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인 안개
“키메라는 전형적으로 방사능에 피폭되어 생겨난 클롭스 중 하나입니다.”
시윤이 조곤조곤하게 강의를 이어 갔다. 그렇게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 널따란 강의실 끝까지 또렷하게 전달됐다. 수십 명의 병사가 눈을 반짝이며 시윤의 강의에 집중했다.
“키메라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앞에 달린 머리는 사자의 형상을, 등에 달린 머리는 염소의 형상을, 꼬리에 달린 머리는 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시윤이 허공에 동동 떠 있던 키메라 홀로그램을 한 바퀴 크게 돌렸다. 그것을 따라 병사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확실히 제가 가이드가 되고 나서, 정확히는 청호의 가이드가 되고 나서 병사들의 수업 집중도가 좋아졌다.
전에는 퓨어 주제에, 전투에도 안 나가 본 주제에, 낙하산 주제에, 따위의 말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었었는데. 이제는 그 누구도 시윤에게 못된 말을 하지 않았다.
시윤이 A급 가이드가 아니라, C와 B를 넘나드는 괴이한 가이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또 적지 않은 비아냥을 들을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평화로웠다.
“키메라는 몸만 하나일 뿐, 뇌가 세 개라 각각의 머리가 각기 다른 공격을 합니다. 사자 머리는 주로 커다란 이빨과 주둥이 힘으로 공격하며 불을 뿜기도 합니다. 염소 머리는 뿔, 뱀 머리는 독을 이용합니다.”
시윤이 홀로그램을 터치하자 각각의 머리가 확대되며 제각기 다른 공격을 시연했다.
“뇌가 세 개라는 건 한두 개의 머리를 벤다고 죽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키메라를 공격할 땐 머리 세 개를 동시에 공격하거나, 배 왼쪽에 있는 심장을 노리는 게 좋습니다.”
시윤이 강의실을 크게 훑어보며 말했다. 그러다 익숙한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 종우였다. 첫 강의 때부터 클롭스 특징을 줄줄이 말하던 그 병사. 이후로도 혼자 공부하다가 막히면 이것저것 물어보던 우등생.
시윤이 빙긋 눈짓으로 인사를 전했다. 종우가 꾸벅 묵례했다. 종우는 이미 모든 강의 과정을 끝냈음에도 꼬박꼬박 나왔다. 이따금 출전으로 불참할 때도 꼭 미리 메일을 주곤 했다. 시윤으로서는 참으로 기특한 학생이자 병사였다.
언젠가는 혹 클롭스 연구에 관심이 있냐, 학업을 준비 중이냐 물었더니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그저 조금 더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해 클롭스를 공부하는 모양이었다.
뭐, 무슨 이유가 됐든 강의 내내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학생보다야 훨씬 나았다.
키메라의 취약점까지 설명한 시윤이 다음 클롭스로 넘어가기 위해 홀로그램을 스와이프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강의실 문을 두드렸다.
시윤을 비롯한 모든 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채 준위.”
“……폴 대령님?”
폴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의 인물에 놀란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윤은 노크 소리가 울렸을 때, 모건을 떠올렸다. 강의 중간에 찾아오는 이라곤 백이면 백 그였으니까. 근데 폴이라니. 설마 청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지레 놀란 시윤이 바쁜 걸음으로 폴에게 다가갔다.
“대령님이 여긴 어쩐 일로…….”
“에로아스 부대 출정 명령이야.”
폴이 일언반구 설명 없이 곧장 본론을 내놓았다. 시윤이 빠끔 붕어처럼 입을 벌렸다.
“지금, 지금요?”
전달받은 게 없는데. 뭐, 전쟁이 어디 예고하고 발발하냐만은, 이렇게나 급작스러울 줄이야.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동동 발을 굴렀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저도…… 같이 갑니까?”
“그럼?”
폴이 무슨 그런 등신 같은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제가 왜 여기까지 행차했겠냐는 비아냥도 덧붙였다. 그 말에 잠깐 컴컴하게 물들었던 시윤의 낯이 환해졌다.
“아, 네! 당연히, 당연히 같이 가야죠.”
시윤이 뒤를 돌아 병사들에게 사정이 있어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노라 말했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홀로그램을 끄고, 바쁘게 짐을 정리한 시윤이 폴을 따라나섰다.
움직이는 병사들 사이, 홀로 가만히 앉은 종우가 멀어지는 시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시윤은 아무런 짐도 챙기지 못한 채 연구복에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군용기에 올라탔다. 여전히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어떤 작전인지 그 어느 것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혼란에 물든 시윤이 애꿎은 소맷자락만 쥐어뜯었다. 눈동자는 부지런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로아스 병사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화산 작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는 적당한 긴장감과 가벼운 장난들이 오고 갔는데. 오늘은 다들 숨은 쉬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들리는 거라곤 세차게 돌아가는 군용기의 엔진음뿐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청호 역시 무표정했다. 그는 대부분 이렇다 할 표정이 없지만, 이렇게 서늘한 기운을 내뿜지는 않았다.
시윤은 눈치껏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 작전이 매우 어렵겠구나. 엄청나게 강한 적이 도사리고 있겠구나.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사실 사화산 작전은 전장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지 않은가. 아마 이번 작전이 실질적인 첫 전장이 될 터였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으로 목구멍이 바짝 메말랐다. 오랜만에 귓불이 간지러워 꽉꽉 꼬집듯 잡아당겼다. 단단히 준비한 상태로 와도 모자랄 판에 얼떨결에 와서 뭘 제대로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와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제가 기를 쓰고 준비한다 한들, 뭐가 그리 다르겠나. 시윤이 푸우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기체가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윤이 양쪽 어깨를 옥죈 안전띠를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청호가 군용기 한가운데에 섰다. 병사들이 허리를 쭉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시윤도 덩달아 꿈틀꿈틀 몸을 폈다.
“다들 들었겠지만, 이번 작전은 쿤 부대의 작전을 이어받은 것이다. 쿤 부대는 나흘 전 Z8 구역으로 출정했고, 현재는 통신 두절 상태다. 통신 두절은 이틀째. 본국에서 날린 탐색 드론이 오늘 오전 돌아왔는데,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 상부에서는 쿤이 전멸……했을 거라고 예상한다.”
청호의 모든 문장이 충격적이었다. 전멸이라니. 전멸이라니. 그런 비보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패전은 있었어도 전멸은 없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쿤 부대가.
쿤은 청호의 에로아스만큼은 아니더라도 포스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대였다. 그러니 Z로 보냈겠지.
앞 스펠링이 Z로 시작하는 구역은 미지의 구역을 뜻했다. 아직 포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어떤 지형인지, 무엇이 살고 있을지 모르는 곳. 포스의 뛰어난 기술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건 아주 거대한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한 쿤 부대를 보냈을 텐데. 전멸이라니…….
시윤이 재차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목구멍이 다 쓰라렸다.
“우리의 임무는 Z8의 지형 파악, 적 몰살 및 쿤 부대의 시체 수습이다.”
“…….”
“이번 작전은 베이스캠프가 없어. 지형도, 적도 모르니 막사를 올린다는 것 자체가 자살 행위다. 작전이 끝날 때까지 따로 취식이나 휴식 시간 역시 없다. 그러니 틈틈이 알아서 영양을 섭취하도록.”
“예!”
“군용기의 착륙 지점 역시 확보할 수 없으므로, 윙슈트를 입고 낙하한다. 선두는 아돌프 A.”
그 말에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위, 위, 윙슈트라니. 단어조차 어색했다. 지금 청호가 말한 윙슈트가 양팔과 다리 사이에 날개 형식의 천을 덧대 공중 활강할 수 있도록 만든 걸 말하는 게 맞을까. 낙하산보다 수십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그 윙슈트가 맞냐는 말이다.
시윤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설마 그런 수단으로 착륙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총도 제대로 들 줄 모르는 제가 윙슈트를 다룰 줄 알 리 없었다. 생전 입어 본 적도 없다. 더군다나 의자에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근데 맨몸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라니. 눈앞이 아찔했다.
이미 정신은 낙하 중인 시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목시계를 확인한 청호가 매몰차게 명령했다.
“낙하지점까지 8분 17초 남았다. 모두 하강 준비.”
“하강 준비!”
벌떡 일어난 병사들이 각자의 의자 아래에 비치된 슈트를 입기 시작했다. 시윤이 그들을 따라 의자 아래에서 슈트 주머니를 찾아냈다. 그런데 도무지 입을 엄두가 안 났다.
죽어. 죽는다고. 이거 입고 떨어지면, 나는 분명 죽어. 벽에 머리를 처박고 죽든, 바닥에 떨어져 사지가 뒤틀려 죽든, 아무튼 죽어.
죽는 게 두렵진 않았다. 그러나 시윤이 상상한 자신의 종말은 전장에서 장렬하게 맞이하는 거였지, 윙슈트를 다룰 줄 몰라 떨어져 죽는 건 아니었다. 그토록 무의미하고 허망한 죽음이 있을까.
시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지금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했더니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눈시울이 찡하고, 서글펐다. 모두가 익숙하게 슈트를 입고 있는데, 저만 어쩔 줄 모르고 멀뚱히 서 있는 것도 서러웠다.
그래도 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간신히 정신을 다잡은 시윤이 후우, 후우, 후우, 연달아 심호흡했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윙슈트에 팔을 끼워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입는 거 아니야. 다리 들어 봐.”
그때, 청호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시윤의 발치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친히 슈트를 입혀 주기 시작했다. 시윤은 거절도 내놓지 못하고 그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청호가 여기저기 달린 지퍼를 올리고, 바람을 넣고, 비닐 재질의 날개를 펼쳤다.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상대 클롭스가 어떤 종인지 파악이 안 돼. 그래서 채 준위 도움이 필요해.”
그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청호라고 이곳에 시윤을 데려오고 싶었던 건 아니다. 사화산 임무 첫날. 시윤은 내내 막사에 있었는데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데 Z 구역으로 시윤을 데려가라니. 눈앞이 다 캄캄했다.
그가 적당히 무능력한 가이드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클롭스 전문 박사라 상부에서 그와 동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청호는 한껏 으르대며 그럴 수 없다고 말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책상에 앉아 입만 나불거리는 늙다리들을 다 태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폴이 행여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얼른 가야 한다고 재촉해서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야 했다.
“그런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근데 제가…… 바닥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입어 본 적이 없어서…….”
시윤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만 낙하지, 자살을 앞두고 있는지라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걱정하지 마. 채 준위는 나랑 같이 뛸 거야.”
청호가 시윤의 머리에다 고글을 씌우며 말했다.
“같이……요?”
“어.”
기다란 벨트를 꺼낸 청호가 그것을 시윤의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세게 당겨 자신의 허리에 채웠다. 훅 끌려간 시윤이 청호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청호는 그 이후로도 팔뚝과 등, 허벅지에 벨트를 감았다.
시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청호가 저를 가방 메듯 이고 뛸 생각인 듯했다. 그럼 적어도 벽에 부딪치거나 땅에 처박혀 죽을 일은 없겠지. 딱딱하게 굳었던 시윤의 어깨가 한층 느슨해졌다.
그런 시윤을 훤히 꿰뚫어 본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시윤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어디든, 무슨 일이든 내가 너를 혼자 보내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겁먹지 마.”
청호가 시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벨트를 당기며 시윤과 자신이 제대로 묶였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시윤이 멍하니 청호를 바라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대장님.”
“응.”
청호가 고글을 쓰며 대답했다. 시윤이 그런 청호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볐다. 청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제가 대장님의 가이드라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
난데없는 감사 인사에 청호가 눈썹을 구겼다. 그러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예?”
“나도 네가 내 가이드라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그 말에 시윤의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행여 청호가 볼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큭큭, 청호의 가슴팍이 들썩였다. 그럴수록 시윤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한 팔로 시윤을 껴안은 청호가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하강 10초 전!”
청호의 말에 문가에 서 있던 폴이 벽에 달린 붉은 버튼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삐, 삐, 삐. 고막이 진동할 정도로 커다란 사이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군용기의 묵직한 꼬리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과 함께 세찬 바람이 내부로 들이닥쳤다. 흔히 알던 바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꼭 바위 같은 바람이었다. 어깨와 허리, 뒤통수를 퍽퍽 내려치는 게 정신이 다 혼미했다. 오죽하면 귓바퀴가 팔락팔락 흔들릴 정도였다.
시윤이 목과 어깨를 웅크렸다. 그러자 청호가 괜찮다는 듯,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청호가 주위를 크게 한 번 훑었다. 각각 열댓 명씩 네 중대로 나뉜 병사들이 청호만 바라보고 있었다. 청호가 그들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아스 부대만의 의식 같은 거였다.
청호가 우리의 뒤에 있을 거야. 청호가 우리를 이끌 거야. 청호가 우리를 지켜 줄 거야. 행여 죽는다 한들, 청호가 우리의 몸뚱이를 집으로 데려다줄 거야. 그런 믿음과 신용을 주고받는 것이다.
별것 아닌 듯하지만, 그것이 병사들에게 매우 큰 동기가 되어 줌과 동시에 용기를 북돋웠다.
“아돌프 A 하강.”
알렌이 앞장선 소대를 향해 청호가 손짓했다. 그러자 “하강!” 우렁차게 소리친 병사들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허공으로 뛰어내렸다. 시윤이 허옇게 질린 낯으로 그들의 자살 행위를 목도했다.
“아돌프 B 하강.”
청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줄줄이 사라졌다. 그렇게 세 개의 부대가 사라지고, 남은 건 폴이 이끄는 소부대와 청호, 그리고 시윤뿐이었다.
“이제 뛸 거야.”
청호가 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윤이 끄덕, 끄덕, 끄덕, 떠는 건지 동의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무서우면 눈 감고 있어. 땅까지 그렇게 오래 안 걸려.”
청호가 부러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몸에 얹히다시피 한 시윤이 뒤뚱뒤뚱 발맞춰 걸었다.
“저,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되, 됩니다. 잘 붙어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마십시오.”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뚝뚝 끊기는 문장에 진심이라곤 없었다. 청호의 눈매가 난처로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선 열기구라도 하나 만들어 두둥실 띄워 보내고 싶다만, 그럴 여건이 안 되는 게 미안했다.
청호는 그를 더 달래고 보듬는 것보다 그의 공포를 얼른 끝내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청호가 문 옆에 서 있던 폴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폴이 “하강!”이라고 소리치며 하늘로 달음박질쳤다. 그를 따라 몇 남지 않은 병사들 역시 전속력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시윤을 한쪽 팔로 꽉 껴안은 청호 역시 큰 보폭으로 하늘로 뛰어들었다.
“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시윤이 짧게 탄식했다. 순간, 시간의 흐름이 더뎌졌다.
처음엔 몸이 붕 하고 뜨는 느낌이 났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침대에 누운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등으로 느껴지는 허공이 단단했다.
다음으로는 청호 뒤로 보이는 쨍한 해가 시야를 점령했다.
원래 태양이 저리도 크고 강렬했나. 눈알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쨍하게 산란했나. 구름은? 구름은 어쩜 저렇게나 보드라워 보이지. 꼭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구름이 폐부를 가득 채울 것 같았다.
청호의 허리춤을 꽉 움켜쥔 시윤이 초점 없는 동공으로 사위를 구경했다. 그러고 있으니 지금 자신이 해발 수천 미터에서 떨어지고 있다는 걸 잊어 갔다. 바닥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을 보고 있어 그런가. 공중을 유유히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말이다.
몸 여기저기를 살벌하게 할퀴는 바람에 공포가 휩쓸려 사라졌다.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도 태양 빛에 증발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 느껴도 되는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황홀했다. 피터 팬을 따라 하늘을 난 웬디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제 평생 이런 시야를 눈에 담을 거라곤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가이드가 되고 나서 매일, 매 순간이 새롭고 놀라웠다.
시윤이 천천히 청호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시윤이 허공에다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데, 순간 몸이 크게 덜컥였다. 덤프트럭에 받히기라도 한 듯 몸이 앞으로 크게 쏠리더니 떨어지던 몸이 위로 솟아올랐다. 청호가 사지를 대자로 뻗쳐 윙을 펼친 거였다.
시윤이 뒤늦게 현실을 자각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땅이 보였다. 여기저기 섬처럼 높게 솟은 산, 누가 숭텅숭텅 깎아 놓은 듯한 절벽, 푸른 녹음, 그리고 그 위를 새 떼처럼 삼각 배치로 날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렇게 끔찍하리만큼 무서운 광경은 아니었다. Z 구역이라 해서 막연히 황폐한 이미지를 상상했거늘. 연기가 솟구치고, 방사능에 피폭된 괴물들이 으르대고, 화염이 일렁일 거라 생각했는데.
황폐는 무슨,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토록 장엄한 자연이라니. ‘몽골’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대단했다.
시윤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절경을 구경하는 사이, 청호는 능숙하게 하늘을 비행했다. 땅과 가까워질수록 여기저기 솟구친 암산과 삐죽삐죽 올라온 나무들이 위협적이었는데, 신기하리만큼 그것들 사이를 쏙쏙 지나쳐 날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이사이 제 품에 안긴 시윤이 하늘 속으로 빨려가진 않았는지, 놀라 까무러치진 않았는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청호의 고글 위로 붉은 사인이 깜빡거렸다. 낙하산을 펴지 않으면 위험한 고도라는 뜻이었다. 아래를 훑으며 착륙 지점을 찾던 청호가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낙하산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평야이면서, 적에게 발각당하지 않게 주위에 적당히 나무가 자라 있는 곳.
청호가 팔을 접고 재빨리 속도를 내 병사들을 앞질렀다. 그리고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병사들이 그를 따라 감속했다. 적당한 고도가 되었을 때, 낙하산을 펼쳤다. 새가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전신을 두드리던 바람이 단숨에 보드라워졌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숲 내음이 밀려왔다. 시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귓불 사이로 스치는 숲의 청량함이 매력적이었다. 청호의 어깨에 턱을 얹은 시윤이 바쁘게 주변을 구경했다. 지금 이곳이 전장이긴 하지만, 당장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바짝 긴장해서 앞만 보고 있다 한들 제 어빌리티가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잠깐, 더도 덜도 말고 3분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땅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분명 수 초 전만 해도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이제는 나무가 빼곡했다. 얼마 있지 않아 몸이 덜컹거렸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청호는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낙하산을 풀어 버렸다. 그리고 시윤을 안은 채 두 다리로 쿵, 바닥에 착지했다. 비로소 육지였다.
청호가 빠른 손놀림으로 시윤과 자신을 옭아맸던 벨트들을 풀어 갔다. 시윤이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저릿한 팔을 허공에다 탈탈 털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팔을 적당한 악력으로 주물렀다.
“괜찮아?”
“예. 생각만큼 막……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씨익 웃는 시윤에 청호가 기특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사이, 병사들이 하나둘씩 주위에 착지했다. 마찬가지로 낙하산을 풀어 헤친 그들이 곧장 총기를 꺼내 들었다. 살짝 상체를 숙이고 뒤꿈치부터 조심조심 걸으며 주위를 탐색했다.
몇몇은 청호 주위에 모여 각자의 시계 홀로그램을 바쁘게 두드렸다. 열댓 개의 점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다른 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듯했다.
그들이 정확한 위치를 찾을 동안 청호가 이고 있던 총을 꺼냈다. 조금 거짓을 보태어 시윤의 상체만큼이나 커다란 총이었다. 시윤 역시 연구 키트가 든 가방에서 총을 꺼냈다. 사화산 작전에 나가기 전, 청호가 준 그 보랏빛 총이었다.
도톰하고 시린 총 손잡이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곳은 전장이다. 그것도 쿤 부대를 몰살한 미지의 적이 있는 전장.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보이는 거라곤 빽빽이 우거진 나무뿐이었다.
그쯤, 병사들이 여러 가지를 보고했다.
“리더 아돌프 인원 12명. 모두 무사합니다.”
“현재 방사능 수치 228밀리시버트로 양호합니다.”
“아돌프 A, 서쪽으로 약 840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아돌프 B, 남쪽으로 약 230미터 지점에 있습니다.”
“…….”
줄줄이 이어지던 보고가 갑작스레 뚝 끊겼다. 철컥, 총을 장전한 청호가 차례가 되었음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병사를 바라봤다.
“C는?”
“그게…… 아돌프 C의 신호가 안 잡힙니다.”
우물쭈물 흘러나온 답에 청호의 낯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병사들 모두가 그랬다.
“한 명도?”
“예. 한 명도…… 안 잡힙니다.”
병사가 보란 듯이 홀로그램을 크게 확대해 띄웠다. 점들이 반짝이고 있는 다른 병사의 홀로그램과 달리 깨끗했다. 혹 그의 기기가 문제일까, 옆 병사가 다시 C 부대를 찾았으나 역시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EMP일 가능성은?”
“있긴 합니다만, 미미합니다. 저희 쪽과 다른 부대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아돌프 C만 EMP의 피해를 입는 건 불가능하지 말입니다.”
청호가 짧은 휘파람으로 주변을 탐색 중이던 병사를 불렀다. 폴을 비롯한 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C 예상 착륙 지점 계산해. 마지막 신호가 어디였는지도 보고하고. 일단 확인되는 부대들부터 랑데부(군대가 집결하는 장소나 지점)에서 합류한다.”
“예!”
청호의 명령에 각자 맡은 임무를 시작했다. 한 명은 길잡이로 선두를 섰고, 다른 이는 C 부대의 흔적을 쫓았으며, 나머지는 청호를 둘러싸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들은 때로는 기는 것처럼 느리게, 때로는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이동했다. 나무를 피하고, 나뭇잎을 스치고, 덩굴을 뛰어넘고, 돌을 지르밟았다.
그렇게 빼곡한 숲을 해치고 나왔을 땐, 어느새 알렌과 딜런의 부대가 합류해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총소리 한번 없이 증발해 버린 아돌프 C뿐이었다.
병사 하나가 아돌프 C의 예상 착륙 지점을 보고했다. 부대가 그리로 향하기 위해 발을 뗐을 때였다.
찰박.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야트막한 물이 쥐도 새도 모르게 전투화 밑창까지 차 있었다. 물……? 숲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물?
사람들의 만면에 의아함이 피어났다. 괜히 겁을 집어먹은 시윤이 청호의 곁에 딱 붙어 섰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는데, 청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희멀겋기만 했다.
안개다. 희뿌연 기류가 에로아스 부대를 감싸고 있었다. 제 팔에 달린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고, 짙은 안개였다.
찰나, 모두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찰랑거리는 물에 자욱한 안개만으로도 이상한데 종종 들려오던 새소리까지 멎은 게, 영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자연 현상은 아니었다. 이건 적이다. 무슨 능력으로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보통 힘을 가진 게 아닐 터였다.
입술을 겹쳐 문 시윤이 총을 세게 움켜쥐었다. 시야가 차단되니 전보다 곱절은 더 무서웠다.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허나 여기서 엎어지면 꼴사나울 것 같아 악착같이 버텼다.
그때, 청호가 시윤의 손목을 움켜쥐고 훅 자기 뒤쪽으로 당겼다. 시윤이 냉큼 그의 등 뒤로 숨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살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제 역할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적의 존재를 명명하는 거였다. 어떠한 종인지, 조심해야 할 건 무엇이고 약점은 어디인지를 알려 줘야 했다. 그게 자신이 에로아스 부대에 이바지하는 방법이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체중을 받치고 선 뒤꿈치가 아릿할 정도였으나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시윤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어딘가에서 불쾌한 시선이 느껴졌다. 인간의 오감과 직감은 가끔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상황이 급박하고 위협적일수록 더더욱.
청호는 기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안개를 깔았다는 건, 적에게 제2의 눈이 있다는 걸 뜻했다. 이를테면 열 감지 카메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우리는 적을 보지 못하지만, 적은 우리를 보고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얼마나 동상처럼 굳어 있었을까.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청호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폴.”
“예.”
폴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그러고는 후으읍,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상체를 크게 펼쳤다. 동시에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파동하던 공기는 바람이 되고, 잠시 뒤에는 그보다 세찬 회오리가 됐다.
폴의 어빌리티는 바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기의 흐름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맞겠다. 마치 파도를 읽는 선장처럼 말이다.
자욱하게 깔려 있던 안개가 경련했다. 그러나 옅어지지는 않았다. 밀도 높은 안개는 안개가 아니라 질은 밀가루 반죽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A급인 폴의 능력이 먹히지 않는다니.
시윤은 전보다 조금 더 무서워졌다.
그때, 청호가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반짝이는 스파크가 튀더니 곧 불이 타올랐다. 그 불은 바람을 타고 화마로 진화했다. 그것이 거대한 이빨로 안개를 서걱서걱 씹어 삼켰다.
안개가 희미해지는 데는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눈을 홉떴다. 안개의 창조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수십 개의 총구가 사위를 겨눴다. 그러나 이렇다 할 생명체가 보이지 않았다. 넓은 황야, 그새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 듬성듬성 보이는 나무와 바위들이 다였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묵직한 총을 계속 들고 있으니 손목이 아려 왔다. 잠깐 팔을 내리고, 손목을 털었을 때였다.
“으허억……!”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비명이 들려왔다. 병사들의 총구가 곧장 한 방향으로 쏠렸다. 그곳엔, 그곳엔…… 물고기가 있었다.
“어휴, 씨발. 좆같이도 생겼다.”
딜런이 나지막이 욕을 읊조렸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물고기는, 아니, 물고기라고 명명해도 되나. 눈꺼풀이 없이 둥그런 눈알과 긴 몸통, 펄떡이는 아가미, 머리통만큼 커다란 비늘, 뻐끔거리는 주둥이에 특유의 비릿한 냄새까지. 분명 물고기가 맞는데, 크기가 그렇지 못했다.
저 덩치를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 그래, 전투기만 한 크기였다. 큰 요트 같기도 하고, 40인승 버스 같기도 하고. 아무튼 머릿속에 흔히 정의하고 있는 물고기 크기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빨이 지나치게 크고 두꺼웠다. 꼭 코끼리의 상아를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정수리에는 닭 볏 같은 게 돋아 있었다. 또, 대가리와 꼬리는 녹색 비늘이 잔뜩 덮여 있었는데 배 부분은 투명했다. 그래서 그 속에 담긴 것이 훤히 보였다. 이를테면 저 괴이한 생명체의 내장 같은 것들 말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내장이 아니다. 작은 새도 있었고, 네발 달린 짐승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믿고 싶지 않지만 사지가 뒤틀린 인간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심장을 비롯한 오장육부는 어디에다 두고 몸뚱이 가득 위장만 있는 모양이었다.
“사, 살려 줘!”
물고기에 다리 한쪽이 물린 병사가 사지를 퍼덕이며 소리쳤다. 병사들은 세 팀으로 일사불란하게 나뉘었다. 한 팀은 병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고, 다른 한 팀은 총을 쐈으며, 또 한 팀은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총알이 먹히지 않았다. 단단한 젤리 같은 피부가 퉁퉁, 퉁퉁퉁, 총알을 튕겨 냈다. 더군다나 구출 팀이 도착하기도 전에, 병사를 위로 던지더니 그대로 한입에 꿀꺽 삼켰다.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시윤이 알기로 에로아스 부대에 사상자가 있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모두가 에로아스에 들어가길 희망한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 싸우면서 안전을 보장받는 모순이 몹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부가적으로 딸려 오는 명예와 영광은 덤이었다.
근데, 이렇게, 죽어? 아무리 크다 한들 고작 물고긴데?
시윤이 청호를 올려다봤다. 그라면 물고기 배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저 안타까운 병사를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어째서인지 청호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무감한 낯으로 물고기가 병사를 소화하는 걸 목도했다.
“…….”
꼭 그때 같았다. 혀가 뽑혀 죽은 사이먼을 내려다보던 그때 말이다. 시윤이 그를 구해 달라 부탁하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딜런이 물고기를 향해 달려갔다. 어찌나 빠른 속도인지 그가 딛는 물이 찰박찰박 터지듯 튀어 올랐다. 물고기와의 거리가 몇 미터 남지 않았을 때, 그가 크게 점프했다.
물고기의 눈알이 포물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딜런을 따라 데구루루 굴러갔다. 아마 그것의 눈에는 딜런이 사육사가 던져 주는 먹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물고기가 쩌어억 입을 벌리더니 한입에 딜런을 삼켰다. 이제 물고기 배 속에 잠긴 건 딜런과 병사, 둘이었다.
“대, 대장님. 딜런 대위님이…….”
시윤이 다급하게 청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청호는 그런 시윤의 손을 떼어 잡기만 할 뿐,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시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청호와 물고기를 번갈아 봤다. 참다못한 시윤이 물고기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총이 통하지 않는 걸 알지만, 저에겐 이것 말고는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죽은 듯했던 딜런이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내려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총구 위에서 기다란 장검이 튀어나왔다. 딜런은 그것으로 곧장 아가미를 썰어 버렸다.
쿠이이이익!
물고기가 괴이한 비명을 내지르며 마구 펄떡거렸다. 그러나 배 속에 있는 딜런에게는 그다지 피해가 있지 않았다. 그는 솜씨 좋은 횟집 사장처럼 아가미부터 아랫배까지 서걱서걱 썰어 갔다.
시윤이 뻐끔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바라봤다. 그래, 다들 전쟁의 베테랑들이다. 가죽이 두꺼워 총알이 박히지 않으면, 무른 부분을 노리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속된 딜런의 칼질에 속에 든 것이 삐직삐직 새어 나왔다. 탁한 점액이 그렇게 역겨울 수 없었다. 곧 물고기의 피부가 문만큼 갈라지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총을 겨드랑이에 낀 딜런이 까무러친 병사를 껴안고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기다리고 있던 구출 팀이 그들을 받아 수풀 더미로 이동했다. 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른 안도였다. 물고기의 눈알이 희뿌옇고 탁해지더니 몸을 마구 펄떡거리며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두툼한 이빨이 따닥따닥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잠시만 기다려.”
그때, 청호가 시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매우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물 위로 올라온 바위들을 턱턱 뛰어넘은 그는 금세 물고기 앞에 다다랐다.
물고기가 큰 몸집답지 않게 날렵하게 청호 쪽으로 몸을 뒤집었다. 그러나 청호가 더 빨랐다. 크게 도움닫기한 그가 떨어지는 속도를 이용해 주먹으로 쾅 물고기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 쩡, 하는 소리가 났다.
물고기의 두꺼운 머리뼈가 과자처럼 와삭 부서지더니 그대로 펑하고 터졌다. 엄청난 힘이었다. 배 속에 있던 병사가 빠져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가했다면 병사까지 몸뚱이가 터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물고기의 딱딱한 머리뼈와 물컹한 뇌가 여기저기에 흩뿌려졌다. 또한 심장을 비롯한 내장 역시 머리에 있던 모양인지 온갖 생김새의 덩어리가 철퍽철퍽 물 위로 떨어졌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비린 악취가 퍼졌다.
짜증스레 인상을 쓴 청호가 죽은 물고기 위로 팔을 휘둘렀다. 마치 손 씻고 물을 터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크고 작은 불씨가 이슬처럼 떨어졌다. 물고기 특유의 기름과 만난 불이 대번에 활활 타올랐다. 역겹던 악취가 단백질 타는 냄새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썩은 고기가 익는 듯한 냄새였으나 그래도 전보다는 나았다.
적의 최후를 확인한 병사들이 딜런과 부상병을 향해 다가갔다. 시윤 역시 그들 틈에 섞여 걸음을 옮겼다.
물고기에게 끌려갔던 병사는 다행히 다리만 다쳤을 뿐,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종아리에 굵직한 구멍이 뚫렸으면서 아프지도 않은지 소란스럽게 만들어 죄송하다며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려 댔다.
알렌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응급 처치를 했다. 지혈하고, 붕대를 감고, 꿈틀거리는 피부를 보며 넌 자가 치유 능력이 B-이니 대충 일주일쯤이면 아물 거라고도 했다.
“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알렌이 청호를 보며 물었다. 죽진 않겠지만, 이 다리로는 싸울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청호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베이스캠프가 있었다면 그리로 보내는데. 지금은 캠프는커녕 그를 포스로 돌려보낼 항공기도 없었다.
아무래도 병사 두엇을 붙여 구석진 곳에서 쉬게 하는 게 좋을 듯한데. 주변 탐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마땅한 곳을 찾는 데에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아직 아돌프 C의 행방도 모르거늘.
그때. 또 어디선가 희끄무레한 안개가 흘러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삽시간에 부대를 감쌌다. 제 손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한 안개였다.
“폴.”
청호가 폴을 불렀다. 안개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
근데 어째 대답이 늦었다. 설핏 눈살을 찌푸린 청호가 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폴은 멍하니 넋을 놓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도 안 오는데 무지개가 떴지 말입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타령에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항상 건조하던 폴이 저런 말을 하니 낯설기까지 했다.
청호가 됐으니 바람이나 일으키라며 명령하려는데, 시윤이 폴의 옆에 가 섰다. 그러더니 초점 없는 동공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지개 아닌데…… 에펠 탑인데…….”
연구동만 한 에펠 탑이 산기슭 틈에 우뚝 서 있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몸체가 반짝반짝 눈부시게도 빛났다. 진짜 청호가 만들어 준 그대로 생겼다. 대체 과거 인간들은 저 탑을 무슨 의미로 만든 걸까. 포스에 있는 가이아 신전처럼 당시의 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을까.
시윤이 입까지 헤벌린 채 유리 에펠 탑을 바라봤다. 눈썹을 모아 구긴 청호가 시윤의 시선을 따라갔다. 설마 진짜 에펠 탑이 여기 있나 싶어서. 그러나 있을 리가 없었다. 안개가 시야를 꽉 메우고 있어서 하늘도 보이지 않거늘. 시윤은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그에게 다가간 청호가 막 손목을 잡아챘을 때였다.
“토끼가 뛰어다닙니다. 귀가 코끼리만큼 큰 게 아주 귀엽습니다.”
“대장님. 저기 핫도그 가게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오셨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지…….”
병사들이 하나같이 등신처럼 종알거렸다. 아니, 말만 하면 다행이지. 누구는 바닥을 기며 혀를 날름거렸고, 또 누구는 돌을 껴안고 볼을 문질러 댔다. 하물며 딜런은 어깨로 나무를 밀어트리더니 전투모를 벗고 나무를 베개 삼아 자기 시작했다. 드르렁드르렁 어찌나 맛깔나게 자는지, 깨우기 미안할 정도였다.
엉망진창이었다. 청호는 수백 번의 전투에 나가면서 온갖 무질서와 혼돈을 마주해 왔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단체로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약을 빤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그 와중에도 시윤이 에펠 탑을 보러 가자며 아이처럼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대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대장님.”
그 순간, 유일하게 멀쩡한 목소리 하나가 청호를 불렀다. 알렌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애들이 단체로 돌아 버렸지 말입니다.”
알렌이 쩝쩝 입맛까지 다시는 딜런을 보며 혐오스럽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아픈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에로아스 부대는 하나같이 자가 치유 능력이 높은 편에 속했으니까. 무슨 상처든 간에 며칠만 잘 치료받으면 금세 회복하곤 했다.
그러나 머리에, 정신에 이상이 생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신은 치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찢어진 피부는 다시 붙는 게 맞고, 피가 나면 멎는 게 맞고, 손가락이 잘리면 다시 생기는 게 맞다. 그게 원상태로 돌아가는 거였으니까.
그러나 정신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의 판단 역시 제각각이라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명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됐다.
청호가 으득 이를 짓씹었다. 어떤 적인지는 몰라도 아주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그나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청호는 자가 치유 능력이 SS급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상처는 상해를 입음과 동시에 치료가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술에도 안 취하고, 마약류 역시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 안개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그 특성이 마약과 비슷하다면 청호에게 해를 끼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흡수조차 안 되니 그 능력이 정신까지 닿질 않는 것이다.
알렌 역시 그랬다. 청호가 불과 얼음을 다루고, 폴이 바람을 다루는 것처럼 알렌은 치유 그 자체가 어빌리티였다. 일종의 불사(不死)에 가까웠다. 그래서 힘은 조금 모자라도, 치유만큼은 청호와 비등비등했다.
이러한 이유로 수십 명의 병사 중 멀쩡한 이라고는 청호와 알렌뿐인 듯했다.
청호가 후우, 앞머리를 거칠게 불어 올렸다. 처음 안개를 맞닥트렸을 땐 괜찮더니 이번엔 왜. 혹 체내에 쌓이거나, 적의 상태를 보며 세기를 조절하는 걸까.
아아, 뭐가 됐든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청호가 서늘한 눈으로 안개를 노려봤다. 곧 그의 손목뼈에서, 귓바퀴에서, 또 등줄기에서 아지랑이 같은 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나무에 손을 짚고 선 청호가 밭은 숨을 토해 냈다. 목구멍이 텁텁했다. 염산이라도 삼킨 듯 명치가 쓰라렸다. 두통이 일고, 내장 깊숙한 곳에서 비릿한 혈향이 올라왔다. 힘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사위가 재로 가득했다. 청호가 뿜어낸 불에 탄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바위는 그을렸고, 흙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산 서너 개를 너끈히 태울 만큼의 불을 쏟아 낸 것 같은데. 안개는 잠깐 옅어졌다가 곱절로 짙어지길 반복했다. 물론 병사들의 괴이한 헛소리 역시 심해졌다. 몇몇은 자해까지 해서 알렌이 케이블 타이로 손발을 동여매야 했다.
효과 없는 힘 낭비에 짜증이 났다. 거기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이라니.
청호가 꽈악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아귀힘에 나무가 바게트처럼 퍼석거리며 으스러졌다.
“괜찮으십니까?”
얼굴 가득 걱정을 띤 알렌이 다가왔다. 청호가 괜찮다는 말 대신 휘휘 손을 내저었다. 몸뚱이가 아픈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급한 건 안개였다.
이 끈질긴 걸 어찌 처리해야 하나. 안개가 닿지 않을 때까지 산 위로 올라가 볼까. 근데 병사들은 어찌 옮긴단 말인가. 제 사이코키네시스로 옮길 수야 있지만, 그 역시 몸에 무리가 갈 터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미쳐 가게 둘 순 없으니.
크게 숨을 들이마신 청호가 막 움직이려 할 때였다.
“대장님.”
보드라운 음성이 청호를 불렀다.
“…….”
청호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바위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시윤이 있었다. 행여 화마에 휩쓸릴까 봐 모건이 만들어 준 제 코트로 둘둘 싸매 놓은 시윤이. 행여 다른 병사들처럼 자해하면 어쩌나 손목을 묶어 둔 시윤이.
“왜 그래? 정신이 들어?”
청호가 얼른 시윤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다 묶인 손을 들어 청호의 뺨을 감쌌다.
“아파요?”
“어?”
“아파 보이는데. 대장님 아프면 이렇게 인상 쓰잖아.”
그가 한껏 미간을 구겼다. 턱을 안으로 당기고, 어깨를 한껏 펼친 게 청호를 흉내 내는 모양이었다. 그래 봐야 성난 새끼 고양이 같지만. 청호가 피식 웃었다. 나약한 모습을 꿰뚫리고도 웃을 수 있는 건 시윤의 앞뿐이다.
“아니, 안 아파.”
“거짓말. 자요. 잡아요.”
시윤이 두 손을 곱게 모아 내밀었다. 언제봐도 참 예쁜 손이었다. 청호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잡을까, 말까, 라는 등신 같은 고민은 하지 않았다. 제가 그의 손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청호가 조심히 시윤의 손을 잡아 쥐었다. 심장을 옥죄고 있던 가시덤불이 단숨에 사라졌다. 사위를 감싼 안개의 텁텁한 냄새가 옅어지고, 가을 공기처럼 청량한 시원함이 번졌다.
하아……. 나른한 한숨을 내쉰 청호가 매끄러운 손등에 볼을 비볐다. 사막을 거닐던 방랑자가 오아시스에 입술을 대는 것처럼 절박하고, 동시에 행복했다.
시윤이 손끝에 힘을 줬다가 풀며 청호의 커다란 손을 조물거렸다. 그러다 흘깃 청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것처럼 반짝이는 에펠 탑이 시윤을 유혹하고 있었다.
슬쩍 허리를 굽힌 시윤이 청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장님 아픈 거 다 나으면 저기 에펠 탑 보러 가요.”
“…….”
“네? 가요. 데리고 가 준다고 하셨잖아요.”
그가 떼쓰는 아이처럼 어깨를 흔들었다. 청호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가자.”
어렵지 않게 나온 허락에 시윤이 방긋 웃음꽃을 틔웠다. 눈이 예쁘게 휘고,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참으로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런 애를 묶어 둬야 한다니. 그의 안전을 위한 일임에도 가슴이 쓰라렸다. 시윤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청호가 고심했다. 어찌해야 시윤을 이 개 같은 안개에서 구출할 수 있을까.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방법이…….
그 순간. 언젠가 모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채 준위 변곡점이야. 너에 따라 채 준위 등급이 바뀌어. 어쩌면 생물학적으로나, 어빌리티까지 바뀔지도 몰라.’
그 뒤에 붙은 말이 ‘그러니 함부로 스킨십하지 말라’였으나, 그다지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청호가 시윤이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져 네모난 기계를 찾아냈다. 시윤이 아침저녁으로 손가락을 찔러 등급을 확인하는 채혈 기계였다.
시윤은 그새 다시 존재하지 않는 에펠 탑에 영혼을 빼앗겼다. 덕분에 수월하게 그의 엄지를 기계에 찍을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이 반짝 떠오르고, 잠깐의 로딩 화면이 지나더니 곧 결과가 나왔다.
[B-]
B급이다. 알파벳을 확인한 청호가 기계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알렌.”
“예, 대장님.”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알렌이 얼른 다가왔다. 그러나 그 행동이 무색하게 청호가 명령했다.
“뒤돌아.”
“예?”
알렌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다 청호와 시윤을 번갈아 보고는 뒷걸음질 쳤다.
“아, 예.”
구경꾼을 처치한 청호가 시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저기서 정신 나간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왔으나, 어차피 지금은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운 눈알들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청호가 시윤의 턱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그러나 시윤은 여전히 텅 빈 허공을 황홀하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못내…… 짜증이 났다. 제가 앞에 있는데 다른 걸 보다니. 저는 시야가 터질 듯 그만 담고 있는데. 못난 심사가 비비 꼬였다.
뱀처럼 혀를 날름거린 청호가 한입에 시윤의 입술을 삼켰다. 놀란 시윤이 움찔 몸을 떨었으나 무시했다.
술이든 마약이든, 큰 충격을 받으면 깨기 마련이다. 찬물로 샤워를 하거나,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하거나, 큰 고통을 느끼거나. 이 정체 모를 안개도 그런 식으로 깰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또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말랑한 입술을 몇 번 물었다가 놓은 청호가 시윤의 아래턱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시윤이 빠끔 입을 벌렸다. 그 속으로 혀를 욱여넣었다. 입 안 가득 찬란이 넘실거렸다. 짙은 안온에 눈꺼풀이 저절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반면, 시윤은 고통에 잠기기 시작했다. 목구멍을 통해 쏟아지는 청호의 힘이 압정 같았다. 명치가 따갑다. 전신의 마디마디가 지끈거렸다. 시윤이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지를 바르작거렸다. 묶인 손으로 청호의 가슴팍을 밀어 내기도 했다.
“으응, 흐…… 아프, 아…….”
시윤이 고개를 마구 흔들며 반항했다. 그러나 청호는 봐주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가녀린 골반을, 또 한 손으로는 턱을 움켜쥐고 더 깊이 입을 맞췄다.
시윤의 몸부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동그란 눈망울에 축축한 습기가 차올랐다. 끅끅거리며 뒤틀리는 호흡이 청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작고 마른 몸뚱이가 손쉽게 품에 들어왔다. 그 덕에 시윤은 펄떡거리며 휘젓던 사지마저 결박당해야 했다.
시윤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게 된 청호가 고개를 비틀었다. 그리고 뜨겁고 말랑한 혀를 쪽쪽 게걸스레 빨아 댔다. 예민한 점막이 비벼지고 달큼한 타액이 넘나들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시윤을 맛보니 짐승 같은 허기가 올라왔다.
아아, 이대로 종일 그의 입술을 물고 빨면 좋으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애당초 입맞춤의 목적이 가이딩이 아니었던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윤의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부러 세고 거칠게 그의 입술을 탐하던 청호가 물러났다. 그러자 시윤이 툭, 청호의 어깨로 쓰러졌다.
“채 준위. 정신 차려봐.”
청호가 오목하게 파인 시윤의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파르르 몸을 떨던 시윤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반질반질한 눈동자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대장님?”
“괜찮아?”
“어…… 이게 무슨…….”
범람하는 혼란에 시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왜 청호의 품에 안겨 있는가. 이 고통은 뭔가. 묶인 손목은 또 무엇인가. 분명 다리를 다친 병사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시윤이 갑자기 확 몸을 움츠렸다. 심장에 얹혀 있던 청호의 힘이 예고 없이 사지 끝으로 뻗어 갔기 때문이다. 이제 고통에는 제법 익숙해졌는데, 인내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흐으…….”
“많이 아파?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덩달아 얼굴을 구긴 청호가 시윤의 뺨을 매만졌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시윤이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거짓을 고했다. 그새 동그란 이마 가득 식은땀이 맺혔다. 쌉싸름한 낯의 청호가 손바닥으로 그것을 닦아 냈다.
색색 가쁘게 움직이던 시윤의 가슴팍이 한층 단조로워질 때쯤…….
“저기 에펠 탑 보여?”
청호가 안개로 가득 찬 허공을 아무렇게나 가리켰다.
“예?”
“에펠 탑 말이야.”
“……여기 에펠 탑이 있어요? 그거 Z 구역이 아니라 H 구역에 있는 거 아닙니까?”
시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 기이한 산기슭에 갑자기 웬 에펠 탑. 설마 에펠 탑이라는 게 세계 곳곳에 있는 것일까. 시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청호가 가리킨 곳을 살폈다. 그러나 자욱한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게 없었다.
“안 보이면 됐어.”
청호가 시윤의 코 주위로 자그마한 불을 틔웠다. 그가 다시 안개에 취하기 전에 조치해야 했다.
“알렌.”
청호가 멀찌감치 뒤돌아 서 있는 알렌을 불렀다.
“예, 대장님.”
알렌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왔다.
“우리 마스크나 방독면 가지고 온 거 없나?”
청호는 혹시나, 하고 물으면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방사능에도 멀쩡한 병사들이 마스크를 챙겼을 리가 없었다.
“아…… 어……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근데 알렌이 예상 밖의 답을 내놓았다. 그가 한쪽 구석에서 컥컥거리며 추잡스레 자는 딜런의 몸을 마구 더듬었다. 그러더니 뒷주머니에서 마스크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을 탁탁 턴 알렌이 곱게 청호에게 내밀었다.
“딜런 대위님이 클롭스 냄새가 싫다고 챙기는 걸 마침 봤지 말입니다.”
청호가 헛웃음을 흘리며 그것을 받았다.
“참…… 간헐적으로 기특한 새끼야, 딜런은.”
“지극히 동의하는 바입니다.”
알렌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주억였다.
“이거 써.”
시윤이 청호가 준 마스크를 건네 썼다. 희멀건 마스크가 조막만 한 얼굴을 죄다 가렸다. 툭 건드리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은 얼굴임을 알고 있었으나 이리 보니 그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보기 좋은 외모를 가졌으니 얼굴이 좀 커도 좋을 것 같은데. 모호한 미소를 띤 청호가 마스크 끈에 낀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털어 넘겨 줬다. 그리고 시윤의 손목에 엉켜 있던 손수건을 풀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시윤이 찌릿찌릿한 손목을 뒤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규칙 없이 엉켜 있는 병사들이 영 이상했다. 다행히 몸뚱이는 멀쩡한 것 같은데, 다들 눈이 동태 눈깔이었다.
“안개에 환각 성분이 있나 봐. 애들이 정신을 못 차리네.”
“저도 그랬습니까?”
“응. 에펠 탑 보러 가자고 떼쓰던데.”
그 말에 시윤의 귓바퀴가 화르륵 붉어졌다. 아마 마스크 속에 숨은 뺨 역시 발갛게 물들었으리라. 그 모습을 쉽게 가늠한 청호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시윤이 괜히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돌렸다.
“제가 병사들을 좀 봐도 됩니까?”
“물론. 그래도 조심해. 지금 쟤들 눈에 네가 뭐로 보일지 모르니까.”
시윤이 그러겠노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몸을 두르고 있던 청호의 코트를 주섬주섬 껴입었다. 하도 자주 입은 것이라 이제 제 것 같았다. 이불만큼 커다래서 손끝조차 나오지 않음에도 그랬다.
시윤은 가장 먼저 고개를 잔뜩 쳐든 채 하늘을 보고 있는 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혹시 필요할까 싶어 급하게 챙긴 응급 키트였다. 주사기를 찾아 폴의 피를 뽑았다.
“채 준위가 어떻게 깬 겁니까?”
시윤이 멀어지길 기다리던 알렌이 은근한 목소리로 청호에게 물었다.
“내가 채 준위 변곡점이거든.”
청호가 시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예?”
알렌의 눈썹이 아치형으로 크게 솟아올랐다. 변곡점? 그게 무슨 말인가. 일반적인 에스퍼와 가이드 관계가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까. ……아무래도 SS급들이라 특별한가. 가이딩 말고 서로 주고받는 게 더 있나.
알렌이 추가 설명을 기다리며 청호를 바라봤다. 그러나 청호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집요할 정도로 시윤만 응시하고 있었다.
콧잔등을 찡긋거린 알렌이 다른 질문을 올렸다.
“다른 애들은 못 깨우십니까?”
“뭐…… 손목이나 발목을 자르면 깰지도 모르지.”
“…….”
기껏 관리한 표정이 다시 허물어졌다. 뒤돌아 있으라니 모르는 척하긴 했다만, 시윤은 그렇게 감미로운 키스로 깨워 놓고. 다른 병사는 손목과 발목을 잘라야 깰 수 있을 거라니.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을 하는 청호이긴 했으나,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알렌이 자신의 눈썹을 긁으며 답 없는 의문을 홀로 추적하는데, 시윤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돌아왔다.
“다들 맥도 정상이고, 숨도 잘 쉽니다. 안색도 나쁘지 않고요. 안개가 유독성은 아닌 것 같아요.”
“다행이네.”
청호가 그다지 다행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특유의 무감함에 적응한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높은 나무가 필요한데……. 안개 탓에 제대로 보이는 나무가 몇 없었다. 그래도 개중 밑동이 가장 두껍고 단단한 걸 가리켰다.
“대장님. 나무 위로 올라가실 수 있습니까?”
“왜?”
“안개의 출처를 찾아야죠.”
“출처?”
“안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흐름이 보입니다. 분명 어디서 흘러오는 거예요.”
시윤이 손가락으로 물결을 헤치듯 안개를 휘저었다. 그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호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상체를 약간 숙이고 시윤이 가리킨 나무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나무와 가까워졌을 때, 크게 도움닫기 해 점프했다. 기다란 다리가 나뭇가지를 계단처럼 성큼성큼 딛고 올라갔다. 그가 순식간에 나뭇잎 사이로 사라졌다.
“와…….”
시윤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실 나무를 타는 게 그렇게 멋지고 대단한 일이 아닌데. 청호가 하니 괜히 남달라 보였다.
청호는 1분이 채 지나기 전에 돌아왔다.
“뭐가 보입니까?”
바닥에 머리를 찧는 병사를 묶던 알렌이 물었다.
“아니. 근데 채 준위 말대로 흘러오는 게 맞긴 해. 동쪽인데, 멀어서 보이질 않아. 가까이 가 봐야 알 것 같아.”
청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넘겼다. 알렌이 바위틈에 세워 뒀던 총을 들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 말입니다.”
“넌 여기 지켜야지. 아까 그 좆 같은 물고기가 또 나타나면 얘들 다 먹혀.”
“아…….”
“안개가 걷히면 애들 추슬러서 아돌프 C를 찾아. 그 후에 나와 합류한다.”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채 준위 있잖아.”
난데없는 호출에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저도 갑니까?”
“그럼?”
“제가 가면 방해가…… 될 텐데요.”
시윤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병사들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섞여 가도 행여 피해가 될까 전전긍긍인데, 청호와 둘이서 움직이다니. 분명 크게 거슬릴 터였다.
“방해가 될지 도움이 될지 가 보면 알겠지.”
청호가 검은 눈동자로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꼭 제 능력을 시험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면, 제 발 저리는 걸까.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데, 청호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무기를 챙겼다. 방금 한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보며 잘근잘근 입술을 물어뜯었다. 어떤 말로 사정해야 청호가 저를 버리고 가려나. 어찌해야 이 상황에서 도피할 수 있나. 바쁘게 머리를 굴릴 때였다.
“가자.”
청호가 손을 내밀었다.
“……대장님.”
시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청호가 조금 더 깊숙이 손을 뻗어 왔다.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 시윤을 기다렸다.
“네가 필요해.”
“…….”
그 말에 시윤이 잠깐 호흡을 멈췄다. 이럴 때 보면 청호는 참 우두머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고작 한 문장으로 마음을 이리 바꿔 놓다니.
시윤이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두려움을 버리고, 빈자리에 자신감을 채우려 노력했다.
“……예. 가요, 같이.”
그래, 어떻게든 도움이 되면 되지. 제가 아무리 나약해도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있겠지.
입을 앙다문 시윤이 청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언제까지고 짐짝 역할에 충실할 순 없었다. 제 한계를 알고, 발전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청호의 곁에 나란히 서도 부끄럽지 않은 순간이 올 터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무와 풀이 빼곡한 밀림을 걷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청호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나무가 알아서 몸을 피했기 때문이다. 꼭 청호 주위로 둥그런 막이 쳐진 것 같았다. ‘모세의 기적 밀림 버전’ 같기도 하고. 참 여기저기 요긴하게 쓰이는 사이코키네시스 능력이었다.
덕분에 시윤은 한결 편하게 청호를 뒤따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투화와 마찰하는 발바닥이나, 바위를 올랐다가 내려가며 무게를 지탱하는 무릎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기다 코와 입을 가로막은 마스크가 어찌나 답답하고 간지러운지. 다 벗어 던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도 시윤은 불평 한번 안 하고 열심히 걸었다. 에로아스 부대의 병사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놔야 했고, 이곳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쿤 부대를 구해야 했으니까.
청호는 이따금 나무를 올라 안개의 시발점을 확인했다. 뒤를 돌아보며 시윤의 안위를 살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시윤은 빙긋 웃으며 그의 걱정을 해갈시켰다. 아직 단전에 얹혀 있는 청호의 힘이 따끔따끔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아픈 티를 냈다가 그가 절 업고 가겠노라 자처라도 하면 자괴감에 익사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수 시간을 걸었다. 하급 클롭스나 맹수, 또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 종종 나타났다. 청호는 그 모든 것을 눈짓 한 번 또는 손짓 한 번으로 죽이거나 내쫓았다.
이번엔 두툼한 몸집의 곰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섰다. 눈빛이 탁하고 쩍 벌어진 입술 틈으로 침이 질질 흐르는 게, 안개의 환각에 단단히 취한 것 같았다. 씩씩거리는 잇새로 살기가 철철 흘렀다.
이번엔 보통 상대가 아니다. 흥분한 곰은 탱크도 일그러트릴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시윤이 허리춤에서 총을 꺼냈을 때였다. 청호가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그러고는 한쪽 어깨를 뒤로 빼고 팔을 크게 휘둘러 돌을 던졌다. 꼭 야구공을 던지는 투수 같은 몸짓이었다.
주먹만 한 돌멩이는 곧장 곰에게 직진했다. 어찌나 빠른지 쉬이익 하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돌멩이가 그대로 뻑! 곰의 미간을 때렸다. 곰은 짧은 신음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커다란 몸뚱이가 쿵, 넘어가자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곰을 처리한 청호가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여유로운 모습에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모건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마 체스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매일 심심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그에게 포스도 핵전쟁 전에 있었던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경기를 만들면 어떻냐고 제안했었다. 그러자 모건이 뭐 그런 등신 같은 소리를 하냐며 시윤을 꾸짖었었다.
‘100미터를 3초 만에 뛰는 놈도 있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아가미 달고 태어나는 놈도 있고, 점프 한 번으로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는 놈도 있는데. 스포츠가 재미있겠냐.’
……라고 했었지. 그 말에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었는데. 청호를 보고 있으니 그의 말을 통감할 수 있었다. 청호가 야구 선수라면, 혹은 사격 선수나 달리기 선수라면 스포츠로도 학살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한참 걷던 청호가 또 흘깃 시윤을 뒤돌아봤다. 시윤이 괜찮다는 뜻으로 미소 지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청호가 다가왔다.
“5분만 쉴까?”
“괜찮습니…….”
“쉬자. 물도 마시고.”
시윤의 문장을 가른 청호가 멀찌감치 있던 바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다른 것들에 비해 평평한 바위가 청호와 시윤 앞으로 끌려왔다.
먼저 앉은 청호가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잠시 고민하던 시윤이 슬그머니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다 우연히 청호의 전투화 끈이 풀려 있는 걸 발견했다.
“어……. 대장님, 전투화 끈 풀리셨습니다.”
청호가 고개를 내리기도 전에, 시윤이 후다닥 그의 발치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하얀 손으로 전투화 끈을 묶기 시작했다.
“…….”
청호가 시윤의 동그란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화산 작전에 나갈 땐 묶는 방법을 몰라 제가 대신해 줬던 것 같거늘. 몇 번 해 보더니 이제 제법 능숙하게 잘했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래?”
“예?”
“신발 끈 묶어 주고 그러냐고.”
“아…… 어……. 기분 상하셨습니까?”
어딘가 쌀쌀맞은 청호의 음성에 시윤의 눈가에 걱정이 서렸다. 허락도 없이 만져서 화가 났나. 이런 걸 싫어하는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전장이라 예민한 걸까.
“아니. 아직. 네가 다른 놈 신발 끈도 묶어 줬다고 하면 상하겠지.”
그 말에 시윤이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다 청호의 의중을 파악하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요. 형들 신발 끈도 묶어 준 적 없습니다. 저는 항상 받는 쪽이라서요.”
“근데 내 건 왜 묶어 줘?”
“글쎄요. 몸이 먼저 움직인 거라서…….”
“…….”
“음……. 그러고 싶었으니까 그랬겠죠?”
“나쁘지 않은 대답이군.”
오르막길을 그리던 청호의 눈썹이 느슨히 내려앉았다. 시윤이 미소를 띤 채 전투화 끈을 꽉꽉 동여맸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청호는 표정을 숨기는 것에 영 재능이 없다. 덕분에 그의 기분이나 의중을 파악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시윤이 마지막으로 매듭을 옆으로 세게 당겨 마무리했다. 그 후 몸을 일으키려는데, 양쪽 겨드랑이 아래로 쑥 손이 들어오더니 그대로 몸이 들렸다. 짧은 비행의 종착지는 청호의 무릎 위였다.
“이, 이게 무슨…….”
시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와 입도 맞추고, 그의 품에 안겨 책을 읽은 적도 있지만 이런 스킨십은 또 처음이었다. 우위를 따지면 키스보다 못한 스킨십인데 부끄러움은 그와 비등비등했다.
시윤이 내려오기 위해 몸을 뒤트는데, 청호가 골반을 잡고 자신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벙긋벙긋 입만 움직였다. 그마저도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불편하고, 민망하고, 부끄러운 시윤과 달리 청호는 몹시 여유로웠다. 그가 수통을 내밀었다.
“물 마셔.”
“…….”
“얼른. 꾸준히 안 마셔 주면 탈수증 와.”
시윤이 탄식 같은 한숨과 함께 수통을 받아 들었다. 마스크를 내리자 청호가 손바닥에다 불을 틔웠다. 안개를 들이마시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시윤이 홀짝홀짝 물을 삼켰다. 그러다 앉은 김에 영양분을 채워 줄 알약도 몇 개 먹었다. 또 알렌에게 상황을 묻는 메시지를 보내고, 혹 아돌프 C의 GPS가 켜졌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는 수 분 동안 청호의 시선은 내내 시윤의 말간 뺨에 박혀 있었다. 참다못한 시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만 좀…… 보세요.”
“왜? 내가 보면 아파?”
“그건 아니지만…….”
“그럼 싫어?”
“그……것도 아니긴 한데…….”
무릎 위에 앉아 폭격 같은 시선을 견디는 것이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근데 그걸 또 말로 전하자니 몹시 껄끄러웠다. 결국 반기를 들지 못한 시윤이 푹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청호의 시선을 피했다.
숫기 없는 새색시 같은 시윤에 청호의 입꼬리가 익살맞게 솟구쳤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데이트하는 것 같네.”
“……어찌 그런 말을 전장에서 하십니까.”
“못 할 건 또 뭐야.”
한마디를 져 주지 않는 청호에 시윤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놀리는 게 재미있나. 형들도 그렇고 모건에 이어 청호까지. 그다지 리액션이 좋은 편은 아닌데.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잠깐 이유를 고민하던 시윤이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청호의 가슴팍에 기댔다. 다음 휴식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불편하게 있을 바엔 뻔뻔해지더라도 편히 있고 싶었다.
나지막이 웃는 청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시윤은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홀로그램만 들여다봤다.
길게 이어지던 평지가 끝나고 오르막이 시작됐다. 평지도 넋이 빠질 만큼 힘들었는데, 오르막이라니. 시윤이 가쁜 숨을 내쉬며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걸음이 자꾸 늘어졌다. 발목이 부서질 듯 아프고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렸다. 저를 위해 부러 천천히 가는 청호인데 그런 그조차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나무와 나뭇가지는 청호의 능력 덕에 거슬리지 않았지만, 규칙 없이 툭툭 튀어나온 돌부리들은 피하고, 타 넘고, 오르기가 매우 힘겨웠다.
“힘들면 업어 줄게.”
가벼운 산책을 하듯 여유로이 걷던 청호가 시윤을 보며 물었다. 시윤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등산은 저도 종종 했지 말입니다.”
“그래?”
청호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그런 반응을 예상한 시윤이 빙긋 웃었다.
“포스 안에도 산은 많으니까요. 아버지가 등산을 좋아하셔서 형들이랑 가끔 갔습니다. 이렇게 길이 없는 산은 처음이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가 부러 더 활기차게 말했다.
“…….”
청호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사실 시윤을 업고 산을 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백 킬로그램짜리 짐을 인 채 며칠을 내리 걷는 일도 비일비재한데, 시윤쯤이야 제 등에 업혀 있는 것도 모를 터였다.
근데 저리 단호하게 거절하니 억지로 등에 태울 수가 없었다. 다시 그를 설득해 볼까, 고민하던 청호는 곧 그만두기로 했다. 계속 권유해 봐야 시윤의 결심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두 시간을 꼬박 올랐을까. 안개가 점점 더 짙어졌다. 종국엔 서로의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어 손을 잡고 걸어야 했다. 어쩐지 청호는 그게 더 좋은 듯했지만, 시윤 역시 나쁘지 않았기에 딱히 딴지를 걸지 않았다.
두 사람은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의 끝자락. 땅보다 하늘과 가까운 곳. 저무는 해와 떠오르는 달이 만나는 접점. 그와 동시에 안개를 창조한 이가 있는 곳. 안개의 시발점이자 모든 혼란의 원인.
“우리가 찾던 적이 클롭스가 아니라 자연이었군.”
광활하게 펼쳐진 붉은 꽃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