아닌데. 소중한 병력을 제 옆에서 썩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수된 물을 뜨려면 층마다 있는 작은 탕비실까지 직접 나가야 했다. 컵을 든 시윤이 뚜벅뚜벅 연구실을 나섰다.
어둠이 몰려온 연구동은 조용하다. 이곳엔 퓨어가 대부분이라 그랬다. 부대 내에 마련된 숙소에서 사는 에스퍼, 가이드와 달리 연구동 사람들은 아침에 출근하고, 밤에는 퇴근했다.
시윤은 조용한 연구동의 밤을 좋아했다. 이 널따란 곳의 주인이 된 기분이라서. 제 주제에 권력욕은 또 많았다. 시윤이 아무도 모르게 킥킥거렸다.
탕비실에 도착한 그가 컵에 물을 따랐다. 찬물에다 온수를 섞어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늘 미적지근한 물만 마시는 시윤에 모건이 찬 것도 아니고, 뜨거운 것도 아닌 것이 꼭 너 같다며 쯧쯧 혀를 차던 게 떠올랐다.
시윤이 찬장을 뒤적였다. 알약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쓸모없는 몸뚱이라지만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머리가 굴러가지 않으니, 알약 정도는 먹어 줘야 했다.
약보다 음식이 귀한 때다. 공장에서 찍어 내는 알약이야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나, 방사선을 피해 재배한 음식은 귀했다. 본가에 가면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하겠지만, 딱히 흥미가 없었다. 밥 먹는 건 시간을 쏟아야 하니까. 무엇 하나라도 씹어 보겠다고 아등바등인 서민들이 알면 기겁하고 까무러칠 생각이었다.
시윤이 한 끼 적정량인 알약 세 개를 꺼냈다. 그것을 입에 털어 넣고, 막 물컵을 들려고 하는데. 물이 파르르 경련했다. 시윤이 부릅, 눈을 홉떴다.
이건 군용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발생하는 지진이다. 보통은 굉음 수준의 소음에서 그치고 말지만, 지진이라도 난 듯 건물이 흔들리는 건 수백 명이 탈 수 있을 만큼이나 큰 군용기라는 뜻이었다.
“왔나 봐!”
시윤이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침내 영웅을 제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마침내! 형들에게 자랑해야지!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꼭 말해 줘야지!
혹 기회가 된다면, 정말 운이 좋다면, 그가 전투 내내 끼고 있던 보디캠을 받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안 된다면 아버지의 권력을 남용할 생각도 조금, 아주 조금 있었다.
알약을 꿀떡 넘긴 시윤이 바쁜 걸음으로 탕비실을 나왔다. 좀 전과 달리 복도가 북적였다. 다들 퇴근한 줄 알았는데, 시윤처럼 에로아스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시윤이 막 닫히려 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청호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다지 친분이 없는 이들이라 귀만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띵,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터지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연구동 로비는 인산인해였다. 시윤은 인간 파도에 휩쓸려 로비를 지나 부대 격납고까지 정신없이 밀려 나왔다.
격납고의 넓은 공터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눈에 익을 정도로 높은 계급인 에스퍼와 가이드도 있었고, 시윤처럼 평범한 퓨어도 있었다. 낮에 시윤의 강의를 들었던 신병들도 보였다.
저 멀리 건물만큼 커다란 군용기가 내려앉았다.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공기가 볼을 할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고 손뼉을 쳤다. 고막이 터질 듯한 환호성이었다.
사람들의 만면에 환희가 가득했다. 부대가 전투에서 복귀하는 건 흔한 일인데.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인데. 생전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광대에 발긋한 열이 차 있었다. 시윤이라고 별다르지 않았다.
착륙한 군용기 양옆에서 지지대가 나오더니 쿵, 쿵 바닥을 짚었다. 바닥이 우르릉 진동했다. 사람들이 더 크게 열광했다. 여전히 미지근한 물컵을 든 시윤이 까치발을 쳐들 때였다.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람들이 쏟아지듯 앞으로 움직였다. 시윤이 속절없이 무리에 휩쓸려 갔다. 하나 같이 덩치가 좋고, 몸이 단단한 에스퍼였다. 퓨어에 불과한 시윤은 납작하게 짓눌리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키도 그리 크지 못한 탓에 보이는 거라곤 익명의 뒤통수들과 검은 하늘뿐이었다.
시윤의 얼굴 가득 낭패가 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연구실 창문으로 볼 걸 그랬다. 그럼 손톱만 한 크기로나마 볼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 사이로 언뜻언뜻 어떠한 무리가 보였다. 에로아스 특유의 붉은 견장이 어깨에 얹힌 무리였다. 저 중에 청호가 있을 것이다. 헌데 보일만 하면 누군가의 뒤통수가, 어깨가, 팔이 시야를 가렸다.
“아우…….”
나와! 나도 좀 보자! 시윤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사위가 점점 더 조여들었다. 그 틈으로 조금씩 멀어지는 에로아스 부대가 보였다.
시윤의 눈썹이 가파른 내리막길을 그렸다. 이것을 위해 형이 해 준다는 파스타도 마다하고 기다린 것인데. 이리 허무하게 끝나다니. 종일 기대하고 있던 터라 마음이 미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로아스 부대가 건물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10분 정도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공을 축복하던 사람들이 천천히 흩어졌다. 바짝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시윤의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푸욱 한숨을 내쉰 시윤이 등을 돌렸다. 퇴근이나 해야지. 집에 가서 형한테 파스타 해 달라고 해야지. 맥주도 마셔야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손목시계가 가볍게 진동했다. 모건의 메시지였다.
[청호 봤냐? 아까 소녀 팬처럼 연구실에서 나가더니만.]
시윤이 홀로그램 키보드를 빼내 답을 보냈다.
[아니요. 키가 작아서 못 봤습니다.]
답장은 금세 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불난 가슴에 기름을 들이붓는 메시지였다. 시윤이 허공에다 어쭙잖은 주먹을 날렸다. 아오, 대령만 아니었어도!
시윤이 코를 찡그리며 물을 삼켰다. 사람들에게 휘말리며 반쯤 사라진 물은 그새 찬물이 됐다. 속에서 열이 치받으니 찬물도 나쁘지 않았다.
시윤이 신경질 가득한 손짓으로 홀로그램을 밀어 치우려 할 때였다. 시계가 다시 진동했다.
[내 연구실로 와. 청호 검사받으러 이리로 올 거야.]
시윤의 뒤꿈치가 곧장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모건은 연구동과 달리 독자적인 건물을 썼다. 아주 많은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딱히 조수를 두지 않는 그라 이따금 청소를 위해 들르는 이들을 제외하면 늘 한산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청호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가 벌써 퍼진 건지, 제법 많은 인원이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시윤이 씨익 웃으며 그들을 가로질렀다. 모건의 연구실은 모건이 따로 생체 정보를 입력해 놓지 않은 이상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모건과 꽤 두터운 친분을 가진 시윤의 정보는 당연히 등록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시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시윤은 방정맞게 웃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씹어야 했다.
곧장 꼭대기 층까지 올라온 시윤이 모건의 연구실 앞에 섰다. 그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빠르게 고개만 내밀어 유리창 안을 살폈다.
헌데 어째 인영이 하나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인영. 시윤이 다시 유리창 안을 염탐했다. 낮보다 훨씬 깔끔해진 연구실 안에는 모건 혼자였다.
시윤이 똑똑똑 창을 노크했다. 심각한 얼굴로 홀로그램을 보던 모건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안 왔어요?”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벙긋벙긋 입만 크게 움직였다. 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검지 하나를 펼쳤다. 시윤이 가느다랗게 실눈을 뜬 채 손가락을 노려봤다.
그게 무슨 뜻인데. 한 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거야? 아니면 위층으로 갔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공중에 있다고? 곧 떨어질 거라고? 뭔데?
유리에 콩 이마를 박은 시윤이 눈을 한껏 부라렸다. 차라리 문 열고 들어가서 직접 듣지, 싶어 휙 뒤를 돌았을 때였다.
“…….”
두껍고 거대한 벽이 코앞에 있었다. 아니, 벽이 아니다. 두툼한 목젖이 도드라져 있는 게 분명 인간이렷다. 시윤의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묘하게 대충 입은 듯한 제복, 정체 모를 얼룩이 묻어 탁하게 반짝이는 단추, 유독 새까만 옷감, 양쪽 어깨에 달린 붉은 견장, 헐겁게 맨 넥타이, 별 다섯 개가 날카로이 번뜩이는 계급장, 그리고…….
[GEN, 청호]라 적힌 붉은 테두리의 명찰.
“…….”
갈비뼈가 동그랗게 부풀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신 시윤이 뻣뻣하게 굳었다. 눈앞에 청호가 있다니. 이다지도 가까이에 그가 있다니. 어쩌지. 어떡하지. 경례부터 해야 하나. 아아, 그건 그렇고, 모건의 검지가 1을 뜻하는 거였구나. 1분 후에 도착한다는, 그런 뜻이었구나.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누가 뇌를 쾅쾅 두드려서 마구잡이로 으깨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청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기이한 욕망이 샘솟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볼 일이 제 평생 있을 리 없었다. 시윤이 막 고개를 드는데.
“뭐야, 넌?”
청호의 뒤에 서 있던 병사가 시윤의 미간을 향해 뾰족한 적의를 쐈다. 청호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대령 계급의 병사였다. 고작 음성일 뿐인데 옹골찬 주먹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아팠다.
“뭐냐고!”
연달아 이어진 고함에 까무러칠 듯 놀란 시윤이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서 들고 있던 컵이 아래로 낙하했다. 챙그랑! 눈치 없는 파열음이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청호의 뒤에 있는 병사들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렸다. 청호도 얼굴을 구겼을까. 워낙 키가 큰 탓에 그의 표정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었다.
시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치를 확인했다. 연구실 슬리퍼 차림의 제 발과, 두껍고 반질반질한 청호의 군화 사이에 크고 작은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아…… 어, 저는 준위 채시……윤인데. 아, 죄송합니다.”
놀란 시윤이 그대로 쪼그려 앉아 유리를 줍기 시작했다. 제가 원래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닌데. 하물며 입대 첫날에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거늘.
멍청한 놈! 시윤이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그가 허리를 굽히면서, 의도치 않게 청호와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청호의 코트에선 바람 냄새가 났다. 풀과 들, 하늘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 냄새의 근저에는 묘하게 비릿한 내음도 섞여 있었다.
시윤은 주책맞게 그의 냄새를 훔쳐 먹으며 유리를 주웠다. 정수리로 아주 많은 시선이 떨어졌는데, 그중에 청호의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두피가 따끔따끔할 리 없었다.
혼란에 빠진 시윤은 자신이 줍고 있는 게 유리인지, 종이인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모래를 모으듯, 손날로 유리를 뭉쳐 쥐려 했다. 등신 같은 짓이었다.
순간, 유리 파편들이 소리 없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큼지막한 조각부터 집요하게 보고 있어야 존재를 알 수 있을 만큼 작은 조각까지 모두. 시윤의 콧잔등 높이까지 올라온 그것들은 곧 휙휙휙, 허공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종착지는 복도 구석에 있던 쓰레기통이었다. 철제로 된 쓰레기통과 유리가 부딪치며 크리스털 모빌이 나부끼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시윤이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쓰레기통과 바닥을 번갈아 쳐다봤다. 사이코키네시스. 그러니까 염력이다.
사실 염력은 그렇게 특별한 어빌리티가 아니었다. 열 명의 에스퍼를 무작위로 뽑으면, 두 명 이상은 염력을 쓸 줄 알았다.
그러나 누구도 저렇게 많은 개수를, 저렇게 작은 입자까지 동시에 옮길 순 없다. 기껏 해 봐야 바위를 띄워 날리는 수준이었다.
방금 건 훨씬 정교하고 부드럽다. 공중을 부유하던 유리 파편들은 잔떨림도 없었다. 분명 청호의 능력이다.
건물을 으스러트린 것도 아니고, 땅을 갈라 들어 올린 것도 아닌데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청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더 늦으면 청호가 거슬린다며 염력으로 저를 천장에다 붙여 버릴 것 같았다. 그 전에 포스의 위대한 영웅을 꼭 눈에 담고 싶었다.
어렵지 않게 시선이 마주쳤다. 시윤이 가장 처음 맞이한 감정은 공교롭게도 공포였다.
진하고 날카롭게 빠진 눈매 안에 박힌 눈동자가 검었다. 아니, 그저 검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지구를 삼키고, 우주를 삼켜 버릴 것 같은 완전한 흑, 그 자체였다.
블랙홀이 저런 생김새지 않을까. 혹, 청호의 어빌리티 중에 눈으로 공간을 잡아먹는 능력도 있던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마를 훤히 드러낸 머리칼은 검푸른 색이다. 언뜻 보면 검으나, 또 언뜻 보면 푸르다. 마치 깊은 수심의 바다색을 빼앗아 온 듯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는 눈으로 만졌음에도 그 단단함이 느껴졌고, 우뚝 높게 선 코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던 그의 전적을 만천하에 알리는 듯했다. 단정하게 뻗은 입술은 그의 눈과 코를 견고하게 받칠 정도로 도톰했다.
그리고 왼쪽 귓불에 박힌 검은 귀걸이. 가이드를 대체해 넘치는 힘을 막아 주는 귀걸이. 여전히 그의 귓불에 자리 잡은 걸 봐서는 아직 반려 가이드를 찾지 못했음이리라.
청호는 잘생긴 외모의…… 괴물 같았다. 인간도, 클롭스도 아닌 또 다른 종. 풍기는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오장육부가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시윤은 청호와 수 초 동안 시선을 부딪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시윤이 일방적으로 쳐다보는 거였다.
문득, 청호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솟구쳤다.
“안 비킬 건가?”
“아, 예. 죄송, 죄송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시윤이 후다닥 일어났다. 그리고 청호와 그의 부하들의 길목에 걸림돌이 될까, 몸을 가로로 돌리고 벽에 최대한 붙어 섰다. 정신을 놓은 시윤이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청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걷는 것일 뿐인데도 위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시윤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스쳐 지나갈 때까지 숨조차 허투루 쉬지 않았다. 시선은 이도 저도 아닌 허공에 흩뿌렸다.
그래서일까. 청각이 예민해졌다. 청호의 군화가 바닥을 짓이기는 소리, 두껍고 무거운 코트가 펄럭이는 소리, 그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구멍을 간질였다.
마침내 청호와 그의 부대가 시윤을 완전히 지나쳤다. 시윤이 바짝 굳어 있던 어깨를 내릴 때였다.
“거기.”
묵직하게 낮은 청호의 목소리가 복도를 뱀처럼 배회했다. 모든 이의 눈알이 청호가 지칭하는 ‘거기’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그 눈알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시윤이었다.
시윤이 꼿꼿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주, 준위 채시윤.”
관등 성명은 그다지 꼿꼿하지 못했지만.
청호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윤은 작고 말랐다. 언뜻 보기에도 에스퍼는 아니었다. 대충 가이드일 거라 예상했다. 모건의 연구실에 퓨어가 드나들 리 없었으니까. 근데 왼쪽 가슴팍에 붙은 명찰 테두리가 녹색이었다.
[WO. 채시윤]
청호의 눈이 잠깐 가늘게 좁아 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딱히 흥미로울 것 없는 명찰이다. 널리고 널려서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흔한 명찰.
그런데,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클롭스를 앞에 둔 듯,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꼴같잖게 제 머리 위에 올라서려는 늙은 원수들을 보듯, 갑갑하기도 하고. 방사능에 침몰당해 종기를 뒤집어쓴 인간을 보듯, 불쾌한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반대로 청정한 아마존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처럼 상쾌하기도 하고.
한 번에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감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몰아쳤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처음. 처음이라.
쳇바퀴 굴러가듯, 전장과 부대만 반복하는 청호에게 ‘처음’이라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청호는 그 ‘처음’에 아주 조금의 시간을 낭비해 보기로 했다.
지나쳤던 길을 거스른 청호가 다시 시윤의 앞에 섰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눈을 내리깔았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햇빛을 본 적이나 있을까, 의심이 될 정도로 희멀건 피부. 차분하게 내려와 있는 머리칼. 기다란 속눈썹. 동그란 코끝. 그보다 더 동그란 콧방울. 오목하지만 짙지 않은 인중. 가녀린 솜털이 나 있는 볼. 그리고 남자의 것치고는 통통하고 붉은 입술.
청호는 아무 생각 없이 엄지로 시윤의 아랫입술을 문질러 볼 뻔했다. 혹 무언갈 발랐나, 싶어서.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아무리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준위라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건 권력 남용이었다.
“왜, 왜, 왜 그러십니까?”
대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청호의 시선을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다 못한 시윤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 제가 컵을 깬 것이 뒤늦게 기분 나빴나. 그래서 벌을 주려 하나. 그가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머리가 터져 나갈 텐데. 어쩌면 불을 이용해 홀랑 태워 버릴지도 모르지. 또 아니면 심장만 똑 떼어다가 얼려 버릴지도 몰랐다.
다행히, 시윤의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퓨어야?”
“예?”
“퓨어냐고.”
시윤이 퍼뜩 얼굴을 들어 청호를 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청호는 자신의 명찰을 빤히 보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퓨어임을 나타내는 증거물을 보면서 퓨어냐 캐묻는 이유가 뭘까.
그 대단한 청호가 색맹이기라도 한 걸까. 초록색과 노란색, 붉은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윤이 간결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퓨어 맞습니다.”
“확실해?”
“예?”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호를 쳐다봤다. 퓨어가 확실하냐니. 무슨 질문이 그 모양인가.
애매하게 일그러지는 시윤의 낯짝을 보던 청호가 쯧,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더니.
“됐어.”
짧게 대화를 쳐 내곤 뚜벅뚜벅 모건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를 뒤따라왔던 병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섰다.
시윤이 유리를 통해 코트를 벗는 청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런 청호의 어깨 너머로 모건이 시윤과 시선을 맞춰 왔다. 눈썹이 마구 들썩이는 게, 무슨 이야길 했냐며 캐묻는 듯했다.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병사들이 얼른 안 꺼지냐고 눈을 부라려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고장 난 로봇 같은 걸음걸이로 복도를 벗어난 시윤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반질반질한 엘리베이터 문에 자신의 인영이 비쳤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앞이 흐리다. 술에 취한 듯 몽롱하기도 하고. 꿈에 그리던 영웅을 만나서 그런가.
아아, 그러고 보니 그저 만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야기도 나눴다. 엄청 가까이에서 에스퍼 어빌리티를 쓰는 것도 봤다. 세상에. 곱씹을수록 이런 행운이 있나, 싶었다.
엘리베이터에 쾅 머리를 처박은 시윤이 히죽, 바보처럼 웃었다.
“청호 대장님…….”
진짜, 너-무 멋있다.
* * *
다음 날 아침, 연구동 전용 샤워실에서 씻고 나온 시윤이 축축이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였다. 곧장 건조실로 들어가려는데, 순간 몸이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시윤이 어깨로 벽을 짚고 섰다.
“왜 이러지…….”
이상하게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속도 메슥거리고, 머리도 아프고. 분명 두 발로 바닥에 서 있는데 멀미하는 기분이었다.
등신같이 나약한 몸뚱이가 또 아프기라도 한 걸까. 감기? 몸살? 그것도 아니면 중병인가.
시윤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아픈 건 늘, 항상, 독보적으로 일등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들도. 평생 아픈 걸 못 봤는데. 하물며 둘째 형인 시훈은 전투에 나갔다가 팔이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왔음에도 낄낄거리며 웃었었다.
그는 강한 에스퍼고, 저는 보잘것없는 퓨어라 그렇겠지.
무릎에 꽉 힘을 준 시윤이 그대로 뒤를 돌았다. 꼴을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성싶은데, 여기서 쓰러지면 금세 소문이 퍼질 터였다. 엘렉트라 가문의 평범한 막내가 몸살로 쓰러졌다는 소문 말이다.
개인 연구실로 가야 했다. 쓰러져도 거기서 쓰러져야 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그대로 죽어 버린다 한들, 모두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보단 나았다.
간신히 옷을 입고, 비척비척 연구실에 도착한 시윤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누가 관자놀이에 못을 대고 탕탕 때려 박는 듯한 통각이었다. 책상에 한쪽 볼을 대고 엎드린 시윤이 허공에 떠 있는 일정표를 응시했다.
세 시간 뒤에 강의가 하나 있다. 그 이후로는 다행히 비어 있었다. 딱 강의만 하고, 일찍 퇴근해야겠다. 제가 아픈 걸 알면 집이 발칵 뒤집히겠지만, 지금은 그 유난이 고팠다. 몸이 아프니 정신도 나약해진 모양이다.
시윤이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잠깐만, 잠깐만 눈 붙이고 병원에 약을 받으러 갈 생각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강의를 할 순 없으니까.
그가 막 선잠에 빠지려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윤이 잠금을 해제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그 말인즉슨, 노크한 사람이 시윤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이라는 거였다.
부대의 규칙이었다. 자신보다 낮은 계급이 상주하고 있는 방은 주인의 동의 없이 얼마든지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규칙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계급이 높다는 건, 공이 많다는 거다. 공이 많다는 건, 클롭스를 많이 죽였다는 거고. 그건 곧 포스의 국민을 살렸다는 뜻과 직결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에 군 계급은 온전하고 견고한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시윤은 무례한 손님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경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막내! 굿 모닝이야!”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지나치게 발랄하다. 둘째 형인 시훈이었다.
맥이 탁 풀린 시윤이 그대로 주르륵 쓰러지듯 앉았다. 시훈이 그런 시윤의 앞에 도시락을 풀어 놓았다. 멋들어진 제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도시락이었다.
“밥 안 먹었지? 그럴 줄 알고 이 형이 주먹밥을 만들어 왔어. 그 귀한 통조림 햄도 넣었다고.”
그 비싼 통조림 햄을 주먹밥에 넣는다며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지만, 형은 널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시훈이 종알종알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도시락엔 동글동글한 주먹밥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만드신 듯한 콩나물국과 후식으로 먹을 초콜릿 따위도 보였다. 평소라면 배가 고프든, 고프지 않든 고맙다고 인사했을 텐데. 몸 상태가 영 별로인지라 고운 말을 창작할 기력이 없었다.
“하아……. 이거 다섯 개 먹는 것보다 알약 세 개 먹는 게 영양소적으로 훨씬 더 완벽한데, 형.”
시윤이 벅벅 눈두덩을 문지르며 불평했다. 그러자 시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알약엔 내 사랑이 없잖아.”
눈을 찡긋거린 그가 손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그의 발랄한 애정 표현에 익숙한 시윤이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건 다희 누나한테나 가져다줘. 나 말고.”
다희는 시훈과 각인한 그의 반려 가이드였다. 시훈처럼 A등급인, 아주 능력 있는 가이드.
에스퍼와 가이드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가 내려 준 능력을 받은 자들이다. 그만큼, 과학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운명으로 이끌리곤 했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능력을 가진 반려가 태어날 때부터 짝지어지는 것이다.
에스퍼는 인간의 신체를 훨씬 뛰어넘는 힘을 다룬다. 그러다 보니 가끔 치받는 힘이 방출되지 못하고 속에서 나돌았는데, 그 상태를 ‘폭주’라 불렀다. 폭주는 힘을 컨트롤하지 못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위험하게 만들었다.
형들에게 듣기론 그 폭주의 고통이 어마어마하단다. 내장이 녹는 것 같다고 했다. 눈알의 실핏줄이 죄다 터져 시야가 붉어지고, 사지가 뻣뻣하게 굳거나, 반대로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다. 수백 개의 핏줄 사이로 날카롭게 갈린 유리가 나도는 듯한 고통이랬다. 자신이 인간인지, 불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악마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폭주로 인한 상해는 자가 치유 능력이 아무리 높다 한들, 치료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운이 나쁘면 제힘에 잡아먹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때 가이드가 필요하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안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방출되지 못한 힘을 바깥으로 빼내고, 자신의 기운으로 바글바글 끓는 에스퍼의 고통을 내리눌렀다.
각인되지 않은 가이드도 도움은 될 수 있으나, 몹시 미미했다. 그러나 각인한 가이드와 접촉하면 그 효과가 몇 배로 커졌다. 고통이 금세 사그라지고, 상처 치유 속도도 곱절로 빨라졌다. 그래서 국가는 도어 검사 후, 곧장 서로의 반려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시훈이 말하길, 폭주 때 가이드와 접촉하면, 지옥에 있다가 순식간에 천국으로 곤두박질친 기분이랬다. 머리가 개운해지고, 전신이 홀가분해진다고. 각인된 가이드가 자신을 구원해 주러 땅에 내려온 천사로 보인댔다.
“우리 자기 건 여기 따로 있지.”
시훈이 또 다른 도시락 통을 들어 보였다. 새빨간 리본까지 묶인 게, 아주 단단히 준비한 듯했다. 시윤이 못 말린다는 듯,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시훈이 그런 시윤의 양쪽 볼을 쥐고 조몰락거렸다. 무뚝뚝한 막내는, 무뚝뚝해서 귀여웠다.
“이건 다 네 거니까 꼭꼭 씹어 먹어, 우리 막…… 막내야. 너 열 있다?”
시훈의 낯이 단숨에 딱딱해졌다.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말랑한 볼살이 뜨거웠다. 이건 몹시 큰일이었다. 한 떨기 꽃보다 가녀린 동생에게 다른 꽃이 아니라 열꽃이 피었다. 큰형이 알면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시윤을 안락한 침실에 감금할 터였다.
“뭐야. 왜 이래.”
시훈의 목소리가 음울할 정도로 낮아졌다. 시윤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단단하고 차가운 손바닥에 벌써 아픈 게 가시는 듯했다.
아아, 나의 사랑스러운 가족. 언제나 따스하고, 다정한 나의 형.
“응. 나 아파. 몸살인가 봐.”
“몸살이라고?”
“힘이 없어. 속도 안 좋고, 눈앞도 가물가물해. 머리도 아파.”
시훈이 시윤의 이마로 손을 옮겼다. 볼보다 더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몸살로 인한 열이라기엔 지나치다. 대충 어림잡아도 40도에 가까웠다. 시윤은 퓨어인데. 퓨어에게 40도에 육박하는 열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시훈은 잘 알고 있었다.
“일어나. 병원 가자.”
시훈이 시윤을 부축해 일으켰다. 시윤은 웬일로 아무런 반항 없이 시훈에게 몸을 맡겼다.
“응…….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시훈의 얼굴이 더 단단하게 굳었다. 시윤은 자신이 아픈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퓨어라는 정체성을 몹시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큼 아파도 절대 아프지 않다며 바락바락 소리를 치곤 했다.
헌데 이렇게 순순히 아프다고 시인하다니.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시훈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시윤의 손을 잡아챘을 때였다. 익숙한 감각이 손목의 핏줄을 타고 올라왔다. 아니, 익숙하나 시윤에게서 느끼면 안 될 감각이었다.
“너…….”
시훈이 당혹 섞인 눈동자로 시윤을 쳐다봤다. 시윤이 몽롱하게 풀린 눈을 끔뻑였다.
“왜? 심각한 병 같아? 몸살 같은 거 아니고?”
“너, 병원 말고 연구센터로 가야겠다.”
그 말에 시윤의 속눈썹이 위로 바짝 올라붙었다.
“엉……?”
멍청한 탄식은 덤이었다.
시윤에게 연구센터는 미지의 세계였다. 한 번도 발을 들여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구센터는 에스퍼와 가이드에 관해 연구하고, 그들의 건강과 안위를 책임지는 곳이다. 그러니 퓨어인 시윤은 연구센터에 감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근데 이렇게 난데없이 오게 됐다.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시훈에게 잡혀서.
“형 미쳤어? 나 여기 오면 안 돼. 징계감이야.”
시윤이 혹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삭였다. 가슴팍에 붙은 녹색 명찰이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시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열심히 팔을 흔들어 봤으나 꿈쩍도 않았다. 시훈이 그냥 에스퍼도 아니고, A등급 에스퍼인데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가 감히 너한테 징계를 내려. 데리고 와. 대가리 터트려 버릴 거니까.”
시훈이 잔잔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시윤이 부르르 어깨를 떨며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아, 형! 나 몸살이야. 병원 가서 주사 한 대 맞으면 된다고. 여기서 놔 주는 주사 맞으면 나 쇼크로 죽을지도 몰라. 에스퍼랑 가이드가 맞는 걸 나 같은 퓨어가 맞으면…….”
“쉬…….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시훈이 조금 더 강하게 시윤을 잡아당겼다. 이제는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한 시윤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시훈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장난기가 많긴 했으나 이런 장난은 치지 않았는데. 제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 어떠할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서러운 마음에 눈시울이 다 붉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안녕하십니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시훈을 알아보고 척척 경례했다. 시훈은 그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애꿎은 시윤만 저보다 높은 계급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아등바등해야 했다.
시훈은 1층 깊숙한 곳에 있는 이름 모를 진료실에다 시윤을 내려놓았다. 얹혀 오기만 했을 뿐인데 진이 다 빠진 시윤이 진찰 베드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새 열이 더 오르기라도 한 건지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시훈이 벽에 붙은 버튼을 눌러 의사를 호출했다. 연구동과 달리 하늘색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타났다. 시훈을 알아본 그가 곧은 자세로 경례했다. 시훈은 이제껏 그래 왔듯, 그 경례도 무시했다.
“소령님. 어찌 연락도 없이 오셨습니까.”
“쟤. 검사 좀 해 봐.”
시훈이 턱짓으로 시윤을 가리켰다. 의사의 시선이 시윤에게로 흘러왔다. 남자. 20대 중반. 퓨어. 계급 준위.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정보는 그게 다였다. 딱히 어디가 아파 보이진 않았다. 얼굴이 조금 붉긴 했으나, 연구센터에서 담당할 병은 아닌 듯했다.
“무슨…… 검사 말씀입니까?”
“가이드 도어 검사.”
“예?”
“뭐?”
시훈의 말에 의사와 시윤이 동시에 소리쳤다.
“형 미쳤어? 장난도 정도껏 쳐.”
베드에서 벌떡 일어난 시윤이 한껏 눈을 부라렸다. 도어 검사라니! 그것도 가이드 도어 검사라니! 장난이 과했다. 그러잖아도 열 때문에 붉었던 시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마구 요동쳤다.
시윤은 그대로 진료실에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시훈이 그의 손을 세게 잡아 쥐었다.
“시윤아. 장난 아니야.”
“…….”
“너한테서 가이드 힘이 느껴져. 약하긴 한데, 분명 가이드 힘이야.”
시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고, 입매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에 시윤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제게 가이드 힘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혼란이 범람했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입술만 달싹이자 의사가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었다.
“하지만, 소령님. 에스퍼든 가이드든 아무리 늦어도 열여섯 전에 발현하는데요. 준위님은 나이가…….”
그 말에 시윤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가 시훈의 손을 털어 냈다.
“그래! 나 스물여섯이라고! 근데 무슨 도어 검사야.”
도어 검사를 괜히 열여섯에 하겠는가. 그 이후로는 발현이 안 되기 때문에, 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열여섯이라는 마지노선을 세워 둔 것이다. 열여섯이 넘은 나이에 갑자기 에스퍼가 됐다거나, 가이드가 됐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나 형 눈에나 애지, 먹을 만큼 먹었단 말이……!”
빽 소리를 지르던 시윤이 기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열이 펄펄 끓는데 화까지 냈더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시훈이 그런 시윤의 팔꿈치를 잡아 부축했다. 그 가벼운 스킨십에도 손바닥이 뭉근해졌다. 착각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해. 내가 느꼈다니까.”
“형.”
“시윤아. 형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도어 검사가 어떤 상처인지 알고 있어. 그래도 한 번만 해 보자.”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한 말에 시윤의 눈썹이 내리막길을 그렸다. 그가 시훈의 가슴팍에 툭 이마를 기댔다.
“형이 그러면 내가…… 기대하잖아…….”
“…….”
“나 또 실망하기 싫어. 그거 되게 아프단 말이야…….”
기대와 실망.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감정인지, 당해 보지 않은 자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시윤은 자신이 에스퍼라 믿어 의심치 않던 열여섯, 그 두 가지 감정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사경을 헤맸었다.
그래서 다시는, 정말 다시는 그때와 같은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시윤이 눈을 꽉 짓이기듯 감았을 때였다. 의사가 작은 기계 하나를 들고 왔다.
“가이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능력이 확인되면, 그때 본격적인 도어 검사를 진행하는 게 어떠실는지요.”
네모난 기계엔 손바닥 모양의 점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어렵지 않은 검사인 듯했다. 시훈이 묵음으로 시윤을 재촉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시윤이 마지못해 기계에다 손을 올렸다.
기계가 손바닥을 따라 푸른빛을 은은히 뿜어냈다. 시윤과 시훈이 동시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30초쯤 흘렀을 때 빛이 꺼졌다. 기계를 거둬 간 의사가 홀로그램을 빼내 무언가를 분주하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어…….”
시윤과 시훈이 덩달아 눈을 깜빡거렸다. 의사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미미하지만, 가이드 반응이 있습니다.”
그 말에 시윤의 심장이 철렁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온몸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어빌리티 등급은 도어 검사를 진행해 봐야 알 수 있겠으나, 가이드는 확실합니다.”
시윤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라도 지를 듯해서. 가이드라니. 자신이 가이드라니!
스물여섯이라는 나이에 종이 바뀌었다. 아마 미래도 바뀔 것이다. 당장 내일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환희였다.
* * *
시윤은 사흘 동안 연구센터에 박혀 도어 검사를 진행했다. 피가 뽑히고, 이름 모를 약물이 투약됐다. 체력 측정도 했으며, 수면 패턴은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검사당했다.
그런데도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치솟던 열 역시 단숨에 가라앉았다. 마치 열여섯 살, 한껏 신나서 도어 검사를 받던 때와 같았다.
첫째 날에는 부모님이 오셨다. 아버지는 덤덤했으나 씰룩이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고, 어머니는 그동안 마음고생했던 걸 통감하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둘째 날에는 형들이 왔다. 하필 피를 뽑을 때 와서는 대체 무슨 피를 그렇게 뽑아 대냐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 봐야 검지만 한 주사기였을 뿐인데도 그랬다. 한참 연구실 앞을 서성이던 두 사람은 아쉬운 낯으로 전장에 나갔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마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 정도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시윤은 연구센터 안에서 그들과 작별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검사가 끝났다.
결과는 이튿날 나왔다. 시윤 인생에 두 번째로 받는 성적표였다.
[신체 발달: C-]
[자가 치유 능력: C-]
[어빌리티: C]
[소유 능력: 無]
[확정 종: 가이드]
열여섯에 받았던 성적표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남이 보면 형편없는 성적표였으나, 시윤에겐 그저 감동적이기만 했다. 퓨어가 아니라니! 신체 능력은 건장한 퓨어에게도 못 미쳤으나, 어쨌든 가이드였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가이아가 준 힘을 가진,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가이드란 말이다.
시윤은 기뻐할 새도 없이 곧장 반려 에스퍼 찾기에 돌입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반려인 에스퍼와 가이드는 비슷한 능력에, 비슷한 또래이다. 그 말은, 시윤의 반려 에스퍼가 가이드 없이 서른 가까이 버텼다는 뜻이었다.
그 나이까지 폭주가 없진 않았을 터. 어쩌면 이미 죽어 버렸을지도 몰랐다.
에스퍼는 흔치 않은 병사다. 아무리 C급이라도, 나라의 소중한 병력이자, 자산이었다.
처음엔 반려 가이드가 없는 C급 에스퍼부터 매칭을 시작했다. 매칭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관자놀이와 손목에 동그란 칩을 붙이고 악수하면 됐다.
C급에서 반려가 없는 에스퍼는 근 100명이었다. 모두 생각보다 건강한 낯이었다. 아무래도 등급이 낮을수록 폭주가 약한지라.
허나, 그들 중 시윤의 반려는 없었다.
B급에서 반려가 없는 에스퍼는 반절로 뚝 줄었다. 50명이 안 됐다. 그들 중에도 시윤의 반려는 없었다.
결국엔 A급까지 반경을 넓혔다. 의사들도, 시윤도 무슨 C급 가이드의 반려가 A급 에스퍼일 수 있냐며 혀를 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앞선 사람들과 달리, 반려가 없는 A급은 심각한 상태였다. 수시로 코피를 흘리거나, 피를 토했다. 그들은 시윤이 몹시 간절했다. 폭주로 인한 죽음이 턱 끝에서 깔짝거리며 틈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매칭 끝에 반려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면 눈에 띄게 실망하고, 몇몇은 다시 해 보라며, 더 진한 스킨십을 하면 다를 거라며 시윤에게 입을 맞추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매칭에 성공하지 못했다. 부대 안의 모든 에스퍼를 뒤졌으나 시윤의 반려는 없었다. 전투에 나가 있는 에스퍼 중에 있을지도 모르니 연구원들은 더 기다려 보라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반려는 없었다.
시윤의 어깨는 날이 갈수록 처졌다. 온갖 먹구름이 자신에게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제 머리 위에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고, 우박이 떨어졌다.
저는 이런 운명인가 보다. 숨어 있던 힘이 간신히 밖으로 나왔는데, 그 힘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빌어먹을 운명 말이다.
방금 전장에서 돌아온 C급 에스퍼와도 매칭에 실패한 시윤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길게 갈라진 귓불이 어찌나 얄미운지. 그냥 귀 자체를 통째로 뜯어 버리고 싶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가 볼게요.”
저 때문에 몇 날 며칠을 고생한 연구원들에게 꾸벅 인사한 시윤이 막 진료실 문을 열려 할 때였다.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모건이었다. 그가 씨익 입술을 째며 말했다.
“가이드 없는 에스퍼. 아직 하나 남았는데.”
* * *
“청호 대장님. 대령 폴 터너입니다.”
청호의 방에 들어선 폴이 힘이 한껏 들어간 몸짓으로 경례했다.
“응.”
기다란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청호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큐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건 하나였으나, 맞추는 건 열댓 개가 훌쩍 넘었다. 큐브들이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큐브는 움직일 때마다 찰칵찰칵 칼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큐브들의 두 면이 금세 완성됐다. 꼭 미리 촬영해 둔 홀로그램이 재생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만큼 움직임이 부드럽고 버벅거림이 없었다. 그저 그런 사이코키네시스 능력으론 흉내도 못 낼 터였다.
폴은 장난인지 훈련인지 모를 청호의 저런 행위에 퍽 익숙했다. 자꾸 에스퍼 능력을 쓰면 안 좋을 텐데, 싶다가도 제가 어찌 감히 그의 행동에 가타부타 말을 얹겠나 싶어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큐브를 구경하던 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구센터에서 연락이 왔는데, 가이드가 있답니다.”
“무슨 가이드.”
청호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반려 없는 가이드랍니다.”
이어지는 폴의 말에 찰칵찰칵 움직이던 큐브가 언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폴이 뒤꿈치에 꾹 힘을 줬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청호인데, 늘 새로운 공포와 두려움을 경험했다. 목젖이 마른 씨앗처럼 쪼그라들었다.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해?”
청호가 처음으로 폴을 바라봤다. 미간이 묘하게 역삼각형을 그리고 있는 게, 뜬금없는 보고가 영 마뜩잖은 듯했다. 폴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등 뒤로 숨겼다.
“그 가이드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청호의 눈이 번뜩였다. 스물여섯 가이드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보였다. 그때,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울컥 올라왔다. 혀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청호가 짜증스레 입맛을 다셨다.
제힘을 견디지 못해 허물어지는 내장의 고통엔 익숙해졌는데, 이 피비린내는 도무지 적응이 어려웠다.
꿀꺽 피를 삼킨 청호가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스물여섯까지 반려가 없는 가이드. 흔치 않았다. 서른이 되도록 반려가 없는 저만큼이나 흔치 않은 존재였다.
그러니 분명 제 반려일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등신 같은 몸뚱이가 한계에 다다랐다. 수시로 죽을 준비를 하는 것도 지친 상태였다.
청호는 여태 자신의 가이드가 난세에 휩쓸려 어미의 배 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었거나, 태어났으되 어릴 때 클롭스에게 잡아먹혔거나, 아니면 제힘을 시기한 가이아가 존재 자체를 창조하지 않았거나, 셋 중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소리 소문이 없을 수 없었다. 제 반려 정도면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래서 모든 걸 체념하고 죽음만 기다리며 살았다. 근데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드디어!
답지 않게 상기된 청호를 보던 폴이 쭈뼛쭈뼛 두 걸음 다가왔다.
“헌데, 대장님…….”
“뭐?”
“그 가이드…… 어빌리티 등급이 C랍니다.”
그 말에 청호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철재로 만들어진 큐브들이 끼긱, 끽, 까각,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던 그것들은 곧 파직!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조각났다. 그 조각들에서 불이 발화했다.
먼 거리에 있던 폴에게도 열기가 전해질 정도로 화염 같은 불이었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철재가 속절없이 뭉그러졌다. 금세 액체가 된 그것들이 둥글게 모이더니, 곧 익숙한 모양새가 됐다. 총알이었다.
열댓 개의 큐브에서, 수백 개의 총알로 진화한 그것들이 뱅글뱅글 빠른 속도로 돌며 사냥감을 탐색했다. 폴이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처럼 푹 고개를 숙였다.
청호의 입술 끝이 비죽 뒤틀렸다.
“그래서. 그 C급이 내 반려일지도 모르니, 매칭하러 오래?”
“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거절했지만, 모건이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밀고 나옵니다.”
다시 소파에 앉으려던 청호가 멈칫했다. 모건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청호가 귓불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귀걸이가 만져졌다. 먼 옛날. 스무 살이 되면서 그러잖아도 강력했던 에스퍼 어빌리티가 갑자기 팽창한 적이 있었다.
불안정한 상태, 갈무리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 발작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폭주까지. 매일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차라리 죽고 싶다 생각할 때, 모건이 이 검은 귀걸이를 만들어 줬다. 힘을 억누르는 능력이 있는 귀걸이였다. 전투 중에 사망한 가이드 수십의 능력을 빼서 만들었다는데, 제법 효과가 좋았다.
모건은 똑똑한 자다. 포스에서, 어쩌면 멸망한 이 지구 안에서 가장 똑똑한 자일지도 몰랐다. 그런 모건이 확신한다라. 대체 그 C급 가이드가 뭐기에.
청호의 주위를 팽글팽글 돌던 총알들이 동력을 잃고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다. 찰그랑, 찰그랑.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가시게요?”
눈을 동그랗게 뜬 폴이 물었다.
“그래.”
청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죽어 버린 희망에 잠깐 물을 주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 * *
시윤은 죄 없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또 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청호가 저와 매칭하러 온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A급 에스퍼와 매칭 검사를 받을 때도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몸을 뒤틀었는데. SS급이라니.
참다못한 시윤이 홀로그램을 보고 있는 모건에게 다가갔다.
“모건 대령님.”
“응, 왜.”
“이건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제 에스퍼가 청호 대장님일 리 없잖아요.”
그 말에 모건이 가늘게 눈을 떴다. 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얹혀 있던 말들을 와르르 쏟아 냈다.
“저 C급이에요. 그것도 C-. 솔직히 퓨어라고 해도 크게 다른 거 없다고요. 근데 청호 대장님은…….”
“채 준위.”
“네, 대령님.”
모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시윤의 얼굴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시윤이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모건이 허리를 굽히고 그런 시윤과 눈을 맞췄다.
“채 준위는 자신이 스물여섯 살에 가이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나?”
“아니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맞아. 하물며 나도, 포스에서 제일 똑똑한 나도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 했어. 스물여섯 살에 발현이라니. 채 준위 덕에 이제껏 가이드에 대해 연구했던 자료들을 다 불태워야 할 판이야.”
모건은 진실로 침울한 듯했다. 시윤이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갑자기 죄인이 됐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어쩔 줄 모르고 색색 숨만 쉬는데, 모건이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겼다.
“내가 몰랐던 일이 일어났어. 그 말은, 앞으로 채 준위에게 무슨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지 그 누구도 모른단 뜻이거든?”
“…….”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해.”
결론이 이상하게 났다. 아니, 미래에 있을 일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시윤이 캐묻던 건 미래와 하등 상관없었다. SS급인 청호와 C급인 제가 매칭될 리 없으니 그를 부르지 말라는 말이었거늘.
“대령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어. 청호 대장 왔어?”
시윤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려 할 때였다. 모건이 시윤의 어깨 너머를 보며 밝게 인사했다. 시윤이 버석하니 돌덩이처럼 굳었다.
왔구나. 결국엔 그가, 이곳에, 나를 만나러, 와 버렸구나.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박동했다. 어찌나 세게 뛰는지. 목구멍으로 역류할까 입술을 겹쳐 물었을 정도였다.
“가이드는?”
낮은 음성이 자신을 이곳까지 행차하게 한 애송이를 찾았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제발 이대로 사라져 버렸으면. 콱 죽어 버렸으면. 먼지가 되어 흩날렸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간절히 빌었다.
까무러치기 직전인 시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건이 싱글싱글 웃으며 시윤을 잡아 돌렸다. 거센 힘에 시윤이 맥없이 반 바퀴를 팽그르르 돌았다.
“여기. 일주일 전에 발현한, 따끈따끈한 가이드야.”
시윤이 가림막 하나 없이 청호의 앞에 드러났다. 분명 옷을 갖춰 입고 있음에도 알몸뚱이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딱 그만큼 수치스러웠다.
청호는 머지않은 과거에 만났을 때와 달리 편안한 차림이었다. 검은 목 폴라에 일자로 똑 떨어진 바지. 그러나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얼굴과 새까만 동공은 그대로였다.
시윤이 녹슨 로봇 같은 움직임으로 경례했다.
“주, 준위 채시윤.”
청호가 그런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진득한지. 시윤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경례를 계속했다. 그러자 모건이 시윤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무게 중심을 잃은 시윤이 청호의 앞에서 간신히 멈춰 섰다.
단단하고 두툼한 청호의 가슴팍에 코가 닿을 듯 말 듯 했다. 며칠 전, 모건의 연구실 앞에서도 이랬었는데. 혹, 그가 저를 기억할까. 못 하겠지. 저에게나 특별했던 날이지,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평이한 날이었을 테니까.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시윤이 바르게 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모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띤 모건이 시윤의 손목에 동그란 칩을 붙였다.
“…….”
시시각각 하얘졌다가 붉어지는 시윤을 보던 청호가 소매를 걷었다. 시윤과 달리 까무잡잡하고 두꺼운 손목이 드러났다. 모건이 그곳에다가도 칩을 붙였다. 곧 두 사람의 관자놀이에도 칩이 붙었다.
시윤이 죽음을 코앞에 둔 사형수처럼 숨을 고르는데, 문득 청호가 비스듬히 고개를 흘렸다.
“손만 잡으면 됐던가. 마지막 매칭이 10년 전이라 기억이 안 나네.”
그의 입가에 쌉싸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모건이 킥킥거리며 청호의 손을 돌려 손바닥이 위로 오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시윤을 향해 턱짓했다.
“채 준위는 일주일 내내 했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알지?”
“……예.”
시윤이 굼뜬 동작으로 청호의 손바닥에다 자신의 손을 올렸다.
청호의 손은 컸다. 아주아주 컸다. 그리고 지금껏 잡아 왔던 그 어느 에스퍼의 손보다 단단했으며, 또 뜨거웠다.
청호의 손은 이런 느낌이구나. 강해 보이긴 하나, 결국엔 손가락 다섯 개에 손바닥 하나인, 그런 평범한 인간의 생김새인데. 이 손으로 그리 많은 사람을 살리고, 구하고, 나라를 지켰구나. 새삼 감격스러웠다.
시윤이 저도 모르게 청호의 손을 세게 잡았다. 순간, 청호의 도톰한 목울대가 아래위로 거칠게 꿀렁거렸다. 그것을 거부로 느낀 시윤이 휙 손을 빼려 할 때였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러고는 단단히 손가락을 얽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틈 없이 맞물렸다. 마디가 굵은 청호의 손가락은 꼭 쇳덩이로 만든 족쇄 같았다.
“C급 맞아?”
청호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시윤에게 박혀 있었다.
“응, 맞아.”
모건이 대답했다.
“…….”
청호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그에 모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캐물었다.
“왜? 뭐가 좀 달라? 찌릿찌릿하고, 서정적인 감정이 샘솟고, 막 그래?”
“호들갑 떨지 마. 다르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고. B나 A급 가이드랑 느낌이 비슷해서.”
“그게 다른 거야. 어떻게 C급한테서 A급 가이드 느낌이 나냐.”
모건이 어깨로 툭 청호의 팔뚝을 쳤다. 부대에서, 아니, 이 나라에서 청호를 저리 대하는 이는 모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젠가 모건이 시윤에게 자랑하듯 말한 적이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입대한 청호를 동생처럼 돌봐 주고, 이런저런 도움을 줘서 친하다고. 물론 시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청호와 모건은 이질적일 정도로 다른 캐릭터라서. 근데 이렇게 보니 정말 친하긴 한 모양이었다.
모건이 태블릿에서 홀로그램을 빼내 청호와 시윤에게 보였다. 음파 같은 선 두 개가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둘의 에스퍼 능력이랑, 가이드 능력의 파동이 비슷하긴 한데, 크기가 너무 달라.”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매칭이 됐다는 건지, 안 됐다는 건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으란 표정이었다. 모건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무래도 SS급이랑 C급이 하늘과 땅 차이라 그런 것 같은데……. 조금 더 진한 스킨십을 해 봐.”
“예?”
시윤의 음성이 확 위로 튀어 올랐다. 더 진한 스킨십이 뭔데. 머리통 가득 엄한 상상이 차올랐다. 시윤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제껏 연애 한번 못 해 본 터라 이런 쪽으론 젬병이었다.
청호가 자신도 모르게 조물거리고 있던 시윤의 손을 놨다. 바쁘게 움직이던 홀로그램 속 파동이 뚝 끊겼다.
“뭐. 여기서 떡이라도 치라는 거야?”
심드렁한 청호의 말에 시윤의 눈이 떨어질 듯 커졌다. 경악으로 넘실거리는 눈동자가 청호와 모건을 번갈아 봤다. 정말? 여기서? 지금? 당장? 공포에 질린 시윤의 낯을 본 모건이 쯧쯧 혀를 찼다.
“미친놈. 너는 장난을 좀 장난스럽게 치는 법을 배워. 채 준위. 숨 쉬어, 숨.”
모건이 탕탕 시윤의 등을 두드렸다. 시윤이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구역질하듯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