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배수구
책상에 엎드린 시윤이 조그마한 유리 에펠 탑을 멍하니 쳐다봤다. 빛이 모서리에 닿으면 사방으로 빛 그림자가 퍼지는데, 그게 어찌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두 시간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것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에펠 탑……. 내가 널 언제쯤 실제로 볼 수 있을까.”
시윤이 웅얼웅얼 말을 녹여 먹었다. 포스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전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러니 청호와 함께 나가려면, 그의 곁에 서도 될 만큼 강해져야 했다.
근데 그게 언제가 될는지. 아니, 가능이나 할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청호가 약속했으니 이렇게든 저렇게든 방법이 있을 것도 같고.
사실 그가 권력을 남용하고, 편법을 이용해서 자신을 바깥으로 데리고 가 줬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중이다. 그런 제 모습에 구역질이 난다만. 그게 아니고서야 가망이 없는 걸 아는데 어쩌나.
저릿저릿한 팔에 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였다. 문득, 가슴에 화염이 솟구쳤다. 시윤이 명치를 콱 부여잡았다. 아직 청호의 힘이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사실 시윤은 어젯밤 내내 끙끙 앓았다. 청호와 그렇게 오래 손을 잡은 건 처음이라 여간 고된 게 아니었다. 진통제를 으적으적 씹다가 역류해서 청호와 먹었던 저녁을 토해 내기도 했다.
폴이 들이닥치지 않아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면, 정말 눈 까뒤집고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윤이 쿵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고개만 돌려 에펠 탑을 쳐다봤다. 미끈하고 반짝이는 유리 덩어리가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러웠다.
“널 볼 때쯤엔, 내가 좀 강해져 있어야 할 텐데.”
시윤이 한탄인지 바람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렸다. 그렇게 또 한참 에펠 탑을 보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운동이나 가야지. 강의 시작 전까지 쉬지 말고 뛰어야지. 근육도 기본 체력이 있어야 붙는 거랬다.
길게 기지개를 켠 시윤이 막 연구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책상 귀퉁이에서 홀로그램이 반짝하고 켜졌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거였다.
채시훈 소령님.
발신인을 확인한 시윤의 눈가가 대번에 활짝 폈다. 후다닥 책상으로 돌아온 시윤이 홀로그램을 옆으로 스와이프했다.
“형.”
―내 동생. 형 안 보고 싶어?
화면 앞으로 얼굴을 쑥 내민 시훈이 빙글빙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시윤이 나지막이 웃으며 많이 보고 싶노라 대꾸해 줬다.
시훈은 1년 중 반 이상 포스에 없다. A급 에스퍼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갈 때마다 꼭 묻는다.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이 며칠 새에 자신을 까먹었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가 보다.
시윤이 시훈 뒤로 보이는 배경을 살폈다. 군복 내의 차림인 그가 앉아 있는 곳은 막사 안이었다. 거무튀튀한 천 위로 복잡한 지도 홀로그램이 규칙 없이 떠 있었다.
“아직 전장이야?”
―응.
“오래 걸리네.”
―그래도 인제 마무리 단계야. 오늘 아침에 우두머리 목을 땄거든.
“정말? 곧 돌아오겠구나.”
―아마도.
“다희 누나는?”
―자. 새벽에 잠깐 내 어빌리티가 불안정해서 이래저래 신경을 많이 썼어. 피곤할 거야.
“폭주…… 폭주한 거야?”
시윤의 만면이 걱정으로 점철됐다. 미약한 호기심도 끼어 있었다. 전이었다면 그의 가이드인 다희가 잘 대처했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을 텐데. 지금은 저도 가이드가 되었다고 궁금한 게 많았다.
시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폭주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금. 자주 있는 일이야. 다희가 안아 주면 금방 괜찮아져.
시윤이 “아, 그렇구나.” 영혼 없이 대꾸하며 작은 홀로그램 창을 켰다. 그리고 에스퍼의 폭주 단계를 검색했다. 상태의 심각성에 따라 처방해야 할 스킨십의 정도가 다를 테니까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찰나 불안정할 때마다…… 섹, 섹, 아무튼 그걸 할 순 없으니까.
엄한 상상에 시윤의 귓바퀴가 화르륵 붉게 타올랐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시훈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넌?
“어?”
―청호랑 매칭됐다며?
“응! 청호 대장님이 내 반려래!”
한껏 상기된 시윤의 긍정에 시훈이 으음, 목으로 탁음을 냈다. 그다지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께름칙함에 가까웠다. 시윤의 눈썹이 실망으로 내려앉았다.
대단하다고 칭찬하거나, 멋진 반려를 얻었다고 기특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봐?”
시윤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섭섭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훈은 먼 허공을 응시하며 못된 말만 지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C급이랑 SS급이 매칭됐다는 게 이상해서.
“그렇지. 원래 C급 주제면 SS랑 말도 못 붙이는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화났어?
“아니. 나도 이상해. 이상한데, 가이아가 맺어 준 매칭이 맞대. 모건이 그랬어.”
―……모건 그 새끼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맨날 빙글빙글 처웃는 것도 그렇고, 너한테 친한 척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시훈이 콧잔등을 구기며 모건을 비난했다. 시윤이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비스듬히 턱을 괬다. 묘하게 짜증이 났다. 시훈이 꼭 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장난이 심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고.”
시윤의 말에 시훈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한 듯한데, 결국 나오는 문장은 없었다. 화면 속의 그가 머그에 담긴 커피를 홀짝였다.
―청호는 어때?
“음……. 잘해 주셔. 친절하시고.”
―친절하다고? 청호가?
“응.”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시훈에 시윤이 재차 긍정했다. 타인에겐 어떨지 모르겠으나, 청호는 분명 제게 친절했다. 아껴 주겠다고 했고,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고, 늘 시윤의 의사를 물었고, 높은 계급답지 않게 고압적이지도 않았다.
분명 친절하다는 설명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
시훈은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몹시 놀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청호와 관련하여 나도는 소문 중 핏빛이 아닌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윤 역시 청호를 직접 만나기 전엔 진한 색안경을 쓰고 있었으니 이해하는 바였다.
그래도 언젠가 시훈이 청호를 만나게 되면, 제 말에 공감할 거라 확신했다.
그 후 시훈과의 통화는 시답잖은 대화만이 이어졌다. 복귀하면 무엇이 먹고 싶다느니, 전장의 침대는 아무리 경험해도 적응이 안 된다느니, 클롭스의 악취가 고약해서 목구멍이 다 떫다느니.
시윤은 그의 한탄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어떤 내용이든 간에,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면 귀를 쫑긋 세우게 됐다. 그걸 아는 시훈이 부러 이렇게 전화를 걸어 주는 것도 알았다.
“근데, 형. 아버지 요즘 전화를 안 받으신다?”
―아버지가?
“어. 많이 바쁘신가. 부재중 남겨 놓으면 한참 후에야 이제 봤다, 이렇게 메시지 보내신다니까. 그래서 다시 전화를 걸면, 그것도 안 받으셔.”
―왜 그러지? 그러고 보니 나도 근래 통화를 안 했네. 내가 한번 해 볼게.
“그럴래?”
그밖에 또 다른 주제로 한창 수다를 떠는데, 오른쪽 귀퉁이에 반짝거리는 알림이 떴다. 전화였다.
―왜?
“아, 전화가 와서.”
―누구한테?
“잠시만……. 어…… 폴 대령님?”
시윤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대용 지프차에서 내린 시윤이 건물 안으로 쏜살같이 튀어 들어갔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묵는 숙소 건물이었다. 물론, 청호가 묵는 곳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기다리던 폴이 얼른 오라며 손을 휘저었다. 경례도 생략한 시윤이 그 안으로 몸을 던지듯 했다. 엘리베이터는 평소와 달리 느리게 움직였다. 하필 청호의 숙소가 꼭대기 층이라 더 느리게 느껴졌다.
시윤이 움직이는 숫자 홀로그램을 보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심장이 펄떡펄떡 사납게 뛰었다. 아랫배에 간질간질한 요의가 올 정도로 긴장이 됐다.
청호의 상태가 좋지 않단다. 에로아스 부대원들과 훈련 중에 갑작스레 폭주가 왔다고.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시윤은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됐거늘. 그를 안정시킬 자신이 없거늘. 왜 하필 지금. 왜 벌써.
“어제만, 어제만 해도 괜찮으셨는데…….”
시윤이 눅눅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폴이 절레절레 턱을 내저었다.
“원래 폭주라는 게 예고하고 오는 게 아니거든. 잠자다가도 오고. 밥 먹다가도 오고. 양치하다가도 오고. 전투 중에도 와.”
“아…….”
시윤이 바보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폭주가 왜 폭주겠는가. 기미가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분명 학교에서 배운 지식인데, 당황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쯤, 엘리베이터가 간결한 알림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했다. 폴이 먼저 내렸다. 그러고는 시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시윤은 부리나케 엘리베이터에 탈 때와 달리 어딘가 미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따라 내렸다.
복도는 고요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였다. 시윤의 상상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청호의 폭주면 건물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할 거라 생각했는데. 벽 사이사이로 화염이 뿜어지고, 송곳 같은 얼음 조각이 사위를 지배할 줄 알았는데. 어째 미동조차 없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구나. 손잡는 거나 입맞춤으로 끝날 수도 있겠구나. 긴장으로 빳빳하게 곧추섰던 시윤의 어깨가 한결 느슨해졌을 때였다. 폴이 삐뚜름히 턱을 뒤틀었다.
“뭘 기대했는데?”
“기대한 건 아니고, 예상한 건, 어, 교과서에서 보던…… 그런 폭주요.”
불나고, 책상 날아다니고, 천장이 무너지고 그런 거. 웅얼거리는 듯한 시윤의 말에 폴이 짧게 웃었다.
“대장님은 ‘그런’ 폭주 성인 되기 전에 뗐어.”
묘하게 이질적인 말이었다. 뗐다니. 그건 갓난쟁이가 말을 뗐다느니, 젖병을 뗐다느니, 따위에나 붙는 거 아닌가. 에스퍼가 폭주를 뗐다, 라.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예?”
“교과서에 예시로 나오는 폭주는 A급이나 B급 에스퍼 폭주고. 대장님은 SS잖아. 대장님이 그렇게 폭주하시면…….”
“하시면?”
“부대 전체가 날아가겠지.”
“아…….”
“나도 소문으로 듣기만 했는데, 대장님이 어리실 때, 모건에게 귀걸이를 받기 전엔 ‘그렇게’ 폭주하셨다더군. 격납고 세 개를 한 번에 날리신 적도 있다던데.”
폴의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문 앞에 도착했다. 역시나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윤이 밋밋한 문을 응시하며 물었다.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한 겁니까?”
“속으로 삼키시거든.”
“……예?”
폭주를, 속으로 삼킨다고? 시윤이 미처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폴이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을 따라 파란빛이 일렁이더니, 곧 문이 열렸다.
청호는 숙소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윤이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를 살폈다. 창을 향해 서 있는 그의 등은 평소와 다름없이 꼿꼿했고, 어깨는 직선으로 뻗어 있었으며, 목 역시 바르게 곧추서 있었다.
어딜 봐도 폭주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유롭게 창밖 풍경을 감상하는 거라면 모를까.
근데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시윤은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뒤집힌 침대가 벽에 붙어 있다. 시윤의 몸뚱이보다 크고 무거운 소파는 천장과 벽이 닿는 모서리에 끼어 있고, 조명등은 누가 걸레 짜듯 쥐어짠 모습으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무엇보다…… 벽이 요동쳤다. 꼭 벽이 아니라 젤리처럼 꿀렁꿀렁 움직이고 있었다. 손대면 그대로 쑥 하고 빨려 들어갈 늪처럼 보이기도 했다.
매우 기이한 광경이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구를 두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그때, 청호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시윤의 시야에서는 그의 한쪽 눈과 높다란 콧대만이 간신히 보였다.
“저, 어, 대장님이 포, 폭주하셨다는 말을 듣고 왔, 습니다.”
시윤이 방금 말을 깨우친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했다. 제게 박힌 청호의 눈알이 어찌나 시뻘건지, 숨이 다 막혀 왔다. 눈꺼풀은 깜빡이지 않고, 눈동자는 인형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꼭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 같았다.
청호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시윤을 응시하기만 했다. 기다리다 못한 시윤이 그를 향해 발을 뗐을 때였다.
“……나가.”
아주 낮은 음성이 바닥을 기어와 시윤의 발목을 옥죄었다.
“예?”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나가라고.”
으르렁거리는 청호의 목소리가 재차 시윤을 쫓아냈다. 분명 거부였다.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왜 나가라고 하지. 평생 고통에 시달려 왔으면서. 애타게 기다리던 가이드가 나타났는데. 왜 써먹지 않고 나가라고만 하지.
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있어 봐야 쓸모없을 테니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능력자가 됐는데. 여전히 쓸모가 없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나라에 이바지할 수 없다.
시윤은 깊고 역겨운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절망에 젖은 그가 어쩔 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자, 청호가 짜증 섞인 낯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아랫입술을 핥았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혀가 통렬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시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피다. 혀가 피에 젖어 있었다. 어째서…….
순간, 폴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속으로 삼키시거든’.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청호는 힘을 분출하는 대신, 자신의 내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시훈이 말하길, 폭주는 끔찍할 만큼 괴롭고 아프댔는데. 가이드가 없을 땐 정신 놓고 깨부수는 게 미미하지만, 그나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는데. 청호는 그것조차 하지 못해서, 할 수가 없어서, 속으로 삼키고, 또 삼키다 각혈하는 게 당연시되어 버렸다. 저렇게 꼿꼿한 자세로 그 큰 고통을 머금고 있는 거다.
시윤이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안 돼. 청호는 아프면 안 된다. 죽는 건 더더욱 안 된다. 그는 무너지고 있는 작금의 포스에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그걸 깨닫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윤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청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믿기 힘들게도, 청호가 뒷걸음질을 쳤다.
“오지 마.”
고통에 바글바글 끓는 음성이 고집스레 시윤을 밀어냈다. 그러나 시윤은 다가감을 멈추지 않았다. 청호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벽이 고함치듯 진동했다. 꼭 시윤에게 더 다가오면 큰일이 날 것이다, 경고하는 것 같았다.
“여기요.”
시윤이 몹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마치 겁먹은 짐승에게 안심하라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것 같았다.
“…….”
청호가 그 손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다. 마디가 도드라지지 않고, 흉터도 없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얇은 피부 아래로 맥동하는 푸른 핏줄도 보였다.
감히 말하길, 청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손이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저 손을 잡으면 오장육부를 들쑤시는 이 화염이 가라앉을까. 목구멍을 절이는 피가 사라질까. 아마 그렇겠지. 완전한 평온에 다다르진 못해도, 그 언저리에는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헌데, 그러면…….
“많이 아플 거야.”
“……예?”
시윤이 다칠 게 분명했다. 폭주가 아닐 때도 찰나의 스킨십에 움찔움찔 몸을 떠는 시윤이다. 자신은 잘 숨긴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가 펴거나, 저릿한 손목을 주무르거나, 말 사이에 공백이 많아지거나,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거나,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청호는 그걸 낱낱이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원하지 않는 듯해 모른 척해 주고 있을 뿐.
그런 시윤에게 지금의 자신이 닿으면. 저조차 추스르기 어려운 힘을 대신 받아 내면. 잘은 몰라도 잔혹한 사달이 날 터였다. 모건이 시윤의 한계를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건드리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한 번 닿기 시작하면 정신 놓고 시윤을 쓰레기통 취급할 게 뻔했다. 손을 잡는 것으로 모자라 껴안고, 입술을 비비고, 옷을 벗기며 이 가시 같은 힘을 마구 퍼붓겠지.
그러다 시윤이 죽으면 어쩌나. 어떻게 찾은 가이드인데. 이깟 폭주, 1년에도 수백 번씩 있는 것이다. 그 수백, 수천 번의 폭주를 시윤 없이 버텨 왔다. 한 번 더 버티는 것쯤이야 무어가 그리 어렵겠나.
“나가.”
청호가 음산한 목소리로 다시 명령했다. 그의 눈알이 시시각각 붉어졌다. 누가 빨간 물감을 쉬지 않고 떨어트리는 것 같았다. 시윤이 그 괴물 같은 눈과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그런, 그런 이유로 거부하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허공에 정박한 시윤의 손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느슨하게 풀린 다섯 손가락이 청호를 강렬히 유혹했다.
“제가 대장님 가이드라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
“근데, 이렇게, 제 도움을 거부하시면…… 제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슬픕니다.”
“…….”
“제가 늦게 나타나서 평생 고통 속에 사셨잖아요. 그러니 이번엔 제가 아프겠습니다.”
시윤이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청호의 시선이 그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눈으로 시윤의 피부를 핥듯, 집요하고 끈적하게 응시했다.
청호는 인내심이 강하다. 참을성 역시 좋다고 자부할 수 있다. 물론, 참아야 하는 것에 한에서만. 예를 들면 고통이나, 지루함이나, 피비린내 같은 것 말이다.
근데 하나 약한 게 있었다. 안락. 평온. 안온. 쾌감. 쾌락. 그런 거. 평생 몇 번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에 대한 갈증과 욕망이 대단했다.
허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못…… 참을 거야. 손잡는 거로는 부족해.”
“각오하고 왔습니다.”
시윤의 음성은 단단했다.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껴졌다. 청호의 목울대가 꿀꺽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이만하면, 이만하면 충분히 경고했다. 충분히 밀어냈고, 충분히 시윤의 처지를 걱정해 줬다.
그러니까…… 시윤을 멋대로 움켜쥐고 껴안아도 저는 무고하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낚아챘다. 매우 빠른 움직임이었다.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긴 신음을 내뱉었다. 늘 그렇듯, 한쪽은 쾌락에 가까운 안온함 때문이었고, 한쪽은 전신의 핏줄이 다 뒤틀리는 듯한 고통 때문이었다.
“하아…….”
청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시윤과 맞닿은 살갗을 통해 불쾌한 진드기 같던 힘이 빠져나갔다. 그 빈자리는 시윤에게서 흘러온 청량함이 채웠다. 산들거리는 봄바람 같은 청량함이었다.
걸레짝이 된 근육과 핏줄이 빠르게 아물었다. 뒤틀렸던 뼈는 제자리를 찾아갔고, 엉켰던 기도 역시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부족했다. 폭주가 왜 폭주겠는가. 힘이 지나치게 용솟음쳐서,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뿜어져서 폭주다. 손잡은 것만으로는 치료가 안 됐다.
청호가 번쩍 눈을 떴다. 붉은 눈알 가득 시윤이 담겼다.
살짝 어그러진 눈가. 아픔을 삼키기 위해 말아 문 입술. 한쪽으로 기울어진 동그란 어깨. 그걸 보고 있는데 희한하게 목이 말랐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끌어당겼다. 마른 몸뚱이가 쉽게 휩쓸려 왔다. 그대로 한 아름 그를 껴안았다.
그와 동시에 따뜻한 기운이 청호의 몸을 감싸 안았다. 분명 자신이 시윤을 안았는데, 꼭 안긴 듯한 기분이었다.
청호가 길게 숨을 내쉬며 시윤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가느다랗고 깨끗한 목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생명의 냄새. 보드라운 냄새. 전장에선 절대로 맡을 수 없는, 순수하고 고결한 향.
청호가 굶주린 맹수처럼 시윤을 세게, 더 세게 껴안았다. 그 순간, 시윤의 목이 휙 뒤로 넘어갔다.
“아윽…….”
사지가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고, 근육이 수축했다. 일평생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여태 그와 스킨십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지난날의 아픔은 아픔이 아니었나 보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저 앓는 소리가 아니고, 심장이 기이할 정도로 빨리 뛰었다. 그와 닿은 모든 부분을 통해 힘이 흘러왔다. 그것은 뼈마디를 녹이고, 피를 뜨겁게 달궜다. 누가 링거 가득 부글부글 끓는 물을 넣고 사지 끝에 꽂아 둔 것 같았다. 공기와 마찰하는 피부는 시리기 그지없는데, 속에선 화염이 일었다. 그 부조화에 구역질이 다 올라왔다.
“아, 아아…….”
시윤의 몸이 파르르 경련하기 시작했다.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그 말이 혀끝에서 찰랑거렸다. 허나 내뱉지 않았다.
저는 청호의 가이드다. 청호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수십 년 동안 홀로 견디며 살았다. 이쯤은 괜찮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한다.
시윤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청호의 허리를 껴안았을 때였다. 청호가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형형한 안광이 잘 벼려진 칼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 눈빛에 미간이 내려 찍히는 순간, 입술이 닿았다.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찰나 모든 고통이 휘발했다. 이럴 줄 알고 왔는데, 이럴 줄 몰랐다. 모순 가득한 말이었지만 실로 그랬다.
입맞춤. 키스. 그런 것은 상상만 했지 실제로 경험하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가족이 아닌 이와의 포옹도 청호가 처음이었는데, 얼떨결에 지나가서 이렇다 할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키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매우 크게 다가왔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환경, 뒤틀린 공기, 비릿한 청호의 혈향들이 지나칠 정도로 세세히 느껴졌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청호의 입술은 건조했고, 적당히 말랑하면서도 단단했으며, 델 듯이 뜨거운 입김을 뿜어냈다. 시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코앞에 있는 청호를 응시했다.
청호가 특유의 서늘한 시선으로 시윤을 내려다봤다. 한 뼘이 훌쩍 넘는 키 차이 탓에 항상 내려다봤으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훨씬 진하고 그윽한 눈빛이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맞붙은 입술 틈으로 흘러오는 호흡이 낯설었다. 근데 그게 다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피부와 피부가 맞닿은 정도였다. 키스. 별거 아니구나. 그런 철없는 생각을 했다.
수 초가 흐르고, 얼어붙었던 시윤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갈 때쯤. 청호가 입술을 뗐다. 그게 뭐라고 시윤은 흠칫 몸까지 떨며 놀랐다.
왜 벌써. 이만하면 괜찮은데. 포옹할 때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혹 제 키스 실력이 너무 별로여서 그런 걸까. 관계에 서툰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우물우물 혀를 씹었다.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어떠한 말로 어떻게 물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청호의 옷자락을 움켜쥔 시윤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별로 효과가 없…….”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청호의 거대한 손이 목덜미를 감싸 왔기 때문이다. 시윤의 자그마한 머리통이 그대로 끌려갔다. 충돌하듯 입술이 맞물리기 직전, 청호가 슬쩍 고개를 틀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입맞춤이었다. 훨씬 깊고 진했다. 입술이 납작해질 정도였다. 미처 추스르지 못해 뻐끔 벌어진 입술 틈으로 청호의 혀가 밀려왔다. 피에 젖어 뜨겁고 축축한 혀였다.
“흐…….”
그와 동시에 시윤의 손가락이 절정에 이른 단풍잎처럼 쫘악 펴졌다. 여태껏 피부를 타고 스며 오던 청호의 힘이 입술을 통해 콸콸 쏟아졌다. 누가 두꺼운 깔때기를 목구멍에 욱여넣고 마그마를 쏟아붓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장육부가 녹고, 뇌가 끓었다. 폐는 버석하니 마르고 근육은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정신이 홀라당 뒤로 넘어갔다. 눈알이 화끈거리더니 줄줄 눈물이 흘렀다.
시윤이 파르르 경련하는 팔로 청호를 밀어 내려 했다. 허나 그와 닿는 부분마다 인두로 지져지듯 아파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꼭 불에 안겨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청호는 조금씩 조금씩 시윤을 삼켜 갔다. 목덜미로 모자라 허리까지 옭아매고 온몸을 바짝 붙였다. 청호의 눈꺼풀엔 움직임이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 역시 미동이라곤 없었다. 움직이는 거라곤 시윤의 혀를 빨아당기고, 치열을 훑고, 타액을 흡입하는 입뿐이었다.
그 모습이 몹시 무서웠다. 청호가 청호가 아닌 것 같다. 몸뚱이는 여기 있는데, 영혼은 여기 없는 사람 같았다.
“그, 만…… 그만…….”
시윤이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다리를 퍼덕거려 보기도 했다. 허나 그럴수록 몸을 옥죄는 청호의 힘만 곱절로 세졌다. 종국엔 발이 공중에 동동 뜰 정도였다.
시윤의 반항 아닌 반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체적인 고통이 한계를 넘어서면, 더 이상 파괴할 세포와 근육이 없어지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사지가 끓는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졌다.
시윤은 시야가 괴이할 정도로 뿌옇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조금 더 지나자 타오르는 태양을 눈앞에 둔 것처럼 붉어지더니 곧 검게 죽기 시작했다.
청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미하던 반항조차 사라지니 한결 수월하게 시윤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청호가 보다 깊숙이 입술을 겹쳤다. 이미 시윤의 입 안을 정복한 혀를 어떻게든 더 욱여넣으려 발악했다.
평소라면 시윤의 입이 찢어지면 어쩌나, 턱이 으스러지면 어쩌나, 이가 죄 뽑히면 어쩌나, 같잖은 걱정을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여태 그가 느낀 최고의 안정은 A급 가이드와 잠자리를 하거나, 시윤과 포옹했을 때였다. 근데 이 입맞춤은 그것들과 비교를 불허했다.
혀를 타고 넘어오는 시윤의 타액이 성수 같다. 지금 이 순간이, 이곳이 천국 같다. 예수고 가이아고, 신 따위 믿어 본 적 없는데. 시윤의 존재를 마주하고 나니, 그가 주는 안온을 경험하고 나니, 창조주가 얼마나 대단한지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평범한 인간들은 이다지도 가벼운 몸뚱어리로 살았을 거라 생각하니 질투까지 일었다. 어찌나 얄미운지, 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괜찮다. 제가 죽기 전에 시윤과 만났으니 그걸로 다 되었다.
청호는 매우 옹졸해졌다가, 몹시 너그러워짐을 반복했다. 그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쨌든 결론은 ‘좋다’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기대되어 방정맞게 발을 구를 것 같았다.
설핏, 연하게 미소 지은 청호가 시윤의 아랫입술을 게걸스레 빨아 댔다. 그런데 어째 전과 맛이 다르다. 그의 타액은 이렇게 질척하지 않았는데. 묘하게 비린 것 같기도 하고.
청호가 첩첩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슬쩍 뒤로 물렸다. 그리고 새빨간 풍경과 마주했다.
“…….”
피다. 피. 피. 시윤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작은 콧구멍을 통해 나오는 거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콸콸, 아주 수도꼭지처럼 쏟아 냈다. 인중을 타고, 입술에 다다른 피가 턱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놀라운 광경도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공기만큼이나 흔한 것이니까. 쏟아지는 피. 뿌려지는 피. 솟구치는 피. 흩날리는 피. 청호는 그 모든 것에 익숙하고, 동시에 무감했다. 허나 시윤의 피를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채 준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색깔의 피다. 누가 탐스러운 체리를 공들여 짠 듯한 색이었다. 불순물 하나 없었고, 심지어 달아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감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채 준위.”
청호가 시윤을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텅 빈 허공에 얽매인 시윤의 눈동자엔 미동이 없었다. 힘 하나 없이 늘어진 사지는 청호가 흔들 때마다 종잇장처럼 나부꼈다.
청호가 헛숨을 집어삼켰다. 죽었나? 죽어 버렸나? 안 되는데. 죽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찾은 내 가이드인데. 이리 허무하게…….
그가 벽에 붙어 있는 소파를 흘깃 바라봤다. 그러자 소파가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들의 앞까지 날아왔다. 청호가 그 위로 시윤을 조심히 내려놨다. 시윤은 여전히 언 것처럼 굳어 있었다.
“채 준위. 나 봐.”
청호가 시윤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니, 쓰다듬으려다 말았다. 제가 만져 봐야 그에게는 독이 될 테니까. 청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꽉꽉 세게 짓씹었다.
만지질 못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폴을 불러야겠다. 아니, 모건이 더 좋을 것 같다.
청호가 소파 틈에 처박혀 있던 홀로그램 기계를 공중에 띄웠을 때였다.
“흐…….”
시윤이 실처럼 가느다란 신음 한 줄을 흘렸다. 청호가 부리나케 시윤의 낯을 살폈다. 여전히 창백하다. 그래도 코피는 멈춘 것 같았다. 청호가 자신의 소매로 그것을 얼른 훔쳐 냈다.
“정신 차려. 지금 모건에게 연락을…….”
빠르게 이어지던 청호의 문장이 뚝 끊겼다. 시윤이 더듬더듬 자신의 손등을 쥐어 왔기 때문이다. 피가 다 빠져나간 시체처럼 차가운 손이 시윤의 것 같지 않았다. 항상 따뜻하고 보드라웠는데.
청호는 그 손을 떨쳐 내지도, 그렇다고 맞잡지도 못했다. 그 찰나에도 시윤의 손가락을 타고 빠져나가는 고통이 황홀해서.
시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청호의 손에 매달렸다. 그러고는…….
“괜……찮으십니까?”
연약한 걱정 한 줌을 흘렸다.
“뭐?”
청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이제…… 아프지 않으……십니까?”
시윤이 탁하게 죽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
청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시윤은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말을 하는 건지 자각하고 있는 걸까. 스치듯 봐도 청호와 시윤 중, 환자는 시윤이었다. 보살핌을 받고, 안부를 물어야 하는 대상은 시윤이란 말이다. 얼굴 반절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거늘. 정복 셔츠 깃이 온통 붉거늘.
“그랬으면…… 좋겠는데…….”
시윤이 흐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청호에겐 천둥처럼 크게 다가왔다.
멍청하게 굳어 있는데, 시윤의 손이 툭 바닥으로 추락했다. 매가리 없이 풀어진 다섯 손가락이 참으로 가녀렸다.
청호가 방금까지 시윤의 손이 머물렀던 자신의 손등을 바라봤다. 손등이 묘하게…… 묘하게 간지러웠다.
* * *
송장처럼 누워 있던 시윤이 찬물이라도 맞은 듯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와 동시에 까무러치기 직전의 기억이 와르르 쏟아졌다.
청호. 폭주. 그리고 피. 피. 피.
청호는 괜찮나. 폭주가 멈췄나. 혹 제가 부족해서 도움이 안 된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흐으…….”
어깨를 움츠리며 허리를 말았다. 뼈마디가 쑤신다는 말, 듣기만 했지 실로 경험하는 건 처음이었다. 덜덜 경련하는 근육도, 전선이 된 듯한 핏줄도, 텁텁한 목구멍에 시큰거리는 뇌까지. 뭐 하나 익숙한 게 없었다.
아프다. 아프다. 정말, 끔찍하리만큼 아프다.
“아프지? 아주 아파 죽겠지?”
고통에 짓눌려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데, 이죽거리는 음성 하나가 시윤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것이다. 시윤이 양손을 교차해 자신의 팔뚝을 감싼 채 눈만 흘깃 들어 목소리를 따라갔다.
홀로그램 차트를 든 모건이 서 있었다.
“어…… 대령님…….”
잠시 멍하니 있던 시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경례했다. 그답지 않게 손날이 둥그렇게 말린 게, 아프긴 많이 아픈 모양이었다. 모건이 됐다는 듯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시윤은 그제야 주위 환경을 눈치챘다. 연하게 녹색 빛을 띠는 벽. 소독약 냄새를 담뿍 풍기는 딱딱한 침대. 희멀건 이불. 모건의 연구동에 있는 병실이었다. 시윤이 자신의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홀로그램을 대충 밀어 치운 모건이 시윤에게 다가왔다. 잘생긴 얼굴 가득 심통이 줄줄 흐르는 게, 무언가가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때?”
“네?”
“청호 힘을 받아 본 소감이 어떠냐고.”
“어……. 많이 아픕니다.”
“……그게 다야?”
“음……. 대장님은 이런 고통을 평생 홀로 감당하고 사셨던 걸까요? 제가 여태 최고로 아팠던 건 열여섯 살, 편도염에 걸렸을 때였는데.”
시윤이 눈치 없이 동정을 종알거렸다. 그에 모건이 허, 실소했다. 얼굴이 허옇게 떠서, 미처 다 닦지 못한 피를 턱 아래로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주제에 하는 말이 청호 걱정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 턱이 빠질 정도였다.
“채 준위.”
모건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깔았다. 처음 듣는 저음이었다. 상부에 연구 보고를 할 때도 특유의 발랄한 톤을 유지하는 그인지라.
괜히 긴장한 시윤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예?”
“너 죽을 뻔했어.”
“…….”
“그냥 겁주는 게 아니라, 진짜 죽을 뻔했어.”
청호의 난데없는 부름에 불려 간 모건은 축 늘어진 시윤을 보고 눈이 회까닥 돌아가는 줄 알았다. 그저 쓰러지기만 했다면 ‘그러게 일 좀 줄이라니까’라며 포도당이나 꽂아 줬겠지만, 목덜미가 다 젖을 정도로 코피를 줄줄 쏟고, 변종 모기 클롭스에게 피가 다 빨려 죽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옆에 안절부절못하며 얼쩡거리는 청호 역시 한몫했다.
얼른 몸을 스캔해 보니 맥박이 거의 없었고, 생체 반응 역시 미미했다. 움직이는 거라곤 전신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기이한 기류뿐이었다. 그것은 시윤의 명치께에 실타래같이 마구 엉켜 있었다. 꼭 기생충처럼 심장을 옥죄고, 오장육부를 갉아먹고 있었단 말이다.
모건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응급처치를 적시에 하지 못했다면, 시윤은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몰랐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그의 죽은 몸뚱이를 분해하고 갈아서 청호에게 또 다른 귀걸이를 만들어 줬겠지.
“내가 분명 청호한테 너랑 접촉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새끼가 가이드 찾았다고 빠져 가지고…….”
“대장님한테 뭐라 하지 마십시오.”
“……뭐?”
모건이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넋을 뺀 모건이 입만 벙긋거리는데, 시윤이 시무룩한 낯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제가 너무 약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명색에 청호 대장님 가이드인데, 폭주를 그저 보고만 있을 순 없었습니다. 대장님은 그렇게 아프신 와중에도 저한테 나가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
“다 제 탓입니다. 대장님은 죄 없습니다.”
“너 진짜…….”
“대령님. 저는 왜 이다지도 약할까요. 대령님이 절 강하게 만들어 주실 순 없습니까? 저 진짜 무슨 약물이든, 실험이든 다 버틸 수 있는데.”
파리한 안색의 시윤이 옹골차게 이불을 말아 쥐었다. 모건이 참담한 낯으로 벅벅 마른세수했다.
제가 알던 시윤은 이렇게 우매하고 미련한 인간이 아니다. 조금 숫기가 없긴 했지만 충분히 똑똑하고, 똑 부러졌다. 워낙 대단한 집안에서 자라 온 터라 상사에게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도 있었다.
근데 청호의 가이드가 된 후부터는, 제가 알던 시윤이 아닌 것 같았다. 뭐에 씌었나. 뒤늦게 발현하면서 뇌가 회까닥 돌기라도 한 걸까.
“실험은 개뿔. 너 당분간 청호 가까이도 못 가.”
코끝이 벌겋게 익을 때까지 얼굴을 문지르던 모건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청호랑 스킨십하면, 너 진짜 죽어.”
“어째, 어째서 말입니까? 이 정도는 금방 치료하실 수 있잖아요. 저 바보 아닙니다. 가끔 에스퍼가 과도하게 폭주해서 가이드가 다칠 수 있다는 거 압니다. 근데 그걸 하루 만에 치료했다는 논문도 봤습니다. 그 논문, 대령님이 쓰신 거잖습니까. 그러니 그런 말로 저를 잡아 두려 하지 마세요.”
시윤이 반쯤 쉰 목소리로 종알종알 빠르게 말을 쐈다. 모건이 푸욱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똑똑하지라도 말지. 그럼 대충 둘러댄 말에 속았을 텐데. 똑똑한 데다가 고집도 있으니 구슬리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건이 어두운 낯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홀로그램을 끌어와 이것저것 누르더니 곧 확대했다.
“이거 봐.”
꽈배기 같은 모양의 DNA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구조를 보아하니 인간의 것이리라. 시윤이 이게 왜, 라는 눈으로 모건을 쳐다봤다. 모건이 홀로그램을 쭉쭉 확대했다.
“이거 채 준위 DNA야. 내가 세포 조직을 조금 훑어봤거든. 아직 제대로 뜯어보질 못해서 명확하게 정의하진 못하겠는데, 채 준위가 좀…… 아니 많이 이상해.”
“예?”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하루아침에 가이드가 됐는데. 이제는 또 DNA가 이상하단다. 병인 걸까. DNA에 문제가 생겼으면 몹시 심각한 병일 게 분명했다. 갑자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다거나, 뼈가 수축한다거나, 심장이 멈춘다거나. 그런 거.
시윤의 얼굴이 대번에 검게 죽었다. 어째 저에게는 평범도 이리 어렵나. 가이아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시윤을 살피던 모건이 으음, 목울대를 꿀렁거렸다.
“아니다.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려 주세요.”
“채 준위의 DNA는 자극에 변화해.”
“……예?”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쿡쿡 쑤시고 간지럽히면, 자기들끼리 부딪치면서 변화한단 말이야.”
모건이 검지로 시윤의 팔뚝과 볼을 찔러 댔다. 시윤이 목을 움츠렸다.
“발현 전에 열났었다며. 그거 채 준위 세포들이 변화, 아니, 진화하면서 발생하는 열이었을 거야.”
“그게 무슨…….”
“어떤 행위가, 또는 접촉이 변화의 발화점이 됐는지는 아직 몰라. 뭐, 채 준위가 피 튀는 전투에 나간 것도 아니고, 하는 거라곤 애송이들 가르치기, 연구실에 처박혀 있기가 다니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닐 거야.”
“그 말은…… 제가 앞으로 또 변화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어.”
“…….”
시윤의 입매가 삐뚜름히 뒤틀렸다. 변화하는 DNA.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이드로 변화했다. 그 말인즉슨, 어느 날 갑자기 B급이 될 수도 있고, A급이 됐다가, 또 언젠가는 청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SS가……까지 생각하는데.
“사실 이미 변했어.”
모건이 그 생각의 타래를 뚝 끊어 냈다.
“예?”
“채 준위 도어 검사 몇 급이었지?”
“C-입니다.”
“지금은 D야.”
“……네?”
순간, 시윤은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알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천둥이 치더니, 우박이 쏟아지고, 오물이 뒤섞인 비가 전신을 적셨다. 그만큼 끔찍하고 참혹했다.
D라니. D라니. 그런 등급의 능력자는 없다. 그 말인즉슨, 현재 시윤이 퓨어와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모건이 자신의 턱 아래를 벅벅 긁었다. 눅눅하게 젖은 시윤의 만면에 가슴이 답답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못된 짓을 하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아, 그래. 봐 봐. C급 가이드의 어빌리티를 이만한 크기의 배수구라고 하자.”
모건이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시윤이 그 작은 동그라미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B급은 그보다 조금 더 크고, A급은 그보다도 크지.”
모건이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가, 머리 위로 더 큰 원을 그리며 크기를 묘사했다.
“그럼 SS급은…….”
시윤이 혼잣말처럼 질문했다.
“이 방을 넘어서 건물 크기쯤 될 거야.”
“역시…….”
모건의 대답에 시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건이 비죽 입술을 뒤틀었다. 그가 대체 왜 일면식도 없던 청호를 이리 열렬히 동경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이 청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 주는 게 아니거든?”
“죄송합니다.”
“아무튼. 가이드 등급에 따라 에스퍼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배수구 크기가 정해져 있단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거야, 그건. 그리고 보통 열여섯에 그 능력이 정착돼. 그래서 도어 검사도 그때 하는 거고.”
“아아. 그럼 저는 요만하겠네요.”
시윤이 손톱만 한 크기의 원을 만들었다. 자신은 C-니까. 아니, 지금은 D니까 이보다 더 작나. 시윤이 시무룩한 얼굴로 원을 바늘구멍만 하게 줄였다.
그러자 모건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럼 더 작다는 말씀이세요?”
“그것도 아니야.”
“……예?”
“모르겠어.”
“…….”
시윤이 멍청한 낯으로 눈을 끔뻑였다. 모르겠다니. 모르겠다니! 시윤은 모건이 평생 그 동사를 써 본 적이 없노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포스에서, 아니, 이 세상 그 어떠한 존재보다 똑똑했으니까. 근데 모른단다.
아니나 다를까, 모건 역시 혼란스러운 듯했다. 살풋 눈살을 구긴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읊조렸다.
“채 준위 배수구는 알 수가 없어. 아주 작을 수도 있고, 아주 클 수도 있지. 마치 고무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C급이었다가 D급으로 내려간 거고.”
“그럼 제가 훗날…… 다시 퓨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모르지. 근데 지금 청호와 닿았다간 너 죽어.”
현재는 D급이니까. 그 말에 시윤의 눈썹이 아래로 사선을 그렸다. 이래서야 원. 없느니만도 못한 가이드가 아닌가. 그림의 떡도 아니고. 청호는 평생 기다리던 가이드를 드디어 찾았는데, 죽을까 봐 만질 수도 없게 됐다.
“……제 몸은 왜 이따위죠?”
“글쎄. 가이아에게 뜻이 있겠지.”
모건이 얄미울 정도로 심드렁히 말했다. 시윤이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는데…….
“미친놈.”
모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난데없이 욕을 얻어먹은 시윤이 넋 잃은 표정으로 모건을 바라봤다. 헌데 그는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복도로 나 있는 커다란 유리창을 향해 있었다.
“저 봐라, 저. 그래도 자기 가이드라고 죽을까 봐 걱정은 되는 모양이지.”
시윤의 고개가 모건을 따라 돌아갔다.
“쟤 네가 쓰러져 있는 여섯 시간 내내 저기 서 있었어.”
투명하지만 두꺼운 유리창 너머, 그곳엔 청호가 서 있었다.
시윤이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진짜 청호 대장님이네. 제 눈으로 또렷이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여기. 폭주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쉬어야 할 텐데. 바쁜 일은 없나. 훈련이나, 파병이나, 할 일도 많을 텐데.
“무서운 새끼. 여섯 시간 동안 꿈쩍도 안 해. 눈도 안 깜빡여. 아무래도 서서 죽은 거 같아.”
모건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시윤은 그의 말에 동의도, 부정도 해 주지 못했다. 저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청호의 검은 눈동자에 홀려 어떠한 말도 인지할 수 없었다. 여섯 시간 내내 저리 저를 보고 있었다니…….
“들, 들어오시라고 해야…….”
“안 돼.”
“제가 청호 대장님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쉰다고 죽는 건 아니잖습니까.”
“모르지. 폭주 상태의 에스퍼는 짐승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네가 코피를 줄줄 쏟으면서 까무러치는데도 청호는 좋다고 네 입술만 빨고 있었지.”
아, 키스. 뒤늦게 그 입맞춤을 상기한 시윤의 귓바퀴가 화르륵 타올랐다.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모건이 헛숨을 삼켰다.
“지금 부끄러워할 타이밍 아니거든?”
“어, 어쨌든 대장님을 저리 세워 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면 제가 나갈게요.”
시윤이 이불을 들쳤다. 모건의 눈가에 짜증이 서렸다. 막 첫사랑을 시작한 열일곱 소년처럼 구는 시윤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첫사랑 중인 건가.
흔한 일이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랑에 빠지는 건. 가이아가 이어 준 운명의 짝인데, 사랑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다만 그 사랑이 너무 빨리 와서 문제였다. 시윤이 발현한 지 얼마나 됐더라.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나. 그런 주제에 감정이 깊어 봐야 얼마나 깊다고. 절절해 봐야 얼마나 절절하다고.
“됐어. 만나라, 만나. 그래 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냐.”
입술을 씰기죽거린 모건이 직접 문을 향해 다가갔다. 손을 가져다 대자 간결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청호가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모건의 말처럼 서서 죽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청호가 막 모건을 스쳐 지나가는데, 모건이 낮은 음성으로 경고했다.
“손끝 하나 건드릴 생각하지 마.”
“안 건드려.”
“이번에 또 건드리면 진짜 죽어.”
“……안다고.”
“쟤 잘못되면 너 좆 돼.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로. 쟤가 어느 댁 자제인 줄 모르지? 아무리 너라도 뒷감당 못 할걸.”
“댁? 자제? 무슨 소리야, 그게.”
청호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시윤이 어디 대단한 집 아들이라는 뜻 같은데. 그런 것에 영 관심이 없어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청호에게 가족이란 전장에서 함께 피를 뒤집어쓰는 병사들뿐인지라.
그래. 시윤에겐 가족이 있을 터였다. 폴이 그에게 에스퍼 형들이 있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모호한 청호의 낯에 모건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에게 답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오셨습니까?”
그러나 쓸데없이 인사성 바른 시윤 탓에 때를 놓쳤다. 잠깐 모건을 쳐다봤던 청호가 큰 보폭으로 시윤을 향해 다가갔다. 모건은 나가지 않고 문가에 기대어 그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감시였다.
“몸은 어때.”
청호는 침대에서 두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안부를 묻기엔 퍽 먼 거리였다. 그 딴에는 조심하는 중이었다. ‘조심’이라니. 이토록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괜찮습니다.”
시윤이 흐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비록 능력은 D급으로 떨어졌지만. 차마 뒷말은 할 수 없었다.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너무 참담해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며칠 지나면 다시 C급으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잠시만 비밀로 하자.
“…….”
청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마디 말만 했다. 그러더니 우두커니 서서 시윤을 내려다봤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새로운 화두를 던지지 않았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이불을 쥐어뜯었다. 폭주는 어떻게 됐냐고 물어볼까. 제가 도움이 됐는지도 궁금한데. 아니면 밥은 먹었냐고 물어볼까. 내일은 뭐 하냐고 물어볼까. 아, 이건 꼭 내일 만나자는 뜻 같으니까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시윤이 할 말을 찾기 위해 팽글팽글 머리를 굴리는데, 청호가 슬쩍 허리를 숙이고 눈을 맞춰 왔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묘하게 눅눅했다.
“미안해.”
“……예?”
“네가 아플 걸 알고 있었는데도 멈추지 못했어.”
“아…….”
퍽 진심 어린 사과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가 듣기엔 민망할 정도로 진심인 사과. 시윤이 두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야!”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모건이 빽 고함을 질렀다. 시윤의 어깨가 펄쩍 위로 뛸 정도로 큰 음성이었다. 청호가 뾰족한 눈초리로 모건을 노려봤다. 어디 감히 아픈 환자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냐, 비난이라도 하는 듯했다.
모건은 역시 지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저 꼴을 방관하면 당장 시윤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네 덕에 많이 좋아졌거든.”
청호가 모건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시윤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 어……. 저, 저 때문에요?”
“응.”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그의 긍정에 시윤의 볼에 발그레한 열이 올랐다. 제 덕이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대단한 청호가 제게 도움을 받았단다.
온몸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성취감이었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어린 나이에 박사 학위를 따 박수를 받았을 때도. 입대했을 때도. 하물며 두 번째 도어 검사 결과가 가이드로 나왔을 때도 이렇게나 기쁘진 않았던 것 같다.
“기쁩니다.”
“뭐가.”
“제가 청호 대장님께 도움이 되었다는 게요.”
“…….”
“정말…… 정말 기쁩니다.”
시윤이 더없이 해사하게 웃었다. 통통한 입술이 함빡 벌어지고, 눈이 사르르 휘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주위가 다 환해질 정도로 맑은 웃음이었다.
청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은근히 손을 뒤로 숨겼다. 또 손등이 간지러웠다.
* * *
시윤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퇴원했다. 모건이 더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말렸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C급이었다가 D급으로 떨어진 판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시윤은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처박혀 가이드 관련 논문을 헤집었다. 설마 포스 100년 역사에 DNA가 변화하는 이가 저 하나일까. 아무리 모건이라도 발견하지 못한 케이스가 있겠지.
시윤이 활자로 빼곡한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손목을 꽉꽉 주물렀다. 청호의 힘이 아직 몸속을 나돌고 있어 사지가 저렸다. 좁은 배수구라더니. 정말 그의 힘이 아주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시윤이 손등으로 눈두덩을 덮었다. 눈알이 따갑다. 피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종일 한 거라곤 강의 두 개뿐이거늘. 왜 이리 피곤한 건지.
집에 갈까. 그러잖아도 아까 시훈에게 복귀했다는 전화가 왔었는데. 집에 일찍 오면 베이컨을 잔뜩 넣은 파스타도 해 주겠다고 했는데.
시윤이 쩝 입맛을 다셨다. 간만에 식욕이 돌았다. 입가에 파스타 소스를 덕지덕지 묻히면서 먹으면, 어머니가 입을 닦아 주시겠지. 형들은 아직도 애라며 꾸지람 같은 애정을 늘어놓을 것이고. 아버지는 별다른 말 없이 물을 건네주실 터였다.
그 장면을 상상한 시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아무래도 집에 가야겠다. 푹신하고 안락한 제 침대도 그립고.
시윤이 복작복작하게 떠 있던 홀로그램을 한 번에 밀어 치웠다. 그리고 연구 가운을 벗고, 재킷을 챙겼다. 집에 맥주는 있으려나. 시훈은 전투에서 돌아오면 꼭 맥주를 마시는데.
시윤이 즐거운 계획을 세우며 막 문고리를 쥐었을 때였다. 책상 위로 작은 홀로그램 하나가 불꽃놀이처럼 튀어 올랐다.
시윤이 제 앞으로 건너온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한 입 크기로 조각난 고깃덩이가 포크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 부른 이가 친히 썰어 준 고기였다. 혹여 아파서 칼질도 못 할까 봐 걱정이 되는 듯했다.
허나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분명 10분 전만 해도 집에서 파스타 먹을 생각으로 군침을 삼키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미간으로 꽂혀 오는 눈빛이 워낙 드센지라 포크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윤이 사약이라도 받은 죄수처럼 께름칙하게 손을 움직였다.
고기를 찍고, 입으로 가져가고, 턱을 우물거리자 그제야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시윤이 그 시선의 주인을 흘끔 바라봤다.
청호였다. 시윤이 연구실을 나서기 직전, 청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일 끝났으면 저녁을 함께하자는 거였다.
물론, 시윤은 그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럴 권리도 없었고. 혹여 또 어디가 아픈가, 싶었는데. 별다른 낌새가 없는 걸 보니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은 어딘가 기이한 모양새로 식사를 이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청호가 저 멀리서 밥을 먹고 있었다. 못해도 네 걸음 거리. 테이블 따로, 소파도 따로. 이건 뭐 같은 공간에만 있을 뿐이지 따로 식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 모건의 엄포로 제게 닿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그렇지 이럴 거면 뭐 하러……. 시윤이 파스타 말 듯, 허공에다 포크를 돌돌 돌렸다.
“이렇게 떨어져 있을 거면…… 같이 식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항상 바로 옆에 앉아 식사했었는데. 오늘은 손은커녕, 팔뚝도 스치질 않았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거늘 청호가 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그를 보기 위해 격납고로 나갔다가 인파에 휩쓸렸던 때처럼.
그는 위대한 영웅이고,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평범한 국민의 위치로 회귀한 기분이었다. 결코 좋은 기분이 아니란 말이다.
“싫어.”
“예?”
문맥과 맞지 않는 거절에 시윤이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식기를 내려놓은 청호가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았다.
“이제는 너랑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숨쉬기가 편해지는 것 같거든. 뭐, 기분 탓일 수도 있지.”
“…….”
“아무튼, 그래서 계속 보고 싶어. 계속 같이 있고 싶고.”
“…….”
“굳이 아프지 않더라도 말이야.”
시윤이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포크를 움켜쥐었다. 청호는 그가 하는 말에 제 자존감과 자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고 있을까. 그걸 알고 저리 반짝반짝한 말을 해 주는 거라면, 참으로 대단했다. 전혀 모른 상태로 하는 거라면, 그 역시 대단했고.
어딘가 아리송한 시윤의 낯에 청호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왜. 나랑 밥 먹기 싫어?”
“……아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시윤이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부정이었다. 찰나 단단하게 굳었던 청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변화를 가만히 보던 시윤이 넌지시 입을 뗐다.
“내일, 내일 저녁……도 같이 먹을……까요?”
“그럴까?”
그래. 같이 먹자. 청호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신난 얼굴로 식사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산책을 앞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그 위압적인 에로아스의 청호 대장이 강아지 같다니.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그러지 않고는 방정맞게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