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6)

변곡점(變曲點)

넓고 좁은 길이 규칙 없이 이어졌다. 열댓 명이 동시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넓은 곳도 있었고, 납작 엎드려 기어가야 할 만큼 좁은 곳도 있었다. 이미 체력 고갈이 상당한데, 호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덥고, 몸 여기저기를 긁고 눌러 대는 돌부리는 아프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나 안 해! 집에 갈래! 라는 말이 입천장을 살살 간질여 댔다. 시윤이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와중에도 눈치 없는 땀방울이 삐질삐질 눈앞을 가렸다. 그걸 신경질적으로 벅벅 닦아 내는데, 알렌이 다가왔다.

“힘드십니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많이 힘드시면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멀리 온 건 아니니 돌아가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하십시오.”

시윤이 제발 그리해 달라는 듯,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알렌의 눈썹이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었다.

“대장님이 안 좋아하실 텐데요.”

“예? 뭘 말입니까? 중위님이 준위인 제게 말 놓는 거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시윤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군대에서 계급만큼 절대적인 게 없다. 시윤은 알렌이 여기서 당장 자신의 신발을 핥으라 명령해도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그러니 말을 편하게 하는 것쯤이야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

“음…… 안 좋아하실 겁니다. 저는 대장님한테 미움 사기 싫지 말입니다. 그거 되게 무서운 일이거든요.”

알렌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알렌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길이 많이 험하죠? 평소라면 그냥 화산 자체를 날려 버렸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애들 어빌리티면 알 수천 개쯤이야 한 시간도 안 걸리지 말입니다. 근데 어빌리티를 못 쓰니……. 이런 건 십수 년 군 생활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라 긴장됩니다.”

“……중위님도 긴장이 되십니까?”

“맨손으로 전투 나가는 거랑 다름없으니까요. 아, 뭐. 진짜 맨손으로 나가는 중이긴 하네.”

알렌이 텅 빈 두 손을 보며 킥킥거렸다. 긴장된다는 말과 달리 만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어정쩡하게 미소 지었다.

알렌은 말이 많았다. 시윤이 이렇다 할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여도 혼자 수다를 떨어 댔다. 대부분은 딜런을 욕하는 거였고, 가끔 비효율적인 군대의 시스템을 비난하기도 했으며, 전투화를 비롯한 전투복의 질이 영 별로라는 말도 했다.

시윤은 그 모든 것들을 꽤 흥미로이 들었다. 반평생을 연구실에 처박혀 있던 저는 꿈에도 몰랐던 것들이라.

알렌과는 그 후로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저 막연히 걷는 것보다 말이라도 하니 덜 힘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인물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든 물어봐야지, 물어봐야지, 미루다가 여태 답을 찾지 못한 거였다.

“저…… 중위님.”

“네.”

“혹시 사이먼…… 톰슨이라고 아세요? 중위 계급 에스퍼인데…….”

시윤이 흘끔흘끔 알렌의 표정을 살폈다. 일렁이는 램프 빛을 따라 알렌의 얼굴이 보였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했다. 역시 모르나. 청호의 최측근인 폴만 아는 건가. 시윤이 아니라고 질문을 철회하려 할 때였다. 알렌이 비죽 입술을 뒤틀었다.

“아, 채 준위한테 손댔다가 혀 뽑혀 죽은 그 돼지 새끼?”

“…….”

알렌의 반응은 언젠가 사이먼에 대해 물었을 때 폴의 반응과 같았다.

“왜요?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죽을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대장님이 막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지고 그런가?”

알렌은 단숨에 시윤의 의중을 꿰뚫어 봤다. 빙글빙글 웃는 낯인데 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윤이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어버버 혀만 씹는데, 알렌이 친히 설명해 줬다.

“사이먼은 지나치게 대장님을 동경했습니다. 대장님처럼 되고 싶어 했고, 그래서 훈련도 열심히 하고, 전투마다 공도 세웠지 말입니다.”

“…….”

“근데 그게 과해지더니 나중엔 자기랑 대장님을 동일시하는 그런 정신병이 생겼지요. 대장님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우두머리인 양 구는 게 꼴같잖긴 했지만, 대장님이 묵인하고 넘어가시니까 우리로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

“근데 이 새끼가 어느 날은 지 가이드 목을 땄습니다.”

“……예?”

“대장님한테는 가이드가 없는데, 자기한테는 있으니까. 그게 다른 걸 참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

시윤이 뚝, 턱을 떨어트렸다. 미친놈이었구나. 포스 내에 살인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거기다 자기 가이드를 죽이다니.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데.

어쩐지, 그래서 제가 발현하고 반려 에스퍼를 찾을 때 매칭하러 오지 않았구나. 이미 반려 가이드가 죽어 버린 상태니까.

시윤이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알렌은 잠시 그가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용납이 안 되거든요. 사이먼의 가이드 역시 에로아스 부대 소속이었으니까. 사이먼은 에로아스의 병사를 살해한 게 되는 거예요.”

“…….”

“대장님은 고민했어요. 어쨌든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 온 동지이니 처리 방식에 신중하고 싶으셨겠지요. 근데 그때, 그 미친놈이 또 일을 쳤어요.”

“…….”

“대장님 명령이라며 병사를 모아다가 출정해 버렸거든.”

“……예?”

“지가 공을 세우면 진짜 대장이 될 줄 알았나 보더라고요. 그게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닌데.”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딱 반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

“대장님은 우리가 죽는 걸 아주, 아주 싫어해요. 본인 책임이라 생각하시거든. 근데 웬 등신 같은 새끼의 같잖은 아집으로 수십 명이 죽고 다쳤으니 오죽 화가 나셨을까. 당장 죽여도 모자라지. 근데 그놈이 복귀하자마자 다른 부대로 옮겨 달라 신청을 했더라고요. 다른 부대에 소속되어 버리면, 청호 대장님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통제권이 상실되니까.”

“…….”

시윤은 비로소 청호가 사이먼을 왜 그렇게 단숨에 죽여 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이먼 때문에 죽은 이들이 많았구나. 사형. 그건 분명 현명한 판결이었다. 법원에 갔어도 똑같은 선고가 내려졌을 터였다.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가이드가 없는데. 몸이 죽어 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졌겠지요. 그 와중에 대장님께 가이드가 생겼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겠죠. 알음알음 듣기론 자기랑 청호 대장님이랑 한날한시에 죽을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던데.”

“…….”

“채 준위의 등장으로 대장님과 평행을 이루던 사이먼의 세계가 완전히 어그러져 버린 겁니다.”

“……그걸 버티지 못하고 제 발로 죽으러 온 거군요.”

시윤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참, 별사람이 다 있다. 그 때문에 청호도 꽤나 고생했겠구나, 싶었다.

“마지막 숨을 대장님이 거둬 주셨다고 발기할 새낍니다, 그 새끼는.”

알렌이 다시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시윤이 애매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사연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되레 청호가 나쁜 사람이 아닐까, 의심했다. 거기다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했지.

당시를 상기하자 우둘투둘한 동굴 벽에다 머리를 찧고 싶었다. 청호에게 말도 못 하게 미안했다. 어찌 사과를 전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자욱한 악취가 갑작스레 콧잔등을 후려쳤다. 퀴퀴하고 시큼한 게, 정말이지 끔찍한 냄새였다.

시윤이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전신의 근육이 수축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는 태어나 처음 맡아 봤다. 뙤약볕에 고기가 썩은 것 같기도 하고, 날파리가 득실득실하게 꼬인 과일에서 날 법한 냄새 같기도 하고, 온갖 폐수가 다 모인 하수구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것들을 떼로 뭉쳐 놓은 냄새였다.

어제, 복귀한 청호와 병사들에게서도 역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짙지는 않았다. 딜런이 빨래집게를 코에 끼운 걸 통감할 정도였다.

이 냄새를 버티고 수 시간 동안 머무를 수 있을까, 걱정하는 찰나 전투화 아래로 철퍽거리는 질감이 느껴졌다. 시윤이 얼른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붉은 액체가 바닥 여기저기에 난자해 있었다. 클롭스의 살로 추정되는 미끈한 덩어리도 있었고, 쥐색의 바스러진 껍데기도 있었다.

“클롭스 피예요. 껍데기는 알.”

알렌이 묻지 않은 질문에 답했다.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클롭스는 연구용으로 또는 신병들의 훈련용으로 쓰기 위해 포스에 숱하게 잡혀 온다. 산 채일 때도 있고, 시체일 때도 있다. 근데 그들의 피와 살 냄새가 이다지도 역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시윤이 전달받는 건 피부 조직이나, 앰플에 담긴 소량의 피 정도였으니까.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피는 더 많아지고, 그에 비례해 냄새 역시 짙어졌다. 나중엔 전투의 긴장이고 뭐고, 머리가 아프고 눈이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악취에, 더위에,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에 정신이 다 혼미할 때였다. 앞서가던 병사들이 멈춰 섰다. 시윤 역시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땅만 응시하던 눈을 무심코 들어 올렸다.

“아…….”

일순, 호흡이 멈췄다. 도착한 곳은 아주 넓었다. 여태 걸어온 동굴과 이어진 곳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머리 위로 끝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딛고 선 땅 역시 광활했다.

더군다나 그 공간을 가득 메운 알들이 경악스러울 만큼 많았다. 시윤의 몸뚱이보다 커다란 알 수천, 아니, 수만 개가 벽을 타고 화구까지 빼곡히 박혀 있었다. 어제, 부대가 자정을 넘어 복귀했던 만큼 그 개수가 상당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악취도, 피로도 잊은 시윤이 입을 벌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청호에게 충분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두려움 역시 들었다.

여기 있는 클롭스가 모두 부화한다면 단숨에 몇만 대군이 만들어진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직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에스퍼의 어빌리티를 무력화시키고 기계를 고장 내는 능력을 갖췄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차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건, 어딘가에 이런 장소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저 앞에 선 청호가 병사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명령했다. 사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어제도 왔던 곳이고. 적은 죽은 상태와 다름없고. 그래서 알을 깨고 목을 노리란 말만 덧붙였다.

우렁차게 대답한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불을 피웠다. 주위가 밝아질수록 구석에 따개비처럼 붙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알들의 존재가 드러났다. 각기 다른 무기를 든 병사들이 알을 깨기 시작했다. 퍼걱거리는 소음이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출발하면서 헤어졌던 다른 부대는 천장에서 루프를 타고 내려오며 알을 깨고 있었다. 그 덕에 클롭스의 피가 하늘에서 비처럼 내렸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제 인생 처음으로 클롭스를 죽일 기회였다. 극도의 긴장감과 묘한 흥분감이 사지 끝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가 지척에 있는 알로 발을 움직였을 때였다.

“채 준위.”

익숙한 저음이 시윤의 발목을 옭아맸다. 파드득 몸을 떤 시윤이 고개를 돌렸다.

“예?”

“이리 와.”

청호가 자신 쪽으로 손을 까딱였다.

“아, 네!”

시윤이 잘 길든 강아지처럼 후다닥 그에게로 뛰어갔다. 중간에 오목하게 파인 홈을 보지 못해 삐끗거리는 바람에 청호의 미간이 구겨지긴 했으나, 아무튼 금세 그의 앞에 도착했다.

“혹시 모르니까 옆에 붙어 있어.”

청호의 명령에 시윤이 고개를 주억였다. 클롭스를 죽일 기회와는 멀어졌지만, 어째서인지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심됐다. 저는 아직 살육이 두려운 애송이인 모양이다.

청호는 매우 빠르게 알을 처리해 갔다. 칼등으로 알의 불룩한 부분을 쳐 깨뜨리고, 구멍 사이로 칼날을 꽂아 단숨에 클롭스의 목을 그었다. 정확히 동맥이 끊기고, 피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어찌나 세찬 핏줄기인지. 시윤에게까지 피가 튀었다.

기겁한 시윤이 벅벅 얼굴을 닦아 내는데, 청호는 살짝 눈가만 구기고 바로 다음 알을 부쉈다. 꼭 기계 같은 몸놀림이었다.

시윤은 그 일련의 행동들을 판타지 영화라도 보듯, 넋을 잃고 구경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청호가 하니 남달랐다.

그렇게 청호가 알을 쉰 개쯤 깨트렸을 때쯤, 시윤은 뒤늦게 자신의 임무를 상기했다. 비록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저는 클롭스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 환경과 알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시윤이 크게 주위를 훑었다. 알이 있으면, 모체가 있어야 한다. 알을 낳았든, 생산했든, 찍어 냈든 알을 탄생시킨 무언가가 있어야 한단 말이다. 근데 눈에 띄는 게 없었다. 마치 누가 이곳으로 알을 옮겨 놓은 것처럼.

근데 옮겨 놓았다기엔, 영 이상하다. 알들이 벽에 박혀 있지 않은가. 누가 다른 장소에서 알을 낳아 이곳으로 옮겼다면 그저 바닥에 차곡차곡 쌓았지, 화구 전체를 두르며 벽에 붙여 놓진 않았을 터였다.

또, 마그마도 없는 사화산 주제에 지나치게 많은 열을 발산하는 것도 께름칙했다.

시윤이 청호가 방금 깨트린 알을 살폈다. 조심히 손을 가져다 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니, 후끈한 게 아니라 뜨거웠다. 장갑을 끼지 않고 있었더라면 그대로 손바닥이 익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열의 발산지가 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열기를 내뿜는 알이 수만 개가 모여 있으니, 주위 기온이 이상하리만큼 치솟았을 만도 했다.

시윤이 바닥에 떨어진 껍데기 조각을 주웠다. 손바닥만 한 껍데기 주제에 꽤 무거웠다. 껍데기 두께는 약 10센티. 퓨어와 다름없는 제힘으로는 주먹으로 내리치고, 발길질해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청호는 대체 이걸 어떻게 칼등으로 마늘 빻듯 깨 버린 걸까. 신기했다.

시윤은 껍데기를 꽤 오래 시간을 들여 살펴봤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여태 알에서 부화한 클롭스는 없었으니까. 아무리 클롭스 연구로 박사 학위까지 딴 시윤이라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시윤이 가방에서 비닐 팩을 꺼내 껍데기를 넣었다.

다음으로는 클롭스를 살필 차례였다.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청호가 죽이고 지나간 클롭스를 바라봤다. 차마 다가가진 못했다. 행여 갑자기 살아나기라도 하면, 벌떡 일어나 제 코라도 물어뜯으면 어쩌나. 겁이 났다.

하지만 진득한 피를 뒤집어쓴 클롭스는 정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좌우로 뒤틀며 클롭스를 살피던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이래선 눈 코 입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저…… 대장님.”

시윤이 벌써 몇 미터나 멀어진 청호를 불렀다. 그리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청호가 시윤을 바라봤다.

“알 하나만 깨 주시면 안 됩니까? 클롭스는 그냥 두시고요. 잠깐 확인만 하겠습니다.”

시윤이 간곡하게 말했다. 혹 청호가 거절하면 어쩌나, 괜히 따라와서는 귀찮게 한다고 꾸짖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러나 청호는 대답 대신 알 하나를 깨고, 껍데기까지 벗겨 주고는 다음 알로 넘어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시윤이 얼른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흐음…….”

시윤이 심각한 낯으로 클롭스를 살폈다. 2미터 가까이 되는 클롭스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끈적한 점액질을 헤쳐 내자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푸른색 가죽. 주먹만큼 커다란 눈두덩. 사마귀와 종기로 뒤덮인 피부. 입 밖으로 삐죽삐죽 나와 있는 커다랗고 둔탁한 이빨. 족히 30센티는 되어 보이는 손톱과 발톱.

시윤은 클롭스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렸다. 부기였다. 이빨과 손톱이 강하긴 하나 그 외 별다른 능력이 없어 하급 클롭스로 분류되는 종이었다.

하지만 이게 왜 알에서 부화하지. 시윤이 부기를 유심히 뜯어봤다. 허나 도드라지는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괜히 손톱도 건드려 보고, 피부도 찔러 보는데…….

“다 봤어?”

청호가 다가왔다.

“아, 예, 뭐 대충…….”

시윤이 어물쩍 대답을 흘렸다. 그가 무언가 발견한 게 있냐 물어볼까 두려웠다. 그래도 이런 쪽 지식은 자신 있었는데. 가이드로서도, 박사로서도 무능력하다고 오해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허나 청호는 와서 부기의 숨통만 단칼에 끊어 낼 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또 다른 알 하나를 깨 줬다.

“이것도 봐.”

“……감사합니다.”

시윤이 씨익 웃으며 그 알로 이동했다. 당연히 부기가 들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이번엔 붉은 닭 머리에 새의 날개를 가진 새끼 바실리스크가 들어 있었다.

시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껍데기와 클롭스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쉽고 답답한 마음에 괜히 날개를 뒤적여 보고, 볏도 찔러 봤지만 건질 게 없었다.

알 앞에 쪼그려 앉은 시윤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아무리 봐도 이곳의 클롭스들은 시윤이 익히 알고 있는 클롭스다. 하급의, 평범하고, 세지도 않은 클롭스. 유일한 특이점이라곤 알인데.

낑낑거리며 바실리스크를 옆으로 밀어 낸 시윤이 알 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껍데기와 점액 등을 세세히 살폈다. 그 순간에는 악취도, 열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시윤은 열의 가득한 박사이자 연구자였다.

그러다 이질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엄지만 한 굵기의 기다란 세포 줄기가 점액 사이에 엉켜 있었다. 시윤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탯줄?

탯줄이 왜 여기에……. 시윤이 두 손으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탯줄은 끝도 없이 끌려 나왔다. 대체 언제쯤 끝이 나려나 싶어 시작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데, 어쩐지 께름칙한 시선이 느껴졌다.

시윤이 무심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눈을 뜬 바실리스크가 특유의 노란 눈알로 시윤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

찰나, 시윤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바실리스크는 눈알이 크다. 주먹만 한 눈알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데, 그것에 맺힌 시윤의 모습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얼굴은 옆으로 펑퍼짐하게 짓눌리고 상체는 한껏 오므라든 게 인간 같지 않았다.

바실리스크는 매우 집요하게 시윤을 바라봤다. 꼭 실험체를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또는 시윤도 모르는 시윤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마법사처럼. 그 시선에 얽매인 시윤은 바위처럼 굳은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 있는 클롭스를 마주하는 게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이 존재가 진정 살아 있는 건지, 살아서 저를 보고 있는 게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바실리스크의 고개는 닭처럼 간헐적으로 앞뒤로 움직였다. 빡빡거리며 닭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시윤만을 바라보는 게 그렇게 소름이 끼쳤다.

시윤은 한참 동안 바실리스크와 대치 아닌 대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바실리스크가 누런색 부리를 시윤의 머리통만큼이나 크게 벌렸을 때였다. 바실리스크의 오돌토돌한 입천장과 시뻘건 목젖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청호를 불러야 하는데. 피해야 하는데. 허리춤에 있는 나이프로 목을 찔러야 하는데. 바실리스크는 부리만 조심하면 되니 얼른 움직이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데.

머릿속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으나, 정작 몸뚱이는 움찔거리기만 했다. 그사이 바실리스크의 부리가 더욱이 가까워졌다. 뾰족한 부리 끝에 이마가 쓸리며 따끔한 통각이 느껴졌다.

그 순간 자신의 머리통이 으적으적 씹히고, 두개골이 깨지고, 뇌수가 터지는 모습이 상상됐다. 잔인하게 죽으면 가족들이 괴로워할 텐데. 찰나, 그런 생각도 했다.

바실리스크의 숨소리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다가왔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

근데 어째 통각이 없었다. 몸을 한껏 움츠리고 있던 시윤이 슬쩍 한쪽 눈만 떴다. 그리고 헉, 헛숨을 집어삼켰다. 바실리스크의 대가리가 여전히 코앞에 있었다. 부릅뜬 눈도 그대로였다. 다만, 입김이나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리 밖으로 혀가 축 처진 것도 이상했다.

“조심해야지.”

정수리 위로 묵직한 저음이 떨어졌다. 시윤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청호가 우직하니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바실리스크의 목이 들려 있었다. 아귀힘으로 목을 으스러트린 거였다. 바실리스크는 찍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윤이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멎었던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며 제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 왔다. 억누르던 호흡을 몰아쉼과 동시에 울컥, 서러움이 치받았으나 여기서 우는 건 너무 등신 같을 듯해 꾹꾹 눌러 내렸다.

“감사……합니다.”

시윤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였으나 희멀겋게 질린 낯과 충혈된 눈이 정상에 한참 못 미쳤다.

“직접 죽이라고는 안 해. 그래도 소리 정도는 질러.”

죽은 바실리스크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청호가 손을 바지춤에 벅벅 문질러 닦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시윤에게 내보였다. 잡고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시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뻗었다. 그런데…….

“어…….”

손목에 무언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미끈거리는 질감, 팽팽한 조임, 따끔거리는 통각. 바실리스크의 알 속에서 봤던 그 탯줄이었다.

탯줄에는 꼭 가시덩굴처럼 비죽비죽한 돌기가 나 있었는데, 기다란 줄에 거머리 수백 개가 달린 듯한 생김새였다. 그것이 시윤의 피부를 파고들고 있었다.

아까는 이런 돌기가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리고 언제. 겁에 질린 상태라 아픔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건 또 뭐야.”

대번에 심각해진 청호가 시윤의 팔꿈치를 확 잡아챘다. 시윤이 모르겠다는 뜻으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이곳은 꼭 다른 세상 같다. 청호도, 저도 모르는 일들이 자꾸 일어났다.

“일단 부대로 돌아가자. 의무병이 같이 오지 않았어.”

청호가 시윤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늘고 하찮은 것이긴 하나 독이 있을 수도 있고, 막 뜯었다가 시윤의 살점까지 뜯겨 나오면 큰일이었다. 모르는 것은 일단 조심해야 한다. 어빌리티를 전혀 못 쓰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니요. 괜찮습니다.”

시윤이 슬쩍 팔을 비틀어 청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살살 탯줄을 떼어 냈다. 크게 아픈 느낌도 없고, 돌기가 박힌 피부가 우그러들거나 색이 변하지도 않았다. 가져가서 더 연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생충이나 거머리 정도로 명명해도 될 성싶었다.

탯줄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박혀 있던 돌기가 뽑히는 게 속이 다 시원했다. 손목에 둘둘 감긴 탯줄을 뗀 시윤이 그것을 지퍼 백에 담았다. 포스로 돌아가면 연구할 게 많다. 아마 모건도 좋아하리라.

시윤이 실없이 웃고 있는데, 청호가 짜증스레 그의 팔을 거머쥐었다.

“피 나잖아.”

그의 말마따나, 시윤의 손목에 생긴 수십 개의 동그란 상처에서 찔끔찔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줄줄 쏟아질 정도는 아니었고, 방울방울 맺힌 정도였다.

“에이,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시윤이 보란 듯이 손목과 손가락을 움직여 보였다. 청호의 미간에 불만이 꼈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벙긋거렸을 때였다. 시윤이 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죽은 바실리스크에게서 여러 개의 탯줄이 기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그것은 깨진 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윤이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따라갔다. 탯줄, 아니, 기생충에 가까운 그것은 알을 타 넘더니 벽 틈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시윤의 눈가가 모호하게 구겨졌다.

벽으로 들어가? 왜? 제 손목에 달라붙었던 거 보면 인간의 피도 먹는 모양인데. 여기 병사가 몇이거늘 먹이를 포기하고 벽으로 들어가? 본능적인 도피라 하기엔 영 께름칙했다.

“대장님.”

“응.”

“이쪽 벽, 조금만 부숴 주시면 안 됩니까?”

시윤이 막 기생충이 사라진 벽을 가리켰다. 청호가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그러더니 별말 없이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아니, 바위를 들어 올렸다. 시윤의 상체와 비슷한 크기였는데, 마치 야구공을 들 듯 가벼이 들었다.

청호가 그것을 그대로 벽을 향해 던졌다. 쾅! 엄청난 파열음이 허공을 찢었다. 바위가 벽에 박혔다. 그 주위로 쩌저적 금이 가더니, 곧 돌과 흙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구 전체를 울리는 굉음에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리고 벽 내부가 드러나는 순간, 모두 경악으로 턱을 떨어트렸다.

벽 속에는 굵기와 길이가 제각각인 기생충이 빼곡했다. 아니, 기생충이 아니라 꼭 내벽 같았다. 이 화산 전체가 누군가의 배 속 같았다는 말이다. 꿈틀거리며 맥동하는 그것들이 무언가를 어딘가로 열심히 전달했다. 방향으로 보아하니, 알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 있는 클롭스들…… 알에서 자라던 게 아니에요. 알이 클롭스를 흡수하고 있던 거죠.”

시윤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 속엔 온통 기생충이 가득했다. 아마 이 화산 전체가 기생충으로 차 있으리라.

끔찍한 광경에 시윤이 주춤주춤 청호의 곁에 붙어 섰다.

“기름, 기름 있나요?”

“있어. 램프 때문에 잔뜩 들고 왔어.”

“저기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세요. 알은 쉽게 불이 붙지 않는 난연재지만, 저것들에는 잘 붙을 거예요.”

시윤의 말에 청호가 가까이 있던 램프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생충들을 향해 던졌다. 파삭거리며 램프가 깨지고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기생충들은 불이 닿자마자 확 쪼그라들었다. 재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병사들이 청호를 따라 램프를 던지거나, 불을 옮겨 붙였다. 여기저기서 화마가 춤을 췄다. 지지대를 잃은 알들이 벽에서 떨어져 아래로 퍼걱퍼걱 추락했다.

바쁘게 눈알을 굴리던 시윤이 청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나가야 해요. 지금 화산은 텅 빈 껍데기이고, 기생충 때문에 형태를 유지하는 건데, 저게 모두 불타면 화산도 무너질 겁니다.”

“그래.”

청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폴, 알렌과 딜런을 비롯한 몇몇을 모은 그가 철군을 명령했다. 명령을 하달받은 그들이 각자의 소부대를 이끌고 화산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그들을 보던 청호가 시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뭐 하나라도 더 가져가겠다고 가방에 이것저것을 주워 담던 시윤이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달음박질쳤다.

사실 청호가 그를 둘러메다시피 하고 달리긴 했지만, 어쨌든 화산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한참을 걸어서 지프차까지 도착하고, 인원을 체크하고, 갑갑한 우비를 벗어 던지고, 자욱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화산을 구경하고, 지프를 타고 부대에 복귀하니 온 세상이 검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이 오늘의 고난을 위로하는 듯했다.

시윤이 비척비척 샤워실로 향했다. 차례를 기다리다 간신히 개인 샤워실에 들어갔는데,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종일 몸을 혹사한 건 태어나 처음이라 버티기가 힘들었다. 샤워하다 말고 그대로 쓰러져 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진득하게 붙어서 잘 씻기지도 않는 클롭스의 피라니.

이를 악문 시윤이 벅벅 팔뚝을 문질렀다.

결국, 샤워하는 데에 무려 한 시간 하고도 38분이 걸렸다.

시윤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막사로 들어왔다. 저와 같이 머리칼이 축축이 젖은 청호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내리고 있었다.

시윤이 반쯤 감긴 눈으로 샤워용품을 정리했다. 아, 청호와 둘만 있게 됐으니 말을 붙여 봐야 하는데. 그와 친해지는 임무가 남았는데. 오늘 채집해 온 것들도 아직 가방에 그대로 있는데. 배도 고픈데. 다 모르겠다. 일단 쓰러져 자고 싶었다.

청호에게 먼저 자겠노라, 말하려 입을 떼는데, 청호가 한발 빨랐다.

“이리 와.”

그가 테이블 맞은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시윤은 반항 없이 그에게로 향했다. 팔다리가 잘려 죽어 가더라도, 청호가 오라면 가야 했다.

시윤이 막 의자에 앉으려는데 의자가 드르륵 청호의 옆으로 움직였다. 몇 번 눈을 끔뻑이던 시윤이 군말 없이 청호 옆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구급상자로 그가 절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 큰 상처도 아니고요.”

시윤이 거절 아닌 거절을 넌지시 내놓았으나 청호는 꿈쩍도 않았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다친 손목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종용이었다. 코로 한숨을 내쉰 시윤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목을 올렸다.

청호는 매우 익숙한 손길로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랐다. 뭐 그리 대단한 상처라고 미간을 구기고 집중하는 게 시윤으로선 퍽 민망했다.

“아프진 않아?”

면봉으로 상처 위에다 연고를 콕콕 바르던 청호가 물었다. 시윤이 고개를 주억였다.

“예. 조금 따끔거리긴 하는데,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좁쌀만 한 상처들이다. 손목을 빙 두르고 있어 거슬리긴 한다만, 이틀만 지나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터였다. 그러나 청호는 꽤 오래 상처를 치료했다. 수십 개의 상처를 하나하나 살피고, 연고를 발랐다.

시윤은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런 청호를 바라보았다. 차분히 내려온 검은 머리칼과, 그 아래로 쭉 뻗은 콧대, 내리깔린 속눈썹이 새삼 신기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곱게 포개진 자신과 청호의 손을 보게 됐다.

뭔가…… 뭔가 허전한데. 뭐지. 내가 뭘 잊고 있지.

눈을 게슴츠레 뜬 시윤이 청호와 자신의 손을 쳐다보다 번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

“왜? 아파?”

청호의 콧잔등이 걱정스레 구겨졌다. 시윤이 어딘가 멍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손이…… 안 아픕니다.”

그 말에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고에는 미미한 마취 효과도 있어. 내일은 아플 수도 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또 발라.”

“아니, 아니요. 상처 말고요. 지금 이렇게 대장님과 손을 잡고 있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작전 중에도 청호의 손을 알게 모르게 여러 번 잡았다. 그때도 아프지 않았다. 모건이 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헌데 지금은 맨손이란 말이다. 평소라면 전기에 감전된 듯 손가락부터 손목 안쪽까지, 심하면 팔뚝에 어깨까지 저릿저릿하게 아려야 했다.

근데 아무렇지도 않다. 느껴지는 거라곤 청호의 단단한 피부와 굴곡 있는 손금 정도가 다였다.

시윤이 조물조물 청호의 손을 매만졌다. 정말 아프지 않은지, 너무 피로해서 오감에 무뎌진 건 아닌지 확인하는 거였다. 청호가 쥐고 있던 면봉을 떨어트린 것도 몰랐다.

“왜 안 아프지? 왜…….”

시윤의 낯이 혼란에 물들었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설마 가이드 능력이 또 떨어졌나. 아예 퓨어가 되어 버렸나. 그래서 청호의 힘을 받아들이질 못하는 걸까.

좌우로 눈알을 굴리던 시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청호가 흠칫 턱을 안으로 당겼다.

“……왜 그래?”

“지금 뭔가…… 느껴지십니까?”

“뭐가 느껴져?”

“가이드랑 접촉할 때 발생하는 상호 작용 말입니다. 힘이 진정되거나, 마음이 편안해진다거나, 그런 거요.”

“물론. 너랑 닿아 있는데 그걸 느끼지 못할 리가.”

청호가 두 손으로 시윤의 손을 감싸 쥐었다. 시윤과 스치는 피부마다 개운해졌다. 지금 크게 고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좋았다. 억세게 엉켜 있던 근육이 나른히 풀리고, 핏줄을 할퀴며 돌던 피가 유순해졌다.

이다지도 거대한 감각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근데 왜…… 저는 아프지가 않죠?”

시윤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시윤에게 변화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죄 없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시윤이 청호에게 내주었던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가방을 뒤져 홀로그램 바를 꺼내 모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동그란 기계도 꺼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피를 뽑아 모건에게 정보를 보내는 그 기계였다.

“…….”

갑작스레 분주해진 시윤을 바라보던 청호가 텅 빈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쉽다. 시윤과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진 청량함이 말도 못 하게 아쉬웠다.

허나 시윤은 청호의 상태가 어떠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바실리스크에게 머리통이 뜯길 뻔할 때만큼이나 두려웠다. 이 등신 같은 몸뚱이에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가늠조차 안 됐다.

모건이 전화를 받길 기다리며, 시윤은 기계에다 엄지를 짓이겼다. 따끔거리는 통각이 느껴지더니 자그마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여전히 해석할 수 없는 수식들이 차르륵 줄을 이었다. 그쯤, 모건이 전화를 받았다.

―채 준위?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테안경을 쓴 모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게 아직 연구실인 모양이었다.

“채혈 정보 보내겠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인사치레를 생략한 시윤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가 채혈 기계 위로 뜬 홀로그램을 모건에게로 전송했다.

―지금? 왜? 무슨 일 있어?

모건이 눈살을 구겼다. 콧잔등 위에 얹혀 있던 안경이 살짝 들썩였다. 그 질문에 시윤의 눈가가 서럽게 어그러졌다.

“청호 대장님과 손을 잡았는데…… 아프지가 않습니다.”

―안 아프다고?

“예. 정말, 하나도 안 아픕니다.”

―…….

모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호와 손잡는 것에 큰 고통을 느끼던 시윤이었는데. 포옹엔 쓰러지기도 했었고. 키스는 코피를 줄줄 쏟으며 까무러쳤었지.

근데 갑자기 아프지 않다니. 시윤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정확히는 시윤의 신체에 어떠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유야 뻔했다. 어떤 식으로든 청호와 충돌했기 때문이겠지. 청호는 시윤의 변곡점(變曲點)이니까.

모건의 입매가 삐뚜름히 뒤틀렸다.

―내가 스킨십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곤조곤한 꾸지람에 시윤의 만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젯밤, 청호와 손을 잡으면서 모건의 경고를 떠올리긴 했으나 무시했다. 전장까지 와서 반려 에스퍼의 손조차 못 잡아 주는 건 직무 유기인 것 같아서.

“아, 그게…….”

시윤이 변명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채 준위가 조금 다쳐서.”

청호가 불쑥 대답을 가로챘다. 그러나 모건은 청호의 등장에 조금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채 준위가 다친 거랑 너희 둘이 손잡은 거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치료해 줬으니까.”

―그러니까. 포스에 내로라하는 의무병이 죄다 에로아스 부대에 속해 있는데. 왜 네가 치료를 해 주느냐고.

“내 마음이야.”

청호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모건이 상한 음식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포스에서 가장 똑똑하고 논리적인 모건의 앞에서 ‘마음’ 따위를 운운하는 건 청호밖에 없을 터였다.

모건이 어떤 말로 욕을 퍼부어 줄까, 고민하는데 청호가 그를 재촉했다.

“피나 조사해 봐. 어쨌든 나랑 닿는 게 더 이상 아프지 않다면, 좋은 거 아냐?”

답지 않게 순진한 청호의 말에 모건이 조소했다. 그가 건너온 자료를 살피며 청호를 비난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거든. 채 준위는 너랑 닿을 때마다 어빌리티가 들쑥날쑥…….

모건이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입술을 동그랗게 만 채 굳었다. 썩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시윤의 호흡이 덩달아 멈췄다. 청호 역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너희 무슨 짓 했어?

모건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어…… 아무것도 안 했지 말입니다.”

잠시 어제와 오늘을 반추하던 시윤이 턱 아래를 긁으며 대답했다. 힘든 이틀이긴 했지만 ‘무슨 짓’이라고 표현될 만큼 큰일은 없었다.

―손만 잡았어?

“네. 손잡고…….”

“안기도 했어.”

청호가 이번에도 답을 대신했다. 대꾸하기 께름칙한 것만 쏙쏙 골라서 대신해 주는 게 고마웠다.

―안았다고? 정확히 어떻게?

모건이 화면 밖에서 두 손을 좌우로 움직이며 되물었다. 아마 여러 홀로그램 자료들을 띄워 두고 시윤의 상태를 진단 중이리라.

“그냥, 이렇게. 안았다고 표현하기도 모호한 행위지.”

청호가 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는 흉내를 냈다. 혹여 아플까, 진짜 안지는 못하고, 닿기 전에 손을 거뒀다. 모건의 머리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었다.

―그게 다야?

“다야. 아쉽게도.”

청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홀로그램용 만년필로 책상을 톡톡톡톡 두드렸다. 시윤이 불안한 표정으로 뒤꿈치를 들썩였다.

“왜요? 뭐가 또 바뀌었습니까?”

―채 준위.

“예.”

―축하해.

“뭐가 말입니까?”

―너 B급이야.

“……예?”

―가이드 어빌리티가 B-로 올랐다고.

시윤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청호도 마찬가지였다.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갑자기 등급이 오르다니. 그것도 1등급이 통째로 올랐다.

B급이면 가이드를 무작위로 열 명쯤 세워뒀을 때, 5등 정도 됐다. 비록 청호와 견줄 바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C급과 비교하면 천지개벽한 수준이었다.

시윤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는데, 모건이 다시금 물었다.

―혹시 어지럽거나, 속이 메슥거리거나, 발열 증세 있어? 처음 발현했을 때처럼 말이야.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이미 안정화 단계도 지났다는 건데……. 어떻게 이틀 만에 C에서 B로 오르지?

불가사의한 일에 모건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시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도 이게 도통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하겠나. 지금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생각이라곤 내가 B등급이 됐다니, 라는 기쁨과 혹 앞으로 더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뿐이었다.

―청호와 손잡는 게 안 아픈 이후로 포옹은 해 봤어?

“아니요. 방금 손잡고 바로 전화드린 겁니다.”

―해 봐.

“예?”

―그것도 괜찮으면 입도 맞춰 보고. 그것도 괜찮으면 더한 것도 해 봐.

“……예에?”

시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모건과의 통화를 끝낸 시윤은 그다지 크지도 않은 가방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당장 B급이 된 건 너무 좋은데, 후에 이어진 모건의 말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포옹과 키스뿐만 아니라 더한 것도 해 보라니.

가방 끄트머리를 말아 쥔 시윤이 꾸욱 눈을 내리감았다.

‘아프면 하지 말고. 무리하면 안 돼. 저번처럼 키스하다 까무러칠 정도로 아프면 그만둬. 또 능력이 퇴화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조심조심, 어? 무슨 말인지 알지?’

전화를 끊기 전 모건이 신신당부한 말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절대로 닿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 그가 원망스러웠다.

푸욱 한숨을 내쉰 시윤이 가방 속에 있던 잡다한 물품을 다시 꺼냈다. 이 짓이 아니고서는 막사 안에서 청호를 등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덜미로 진득하니 박혀 오는 시선에 속이 메슥거리거늘. 키스와 세, 세, 섹, 아무튼 그거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다 꼬이는 느낌이었다.

입술을 겹쳐 문 시윤이 느릿하게 가방을 정리하는데…….

“오늘은 거기서 밤새우게?”

웃음기가 잔뜩 섞인 청호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시윤의 등이 흠칫 경련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구석 의자에 앉아 청호와의 동침을 미루고 또 미뤘었지. 그걸 상기하니 제 꼴이 말도 못 하게 부끄러웠다.

가이드라고 알짱거릴 땐 언제고. 지금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게, 몹시 이중적이었다.

“안 잡아먹어. 치료 덜했으니까 이리 와.”

그 말에 시윤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았다. 구급상자를 앞에 둔 청호가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윤이 녹슨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걸음걸이로 청호의 옆에 가 앉았다.

“소, 손목 치료는 다 한 것 같은데요.”

연고는 이미 충분히 발랐다. 사실 치료라는 거창한 것도 필요 없는 상처였다.

“발도 치료해야지.”

청호가 구급상자에서 이것저것을 꺼내며 말했다.

“발이요?”

뚱딴지같은 말에 시윤이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제가 발도 다쳤던가. 그건 기억에 없는데. 오늘 하루가 너무 고단했던 터라 다친 것도 잊어버렸나. 시윤이 흘끔 제 발을 내려다봤다. 흰 발은 여전히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혹시나, 하고 발목을 꺾어 발바닥을 보는데, 비로소 청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발바닥에는 물집과 쓸린 상처가 가득했다. 물집 몇 개는 이미 터진 모양인지 하얗게 살갗이 올라와 있었다.

“…….”

시윤은 열여섯, 도어 검사 이후 운동과 먼 삶을 살아왔다. 가이드가 된 후로 종종 체육관을 들르긴 했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그런 몸뚱이로 종일을 걷고 또 걸었으니 발바닥이 버틸 리가.

상처를 보고 나니 뒤늦게 따끔한 통각이 느껴졌다. 시윤이 발가락을 안으로 한껏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행군 때문에 생긴 상처가 부끄러웠다. 신체 능력이나 자가 치유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멀쩡할 텐데 저만…….

시윤의 입꼬리가 추욱 아래로 처졌다.

“그냥 두면 염증까지 생겨. 발 올려 봐.”

알코올 솜을 든 청호가 톡톡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청호의 허벅지에 발을 올리라니. 기겁한 시윤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닌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윤의 발이 꼬물꼬물 뒤로 움직이더니 의자 아래로 쏙 사라졌다. 청호의 입술 끝이 꿈틀 경련했다.

“채 준위.”

“예?”

“내가 고압적인 상사가 되게 하지 마.”

“……예?”

“나는 널 내 가이드로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근데 네가 그렇게 상사 대하듯이 하면, 맥이 빠진다고.”

청호가 미약하게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시윤이 멍청한 낯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무심결에 또 고개를 내젓고야 말았다.

“어, 아…… 그래도 어떻게 대장님께 제 발을 치료하게 합니까. 손목이야 그렇다 해도, 발은 좀…….”

우물우물 흘리는 거절에 청호는 이마 위로 핏줄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게 치밀었다. 길게 숨을 내쉰 청호가 지그시 시윤을 바라봤다. 그러자 시윤이 무언가에 떠밀리듯, 훅 뒤로 넘어갔다.

“아……!”

너무 놀란 시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꼭 힘센 돌풍에 휩쓸린 느낌이었다. 뒤집히는 시야가 비현실적으로 느렸다. 시윤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 흉곽은 안으로 말렸고, 호흡은 멈췄다.

넘어진다, 넘어진다, 넘어진다.

바닥에 부딪친다. 부딪친다. 부딪친다.

그 생각을 꼬박 열 번쯤 되뇌었을 때, 등 뒤로 푹신한 게 닿았다. 침대였다. 이게 무슨……. 시윤이 멍한 낯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복근에 힘을 주는데, 발목이 덜렁 위로 들렸다.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은 청호가 시윤의 오른쪽 발목을 쥐고 있었다. 시윤이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러나 청호는 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파?”

“예?”

“내가 잡은 발목. 아프냐고.”

시윤이 깜빡, 깜빡 눈꺼풀을 움직였다. 그러다 간신히 청호의 질문을 이해했다. 혹 닿은 부분으로 힘이 흘러들어와 아프냐는 뜻 같았다. 시윤이 잠시 청호의 손을 느꼈다. 청호의 단단한 손바닥만 느껴질 뿐, 시큰거리거나 찌릿한 고통은 없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치료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

“…….”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물론,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또 그랬다간 청호가 제대로 화가 날 것 같았다. 머지않은 과거, 사이먼의 혀를 뽑던 청호가 아직 생생히 뇌리에 남아 있었다.

시윤이 사지에 힘을 빼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사실 너무 피곤했다. 침대에 누우니 잊고 있던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자고 싶었다. 오감과 사고가 둔해졌다.

청호는 손목을 치료했던 것처럼 발바닥 역시 꼼꼼하게 치료했다. 간간이 따끔하기도 했고, 쓰라리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윤의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오른쪽 발바닥에 넓적한 밴드를 붙인 청호가 이번엔 왼발을 쥐었다.

“내일 작전에는 따라갈 필요 없어. 혹시 남은 게 있나 살펴보러 소부대만 출정할 거라 나도 안 갈 거야.”

“……네.”

시윤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내일은 그 긴 여정을 떠날 필요가 없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럼 조금 늦게까지 자도 되려나. 그러면 좋겠는데. 게으른 생각을 하는데, 청호가 그런 시윤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그러니까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돼.”

“감사……합니다.”

이미 눈을 감은 시윤이 배시시 미소 지었다. 청호가 그를 따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왼쪽 발도 치료를 마무리한 청호가 연고와 면봉을 들고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목적지는 시윤의 이마였다. 바실리스크의 부리에 긁힌 곳 역시 연고를 발라야 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청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윤은 속절없이 수마에 끌려가고 있었다.

시윤의 옆에 길게 누운 청호가 면봉에다 연고를 짰다. 시선은 시윤의 하얗고 동그란 이마에 박혀 있었다. 그의 짙은 그림자가 시윤의 작은 얼굴을 죄 잡아먹었다.

“그래서 말인데.”

“예…….”

“아까 모건이 제안한 거, 실행해 볼까?”

이윽고 면봉이 시윤의 이마에 닿았다. 시윤의 미간이 살풋 구겨졌다. 눈꺼풀 속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모건이 제안한 거? 그게 뭐더라……. 그게…….

시윤이 번쩍 눈을 떴다. 찬물이라도 맞은 듯 잠기운이 대번에 휘발했다.

“네?”

그가 잘못 들었다는 듯, 아니, 잘못 들었길 바라는 듯 되물었다.

“포옹. 키스. 괜찮으면 더한 거.”

그러나 청호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는 얄미울 정도로 무심히 말하며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아 흉터는 남지 않을 듯했다. 청호가 면봉을 휙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고운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그것은 구석 어귀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갔다.

청호가 팔로 머리를 고정하고, 물끄러미 시윤을 내려다봤다. 본격적으로 모건의 제안을 실행해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 크지 않은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청호가 무엇을 원하든, 거부할 의사는 없었다. 그냥 처음이라는 낯섦이 두려울 뿐이었다. 비록 이제 손잡는 건 아프지 않다만 키스와 그 이상의 것까지 아프지 않을 거라곤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 간신히 B급이 됐으니까.

근데 한창 하다가 아프면 어쩌지. 중간에 C급으로 떨어지면 어쩌지. 청호를 밀어 내야 하나. 아니면 참아야 하나. 참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참을 수 있을까. 저번에 입을 맞췄을 때도 정말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수천 개의 톱니바퀴가 각각 제멋대로 돌아가는 듯 생각이 꼬였다.

“…….”

청호는 그런 시윤의 혼란을 낱낱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윤은 표정을 숨기는 데에 그다지 재능이 없다. 그래서 그의 공포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까, 너그러운 마음도 잠시 들었으나 말 그대로 잠시였다.

청호는 욕심이 많았다. 원래 없었는데 시윤을 만나고 생겼다. 그와 한번 입을 맞추고 나니 더한 것이 고팠다. 키스도 그렇게 황홀했는데, 그 이상은 어떤 쾌감을 선사할지 몹시 기대가 됐다.

아니, 당장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시윤의 저 말랑말랑한 입술과 보드라운 혀, 달큼한 타액만 다시 맛봐도 한동안 편히 살 수 있을 터였다.

청호가 치받는 갈증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을 본 시윤이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언제 다시 C급으로 내려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지금이 기회였다.

시윤이 눈을 홉떴다. 그리고 쓸데없이 우렁차고, 호기로이 소리쳤다.

“해, 해요!”

“……진짜?”

“예! 해요!”

시윤의 허락에 청호의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가 시윤의 볼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청호가 천천히 다가왔다.

“…….”

시윤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볼썽사납게 쭉 빼고 있을 수도 없어 입술 끝에 힘을 줬다. 그런데 어째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적막을 버티고 버티던 시윤이 찔끔 한쪽 눈을 떴다. 그리고 헉 숨을 들이켰다.

청호가 코앞에 있었다. 그저 비유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코끝과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당혹 어린 제 얼굴이 또렷이 보일 정도였다.

시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불만 쥐어뜯는데, 청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가 내뱉는 숨결이 입술 위에서 흩어졌다. 시윤이 다시 눈을 감았다.

허나 이번에도 닿는 건 없었다. 발끝을 까딱거리며 의미 없는 수를 세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청호는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윤이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원래 키스하기 전에 5분씩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게 당연한 건가. 암묵적인 예의인데 제가 경험이 없어 모르는 걸까. 저번에 청호와 했던 키스는 어땠더라.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시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는데, 청호가 시윤의 코끝을 톡 두드렸다.

“일단 포옹부터 할까? 손잡는 건 아프지 않더라도 포옹은 아플 수 있으니까.”

청호 딴에는 시윤을 배려하는 거였다. 아무래도 입맞춤을 전장에 나가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청호는 모든 게 서툰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청호의 말에 시윤의 안색이 화사하게 갰다.

“네? 아, 그럼, 그럴……까요?”

포옹은 한결 편하다. 일단 안고 나면 청호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니 아픈 티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붉어지는 광대나 요동치는 동공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손잡기보다 쉬웠다. 시윤이 누운 자세로 어떻게 그를 안을 수 있나 고민하는데, 청호가 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탁탁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시윤은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일어난 그가 청호에게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청호는 마치 강아지가 오길 기다리듯 품을 열어놓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청호 앞에 도착한 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마주 보고 안는 자세가 됐다.

청호는 시윤이 먼저 안길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우물쭈물하던 시윤이 어색하게 팔을 벌리고 청호의 목을 껴안았다.

청호에게선 알싸한 리넨 향이 났다. 군부대가 공통으로 쓰는 특유의 비누 냄새였다. 아마 자신에게도 같은 향이 나겠지. 형들에게서도 이따금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시윤이 청호를 조금 더 세게 껴안고 그의 굵직한 목덜미에 이마를 파묻었다. 상체가 찰싹 달라붙고, 하체 역시 남세스러울 정도로 붙었다. 시윤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허나 괜찮다. 이 각도에서는 청호에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와 마주 닿은 부분을 통해 뭉근한 힘이 흘러들어 왔다. 이제 꽤나 익숙한 청호의 힘이었다. 가볍게 눈을 감은 시윤이 그것을 느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물었다.

“아파?”

“어…… 아니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시윤이 고개를 내저었다. 몸뚱이를 타고 흘러오는 청호의 힘은 느껴지는데, 그것이 고통스럽지는 않다. 종종 정전기가 온 것처럼 따끔거리긴 했으나 말 그대로 정전기 수준이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오한이라도 온 듯 몸을 떨던 과거와는 비교를 불허했다.

“정말 아프지 않습니다. 제가 B급이 되긴 된 모양입니다.”

시윤이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뒤틀며 여기저기를 비벼 댔다. 꼭 호기심 많은 고양이 같았다.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시윤의 허리를 감싸 동그란 어깨에 뺨을 묻었다.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물론 ‘좋다’였다. ‘평화롭다’도 되겠고, ‘안온하다’도 괜찮겠다.

시윤을 통해 불필요하게 날뛰던 힘이 흘러갔다. 그 빈자리는 시윤의 맑은 기운이 채웠다.

청호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기운이 몸속을 빽빽하게 메우는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햇볕이 잘 드는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는 기분과도 비슷하고, 단단하고 따스한 집 안에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밖을 구경하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청호의 눈꺼풀이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저보다 한참 작은 몸이, 세게 껴안으면 그대로 바스러질 것 같이 마른 몸이 이런 축복을 내린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가 B급이 되어서, 앞으로는 손잡는 것만큼이나 포옹을 자주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좋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그를 안고 잘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정말이지 예쁜 꿈을 꿀 텐데. 시윤이 더는 저를 아파하지 않으니 그날이 머지않은 듯했다.

그 기쁨을 참지 못한 청호가 시윤을 꽉 안아 좌우로 몸을 뒤틀었다. 너무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른다는 게 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뒤늦게나마 나타나 준 제 가이드가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때, 시윤이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저희 아버지 같았습니다.”

“내가?”

“예. 지금은 좀 덜한데, 성인 되기 전에는 이렇게 껴안고 몸을 좌우로 흔들곤 하셨거든요. 아, 형들은 요즘도 가끔 그럽니다. 피톤치드 같다나…….”

시윤이 자신이 말해 놓고도 어이없다는 듯 킥킥거렸다. 그러나 청호는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피톤치드 같은 시윤. 참으로 찰떡같은 비유였다. 방사능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피톤치드라는 건 경험해 본 적이 없음에도 그랬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시윤의 가이드 능력을 느끼고 있던 건 아닐까. 그래. 이다지도 좋은 기운을 내뿜는데, 몰랐을 리 없었다.

그리 생각하자 치졸한 질투가 들끓었다. 나의 가이드인데. 가이아가 짝지어 준 내 반려인데.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를 여태 독차지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패악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도 참아야겠지. 시윤이 가족을 몹시 사랑하는 것 같으니.

뭐, 앞으로는 제가 독차지할 테니 괜찮다. 내일도 모레도, 내년도, 그 후에도, 시윤은 계속해서 이렇게 제 품에서 평온을 제공할 터였다.

시윤의 어깨에 묻혀 있던 청호가 조금씩, 조금씩 시윤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앞서 말했듯 시윤을 만나고 욕심이 세상을 집어삼킬 만큼 비대해진 터라, 더 많은 안온이 고팠다.

포옹으로도 이리 좋은데 키스는 더 좋겠지. 폭주 때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의 혀를 빨아 댔었는데. 당시의 황홀경에 다시 빠져들고 싶었다.

“키스……하고 싶은데.”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흠칫 놀란 시윤이 얼굴을 들고 그와 눈을 맞췄다. 평소보다 짙은 청호의 눈동자에 저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뭐랄까. 저로 인해 변화하는 청호를 보고 있으니 뿌듯하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하고.

이 행위가 연인끼리의 스킨십이 아니라 환자를 살리는 의사의 치료처럼 느껴졌다. 그건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불행이었다.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명백한 동의였다. 그저 오기로 냅다 질러 버린 이전의 동의와 달리 확실하고, 단호했다.

청호가 시윤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아프면 말해야 해.”

코끝을 마주 댄 청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시윤이 눈짓으로 그러겠노라 답했다.

청호는 매우 느리게 다가왔다. 행여라도 마음이 변한 시윤이 거절할 수 있도록. 다행히도, 입술이 닿는 그 순간까지 시윤은 거절을 내놓거나 고개를 뒤로 빼지 않았다.

청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아아……. 예상은 했다만, 시윤의 입술은 그보다 훨씬 황홀했다. 폭주 당시에도 정말 좋았는데, 이렇게 맨정신으로 온전히 느끼고 있자니 척추가 다 찌릿했다.

청호는 가볍게 시윤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길 반복했다. 시윤이 적응할 여지를 주는 거였다. 시윤은 어깨를 뻣뻣하게 굳히긴 했으나 용케 물러나지 않고 청호의 입술을 받아 냈다.

통통하고 따뜻한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빨던 청호가 살짝 고개를 뒤틀었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시윤의 입술을 크게 핥았다. 놀란 시윤이 청호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찰나, 헛숨을 들이켜는 시윤의 입이 빠끔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청호가 시윤의 입술을 세게 빨아당겼다. 틈이 더 벌어졌다. 청호의 혀가 시윤의 입 안으로 쑤욱 밀려갔다. 그리고 그의 타액을 맛보는 순간, 눈시울이 다 뜨거워졌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시윤의 숨결과 타액이 마치 성수 같았다. 세상이 화창하게 개는 기분이었다. 잠시 시윤을 느끼던 청호가 그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보다 적극적으로 혀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으응…….”

시윤이 눈을 짓이기듯 감았다.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매우 낯설었다. 그래도 참아 냈다. 대다수의 연인이 좋다고 물고 빠는 이유가 있겠지. 조금 있으면 좋아지겠지. 그런 희망을 품었다.

허나 혀가 불에 타는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청호의 타액이 넘어오는 식도는 따끔거렸고, 그의 숨을 소화하는 폐는 바글바글 끓었다. 잠시 잊고 있던 고통이었다. 그래, 청호와 닿으면 이렇게나 아팠는데. 그의 입술과 타액은 날카로이 조각 난 유리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거였는데.

청호의 혀는 점점 더 격렬하고 진득해졌다. 그 힘과 기세를 이기지 못한 시윤이 자꾸 뒤로 넘어갔다. 종국엔 침대에 누워 그를 받아 내고 있었다.

청호가 훌떡 시윤의 위에 올라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리고 잠깐 떨어졌던 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허겁지겁 다시 입술을 물었다. 이번에는 곧장 혀가 넘어왔다. 고통 역시 즉각 반응했다.

시윤이 달달 경련하는 무릎을 꽉 오므렸다. 갈퀴처럼 꺾인 손은 이불 아래로 숨겼다. 마약이라도 한 듯 환상에 물든 청호의 낯을 코앞에서 목도하고 있으니 아파도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고통을 감내하다 보면, 무뎌지다 보면, 언젠가는 A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섣부른 기대와 희망이 시윤을 좀먹었다.

그러나 청호의 혀끝이 입천장을 긁어내리는 순간, 참지 못하고 윽, 짧은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청호의 혀가 철근이 되어 입천장부터 정수리까지 단번에 꿰뚫은 듯한 고통이었다.

청호는 폭주 때와 달리 즉시 물러났다. 시윤의 눈가에 낭패가 서렸다.

“아파?”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이마를 살살 쓸며 물었다.

“아……니요.”

시윤이 어쭙잖은 거짓을 내놓았다.

“아프구나.”

청호의 만면에 죄책감이 서렸다. 또 자욱한 쾌감에 빠져 그의 고통을 돌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 무시한 걸지도 모르겠다. 청호는 걱정 어린 눈으로 시윤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그의 타액이 묻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아쉽게 핥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모습에 시윤이 쌉싸름한 웃음을 흘렸다. 그와 몇 분이나 입을 맞췄지. 청호가 무언가를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아픈 티를 내 버린 것 같아 그렇게 송구할 수 없었다.

시윤의 눈가가 괴롭게 어그러졌다. 전신의 핏줄이 매듭처럼 꼬이는 듯한 고통은 미련하게 참고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하고 외면할수록 더 거센 파도가 되어 돌아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시윤이 끝내는 고통에 휩쓸려 몸을 옹송그렸다. 아득 문 잇새로 가냘픈 신음이 터져 나갔다. 그래도 저번엔 코피를 줄줄 쏟으며 기절했었는데. 그때보단 나으니 다행인가, 싶었다.

“채 준위. 괜찮아?”

점점 소멸하는 듯한 시윤에 청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시윤의 머리 아래로 베개를 받쳐 주고, 이불을 올려 주기도 했다.

멍청하긴. 아플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욕심을 부렸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러지 말걸. 하지만 청호는 몇 분 전을 후회하면서도 입 안에 연하게 남은 시윤을 되뇌려 입맛을 다셨다. 참으로 추악한 꼴이었다.

“내가 뭘 해야 네 아픔이 사라질 수 있을까.”

서글프게 눈썹 끝을 내린 청호가 물었다. 사실 혼잣말에 가까운 어투였으나, 지척에 있는 시윤에게 안 들릴 리 없었다.

“흐……. 아무,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옅어지더라고요.”

시윤이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 상태로 하기엔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청호가 손바닥으로 그의 땀을 가볍게 닦아 냈다.

시윤과의 접촉은 가이딩이라기보다 제 죽음을 나누어 주는 것과 비슷하다. 저와 닿기만 하면 하얗게 질리고, 신음을 흘리고, 피를 쏟는 그를 보고 있으면 씁쓸한데 또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눈 뒤집고 달려들게 됐다.

“사실 내가 네 옆에 없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데.”

청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손 한 번 더 잡겠다고 헐떡이는 꼴이 그렇게 우스울 수 없었다.

그 말에 시윤이 한껏 미간을 구겼다. 고통도 잊고 벌떡 일어난 그가 청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제가 대장님 힘을 못 따라가는 탓인걸요.”

“너나 그런 소리 하지 마. 따지고 보면 내가 기형적으로 힘이 센 거니까.”

청호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시윤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힘이 너무 센 게 기형이라니.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안달이거늘. 이 무슨 복에 겨운 말이란 말인가.

청호의 말을 되뇌는 시윤의 낯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그의 머릿속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본 청호가 큭큭, 작게 웃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 가이아가 이어 준 인연이면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네 말마따나 네 탓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 탓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잖아.”

“…….”

뭐,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강한 게 죄가 될 수는 없다. 태초에 가이아가 저와 청호를 C급 반려로 맺었다 하더라도, 청호가 SS급인 이상 시윤 역시 그에 응하는 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 생각을 줄줄이 읊는다 한들, 호랑이 같은 얼굴로 저를 응시하고 있는 청호에겐 전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시윤이 청호의 손을 쥔 채로 쓰러지듯 누웠다. 청호가 얼른 그의 머리를 받쳐 베개 위로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래도 저는 대장님만큼 강해질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러고 싶습니다. 전장에서 약한 것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으니까요.”

힘이 잔뜩 실린 말에 청호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이따금 느끼는 거지만, 시윤은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쓰라린 패배를 수십 번쯤 경험한 병사와 비슷했다. 한 번도 전장에 나와 본 적 없으면서, 평생을 퓨어로 살아왔으면서, 그게 가능한가.

지나치게 강한 가족들의 기세에 열등감을 느끼는 건가, 치부하기엔 그 욕망에 독기가 묻어 있다. 알량한 치기나 섣부른 다짐이 아닌 것 같단 말이다.

청호는 그렇게까지 강해지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윤이 여전히 몸을 움츠리며 아파해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청호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렸다.

시윤은 무언갈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여태 버틴 것도 용했다.

청호는 깊은 새벽까지 끙끙거리며 앓는 시윤의 곁을 지켰다. 그것 말고는 그의 아픔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흐으…….”

시윤은 기상과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핏줄을 타고 압정이 흐르는 듯한 고통과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근육이 끔찍했다.

아직 체내에 청호의 힘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혹사당한 몸뚱이가 내지르는 아우성인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가.

시윤이 노인 같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청호는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테이블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 시계가 정오를 가리키고 있으니 막사에 없을 만도 했다.

미쳤지, 미쳤어. 여태 자다니. 아무리 피곤했어도 전장인데. 이 시간까지 자 버리다니.

시윤이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전신의 모든 근육이 바짝 마른 황태처럼 질기고 뻑뻑해져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중에 누가 절 호되게 두들겨 팬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시윤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앓은 소리만 거듭하고 있는데, 천막이 펄럭이더니 청호가 들어왔다. 어제처럼 무언가를 한 아름 든 채였다.

“일어났어? 몸은 어때?”

그에 시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늦잠을 잔 것도 송구스러운 마당에 청호를 세워 두고 저만 한량처럼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 억…….”

하지만 시윤은 짤막한 문장조차 매듭짓지 못했다. 뭐 그리 큰 움직임이었다고 근육이 비명을 질러 냈다. 의무실에 가야겠다. 당장에 치료까진 바라지 않으니 마취제든 진통제든 왕창 받아 와야겠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아프지? 근육통 때문에 그래.”

쯧, 혀를 찬 청호가 침대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잡다한 것들을 와르르 쏟아 냈다. 약, 물, 샌드위치, 붕대 따위가 나뒹굴었다. 시윤이 그것들을 구경하는 사이, 청호가 훌떡 이불을 까뒤집었다.

“약 바르자.”

“약이요?”

“어. 근육통에 좋은 약.”

청호가 손바닥 가득 튜브 형태의 약을 짰다. 알싸한 파스 냄새가 났다. 손바닥을 비벼 차가운 연고를 미적지근하게 만든 그가 시윤의 발목을 쥐었다. 이제 그가 잡고, 돌리고, 이동시키는 것에 적응한 시윤이 별다른 반항 없이 몸을 맡겼다. 사실 너무 아파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청호는 시윤의 종아리에 연고를 바르고, 매우 능숙한 손길로 마사지했다. 커다랗고 힘 좋은 아귀가 뭉친 근육을 꽉꽉 누르는데 만족의 신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이게 근육통이었구나. 평생 경험한 적이 없어 몰랐다.

“밤에 주물러 줘야 했는데. 내가 손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 지금도…… 너무 좋습니다.”

시윤이 청호의 손길을 느끼며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

“예……. 근데 이런 걸 어떻게 다 아십니까? 발바닥에 물집 잡힌 것도 아시고, 근육통도 아시고, 마사지도 할 줄 아시고.”

청호는 이런 걸 알 필요가 없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물집과 근육통이 애당초 생기지도 않을 테지만, 만약 생긴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아물 게 뻔했다. 헌데 어찌 이리도 능숙한가.

“설마 부하 병사들이 다친 걸 이렇게 치료해 주시는 겁니까?”

시윤이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락부락한 병사들을 일렬로 세워 두고 마사지해 주는 청호를 떠올렸더니 고수라도 씹은 듯 눈썹이 팔(八)자로 구겨졌다.

청호 역시 떨떠름히 표정이 굳었다. 아마 같은 장면을 상상한 듯했다.

“나도 너처럼 전장이 처음일 때가 있었으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하지만 대장님은 신체 능력이 저와 다르지 않습니까.”

“열두 살에는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어.”

“아…….”

청호가 열두 살에 처음 출정했다는 건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어린 나이부터 괴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던 청호. 그래서 대단한 청호. 떡잎부터 다른 포스의 영웅. 일종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너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포스는 지금보다 엉망이었어. 군인은 적었고, 무기는 없었고, 전투 방법이나 클롭스에 대한 정보 역시 전무했지. 그래서 나이가 적든, 많든 에스퍼나 가이드면 일단 전장으로 뛰어나가야 했어.”

청호가 반대쪽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시윤이 입을 헤벌리고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청호의 어릴 적 이야기. 그의 첫 전투. 여태 들어오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는 내가 어빌리티 조절을 못 할 때였는데, 모건이 잘못하면 아군도 죽일 수 있다 했지만 윗선에서는 들은 척도 안 하더군. 내가 클롭스 수백을 죽인다면, 아군 수십쯤이야 그 힘에 제물로 바쳐져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였지.”

“…….”

“그 소문이 퍼져서 그때 있던 상사들이 나를 지독하게 굴렸어. 클롭스에게 먹혀 죽을까, 걱정하는 것도 벅찬데 신입이라고 들어온 애새끼가 적과 아군도 구분 못 하니 얼마나 짜증이 났겠어.”

“청호 대장님을 굴렸다고요?”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누가 감히! 어화둥둥 모시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당시의 포스가 정말 엉망이긴 했던 모양이다.

“응. 보급 상자 이리로 옮기면 저기 가져다 두라 하고. 또 옮기면 왜 여기 뒀냐고 혼내고. 어빌리티를 써서 이동시키면 편했지만, 그러다 잘못해서 폭주라도 하면 부대 전체를 없애 버릴 테니까 그냥 어깨에 얹고 옮겼었거든. 그 쓸데없는 짓을 하루에 스무 시간씩 했어.”

“…….”

“가끔은 상사들 전투화도 닦고, 설거지도 하고, 죽은 병사들 수습도 하고 그랬지.”

“…….”

“신체 발달이 지금처럼 높지 않아서 물집도 많이 잡히고, 삐고, 찢기고, 근육통도 달고 살았어.”

청호가 다시 튜브를 짰다. 그리고 이번엔 시윤의 팔을 쥐었다. 반팔 소매를 어깨까지 동동 걷어붙이곤 근육을 꾹꾹 눌러 풀었다.

“그 상사들을 그냥 두셨습니까? 아무리 어리셨어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제압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시윤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분노했다. 청호가 픽, 조소했다.

“그 마음을 못 먹겠더라고.”

“네?”

“그때는 피가 싫고 무서웠어. 클롭스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가. 전장에 나가면 사지가 떨어져 나간 시체, 머리가 터진 시체, 클롭스에게 밟혀 몸 전체가 짜부라진 시체, 상체나 하체가 반만 남은 시체들이 즐비한데, 그런 거에 적응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으니까.”

“…….”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극이 넘치는 시대이다. 그저 길만 걸어도 어렵지 않게 누군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족이 다 죽고 혼자 남았다더라. 이틀 전에 입대한 딸이 클롭스에게 통째로 먹혀 시체도 못 찾았다더라. 어느 구역에 잘못 들어갔다가 방사선에 피폭되어 내장 가득 고름이 차 손쓸 새도 없이 가 버렸다더라 등등. 그에 비하면 청호의 이야기는 그렇게 안타깝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근데 왜 이리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다.

시윤의 낯이 시시각각 침울해지고 있으니 청호가 시윤의 손바닥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떼며 웃었다.

“괜찮아. 그때 날 내려다보며 시시덕거리던 놈들, 다 전장에서 뒤졌거든.”

제법 통쾌한 말과 함께.

시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불끈 주먹을 쥐었다. 못된 것들은 항상 끝이 좋지 않다. 가이아가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인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시윤의 반대쪽 팔까지 마사지한 청호가 마른 수건으로 끈적한 연고를 닦아 냈다. 시윤이 한결 가뿐해진 사지에 감사하다며 꾸벅 묵례했다. 청호의 힘이 아직 몸속을 나돌고 있었으나 근육통이 옅어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염력을 이용해 잡다한 물건들을 여기저기로 수납한 청호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그의 검지가 가지런히 정리된 티백 위를 배회했다. 오늘의 선택은 인공영양센터에서 재배한 녹차였다.

금세 녹차를 우린 청호가 묵직한 머그 대신 가벼운 컵에 차를 따랐다. 현재 시윤에겐 컵 하나의 무게도 버거울 것 같아서. 시윤이 빙긋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뜨끈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왔다.

시윤의 옆에 걸터앉은 청호가 가까운 허공을 응시했다.

“열두 살 당시에 나는 전장에 나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

“싫으셨다고요? 근데 왜 나가셨습니까?”

“나를 전장에 내보냈던 사람이 있거든.”

“대장님을 강제로 차출시켰단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었던 사람.”

“그게 누굽니까?”

“아직은 몰라. 나와 연관된 인간이 너무 많아서. 그래도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청호가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차를 머금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컵을 기울였다. 혀를 물들이는 쌉싸름함이 나쁘지 않았다. 차에도, 혀끝이 아릴 정도로 뜨거운 온기에도 취미가 없었는데. 청호 덕에 저도 맛을 들였다.

시윤이 이불을 헤치고 청호의 곁에 붙어 앉았다.

“그 사람이 미우시겠네요.”

“응, 좋진 않지. 내 모든 악몽의 시발점이라.”

“찾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어떤 방법으로 죽일지 아직 고민 안 해 봤는데.”

청호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읊조렸다. 그 냉기에 시윤은 괜히 자신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이리 강한 그에게도 전장은 퍽 끔찍한 곳이구나, 싶었다. 하긴 열두 살 아이가 버티긴 벅찬 환경이었을 테니.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만 마셨다. 뜨겁던 차가 미적지근하게 식었을 때쯤, 시윤이 넌지시 물었다.

“대장님이 전장에 나오실 수밖에 없던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됩니까?”

“나중에.”

“아…….”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네 몸 추스르기도 바쁜데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

설핏 웃은 청호가 시윤의 컵을 가져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컵을 감싸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은은한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윤이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그것을 받아 홀짝였다.

차가 아까보다 곱절은 더 씁쓸했다.

‘몽골’이라 불리던 이곳은 해가 뜨는 것과 지는 것이 신기하리만큼 잘 보였다. 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도 어찌나 신비로운지, 추위도 잊고 코끝이 붉어질 때까지 올려다보고 있다가 청호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완전히 무너져 버린 사화산을 조사하러 나갔던 병사들이 돌아온 건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상황 보고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끝났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생충의 모체도 보이지 않았고, 그것들이 흡수한 힘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딜런이 면목 없다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렌이 그래도 꽤 멀쩡한 알 몇 개를 수거했다며 말을 덧붙였고, 폴은 옆에서 쯧쯧 혀를 찼다.

이번 작전은 그렇게 끝났다. 어려웠다면 어려웠고, 허무하다면 허무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시윤은 꽤 인상 깊었다. 단지 첫 출정이라서가 아니라, 클롭스가 또 다른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윤은 그들이 가져온 알을 꼼꼼히 포장해 보급 상자에 실었다. 포스에 돌아가자마자 모건과 알을 뜯어볼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그렇게 짐을 싸고,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근데 어째 청호가 돌아오지 않았다. 괜히 막사 안을 빙빙 돌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와 동시에 왁자지껄한 소음이 귓구멍을 후려쳤다. 모든 전투가 끝난 전장의 마지막 밤. 긴장을 푼 병사들이 여기저기 둘러앉아 술병을 부딪치고 있었다.

붉은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시윤의 몸뚱이만큼이나 커다란 고기가 통째로 구워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만면엔 웃음이 가득했다.

찬찬히 그들을 둘러보던 시윤이 아무도 몰래 미소 지었다. 꿈꾸던 전장이다. 이런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보다니. 감동적이었다.

시윤은 병사들이 노독을 푸는 걸 한동안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제가 청호를 찾으러 왔음을 상기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청호 역시 이들 중 어딘가에 있을 듯한데.

……찾지 말까. 제가 괜히 끼어 흥을 깨면 어쩌나. 아직 몸도 덜 나았는데. 한시라도 빨리 회복하는 게 청호를 위한 일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눈으로나마 병사들을 쳐다보던 시윤이 막 등을 돌렸을 때였다.

“채 준위.”

누군가가 시윤을 불렀다. 청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시윤이 얼른 뒤를 돌았다.

시윤을 부른 사람은 대위 딜런이었다. 코에 빨래집게를 끼웠던 그 딜런.

“준위, 채시윤.”

시윤이 재빠르게 그의 앞에 가 경례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 청호가 어디서 또 혼자 아파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레 겁이 났다. 그러나 딜런이 내놓은 말은 참으로 단순하고, 별 볼 일 없었다.

“뭐 해?”

“아, 대장님이 막사에 돌아오질 않으셔서 찾는 중이었습니다.”

시윤이 턱 아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 주제에 청호를 걱정한다는 게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지만, 실로 그런 터라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나 어디 계신지 아는데. 따라와.”

딜런이 데려다주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시윤이 팔락팔락 두 손을 흔들었다. 원치 않던 조력자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아니요, 아니요. 잘 계신 것 같으니 괜찮습니다.”

“보지도 않고 잘 계신지, 잘 못 계신지 어떻게 알아?”

“대장님께 무슨 일이 있는데, 딜런 대위님이 초콜릿을 들고 부대를 배회하실 리 없지 말입니다.”

시윤이 눈으로 딜런의 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초콜릿을 가리켰다. 딜런은 크고 작은 초콜릿을 종류별로 한 아름 껴안고 있었다. 불쏘시개로 쓸 리 없으니 먹으려는 것 같은데. 그의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어, 와, 그렇네……. 너 되게 똑똑하구나?”

딜런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시윤이 건조하게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만……’ 같은 모호한 인사와 함께 내빼려는데, 딜런이 기어코 다시 시윤을 잡았다.

“그래도 같이 가자. 맛있는 거 많아.”

“아니요. 배가 고프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가자니까.”

딜런이 씨익 입술을 가로로 째며 말했다.

“…….”

시윤이 잠깐 숨을 멈췄다가 풀었다. 묘하게 강압적인 말이었다. 분명 빙글빙글 웃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 시답잖은 장난을 많이 쳐도 그는 대위라는 계급이었고, 에로아스 부대에 속해 있었다.

시윤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예. 가겠습니다.”

애당초 거절은 선택지에 없었다.

5분 정도 걸으니 멀찌감치 청호가 보였다. 그 어느 모닥불보다 큰 모닥불 주위로 제법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는데, 청호의 존재감이 워낙 대단한지라 단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위님.”

딜런에게 경례한 시윤이 헐레벌떡 청호를 향해 뛰어갔다. 아무래도 타인과 있는 것에 능하지 못한 터라. 따지고 보면 가장 어려운 게 청호인데, 또 따지고 보면 그가 제일 편했다.

“대장님.”

시윤이 청호의 팔꿈치를 슬쩍 쓰다듬었다. 한 손에는 접시를 또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있던 청호가 꽤 놀란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더니 확 미간을 구겼다.

“왜 왔어?”

결코 반가움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시윤이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예? 아, 저, 대장님이…… 오시질 않아서…….”

시윤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데, 누군가가 곁에 와 섰다.

“제가 데리고 왔지 말입니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멀뚱히 서 있길래. 잘했죠?”

딜런이었다. 그가 칭찬해 달라는 듯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청호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턱을 안으로 당기며 짜증을 냈다.

“왜 여길 데리고 와. 막사로 데려갔어야지.”

청호가 들고 있던 맥주와 접시를 딜런에게 던졌다. 딜런이 껴안고 있던 초콜릿들을 와르르 떨어트리며 그것을 받았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청호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시윤에게 입혀 줬다. 옷이 워낙 큰 탓에 하얀 목이 훤히 드러난 게 안타까워 코트 깃을 올려 주기도 했다.

“추워. 들어가 있어. 고기 익으면 가져갈게.”

청호가 유난스러운 걱정을 내놓았다. 지척에서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윤이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이왕 온 거 버텨 볼까, 고민하는데 이번엔 알렌이 다가왔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뭘 또 돌려보냅니까. 이제 우리 부대인데 친해지면 좋지 말입니다.”

맥주 마실래요, 채 준위? 알렌이 술병을 내밀었다.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제 우리 부대’라는 알렌의 말이 웽웽 귓가를 맴돌았다. 제가 에로아스 부대라니. 당치도 않은 말인데 주책맞은 기분이 상승선을 그렸다.

반면, 청호의 입은 삐뚜름하게 뒤틀렸다.

“채 준위는 나랑만 친하면 돼.”

아직 저와도 정을 나누지 못했거늘. 감히 누구와 친해진단 말인가. 청호가 뒷말을 삼켰다. 그가 시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만 돌아가라는 무언의 종용이었다. 시윤은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으나,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몸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추운 날씨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멋있었고, 어깨를 감싼 청호의 코트는 묵직하니 따뜻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잡함이 좋았다.

그러니까 이곳에 조금 더 있고 싶단 말이었다. 시윤이 청호의 옆에 딱 붙어 섰다. 청호를 구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기 다 익으면 대장님이랑 같이 갈래요.”

시윤이 슬쩍 청호의 손을 잡았다. 순간, 청호의 눈동자가 크게 휘청였다. 무언갈 말하려 입술을 움직거리던 그는 결국 이렇다 할 말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시윤의 손을 고쳐 쥐기만 했다.

모닥불은 뜨거웠다. 여전히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인 건 변함없는데, 광대가 발갛게 익었다. 어쩌면 모닥불 때문이 아니라 간만에 마시는 맥주 때문일 수도 있고. 아무튼, 상반되는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맥주를 삼킨 시윤이 무릎 위에 올려 둔 접시를 들었다. 접시 위에는 두툼한 고기가 있었는데, 매우 맛있었다. 적당한 기름기와 줄줄 쏟아지는 육즙, 겉은 센 불에 약간 탔나, 싶을 정도로 바싹하게 익었고 안은 촉촉한 게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시윤은 한 덩이를 진즉 먹어 치우고 벌써 두 덩이째 먹고 있었다.

입 안 가득 고기를 베어 문 시윤이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옆에 앉아 있던 청호가 그런 시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잘 먹네.”

“예. 맛있습니다.”

볼이 퉁퉁하게 부풀어 발음이 뭉개졌다. 꼭 어린아이의 옹알이 같았다. 시윤이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앞에서 이리 게걸스레 음식을 먹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구태여 그의 앞으로 국한하지 않더라도 뭘 진득하니 먹는 법이 없었는데. 요즘 이래저래 변화가 많다.

“춥진 않아? 음식 챙겨서 들어가자.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찬 바람 쐐서 좋을 거 없어.”

청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시윤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열심히 움직이던 시윤의 턱이 뚝 멈췄다. 들어가서 먹으면 지금처럼 맛있지 않을 것 같은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좋은데. 술기운을 휘발시켜 주는 바람이 상쾌한데.

내놓을 변명은 많았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청호의 말을 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라. 시윤이 그럼 그럴까요, 하고 엉덩이를 떼려 할 때였다.

“채 준위.”

맥주병을 든 딜런이 시윤을 부르며 다가왔다.

“준위, 채시윤.”

놀란 시윤이 발딱 일어나 경례했다. 그 움직임에 접시 위에 있던 고기가 주르륵 미끄러지더니 텁, 흙바닥에 떨어졌다. 시윤의 눈썹이 축 처졌다. 아직 덜 먹었는데. 아까워라.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제 앞에 딜런이 서 있는 걸 인지하고 퍼뜩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근데 청호가 시윤의 팔목을 잡아 쑥 아래로 내렸다. 시윤이 속절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청호가 못마땅한 눈으로 딜런을 노려봤다.

“너는 왜 애 밥 먹는데 부르고 지랄이야.”

청호가 시윤의 텅 빈 접시를 쥐어 딜런에게 던졌다.

“다시 가지고 와. 노릇하게 구운 거로. 두껍지 않게 썰어서.”

몹시 구체적인 명령에 딜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냥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뭐 저렇게까지 분기탱천하나, 싶었다.

딜런이 부루퉁한 얼굴로 곧추섰다. 청호가 그런 딜런을 당장이라도 태울 듯,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사이에 낀 시윤은 이도 저도 못 하고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딜런을 보낼 순 없었다. 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무릎에 힘을 줬다.

“그냥 제가 얼른 다녀오겠…….”

물론, 불발됐다. 청호가 “그냥 있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시윤이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그리고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는데, 딜런이 불퉁한 낯으로 뒤를 돌았다. 곧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뜨끈뜨끈한 고기가 들려 있었다. 허나 그때는 이미 식욕이 바닥 저 끝까지 떨어진 후였다.

시윤이 입꼬리를 힘껏 당기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딜런이 그런 시윤의 앞에 털썩 퍼질러 앉았다. 청호의 한쪽 눈썹이 비죽 위로 올라갔다.

“왜 앉아?”

“채 준위랑 대화 좀 나누려고 왔지 말입니다.”

“네가 왜?”

“아, 제가 뭐 채 준위를 때리겠습니까, 꼰대 짓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장님 가이드인데 어화둥둥 모셔도 모자랄 판에. 그러니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아주 꿈에 나올까 무섭습니다.”

딜런이 진심으로 두렵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뾰족하게 벼려진 청호의 눈초리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그에 시윤이 괜찮다는 듯, 청호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험상궂게 일그러졌던 청호의 만면이 한결 유순해졌다.

딜런이 그 광경을 흥미로이 관찰했다. 왕으로 군림하던 호랑이에게 능력 좋은 조련사가 생겼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모르지만, 적어도 보기엔 좋았다.

“채 준위한테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서. 채 준위 아니었으면 아직도 그 뜨겁고 역겨운 화구에서 알 깨고 있었을 거야.”

딜런이 보기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닙니다. 제가 뭘 했다고.”

짐이나 안 됐으면 다행이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욕보다야 칭찬이 좋은 거 아니겠나. 시윤이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때 청호가 낮은 음성을 덧붙였다.

“네 덕 맞지 뭐. 아무도 기생충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말이야. 우리는 죽이고 부수는 거 전문이라 살피는 건 잘 안 하거든.”

“맞아. 채 준위가 에로아스 부대에 들어와서 다행이야. 비밀인데, 우리 명성과 달리 되게 무식하게 싸워. 대장님 믿고 막 나대거든.”

딜런이 킬킬 주책맞게 웃었다. 그 말에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제가 에로아스 부대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시윤이 머리를 좌우로 팩팩 흔들었다. 듣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단호한 시윤의 부정에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여기 말고 어디 들어가게?”

“네?”

“우리가 포스에서 제일 세. 대우도 좋고.”

그 말에 시윤이 개구리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 푸흐,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청호가 제 말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에로아스 부대에 들어오라 홍보하는 것도 아니고.

시윤이 눈을 처연히 내리깔았다.

“그 뜻이 아니라, 제가 감히 에로아스 부대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누가 그래? 네가 자격이 없다고?”

“그야…… 저는 강하지도 않고, 전투 경험도 없으니까요.”

자신의 밑바닥을 인정하는 건 항상 아프다.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던 때가 있어서 유독 아팠다. 그래도 이제 B급 가이드니까, 이만하면 나쁘지 않지, 라고 생각하더라도 청호를 보고 있으면 자존감이 끊임없이 고꾸라졌다.

그때, 딜런 옆에 있던 알렌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부정했다.

“에이…… 대장님 가이드면 자격이 충분하죠. 원래 에스퍼나 가이드 중 한 명이 에로아스 부대에 입대하면, 그 반려도 에로아스 부대에 들어옵니다. 당연한 거예요.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요.”

“그래도…….”

반발을 준비하던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닥불 주위의 병사들은 하나 같이 둘씩 짝지어 앉아 있었다. 서로 마주 보며 웃고, 말을 속삭이고, 뺨을 맞대는 가벼운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알렌의 말마따나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 관계이리라.

시윤이 어딘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상적인 에스퍼와 가이드다. 부러웠다. 저도 청호와 저 정도쯤의 스킨십은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인 터라. 함께 전쟁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그런 반려가 되어 줄 수 없는지라. 저들은 모두 에로아스에 있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저는…….

제 어깨에 에로아스의 붉은 견장이 달리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겠지만 온전히 기쁘지만은 않을 터였다. 저는 아주 치졸하고 겁 많은 애송이니까.

시윤은 별다른 말 없이 흐릿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맥주를 삼켰다. 목구멍을 할퀴는 탄산이 이상하게 텁텁했다.

청호와 시윤은 늦은 새벽까지 모닥불 옆에 있었다. 타닥타닥 튀어 오르는 모닥불의 백색 소음을 배경으로 술을 마시고, 달고 짠 전투 식량을 안주로 먹고, 대화를 나눴다.

대화 상대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여기저기 술병이 굴러다닐 때쯤에는 다들 술기운이 올라서 거리낌 없이 시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청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지만, 딜런과 알렌이 어찌나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는지, 모두 대장님이 가이드를 너무 아낀다며 낄낄거리기만 했다.

청호는 제대로 한 소리 해 줄까, 아닌 밤중에 다 같이 신나게 흙밭을 구르게 해 줄까, 고민하다가 발갛게 술기운이 오른 시윤이 헤실헤실 웃고 있어 말았다. 그렇게 술자리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어스름한 새벽이 됐다.

견디다 못한 청호가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뒷정리를 명령하고, 시윤을 샤워실로 보내고, 침구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니 해 뜨기 직전이었다.

아직 술기운을 털어 내지 못한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자야 하는데, 피곤한데, 이 순간이 끝나면 포스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이 아쉬워 잠들 수가 없었다. 뭐랄까. 아주 좋은 꿈을 꾸는 와중에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들은 기분이랄까.

“잠이 안 와?”

반 뼘쯤 떨어진 거리에 누워 있던 청호가 물었다.

“옵니다.”

시윤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근데 왜 안 자? 아직 아파?”

청호가 옆으로 돌아누워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그를 따라 꾸물꾸물 몸을 돌렸다. 멀찌감치 켜 둔 조명 빛에 청호의 얼굴이 어스름히 보였다. 어둠 속에서 봐도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니요. 안 아픕니다.”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아직 청호의 힘이 근육과 핏줄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이따금 정전기처럼 튀며 따끔거렸으나, 익숙했다. 늘상 달고 살았던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냥…… 자기 아쉬워서요.”

시윤이 반쯤 감은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아쉬운데?”

청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복귀를 반기지 않는 병사는 여태 한 명도 없었다. 아무래도 전쟁터는 위험하고 불편하니까. 더군다나 시윤처럼 화목한 가족과 유복한 집이 있다면, 더욱 돌아가고 싶을 터였다.

시윤이 으음, 목으로 신음하며 대답을 골랐다. 근데 알코올 때문인지 사고가 느렸다. 그래서 그냥 사실대로 말해 버렸다.

“유치하게 들리시겠지만, 첫 출정이라 설레고 기쁩니다. 내일 포스로 돌아가면 지금이 꿈처럼 느껴질 거예요.”

“…….”

“아, 전장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전장은 이렇지 않다는 걸 알아요. 많은 병사가 다치고 죽겠죠. 근데, 그래도…… 그래도 지금은 기분이 좋습니다.”

시윤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청호가 그를 따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강의할 땐 그렇게 똑 부러지면서 클롭스는 무서워하고. 똑똑한데 전투에는 서툴고. 그 서툰 모습이 드러나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고. 조사하고 연구할 땐 박사답게 날카롭고. 지금은 또 마냥 순진한 아이 같다.

청호는 그런 시윤이 신기하고, 독특하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넓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네.”

거부 없이 대꾸한 시윤이 청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꾸물꾸물 그의 품을 파고들자 청호가 두꺼운 팔로 시윤을 힘껏 껴안았다.

“하아…….”

절로 만족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품에서 꽃이 핀다. 나무가 자라고, 잠자리와 나비가 날아다닌다. 천국을 눈송이처럼 뭉쳐다가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시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칼 사이로 시윤의 냄새가 나부꼈다. 잔잔하고 보드라운 냄새. 언젠가 그가 묘사했던 그의 어머니에게서 이런 향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좋다. 좋은 냄새다. 제 어머니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났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음에 또 같이 나오자.”

청호가 단조로이 다음을 기약했다.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 있던 시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언제 졸렸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이렇게 내 옆에, 내 품에 있어. 이제는 네가 내 옆에 없는 걸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나.”

아까, 시윤이 에로아스 부대에 있지 않을 것처럼 말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와 만난 지 이제 고작 한 달이거늘. 혼자 버텨 온 30년보다 그 한 달이 더 길고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가 없던 때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쏟아지는 고통과 홀로 마주할 자신이. 매일, 매시간, 매초 죽음을 준비할 자신이.

차라리 시윤을 몰랐으면 어떻게든 참아 볼 텐데, 이제는 그가 제공하는 안락을 알아 버린지라 불가능했다.

“그럼요. 저는 항상 대장님 곁에 있을 겁니다.”

다행히 시윤은 냉큼 긍정해 주었다. 청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시윤이 해사하게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조금 더 힘껏 껴안았다. 막사 밖으로 몰아치는 칼바람과 달리 따뜻한 새벽이었다.

포스로 돌아온 시윤은 몹시 바빴다. 수집한 알과 기생충을 연구해야 했고, 모건에게 전신을 샅샅이 검사당해야 했다. 모건은 급작스레 변한 가이드 어빌리티가 몹시도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변화한 시윤의 기록들을 모두 띄워 두고 대가의 명화라도 감상하듯,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의 연구실 구석에 앉아 있던 시윤이 엉덩이가 배겨 몸을 뒤틀 정도였다.

“청호랑 뭐 했어?”

모건이 이틀 전과 같은 걸 물었다. 그 몰래 하품하던 시윤이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손잡고, 어깨동무한 수준의 포옹이 끝이었다고.”

“근데 왜 B급이 됐어?”

모건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설마 모건은 그가 모르는 걸 자신이 알 거라 생각하는 걸까. 시윤이 대답을 고르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제 질문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모건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속적인 변화엔 규칙이 있기 마련이야. 더군다나 너처럼 변곡점이 명확한 상태면 패턴이 보여야 하는데. 그게 없어.”

모건이 홀로그램용 만년필 뒤로 톡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제가 유별난 탓이니 죄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한참 고민하던 모건이 사방으로 떠 있던 홀로그램들을 죄 밀어 치워 버렸다.

“일단 떨어진 건 아니니 더 두고 보자. 네 몸이 청호에게 적응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네.”

시윤이 시무룩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계속 적응해서 청호만큼 강해져야 할 텐데. 너무 까마득한 그라 따라잡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모건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여러 가지를 캐물었다. 전장에서 무슨 일은 없었느냐, 특별한 느낌이나 기운을 받은 적이 있느냐, 혹 네가 자는 동안 청호가 몰래 널 건드린 건 아니냐, 까지 질문을 받았을 때 시윤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저 청문회 하러 온 거 아니거든요. 나름 담당 연구원으로 배정받아서 대령님과 알 연구하러 온 거란 말입니다. 대체 저건 언제 보실 겁니까?”

시윤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알을 가리켰다. 여태 손 한번 못 대 본 알이 아련하기까지 했다. 저런 게 어디서 또 똬리를 틀고 있을지 모르는데, 한시라도 빨리 정체를 밝혀야 했다. 그리고 에스퍼의 능력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모건은 알 따위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난잡한 책상을 뒤지던 그가 자그마한 물건 하나를 시윤에게 건넸다.

“자.”

시윤이 익숙한 생김새의 그것을 쳐다봤다. 아침저녁으로 피를 뽑는 그 채혈 기계였다.

“저번에 주신 거 잘 가지고 있는데요.”

“좀 바꿨어. 이건 피 뽑으면 자동으로 어빌리티 등급이 떠. 청호와 언제 어떻게 닿게 될지 모르니까 수시로 체크해. 변화가 있으면 나한테도 보고하고.”

“아, 예. 감사합니다.”

시윤이 냉큼 그것을 받았다. 기계의 각진 모서리가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아마 저는 한시도 참지 못하고 기계에다 엄지를 짓이길 것이다. 그리고 결과가 뜰 때까지 설렘과 불안을 반복하겠지. 등급이 그대로면 실망하고, 오르면 기뻐하고,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할 게 뻔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성적표 아닌 성적표로 제 감정을 혹사할 텐데.

그래도 어쩌겠나. 등신 같은 유전자를 타고난 제 죄지.

시윤이 기계 가운데에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바늘을 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벌써 엄지가 따끔거렸다.

“자. 이제 저 흉물스러운 알을 살펴볼까?”

모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혈 기계를 연구복 주머니에 넣은 시윤이 그를 따라 일어났다.

1차 조사에서는 이렇다 할 발견을 하지 못했다. 알은 그저 두껍고 단단한 갑옷에 불과했고, 알 속에 있던 클롭스는 진즉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가장 집중해서 본 것은 알 속에 있던 기생충이었는데, 그 역시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연약한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래도 몇 가지 알아낸 게 있다면 이 기생충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과, 그들이 모두 같은 유전자로 형제 또는 가족으로 명명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마치 여왕개미의 진두지휘를 따르는 일개미처럼 말이다.

그러니 수수께끼를 풀려면 여왕개미를 찾아야 했다.

그 많던 클롭스에게서 대체 무엇을 뽑아 먹고 있었는지, 여왕개미의 능력이 무엇이기에 주위에만 가면 모든 무기가 무력화되었는지, 아직 미궁이었다.

사실 힘을 흡수하는 클롭스는 드물긴 하나 없진 않았다. 인간과는 다른 생태계로 살아가는 그들은 같은 종족을 잡아먹기도 하고, 아예 난도질해다가 몸 일부에 붙이기도 했다.

헌데 이토록 대량의 또 체계적인 착취는 이례적이었다.

모건과 시윤은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에야 연구를 멈췄다. 채취한 샘플들을 여러 기계에 넣고 돌린 모건이 장갑을 벗었다. 진득한 점액질과 퀴퀴한 악취에 두통이 다 올라왔다.

“오늘 저녁도 청호랑 먹어?”

모건이 물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오늘은 가족들과 먹기로 했습니다. 복귀하고 한 번도 못 봤거든요. 고작 사흘 나가 있었는데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아, 너 사랑받는 막내 도련님이었지.”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말입니다. 아무튼, 제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 걸 확인시켜 주러 가야 합니다. 대장님께 허락도 받았고요.”

킁킁 자신의 손 냄새를 맡은 시윤이 불쾌한 낯으로 손바닥 가득 물비누를 짰다. 그렇게 연거푸 세 번을 씻고 나서야 클롭스 냄새가 사라졌다.

“본가에서 자고 올 거야?”

모건이 시윤의 곁에 붙어 함께 손을 씻었다. 시윤이 핸드 드라이어에다 손을 집어넣고 으음, 신음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형들이 술 마시자고 하면 자고 올 수도 있고…….”

“일찍 복귀해.”

“뭐 시키실 일 있습니까?”

“아니. 청호가 혼자 있잖아.”

거품을 구름만큼 크게 만든 모건이 벅벅 손을 문질렀다. 시윤이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청호가 혼자 있는 게 뭐. 설마 그사이에 폭주할까 봐? 에이.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하룻밤 혼자 잔다고 큰일이 생기진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집이 아주 먼 것도 아니고, 시훈의 오토바이를 타면 10분 이내로도 올 수 있었다.

시윤의 아리송함을 꿰뚫어 본 모건이 말을 덧붙였다.

“청호가 기다릴 거야.”

“하지만 다녀오라고 허락하셨는걸요.”

“그럼 네가 간다는데 가지 말라고 그러겠냐.”

“아…….”

“웬만하면 일찍 들어와. 불쌍하잖아.”

“누가요? 대장님이요?”

“그래.”

“…….”

시윤의 입술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모건의 문장에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청호가 왜, 무엇 때문에 불쌍한데. 어째서 제가 하룻밤 자리를 비운다고 그 대단한 사람이 불쌍해지기까지 하는 건데.

한참 고민하던 시윤의 뇌리에 무언가가 휙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것과 관련된 것인가.

시윤이 낮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 대장님 열두 살 때 말입니다.”

“어.”

“대장님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무슨 일?”

“이를테면 전투에 나갈 수밖에 없던…….”

그때. 시윤의 주머니가 우우웅, 가열차게 진동했다. 시윤이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홀로그램 바를 꺼냈다. 둘째 형인 시훈이었다.

[어디야.]

[나 모건 연구동 앞이야.]

[언제 나와.]

[보고 싶어, 동생 ㅠㅠ]

[뭐야. 왜 답장 안 해.]

[설마 전투 나갔다가 손가락 잘렸어?]

[형 쳐들어간다. 모건 연구실 다 불 질러 버린다.]

[밖에 추워……. 형 얼어 죽을지도 몰라……. 동생……. 어여 나와…….]

메시지는 끊기질 않았다. 활자를 읽는 속도보다 메시지가 오는 속도가 더 빨라서 눈알이 다 뱅글뱅글 돌았다. 시윤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모건이 질색했다.

“난리다, 난리. 어여 가 봐. 너 늦게 보내면 죽일 놈이라느니, 개놈이라느니, 온갖 욕을 다 할 거다.”

으으으, 모건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넙데데한 어깨를 움츠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피식 웃은 시윤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내일 다시 만날 텐데. 그때 물어보면 되지.

급할 건 없었다.

* * *

집에 도착한 시윤은 한참 동안 현관에서 서 있어야 했다. 가족들이 얼싸안고 놔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전장에 있을 때도 간간이 통화해서 잘 있노라 말했거늘 뭐 이렇게 유난인지 모르겠다.

큰형과 작은형은 시윤의 사지가 멀쩡한지, 손가락 발가락이 다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머니, 선화는 볼과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으며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으며, 아버지, 정원은 한 발 떨어져서 눅눅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시윤은 그들의 관심이 귀찮았으나, 한편으로는 좋았다. 힘들다고 징징거려도 저를 욕하지 않을 사람들. 밑바닥을 보여도 저를 품어 줄 사람들. 온전한 내 편. 내 가족.

아아, 이래서 전쟁터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복귀를 바란 모양이었다.

시윤이 빙긋 웃으며 그들을 마주 껴안았다.

잠깐 혼자 있을 청호가 떠올랐으나,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식탁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나하게 차려진 저녁은 맛이 좋았다. 시윤은 가족들의 시선을 폭우처럼 맞으며 바지런히 포크를 움직였다. 그래도 며칠 타지에 있었다고 집밥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선화와 형들이 만든 음식은 익숙한 맛이라서 맛있었다. 사람들이 괜히 집밥, 집밥 입에 달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이렇게 깨달았다.

시윤은 식사 내내 종알종알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 몽골이라 불리던 곳이 정말 멋있었다고.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그 위로 쏟아지는 하늘이 너무 아름답고 상쾌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코가 새빨갛게 얼고 귓바퀴가 따가울 정도의 추위는 생전 처음 느껴 봤다고. 사화산 안에 정체 모를 알들이 엄청 많았다고. 또, 제가 기생충을 발견해서 일주일로 예상했던 작전이 사흘 만에 끝났다는 것도 넌지시 자랑했다.

가족들은 마치 시윤의 열성 팬인 것처럼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열광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시윤이 수다 떠는 게 귀여워서, 열등감에 짓눌려 살던 그가 번듯하게 작전을 마치고 온 게 기특해서, 말이다.

시윤의 수다와 함께 주요리가 지나가고, 디저트가 나왔다. 귀한 복숭아가 담뿍 올라간 타르트와 시훈이 직접 구운 바스크 치즈케이크가 참으로 맛깔스러웠다. 쌉싸름한 자몽과 계피가 묘하게 섞인 차를 함께 마셨는데, 디저트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시윤이 파동 하나 없이 잔잔한 차를 가만히 바라봤다. 청호가 이런 차도 좋아하려나. 그러고 보니 집에 티백이나 찻잎이 많았던 것 같은데. 좀 가져갈까. 집에 있는 거면 싸구려는 아닐 테니 그의 입에도 맞지 않을까.

시윤이 청호와 함께 마셨던 차들을 떠올리며 그의 취향을 가늠하려 애쓰는데, 큰형인 시준이 물었다.

“청호는 어때?”

놀란 시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뭘 그렇게 놀라. 청호 대장 말이야. 네 에스퍼. 어떠냐고.”

“아, 어어……. 대장님……. 좋지. 친절하시고. 잘해 주셔.”

그러고 보니 가족들에게 청호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저와 청호가 매칭되었다는 것도 제가 말한 게 아니라, 포스 전체에 소문이 나 버려 알게 된 거였다.

시윤이 멋쩍게 목덜미를 긁었다. 시준과 시훈의 가이드들과는 왕래가 잦다. 집에도 자주 놀러 오고, 가끔은 자고 가기도 한다. 형들이 열여섯 도어 검사 후 바로 매칭된 터라 아주 오래 봐 왔다. 그래서 마치 형제자매인 것처럼 친했다.

청호도…… 청호도 그럴 수 있을까. 나와, 또 우리 가족과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대충 넘겨짚기로는 가족이 하나도 없는 것 같던데. 같이 사는 동안 일이나 훈련이 아닌 이유로 바깥에 나가는 것도 못 봤으니 친구도 없는 것 같고.

어쩌면 저보다도 관계에 취약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 말도 말아야지. 괜히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녔다가 부모님이 그를 데리고 오라거나, 또는 그를 찾아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청호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약한 저 때문에 아주 많은 불편을 감내하고 있는 그라서.

“진짜? 진짜 청호가 잘해 준다고?”

시훈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끝냈다.

시준이 흐음, 목울대를 움직이며 신음했다. 어딘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기분이 엄청 이상해. 어제까지 독신주의였던 동생이 오늘 결혼하겠다고 웨딩드레스 입고 나타난 기분이야.”

“그래도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새끼한테 가는 것보다야 청호가 낫지.”

“아무렴. 거기다 잘해 준다니. 나쁘지 않아.”

“그건 모르지. 채시윤 저거 또 상사라고 뭘 시키든 ‘네, 네’만 할 텐데.”

“진짜야? 너 그랬어?”

시준의 안면이 대번에 구겨졌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키워 온 동생이 타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오늘도 유난의 끝을 달리는 제 형들에 시윤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 싶은데, 뭘 시키시질 않아.”

“자기 가이드한테 뭐 시키는 놈이 어디 있어. 존재만으로도 감사한데.”

“아니, 그러니까…… 못 하게 하는 게 많다고 해야 하나. 걱정이 많으셔. 내가 다칠까 봐. 감기에 걸릴까 봐. 밥을 잘 못 먹을까 봐. 잠을 잘 자지 못할까 봐. 아무래도 갑자기 생긴 가이드라 어, 음…… 소중……하게 여겨 주시는 것 같아.”

시윤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그 낯간지러움에 광대를 붉게 물들였다. 그래, 소중히 여기지. 다른 단어로는 청호의 호의를 표현하기 어렵다.

어딘가 몽글몽글한 시윤의 반응에 시준과 시훈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몄다.

“그래? 그거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네.”

“놈이라니. 대장님한테.”

시윤이 새치름히 시훈을 노려봤다. 시훈이 어떻게 제 앞에서 딴 놈 편을 들 수 있냐며 우는 시늉을 했다. 시윤이 말을 말자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답잖은 수다를 떨었다. 차가 식고, 케이크는 부스러기만 남을 때쯤 시윤이 흘깃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 그렇게 늦은 시각은 아니지만, 또 이른 시각도 아니었다.

‘청호가 혼자 있잖아.’

‘청호가 기다릴 거야.’

모건의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괜히 입술을 우물거리던 시윤이 이만 가 보겠다며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가이드는…… 할 만하냐.”

시윤의 아버지, 정원이 입을 뗐다. 저녁 식사 내내 말 한마디 없던 그였는데. 시윤이 의자를 바짝 당겨 바르게 앉았다.

“네. 아직 서툴긴 한데,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 청호 대장이랑 같이 산다고?”

“아, 네. 그렇게 됐어요.”

시윤이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옹송그렸다. 아직 부끄러운 짓은 하지도 못했는데 괜히 민망했다. 어찌 됐든 부모에게 동거를 밝히는 거였으니까.

시윤이 차게 식은 차를 냉수처럼 들이켰다. 텁텁하고 쌉쌀한 게 뜨거울 때만큼 맛있지 않았다.

“꼭 그래야 하냐?”

정원이 물었다. 묘하게 노여움이 낀 음성이었다. 시윤이 눈썹을 위로 추켜올렸다.

“예?”

“시준이도, 시훈이도 반려 가이드와 같이 살지 않는데. 넌 왜 청호와 사냐. 그것도 그 좁아터진 숙소에서.”

“좁진 않아요. 넓고, 깔끔해요. 대장님이 신경 써 주셔서 제 방도 꽤 좋고요.”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라.”

“…….”

정원은 답지 않게 막무가내였다. 시윤이 혀끝으로 자신의 입천장을 긁었다. 평소라면 냉큼 정원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태 단 한 번도 틀린 판단을, 옳지 않은 명령을 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가족들은 제가 C급 가이드인 줄로만 알지, 어빌리티가 제멋대로 변하는 건 몰랐다. 그 변곡점이 청호인 것 역시 몰랐고. 사실 시윤이 청호와 함께 사는 건 오롯이 자신 때문이었다. 그의 곁에 있어야 성장할 수 있으니까.

허나 이 사실을 밝힐 순 없었다. 보나 마나 온갖 걱정을 다 쏟아 낼 텐데. 청호와 닿으면 아프다는 것까지 알게 되면 정말 난리가 날 터였다. 어쩌면 청호와 만나는 걸 평생 금지당할지도 몰랐다.

“저 어차피 연구실에서 먹고 잤었잖아요. 그에 비하면 대장님 숙소는 천국이에요. 연구동이랑 10분 거리라서 왔다 갔다 하기도 편하고요.”

시윤이 능청맞게 변명했다. 주된 이유가 아니긴 했으나,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실로 집에서 출퇴근을 왕복하는 것보다 편했으니까.

“시윤아.”

정원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시윤을 불렀다. 고집부리지 말고 자신의 말에 따르라는 품격 있는 종용이었다.

시윤이 슬쩍 그의 눈을 피했다. 항상 그의 말을 따라 왔으나,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저는 정말로…… 강해지고 싶단 말이다. 청호의 가이드로서, 또 정원의 아들로서. 그 위치에 맞는 자격을 갖추고 싶었다.

“불편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정말 배려 많이 해 주시거든요.”

거듭되는 시윤의 거절에 정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나이답지 않게 새카만 머리칼을 더듬어 넘겼다. 그 손길에 짜증이 가득했다.

“그 배려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지 않냐.”

“네?”

“사람 바뀌는 거 한순간이다.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변할 수 있어.”

그다지 문맥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시윤의 눈동자가 좌우로 경련하듯 움직였다. 누가 변하는데? 청호가? 어떻게 변하는데? 어떻게 변하기에 제가 그와 함께 살면 안 되는 건데? 하루아침에 야차처럼 바뀌기라도 한다는 걸까. 아니면 인육을 탐하는 짐승이라도 되나?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걸 저렇게나 확신하며 말하는 걸까.

의자 등받이 깊숙이 등을 묻은 시윤이 고개를 삐뚜름히 뒤틀었다.

“무슨 계기요? 무슨 계기가 있어야…… 청호 대장님이 변하는데요?”

정원이 곧바로 입을 뗐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평소보다 하얗게 질린 그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꼭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려다 텁, 하고 닫힌 듯했다.

시윤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정원을 응시했다. 사실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청호를 못마땅히 여기는 아버지가 미웠다. 청호에 대해 뭘 안다고. 나도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데. 시준과 시훈의 가이드에겐 잘해 주면서 청호에게만 쌀쌀맞은 그가 몹시 섭섭했다.

식탁 위로 모호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항상 웃음이 넘실거리던 가족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시윤이 피곤하지? 오늘 자고 갈 거니? 엄마랑 같이 잘까?”

선화가 수완 좋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녀가 온화하게 웃으며 시윤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시윤이 그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 꽁했던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아니요. 갈 거예요. 주말에 다시 올게요.”

“그럴래? 아, 케이크 좀 남았는데 가지고 가. 가서 청호랑 같이 먹어.”

선화가 분주하게 부엌으로 향했다. 시준과 시훈이 그녀를 돕겠다며 따라갔다. 침대만큼이나 커다란 식탁에 정원과 시윤 둘만 남았다.

정원은 선화가 포장한 케이크를 가지고 나올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시윤은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 끝끝내 말해 주지 않는 그가 답답했으나 더 캐묻진 못했다.

그냥…… 듣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윤은 헤어지길 아쉬워하는 가족들 덕에 자정에 가까워져서야 청호의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행여 청호가 잘까, 조심조심 들어온 시윤이 막 문을 닫았을 때였다.

“늦었네.”

예고 없이 튀어나온 저음이 귓바퀴를 할퀴었다. 시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청호의 목소리다.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태산만큼 커다란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안…… 주무셨습니까?”

“응. 잠이 안 와서.”

“아아…….”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무심코 제 방을 향해 발을 옮기는데, 청호가 따라왔다. 시윤이 흘깃 그를 바라봤다. 청호는 늘 그렇듯, 무표정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거였다. 오전에 강의 하나 하고 내내 모건의 연구실에 있었으니까. 점심은 먹었나? 저녁은? 종일 뭘 했으려나. 주제넘은 궁금증이 산발적으로 솟구쳤다.

“대장님.”

시윤이 잔잔한 목소리로 청호를 불렀다.

“…….”

청호가 음성 대신 눈빛으로 대답했다. 시윤이 빙긋 웃으며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흔들었다.

“어머니가 케이크 싸 주셨는데. 같이 드실래요?”

“……그래.”

청호의 긍정에 시윤이 그에게 가방을 넘겨줬다. 청호가 가방 주둥이를 벌려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곱게 포장된 케이크와 여러 가지 티백들이 보였다.

“저 얼른 씻고만 오겠습니다. 종일 바깥에 있던 터라…….”

시윤이 외투를 벗으며 뒤를 돌 때였다.

“천천히 와도 돼.”

청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걸음을 멈춘 시윤이 잘 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예?”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청호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호기로이 말했다. 꽉 움켜쥔 종이 가방이 무거운 추처럼 흔들렸다.

“…….”

시윤은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도 얼른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후다닥 욕실로 뛰어갔다. 욕실 문을 닫는데, 희미하게 청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케이크 두 조각과 카페인 없는 허브티가 놓여 있었다. 심플한 케이크 접시에 하얀 찻잔과 도톰한 코스터까지. 시윤이 씻는 사이 청호가 손수 내놓은 것들이었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참 섬세한 부분이 있는 그였다.

청호 옆에 앉은 시윤이 포크를 들었다. 그런데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사실 시윤은 케이크가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이미 충분히 먹고 온 터라 아직 배가 불렀다.

하지만 자기 전에 청호와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오늘은 평소보다 함께 있던 시간이 적었으니까,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케이크를 먹자고 한 거였다.

그런 시윤과 달리 청호는 느리긴 하나 꾸준히 포크를 움직였다. 다행히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저녁은 뭐 드셨어요?”

아예 포크를 내려놓은 시윤이 청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푹신한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굴곡이 뚜렷한 청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그냥 고기.”

폴이랑 먹었어. 청호가 무심히 대답했다. 시윤이 의미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가늠하기로서니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낸 듯했다.

시윤이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차를 향해 손을 뻗는데, 차가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곧 시윤의 앞에서 멈췄다. 옅은 미소로 감사 인사를 대신한 시윤이 차를 홀짝였다.

“너는? 집에서 맛있는 거 먹었어?”

이번엔 청호가 물었다.

“예. 어머니랑 형들이 요리를 잘하거든요.”

시윤이 냉큼 긍정을 내놓았다. ‘나중에 같이 가서 먹어요’라는 말이 윗니를 간질였으나 뱉진 못했다. 저에게는 선의라도 그에게는 불편일 수 있으니까. 아직은 아니다. 조금만, 조금 더 친해지면. 그때 정식으로 초대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래. 다행이네.”

청호가 대화를 일단락했다.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이따금 포크와 접시가 닿는 소리나 소파 가죽이 밀리는 소리, 또는 서로의 숨소리만 잔잔히 울려 퍼졌다. 새벽 특유의 뭉근한 적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크 접시가 텅 비었다. 찻잔 역시 바닥을 드러냈다.

시윤이 자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졸리긴 하는데, 이대로 그와 헤어지기 아쉬웠다. 아니, 아쉽다기보다는 굿나잇 인사를 전하기가 민망하다는 게 맞겠다. 전장에서는 같이 자서 헤어질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은 각자의 침대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물고기 아가미처럼 펄떡이는 청호의 손가락이 너무 거슬려서 모른 체하기가 어려웠다.

“대장님.”

시윤이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바르게 앉았다. 느슨히 늘어져 있던 청호가 덩달아 등을 곧추세웠다.

“왜? 자려고?”

그의 눈가에 아쉬움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우리 5분만…… 손잡고 있을까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청호가 그것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혓바닥 위로 침이 담뿍 고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저는 항상 시윤이 고픈 상태고. 이제 시윤은 손 닿는 것 정도로는 아파하지 않는다. 마음 같아선 아침부터 밤까지, 아니, 잠자는 동안에도 쥐고 싶다며 떼를 쓰고 싶을 지경이었다.

청호가 부드럽게 시윤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딱 달라붙고 손가락이 얼기설기 엉켰다. 청호의 속눈썹이 대번에 무겁게 처졌다. 으음, 묵직한 신음도 흘러나왔다.

시윤은 그가 평온해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저로 인해 변화하는 청호는 볼 때마다 신비하고 뿌듯하다. 그가 엄지로 손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는 것도 좋았다. 꼭 칭찬받는 것 같아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5분은 물론, 10분이 훌쩍 넘었을 때. 시윤이 조용히 하품했다. 잠깐 정신을 놓으면 곧장 잠들어 버릴 듯했다.

눈을 부릅뜬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제가 보던 책이 테이블 아래 선반에 있었다. 그것을 집어 온 시윤이 한 손으로 가름끈을 당겨 책을 펼쳤다. 그런데 거실이 너무 어두워서 도무지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윤이 소파 가까이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제법 먼 거리라 손끝만 닿을 뿐, 전원 버튼을 누를 순 없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낸 시윤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힘차게 손을 뻗는데, 허리에 두꺼운 팔이 감기더니 그대로 훅 뒤로 끌려갔다.

“…….”

시윤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졸음이 단숨에 증발했다. 등으로 청호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꼼지락거려.”

시윤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그가 미약하게 짜증이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불을, 불을 좀 켜려고…….”

글자가 안 보여서……. 시윤이 웅얼웅얼 말을 녹여 먹었다. 청호가 살짝 눈을 뜨고 시윤의 허벅지 위에 엎어져 있는 책을 바라봤다. 시윤이 책을 읽으려는 모양이다. 좋은 신호였다. 그동안은 그의 손을 놓아줄 필요가 없다는 걸 뜻했으니까.

청호가 시윤을 안지 않은 손을 쑥 앞으로 내밀었다. 시윤이 아리송한 낯으로 그 손을 바라봤다. 뭐지. 이 손도 잡아 달라는 뜻인가. 시윤이 고개를 갸웃, 뒤트는데 순간 화르륵. 청호의 손바닥에서 불이 솟구쳤다. 사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쨍할 정도는 아니었고, 적당히 은은한 빛이었다.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일렁이는 화염. 금색과 붉은색이 규칙 없이 어우러지는 덩어리는 분명 불이 맞았다.

이게 무슨……. 설마 책 읽으라고 켜 준 건가. 굳이? 소파 옆에 멀쩡한 스탠드가 있는데? 몹시 비효율적인 행동이었으나 딴지를 걸진 못했다.

근데 어째 불이 코앞에 있는데도 뜨겁지가 않다. 은은한 온기는 느껴지는데, 말 그대로 온기였다. 시윤이 마술 쇼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황홀한 얼굴로 불을 응시했다.

“불 온도도 조절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럼. 내가 만드는 건데.”

“와……. 손 넣어 봐도 돼요?”

“응.”

시윤이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불 속에다 손을 넣었다가 뺐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안심한 그가 이번엔 천천히 손을 넣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푸근한 이불 속 같은 온도였다.

시윤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며 감탄했다. 세상에, 이렇게 작고 귀여운 불이라니. 그대로 유리 안에 집어넣고 침대맡에 두고 싶었다. 청호가 만들어 준 에펠 탑만큼이나 멋지고 사랑스러운 친구가 될 터였다.

시윤은 한참이나 불을 가지고 놀았다. 그래 봐야 불 속에 손을 넣었다가, 불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있다가, 불이 춤추는 걸 구경하는 게 다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보다 못한 청호가 시윤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말했다.

“이제 책 봐.”

“아, 네.”

시윤이 내팽개쳐져 있던 책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오래된 책의 좋은 점은 책등이 다 해져서 책을 한번 펼치면 저절로 접히는 법이 없다는 거다. 덕분에 한 손으로도 너끈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 자꾸 비싯비싯 웃음이 샜다. 아무리 청호가 만든 불이라 할지라도 결국 불인지라 물결치듯 흔들릴 때마다 활자가 덩달아 춤을 췄다. 덕분에 같은 문장을 세 번째 읽고 있었다.

“이렇게 책 읽는 건 세상에 저밖에 없을 겁니다.”

“설마. 어딘가에 하나쯤은 더 있겠지.”

청호가 능청맞게 대꾸하며 시윤의 목덜미에 볼을 비볐다. 시윤이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더디긴 해도 청호와 조금씩,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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