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 위의 사화산 (2)
금방 오겠다던 청호는 자정이 가까워졌음에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나간 병사들 모두가 돌아오지 않았다. 막사에서 쥐죽은 듯 있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청호의 행방을 아는 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근데 어째 캠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캠프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바깥에 나와 화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윤이 덩달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검은 밤 속에 갇힌 화산은 낮에 있던 그 자리에 있긴 한 건지, 아니면 도망간 건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고개를 쭉 빼고 눈알을 굴리던 시윤이 주위에 있던 병사에게 다가갔다. 공교롭게도 오전에 탐색 드론과 관련한 보고를 했던 그 병사였다. 그는 원사로, 다행히 시윤보다 계급이 낮았다.
“저기…….”
“예, 채 준위님.”
“청호 대장님은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아, 그게……. 통신이 먹통입니다. 드론도 끊겼으니, 통신 역시 불량일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만…… 너무 늦으시지 말입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는데, 불빛이나 움직임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총을 쏘면 불꽃이 보여야 하는데……. 대체 뭘 하시는 건지…….”
그가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시윤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건네준 인이어와 마이크가 쓸데없는 짐이 됐겠구나, 싶어 신경질이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탄창이나 더 챙겨 줄걸. 아니, 총도 못 쓰고 있는 듯하니 나이프를 줬어야 했나.
시윤이 짜증스레 목덜미를 긁었다. 그 짜증은 곧 걱정이 되고, 나중엔 불안이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대 분위기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매서운 칼바람보다 불안이 더 추웠다.
청호와 연락이 안 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 말인즉슨,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청호와 비등한 힘을 가진 적이 있다는 걸 뜻했다.
병사들이 줄지어 무기를 들었다. 방사능 방호복을 입은 퓨어들 역시 무기를 들었다. 시윤이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청호가 준 총이 느껴졌다.
“…….”
목구멍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렇게 갑작스레 전쟁을 앞둘 줄이야. 한 달에 한 번,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사격 연습 덕에 총을 다룰 줄은 알지만 잘 쏘진 못했다.
긴장은 한계를 모르고 고조됐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 소리가 어찌나 큰지. 양 뺨을 매몰차게 후려치는 바람 소리가 적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땅이 미약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든 이가 숨을 멈췄다.
부대에 남아 있는 인원은 대부분이 전투에 능하지 못하다. 이대로 클롭스들과 마주하면 추풍낙엽처럼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다.
시윤이 뒤꿈치를 좌우로 비틀어 땅을 지르밟았다. 행여라도 무의식중에 도망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장에서 죽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포스를 지키다, 국민을 지키다 죽는 건 다시없을 영광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당연한 이치처럼 배워 온 거였다.
시윤이 두 손으로 총을 거머쥐었다. 헌데 어째 자꾸 귓불이 간지러웠다. 갈라진 그 귓불이었다. 어깨로 귓바퀴를 문지르며 불안인지 간지러움인지 모를 것을 해소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군입니다!”
“대장님 지프입니다!”
“아돌프가 돌아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바짝 올라가 있던 병사들의 어깨가 탁 내려앉았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 올랐다. 그러나 시윤은 안심하지 못했다. 총을 대충 허리춤에 꽂은 그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뜀박질을 쳤다.
그리고 막 지프에서 내리는 청호와 마주했다. 시윤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졌다.
“……대장님?”
청호의 전신이 시뻘건 피에 절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윤이 흡, 숨을 말아 먹었다. 경악과 공포가 동시에 몸을 지배했다.
청호는 꼭 피로 샤워한 사람 같았다. 평소보다 더욱 검어진 그의 머리칼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꽉 다물린 턱 끝에도 핏방울이 고여 있었다. 피 칠갑, 피 칠갑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치, 다치셨습니까?”
얼른 정신을 다잡은 시윤이 청호에게 다가갔다. 그를 부축하기 위해서였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보통 상처는 아니리라.
시윤의 손끝이 막 청호의 팔뚝에 닿으려 할 때였다.
“오지 마.”
청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시윤의 움직임도 멎었다. 자의로 멈춘 건 아니었고, 앞에 벽이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사지가 언 것 같기도 했다. 청호가 또 사이코키네시스 능력을 쓴 모양이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시윤이 차렷 자세로 섰다. 그제야 몸을 둘둘 감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청호가 손등으로 축 내려앉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겼다.
“안 다쳤어. 내 피 아니야. 클롭스 거야.”
“아…….”
그제야 청호를 따라 내리는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청호처럼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질퍽한 핏물이 줄을 이었다. 시뻘건 얼굴에는 피곤과 짜증만이 뒤섞여 있을 뿐, 고통이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부상병은 없는 듯했다.
청호가 뒤를 돌아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지프에서 내린 병사들이 가지런히 열 맞춰 섰다.
“다들 좆같은 거 보느라 수고했다. 얼른 씻고, 식사하고, 휴식하도록. 보초는 3교대. 가장 늦게 투입됐던 팀부터 먼저 선다. 해산.”
“해산!”
우렁차게 대답한 병사들이 반려 가이드와 함께 빠르게 흩어졌다. 청호 역시 시윤에게로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묘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고기 썩은 내처럼 시큼하고 역겨웠다. 클롭스 특유의 냄새였다.
시윤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볼 안쪽 살을 짓씹었다. 늘 바람 냄새가 나던 청호였는데. 이런 악취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씻고 갈 테니까 막사에서 기다려.”
청호가 말했다. 시윤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근데 정말…… 다치신 곳 없는 거죠?”
“없어.”
심드렁한 음성에 거짓은 없었다. 그에 시윤이 알겠다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청호가 먼저 자리를 뜨길 기다렸다. 그게 예의였으니까.
“…….”
잠시 시윤을 응시하던 그가 등을 돌렸다. 청호는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빠르게 멀어졌다. 그가 손바닥만큼 작아졌을 때, 시윤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왼쪽 가슴을 쓸어내렸다. 피투성이가 된 청호의 모습이 가슴께에 쿡 박혀 쓰라렸다.
청호는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막사로 돌아왔다. 축축이 젖은 머리에 검은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클롭스 피는 끈끈하고 진득해서 꼭 거머리 같다며 툴툴거리기도 했다. 시윤은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이후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사실 시윤은 그다지 식욕이 없었지만, 종일 고생하고 온 청호를 홀로 식사하게 두고 싶지 않아 수저를 들었다.
저녁 메뉴는 뻐득뻐득한 빵과 짠 버터, 그리고 질긴 고깃덩이, 익힌 브로콜리와 양파, 미적지근한 수프 정도였다. 전장인 걸 고려하면 매우 호화로운 식사였다.
“사화산에 뭐가 있었습니까? 클롭스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가요? 오래 계셨던 걸 보니, 상위 계급 부대였나 봅니다.”
수프를 휘젓던 시윤이 물었다. 그를 기다리는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대체 어떤 클롭스이기에 에로아스 부대가 이리도 애를 먹었나, 싶었다.
청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부대가 아니라 알.”
“네?”
“알이 있었어. 클롭스 알.”
“……클롭스 알이요? 달걀 같은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크기는 달걀이 아니었지만.”
청호의 긍정에 시윤의 눈썹 위로 야트막한 홈이 파였다. 클롭스의 알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클롭스는 시윤의 전문 분야였다. 그들의 생물학적 특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클롭스는 알을 낳지 않고 새끼를 낳는데요.”
“낳은 게 아닐 거야.”
“예?”
“낳는다는 표현보다는…… 공장에서 찍어 낸 것 같았는데.”
청호가 떨떠름한 낯으로 사화산 내부의 풍경을 상기했다. 시윤의 표정이 덩달아 떫어졌다. 공장처럼 알을 낳는 클롭스라. 어떤 변종인지조차 가늠이 안 됐다.
“중심에 있던 마그마방부터 화구까지 알이 가득 차 있었어. 이것처럼.”
청호가 포크로 브로콜리를 건드렸다. 정확히는 녹색 알갱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송이 부분을.
“처음에는 그냥 화산재에 뒤덮인 돌덩어린 줄 알았는데, 칼로 째 보니까 죄다 클롭스더라고. 그것도 새끼가 아니라 제법 컸어.”
“어떤 종이었습니까? 도드라지는 생김새는요? 뿔이나, 몸체나, 손가락 같은 거 말입니다.”
시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알을 낳는 클롭스는 처음이다. 얼른 연구해 보고 싶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동시에 마음이 급해지기도 했다. 클롭스는 여태 새끼만 낳았다. 그런데도 번식 속도가 인간의 수배에 다다랐다. 근데 알이라면…… 걷잡을 수 없다. 한 번에 적으면 네댓 개, 많으면 수천 개까지 낳을 텐데. 지구 전체가 클롭스로 뒤덮일지도 몰랐다.
청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시윤이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가 뱉을 말에 집중했다.
“그냥…….”
“트롤과 비슷하던가요? 아니면 오우커나 바실리스크?”
“다 좆같이 생겼어.”
“…….”
시윤의 턱이 뻐끔 아래로 떨어졌다. 청호는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역겹다는 듯 콧잔등을 구기고 있었다. 시윤이 검지로 목을 긁었다.
“보디캠 없이 가셨죠? 그럼 다른 병사 것이라도…….”
“쓸모없을걸.”
“어째서입니까?”
“사화산 주위에만 가면 기계란 기계는 죄다 먹통이야. 총도 발사가 안 되고, 수류탄도 그냥 철 덩어리지. 하물며 에스퍼 어빌리티도 쓸 수가 없어.”
“그게 무슨…….”
“그래서 오래 걸린 거야. 쓸 수 있는 게 나이프뿐이라서 그걸로 알을 하나하나 박살 내고, 그 속에 있는 클롭스 역시 하나하나 죽여야 했거든.”
아직 반도 못 끝냈어. 청호가 일주일 내내 가야 할 것 같다며 혀를 찼다.
시윤의 머리가 갸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EMP야 전쟁 중에 흔히 사용되는 것이다. 기계가 멈추는 것도 방사능 수치가 매우 높으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근데 에스퍼가 어빌리티를 쓰지 못하다니. 한둘만 그런 게 아니고 부대 전체가 그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시윤의 상식에선 그랬다.
“기계도 작동을 안 하는데, 어빌리티도 쓸 수 없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대체 사화산에 뭐가 있길래…….”
“글쎄. 뭐가 있는진 모르지만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인간이 한 손으로 건물을 들어 올리고, 입으로 불을 쏘고, 물속에서 숨까지 쉬는데.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
시윤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퍽 무서운 말이었다. 당연하고 절대적이던 이치가 언제든 까뒤집힐 수 있다는 거였으니까.
청호의 말을 곰곰이 되씹던 시윤이 미약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네요. 그럼, 어, 혹시, 내일은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턱을 안으로 바짝 당긴 시윤이 흘끔 청호를 살폈다.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무릎을 긁어 댔다. 청호가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래도 오늘 아침엔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 줬었는데. 그새 마음이 변했으려나.
“…….”
아니나 다를까. 청호의 눈이 가늘게 구겨졌다. 부정을 예상한 시윤이 속사포처럼 변명 같은 문장을 줄줄이 내놓았다.
“클롭스가 새끼가 아닌 알을 낳기 시작했다면 큰일입니다. 새끼와 달리 알은 한 번에 수천 개까지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태어난 클롭스 능력이 전파 교란과 능력 무력화라면 더 큰일이고요. 얼른 연구해서 약점을 찾아야 합니다.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조사만 할게요. 위험한 행동도 하지 않을 거고, 어…… 또…….”
“그래. 같이 가.”
청호는 참으로 너그러이 허락을 ‘하사’했다. 시윤에게는 정말 하사였다.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런데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내일은 그와 함께 출정할 수 있다. 죽었던 식욕이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포크를 쥔 시윤이 입에다 음식들을 마구 욱여넣기 시작했다.
동그랗고 하얀 볼이 통통하게 부풀었다. 그 안에 차오른 게 고기인지 설렘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런 시윤을 보며 청호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시윤은 양치에 세안까지 마치고도 구석 의자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일출을 앞둔 깊은 새벽. 이만 자야 하는데. 너무 피곤한데. 어제도 긴장해서 잠을 설치고, 오늘도 신경을 한껏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눈알이 빠질 것 같은데.
도무지 침대에 누울 수가 없었다. 침대 깊숙이 걸터앉은 청호가 저를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꼴깍꼴깍 자꾸 침이 넘어갔다. 난로가 있어 막사 가득 따뜻한 온도가 넘실거리거늘, 손과 발이 시렸다.
“채 준위.”
손바닥만 한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던 청호가 시윤을 불렀다.
“……네?”
시윤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거기서 밤새우게?”
청호의 낮은 목소리엔 미미하게 아니꼬움이 깔려 있었다. 놀란 시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요, 아니요. 자야죠.”
저보다 청호가 곱절은 더 피곤할 텐데. 눈치 없이 시간을 끌었다. 시윤이 얼른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호기로이 자리를 잡긴 했으나 청호가 가로로 앉아 있는 탓에 안쪽에 누워야 할지, 바깥쪽에 누워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옆으로 누워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우물쭈물 이불과 베게만 뒤적거리던 시윤이 한숨과 함께 청호처럼 침대에 앉았다. 등 뒤로 벽을 두고 방을 바라보는 자세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익숙한 정적이었다. 청호와 함께 있는 시간의 8할은 정적이 채우니까. 근데 오늘따라 유달리 불편했다. 머리 한 귀퉁이에 맴돌고 있는 청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일주일 동안 나와 친해지도록 해. 그게 이번 작전에서 네가 맡은 임무야.’
청호가 옆에 있으니, 그 임무를 진행해야 하는데. 영 엄두가 안 났다. 그러잖아도 사회성이 모자라 친구 하나 없거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청호와 친해지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시윤은 열과 성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대화의 물꼬를 터 볼까. 아니,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그냥 잘까. 근데 자자는 말을 어떻게 하지. 불을 끄자고 넌지시 돌려 말할까.
그러다 번뜩 좋은 생각이 들었다.
“대장님.”
“응.”
“손……잡으실래요?”
시윤이 청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킨십만큼 유대를 쌓기에 좋은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의 스킨십이라면, 더욱 대단한 효과를 낼 터였다.
비록 모건의 허락을 구하지 못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전투 중에 손잡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
청호가 제 앞에 놓인 시윤의 손을 내려다봤다.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손이 고요히 그를 유혹했다. 청호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 수고했는데. 피를 뒤집어써서 짜증도 났는데.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될 것 같았다.
청호가 천천히 시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살짝 가져다 댔다. 혹 갑작스러운 접촉에 시윤이 까무러치면 안 되니까. 다행히 시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제 손을 얽어 갔다. 물갈퀴 같은 손가락 이음새가 마주 닿고, 손바닥이 겹쳐졌다. 시윤의 손이 청호의 커다란 손에 온전히 먹혀들어 간 것이다.
청호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손끝부터 봄바람이 밀려왔다. 오늘은 어빌리티를 거의 쓰지 않아 크게 아프지도 않았는데, 그저 좋았다.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스몄다.
시윤이 환희를 즐기는 청호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하등 특별할 거 없는 퓨어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런 간단한 행위만으로 청호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곱씹을 때마다 뿌듯하고 기뻤다.
시윤이 조금 더 세게 청호의 손을 잡았다. 손목이 찌릿찌릿하고 팔뚝이 아렸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자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어 왔다. 보드랍고 매끈한 살결이 참 좋았다.
“채 준위.”
“예?”
“오늘 말이야.”
“네.”
“내가 늦게 와서 걱정했어?”
“……네?”
“걱정했냐고. 내 걱정.”
눈꺼풀을 반쯤 내린 청호가 평소보다 느린 어투로 물었다.
“예. 물론 했습니다.”
시윤이 별 고민 없이 긍정했다. 실로 걱정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다친 건 아닌가. 제가 없는 곳에서 폭주라도 온 건 아닌가. 무수히 많은 걱정을 했다.
“좋네.”
거짓 하나 없는 대답에 청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닿은 손이 조금 더 꽉 아물렸다. 그에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저는 걱정하는 처지로서 좋지만은 않습니다.”
“그래?”
“그럼요. 종일 마음 졸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말입니다.”
시윤이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청호가 나지막이 목젖을 일렁이며 웃었다.
“너무 억울해하진 마. 나도 네 걱정 많이 했거든.”
“네? 왜요?”
“글쎄. 이유 없이 걱정되던데.”
“저 막사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려하실 일 없었어요.”
시윤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정말 가만히 있었는데. 혹여 폐가 될까, 짐이 될까, 막사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는데.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우려가 아니고 걱정. 막사에 혼자 있는 게 심심하진 않을까. 점심은 먹었나. 저녁은 먹었나. 전장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홀로 무섭진 않을까. 그런 걱정.”
청호가 시윤의 손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퍽 낯간지러운 문장의 연속이었는데 지나치게 뻔뻔했다. 애꿎은 시윤의 귓바퀴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대체 언제쯤 청호의 말투에 적응하려나.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는데, 청호가 가까운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과거에 비하면 시답잖은 걱정이지. 전에는 오늘 밤에 죽으면 어쩌나,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뜨면 어쩌나, 심장이 녹으면 어쩌나, 폭주해서 포스를 통째로 날려 버리면 어쩌나, 그런 걱정뿐이었거든.”
“…….”
“다 네 덕분이야. 내 고통이 가벼워진 것도. 걱정이 가벼워진 것도.”
청호는 자주 이랬다. 자주 이렇게, 틈만 나면 시윤의 존재를 감사하곤 했다. 시윤은 그게 기쁘면서도 안쓰러웠다. 여태 얼마나 홀로 아팠으면 로봇처럼 무뚝뚝하고 정 없기로 소문난 청호가 이러나, 싶었다.
시윤이 엉덩이를 움직거려 청호의 옆에 바짝 붙었다. 팔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너무 가까우면…… 아플 텐데.”
청호는 입으로는 걱정을 말하면서도 시윤을 밀어 내지 않았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시윤이 보란 듯이 팔뚝을 찰싹 붙였다. 제법 도톰한 옷을 입고 있음에도 청호의 힘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꼭 전기를 내뿜는 난로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으나 참을 만했다. 아무렴. 키스에 비하면 아픈 수준도 아니지.
“괜찮다고?”
청호가 재차 물었다.
“네. 정말 괜찮습니다.”
시윤이 거듭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청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표정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시윤이 덩달아 눈살을 찌푸리는데, 청호가 팔을 뒤로 뻗어 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윤이 속절없이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갔다.
“으음…… 좋아.”
시윤을 껴안은 청호가 짙게 호흡했다. 반면 시윤은 목을 잔뜩 움츠린 채 굳었다. 아픔보다는 당황이 먼저였다. 포옹이라 하기엔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자세였다.
아무튼 몹시 불편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불편했다. 싫거나 불쾌하진 않았다. 다만 뺨에 닿는 청호의 가슴팍과, 이마 위로 흩어지는 그의 숨소리가 너무 적나라해서 배 속이 다 간질거렸다.
시윤이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는데, 청호가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긴장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의식적으로 허리를 편 시윤이 그 손길에 맞춰 엉킨 호흡을 정리했다.
그쯤, 청호가 못다 끝낸 대화를 이었다.
“너는 왜 날 걱정해? 내가 반려 에스퍼라서? 아니면 내가 불쌍해서? 그것도 아니면, 늦게 나타난 게 미안해서?”
“어…… 사실 제가 가이드가 되기 전부터 청호 대장님 걱정은 쭉 해 왔습니다. 대장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포스의 안전이 위험해지니까요.”
“…….”
“저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대장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시윤이 내놓은 이유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청호의 미간이 모나게 구겨졌다. 이상하게 배알이 꼬였다. 뭐든 부수고, 뭉개고 싶었다. 손가락이 자꾸 안쪽으로 말렸는데, 그랬다간 시윤의 어깨가 바스라질 수도 있어서 간신히 참아 냈다.
“그게 다야?”
“네?”
“걱정하는 이유가 그게 다냐고. 내가 SS급이라서 많은 클롭스를 죽이니까. 내가 없으면 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걱정하는 거냐고.”
그 말에 시윤이 끔뻑, 끔뻑 눈꺼풀을 움직였다. 어쩐지 노기가 끓는 청호의 목소리에 혀가 뻣뻣이 굳었다. 다행히 시윤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청호가 왜, 어떤 부분에서 언짢음을 느끼는 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시윤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그런 걱정이랑은 조금 다릅니다.”
“뭐가 어떻게 다른데.”
청호가 집요하게 캐물었다. 허나 시윤은 되레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청호가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래돼서 케케묵은 먼지 냄새도 나고, 강렬한 피비린내도 묻어 있고, 눈물도 섞여 있는 이유였다. 그저 나라의 영웅이라 걱정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이야기할 순 없었다. 청호가 저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테니까.
잠시 텅 빈 눈동자로 청호를 올려다보던 시윤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동경합니다. 많이.”
문맥에 어긋나는 대답이었으나, 나쁜 답은 아니었다. 사실 대답보다는 시윤이 꼬물거리며 청호의 품을 파고든 게 효과가 좋았다.
직선이 죽죽 그어져 있던 청호의 얼굴이 한층 부드럽게 풀렸다. 따뜻한 햇살을 품에 안은 것 같다. 평생 쥐어 본 적도 없는 곰 인형을 껴안고 있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만큼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반면, 시윤의 얼굴은 비라도 맞은 듯, 침울하게 젖어 있었다.
다음 날 시윤이 눈을 떴을 때, 청호는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덕분에 누운 채로 아침 인사를 주고받는 어색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시윤이 막사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오른팔을 주물렀다. 어제 청호와 손을 잡았던 쪽이었다. 근육은 저릿저릿하고, 피부는 따끔거리는 게 한동안 고생하겠구나, 싶었다.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킨 시윤이 어젯밤을 반추했다. 어쩌다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청호의 가슴팍에 안겨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긴 했는데. 혹 잠든 게 아니라 까무러친 걸까 봐 신경이 쓰였다.
분명 청호가 봤을 텐데. 간단한 스킨십으로 기절하는 걸 보고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는지 걱정이다. 꼭 자신이 파렴치한이라도 된 것 같았을 테니까.
시윤이 손목을 꽉꽉 주무르며 고통을 해소하고 있을 무렵,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윤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얼굴도 벅벅 비벼 잠기운을 털어 냈다. 아니나 다를까. 품 안 가득 무언가를 든 청호가 천막을 걷고 들어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새삼 전장에서 늘어지게 자 버린 게 민망했다.
“응.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너그러운 청호는 그런 시윤을 꾸짖지 않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들고 온 것을 우르르 쏟아냈다.
“아, 충분히 잤습니다.”
시윤이 나지막이 대답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곳엔 공통분모로 엮이지 못하는 것들이 규칙 없이 뒤섞여 있었다. 사과, 방탄복, 나이프, 샌드위치, 군용 우비, 껌……. 시윤이 그것들을 눈동자로 훑었다.
“아침은?”
청호가 사과와 샌드위치를 동시에 내밀며 물었다. 시윤은 버릇처럼 생각 없습니다, 하고 말하려다가 오늘 할 일이 많음을 상기하곤 샌드위치를 받았다. 두꺼운 빵 사이에 어떤 고기로 만든 것일지 모를 햄이 끼워져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시윤이 샌드위치에 둘둘 말린 랩을 뜯는데, 청호가 이번엔 나이프를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손잡이와 칼 전체가 검은색이었다. 칼날은 매우 날카롭게 손질되어 있었고, 칼등엔 오돌토돌한 돌기가 나 있었다.
시윤이 한 입 채 베어 물지 못한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그것을 건네받았다. 눈뜨자마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나이프 어떻게 쓰는지 알아?”
청호가 물었다.
“어…… 이렇……게요?”
시윤이 나이프 손잡이를 바투 쥐고 손을 앞뒤로 움직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다.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윤은 살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다 군에 입대한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너도 잘 알겠지만, 클롭스 가죽은 아주 질겨. 그렇게 쥐고 찌르면 칼날이 들어가지 않고 튕겨 나올 거야. 그럼 순간적으로 손이 칼날로 미끄러지게 돼. 손바닥이 죄 찢어지겠지.”
“아…….”
“그러니까 이렇게 쥐어.”
청호가 나이프를 뒤집어 다시 시윤의 손에 들려 줬다. 손잡이가 위로, 칼날이 아래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렇게 쥐면 아래에서 위로 찌르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기 때문에 힘을 조금 더 실을 수 있어. 만약 손이 미끄러지더라도 새끼손가락 정도만 다치니까 괜찮아.”
시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위에서 아래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잡는 방법만 바꾸었을 뿐인데 훨씬 빠르게, 또 가볍게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네가 칼 쓰는 일은 없게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알려 주는 거야.”
“네.”
“칼을 쓰면 피가 많이 튀어. 클롭스 피는 냄새도 많이 나고 씻기도 힘드니까, 우비를 쓰도록 해. 너뿐만이 아니고 전 병사들 다 쓰고 갈 거야.”
“네.”
“방탄복은 필수고. 최대한 가벼운 거로 골라 왔는데, 한번 입어 봐.”
끝없이 이어지는 청호의 말에 시윤이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살풋 구겨진 그의 미간에 걱정이 가득했다. 시윤은 그 걱정을 이해했다. 연구실에 처박혀 있던 애송이를 전장에 데려가려니 우려되는 게 얼마나 많겠나.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윤이 빙긋 웃으며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 *
에로아스 부대는 목적지의 반 정도까지는 지프차로 이동 후, 나머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시윤이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넋 놓고 바라봤다.
시윤이 평생을 살아왔던 포스는 그다지 크지 않다. 물론, 나라라고 명명할 정도니 아주 작진 않지만 지구의 유일한 나라치고는 작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크면 관리와 방어에 힘드니까. 또 인간이라는 종(種)도 몇 남지 않아서 큰 부지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거기다 나라 주위로 아주 높고 두꺼운 벽이 있어 이런 평야는 일평생 처음 봤다. 파란 하늘.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풀들. 듬성듬성 떠다니는 구름. 핵전쟁의 피해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자연 그 자체.
과거에는 ‘몽골’이라고 불렸다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런 평야를 마주하며 살았겠구나, 싶어 부러웠다.
점점 창에 들러붙던 시윤이 끝내는 이마를 처박았다. 바깥 공기에 덩달아 차가워진 유리가 얼음 같았지만 풍경이 너무 환상적이라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윤의 이마가 새빨갛게 얼 때쯤, 차가 멈췄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내렸다. 시윤도 청호를 따라 내렸다. 기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였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몸이 좌우로 들썩였다.
한껏 몸을 움츠린 시윤이 둘러멘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샘플을 채취할 병을 비롯해 간단한 연구용품들이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이 불가능하니 직접 가져가야 했다. 알 하나를 통째로 가져가면 좋을 텐데. 추후 분위기를 살피다 청호에게 넌지시 말해 봐야겠다.
병사들이 청호의 앞에 열 맞춰 섰다. 청호가 함께 온 지질학자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이 병사들에게 종이를 하나씩 나누어 줬다. 보통 때라면 홀로그램으로 전송했을 텐데, 기계가 불통이라 어제 급히 포스에서 공수해 온 인쇄물이었다.
인쇄물에는 화산의 구조가 그려져 있었다. 어제 다녀온 병사들의 의견을 조합해 만든 대략적인 지도였다.
청호가 검지로 인쇄물을 가리키며 팀마다 맡을 구역을 나누었다. 그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청호 팀 역시 출발했다.
사화산은 멀었다. 육안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보이는데,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한 시간쯤 걷자 군화가 무겁게 느껴졌다. 걸치고 있는 방탄조끼 역시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메고 온 가방은 원수 같았다.
그러나 사화산은 여전히 멀었다. 그 후로 한 시간을 내리 더 걷고 나서야 화산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쯤, 시윤을 비롯한 부대원들은 땀범벅이었다. 지프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추웠는데. 화산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리만큼 기온이 올라갔다.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라도 한 듯, 얼굴이 발갛게 익을 정도였다.
하지만 행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목적지는 화산 내부다. 화산 중턱으로 올라가서, 화구를 통해 화산관까지 들어가야 했다. 여태는 평지를 걸어왔는데. 이제는 오르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다른 것보다 몸을 뒤덮은 우비가 끔찍했다. 한증막에 갇힌 기분이었다. 시윤이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저 멀리 청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도 땀을 흘리고 있을까. 오감에 무뎌서 추위도 못 느낀다고 했는데. 그럼 더위에도 무디려나. 별것이 다 궁금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이 후들거리고 허벅지가 덜덜 떨려올 즈음 컴컴한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청호가 오른쪽 주먹을 들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투입 전 정비.”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정비!”
간결히 외친 병사들이 저마다 무기와 전투복을 가다듬었다. 물을 마시거나, 전투모를 다시 썼다. 크기가 제각각인 나이프 또는 도끼, 그것도 아니면 장검을 꺼내기도 했다.
시윤 역시 허리춤을 매만졌다. 이른 아침, 청호가 준 나이프 손잡이가 잡혀 왔다. 그러자 행군의 고단함으로 잊고 있던 긴장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알음알음 주워듣기로는 숨 쉬는 시체와 다름없는 알이라는데. 그래도 클롭스는 클롭스라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윤이 침통한 낯으로 미지의 적을 가늠하고 있으니 청호가 다가왔다. 그가 수통을 내밀었다.
“물 마실래?”
“아, 제 거 있습니다.”
시윤이 보란 듯이 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미적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힘들어?”
“아니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땀을 너무 많이 흘리는데.”
눈가를 일그러트린 청호가 손등으로 시윤의 땀을 닦아 냈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청호에 조금 적응한 시윤이 씩 어색하게 웃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청호 역시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게, 기온이 높긴 높은 모양이었다. 청호가 더위를 느낄 정도라 생각하니 어쩐지 더 더워졌다. 시윤이 연거푸 물을 들이켰다.
“그 꼴은 뭡니까?”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시윤이 움칠 어깨를 떨었다. 혹여 저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서.
눈알만 흘끔 돌려 목소리를 따라가자 땀에 젖은 알렌이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앞에는 코에 빨래집게를 낀 딜런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있었다.
빨래집게를…… 코에……. 영 이상한 몰골이었다.
“냄새가 고약한 걸 어떡해.”
딜런이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알렌의 만면 가득 혐오가 차올랐다.
“제발 대위로서 품위를 지키십시오.”
알렌이 딜런의 빨래집게를 확 뽑아 버렸다. 딜런이 악 소리를 지르며 코를 부여잡았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바짝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시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알렌과 딜런은 그 후로도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이 얼마나 유치한지. 꼭 어린아이들 같았다. 그들이 대위와 중위라는 계급장을 달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시윤도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 때.
“다들 일어나. 가자.”
청호가 병사들을 모았다. 모두가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