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 위의 사화산 (1)
동전만큼 작고 동그란 기계가 시윤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것을 지지 않고 노려보던 시윤이 그 위로 엄지를 꾸욱 눌렀다. 따끔거리는 통각이 느껴지고, 기계가 은은한 불빛을 내뿜었다.
엄지를 뗀 시윤이 그것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비릿한 혈향이 혀 위를 맴돌았다.
곧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그곳엔 알아보기도 힘든 언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분명 영어인데, 읽을 수조차 없었다. 한 단어인 주제에 스펠링이 스무 개나 되는 것도 있었다. 한참 창을 노려보던 시윤이 포기하고 그것을 모건에게로 전송했다.
오늘은 변화가 있어야 할 텐데. 벌써 2주째 아침저녁으로 피를 뽑아 보내고 있으나,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C0 상태였다.
시윤은 모건에게서 답이 올 때까지 ‘청호의 만물상’에서 가져온 책을 읽었다. 홀로그램과 픽셀로 이루어지지 않은 활자는 그저 보고만 있어도 신비로웠다. 아무래도 책에 묻은 세월이 적지 않은지라 이따금 잉크가 날아간 곳도 있고, 낱장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으나 그 역시 특유의 감성으로 느껴졌다.
시윤이 연한 미소를 띤 채 책장을 열댓 개쯤 넘겼을 때였다. 반짝이는 빛과 함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모건에게서 전화가 온 거였다. 통화 아이콘을 스와이프하자 하얀 가운을 입은 모건이 삐뚜름하게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채 준위.
“네, 대령님.”
―청호랑 붙어 있는 거 맞아?
“네. 일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 말고는 대개 2미터 내에 함께 있습니다.”
시윤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건의 반응을 보아하니, 오늘도 유의미한 변화가 없는 모양이었다. 시윤은 실망하지 않기 위해 부러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근데 왜 변화가 없지?
“글쎄요.”
―하아…….
모건이 피로한 낯으로 벅벅 얼굴을 문댔다. 호기로이 내놓았던 가설이 무너지고 있는 게 못마땅한 것 같았다. 시윤은 괜히 중죄라도 지은 듯,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책의 해진 모서리를 살살 문질렀다.
“어쩌면 C0가 제 한계인 게 아닐까요. 아무리 제 유전자가 고무처럼 늘어났다가 준다 한들, 한계는 있을 테니까요.”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 기분이 좀 나아?
“아니요. 비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청호 대장님도 기대하고 계실 텐데. 어빌리티가 상승할지도 모른다고. 그럼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고, 입을 맞출 수 있을 거라고. 분명 기대하고 계실 텐데.
결국 제 그릇이 C 나부랭이에 불과한 거라면, 저를 포함한 주변 이들이 얼른 체념하는 게 좋았다. 기대는 결국 실망이 되고, 겪어 본 바에 의하면 그 실망은 적지 않게 아프니 말이다.
―너 가끔 보면 애가 참 독해.
모건이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시윤이 설핏, 알맹이 없는 미소를 흘렸다. 그 미소가 꼭 초탈의 경지에 이른 승려 같았다.
쯧쯧 혀를 차던 모건이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청호 또 작전 나간다던데. 들었어?
“작전이요?”
줄곧 무감하던 시윤의 표정에 파동이 일었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청호도 방금 알았을 거야. 오늘 아침 간부 회의 때 결정 난 거거든.
“언제, 어디로 가신답니까?”
―모레 출정이고, F3에 있는 죽은 화산으로 간대. 분명 사화산인데, 땅 아래가 이상하다나 봐.
“땅이 어떻게 이상하길래 에로아스 부대가 갑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모건이 그걸 대체 왜 자신한테 묻냐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시윤이 얄미워 죽겠다는 듯, 그를 흘겨봤다. 말 안 해 주면 내가 모를 줄 알고. 청호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지. 시윤이 됐다며 이만 통화를 종료하려는데, 별안간 모건이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
―너도 따라가.
“……예?”
―이번 작전 적어도 일주일이라더라. 그러니까 너도 가.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시윤의 눈썹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뭘 어떻게 가. 군용기 타고 가면 되지.
“그 뜻이 아니잖습니까.”
―그럼?
“저는 전장에 나가 봐야 짐만 될 거라고요. 총도 제대로 못 드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누가 나가서 싸우래? 그냥 청호 옆에 붙어 있어.
“하아…….”
시윤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늘 논리적이던 모건이 오늘따라 이상했다. 심통 나서 아집을 피우는 어린아이 같았다.
“가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청호 대장님 가이딩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왜 갑니까.”
―너 항상 전장 나가고 싶어 했잖아. 근데 갑자기 왜 그러냐?
“그때는 제 주제를 몰랐고, 지금은 주제를 너무 잘 알거든요.”
―…….
“일주일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닌데, 그 정도는 떨어져 있어도…….”
―와, 얘 봐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DNA 구조만 보고 있는데? 네가 안 가면? 표본은? 실험은? 연구는? 네 가이드 능력은?
“……여태 변동 없었잖아요. 거기 간다고 특별히 뭐가 달라질까요? 거기다 청호 대장님이 허락해 주지 않으실 겁니다.”
시윤은 줄줄이 부정만 내놓았다. 세상에 불만 많은 청소년 같았다. 모건의 눈매가 단단히 굳었다. 화면 속의 그가 어깨를 넓게 펴며 의자에 바로 앉았다.
―채 준위.
“네.”
―가.
“…….”
―명령이야.
“…….”
시윤의 거절과 부정은 그렇게 묵살당했다. 모건이 명령이라는 말을 한 이상, 시윤은 당장 죽거나 사지가 잘리는 게 아니고서야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예.”
우물우물 혀를 씹던 시윤이 마지 못해 고개를 주억였다.
시윤은 청호가 저번처럼 자신의 출정을 거부해 주길 바랐다. 그는 대장이라는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었고, 오지 마, 라는 한마디로 모건의 명령을 무력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헌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건이 언질을 주지 않았나. 제가 출전하게 해 달라고 조른 거로 알고 있으면 어쩌지.
시윤이 맞은편에 앉은 청호를 흘깃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표출했다. 청호는 늘 그랬듯,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다. 두툼한 고깃덩이를 두부처럼 가르는 칼질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윤이 그것을 보며 고기 대신 자신의 입술을 질겅거리고 있는데, 청호가 문득 시윤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예?”
“왜 밥 안 먹어? 어디 아파?”
청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윤의 접시를 바라보았다. 난도질만 당했을 뿐, 시윤의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음식이 퍽 애처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니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큼지막한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청호는 시윤이 음식을 꿀꺽 삼키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식사를 이어 갔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훔쳐보며 혀로 앞니 뒤를 두드렸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모레 F3으로 출정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저도…… 저도 같이 가는 거 아십니까?”
“알아. 모건이 알려 줬어.”
“근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청호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시윤은 그 반응이 못내 당혹스러웠다. 그래, 제 첫 출정이 타인에게 무어가 그리 대단하겠는가. 가면 가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시윤에게나 일생일대의 사건이지 청호나 모건에겐 그다지 큰일이 아닐 터였다.
“……아닙니다.”
시윤이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숨을 크게 내쉰 그가 식사에 집중하려 하는데, 청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가기 싫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싫은 얼굴인데?”
청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눈동자가 온기라곤 없는 우주 같았다. 고작 시선일 뿐인데 위압감이 엄청났다. 시윤이 푹 머리를 고꾸라트렸다.
“제가 따라가 봐야 짐이 될 게 뻔한데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총도 못 다루고, 체력도 좋지 않은걸요. 더군다나 자가 치유 능력도 퓨어와 다름없어서, 조금 다친 거로도 크게 아플 겁니다. 그 모든 게 민폐일 텐데요.”
“누가 너더러 민폐래?”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문장을 끝맺지 못한 시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상사에게 이따위 말투를 쓰는 건 군 규칙에 어긋남을 알지만, 어딘가로 숨고 싶은 기분이라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이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제가,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는 제 처지가 속상하고 또 속상했다.
시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아침저녁으로 피가 뽑히는 엄지에 새파란 멍이 올라와 있었다.
정적이 이어졌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시윤이 무슨 말이라도 뱉어 보려 입술을 뗐을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호가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와 시윤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고는 지긋한 눈빛으로 시윤을 바라봤다.
“누가 그러면 내가 혼내 줄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 줘.”
“……예?”
“같이 가 달라고. 같이 가고 싶어.”
청호가 한 말은 분명 부탁이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 포크를 내려놓은 시윤이 어깨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됩니까?”
“폭주가 올지도 모르잖아.”
“폭주요? 전장에서요?”
“응.”
시윤이 살풋 미간을 좁혔다. 폭주라. 틀린 말은 아니다만, 영 께름칙했다. 그도 그럴 게, 청호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제가 목도했던 그의 폭주는 절대 즐거울 게 못 됐다. 혀가 피로 담뿍 젖을 정도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었으니까.
그가 청호의 의중을 가늠하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청호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마치 애교 떠는 강아지처럼.
“그럼…… 손잡아 줄 거지?”
“예?”
“손 말이야. 잡아 줄 거지? 아무리 모건이 안 된다고 했어도, 내가 아프면 손잡아 줄 거지?”
“예. 그럼요.”
시윤이 얼떨떨한 낯으로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그럼 됐어.”
기어코 받아 낸 긍정에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시윤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꼭…… 꾀병이라도 피우시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들려?”
“네.”
“맞아.”
당당하게 시인하는 얼굴이 어찌나 천진난만한지. 시윤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원래 전장이라는 게, 예상치 못한 일만 일어나는 곳이니까. 청호에게 폭주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 그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건 세상에 저뿐이니까.
그러니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병사 한 명의 역할을 온전히 해내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손톱만큼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윤은 일주일 치 짐을 싸는데 무려 여덟 시간을 소모했다.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은 집 밖에서도 보낸 적이 없는데, 하물며 포스 바깥에서, 전장에서 보낼 거라 생각하니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녔다.
씻는 건 챙겨 가야 하나. 먹을 건 내가 안 챙겨도 되겠지. 혹시 모르니까 알약 조금만 챙길까. 베개랑 이불은 주나? 아무래도 전장이니 그런 거 없이 몸을 옹송그리고 자려나. 전장에 따라가긴 하더라도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겠지? 그럼 그 시간 동안 뭘 하나? 홀로그램 패드를 가져가 일을 할까? 책 읽는 건 눈치 없는 짓일 것 같고.
머릿속이 복작복작 난리였다. 결국엔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급한 마음에 앞뒤 분간 없이 ‘나 내일 F3으로 출정 나가는데 뭐 가져가?’라고 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네가 출정을 왜 나가냐. 그걸 왜 이제 말하냐.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겁도 없이 따라가냐. 안 가겠다고는 해 봤냐. 형 얼굴도 안 보고 갈 거냐.
쏟아지는 잔소리에 별다른 소득 없이 얼른 통화를 종료했다. 그래서 시윤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홀로그램 태블릿 하나만 챙겼다.
나머지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일주일 동안 바닥에서 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안 씻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다 포기하니 모든 게 명쾌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출정 당일이 도래했다.
시윤은 밤새 잠을 설쳐 뻑뻑한 눈으로 군복을 껴입었다. 군복 가이드가 적힌 홀로그램을 띄워 두고 수시로 살피면서 끈을 묶고, 단추를 채우고, 지퍼를 올렸다. 시윤은 나름 준위라는 높은 계급을 가졌으나, 군복을 입을 일은 없었다. 늘 정복 차림이었지.
가슴팍에 [WO. 채시윤]이라고 적힌 노란 테두리 명찰을 부착한 시윤이 이번엔 포스 국기가 수놓인 패치를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팔뚝에 꾹꾹 눌러 붙이는데, 아직 한참 남은 배지들이 보였다.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쉰 시윤이 그것들을 대충 모아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일일이 달 시간이 없었다. 아직 군화도 신지 못했고, 전투모도 머리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을 뿐, 여미지 못했다.
시윤이 엉거주춤한 포즈로 전투화에 발을 쑤셔 넣었다. 끈을 묶는데, 구멍이 어찌나 많은지 눈앞이 다 빙글빙글 돌았다. 별생각 없이 바지를 바깥으로 냈다가, 틀렸다는 걸 알고 끈을 죄 풀고 다시 묶기도 했다.
그러고 나니 전달받은 집합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시윤이 낑낑거리며 전투화와 씨름하고 있는데,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마 청호일 것이다.
“잠, 잠시만요! 저 다 했어요! 거의 다…… 했…… 악!”
침대에 걸터앉아 전투화 끈을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기던 시윤이 그대로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희멀건 천장이 그런 시윤을 비웃듯 내려다봤다. 진짜…… 짜증 나…….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린 시윤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도 돼?”
문 너머에서 청호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예.”
시윤이 매가리 없이 대답했다. 곧 문이 열리고 청호가 들어왔다. 그는 전투복 차림이 아니었다. 품이 넉넉한 검은색 티셔츠에 전투 바지, 그리고 전투화가 다였다. 겉옷도, 명찰도, 하다못해 군번줄도 없었다.
출정이 오늘이 아니었나? 라는 의심이 될 정도로 편안한 복장이었다.
“뭐 해?”
붉으락푸르락 물든 시윤의 얼굴에, 청호가 물었다. 비아냥은 아니었고,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그에 시윤의 귓바퀴가 시뻘겋게 익었다.
“제가 아직 전투복에 익숙지가 않아서……. 혹 너무 늦었습니까? 일단 나갈까요?”
시윤이 벌떡 일어났다. 그 움직임에 쓰다 만 전투모가 앞으로 내려오며 시야를 가렸다. 얼른 그것을 올려 원위치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전투모가 또 주르륵 내려왔다. 시윤이 이를 악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전투복 입는 연습이나 할 걸 그랬다.
신경질 가득한 손길로 전투모를 내리누르는데, 청호가 그것을 부드럽게 벗겨 냈다. 시윤의 헝클어진 머리칼이 드러났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꼭 풀밭에서 뒹굴어 털이 비죽비죽 선 고양이 같달까.
“전투복 입을 필요 없어.”
“예? 하지만 출정 시에는 전투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어야 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래?”
“……조교님이요.”
“무슨 조교?”
“처음 입대했을 때 신병 교육 해 주신 조교님이요.”
시윤이 먼 과거를 회상하며 게슴츠레하게 눈을 좁혔다. 흑인 조교였는데, 꼭 공룡 같았다. 덩치도 크고, 팔뚝도 엄청나게 두꺼웠었지. 거기다 어찌나 냉철하고 칼 같은지, 배우는 거라면 뭐든 빠른 시윤도 교육을 이수하는 데 진땀을 뺐었다.
“너 신병이야?”
“……아니요.”
“그럼 그런 거 무시해도 돼.”
청호가 보란 듯이 전투모를 뒤로 던졌다. 고운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그것이 옷장 가장 위 칸, 정모(정복 모자) 옆에 곱게 안착했다.
시윤이 종일 씨름하던 그것을 아련하게 바라보는데, 청호가 대뜸 한쪽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놀란 시윤이 덩달아 몸을 굽혔다. 그러자 청호가 그를 가볍게 뒤로 밀었다. 시윤이 얼떨결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청호가 엉망으로 엉킨 군화 끈을 풀어냈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손을 휘저었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너 때문에 출정 늦어지면, 책임질 거야?”
그에 시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청호의 가이드가, 엘렉트라 집안의 막내아들이 전투화를 신을 줄 몰라서 에로아스 부대의 출정이 늦어졌다더라, 라는 소문이 돌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릴 테였다.
조용해진 시윤에 청호가 알 듯 모를 듯 미소 지었다. 그는 매우 익숙한 손길로 끈을 묶었다. 시윤에게는 영악한 뱀처럼 굴던 끈이 부드럽게 전투화 구멍을 넘나들었다.
청호는 금세 한쪽 전투화 끈을 다 묶었다. 시윤이 마법이라도 보듯, 넋을 잃고 그것을 구경했다. 분명 끈을 빡빡하게 조였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정말 마법 같았다.
청호가 반대쪽 끈을 풀었다. 엉망진창으로 엉킨 끈에 시윤이 얼마나 치열한 사투를 벌였는지 알 수 있었다. 청호가 그것을 슥슥 풀며 말했다.
“군복은 됐고, 전투화만 잘 신으면 돼. 땅에서 올라오는 방사선을 막아 주니까.”
“…….”
“전투모는 나중에 써도 괜찮아. 가는 데 꼬박 열두 시간이 걸리는데, 내내 쓰고 있으면 답답하기만 할 뿐이야.”
“…….”
“전투복을 차려입는 건 복귀할 때. 그때는 다른 부대며, 시민이며 보는 눈이 많거든.”
시답잖으면서도 중요한 팁에 시윤이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것들이었다.
마침내, 전투화가 시윤의 발에 딱 맞게 안착했다. 훌떡 몸을 일으킨 청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시윤이 갓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 늘 신던 구두와 달리 무겁고, 두껍고, 단단한 전투화가 몹시 새로웠다. 두툼한 밑창 덕분에 시야가 올라가서 그런가. 어깨가 으쓱한 느낌이 들었다.
시윤이 뒤꿈치를 들썩이며 전투화와 친해지고 있는데, 청호가 허리춤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물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시윤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졌다.
“네 거야.”
“제 거요?”
“응.”
청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총이었다. 청호의 손바닥만 한 총은 어떻게 보면 작았고, 또 어떻게 보면 컸다. 청호가 얼른 받지 않고 뭐 하냐는 듯 손을 흔들었다. 시윤이 얼결에 그것을 건네받았다.
보기와 달리 묵직한 무게감에 손목이 출렁거렸다. 생김새는 권총과 비슷했다. 대신 총구가 길었다. 검은색 보디에 손잡이, 방아쇠, 가늠쇠는 미묘한 보라색이었다.
시윤이 제 손에 놓인 총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반짝이는 총에 넋을 놓은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에로아스 부대가 쓰는 무기들은 성능이 좋지만 무거워. 저번에 들어 봐서 알겠지만, 네가 들고 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아, 어, 예. 그렇죠…….”
“이건 권총인데 AR처럼 발사되게 개조했어. 방아쇠를 당겼다가 놓지 말고, 계속 당기고 있어.”
“…….”
“총 수납은 여기. 탄창 수납은 여기, 여기, 여기.”
가까이 다가온 청호가 시윤의 전투 바지 오른쪽 주머니를 살짝 건드렸다가, 왼쪽 주머니 세 개에 가져온 탄창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모래주머니라도 단 듯, 다리가 순식간에 묵직해졌다.
“소음기는 일부러 안 달았어. 그래야 네가 어디서 총을 쏘든, 내가 들을 수 있으니까.”
“아…… 네…….”
시윤은 청호의 말을 최선을 다해 듣고, 기억하려 했다. 허나 귓구멍에 얇은 막이 덮인 듯 모든 소음이 탁하게 들려왔다.
총이다. 내 총. 청호가 만들어 준, 나만의 총.
손잡이를 조물거리던 시윤이 총구를 살살 쓰다듬었다. 차갑고 미끈한 질감이 더할 나위 없이 낯설었는데, 그 낯섦이 나쁘지 않았다.
드디어 내가, 전장에 나가는구나. 그것도 청호의 에로아스 부대와 함께. 그 사실이 몹시 선연하게 다가왔다.
철없는 기분이 상승 곡선을 그렸다. 주책맞게 솟구치는 입꼬리를 눌러 내리려 안간힘을 쓰는데, 청호가 물었다.
“더 챙길 거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가자.”
그가 문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널따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그의 잘빠진 콧날과 보기 좋은 턱선에 묻어났다. 멋들어지게 넘긴 검은 머리칼이 푸르게 일렁였다.
시윤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때때로, 아니 자주 느끼는 거지만 청호는 그의 위상과 참 잘 어울리는 생김새를 가졌다. 영웅으로 추앙받기 더없이 좋은 외모랄까. 적당히 서늘하고, 감정에 무뎌 보임과 동시에 자꾸 시선이 갈 만큼 잘생겼다. 똑바로 직시하기는 어려우나, 흘깃흘깃 훔쳐보게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어여 와.”
움직임 없는 시윤에 청호가 부드러이 그를 재촉했다. 움칠 어깨를 떤 시윤이 얼른 그를 뒤따랐다.
“네, 가요!”
비로소 첫 출정이었다.
전장과 관련한 모든 것에 처음인 시윤은 군용기를 타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건물만큼이나 커다란 군용기는 에로아스 부대 수십 명과 무기, 장비 등을 한가득 싣고도 거뜬히 하늘로 비상했다.
우르릉 진동하는 기내에 시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중력이 강해지면서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생경했다. 고막이 먹먹해지고, 딱딱한 의자와 등이 철썩 달라붙었다.
그래도 그건 버틸 만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전신 여기저기로 박혀 오는 타인의 시선이었다.
군용기에 탄 모두가 시윤을 구경했다. 말 그대로 구경이었다. 표본으로 잡혀 온 클롭스를 보는 눈과 비슷하기도 하고, 방사능에 피폭돼 사지가 뒤틀린 동물을 보는 눈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다지 기꺼운 시선들은 아니었다.
물론 신기하겠지. 신입을 잘 받지 않는 에로아스 부대라 신병만 들어와도 수군거릴 판에, 청호의 가이드가 들어왔으니 어찌 흥미가 동하지 않겠는가.
만약 시윤이 온전한 가이드였다면. 그러니까 청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가이드였다면 이 시선을 즐겼을 터였다. ‘맞아, 내가 바로 청호의 가이드야’라며 같잖은 우월감을 만끽했을 텐데.
허나 할 수 있는 거라곤 손잡아 주기뿐인지라 제 수준이 들통날까, 여간 두려운 게 아니었다.
시윤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두툼한 장갑을 낀 손이 영 어색했다. 군용기가 뜨기 전, 어디선가 나타난 모건이 준 장갑이었다. 청호를 가이딩할 일이 생길 수 있으니, 그때 끼라고 했다. 청호의 귀걸이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는데. 그의 힘을 모두 흡수해 주진 못하더라도, 고통이 어느 정도는 옅어질 거라고 했다.
장갑의 생김새는 일반 전투 장갑과 비슷했다. 그래도 시윤은 다른 병사들의 장갑과 제 것이 다르다는 걸 뚜렷이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 주먹을 쥐게 됐다. 혹여 남이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출정하면 그저 기쁘고 설렐 줄 알았는데. 온통 불안과 걱정뿐이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할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말해 볼까. 비겁한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대장님, 이번 작전은 든든하시겠습니다.”
병사 하나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시윤에게 박혀 있던 시선들이 그에게로 흘러갔다. 시윤 역시 그를 바라봤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는 기다란 장거리 저격총을 다리 사이에 두고 있었다. 명찰은 붉은색이었고, 폴의 옆에 앉아 있는 걸 보니 꽤 높은 계급인 듯했다. 그의 붉은 명찰에는 [CPT, 딜런]이라는 활자가 수놓여 있었다.
“낯빛부터 평소랑 다르시지 말입니다.”
“맞습니다. 늘 따분해하셨으면서, 지금은 묘하게 신나 보이시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무표정이라도 저희 눈까지 속이실 순 없지 말입니다.”
누군가가 화두를 던지길 기다렸다는 듯, 각자 한마디씩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 상부에선 일주일로 예상하던데. 대장님이 마음 놓고 힘쓰시면 이틀 만에도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시윤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붉은색 명찰에는 [1LT, 알렌]이라고 적혀 있었다.
“방아쇠 한번 못 당겨 보고 상황 종료될까 봐 걱정까지 되지 말입니다.”
“저는 그럴까 봐 미리 탄창 좀 비워 왔습니다. 그럼 총기 반납할 때 덜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똑똑하십니다, 딜런 대위님?”
“칭찬 고맙습니다, 알렌 중위.”
덤 앤드 더머 같은 두 사람의 화담에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윤이 어색하게 그들을 따라 웃었다.
“아, 간만에 진득하게 쉬어서 좋았는데. 얼른 처리하고 복귀하지 말입니다?”
알렌이 짧은 머리칼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푹신한 침대가 벌써 그립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도착하자마자 막사 펼칠 거 없이 바로 쓸어 버리면 안 됩니까?”
딜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번엔 모든 이의 시선이 청호에게로 쏟아졌다. 시윤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을 나른하게 내리깐 청호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모두가 그의 답을 기다렸다.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었다. 청호가 당연히 긍정할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청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나는 일주일 다 채우고 돌아올 거야.”
“예?”
“어째서입니까?”
딜런과 알렌이 눈을 부릅떴다.
“거기 있으면 채 준위랑 손잡을 수 있거든.”
청호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손이요?”
청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딜런과 알렌이 턱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시윤만 홀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픈 척할 테니 손잡아 달라던 청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청호는 이번 기회를 아주 옴팡지게 써먹을 생각인 듯했다.
난데없는 시윤의 웃음에 딜런과 알렌이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뭔데. 뭘 알고 있는데. 무슨 뜻인데. 그런 궁금증이 잔뜩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나 시윤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청호와 눈을 맞추고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만 띠고 있었다. 청호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에 가슴께를 꽉 채우고 있던 불안과 걱정이 한층 수그러드는 듯했다.
* * *
군용기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병사들이 줄 맞춰 내리고, 머뭇거리며 몸을 꼬던 시윤은 가장 늦게 내렸다. 그리고 땅에 발을 붙임과 동시에 턱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그곳은 황야였다. 지평선 같은 땅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각양각색의 풀과 마른 나무들이 규칙 없이 올라와 있었다. 머나먼 끝에는 화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목표인 사화산인 듯했다. 그것을 보며 시윤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춥다’였다.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추웠다. 바깥 공기와 닿는 순간, 얼굴 가죽이 통째로 벗겨지는 줄 알았다.
포스에도 겨울이 있긴 하다. 허나 눈도 내리지 않고, 얼음도 얼지 않는 연약한 겨울이었다. 이다지도 춥진 않단 말이다. 이곳의 바람은 피부를 할퀴고, 눈알을 얼렸다.
어깨를 움츠린 시윤이 고개를 자라처럼 오그렸다. 이런 날씨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는데. 이 추위에서 어떻게 일주일을 있는담. 옴짝달싹할 엄두가 안 났다.
하지만 모든 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짐을 옮기고, 막사를 설치하고, 무기를 점검하고, 주변을 탐색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각자 맡은 일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했다. 수없이 반복된 전투에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오로지 시윤만 이름 없는 섬처럼 분주 속에 멈춰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윤이 가까이에 있는 철제 상자를 향해 다가갔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이것을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모르지만 일단 뭐든 하고 싶었다.
흐읍, 숨을 한껏 들이켠 시윤이 제 몸뚱이만 한 상자에 손을 댔을 때였다. 상자가 끼긱, 끽 바닥을 긁으며 한 뼘 뒤로 물러났다. 놀란 시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안에 든 게 살아 있는 건가? 로봇이나 동물 같은 거? 그것도 아니면 몰아치는 바람에 미끄러지기라도 한 건가?
상자를 뚫어지라 바라보는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윤이 다시 조심조심 다가갔다. 아무래도 바람에 미끄러진 게 맞는 듯했다. 안심한 그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헌데 그것이 또 뒤로 드르륵 밀려났다.
기겁한 시윤이 뒷걸음질을 치다 무게 중심을 잃었다. 시야가 기우뚱 뒤틀렸다. 본능적으로 사지를 퍼덕이는데, 몸이 반 바퀴 빙그르르 회전했다. 시윤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청호가 서 있었다. 그는 붉은 선이 들어간 에로아스 부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이리 와.”
그가 시윤을 불렀다. 시윤이 냉큼 그를 향해 뛰어갔다. 혹 청호가 저에게도 일을 시켜 주려나, 기대가 됐다. 그의 앞에 서서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청호가 자신이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시윤의 어깨를 감쌌다. 묵직한 무게감과 동시에 따뜻한 온기가 시윤을 보듬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여기 있어.”
“하지만 모두가 움직이는데 저만 이렇게 있을 순 없습니다.”
“쟤들은 그게 맡은 소임인 거고. 너는 이렇게 내 옆에 있는 게 소임이야. 다 그렇게 생각할걸.”
“…….”
시윤의 눈꼬리가 실망으로 내려앉았다. 맡은 소임이 다르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뭐든 하고 싶었다. 클롭스를 죽이겠다든가, 거나한 공을 세우겠다는 주제에 맞지 않은 목표는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손톱만큼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짐을 옮기는 것 정도는 해도 되는데. 소유 어빌리티가 힘이라 상자를 네 개씩 번쩍번쩍 드는 여타 병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시무룩한 시윤의 낯에 청호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맞췄다.
“정 심심하면 손이나 잡아 주든가.”
“…….”
시윤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인지 구분이 안 됐다. 물론, 손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청호가 원한다면 뚝 잘라다가 줄 의향도 차고 넘쳤다. 시윤이 장갑을 벗는데, 청호가 쯧 혀를 찼다.
“장난이야, 장난.”
시윤이 아쉽게 장갑을 다시 여몄다. 그의 고통을 덜어 주고, 손목과 팔뚝이 찌릿찌릿하면 그나마 뭐든 했다고 위안할 수 있을 것 같았거늘. 시윤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눈치 없는 입김이 와르르 쏟아졌다.
“춥지?”
청호가 물었다. 시윤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떼는데, 청호가 시윤의 바지 주머니에서 탄창을 쑥 빼갔다. 오늘 아침, 그가 손수 넣어 줬던 그 탄창이었다.
청호가 그것을 꽈악 움켜쥐었다. 그러자 탄창 주위에서 희미한 연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시윤의 입김과 비슷한 결을 가진 연기였다.
시윤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청호가 능력을 쓰는 건 볼 때마다 신비롭다. 청호는 탄창에 수십 초간 열을 가했다. 그리고 탄창이 녹거나 일그러지기 전에 그것을 시윤에게 되돌려 줬다. 시윤이 두 손으로 탄창을 받았다.
“핫 팩 대신.”
청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웃는 낯도 아니고, 파동이 많은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장난기가 느껴졌다. 철없는 개구쟁이 같다고 생각하면 영창 가려나.
어쨌든 탄창은 실로 따뜻했다. 두꺼운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옅은 미소를 띤 시윤이 탄창을 만지작거리며 감사합니다, 담백한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청호는 셔츠만 입고 있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 선이 죄 드러날 정도로 얇은 셔츠였다. 그런데도 몸을 웅크리거나 발을 구르거나 하지 않았다. 혹 겁 많은 바람이 그를 피해 가나, 싶었는데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아선 그도 아닌 듯했다.
“대장님은 춥지 않으십니까?”
시윤이 물었다. 호기심과 걱정이 적절히 섞인 질문이었다. 그러자 청호가 시윤을 빤히 응시하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다지 우스운 질문은 아니었는데.
“왜 웃으십니까?”
“나한테 그런 걸 묻는 사람이 처음이라.”
“소유 어빌리티가 불이면…… 추위도 안 타나요?”
“글쎄. 이유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냥 오감에 무뎌.”
무심하다 못해 건조한 대답이었다. 그게 이상하게 안쓰러웠다. 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저주보다는 축복에 가까운데도 그랬다.
시윤이 탄창을 꼬옥 말아 쥐었다.
“그래도 저랑 손잡는 것까지 무뎌지시면 안 됩니다.”
나름대로 장난이랍시고 한 말이었다.
“…….”
청호의 잇새를 타고 나오던 입김이 뚝 끊겼다. 그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곧 익살맞게 입술을 뒤틀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은 감각을 느꼈을 때가 너와 입을 맞췄던 순간이라고 하면 믿겠어?”
“…….”
그 말에 시윤이 끼긱, 끽 녹슨 깡통 로봇처럼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시윤은 그 문장을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귓가에 청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볼 위로 진득하니 박혀 오는 시선은 덤이었다.
* * *
지휘 본부 및 막사, 생활 기지 등은 빠르게 설치되었다. 빛을 형상화한 포스의 국기와 에로아스 부대 특유의 붉은 깃발이 여기저기서 넘실거렸다. 청호와 시윤이 대장 막사로 이동하는 동안, 사방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와 이것저것을 보고했다.
“막사 총 열두 개, 지휘 본부 하나, 생활 기지 두 개 모두 설치 마쳤습니다. 바리케이드 실행 명령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사능 수치는 310밀리시버트로 에스퍼와 가이드에겐 무난하나 퓨어에겐 방호복 착용이 권고됩니다. 요리병 및 지질학 전문가들에게 방호복을 나누어 줬습니다.”
“탐색 나간 병사들 전원 복귀했습니다. 2킬로미터 내 생체 반응, 열 반응 없습니다.”
“탐사용 드론 비행 준비 마쳤습니다. 목적지까지 예상 비행시간 17분 28초, 왕복 34분 56초입니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보고들이었다. 시윤이 그것들을 주워들으며 뻐끔 입을 벌렸다. 제가 아무리 전장에 나가 본 적 없는 애송이일지라도 전투 관련 지식이 전무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준위인데 그렇게나 멍청하겠는가. 근데 너무 많은 보고가 동시다발적으로 밀려와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허나 청호는 몹시 태연하게 그 보고들에 대꾸했다.
“바리케이드 실행해.”
그 한마디에 허공 여기저기에서 원판 모양의 기계가 튀어 올랐다. 사위의 배경을 반사하는 고화질 홀로그램 기계였다. 바깥에서 보면 부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투명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사능 수치와 관련한 보고에는 “나도 하나 줘.”라고 대답했다.
“예? 방호복 말씀입니까?”
병사가 당신이 그게 왜 필요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청호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나는 방호복 입으면 안 돼? 요즘 피부가 민감해져서 입고 싶은데.”
“아니, 아닙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아, 핫 팩도. 아주 많이.”
“예!”
병사가 쏜살같이 뛰어가더니 짐을 한 아름 가져왔다. 청호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옆에 있던 시윤에게로 전달했다.
그런 청호의 행동을 예상한 시윤이 별다른 말 없이 그것을 껴안았다. 옷은 나중에 입고, 일단 장화 같은 생김새의 방호 신발에다 발을 끼워 넣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방사능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퓨어와 다름없는 시윤은 방호복을 꼭 착용해야 했다.
탐색 병사 관련 보고에는 함께 온 지질학자 한 명당 병사 열 명씩 동행해 네 개 조로 나누어 다시 탐색할 것을 명령했고, 드론은 곧장 비행을 시작했다.
그 후, 청호와 시윤은 대장 막사로 들어왔다.
막사는 우려했던 것만큼 나쁘진 않았다. 크기도 매우 컸고, 천막으로 공간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앞 공간은 널따란 책상과 열댓 개 정도 되는 의자가 있었다.
가운데에는 모닥불을 형상화한 전기난로가 있었는데, 제법 후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책상 위에는 홀로그램 패드, 마이크, 지도 등이 가지런히 정리된 상태였다. 벽 한쪽에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줄 맞춰 서 있었다. 크기와 색부터 눈에 띄게 다른 게, 청호의 무기인 듯했다.
병사 둘이 양쪽 옆으로 포스 국기와 에로아스 부대 깃발을 걸고 있었다. 혹여 구김이 생기진 않을지, 삐뚤어지진 않을지 까치발을 들고 전전긍긍하는 게 퍽 안쓰러웠다.
“대충하고 나가.”
청호가 고갯짓으로 출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병사들이 얼른 일을 마무리하곤 각 잡힌 동작으로 경례한 후 막사를 나갔다. 비로소 청호와 시윤 둘만 남았다.
핫 팩과 방호복을 바리바리 껴안고 있던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청호도 썩 편한 사람은 아닌데. 다른 병사들과 있을 바에는 청호와 둘이 있는 게 훨씬 편안했다. 그래도 최근의 동거가 영 쓸모없진 않았던 모양이다.
시윤이 짐 내려놓을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품속의 짐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청호였다. 하도 경험하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이리 와.”
청호가 무겁게 내려와 있는 천막을 들쳤다. 시윤이 냉큼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곳엔 앞선 공간과 달리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존재했다. 큼지막한 더블베드가 한쪽에 놓여 있었고, 가운데는 앞선 전기난로보다 훨씬 커다란 난로가 훈훈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닥에는 적당히 거칠면서도 보드라운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옷장이나 테이블, 자그마한 개인용 책상도 보였다. 그 옆에는 물과 차, 커피포트 등이 있었다.
청호가 그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차를 골랐다.
“홍차 어때?”
“아, 예. 좋습니다.”
시윤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위를 훑어봤다. 앞으로 일주일간 지낼 곳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한곳에서 멈춰 섰다.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하얀 이불이 깔린 침대에서였다.
“침……대가 하나……네요.”
시윤이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티백 주머니에 홍차 잎을 넣던 청호가 시윤을 돌아봤다. 시윤이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제, 제가 다른 막사에서 묵겠습니다. 어차피 포스에 있을 때도 잠은 따로 잤으니까, 그 정도 떨어져 있다고 모건 대령님 연구에 지장이 있진 않…….”
“왜?”
“아, 그게 아무래도…….”
“나랑 자기 싫어?”
“……예?”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청호는 말을 돌려 할 줄 모른다. 그럴 필요가 없는 위치와 힘을 가졌으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듣는 처지에선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기 일쑤였다.
시윤의 눈알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대답해야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번듯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물우물 입술만 움직이고 있는데, 턱을 안으로 당긴 청호가 은근히 매서운 시선으로 시윤을 응시했다.
“나 나쁜 짓 할 생각 없는데.”
“아, 어…….”
“널 아프게 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
“…….”
“손만 잡아도 아파하면서. 입 맞춘 거로는 까무러치기까지 했었지. 근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야. 안심하라고 한 말이지.”
청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피포트의 버튼이 달칵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청호가 김이 폴폴 나는 물을 따르고, 티백을 넣었다. 곧 홍차 특유의 쌉싸래한 향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티백을 두어 번 들썩인 청호가 머그를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시윤이 쭈뼛쭈뼛 테이블에 가 앉았다. 청호는 맞은편에 앉았다. 기다란 다리를 꼰 그가 테이블 위로 턱을 괴고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보통의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예, 압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지나치게 먼 사이라는 것도 알고?”
“……네.”
시윤이 죄인 같은 낯으로 목을 푹 고꾸라트렸다. 홍차가 금세 갈색빛으로 우러났다. 그 위로 비치는 제 얼굴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자괴감에 빠진 시윤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추락하는데, 청호가 똑똑 테이블을 두드렸다. 시윤이 번뜩 얼굴을 쳐들었다.
“모건이 널 전장에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내가 허락한 이유는 하나뿐이야.”
“…….”
“네가 강의도 안 나가고, 일도 안 하고 오로지 내 옆에 있을 테니까.”
“아…….”
“일주일 동안 나와 친해지도록 해. 그게 이번 작전에서 네가 맡은 임무야.”
누군가는 뭐 그런 시답잖은 임무가 다 있느냐, 비난하겠으나 시윤에겐 퍽 어려운 임무였다. 청호와 친해지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도 안 났다.
시윤이 끙끙거리며 고민하는데, 청호가 씨익 익살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쉬운 남자야.”
“예?”
시윤이 평소보다 네 음은 높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그런 해괴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쉬운 남자라니. 이토록 청호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가 있을까.
“적어도 너한테는 쉬울걸.”
청호가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느릿한 몸짓으로 머그를 입으로 가져갔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빤히 바라봤다. 별다른 뜻 없는 시선이었다. 그저 쉬운 남자라는 수식어와 청호를 접합시키기 위해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근데 어째 청호의 귓불이 아주 미약하게, 조금씩 조금씩 붉어졌다. 시윤이 멍한 눈빛으로 그것을 응시하는데, 청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얼른 마셔. 식으면…… 다시 데워야 해. 귀찮잖아.”
미묘하게 어색한 문장이 웽웽 귓구멍을 울렸다. 뭐랄까. 청호도 지금 이 상황이 꽤…… 수줍은 듯했다. 그걸 느끼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시윤이 한결 맑게 갠 낯으로 차를 홀짝였다. 따뜻하고 쌉싸래한 홍차가 참 괜찮았다.
시윤이 몇 안 되는 짐을 모두 정리했을 무렵, 병사 하나가 막사 바깥에서 우렁차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시윤이 월동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바스락바스락 움직이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던지라 그걸 방해받으니 짜증부터 났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청호가 막사 사이에 놓인 천막을 걷었다. 그렇게 큰 움직임도 아니었는데 그의 넓은 등 위로 두툼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의도치 않게 그것을 본 시윤이 뻐끔, 입을 벌렸을 때였다. 청호가 고개만 살짝 틀어 시윤을 바라봤다.
“탐색 드론 보고일 거야. 같이 들을래?”
“아, 저도 들어도 됩니까?”
“안 될 건 뭐야.”
그 말에 시윤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청호의 뒤에 서는데, 청호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시윤이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
청호는 별다른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그를 따라나섰다.
바깥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청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비행 중에 봤던 이들이었다. 폴을 비롯해 딜런과 알렌도 있었다. 허나 그때와는 표정이 사뭇 달랐다. 전투모에 방탄조끼까지 차려입은 게 비로소 전투 중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가슴을 넓게 편 그들이 청호를 향해 경례했다. 청호는 그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테이블 상석에 있는 의자에 삐딱하니 착석했다. 시윤이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청호가 눈만 들어 시윤을 바라봤다. 동시에 멀찌감치 있던 철제 의자 하다가 바닥을 긁으며 청호 옆으로 끌려왔다.
“앉아.”
그 말에 시윤의 낯빛에 당황이 서렸다.
“아, 저는 서 있겠습니다.”
“왜? 앉으라고 만들어 둔 의자가 이렇게 많은데?”
“어…… 여기 대위님도 계시고, 대령님도 계시지 말입니다. 근데 제가 어떻게 감히…….”
에로아스 부대에는 청호를 제외하더라도, 우러러봐야 할 만큼 높은 계급들이 득실득실했다. 그런 이들이 저렇게 각진 자세로 서 있는데, 준위밖에 안 되는 제가 앉을 순 없었다.
기어들어 가는 시윤의 목소리에 청호가 아, 짧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몇 년을 동고동락한 제 병사들의 계급을 이제야 인지한 모양이었다.
“너희들도 앉아.”
청호의 명령에 열댓 명의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착석했다. 청호가 이제 됐지, 라는 표정으로 시윤을 쳐다봤다.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청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엉덩이를 움직여 의자를 뒤로 뺐다. 청호의 옆자리가 아니라, 청호의 뒷자리로 봐도 무방할 정도가 되어서야 멈췄다.
그쯤, 분위기를 살피던 병사 하나가 테이블 가운데에 홀로그램을 쏘아 올렸다. 보고는 쓸데없는 사설 없이 곧장 시작됐다.
“09시 14분. 목적지인 사화산으로 탐색 드론을 보냈습니다.”
홀로그램이 동영상을 재생했다. 어느 병사의 군화로 시작한 동영상은 곧 병사의 정수리를 비추더니 이내 드넓은 황야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쉭쉭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병사가 홀로그램을 쭉쭉 옆으로 당겨 동영상을 넘겼다. 손톱만 하던 사화산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바람이 조금 세긴 했으나 드론이 밀리거나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근데 도착 2분 전. 영상이 끊겼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잡음 하나 없이 멀끔하던 동영상이 별안간 새까맣게 죽었다. 흔들림도 없었고, 어떠한 공격도 포착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갑자기 전원선을 뽑아 버린 것 같았다.
“급하게 드론을 돌렸는데, 신호 자체가 단절됐습니다. 지금 이 동영상도 드론에서 녹화한 영상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보던 화면을 저장한 것입니다. 드론은 복귀하지 못했고 말입니다.”
“드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통신 오류야? 그것도 아니면 EMP(전자기 펄스로 인하여 나타나는 전자 방출 효과. 영향을 받는 곳에 있는 모든 전자 기기는 파괴된다.)인가?”
청호가 물었다.
“그게…… 아직 파악이 안 됩니다.”
병사가 송구하다는 듯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반면에 청호의 눈동자는 위로 치켜 뜨였다. 사위가 단숨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이걸 보고라고 가져온 거야? 뭘 보고하러 온 건데? 드론이 멍청하다는 거, 아니면 네가 멍청하다는 거?”
“그…… 상황 파악을 위해 추가로 드론을 날렸습니다. 헌데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같은 방법으로 모두 행방불명됐지 말입니다.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대장님 말씀처럼 EMP입니다만, 이제껏 클롭스가 EMP를 쓴 적이 없어서 확언할 수 없습니다.”
“……날려 먹은 드론이 총 몇 개야?”
“세 개입니다.”
으음, 청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많은 전투를 겪었으나 드론부터 말썽인 적은 없었는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화산 안에 뭐가 있는지 알려면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군.”
청호가 검지로 톡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사실 출정 전에 제대로 된 정보를 듣지 못했다. 정부는 항상 그랬다. 무엇이, 어떻게 문제라는 걸 명확히 알려 주는 법이 없었다. 많이 줘 봐야 ‘방사능 수치가 올라갔어’라든가, ‘누가 거기 클롭스가 득실거리는 걸 봤대’ 수준이었다.
청호를 맹신하는 건지, 아니면 대충 위험한 곳만 골라 보내서 죽이려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사화산 주위에 지진이 발생한대. 지질학자에 따르면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래. 가서 알아보도록. 청호가 받은 정보는 그게 다였다.
근데 잘 날아가던 드론이 고꾸라진다니. 죽은 화산, 인공적인 지진, 추락하는 드론. 뭐 하나 접점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청호가 가볍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딜런, 알렌.”
“예, 대장님.”
“애들 데리고 출정 준비해. 아돌프 A, B가 선두로 탐색부터 간다. 나머지는 베이스캠프와 사화산 중간 지점에서 대기. 5분 뒤 집합.”
청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막사를 나갔다. 바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얼떨결에 덩달아 일어난 시윤이 제자리에서 뒤꿈치만 들썩였다.
“너도 갈래?”
청호가 물었다.
“아니요.”
시윤이 단호히 거절을 내놓았다. 따라가 봐야 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게 뻔한데. 괜히 도와 보겠다고 이것저것 건드리고 만지다 작전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릴 터였다.
“그래, 그럼. 여기서 기다려.”
청호는 구태여 시윤을 설득하지 않았다. 일렬로 세워진 무기 앞에 선 그는 몹시 익숙한 몸놀림으로 그것들을 전투복 바지 여기저기에 수납했다. 잘 벼려진 나이프와 묵직한 탄창들이 쏙쏙 잘도 들어갔다.
에스퍼라고 해서 어빌리티만 가지고 싸우는 건 아니다. 어떤 종의 클롭스를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르니 무기는 종류별로 휴대하는 게 좋았다.
옆에서 서성이던 시윤이 인이어 이어폰과 마이크를 내밀었다.
“다치지 말고 돌아오십시오.”
뭐, 자가 치유력이 워낙 뛰어나니 목이 잘리는 게 아닌 이상 두 발 멀쩡히 걸어오겠지만 그래도. 사실 그게 아니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
청호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시윤의 말간 얼굴과 하얀 손 위에 곱게 올려진 마이크를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금방 올 거야. 늦어도 저녁쯤.”
“예. 기다리겠습니다.”
시윤의 말에 청호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미소가 스몄다. 그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미세한 표정을 놓치지 않은 시윤이 속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