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저-갱
근 일주일, 포스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에로아스가 처음으로 전장에서 패배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던 쿤 부대가 전멸했고, 에로아스 부대의 아돌프 C가 몰살당했다는 말까지 돌았다. 비록 거짓은 아니었으나, 민간인들의 귀에는 들어가 봐야 좋은 게 없는 것들이었다.
부대는 그에 대해 딱히 부정도, 긍정도 표하지 않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상자가 생기는 건 늘 있던 일인데, 그 무게가 남달랐다. 목숨의 무게를 어찌 재겠느냐마는 죽음이 미치는 파급력이 다르므로 어쩔 수 없었다.
에로아스가 군용기 가득 실어 온 사체를 수습하는 데도 수일이 걸렸다. 목이 잘리며 군번줄이 죄 분실된 데다가, 땅에 묻혔다가, 얼었다가, 녹았다가 등, 사건 사고가 많았던 탓에 부패되어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그들의 장의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왔다. 덕분에 대낮임에도 세상이 어둑했다. 하늘은 두꺼운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이따금 번쩍이는 번개가 지상에 내리쳤다. 덕분에 그러잖아도 우울했던 기분이 곱절로 깊어졌다.
정복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선 시윤이 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장의식에 참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윤의 동료라 봐야 모두 연구원이었으니까. 여름엔 에어컨이, 겨울엔 히터가 있는 연구실에서 사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참으로 먼 것이었다.
시윤이 거울에다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휘저어 책상 위에 있던 채혈 기계를 낚아챘다. 그리고 바늘에다 엄지를 쑤셨다. 수시로 능력을 쟀더니 이제는 보지도 않고 할 수 있게 됐다. 버릇이 되어 버린 행동이었다.
따끔한 통각이 나고, 핏방울이 맺힌 엄지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결과는 금세 나왔다.
[B+]
꽃밭에서 돌아온 후 내내 B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비록 청호와 잠자리를 가질 순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의 힘을 갈무리할 수 있을 터였다.
기계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시윤이 모자를 꾹 눌러쓰곤 방을 나섰다.
장의식은 고요하고 엄숙하게 그리고 적당히 화려하게 치러졌다. 장의식에는 사람이 많았다. 죽은 이들의 가족과 지인, 애도하기 위해 모인 시민, 그리고 이례적으로 원수까지 참석했다.
물론, 시윤의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 역시 참석했다.
덕분에 시윤은 홀로 있지 않아도 됐다. 식 차례야 이론으로 배워 알고 있지만 직접 참여하는 건 처음이고, 무슨 표정으로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간간이 눈을 마주치는 이들에게 괜히 송구스러웠다.
아버지와 형들은 계급이 높아 앞쪽에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옆에 있어 숨통이 트였다. 청호의 등 뒤에 숨어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른 안정감이었다.
예포(의례 시, 그 수례 대상에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하는 예식 절차)가 비 오는 하늘을 깼다. 순직한 병사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내내 울적하던 기분이 정점을 찍었다.
사실 포스로 돌아와서는 그들을 잠시 잊고 살았다. 복귀 첫날에는 긴장이 풀린 데다가, 청호와 몸을 섞은 고통이 뒤늦게 몰려와 끙끙 앓았다. 그래서 진통제를 먹고 종일 누워 있었다. 다음 날에는 상부 보고에 참여하고, 손목을 치료하고, 또 다음 날에는 가족들을 만나고, 그다음 날에는 모건과 함께 정체 모를 남자의 붉은 머리칼을 연구했다.
전투에서 파생된 것들을 처리하면서도, 정작 당시에 있었던 일은 아득한 꿈처럼 여겼다. 모건의 시답잖은 농담에 웃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형들과 장난도 쳤다.
그 모든 게 파렴치한 짓처럼 느껴졌다. 왜 그랬을까. 뒤늦게 후회가 됐다.
바른 자세로 꼿꼿이 서 있던 시윤이 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아 냈다. 전신을 축축하게 적신 빗물이 너무 무거워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식의 끝이 보여 억척스레 버티고 서 있을 때였다.
“시윤아.”
익숙한 음성이 시윤을 불렀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우산을 들고 선 어머니, 선화였다.
“비 맞지 말고 이리 와.”
그녀가 빗소리를 방패 삼아 소곤소곤 말했다. 시윤이 간결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이리 와.”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맞고 있는데 어떻게 저만 우산을 써요.”
“그냥 몰래 써. 아무도 뭐라고 안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죠. 엄마가 누군지 아니까.”
“그게 그거지.”
“절대 안 돼요. 원래 쓰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시윤이 거절을 거듭했다. 입매를 단단히 굳히고 제법 단호한 표정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선화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니.”
“비 정도로는 감기 안 걸려요. 형들도 다 그냥 있잖아요.”
시윤이 대열 앞쪽에 굳건히 서 있는 시준과 시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
선화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런데도 시윤은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형들이랑 너랑 같니.’
아마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허나 혹 제가 상처받을까, 삼킨 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로 시준과 시훈은 비는 무슨, 우박이 쏟아지는 걸 사흘 밤낮으로 맞고 있어도 멀쩡할 터였다. 그들은 강한 에스퍼였으니까.
하지만 괜찮았다. 비 따위에 지면 어때서. 좀 아프면 어때서. 저는 이제 가이드고, 나름 B급이다. 에스퍼와는 다른 식으로 쓰임새가 있게 태어난 거였다. 그런 것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콧잔등을 찡긋거린 시윤이 감기 따위야 약 몇 알 먹으면 금방 낫는다며 되레 선화를 꾸짖을 때였다.
갑작스레 주위가 고요해졌다. 비가 멎은 게 아니라, 아니, 멎긴 멎었는데 그게 다 멎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꼭 투명 우산을 쓴 것처럼 시윤의 머리 위로만 비가 멈췄다.
당황은 잠깐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열에 아홉은,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청호의 짓이었다. 시윤이 고개를 위로 올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청호가 태산처럼 서 있었다. 넥타이까지 한 정복 차림은 처음 봤다. 가끔 셔츠를 입어도 단추 두엇은 꼭 풀고 입는 그인데. 아무래도 날이 날이다 보니 신경 쓴 모양이었다.
“춥진 않아?”
청호가 고개를 쳐든 시윤의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으로 옮겨 간 물방울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시윤이 빙긋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뭐 하러 왔어. 안 와도 된다니까.”
“……어떻게 안 옵니까.”
머리가 잘린 채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또 죽지 못해 살아났다가 다시 죽던 모습이 이리 생생한데. 시윤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설핏 눈살을 찌푸린 청호가 시윤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뜨끈한 손바닥이 몹시 큰 위로가 됐다.
그때, 그들을 가만히 방관하던 선화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대장님. 처음 뵙네요.”
“…….”
낯선 이의 등장에 청호가 흠칫, 굳었다. 그가 선화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익숙했다. 그러다 번뜩 깨달았다. 그녀의 눈매가 시윤과 똑 닮아 있었다. 아니, 시윤이 그녀를 닮은 거겠지.
시윤에게서 떨어져 나온 청호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 모습에 시윤이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시윤은 그가 경례하는 걸 처음 봤다. 누가 경례를 해 오면 가끔 고갯짓으로 받아 주고, 대부분은 무시했던지라.
“어머, 네. 저도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선화가 그를 따라 경례했다. 그러곤 경례 참 오랜만에 한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원이 전장에서 은퇴하며 함께 은퇴한 지 벌써 십수 년이었다. 고작 경례 한 번 했을 뿐인데 당시의 기억들이 퐁퐁, 비눗방울처럼 솟아올랐다.
선화가 시윤을 바라봤다.
소개해 줘, 말 걸게 해 줘, 같이 밥 먹자고 해 봐, 등등의 요구가 담긴 눈빛이었다.
시윤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오늘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기 어려운 날이란 말이다. 시윤이 애써 선화의 시선을 피해 청호를 바라봤다.
“아직 다 안 끝났는데 왜 벌써 나오셨어요?”
“……그냥.”
청호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물에 젖어 더욱 검어진 그의 속눈썹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어디가 아픈가. 저번 전투 때 힘을 크게 써서 아직 몸이 안 좋나. 그것도 아니면 병사들을 보내기가 힘든가.
시윤이 으음, 목울대를 움직이며 고민하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윤이 딱딱하게 굳었다.
매우 많은 눈알이 청호를 향해 있었다. 그건 청호가 늘상 받아 오던 동경의 시선과 전혀 달랐다. 하나같이 날카로이 벼려져 있었다. 그 눈초리들이 뭉치고 뭉쳐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됐다.
너는 뭘 했어.
왜 내 가족을 지켜 주지 않았어.
구할 수 있었잖아.
넌 강하니까, 할 수 있었잖아.
무책임한 새끼.
혹시 네가 죽인 거 아니야?
클롭스만 죽이는 거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지?
살인귀.
괴물.
“…….”
그 문장들을 알아차린 시윤은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누가 억센 손아귀 힘으로 기도를 비틀어 쥔 것 같았다.
시윤이 반사적으로 청호의 손을 잡았다. 청호가 왜 식 도중에 제게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장의식이 시작한 지 얼마나 됐더라. 족히 한 시간은 됐지 싶은데. 청호는 저 혐오 어린 시선을 여태 감내하고 있었을까. 아니, 아니지. 이와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지금 같았겠구나.
그걸 깨달으니 속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시선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는 사람인데. 항상 부대원들을 생각하는데. 위험한 일에는 앞장설 줄 아는 사람인데. 이미 그들의 죽음에 많은 상처를 입은 사람인데.
분노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들끓었다. 그렇다고 왜 그런 눈으로 청호를 바라보냐고, 전장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소리칠 수도 없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청호를 불쾌한 시선에서 구하는 게 우선이다.
시윤이 막 청호의 손을 잡아끌려는데, 선화가 싱긋 웃으며 수완 좋게 말을 붙였다.
“우리 시윤이가 전장에서 피해는 안 끼칠는지 모르겠네요.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애라서.”
청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아닙니다, 짧게 대꾸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낀 시윤이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대충 변명 하나를 생각해 냈다.
“어, 아. 엄마. 대장님이랑 모건 대령님 연구실 가 봐야겠어요. 전투 때 수집해 온 거 연구 중이었거든요.”
“지금 말이니?”
“네, 지금.”
선화가 아쉽게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식 얼마 안 남았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아버지랑 인사하고 가지 그러니.”
그 말에 시윤이 멀찌감치 있는 아버지, 정원을 바라봤다. 신기하게도 곧장 눈이 마주쳤다. 정원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청호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내일 집에 들를게요. 아버지한텐 저 일 있어서 먼저 갔다고 해 주세요.”
시윤이 정원과 눈을 마주한 채 선화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청호의 손을 잡아당기며 뒤를 돌았다.
“가요, 대장님.”
청호는 군말 없이 순순히 끌려왔다. 선화가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봤다. 커다란 덩치의 청호가 조막만 한 시윤에게 끌려가는 게 퍽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청호는 소문과 달리 꽤 괜찮은 사람인 듯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고, 적어도 시윤에게는 그래 보였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시윤의 걱정을 달고 사는 정원에 덩달아 마음 졸였거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청호 대장님.”
선화가 나지막이 청호를 불렀다. 큰 목소리도 아니었고, 날카로운 고음도 아니었는데 짧은 문장이 청호의 귓구멍에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시윤을 당겨 멈춘 청호가 선화를 뒤돌아봤다.
“예.”
“언제 밥 한번 드시러 오세요.”
“…….”
“차 좋아하신다면서요? 집에 좋은 차가 많아요. 시윤이 아빠도 차를 좋아해서. 오시면 다 내드릴게요.”
“……예.”
조금 방정맞기까지 한 선화의 말에 청호가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도 어쨌든 긍정이긴 했다. 선화의 안색이 환하게 피어났다.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옅게 주름진 눈가가 차곡차곡 접히는 게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청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제 어미도 여태 살아 있었으면 저리 고우려나. 아니겠지. 지옥 같은 구덩이에서 저를 먹여 살리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죄 했으니까.
아니, 그래도 아주 못나진 않았을 것이다. 제가 목숨값으로 받은 돈으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입었을 테니까. 꽤 우아하고 고상했을지도 몰랐다.
뭐…… 그래 봐야 쓸모없는 상상이지.
시윤의 손을 고쳐 쥔 청호가 등을 돌렸다.
* * *
시윤과 청호는 당연히 모건의 연구실이 아니라 숙소로 왔다. 현관에 선 시윤이 비에 젖어 무거운 모자부터 벗었다. 소맷자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으, 짜증 섞인 신음을 흘리며 재킷도 벗었다. 몸에 찰싹 달라붙은 옷들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찝찝한 건 딱 질색이다.
“씻고 올게요.”
시윤이 넥타이를 헐겁게 당기며 욕실로 향하려는데, 청호가 슬쩍 앞을 가로막고 섰다.
“……괜찮은데.”
“…….”
그건 가지 말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시윤이 청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축축이 젖은 얼굴이 비에 젖은 건지 슬픔에 젖은 건지 분간이 안 됐다.
많이 힘들구나.
시윤이 재킷과 모자를 바닥에 툭 떨어트렸다. 그러자 청호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서로의 숨소리가 입술을 간질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청호의 손이 시윤의 얼굴께로 올라왔다. 그러나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만져도 돼?”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시윤의 속눈썹이 바짝 굳었다. 그런 시윤의 모습을 긴장과 두려움으로 해석한 청호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냥 만지기만 할게. 손잡고, 안고, 쓰다듬고 그런 거. 다른 건 안 해.”
시윤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청호는 불안해 보였다.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속은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사람 같았다. 와중에도 절 배려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시윤이 허공에 뜬 청호의 손을 쥐어 그곳에다 볼을 묻었다.
“……다른 것도 하셔도 괜찮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호가 반대 손으로 시윤의 허리를 감싸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시윤은 붕 뜨다시피 그의 품으로 끌려갔다. 곧장 입술이 맞물렸다.
비를 잔뜩 맞아 체온이 식은 시윤과 달리 청호는 타는 듯 뜨거웠다. 그래서일까, 그와 닿은 부분들이 찬물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간 듯 찌릿찌릿했다.
청호가 시윤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빨았다. 아랫입술을 삼켰다가, 윗입술을 핥으며 긴장감을 풀어 주려 했다. 그리고 시윤의 어깨가 한결 느슨해졌을 때쯤, 고개를 살짝 비틀고 입술을 세게 빨았다.
“으응…….”
가녀린 신음과 함께 시윤의 입술이 벌어졌다. 청호가 빠르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시윤의 달큼한 타액이 느껴졌다. 조금 맛봤을 뿐인데 눈이 뒤집힐 만큼 좋았다. 시윤의 턱을 감싸 쥐고 허겁지겁 혀를 욱여넣었다.
“읏…….”
시윤이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청호의 혀는 두껍고, 힘이 셌다. 그가 훑고 지나간 점막이나 잇몸이 아릿할 정도였다. 가끔 혀가 통째로 잡혀 빨리면 혀뿌리는 물론, 목구멍까지 아팠다.
그래도 몇 번 경험했다고 제법 적응한 건지, 이제는 미약하게나마 청호에게 응해 줄 줄 알았다. 그래 봐야 키스 중간에 기침하지 않기, 머리를 뒤로 빼지 않기 정도였지만.
타액이 규칙 없이 넘나들었다.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가 풀리고, 가끔은 공격적으로 입천장이나 볼 안쪽을 찌르기도 했다.
다행히 아프진 않았다. 손을 잡거나, 안는 수준의 스킨십을 끊임없이 해 오는지라 청호 속에 엉킨 힘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청호는 키스가 짙어질수록 시윤을 더 세게 껴안았다. 나중엔 그의 몸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야 했다. 축축하게 젖은 셔츠 너머로 청호의 단단한 근육들이 느껴졌다. 그게 괜히 부끄러워 발가락을 오므렸다.
청호의 키스는 쉬는 틈이 없고, 욕심이 많았다. 시윤의 타액은 물론, 호흡하는 숨 자락까지 죄다 훔쳐 먹었다. 그걸 견디다 보면 자연히 공기가 모자랐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숨을 참고 또 참던 시윤이 끝내는 청호의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다행히 청호는 즉시 반응했다. 입술을 뗀 그가 비에 젖어 축 내려앉은 시윤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왜? 아파?”
“하아…… 아니요. 숨이, 숨이 차서…….”
시윤이 색색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뭘 얼마나 물고 빨았다고 입술이 쓰라렸다. 차게 식었던 체온도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부딪치고 혀를 섞는 게 큰 운동력을 요하는 것도 아니거늘. 신기할 따름이었다.
1분 정도 숨을 고르던 시윤이 조곤조곤 말했다.
“아픈 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 B급이라 웬만한 건 다 괜찮아요.”
“……그런 말 하지 마.”
“예?”
“나쁜 짓 하고 싶어져.”
“나쁜…… 짓이요?”
“‘웬만하지 않은 짓’ 말이야.”
시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혹 청호가 정말 ‘나쁜 짓’ 또는 ‘웬만하지 않은 짓’을 할까 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게 실로 나쁜 짓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손 들고 환영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첫 기억이, 그러니까 첫 고통이 매우 강렬했던지라. 청호가 요구하는 게 아닌 이상, 괜히 들쑤셔 당시의 상황을 거듭하고 싶지 않았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시윤을 내려다보던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생각하는 게 저리도 또렷이 얼굴에 드러날 수가 있나.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잠시 했다.
“안 할 테니까 긴장 풀어.”
청호가 나지막이 시윤을 달랬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지라 마지막으로 시윤의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가 놨다. 그러고는 그를 안아 소파로 향했다.
시윤을 곱게 소파에 내려놓은 청호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 후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로 모자라 소매 단추까지 끌어 돌돌 접어 올렸다.
소파 등받이에 기댄 시윤이 그런 청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장님.”
“응.”
“괜찮으십니까?”
단조로운 질문이었다. 그런데 소매를 접던 청호의 손이 뚝 멎었다. 시윤은 그것에서 청호가 괜찮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답답했다.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원망과 미움을 받아 삼켰을까. 눈썹을 잔뜩 일그러트린 시윤이 청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다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청호 대장님을 잘 몰라서, 그래서 그냥…….”
“채 준위.”
“네.”
청호가 손바닥을 뒤집어 시윤의 손을 감싸 쥐었다. 고작 손잡는 게 뭐라고 닿을 때마다 황홀해진다. 참 경이롭고, 감사했다.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나는 무서워.”
“……네?”
“내가 지켜 주지 못한 이들의 가족이 나를 미워하는 게 무서워. 그 미움을 받고 있으면, 죽은 내 병사들도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
“……대장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누군가가 죽으면, 그 가족들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해. 그게 직접적인 가해자일 때도 있고, 방관자일 때도 있고, 무고한 자일 때도 있고, 좆같은 세상일 때도 있고, 가끔은 자기 자신일 때도 있지.”
“…….”
“근데 전장에서 죽으면 대부분은 나를 원망해.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을 지켜 줘야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신이거든. 근데 그 신이 할 일을 못 하면, 악마 취급을 당하지.”
청호가 소파 깊숙이 등을 묻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두툼한 목울대가 한껏 도드라졌다.
“어쩌면 나는 진짜 악마일지도 몰라. 가는 곳마다 죽음을 몰고 다니니 말이야.”
그 말에 시윤은 자신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청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장은 좋게 말하면 사람들을 지키러 가는 것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죽으러 가는 거였다. 에로아스 부대 정도 되니 이만한 사상자로 그친 거지, 대부분 C급으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반 정도 돌아오면 많이 산 거였다.
시윤이 팩팩 정성을 다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대장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계속 전장에 계셔서 모를 뿐입니다. 대장님이 구해 온 방랑자들이 몇인데. 목숨을 빚진 이들이 몇인데. 그런 생각 마세요.”
그저 그런 위로가 아니라 진실이고 진심이었다. 시윤이 청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진중히 고민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청호가 저 어두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헌데 이런 쪽으로는 영 젬병이라 도통 좋은 위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윤이 입술을 옴질옴질 움직이며 말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청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
“예?”
“지금까지는 아무도 없었거든. 가끔 이렇게 장의식에서 도망치듯 나오고 나면,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거라곤 고통뿐이었어. 목구멍에선 계속 핏물이 올라오고, 나를 원망하는 시선들은 여전히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고. 끔찍했지.”
피와 침울을 같이 삼켜야 했다. 뒤틀리는 오장육부가 버거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데, 죽으면 제가 지키지 못한 이들을 만나야 하니까. 그들을 만나 내놓을 변명거리가 없어 죽을 수가 없었다.
근데 지금은 저보다 더 우울해하고, 더 아파하고, 더 통감해 주는 시윤이 있어서. 오해다, 아니다, 괜찮다, 말해 주는 시윤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청호가 덕분에 괜찮아졌노라, 가족과의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다, 말하려 할 때였다. 시윤이 날다람쥐처럼 청호의 품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목을 껴안았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청호가 바위처럼 굳었다. 시윤 역시 부끄러운지 청호의 쇄골에 코를 묻은 채 색색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맞닿은 가슴팍을 통해 서로의 심장 박동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수 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시윤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저는요……. 저는…… 앞으로도 대장님 곁에 있을 겁니다.”
“…….”
“그리고 제가 있는 이상 더는 아플 일 없으실 거예요.”
“……고마워.”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세게 껴안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시윤 특유의 체온과 체취와 가이드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안식이 느껴졌다. 그게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제 반려 가이드는 참……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세상이 몰락해도 시윤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엄마가 살아 있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와 상응할 만큼 안정적이고 안온할 터였다.
그럴 거라 믿었다.
* * *
시윤이 묵직한 총 손잡이를 단단히 말아쥐었다. 요즘 하루가 멀다고 잡는데, 쥘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시윤은 근래 사격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강의, 정오부터 서너 시까지는 클롭스 연구, 그 후엔 모건의 연구실에서 붉은 머리카락과 기생충의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저녁엔 내내 훈련실에서 살았다.
며칠 전에는 능력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훈련실에 입성하기도 했다. 이제 가만히 있는 과녁쯤은 얼마든지 맞힐 수 있어서, 움직이는 대상을 노리는 연습을 해야 했다.
훈련실은 꼭 빙판 없는 아이스하키장처럼 생겼다. 격투 관련 강의실로도 쓰이는지라 주위에 수백 석의 의자가 놓여 있고, 훈련장과 의자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가 둘려 있었다.
먼저 훈련실에 입장하면 세팅 메뉴 홀로그램이 뜬다. 거기서 클롭스 종이나 레벨, 빠르기, 힘, 공격 무기 등을 세세히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시윤은 모든 요소를 1에 맞췄다. 몇 번 경험해 본 결과, 욕심낸다고 빨리 성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윤은 주제를 파악하는 건 누구보다 잘했다.
시작 버튼을 누르기 전, 총을 정비했다. 훈련 중에 쓰이는 총알은 실제 총알과는 달랐다. 무기를 낭비할 순 없으니 특수 제작된 탄창을 썼는데, 쏘면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총알이 나갔다. 맞는 이는 타격이 없지만, 공기를 이용해 그 반동과 힘을 비슷하게 흉내 내서 쏘는 사람은 실제 총을 쏘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청호가 만들어 준 총에 홀로그램 탄창을 끼우고, 고정쇠를 풀었다. 그리고 막 시작 버튼을 누르려 할 때였다.
“혼자 하게?”
익숙한 음성이 뒤통수를 두드렸다. 시윤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리며 올라갔다.
“……대장님?”
청호였다. 가벼운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를 입은 그가 뚜벅뚜벅 큰 보폭으로 다가왔다. 시윤이 끔뻑, 끔뻑 눈꺼풀을 움직였다. 대장님이 왜 여기……. 에로아스 부대와 훈련할 시간인데.
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청호가 허공에 뜬 홀로그램을 밀어 치웠다.
“도와줄게.”
“뭘요?”
“너 훈련하는 거.”
“호, 혼자 해도 됩니다.”
시윤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청호가 제가 훈련하는 걸 본다니. 진심으로 싫었다. 허둥지둥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고, 홀로그램일 뿐인 클롭스에게도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기까지 한단 말이다. 그 등신 같은 모습을 청호에게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러나 청호는 굳건했다.
“혼자 해 봐야 실력 안 늘어. 입력된 홀로그램 클롭스들은 널 죽이려고만 들지 어떻게 공격하고 방어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거든.”
“그래도, 그래도 괜찮습니다.”
“나랑 있는 게 싫어?”
“예?”
“나랑 있는 게 싫어서 거절하는 거야?”
“아니, 그게 어떻게 그 말이 됩니까…….”
시윤이 총 든 손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언제부터더라. 그래, 장의식 날부터, 청호는 제가 무언가 싫은 티를 내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저를 호도하곤 했다. 퍽 불쌍한 얼굴로 내쫓지 마. 밀어내지 마. 싫어하지 마. 그런 티를 내는데,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가슴께가 쿡쿡 쑤셨다.
결국엔 그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시윤이 푸욱,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봐주지 마십시오.”
“안 봐주면 너 죽을 텐데.”
“아……. 그럼 저, 적당히 봐주십시오.”
“그럼 팔이나 다리 하나가 부러질 수도 있는데.”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반면에 시윤은 웃지 못했다.
“……저 놀리는 거 재미있으십니까?”
“응.”
원망 섞인 시윤의 물음에 청호가 간결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이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미있다니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 주자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고.
시윤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청호를 올려다봤다.
“대장님.”
“응.”
“저 잘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놀리는 건 상관없는데, 비웃진 마십시오. 그건 정말 상처받을 것 같습니다.”
“…….”
“상처받으면…… 그러면…… 일주일 동안 손 안 잡아 드릴 겁니다.”
“……그거 되게 무서운 협박이네.”
청호가 큰일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못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게 퍽…… 귀여웠다. 고작 손잡는 게 뭐라고 저리 침울해한단 말인가. 저렇게나 반응이 튀니 청호가 어째서 저를 놀리는지 알 것 같았다.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고 엄한 낯을 흉내 냈다.
“네. 그러니까 이왕 가르쳐 주시는 거 진지하게, 잘 가르쳐 주세요. 저 배우는 건 자신 있습니다.”
“그래, 진지하게.”
청호가 옆으로 팔을 뻗었다. 멀찌감치 놓여 있던 경봉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청호가 그것을 휙휙 휘두르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덤벼 봐.”
“예.”
시윤이 총구를 청호를 향해 겨눴다.
두 시간가량의 훈련이 끝났을 때, 시윤은 바닥에 주저앉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을 만큼 녹초가 되어 있었다. 총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그가 가슴팍을 들썩이며 밭은 숨을 골랐다.
총을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이 뻐근했다. 심장 박동은 귓구멍을 둥둥 북처럼 울렸다. 피가 빠르게 도는 사지는 저릿저릿했고, 속눈썹까지 맺힌 땀방울은 따끔거렸다.
“하아, 하아…….”
다행히 죽지도 않았고,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경봉에 맞은 곳곳들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청호는 정말 시윤을 봐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싸웠다는 건 아니다. 청호가 마음먹었다면 시윤은 3초 안에 목이 꺾였을 터였다. 다만 간간이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방심할 때마다 허벅지나 팔뚝, 허리께를 가볍게 내리쳤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으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는 됐다.
“괜찮아?”
시윤의 옆에 쪼그려 앉은 청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색색 가쁜 숨을 내쉬는 시윤이 꼭 토끼 같았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닌가, 미안하기도 했다.
“네, 괜찮아요. 근데 정말…….”
“정말?”
“좋았습니다.”
시윤이 샐쭉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고작 두 시간. 두 시간일 뿐인데 배운 게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총을 쏘면서 눈을 감지 말 것. 상대를 끝까지 응시할 것.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총을 쏠 것. 팔다리가 아닌 머리를 노릴 것. 너무나 당연한 것들인데 정작 공격할 때는 전혀 신중히 여기지 않던 것들이었다. 시윤이 쏘는 총은 갈긴다, 라는 표현이 어울렸던 터라.
청호는 시윤의 단점을 5분 만에 파악하고는 당장 고쳐야 할 것들만 쏙쏙 알려 줬다.
“다음에 시간 나면 또 알려 주세요.”
시윤이 눈을 반짝였다. 무엇이든 간에 배운다는 행위는 매우 흥미롭다. 막연히 혼자 헤쳐 나가는 것보다 누군가가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 길잡이가 청호라면 더할 나위 없이 효과가 좋았고.
학구열 가득한 시윤에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찬물을 가져온 그가 손수 뚜껑을 따 시윤에게 내밀었다. 꾸벅 묵례한 시윤이 그것을 꿀꺽꿀꺽 맹렬하게 들이켰다.
“모건이랑 하는 연구는 어때? 뭐 좀 나온 거 있어?”
아예 시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청호가 물었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그 남자가 인간이긴 하다는 정도만요. 근데 이상한 게, 지나치게 오래된 머리카락이랍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꼭 미라의 머리카락처럼 나이가 많아요. 가발 같다고 해도 되겠네요. 아무튼 오래됐다는 거죠. 살아 있는 인간의 것 같지도 않고요. 발광 이유는 아직 못 밝혔습니다.”
“…….”
“모건 대령님도 정체 파악이 어렵다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보통 인물은 아니겠죠.”
시윤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분명 인간인데, 동시에 살아 있는 인간은 아닌 남자. 정말 미스터리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이긴 하나 그래도 에스퍼, 가이드, 퓨어, 그리고 클롭스와 동물 정도로는 분류할 수 있었는데. 남자는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았다.
시윤이 반절 정도 줄어든 물병을 내려놓았다.
“아, 대령님이 그 남자를 휴(huế)로 명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연구 파일도 휴1, 휴1-2, 이런 식입니다.”
“휴?”
“네. 연구하고 있으면 휴우-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고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군.”
청호가 혐오스럽다는 듯 눈가를 구겼다. 듣자마자 소름이 돋아나는 이유였다. 그러자 시윤이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근데 옛날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언어로 ‘색조’라는 뜻도 있답니다. 그렇게 보면 영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죠. 괴이할 정도로 붉은 남자니까요.”
청호가 비로소 조금 수긍한다는 듯 턱을 주억였다.
시윤은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석하게 반쯤 마른 땀이 몹시 불쾌했다.
“저는 여기서 씻고 가겠습니다. 먼저 돌아가세요.”
“기다릴게. 같이 가.”
청호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답을 내놓았다. 시윤은 별다른 설득 없이 네, 짧게 대답했다. 청호가 저리 말할 줄 알았던 터라. 덕분에 샤워가 급해지겠지만, 꽤나 적응한 상태였다.
시윤이 그럼 다녀오겠다며 탈의실 겸 샤워실로 걸음을 빨리했다. 청호는 멀어지는 시윤을 보다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천천히 일어났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저도 몸이나 풀려고. 그러다 땀이 나면 그것을 빌미로 시윤이 독점하고 있는 샤워실에 발을 들여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음흉한 생각도 했다.
메뉴 홀로그램을 불러온 청호가 무심한 시선으로 툭툭 설정을 변경할 때였다. 문득 그의 안광이 번뜩거렸다. 청호가 갑자기 뒤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바위처럼 옹골차게 말린 주먹 위로 화염이 일렁거렸다.
그러나 주먹은 상대방에게 닿지 못했다. 청호가 으득 이를 짓씹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붉은 머리칼의 남자, ‘휴’였다.
“아이쿠.”
휴가 과장스레 턱을 뒤로 빼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감탄사를 내놓았다. 청호는 쉬지 않고 곧장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마음 같아선 휴를 천장에 붙였다가 바닥에 내리꽂고 싶었으나, 능력이 통하질 않았다. 쓸 수 있는 힘이라곤 무력뿐이었다.
휴는 뒷걸음질 치며 청호의 주먹을 피했다. 청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약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한 대만 때리자 싶었다. 그래서 팔을 한 번 휘두르고, 휴가 뒷걸음질 치는 때에 맞춰 스텝으로 한 발 앞질러 간 다음, 그대로 돌려차기를 해 버렸다.
퍼억.
청호의 발이 그대로 휴의 갈비뼈 아래에 박혔다.
“어…….”
휴가 짧은 신음과 함께 훈련실 반대편 유리로 날아갔다. 쿵! 유리가 부서질 듯 경련했다.
청호가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그래도 맞는 걸 보니 귀신은 아닌 모양이다.
청호가 쓰러진 휴에게 다가갔다. 가는 길에 산더미처럼 쌓인 무기 중 나이프를 집었다. 훈련실의 총기류는 죄 총알이 없지만, 칼은 그냥 칼이라 얼마든지 상해를 입힐 수 있었다.
곧 청호의 그림자가 휴를 집어삼켰다. 반쯤 널브러져 피 섞인 침을 뱉던 휴가 청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청호가 그런 휴의 턱에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관심 없어. 왜 왔는지도 관심 없고. 최대한 예쁘게 죽여다가 모건한테 가져다주면 알아서 난도질해 줄 거야.”
청호가 나이프를 미끄러트렸다. 칼날은 휴의 목울대 위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는데, 어째서인지 휴는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
청호가 딱딱하게 굳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시윤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설마, 저에게 오기 전에 시윤에게 들렀나.
“혹시.”
“시윤이 안 건드렸어. 씻다가 뒤로 넘어진 게 아니면 멀쩡할걸. 오늘은 해코지하러 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렴.”
휴가 이르게 답을 내놓았다. 청호가 꾹 입을 다물었다. 신뢰할 수 없는 이의 말이었으나,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그럼 왜 왔는데.”
“너 보러 왔어.”
“…….”
“해 줄 말이 있어서.”
청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끔 호기심이라는 건 식욕보다 참기 힘든 것이다. 인간인지 괴물인지도 모를 놈의 말을 뭐 하러 듣나, 싶으면서도 여기까지 행차해서 할 말이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시윤이 없는 때에 맞춰서 왔다는 건 시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까.
그리 생각하니 어째서인지 곱절로 궁금해졌다.
“뭔데.”
“힌트 좀 주려고.”
“무슨 힌트.”
“범인 찾을 힌트.”
“무슨 범인. 좆같이 굴지 말고 제대로 말해.”
빙빙 둘러 가는 말에 짜증이 났다. 청호가 그냥 죽이자, 마음먹고 나이프를 말아 쥐었을 때였다.
“네 어미 죽인 범인 말이야.”
순간, 청호의 숨이 잘린 듯 끊겼다.
땀을 뻘뻘 흘리고 찬물로 샤워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오늘 할 일은 모두 끝났고, 약간 출출하니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지, 계획까지 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머리를 대충 말린 시윤이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탈의실에서 나왔다. 청호에게 오늘은 파스타를 먹자고 해야겠다. 크림이 잔뜩 들어가 꾸덕꾸덕하고, 베이컨 대신 두툼한 스테이크를 통째로 올린 것이 먹고 싶었다.
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넓은 어깨에 단단한 등,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죄 가려질 만큼 큰 키. 청호였다.
저런 사람이 제 반려 에스퍼라니. 갑작스레 그 사실이 매우 크게 다가왔다. 아니, 사실 가끔 이렇게 혼자 몸서리치며 좋아하곤 한다. 제가 청호의 가이드라니. 그렇게나 특별하다니.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대장님!”
시윤이 와다다 달려 청호의 곁에 붙었다. 청호가 느리게 옆으로 돌아섰다. 생글생글 웃는 시윤의 얼굴이 참으로 맑았다. 청호가 그 웃음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 집에 밥 먹으러 가도 돼?”
“예? 어디요?”
“너희 집에 말이야. 그때, 장의식 있던 날. 어머니가 먹으러 오랬잖아.”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호가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먼저 말을 꺼내다니. 뜬금없는 일이라 놀랍긴 하지만, 나쁜 건 아니었다. 제 가족을 만나 볼 의향이 있다는 거니까.
시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어머니께 주말에…….”
“내일.”
“네?”
“내일이면 좋겠는데.”
청호가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안 된다고 하면 꾸지람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시윤이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 근데 내일은 아버지가 집에 안 계셔요. 친우분들이랑 포스 동쪽으로 골프 치러 가셨거든요. 한 번 가시면 사흘은 안 오셔서…….”
“골프?”
“네. 조그마한 공을 기다란 채로 쳐서 아주 멀리 있는 구멍에 넣는 스포츠인데, 어……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근데 어빌리티 차이 없이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포츠라고 좋아하셔요. 힘이 세다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아니라고 하셨거든요.”
시윤이 엄지와 검지를 말아 골프공을 표현했다가, 양팔을 옆으로 벌려 골프채도 표현했다. 그렇게 열심히 설명하는데, 문득 청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시윤이 고개를 갸웃 뒤틀었다. 뭐가 우습지. 웃긴 설명은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시윤은 내일은 조금 어렵겠다, 말하려 했다. 근데 청호가 예상 밖의 말을 내놓았다.
“잘됐군. 내일 가지.”
“네?”
“내일.”
“아…… 어…… 네…….”
시윤은 얼떨결에 긍정하고야 말았다. 잘됐다니. 뭐가 잘됐다는 거지. 아, 혹시 아버지가 불편한가. 아무래도 계급이 높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집에 가자마자 어머니께 연락해야겠네. 당황하실 텐데 뭐라고 설득한담. 형들은 집에 있으려나.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며 걱정을 쌓는데, 청호가 훈련동 현관을 향해 발을 뗐다.
시윤이 얼른 그를 뒤따랐다.
“근데요, 대장님. 오늘 저녁은 파스타 어떠세요? 저 샤워하는데 갑자기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
시윤이 종알종알 말하는데, 청호가 우뚝 멈춰 섰다. 시윤은 하마터면 그의 등에다 코를 박을 뻔했다. 간신히 멈춰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나는데, 청호가 슬쩍 고개만 돌려 시윤을 쳐다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달빛을 삼켜 차갑게 빛났다.
“어쩌지. 나는 저녁 생각이 없는데.”
“아……. 네…….”
단호한 거절에 시윤이 고개를 수그렸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착각인가. 혹시 어디가 아픈가. 제가 씻는 새에 폭주 기미라도 온 건가.
걱정을 한 주먹이나 집어삼킨 시윤이 청호를 올려다보는데, 그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뚜벅뚜벅 걷는 걸음걸이는 늘 그렇듯 단단했고, 틈이라곤 없었다.
……아픈 게 아닌가.
아니면 다행이지, 뭐.
턱 아래를 긁적인 시윤이 바지런히 청호를 따라갔다.
본가의 벨을 누른 시윤이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구태여 벨을 누른 건 청호를 비롯한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제게 시간을 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고.
시윤이 커다란 현관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평생 살아온 집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아무래도 함께 온 이가 특별하기 때문이겠지.
시윤이 흘깃 옆을 훔쳐봤다. 말쑥한 수트 차림의 청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가족들 모두 수더분한 성격이에요,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청호보다 제가 더 긴장한 것 같아서.
더군다나 어머니는 그렇다 해도 형들은 절대 남들에게 수더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하필 오늘 둘 다 일이 없어서는. 동생 사랑이 지극한 그들이 청호를 못살게 굴 것 같아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시윤이 불안한 마음에 뒤꿈치를 들썩이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곱게 원피스를 차려입은 선화가 밝은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다.
“엄마.”
시윤이 선화의 품에 안겼다. 선화가 고작 며칠 안 봤을 뿐인데 보고 싶었다며 시윤을 부둥부둥 얼싸안았다. 시윤이 히죽 철없이 웃으며 그녀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역시 엄마가 최고다. 그런 뻔한 말이 절로 떠올랐다.
“아, 엄마. 이쪽은 청호 대장님.”
“그럼, 그럼. 알지, 알지.”
시윤의 소개에 선화가 청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
청호가 그런 선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당황이 넘실거렸다. 놀란 시윤이 대신 선화의 팔을 내려 주었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 선화가 민망하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아들만 셋이라 또래 남자만 보면 다 아들 같고 그래요.”
“……아닙니다.”
“어여 들어와요.”
“예, 실례하겠습니다.”
청호가 꾸벅 묵례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시윤의 집은 컸다. 모건이 귀한 집 아들이라 귓구멍이 아릴 정도로 말해서 알고는 있었는데, 눈으로 보니 더했다. 포스 안에서 3층짜리 저택은 여간해선 보기 힘들었다. 이따금 포스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과거 재벌들의 집이나 별장 같은 것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깨끗하고 정돈이 잘된 집은 여기저기 손때가 묻어 있었다. 아니, 손때라 표현하면 뭣하고 아, 그래. 애정과 추억이 묻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복도를 따라 나란히 걸린 가족사진, 삼 형제의 어릴 적 사진, 시윤의 학위를 비롯해 가족들이 받은 수많은 훈장도 보였다. 신경 써서 기르는 듯한 화분들, 조잡하지 않게 놓인 예술품과 장식들 역시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집이…… 좋네요.”
청호가 그것들을 샅샅이 훑어봤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복도와 그 끝에 있는 계단을 유독 유심히 응시했다.
“그래요? 대장님 온다고 청소했거든요. 이쪽으로 와요. 점심 안 먹었죠? 열심히 준비하긴 했는데,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
선화가 청호를 다이닝 룸으로 안내했다. 따뜻한 색의 원목 테이블에, 은은한 금빛 조명이 인상적인 장소였다. 그곳엔 시준과 시훈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대령, 채시준입니다.”
“소령, 채시훈입니다.”
두 사람이 청호를 향해 경례했다. 아무리 동생의 에스퍼라 해도 어쨌든 청호는 대장이라는 계급이었고, 시준과 시훈보다 한참이나 위였다. 어디서, 어떤 관계로 만나든 예를 표해야 했다.
청호가 느슨한 몸짓으로 경례를 받았다. 시윤이 그런 셋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비로소 청호가 제 가족에 속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시준, 시훈의 가이드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왔는데 신이 맺어 준 인연이라는 게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죽지 않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니. 로맨틱하지 않은가.
선화가 테이블 가운데 자리로 청호를 이끌었다. 청호는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하곤 의자에 착석했다. 시윤은 그 옆에 앉았고, 형들과 선화는 맞은편에 앉았다.
청호가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봤다. 무엇 하나 대충 준비한 게 없었다. 수북이 쌓인 샐러드도 채소별로, 색별로 예쁘게 담겨 있었다. 맛깔스레 구운 식전 빵도 노릇하게 색이 잘 입혀진 거로만 골라 담은 게 보였다.
그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청호의 시선이 빈 의자에서 멈췄다. 가장 상석. 아마 시윤의 아버지인 정원의 자리였을 의자를.
“어여 들어요.”
선화가 샐러드 집게를 청호 쪽으로 옮겼다. 청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샐러드를 집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접시가 아닌, 시윤의 앞접시를 먼저 채웠다. 시윤의 광대가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아이…… 제가 해도 되는데…….”
시윤이 슬쩍 어깨를 비틀며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시준과 시훈을 바라봤다. 봐 봐, 우리 대장님 엄청 잘해 줘. 그런 표정이었다.
식사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선화는 음식이 바뀔 때마다 입맛에 맞냐, 맛은 괜찮냐, 물었고 청호는 짧게 긍정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대화는 대부분 삼 형제들이 했다. 늘 그렇듯, 반은 쓸데없는 말장난이었고, 또 반은 여러 가지 근황들이었다. 형들은 최근 있었던 전투나, 새로운 클롭스의 목격담을 늘어놓았고, 시윤은 어제 청호와 훈련실에서 사격 연습을 했다느니, 오전 강의에서 신병이 아주 흥미로운 발상을 했다느니 등을 말했다.
그러는 내내 흘끔흘끔 청호를 훔쳐보던 시훈이 넌지시 물었다.
“원래 말이 없으신가 봅니다.”
시비는 아니었고, 궁금해서였다. 물론 청호의 이미지상 말이 많은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시윤에게 듣기론 먼저 오고 싶다 했다는데. 아무런 말도 없는 게 영 아니꼬웠다. ……따지고 보니 시비가 맞는 것 같다.
청호가 느릿하게 움직이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반쯤 먹다 만 스테이크가 질질 피를 쏟아 냈다.
“……뭐. 그런 편입니다.”
썩 성의 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준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을 때였다. 시윤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나랑 비슷해. 나도 말 없잖아.”
“그럼 둘이 있을 때 되-게 심심하겠네.”
“아니야. 같이 책도 읽고 대장님이 예쁜 것도 만들어 주시고 그래.”
“예쁜…… 거?”
도무지 청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시훈이 턱을 안으로 당겼다. 시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익살맞게 말했다.
“그런 게 있어. 대장님이 손재주가 좋으시거든. 아니, 손재주가 아닌가……. 아무튼, 못하시는 게 없으셔서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구경할 게 많아.”
여러 가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리로 만든 에펠 탑, 핫 팩처럼 따뜻한 탄창, 뜨겁지 않은 불 등등. 그것들을 떠올린 시윤이 히죽 팔푼이처럼 웃었다. 그 모습에 선화가 따라 웃었다.
시윤이 말하는 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입대하고 저리 웃는 건 처음이니 뭐든 괜찮다, 싶었다. 식사가 마무리되고, 선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식기를 정리했다.
“디저트는 시훈이가 직접 파블로바를 구웠어요. 티는 종류가 많은데 직접 고를래요?”
“아, 배가 불러서. 디저트는 괜찮습니다.”
청호가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을 내놓았다. 선화의 안면에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저것 진득하게 물어보고 싶었거늘. 예상외로 식사가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
“어머……. 그래요? 그럼 싸 드릴게요. 돌아가서 먹어요.”
“예. 그러죠.”
짧게 대답한 청호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후 시윤을 바라봤다.
“채 준위.”
“네?”
“집 구경 안 시켜 줘? 나 네 ‘화목한 방’ 보고 싶은데.”
“아, 네, 네. 그럼요.”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시윤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 손님을 집에 데리고 온 건 처음이라 서툰 게 많았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님.”
선화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청호가 다이닝 룸을 벗어나려 막 등을 돌렸을 때였다. 시준이 청호의 뒤통수에다 대고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근데 반려 가이드를 아직도 계급으로 부르십니까?”
청호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그게 편해서.”
“아주 먼 사이처럼 느껴지네요.”
“…….”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윤의 방은 2층 계단 앞이었다. 베이지색 방문이 시윤과 참 잘 어울렸다. 쑥스러운 듯 뒤꿈치를 들썩이던 시윤이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윤의 냄새였다. 정확히는 시윤의 살 내음. 그의 목덜미에 코를 처박아야만 느낄 수 있는 냄새.
청호가 그것을 깊게 들이마시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윤의 방은 매우 넓고, 햇살이 가득했다. 커다란 창을 흰 커튼이 가리고 있었는데, 얇고 가벼워서 햇볕을 그대로 들여왔다.
“학생 때랑 크게 다른 점이 없어요. 제가 입대하고부터는 집에 잘 안 들어와서…….”
이불이 곱게 펼쳐진 침대는 시윤이 언제든 들어와 잘 수 있도록 누군가가 정성 들여 정리한 모양새였다. 한쪽에는 민간인이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포스 안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 말이다.
낡은 피아노나 기차 모양 장난감이나 만년필, 크레용, 곰 인형 같은 것들. 아마도 전장에 자주 나가는 형들이 주워다 준 거겠지. ‘청호의 만물상’에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봐 줄 만했다. 한쪽에는 귀하게 취급되는 A4용지도 박스로 쌓여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집에서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고 사는 막내아들의 방다웠다.
청호가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었다. 시윤은 참 행복하게 살았구나. 이 좋은 집에서,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아왔구나. 그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시윤의 방을 한 바퀴 크게 돈 청호가 물었다.
“네가 드나드는 방은 이게 끝이야?”
“네? 아, 어…… 네. 여기뿐이에요. 3층은 죄다 손님방이라서. 2층의 나머지는 형들 방, 어머니 서재, 아버지 서재고요.”
“……서재?”
“네. 제가 어릴 때는 부모님이 다 현역에 계실 때라서 일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땐 부대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도 않고, 건물들도 짓기 전이라 회의도 집에서 하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엄청 왔다 갔다 했던 게 기억나요.”
시윤이 먼 과거를 가늠하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청호가 덩달아 눈을 가늘게 좁혔다. 회의를 집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그 문장이 창살처럼 뇌리에 꽂혔다.
그때,
“시윤아! 잠깐 내려와 보렴!”
멀리서 선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간식을 가지고 가라는 부름일 터였다.
“대장님, 잠시만 여기 계세요. 얼른 올게요.”
청호의 팔뚝을 가볍게 쓰다듬은 시윤이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탁탁탁, 바닥을 두드리는 시윤의 발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이윽고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우두커니 서 있던 청호가 민첩한 몸놀림으로 방을 나섰다.
청호는 복도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사랑이 가득한 집은 무엇 하나 잠겨 있는 문이 없었다. 덕분에 수색이 수월했다. 시준, 시훈의 방으로 추정된 곳을 지나고 선화의 서재도 지났다. 이제 남은 문은 하나였다.
청호가 마지막 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헌데 문고리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고 틱틱, 중간에서 멈췄다. 잠겨 있는 것이다. 문고리 위에는 지문 따위를 찍는 듯한 패드도 보였다.
“…….”
비밀스러운 게 들어 있다고 광고를 하는군. 청호가 비죽, 입술을 뒤틀었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손바닥 반만 한 기계를 꺼냈다. 소형 EMP 기계였다. 반경 수 킬로미터의 전자 기기를 멈출 만큼 파급력이 세진 않고, 딱 주위의 기계만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문에 부착한 청호가 기계를 가동했다. 곧 은은한 빛을 내뿜던 패드가 픽, 하고 죽었다. 이까짓 문, 얼마든지 부술 수 있지만 그랬다간 흔적이 남는다. 그건 안 됐다.
혹시 제가 찾는 것이 이곳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이 모든 행위가 파렴치한 오해가 되니까. 그리고, 그러길 바라니까.
마지막 방은 역시나 정원의 서재였다. 한쪽에 세워진 골프채, 크고 작은 조명등, 곱게 걸린 정복, 각양각색의 총기, 그리고 검은색 책상과 열댓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테이블.
청호가 넓은 서재를 찬찬히 훑어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 물건들이 공중으로 비행했다. 그러곤 한 바퀴 휙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언가 숨겨 둔 게 있으면 떨어질 터이다. 사실 청호는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몰랐다.
‘거기에 있어. 힌트.’
휴에게 들은 거라곤 그게 다인지라.
대부분의 물건을 뒤졌으나 특별할 게 없었다. 잘 정돈된 서재는 온갖 것들이 움직여도 먼지조차 날리지 않았다. 서재 가운데에 우직하니 선 청호가 이번엔 서랍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 테이블 아래에 있던 서랍, 장식장 서랍들이 일사불란하게 빠져나와 내용물을 청호의 앞에 보여 주고는 돌아갔다.
하나같이 쓸데없는 거였다. 군사 기밀, 세금 유통, 고위 계급의 각종 비리 같은 게 나오긴 했으나 청호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거였다.
그때였다. 철커덕.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청호가 눈을 번뜩였다. 잠긴 서랍이다. 자물쇠가 걸린 서랍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덜컹거리고 있었다.
청호가 이번엔 친히 몸을 움직여 책상 서랍으로 다가갔다. 근데 서랍이란 서랍은 이미 죄 빠진 상태였다.
설핏 눈살을 구긴 그가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책상 위판 아래에 달린 작은 철제 서랍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책상에 있는 건 아니고, 따로 용접해 단 것 같았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게 들어 있소, 소리치는 꼴이었다.
청호가 아귀힘으로 그것을 뚝 떼어 냈다. 철이면 뒤처리가 쉽다. 녹여서 그대로 다시 붙여 놓으면 되니까.
“…….”
내용물을 마주한 청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2280]
[2281]
[2282]
⋮
[2317]
[2318]
[2319]
[2320]
숫자 네 개가 적힌 칩이 세로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숫자의 의미는 파악하기 쉬웠다. 연도겠지. 어울리지 않게 일기를 쓰는 취미라도 있는 걸까. 청호가 엄지손톱만 한 칩들을 보며 콧잔등을 구겼다.
주머니에서 홀로그램 바를 꺼낸 그가 칩 하나를 바 하단의 포트에 끼워 넣었다. 잠시 로딩 화면이 지나가고, 파일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1월]
[2월]
[3월]
⋮
[11월]
[12월]
월별로 나누어진 폴더였다. 뭐야, 진짜 일기 아니야? 청호가 께름칙한 낯으로 폴더를 터치했다. 그러자 이번엔 1일부터 31일까지의 일별 파일이 떴다. 듬성듬성 비어 있긴 했으나, 제법 꾸준했다.
그중 손 닿는 대로 하나를 터치했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동영상이 떠올랐다. 배경은 지금 청호가 있는 이곳, 정원의 서재였다. 대충 위치를 보아하니 오른쪽 구석의 조명에다 카메라를 달아 놓은 듯했다.
지금은 괜찮다. EMP를 쓰고 들어왔으니 카메라도 먹통일 터였다.
화면 속 중앙 테이블엔 정원을 포함한 다섯 명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얼굴이 익숙한 자들이었다.
포스의 개국 공신인 원수들. 지금보다 젊은 모습의 그들이 심각한 낯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방사선 수치를 얼른 조절해야 하네. 상황이 좋지 않아.
―하지만 자본이 부족해. 자네도 알잖나.
―이렇게 가다간 우리 계획이 무너지고 말 걸세.
―그럴 순 없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900여 개가 전부 동났나?
―우리가 아직 손대지 못한 곳이 있을 거야.
내용을 단번에 파악하기 힘든 대화였다. 그러나 청호가 찾던 건 아니었다. 그가 다른 칩을 집어넣었다. 그 역시 같은 배경에, 같은 등장인물이었다.
그쯤, 청호는 이 칩들이 전부 이곳에서 있었던 원수들의 대화를 녹화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
그럼, 봐야 할 건 하나다. 청호는 [2302]라 적힌 칩을 빼내 홀로그램 바에 넣었다. 청호의 신분이 방랑자에서 포스의 국민으로 바뀌었던 그 해였다. 그 파일을 모두 복사했다. 일일이 볼 시간이 없었다. 혹시나 해 전후 년의 칩들도 복사했다.
그리고 있던 그대로 칩을 정리하고, 철제 서랍을 원위치에 붙였다. 헤집은 서랍과 장식품들도 모두 제자리에 뒀다. 그 후 빠른 몸놀림으로 서재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EMP를 떼는 순간, 계단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케이크와 차가 담긴 트레이를 든 시윤이었다.
계단을 올라온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방과 정 반대편에 있는 청호가 이상했다.
“대장님? 왜 거기…….”
“그림이 예뻐서.”
청호가 대충 앞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형광기가 넘실거리는 노을 아래에 호수가 펼쳐져 있고, 가운데에 부두가 길게 나 있는 그림이었다. 시윤이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아, 그건 <나무 부두>라는 그림인데요, 제가 집에 있는 그림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거예요.”
그의 설명에 청호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윤 몰래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힌트’가 들어 있는 홀로그램 바가 선연히 느껴졌다.
* * *
청호는 시윤의 집을 방문했다가 부대로 복귀한 이후, 종일 보이지 않았다. 폴에게 듣기론 계속 대장실에 있다는데,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인기척도 없단다.
사실 시윤은 청호에게 대장실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긴, 저조차도 개인 연구실이 있는데 그에게 개인 공간이 없을 리 없었다.
밥은 먹고 있나. 잠은 자나. 대체 뭘 연구하고 검토하기에 숙소에 들르질 않나.
시윤은 고작 하루 그를 못 봤을 뿐인데 내내 그의 걱정만 했다. 전장에 나간 것도 아니고, 포스 안에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가 옆에 있는 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냥 전화해서 뭐 해요? 바빠요? 언제 와요? 라고 물어보면 될 것을,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바쁘겠지. 중요한 일이 있겠지. 다른 부하 병사들과도 소통이 없을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겠지. 제가 괜히 연락해 봐야 방해만 되겠지. 등등,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훈련실에서 잔뜩 구르다 온 시윤이 책상 앞에 앉았다. 방금 씻고 나온 터라 축축이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채혈 기계에 꾸욱 엄지를 눌렀다가 뗐다.
[B+]
“…….”
오늘은 그냥 B도 아니고, 자그마치 B+이다. 그런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능력을 쓸 곳이 없기 때문이다.
푸욱 한숨을 내쉰 시윤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다음 날, 오전 강의를 끝내고 모건의 연구실로 향하는 시윤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오늘 새벽, 에로아스 부대가 출정했다는 소리였다. 시윤은 그것이 헛소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부대도 아니고 에로아스의 출정을 제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헌데 만약 진짜면 어쩌지. 물론, 제가 꼭 함께 출정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래도 스케줄 정도는 늘 알고 있었단 말이다. 청호가 직접 언질 주든, 폴이 대신 찾으러 오든, 그것도 아니면 모건이 귀띔해 주든. 어떤 방식으로든 알게 됐다.
근데 이번 출정은 전혀 들은 게 없었다. 새벽이면 제가 자는 동안 출정했다는 건데. 혹 자고 있어서 일부러 깨우질 않은 건가. 시윤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혼란에 물든 채 모건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연구실엔 인기척이 없었다. 모건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시윤은 익숙하게 가운을 찾아 입고, 분석 기계에 들어가 있는 휴의 붉은 머리카락을 살폈다. 고작 머리카락 하나를 몇 주째 살펴보고 있는 건지. 이제는 눈을 감아도 발광하는 머리칼이 아른거릴 정도였다.
지루한 낯빛을 숨기지 못한 시윤이 일지를 작성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어, 채 준위?”
모건이었다.
“오셨어요?”
시윤이 가볍게 경례했다. 그리고 다시 일지를 들여다보는데, 의아한 표정의 모건이 물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출정 안 했어?”
“…….”
바지런히 움직이던 시윤의 홀로그램 펜이 우뚝 멈춰 섰다.
아아, 에로아스가 진짜 출정했구나. 위태로이 직선을 그리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공식적으로 저는 에로아스 부대 소속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투에 매우 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청호의 힘이 불안정한 게 아닌 이상, 꼭 동행할 필요는 없었다.
근데 왜 이리 서운한지. 등신 같은 자아가 저도 모르게 에로아스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그렇게 됐어요.”
시윤이 애써 침울한 기분을 숨기며 대답했다. 그런 시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건이 음흉하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왜? 청호가 또 위험하다고 오지 말래? 저번 Z 구역 전투도 상부에서 너 데려가라니까 눈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안 된다고 화내던데. 이번에도?”
“……뭐, 네.”
“하여튼 새끼, 그렇게 안 생겨서 팔불출이야.”
모건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끊임없이 웃었다. 그러나 시윤은 그 웃음에 동조해 주지 못했다.
그렇게 이어진 연구에서 시윤은 초보적인 실수를 연발했다. 모건은 청호가 그렇게 걱정되냐며 타박했다.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답답하게 있지 말고 청호에게 연락해 볼까. 아니, 차라리 폴한테……. 그런 생각을 하다 제 주제가 너무 구질구질한 것 같아 말기로 했다.
그리고 사흗날 밤, 폴에게 연락이 왔다.
청호가 폭주했다는 연락이었다.
헬기 차창에 이마를 박은 시윤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군용기가 아니라 헬기는 처음 타는데 구경할 정신도 없었다. 타타타, 타타타타, 세차게 움직이는 헬기의 날갯소리가 아득히도 멀리서 들려왔다.
창밖으로 익숙한 포스 전경이 지나갔다. 그 후로는 포스가 수시로 탐색을 나가 정화된 환경이, 다음으로는 황폐화한 도시가, 또 황량한 들판이 지나갔다. 그렇게 몇 개의 풍경을 흘려보냈을까.
시야가 희뿌옇게 번지기 시작했다. 구름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을 한참이나 가로질렀다. 그러다 창밖이 맑게 개는 순간, 시윤이 숨을 꿀꺽 삼켰다.
“…….”
전장이다. 말 그대로 전장이었다. 전장이라는 단어를 상기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에 완전히 부합했다.
여기저기서 폭발음이 터지고, 불길이 치솟고, 거무튀튀하게 탄 연기가 해일처럼 솟아오르고, 재가 흩날렸다. 거기다 땅이 검붉은 액체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꼭 피로 만들어진 폭우가 내린 것처럼. 널브러진 클롭스 시체는 또 얼마나 많은지.
아비규환이었다. 처절한 비명과 고함이 상공에서도 들리는 듯했다. 저 지옥 같은 어딘가에 청호가 있다 생각하니 다리가 방정맞게 덜덜 떨려 왔다. 생전 씹지 않던 엄지손톱도 닥닥 깨물었다.
―목적지 도착 1분 전.
이어폰을 타고 조종사의 말이 들려왔다. 시윤이 손톱을 씹던 그 채로 굳었다.
시윤은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폴에게 떠밀려 곧장 대장 막사로 향했다.
“전투 중에 폭주가 온 거예요? 갑자기?”
시윤이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물었다. 창백한 안색의 폴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갑자기는 아니고, 힘을 너무 많이 쓰셨어.”
“적이 그렇게 강했나요?”
“……그렇진 않았는데.”
“예?”
“꼭 뭐에 화가 나신 것처럼…… 전투 지휘도 안 하시고 그냥, 그냥 다 잡아 죽이셨어.”
“……예?”
시윤이 턱을 앞으로 뺐다. 청호가 왜 화가 나. 무슨 일이 있었나. 전장에서는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인데. 갑자기 어머니와 관련한 기억이라도 떠오른 걸까. 아니면 출정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나. 그래서 능력을 컨트롤하기가 힘들었을까.
그러잖아도 가득하던 걱정이 아예 범람하기 시작했다.
시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채혈 기계를 만지작거렸다. 헬기에서 잰 어빌리티 등급은 B0였다. 이것으로는 청호의 폭주를 잠재우기 한참 부족한데, 어쩐다.
B와 A는 하늘과 땅 차이다. B는 키스만으로도 아플 수 있단 말이다. A는 되어야 그와 잠자리를 가질 수 있을 텐데. 지금 몸을 섞었다간…….
시윤이 걱정과 불안, 두려움을 겹겹이 쌓아 가고 있을 무렵, 대장 막사 앞에 도착했다. 폭주가 온 SS급 에스퍼가 있다기엔 지나치게 고요한 막사였다.
숨을 크게 들이켠 시윤이 천막을 들추려는데, 폴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그…….”
“예.”
“대장님 잘 부탁해.”
“…….”
시윤이 버석하니 굳었다. 타인에게 청호의 안위를 부탁받는 건 처음이었다. 제가 그의 가이드이니 당연한 건데, 폴의 입으로 들으니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 제가 그의 안위를 도맡아야 하는 사람이구나.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시윤에게 짐 아닌 짐을 계속해서 끼얹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
“대장님께 폭주가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 그냥 고통스러워하시는 걸 지켜봐야만 했어. 근데 지금은 네가 있으니까…… 다행이지. 정말 다행이야.”
나쁜 의도는 아니었으나, 시윤은 어쩐지 목이 졸리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최선을 다할게요.”
나지막한 시윤의 말에 폴이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수 막사 천막을 걷어 줬다. 시윤이 꾸벅 묵례하곤 막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첫 공간은 사화산 때와 다름없이 널따란 테이블과 열댓 개의 의자가 놓인 작전 지휘 본부였다. 시윤이 흐트러진 의자들을 지나며 청호를 불렀다.
“……대장님. 저 왔어요.”
“…….”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설마 막사에 없나. 그도 아니면 쓰러지기라도 했나. 불안해진 시윤이 예의도 모르고 두 번째 천막을 훌떡 들췄다.
“대장님?”
막사는 어두웠다. 그래도 청호가 의자에 앉아 양쪽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있는 건 보였다. 허나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 좀, 불 좀 켤게요.”
시윤이 게처럼 옆으로 걸으며 팔을 휘적거렸다. 이쯤에 조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손가락 끝에 차가운 철제 기둥이 만져졌다. 시윤이 기둥을 더듬어 버튼을 찾아냈다. 곧 딸깍이는 소음과 함께 내부가 밝아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은 아니고, 적당히 은은한 빛이었다. 덕분에 청호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앉아 있는지는 보였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피였다. 청호가 앉은 철제 의자 아래로 고여 있는 피. 아니, 웅덩이라고 설명하는 게 맞겠다. 처음엔 당연히 클롭스 피겠거니, 했다. 사화산 때처럼 클롭스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피를 떨어트리는 거라고.
근데 이상하지. 클롭스 특유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비릿한 내음뿐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클롭스가 하나같이 악취를 내뿜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근데 의자 다리를 타고 흐르는 피가 유난히 생생했다.
“…….”
숨을 멈춘 시윤이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크고 작은 돌과 모래들이 청호의 무릎께까지 떠올라 와 경련하고 있었다. 저건 몇 번 본 적 있었다. 내부로 폭주를 삼키긴 하지만, 갈무리되지 못한 힘은 주변 사물을 어그러트리거나 저렇게 공중으로 띄우곤 했다.
시윤이 조금 더 시선을 올렸다. 근데 어째 청호의 옷이 너무 젖어 있었다. 검은 티셔츠인 탓에 무엇에 젖어 있는진 모르지만,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그의 도드라진 근육과 가쁘게 들썩이는 호흡이 육안으로도 훤히 보였다.
설핏 미간을 찌푸린 시윤이 청호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청호의 상체를 보는 순간, 덜컥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청호의 한쪽 어깨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빨이 큰 무언가에게 물렸는지, 살덩이가 움푹움푹 파여 있었고, 피와 살이 짓이겨진 틈으로 희멀건 뼈도 보였다. 거기다 상처에 얽혀 있는 티셔츠까지. 저 피 웅덩이가 모두 청호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던 모양이다.
시윤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고는 꼴사납게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폭주가 왔다고만 했지 다쳤다는 건 못 들었는데.
얼마나 아플까. 저라면 까무러쳤을 텐데, 우두커니 앉아 있는 청호가, 그 와중에도 폭주의 고통을 삼키는 청호가 대단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제가 뭐라고 눈시울이 다 홧홧해질 정도였다.
수 초간 멍청하니 굳어 있던 시윤이 헐레벌떡 청호의 곁에 붙어 섰다. 가까이서 보니 상처는 더 심각했다. 저의 얕은 의학 지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응급 처치가 아니라 당장에 수술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일단, 일단 치료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
“제가 지금 의무병을…….”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시윤이 뒤를 돌았다. 그때, 청호가 시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지글지글 끓는 손바닥이었다. 거기다 피로 담뿍 젖어 미끈거리기까지 했다.
시윤이 다급하게 청호를 되돌아봤다. 의무병을 기다리지 못할 만큼 아픈 건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청호는 붉은 눈동자로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휴의 붉은 눈동자와는 전혀 달랐다. 굳이 묘사하자면 휴의 눈동자는 루비 같은데, 청호의 눈동자는 화염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잔뜩 튀어 있었다. 평소와 달리 가파른 오르막을 그린 눈썹에는 고통과 짜증이 묻어 있었고, 반면에 한일자로 다물린 입술에는 감정이라곤 없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희한하게 등줄기가 선득했다. 꼭 저를 뜯어 먹으려 침을 질질 흘리는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 할 때였다. 청호가 시윤의 손목을 꽈악 움켜쥐었다. 순간 손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거기다 닿은 피부를 통해 스며드는 청호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엄청난 고통에 어깨가 귓불까지 올라오고, 허리가 뒤틀렸다. 고작 손목 하나 잡혔는데도 그랬다.
“아흑…….”
처음엔 폭주 중이라 힘 조절을 못 했나, 싶었다. 항상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던 사람이 얼마나 아프면……. 구겨진 눈가를 애써 편 시윤이 보드라운 음성으로 청호를 타일렀다.
“대장님……. 폭주가 아픈 건 알지만, 그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일단 치료부터 하는 게…….”
“누워.”
“예?”
“누우라고.”
서늘할 정도로 낮은 음성에 시윤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어려운 명령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정신이 멍해졌다.
“어…… 아, 예…….”
잠깐 굳어 있던 시윤이 외투를 벗으며 침대로 올라갔다. 그리고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어색하게나마 셔츠 단추를 풀었다. 그렇게 막 단추를 네 개쯤 풀었을 때였다. 골반이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뒤집혔다.
놀란 시윤이 끔뻑끔뻑 눈꺼풀을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는 도중에 바지가 쑥 내려갔다. 버클을 풀지 않고 내리는 바람에 골반과 허벅지가 죄 쓸렸다. 헌데 너무 놀라서 신음조차 뱉지 못했다. 둔부를 스치는 서늘한 공기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사타구니를 오므리자, 청호가 엉덩이를 양쪽으로 쭉 벌렸다. 그리고 뜨겁고 두툼하며 또 단단한 무언가가 곧장 뒷구멍 위를 내리눌렀다. 시윤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졌다. 설마 아무런 전희 없이 바로…….
아니겠지, 아니겠지, 애써 마음을 추스르는데 청호가 아래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빡빡한 구멍이 짓눌려 오목하게 파였다. 시윤이 순식간에 파리하게 질렸다.
“대장, 대장님. 잠깐만요. 잠깐마, 아흑…….”
시윤이 팔을 버둥거리며 청호를 만지려 했다. 첫 경험 때는 로션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구태여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장에 삽입은 불가능했다.
물론 그가 현재 매우 고통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단 포옹이나 키스부터 해야 했다. 그의 힘을 빼낼 수 있을 만큼 빼내야 제 비루한 몸뚱이가 삽입을 견딜 수 있단 말이다. 아니면 중간에 까무러칠 게 뻔했다. 그럼 홀로 남은 청호는 어쩌나. 다시 저 폭주를 삼키기만 해야 할 텐데. 그럼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청호는 막무가내였다. 시윤의 등을 아래로 콱 짓누르더니 꾸역꾸역 성기를 욱여넣었다. 그러나 시윤의 뒷구멍도 만만찮았다. 무언가를 받아 낸 적이라곤 한 번뿐인지라 쉽게 청호를 허락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서로에게 고통뿐인 행위였다.
“허윽, 큭, 아…… 흐으, 윽…….”
꽉 눈을 짓이기듯 감은 시윤이 덜덜 몸을 떨었다. 힘을 풀어야 하는데, 그래야 청호가 들어올 수 있는데, 바짝 긴장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끝내는 단단하다 못해 돌덩이 같은 청호의 성기가 승리했다. 시윤이 어떻게든 꽉 막힌 숨을 내뱉으려 단전에 힘을 빼는 순간, 투두둑- 뒤를 가르며 깊숙이 침입하고야 만 것이다.
“아아악!”
시윤이 하늘이 찢어지라 비명을 질렀다. 사타구니부터 배꼽까지 반으로 찢어진 것 같았다. 칼로 가른 게 아니라, 아귀힘으로 마구 찢어발긴 듯했다. 거기다 여린 내벽으로 스며오는 청호의 힘이 정말 끔찍하리만큼 아팠다. 청호의 성기에서 가시가 돋아난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시윤과 달리 청호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던 힘이 단숨에 잠잠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전장 특유의 매캐한 공기로 가득 차 있던 폐부가 시윤이 제공하는 청량함으로 정화됐다. 더러운 피로 얼룩져 있던 핏줄은 갓 태어난 신생아의 것처럼 맑아졌다.
온몸에 스미는 시윤을 느끼던 청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성기를 쑥 빼냈다가 힘껏 박아 넣었다.
“큭…….”
시윤이 얼른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행여 제 비명이 바깥까지 들릴까 봐.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온 신경은 청호가 있는 이곳, 대장 막사에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 다른 병사들도 폴처럼 청호의 폭주를 걱정하고 있을 거란 말이다.
그런 와중에 제 비명이 들려 봐야 혼란만 가중될 게 뻔했다. 이곳은 전장이다. 가뜩이나 청호가 자리를 비운 지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제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어도, 설사 정말 찢어져서 죽는다 하더라도 참아 내야 했다.
“윽…… 흐, 읏…….”
그러나 있는 힘껏 입을 막아도 청호가 움직일 때마다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갔다. 뒤를 북북 발기고 들어오는 성기가 끔찍하리만큼 아팠다. 오장육부는 염산이라도 들이켠 듯 따갑고 시큰거렸다. 소화하지 못한 청호의 힘이 단전에서부터 사지 끝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아파요. 대장님, 아파요.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살살……. 대장님. 잠깐만요. 제발.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무엇 하나 내뱉을 수가 없었다. 세게 깨문 아랫입술을 놓으면 정말 세상이 떠나가라 엉엉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사실 이미 울고 있었다. 눈물로 뭉개진 시야가 하늘과 땅의 구분을 어려워했다. 시윤은 단지 아픈 것만으로도 서러울 수 있다는 걸 태어나 처음 깨달았다.
그런 시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청호는 이까지 아득 겹쳐 문 채 허리를 앞뒤로 움직여 댔다.
시윤의 하얗고 통통한 엉덩이 사이로 검붉은 청호의 성기가 사라졌다가 드러나길 반복했다. 그걸 보고 있으면 목구멍이 바짝 메말랐다. 이미 성기를 있는 대로 다 쑤셔 넣고도 모자라서 갈증이 일었다. 가능만 하다면 아예 시윤의 몸을 갈라다 그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하…… 씨발.”
시윤의 골반을 바투 쥔 청호가 힘껏 허리를 치댔다. 제 사타구니에 얻어맞은 시윤의 엉덩이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 꼴이 참 보기 좋았다. 고통에 내몰려 파르르 경련하는 등줄기도,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훌쩍이는 울음소리도, 새빨갛게 익은 귓바퀴도, 베개를 움켜쥔 작은 손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가슴속에 움트고 있던 응어리가 잠깐이나마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비릿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린 채 시윤을 갉아먹던 청호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상처 난 어깻죽지에 들러붙은 옷이 못내 거슬렸기 때문이다. 지금 온전히 시윤에 집중하고 있는데, 자꾸 걸리적거리는 탓에 짜증이 났다.
청호는 몸무게로 시윤을 내리누른 채, 티셔츠의 목 부분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옷을 뜯어내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상처에 엉켜 있던 모직이 떨어지며 투두둑, 살이 갈라졌다. 청호의 움직임을 따라 핏방울이 비처럼 흩뿌려졌다.
그 후, 다시 시윤을 내리눌렀다. 청호의 어깨에서 팔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시윤의 등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러나 잠시였다. 시윤과 접촉하며 폭주가 사그라지자,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피가 멎었고, 뒤틀렸던 뼈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헤졌던 근육은 알아서 철썩철썩 엉겨 붙었으며, 찢어진 피부는 흉터 하나 없이 미끈하게 기워졌다.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고, 청호가 기지개를 켜듯 가슴을 크게 펼치며 느릿하게 호흡했다. 그러다 눈을 번뜩 치켜떴다.
이제 상처도 다 나았으니 하던 걸 보다 적극적으로 해 볼 참이었다.
시윤의 허리를 움켜쥔 청호가 슬쩍 빠진 성기를 쿠우욱 깊숙이 욱여넣었다.
“아흐윽…….”
시윤이 몸을 움츠렸다. 터진 뒷구멍은 따가웠고, 뻑뻑하게 벌어진 내벽은 쓰라렸으며, 청호의 귀두가 쑤셔 박히는 배 속 깊은 곳은 인두로 지져지는 것 같았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가라앉았다. 고통으로부터 말미암은 눈물로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대장, 큭, 대장님…….”
결국 참다못한 시윤이 자신의 허리를 쥔 청호의 손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아직 폭주로 이성이 혼미한 상태일까. 제 심장이 옥죄듯 아프고, 핏줄이 따가운 거로 보아 어느 정도 힘이 제게 넘어왔을 텐데. 이만하면 정신을 차릴 만도 하거늘. 왜 아직도 이리 거친가.
“대장……님.”
시윤이 차마 잠깐만 쉬자는 말은 못 하고, 청호만 애처로이 불렀다. 깊은 고통 속에 잠겨 있을 그가 제 말을 들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청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손등을 스치는 시윤의 손을 잡아다 휙 뒤로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시윤의 허리와 등이 뒤로 꺾였다. 자연히 삽입이 깊어졌다. 청호는 그 채로 퍽퍽 허리를 치받았다. 자신이 치는 힘에 시윤이 밀려나면 팔을 잡아당겨 다시 성기를 삼키도록 했다.
“흐, 읏, 윽, 하으…… 윽…….”
덕분에 입을 막을 방도까지 상실한 시윤은 있는 힘을 다해 입술을 씹어야 했다. 유독 여린 살갗을 가진 입술이 터지는 거야 당연지사였다. 비릿한 피가 혀를 눅눅하게 적셨다.
청호의 움직임은 시시각각 격해졌다. 그럴수록 막사 안이 온갖 엄한 소리로 가득 찼다. 찰박찰박 엉덩이와 골반이 마찰하는 소리와 시윤의 억눌린 신음, 그리고 간간이 스미는 청호의 신음이 규칙 없이 뒤섞였다.
청호는 수십 분이 지나서야 절정에 다다랐다. 시윤의 볼기짝이 터지라 처박더니 골반을 뒤틀며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정액을 사출했다. 아주 뜨겁고, 뭉근한 사정이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시윤은 자신의 배가 다 녹아 버린 게 아닌가, 두려워 아래를 살펴봤을 정도였다.
청호는 사정 후에도 성기를 빼 주지 않았다. 천천히 넣었다가 뺌을 반복하며 후희를 즐겼다.
“하으으…….”
시윤의 고개가 푹 고꾸라졌다. 정말 혼이 빠질 만큼 아팠다. 여태 청호와 했던 그 어느 접촉보다 아팠다. 첫 섹스 때는 A급이기라도 했지. 지금은 육체적인 고통에 갈무리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 청호의 힘까지 더해져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가이딩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잃지 않아서, 또 코피를 쏟으며 까무러치지 않아서, 이성을 놓고 청호에게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시윤이 색색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청호가 등 뒤로 몸을 붙여 왔다. 조금이나마 빠졌던 그의 성기가 쿠우욱 다시 깊은 곳을 뭉개 왔다. 기겁한 시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 아파요……. 대장님, 아파요…….”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정도면 청호도 충분히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다. 첫 섹스 때도 처음엔 야차처럼 굴다가 두 번째부터는 한결 여유로워지지 않았던가.
시윤이 그렁그렁 눈물이 찬 눈으로 청호를 뒤돌아봤다. 인제 그만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자비를 구하는 처절한 몸짓이기도 했다.
“…….”
그러나 청호는 대답이 없었다. 붉게 소용돌이치던 눈동자는 특유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는데, 핏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은 여전히 직선이 죽죽 그어진 상태였다.
시윤이 애타게 그를 바라봤다. 청호 역시 시윤을 내려다봤다. 충혈된 눈,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 피로 물든 입술. 늘 말갛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 얼마나 몰아쳤다고 넝마 같은 몰골이었다.
잠시 정적을 이어 가던 청호가 성기를 잡아 뺐다. 맞물려 있던 살결들이 뒤틀리며 쩍 소리가 났다.
“아흑!”
시윤이 자라처럼 목을 오그리며 단말마와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텅 빈 뒷구멍이 뻐끔뻐끔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분명 청호가 나갔는데, 여전히 홧홧하고 쓰라렸다. 시윤이 자신의 뒤를 더듬었다. 그렇다고 차마 구멍까지는 만지지 못하고 주변만 배회했다. 아픈 곳을 쓰다듬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뒤늦게 서러움이 솟구쳤다. 코끝이 찡했다. 훌쩍훌쩍, 주책맞은 울음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나갔다.
시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꿈틀꿈틀 몸을 뒤집었다. 고작 그 움직임에 사타구니가 말도 못 하게 아팠다. 그래도 꾸역꾸역 몸을 돌렸다. 비로소 청호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막사에 들어선 지 근 한 시간이 지났는데, 온전히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청호는 시윤의 머리 양옆에 팔을 짚은 채 미동조차 없이 시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윤은 그런 청호를 마주한 채 잠시간 눈물을 쏟아 냈다. 끅끅, 딸꾹질까지 하며 열심히도 울었다. 그러더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벅벅 눈물을 닦아 내고 청호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이제, 흐윽, 이제 안 아프신 거죠?”
“…….”
“어, 어깨는요? 끅, 어깨는 다 아물었어요?”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든 말든, 시윤은 청호의 어깨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상처가 아물었대도 줄줄 넘치던 핏자국까지 지워진 건 아닌지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만져 보자니 행여 아물지 않았으면 어쩌나. 스치기만 해도 악 소리가 날 만큼 고통스러울 텐데.
시윤이 훌쩍, 코를 먹으며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며 청호의 어깨를 보려는데 뿌득, 청호가 이를 짓이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란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행여 아직 아픈가, 싶어서.
근데 그대로 목덜미가 잡혀 끌려갔다. 그리고 밀어 낼 새도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왜 또, 라는 생각을 하다가 입맞춤은 오늘 한 번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럼 버텨야지. 시윤은 자신의 키스가 청호에게 어떤 평온을 제공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후으…….”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청호의 힘이 버거웠다. 그의 숨결을 받아 내는 기도와 식도가 따끔따끔했다.
어떻게든 참아 보고자 주먹을 움켜쥐는데, 청호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뜨끈한 살덩이와 함께 비린 피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읏…….”
오늘의 청호는 혀마저 거칠었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내리누르고, 혀를 가져가 잘근잘근 씹는 그 모든 행위가 아팠다. 물론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의 힘이었다.
동그랗게 말린 시윤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아, 설마 그새 등급이 C로 내려가기라도 했나. 아니면 폭주한 청호라 힘이 평소의 곱절로 뿜어지는 것인가. 왜 그와 닿는 모든 곳이, 모든 순간이 이리도 고통스러운가.
정말 지독히도 아팠다. 그러나 청호의 혀끝에서 뿜어지는 피 냄새가 저보다 더 아파서, 시윤은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버텨 보기로 했다. 키스 정도는 괜찮겠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작 키스인데.
마음을 굳게 먹은 시윤이 청호의 혀에 부응하기 위해 혀뿌리에 힘을 줄 때였다. 별안간 허벅지가 잡히더니, 다리가 벌어졌다. 그리고 화끈거리는 구멍에 익숙한 것이 닿아 왔다. 시윤이 번쩍 눈을 떴다.
삽입은 안 된다. 그건 버틸 자신이 없었다. 시윤이 툭툭, 툭 청호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는데, 입술이 물려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으우, 흐, 우으으…….”
“…….”
하지만 코앞에서 시윤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는 청호는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시윤의 양손을 쥐어 머리 위로 결박했다. 그러더니 기어코 성기를 삽입하기 시작했다.
“큭…….”
시윤의 고개가 휙 뒤로 넘어갔다. 이미 난도질당할 대로 난도질당한 뒤라 청호의 우람한 성기를 삼키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찢어진 구멍이 벌어지고, 쓸린 내벽이 터질 듯 팽창하긴 했지만 그래도 까무러칠 수준의 고통은 아니었다.
문제는 청호의 힘이었다. 염산 같은, 혹은 압정 같은, 또는 잘 벼려진 칼 같은 그의 힘 말이다.
“대장……님, 아파요…….”
시윤이 꽉 막힌 기도를 비집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에 흠뻑 젖어서 발음조차 불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알아먹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호는 시윤의 손목을 모아 쥔 아귀에 힘만 더 실었다. 그 후 못다 집어넣은 성기를 슬쩍 뒤로 물렸다가 쿠우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시윤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청호와 맞닿은 부분부터 넘실거리며 퍼져 나가는 통각이 꼭 독 같았다.
“흐윽…….”
시윤의 고개가 조금 더 뒤로 꺾였다. 볼록하게 도드라진 울대가 아래위로 깔짝이며 가녀린 호흡을 나타냈다.
그런데도 청호는 고집스레 움직임을 이어 갔다. 그에게 꿰인 시윤 역시 들썩들썩 몸을 움직이게 됐다. 배 속 깊은 곳을 짓이기는 귀두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흐, 읏, 흐……. 큽, 으읏…….”
시윤의 허벅지가 달달달 떨렸다. 뻣뻣하게 굳었던 전신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통제력을 잃은 근육이 파업을 선언한 모양이었다. 수축하던 뒷구멍 역시 느슨해졌다. 덕분에 청호가 보다 깊숙이 침입할 수 있었다.
“하아…….”
내내 구겨 있던 청호의 미간이 잠시나마 부드러이 펴졌다. 물론, 말 그대로 잠시였다. 시윤을 느끼던 그가 눈을 번뜩이며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미끈하고 가느다란 시윤의 목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냥 잇자국만 내는 수준이 아니라, 조금만 힘을 더 주면 살덩이가 뜯겨 나갈 정도였다.
순간, 열에 달아올랐던 시윤의 뺨이 창백하게 질렸다. 폭주한 청호는 위험하다. 찰나 이성을 잃어 정말 목을 뜯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럼 백이면 백 죽는다. 저는 여타 능력자들처럼 상처가 저절로 기워지는 능력 따위 없단 말이다.
“대장님, 대장님, 흑…… 그러지 마……세요…….”
시윤이 팩팩 힘껏 얼굴을 좌우로 뒤틀었다. 손은 결박되어 있고, 아래는 물려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게 얼굴뿐이었다. 당연히 그것으로는 청호의 이를 피할 수 없었다.
시윤이 막사 천장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나 고심하는 거였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고개를 접은 그가 청호의 머리칼에 볼을 비볐다.
“대장님, 키스…… 키스해 주세요. 네? 키스요.”
“…….”
청호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더니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렸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시윤이 보란 듯이 빼꼼 혀를 내밀었다. 얼른 이것을 삼켜 달라 아양이라도 떠는 모양새였다.
시윤은 절박했다. 가이딩하다 목이 씹혀 죽느니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그의 힘을 감내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놓아줬다. 하얀 손목에 그의 손자국이 진득하니 눌어붙었다. 시윤이 팔을 옹송그리는데, 청호가 머리채를 낚아채 왔다. 목이 꺾이고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흑…….”
청호의 혀는 매우 야하고 천박하게, 또 게걸스레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깊게 성기를 들쑤셨다. 덕분에 시윤의 눈꼬리를 탄 눈물 길이 끊이질 않았다.
키스는 오래 이어졌다. 종국엔 입술이 지이잉, 하고 아리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 후에 입술이 떨어졌을 때, 시윤은 코앞에 있는 청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엉엉 울고 있었다.
청호가 낯설다. 행위 내내 저를 다정하게 바라봐 주던 그가 어디로 증발해 버렸는지 모르겠다.
뺨과 입술에, 또 턱 아래에 쉬지 않고 키스해 주던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아프냐고 물어 주던 그가. 섹스에 서툰 저를 배려하고 또 배려하던 그가. 좋은 곳만 골라서 만져 주고, 빨아 주고, 찔러 주던 그가 말도 못 하게 그리웠다.
시윤의 머리채를 놓아준 청호가 이번엔 시윤의 골반을 잡아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쾌락의 정점을 향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후우…….”
“아, 흣, 대장……님……. 으읏, 흑…….”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거리던 시윤이 청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몸을 바짝 붙여 왔다. 꼭 어미를 잃어 방황하는 작은 동물처럼. 모든 고통의 시발점인 청호인데, 의지할 사람이 그뿐이었다.
시윤이 청호의 너른 가슴팍에 식은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비볐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들고 청호의 안색을 확인했다.
아직도 폭주 중인가. 아직도 폭주를 털어 내지 못했나. 아직도, 아직도. 언제쯤 제가 알던 청호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려나.
하지만 시윤의 바람과 달리 청호는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표정이 사라졌다.
제가 알던 얼굴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어찌나 서러운지. 줄줄 눈물이 쏟아졌다. 짓무른 눈가가 따가웠으나 눈물을 멈출 순 없었다. 퉁퉁 부어서 감지도, 그렇다고 뜨지도 못한 시윤의 눈꺼풀이 간헐적으로 경련할 때였다.
“눈 감아.”
시윤을 내려다보던 청호가 낮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막사에 들어선 후 누우라는 말 이후로 그가 처음 하는 말이었다. 간간이 욕설을 읊조리긴 했으나 그건 고통 또는 쾌락을 짓씹는 혼잣말이었다.
“……네?”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청호의 콧잔등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우는 거 보기 싫으니까 눈 감으라고.”
“…….”
우는 게 보기 싫다니. 제가 그렇게 못나게 우나. 꼴사나워 치솟던 욕정도 고꾸라질 정도인가. 시윤이 바보 같은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으니 청호가 커다란 손으로 텁, 눈두덩을 덮어 버렸다. 그러고는 퍽퍽 가멸차게 성기를 치받았다.
“…….”
시윤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그저 청호가 만든 어둠 속에서 끅끅 호흡만 뒤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눈물은 끊임없이 샘솟았다. 청호의 너른 손바닥을 죄다 적시고도 모자라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릴 정도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청호의 짜증 어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짜증이 어찌나 아픈지. 시윤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 보려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웠다. 고통에 나약한 몸뚱이라, 이렇게 험하게 굴려지는 것에는 면역이 없어서, ‘반려’ 가이드가 아니라 반려 ‘가이드’로 취급당하는 게 너무 아파서, 도무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청호와의 행위는 길었다. 그 이후로 반 이상 그로기 상태였던지라 정확히 몇 시간이 흘렀노라 말할 순 없지만, 정말 지독히도 길었다.
시윤은 그 긴 시간 내내 청호가 창조한 강제적인 어둠 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 종국엔 코에서 비리고 질척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입술과 턱은 물론, 청호의 손까지 눅눅하게 젖는 걸 느끼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채 준위님.”
“…….”
“채 준위님.”
달갑지 않은 소음에 시윤이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고작 눈살 좀 찌푸린 게 뭐라고 얼굴 전체가 뜯겨 나가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얼른 미간을 편 시윤이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현실과 몽중 사이에서 방황하는 정신을 추스르는 거였다.
“채 준위님.”
근데 아까부터 애타게 시윤을 찾던 이가 그 찰나를 참지 못하고 다시금 잠을 방해해 왔다. 시윤이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허나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꼭 누가 눈두덩을 세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시윤은 꾸역꾸역 눈꺼풀을 올렸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낯선 이였다. 아니, 오고 가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사실 희뿌연 시야라 그가 인간이라는 것만 간신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번뜩, 이성 저편에 넘겨 뒀던 기억의 편린들이 전신을 찔러 댔다. 청호의 폭주, 고통스러웠던 가이딩, 눈물, 그리고 기절.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청호의 막사 안이었다. 앞에 있는 이는 에로아스의 병사 같았고.
몇 번 눈을 끔뻑이던 그가 얼른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이불은 덮고 있었다. 피나 정액 따위가 묻지 않은 깨끗한 새 이불이었다. 지끈거리는 근육을 추슬러 하관도 문질러 봤다. 코피를 쏟았던 것 같은데. 굳은 피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시윤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피었다. 청호가 뒤처리를 해 준 듯했다. 폭주가 끝났나 보다. 그 말은, 제가 알던 청호로 돌아왔다는 걸 뜻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청호의 행방을 묻기 위해서였다.
“대장님은…….”
“대장님께서…….”
그러나 병사가 시윤의 말을 가로질렀다.
“할 일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 보시랍니다.”
그때야. 그 순간에야. 시윤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늦은 오후, 청호의 숙소로 돌아온 시윤이 풀썩 침대에 엎어졌다. 씻어야 하는데. 쓰라린 뒤를 치료해야 하는데. 아직 배 속에 청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손 하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늘어져 있어도 덜덜 떨리는 사타구니 탓에 다시 일어날 자신도 없었다.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무겁고, 무겁고 또 무거운 눈꺼풀에 자연히 잠이 왔다. 하지만 자고 싶지 않았다. 복작복작한 머리통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뻥 뚫린 듯 공허한 가슴에다가는 무언가를 채워 넣고 싶었다.
‘할 일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 보시랍니다.’
‘할 일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 보시랍니다.’
‘할 일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 보시랍니다.’
고저 없이 무뚝뚝한 병사의 말이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할 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윤은 청호의 가이드였고, 그의 안정을 도울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할 일이 맞지. 근데 왜 이리 섭섭한지 모르겠다. 이만하면 클 만큼 큰 것 같은데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인 모양이다.
사실 그것 말고도 섭섭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윤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짚어 가며 청호의 변론을 대신 해 주기로 했다.
돌아가라고 한 것도 위험하니까, 그 대단한 사람이 다칠 정도로 강한 클롭스가 득실거리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 제가 다치면 신경 쓰여서 못 싸운다고 그랬었던 사람이잖나. 너무 늦게 만나서, 제가 죽는 게 싫다고 했던 사람이잖나.
저를 배려하지 않은 채 잠자리를 가진 것도 오죽 아팠으면. 오죽 고통스러웠으면 그랬겠나. 따스하게 안아 주지 않은 것도, 아프냐 괜찮냐 물어보지 않은 것도,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우는 게 보기 싫다고 한 건…… 그건…… 자신이 파렴치한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닐까. 그래, 그럴 것이다.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잠자리는 그저 잠자리일 뿐인데, 저와 청호는 항상 확인하고 대비하고 조심해야 하는 거니까. 엉엉 울면서 아프다고, 그만하자고 하니 응당한 행위를 하는 청호의 입장에서는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터였다.
“…….”
드디어 모든 의문을 푼 시윤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 들어 있던 채혈 기계가 빼꼼 튀어나왔다. 시윤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거기다 엄지를 쑤셨다. 푸르딩딩하게 물든 엄지는 이제 바늘이 쑤셔지는 것으로는 아무런 통각도 느끼지 못했다.
기계가 옅게 진동했다. 그러더니 곧 알파벳 하나를 띄웠다.
[C-]
“와…….”
어쩐지 죽을 정도로 아프더라니. 코피까지 쏟았으니 어빌리티 등급이 웬만큼 떨어졌으리라 예상하긴 했다만, 눈으로 마주하니 그 충격이 제법 컸다.
얼마만의 C급인지 모르겠다. 한동안 B였던지라 이제 아예 B로 굳어 버렸구나,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청호와의 잠자리가 제 몸에 큰 영향을 미친 듯했다.
청호와 함께 있으면 등급이 오르는데, 그와 닿으면 등급이 내려간다. 이 아이러니를 어찌 헤쳐 나가야 할까.
시윤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시윤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하룻밤이 훌쩍 지난 아침이었다. 놀란 마음에 허겁지겁 씻고 연구실로 출근했다. 오전 강의가 있었다. 출정 중이면 자연히 휴강 처리가 되겠지만, 급히 나갔다가 정신없이 복귀하느라 출정 보고도, 복귀 보고도 하지 못했다.
수십 명의 신병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가야 했다.
그리고 시윤은 헐레벌떡 연구실에 도착해서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흐우…….”
꼭 목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식도가 뻐근하고 따끔따끔한 건 진즉 알고 있었는데, 설마 목소리가 안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시윤은 침울한 마음으로 강의를 취소했다. 입대하고 처음이었다. 제 의지로 휴강하는 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실 이제 제 본업은 청호를 가이딩하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도 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으나 모두가 제 탓 같았다. 더 근저의 이유를 찾자면 제 부족함으로부터 발생한 일이니 변명하는 것도 우습긴 하겠다.
아무튼 시윤은 이렇게 된 거, 한시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는 데 힘쓰기로 했다.
사실 휴강 공지를 하고 한숨 놓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두 시간가량 강의실에 서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새 두들겨 맞은 듯 퉁퉁 부은 얼굴로 꽂혀 오는 시선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턱 아래부터 손끝까지 난자한 청호의 입술 자국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도 모르겠고. 터진 입술은 달싹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라 말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시윤은 연구실 서랍을 뒤져 볼 캡 하나를 찾아냈다. 그 후 가운도 벗고, 서늘할 때 걸치기 위해 의자에 걸어 둔 후드 집업을 턱 끝까지 당겨 입었다. 잠시 부대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목적지는 20분 거리에 있는 약국이다.
사실 부대 안에 널리고 널린 것이 의사고 약이지만, 어쩐지 껄끄러웠다.
부대 안에서 시윤은 꽤나 유명 인사였다. 좋은 집안의 아들, 그리고 청호의 가이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제가 연구센터나 의무실에 어기적어기적 나타나서 약을 타 가면 분명 소문이 날 터였다. 그 소문은 곱절에 곱절로 자극적이고 비대해져서 가족들이나 청호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유난 떠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뭐, 모건에게 가는 방법도 있긴 했으나 제 몸 상태를 보면 보나 마나 청호를 혼낼 터였다. 그건 싫었다. 제 죄를 청호에게 덮어씌우는 기분이라.
연구실을 나서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시윤이 쿨럭, 둔탁하게 기침했다. 고작 기침일 뿐인데 명치가 찌릿찌릿했다. 가슴 언저리에 청호의 힘이 얇은 철사처럼 둘둘 말려 있었는데, 그것이 호흡할 때마다 심장과 폐를 할퀴었다.
“큭…….”
가슴께를 움켜쥔 시윤이 허리를 굽혔다. 정말 거짓 한 톨 보태지 않고 전신이 죄 아팠다. 하물며 시트를 억세게 움켜쥐었던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근육통이 생겨 뭘 제대로 쥐거나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샤워하다 찔끔 눈물 한 방울 흘린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다.
한참 몸을 웅크리고 있던 시윤은 통증이 잦아들었을 때쯤,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코가 화끈해지더니 줄줄 무언가가 쏟아졌다. 시윤이 본능적으로 턱 아래를 받쳤다. 오목하게 모은 손바닥 위로 피가 고였다.
“하아…….”
제가 아무리 나약하기로서니 피와는 친하지 않았는데. 한동안 자주 만나야 할 성싶었다.
시윤은 코피가 자연히 멎을 때까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종국엔 손바닥을 가득 채운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몸이 헤지니 정신까지 헤지는 듯했다.
그러다 코피가 멈췄을 무렵엔 연구실 바닥이 살인 사건이라도 벌어진 양 피로 난자되어 있었다. 급한 대로 연구실 세면대에 손을 씻은 시윤이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치워야 하는데. 굳으면 지우기 쉽지 않을 텐데.
아아……. 나중에, 다 나중에…….
파리한 낯의 시윤이 비척비척 연구실을 나섰다.
* * *
종이봉투에 각양각색의 약을 넣은 시윤이 숙소에 들어섰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약을 사는 건 처음이었다. 근육통에 좋은 약, 연고, 항생제, 피로 해소제, 철분제, 해열제, 인후통에 좋은 약 등등 아주 다채롭게도 샀다.
이걸 언제 다 바르고, 먹는담. 약만 먹어도 배부르겠네. 시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신발을 벗을 때였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익숙하진 않지만 알고 있는 냄새였다.
담배 냄새.
근데 청호의 숙소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니. 설마 담배가 아니라 뭐가 타는 건가. 제가 인덕션에 뭘 올려 두고 갔던가. 그럴 리가 없는데. 눈 뜨자마자 씻고 부리나케 연구실로 튀어 갔었는데.
홈 슬리퍼를 신은 시윤이 주방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근데 어슴푸레 스치는 연기가 반대쪽이었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시윤이 딱딱하게 굳었다.
“…….”
청호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반쯤 갖춰 입은 전투복으로 미루어 보아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소파 깊숙이 기대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든 채였다.
적어도 사흘은 더 있다 올 줄 알았는데. 되게 일찍 왔네. 멀뚱히 서 있던 시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청호에게 다가갔다. 그사이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뒤로 숨겼다. 왠지 모르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오셨어요.”
“…….”
“죄송해요. 복귀하신다는 소식을 못 들어서…….”
쇳소리 가득한 시윤의 음성이 담배 연기에 얽혀 들었다.
“…….”
청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슬쩍 눈만 내려 시윤의 존재를 확인하기만 했다. 담배에서 뿜어지는 연기에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몸은, 몸은 괜찮으십니까?”
“…….”
“어깨는 다 나으셨…….”
“채 준위.”
“예.”
“내가 좀 피곤해서.”
“예? 아…… 네, 네. 쉬세요.”
시윤의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방금 전장에서 돌아왔으니 피곤할 텐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팔다리가 축축 처지는 기분일 텐데. 제가 눈치 없이 말을 걸었다.
시윤이 뒤를 돌았다. 그런데 어째선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가 담배를 태우는 건 처음 봤다. 술도, 마약도 듣지 않는 몸에 니코틴이 효과가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담배를 피워야 할 일이라도 있었을까. 설마 또 에로아스 병사가 죽었나. 아니면 휴라도 나타났나.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을 추스른 시윤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툭. 약 봉투가 눈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끈거리는 손가락은 영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놀란 시윤이 얼른 그것을 주워 들었다.
“뭐야?”
그러나 이미 청호의 눈에 띈 이후였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윤이 서툴게 거짓을 내놓았다. 청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담배를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비벼 끈 그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뭐냐고.”
“아무것도 아닙…….”
시윤이 역시 같은 답을 내놓으며 입술을 달싹이는데, 청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시윤이 허리춤에 숨긴 봉투가 쑥 빠져나갔다. 청호의 눈앞까지 끌려온 봉투가 그대로 뒤집혔다. 속에 든 것들이 와르르 속절없이 쏟아졌다.
“…….”
“…….”
시윤은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그저 약일 뿐인데 제 치부가 다 드러난 것 같았다. 청호는 이미 저와 관련한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제 처지가 말도 못 하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가늘게 숨을 내쉰 시윤이 터진 입술을 달싹였다.
“감기 기운이 조금 있어서…….”
“…….”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시윤이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약을 다시 담기 시작했다. 그게 뭐 그리 큰 움직임이라고 온몸이 아팠다. 그래도 신음을 흘리진 않았다.
시윤이 주섬주섬 약을 모두 담았을 무렵이었다. 청호가 고개를 슬쩍 비틀고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담배 연기에 가려 흐렸던 시윤의 모습이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보였다.
파리한 안색은 물론, 후드 목덜미나 소매에 묻은 핏자국까지도.
청호의 미간이 굵직한 주름을 만들며 구겨졌다. 여기저기 아픈 것 같긴 하나 피가 날 상처는 보이지 않는데. 그럼 피의 출처는 뻔했다.
“코피 흘렸어?”
“…….”
시윤이 움찔 어깨를 튕겼다. 그리고 급하게 소매를 둘둘 걷었다. 그런다고 청호가 본 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늘. 시윤은 청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반대쪽 소매를 걷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 꼴을 보던 청호가 비죽 입술을 뒤틀었다.
“이제는 상사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나?”
“아…….”
놀란 시윤이 퍼뜩 일어나 곧추섰다. 제가 해이해지긴 한 모양이다. 청호의 말도 무시하고. 사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거대해서 정신 못 차리고 휩쓸리는 중이었지만, 청호가 보기엔 분명 무례한 짓이 맞았다.
“죄송, 죄송합니다. 코피 맞습니다.”
손을 등 뒤로 모은 시윤이 순순히 진실을 시인했다. 청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모건한테는 가 봤고?”
“아니요.”
“왜?”
“…….”
시윤이 냉큼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우물우물 입술을 씹었다. 그러자 막 엉겨 붙기 시작했던 입술의 상처가 툭 터져 피를 비췄다. 시윤이 손등으로 그것을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
“…….”
침묵이 이어졌다.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또 대답 안 하냐는 무언의 꾸짖음이었다. 시윤이 푹 고개를 고꾸라트렸다.
“모건 대령님이…… 대장님 잘못이라고 화내실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
“제가 A급만 되었어도 그런 소리 안 들으셔도 됐을 텐데…….”
사실 모건 ‘대령’이 청호 ‘대장’을 혼낸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나, 어쨌든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할 터였다. 시윤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청호가 파렴치한 취급을 당하는 게 정말, 진심으로 싫었다.
“…….”
“…….”
다시 정적이 자리했다. 한참 동안 시윤을 바라보던 청호가 자신의 얼굴을 벅벅 세게 문질렀다. 건조한 낯에는 짙은 피곤과 미약한 짜증이 물 위의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시윤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막연히 청호가 아직 폭주의 여파를 떨쳐 내지 못했구나, 생각했다. C급으로는 제 몸이 부서지라 받아 내도 그의 고통을 깔끔히 없애 줄 수 없었다. 퍽 우울한 사실이었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시윤이 은근히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가 다시 차려 자세로 돌아왔다. 뒤틀리는 근육을 참고 서 있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뭐 얼마나 됐다고 이마에 식은땀이 채였다.
“앉아.”
그 청승맞은 꼴을 보다 못한 청호가 작은 배려를 말했다.
“네? 아, 네.”
시윤이 느린 몸짓으로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앉는 것도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 말 못 할 곳이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윤은 내색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후로 또 정적이었다. 청호와의 대화 사이에 정적이 비집고 드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근데 오늘따라 유독 무겁고 짙게 느껴졌다. 안개처럼 자욱한 정적에 숨 쉬는 게 조심스러워질 정도였다.
부러 앞만 응시하던 시윤이 흘끔 옆을 살폈다. 그마저도 청호를 보진 못하고, 그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만 훔쳐봤다. 적당히 느슨하게 풀린 손에선 그 어떠한 감정이나 기분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시윤이 다시 정면으로 눈을 돌렸을 때였다.
“채 준위.”
청호가 나지막이 시윤을 불렀다.
“네.”
시윤 역시 단조로이 대답했다.
“…….”
청호는 불러 놓고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도 시윤은 재촉 없이 기다렸다. 속으로는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너처럼 능력 없는 가이드를 옆에 끼고 사는 게 힘들다고, 그렇게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있는 게 꼴 보기 싫다고, 너는 왜 그것밖에 안 되냐고, 그것밖에 안 되는 주제에 어째서 나의 가이드냐고 원망할까 두려웠다.
청호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지금은 실로 무서웠다.
몸이 아프면 자연히 정신도 나약해진다. 시윤은 정신과 몸 모두가 혹사당한 상태였다. 여기서 바람 한 점 더 불면 열여섯에 그랬던 것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릴지도 몰랐다.
정적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청호가 입을 뗀 건 수 분이 지나서였다. 덕분에 시윤의 아픈 심장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내가…….”
“예.”
“내가…….”
우우웅.
눈치 없는 진동음이 청호의 말을 가로질렀다. 어깨까지 떨며 놀란 시윤이 후드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진동은 끊이질 않았다.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인 듯했다.
시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전화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호가 그러지 못했다.
“받아.”
소파 깊숙이 등을 묻은 청호가 한숨처럼 말했다. 시윤이 알 듯 모를 듯 콧잔등을 구기며 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꺼냈다. 하필 이 순간에 누가 눈치 없이 전화를. 누구든 간에 아주 매몰차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해 줄 생각이었다. 근데,
[아버지]
반짝이는 세 음절이 그럴 수 없게 했다. 시윤은 전화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아버지 전화이니 받아야겠고, 그렇다고 청호 앞에서 받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하고.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반짝이는 홀로그램을 들여다보는데, 순간 공기가 확 수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무거워졌다고 해야 하나. 센 기압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시윤이 당연하게 청호를 바라봤다. 갑자기 지구의 중력이 바뀌었을 리는 없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으니까.
“…….”
근데 청호는 아주 평온한 낯으로 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신을 옥죄던 공기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느슨해졌다. 시윤이 잘못 느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전화받고 오겠습니다.”
“왜?”
“예?”
“왜 여기서 안 받고?”
“어…… 아……. 여기, 여기서 받을까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딴에는 청호를 배려했던 터라.
그 모습에 청호의 입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그가 성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가 봐.”
“…….”
시윤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비릿한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예.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얼른 안 와도 돼.”
청호가 무심히 대꾸했다.
“…….”
시윤은 부정도 긍정도 못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웅, 우우웅, 끊임없이 진동하는 시계를 쥐고 청호의 숙소에서 나오는데 멀지 않은 과거, 그와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저 얼른 씻고만 오겠습니다. 종일 바깥에 있던 터라…….’
‘천천히 와도 돼.’
‘예?’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어.’
그렇게 이야기해 줬었지. 근데 오늘은 ‘얼른 안 와도 돼’다. 그 차이가 뭐라고 속이 답답했다.
시윤의 아버지인 정원은 숙소동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기사가 운전하는 미끈한 세단 안에. 별 다섯 개를 형상화한 엠블럼이 꽂혀 있는 고급 세단이었다. 흔히 보기 힘든 차에 주위의 시선이 한껏 집중됐다. 차에다 대고 경례하는 병사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풍경에 익숙한 시윤이 차 문을 열었다. 평상복 차림의 정원이 푸근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시윤이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넌 아비한테 인사도 안 하고 본론부터 캐묻냐?”
정원이 장난스레 콧잔등을 찡그렸다.
“잘…… 지내셨죠? 골프 여행은 어떠셨어요?”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좋았지. 이기진 못했다만 재미있었어. 정치고 클롭스고 다 잊고 지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정원이 나지막이 웃으며 앞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기사가 커다란 라탄 바구니를 대령했다.
“이거 복숭아다. 잘 익어서 말랑말랑해. 너 말랑말랑한 거 좋아하잖니. 너 닮아서 동글동글하고 예쁜 것만 골라 왔어. 선화가 상처 나면 안 된다고 어찌나 유난을 떨던지. 보자기에 싸고 또 쌌다.”
그가 행여 곱게 모셔 온 복숭아에 상처가 났을까, 바구니를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모두 멀쩡했다. 시윤의 입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모습에 단단히 굳어 있던 시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줄줄이 이어지는 문장에, 음절에 사랑이 가득했다. 저는 대체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멋진 사람들의 가족이 됐나, 싶었다.
“……이거 가져다주러 오신 거예요? 연락 주셨으면 제가 집에 갔을 텐데요.”
“뭐 하러. 이런 이유로 바깥에도 나오고 그러는 거지.”
정원이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그가 시윤의 손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영악한 계획을 내놓았다.
“뭐, 주는 건 여기서 했다만 먹는 것까지 여기서 할 필욘 없지. 탄 김에 집에서 저녁 먹는 건 어떠냐. 선화가 좋아할 거…….”
신나게 말을 잇던 정원은 문장을 마치지 못했다. 뒤늦게 시윤의 얼굴을 봤는데,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아들의 얼굴이 영 온전치 않았기 때문이다.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정원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시윤이 얼른 입가를 가렸다. 급하게 내려오느라 제 몰골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수였다. 정원을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시윤의 동공이 좌우로 바쁘게 경련했다. 변명을 고민하는 거였다.
“아…… 훈련하다가 넘어지면서 씹었어요.”
내놓은 변명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가장 현실적이었다.
정원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의 시선이 시윤의 손목으로 향했다. 소매를 둘둘 말고 있어 훤히 드러난 손목에는 푸르딩딩한 멍이 올라와 있었다. 흘깃 보니 반대쪽 손목 역시 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손목은?”
“어…… 이, 이것도 훈련하다가…….”
“…….”
정원은 시윤의 몸에 저런 상처가 있는 걸 처음 봤다. 시훈과 시준이야 어렸을 때부터 워낙 여기저기 쏘다니고, 자기들끼리도 치고받고 싸우는 터라 상처 나기 일쑤였지만, 시윤은 그렇게 활동적인 아이가 아니었다.
열여섯 도어 검사가 끝나고 귓불이 째져 들어왔을 때도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후로는 이렇다 할 상처 없이 곱게 잘 자라 주었거늘. 입술이 터지고 손목에 멍이 든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현기증이 다 났다.
거기다 거짓말까지 하다니. 정원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대도, 어쨌든 군인이었다. 포스 훈련의 근저는 모두 정원의 머리에서 나왔단 말이다. 입술이 터진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무슨 훈련을 어떻게 해도 양쪽 손목에 저리 멍이 들 순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목도 쉬었구나.”
“…….”
“눈은 왜 짓물렀니. 울었어?”
정원은 시윤을 샅샅이 뜯어봤다. 마음 같아선 홀딱 벗겨서 온몸을 검사하고 싶었다. 제 귀한 막내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해 오금이 다 저렸다.
……유력한 용의자로 어떠한 인물 하나가 떠오르긴 한다만,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 인물이 시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원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목구멍이 시큼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발끝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약은 왜 안 발랐냐? 병원부터 가자.”
정원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당장 뒤엎어 봐야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시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해결을 봐야 했다.
“괜찮아요. 약 사 왔거든요. 자기 전에 바를게요.”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그럼.”
정원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이 일곱 살짜리 애였다면 막무가내로 병원에 끌고 가겠지만,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다. 무슨 선택을 하든, 존중해 줄 필요가 있었다.
잠시 정적이 자리했다. 시윤이 정원의 품에서 슬쩍 바구니를 빼냈다.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그래. 집엔 언제 오니?”
“어…… 주말에…… 일정 보고 비어 있으면 갈게요.”
“자주 들러. 어찌 됐든 네 집은 여기가 아니지 않니.”
“…….”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내 집. 그래, 이곳은 청호의 숙소이지 제집은 아니었다. 제 능력 향상을 위해 함께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이 갑자기 매우 새롭고 선연하게 다가왔다.
“네.”
흐릿하게 웃은 시윤이 차에서 내렸다. 이런저런 시선들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평소라면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빨리했겠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귀찮았다.
숙소동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길이 몹시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꾸역꾸역 올라온 시윤이 옅은 한숨과 함께 숙소 문을 열었다.
“대장님, 저 왔습니다. 복숭아 드실…….”
홈 슬리퍼에 발을 꿰며 말하던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청호는 그새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시윤을 반겨 주는 건 황량한 공기뿐이었다.
근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부엌에 라탄 바구니를 올려 둔 시윤이 거실 바닥에 놓인 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피곤한 낯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 * *
시윤은 연구실에 있었다. 이틀 정도 약을 열심히 먹고 발랐더니 목소리도 돌아오고, 제법 인간다운 몰골이 됐다. 비록 손목과 목덜미에는 여전히 청호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목 폴라로, 또 시계로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코피도 더는 흘리지 않았다.
이따금 바늘이라도 삼킨 듯 속이 따끔거리긴 했으나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내일 있을 강의 내용을 정리한 시윤이 연구실 한쪽에 수북이 쌓인 보디캠 칩들을 바라봤다. 저것도 봐야 하는데. 클롭스 분석이 예전만큼 즐겁지가 않아서 도통 손이 안 갔다.
이전에는 동영상에 찍힌 클롭스만 봤다. 그들의 생김새에 집중하고, 능력을 관찰했었다. 근데 지금은 그 배경으로 죽고, 찢기고, 뭉개지는 병사들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도무지 클롭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을 하긴 해야 하는데. 딱 하나만 볼까.
시윤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책상 홀로그램이 반짝거리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모건이었다.
“이것 봐.”
모건은 뭐가 그리 급한지 시윤이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팔꿈치를 잡고 기계 앞으로 이끌었다. 인사할 틈을 놓친 시윤이 엉거주춤한 포즈로 끌려갔다.
기계 위에는 휴의 붉은 머리카락과 피로 추정되는 액체가 손톱만큼 있었다. 시윤이 주섬주섬 연구용 장갑을 끼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휴 머리카락이랑 네 피야.”
“……제 피요?”
난데없는 말에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휴가 네 손목 물었다고 했잖아. 근데 독을 뿜은 것도 아니고, 식육도 아니고, 피를 마신 것도 아니었다며.”
“네, 그랬죠.”
“그럼 왜 그랬을까 고민해 봤거든. 기생충도 다룰 줄 알고, 함정도 팔 줄 알고, 능력자 어빌리티도 못 쓰게 만들 수 있고, 사이코패스 성향도 있는 놈이 목적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단 말이야. 손목에 이 박으면서 발기하는 미친놈이면 또 모를까.”
“……그래서요?”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너랑 걔랑 합쳐 보자 싶었지.”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맞아. 하필 제 손목을 문 이유가 있겠지. 많고 많은 능력자를 두고, 하물며 그 자리에는 청호도 함께 있었는데, 구태여 별 볼 일 없는 가이드인 저를 선택한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무슨…… 무슨 결과가 나왔습니까?”
긴장한 시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모건이 툭툭 현미경의 접안렌즈를 두드렸다. 직접 보라는 뜻 같았다. 시윤이 렌즈에다 눈을 붙였다.
모건이 아주 작게 조각낸 휴의 머리카락을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위로 이전에 채혈해 뒀던 시윤의 피를 떨어트렸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콜라에 멘토스를 넣은 것처럼 엄청난 반응은 아니었고, 아주 넓은 호수 위로 산들바람이 부는 듯 잔잔하게 움직였다. 꼭 방사선에 피폭된 듯 규칙 없는 꿈틀거림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어떠한 변화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변화입니까?”
“자, 봐 봐.”
모건이 슬라이드 글라스를 가져갔다. 렌즈에서 눈을 뗀 시윤이 그를 따라 눈을 움직였다. 모건은 글라스에 든 피를 네모난 기계 위로 흘려보냈다. 시윤이 아침저녁으로 능력을 재는 채혈 기계였다.
곧 반짝이는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B+]
“어……. 제 피 언제 뽑은 겁니까?”
“너 처음 발현했을 때. 그러니까 C-일 때.”
“근데 어째서 B+가…….”
“진짜 존나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휴한테 능력을 향상하는 힘이 있나 봐. 이것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시기에 뽑은 네 피 전부 능력이 올랐어.”
시윤이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놀라움에 흉통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였다. 그래, 그에게 손목을 내어 주고 그 후로 며칠 내내 B였지. 그게 휴 때문이었다니.
능력 향상이라. 이건 엄청난 발견이었다. 저뿐만이 아니라 포스 전체에 영향을 줄 것이다. 능력자들이 모두 한 단계씩 등급이 오르면 그만큼 포스가 안전해지고, 견고해질 터였다. 그 어떤 적도 섣불리 덤비지 못할 거란 말이다.
“다른, 다른 능력자에게도 통하는 겁니까? B급은 A급으로, A급은 S급으로 오를 수 있는 거예요?”
“아니. 아무나 골라다 실험해 봤는데, 가이드랑 에스퍼 전부 반응이 없었어.”
“근데 왜 저만 변화한 겁니까?”
“네 DNA만 변화하니까. 다른 애들은 능력이 고착화된 상태잖아. 너만 하루가 멀다고 휙휙 바뀌지.”
모건이 손바닥을 빠르게 엎었다가 뒤집었다. 시윤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뒤틀렸다. 모두에게 효과가 없다니 슬픈 일인데, 어찌 됐든 제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싶었다. 어떠한 방식이든 능력이 오르기만 하면 되지. 저 머리카락만 있으면 청호를 가이딩하다 코피를 쏟으며 까무러치는 일은 없어질 터였다.
시윤이 휴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숱한 연구로 처음 Z 구역에서 가져왔을 때와 달리 반절로 짧아진 상태였다. 산소통에 산소가 얼마 남지 않은 듯 안달이 났다.
“이 머리카락을 저에게 주입할 순 없습니까? 아예 제 DNA에 합성하면 능력이 B나 A급으로 유지될 수도 있잖아요.”
그 말에 모건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연구가 부족해.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 몰라.”
“감수하겠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혼자 남은 청호는 어떡해? ‘안됐다. 어렵게 만난 가이드가 몇 달 만에 죽어서. 그래도 힘내. 원래 없었잖아.’ 그렇게 위로할까?”
“…….”
시윤의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렸다. 그 생각은 못 했다. 어떤 방법이든 간에 제 능력이 오르면 청호에게도 좋을 거라는 생각만 했지.
잠깐 기대했는데. 또 제자리다. 시윤이 눈두덩을 세게 비볐다. 어찌나 세게 문지르는지 눈알이 붉게 충혈될 정도였다. 보다 못한 모건이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휴의 의도도 알 수 없어. 그놈이 너 좋자고 네 능력을 높여 주는 건 아닐 테니까.”
“아…….”
“분명 자기한테 득이 있으니까 그런 걸 거야.”
시윤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왜 A급 가이드가 아니라 변종인 저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건의 말마따나 목적이 있을 터였다.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순순히 머리카락을 넘겨준 것도 수상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시윤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건이 그 옆에 있는 테이블에 기대섰다. 그리고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B+’라는 알파벳을 가만히 응시했다.
“너한테 청호는 ‘변곡점’이었지.”
“…….”
“휴는 ‘길’이야.”
시윤이 고개를 갸웃 꺾었다.
“……두 개가 다릅니까?”
“청호가 변곡점을 만들면, 휴는 그 변곡점으로부터 네 능력을 상승시키는 거니까 다르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좁힌 시윤이 모건의 말을 되뇌는데, 모건이 친히 설명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줄게. 네가 B급일 때 청호와 접촉했어. 그럼 너는 스킨십 강도나, 네 컨디션에 따라 C가 될 수도 있고, A가 될 수도 있겠지. 근데 휴는 그 변곡점이 왔을 때 너와 어떠한 방식으로 접촉해서, 아마 피와 관련되어 있을 텐데 아무튼, 접촉해서 네 능력을 위로만 올린단 말이야.”
“…….”
“따지고 보면 휴와 피를 나누는 게 너한테는 더 좋은 거지.”
“아…….”
시윤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청호보다 휴가 더 좋다니……. 이해는 했는데, 와닿지 않았다. ‘휴’라는 존재를 실제로 마주한 적이 있는 터라. 그 괴이한 동화 같은 남자가 제게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니. 직접 눈으로 봐 놓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시윤이 멍하니 허공에다 시선을 띄우고 있는데, 모건이 말했다.
“내가 더 연구해 볼게. 조금만 기다려.”
“예. 감사합니다.”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볼일이 끝난 듯해서. 모건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려는데, 모건이 시윤의 턱을 잡아챘다.
“근데 너 어디 아프냐? 안색이 되게…… 시궁창 같은데?”
“아니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시윤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시궁창 같은 안색이야 숱하게 있던 일이다. 연구실에서 밤만 새워도 다 죽어 가는 얼굴이 되기 일쑤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해 입술을 말아 물고 혀로 더듬어 봤다. 효과 좋은 연고 덕에 터진 입술은 금방 아물었는데, 모건이라면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다행히 요철 없이 미끈한 살결만 느껴졌다. 안심한 시윤이 입술을 다시 풀었을 때였다. 모건의 입꼬리가 비죽 모나게 뒤틀렸다.
“피곤해서 와이셔츠 안에 목 폴라를 받쳐 입었어?”
“…….”
“잘 차지도 않던 명품 시계도 차시고?”
“…….”
“입술엔 반질반질하게 연고까지 바르고?”
“…….”
“생전 관심 없던 패션에 갑자기 흥미가 생긴 모양이지?”
시윤이 얼른 손목을 감싸 쥐었다. 흐릿하게나마 청호의 손자국이 남아 있어 시계를 찬 거였다. 목 폴라 역시 청호가 씹어 놓은 목덜미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입은 거고. 입술은 어떻게 가릴 방도가 없어 수시로 연고를 발랐다. 그 덕에 입술은 거의 아물었는데, 손목과 목은 그만큼 신경을 쏟지 못해 아무는 속도가 더뎠다.
그래, 모건이 제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지. 이걸 어떻게 빠져나간다. 청호가 그에게 엄한 소리를 듣는 건 정말 정말 싫은데.
파랗게 질린 시윤이 데굴데굴 머리를 굴렸다. 그런 시윤의 속을 뻔히 꿰뚫어 본 모건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시윤은 연구할 때나 똑똑하지 다른 방면에는 좋은 머리를 영 효율적으로 쓰지 못했다.
“일단 모르는 척 넘어가 줄게.”
“……정말요?”
“그래. 대신 다음엔 좀 인간 같은 몰골로 와라. 어? 잠 좀 자. 밥도 챙겨 먹고. 영양제는 말 그대로 영양제야. 살기 위한 최소한의 영양분을 보충해 줄 뿐이라고. 그 퀭한 얼굴 복구하려면 음식을 먹어야 해.”
“네……. 그럴게요.”
시윤이 명심했다는 얼굴로 제법 굳건히 대답했다. 사실 어제오늘 목구멍이 쓰라려 영양제조차 먹지 못했다만, 그걸 밝히면 모건이 눈을 부라릴 것 같아 숨기기로 했다.
시윤이 얼른 내빼려는 듯 빠르게 경례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모건이 별다른 말 없이 손을 휘저었다. 시윤이 후다닥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모건이 그가 사라진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콧잔등을 콰득 찌푸렸다.
“청호 이 새끼가…….”
소중히 대하겠다더니.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놔?
* * *
시윤이 숙소로 돌아왔을 땐 청호가 폴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청호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폴은 큼지막한 홀로그램을 띄워 둔 채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시윤이 조용히 신발을 벗고 홈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두 사람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시야가 트여 있어서 적 동태를 파악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리도 발견되기 쉽겠지.”
“예. 그래서 황토색 군복으로 바꿔 입어야 할 듯합니다.”
“그래. 준비시켜.”
“또 햇볕이 매우 강하므로 선글라스 착용이 권고되는데, 현재…….”
시윤이 경례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다 폴과 눈이 마주쳤다. 바르게 서 경례하자 폴이 눈짓으로 인사를 받았다. 청호는 뒷모습만 보이는지라 제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경례는 미루기로 했다.
살금살금 방으로 돌아온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냈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장 창가로 향했다. 부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언제 봐도 참 좋았다.
창가 턱에 기대선 그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모건에게 들은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청호, 변곡점, 휴, 길, 어빌리티, 상승과 하강.
시윤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 자신이 낯설어지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통스러운 낯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능력이 갑작스레 튕기듯 올랐을 때마다 꼭 무언가에게 물렸었다. 사화산에서 기생충에게 손목이 물리고 등급이 B로 올랐었다. 청호와 손잡는 게 아프지 않았었지. 그리고 꽃밭에서는 모기에게 물렸었다. 그 덕에 등급이 A로 올라 청호의 폭주를 갈무리할 수 있었다.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그저 허황한 가늠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 모든 게 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휴는 제가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오래전부터 저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대체 왜. 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기에 끊임없이 저를 자극하는 걸까. 그리고 왜 구태여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게 하는 걸까. 제게 바라는 게 있다면 아예 납치해다가 마음대로 굴리는 게 편할 텐데.
왜 굳이. 어째서.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추론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했다. 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든, 둘둘 돌려 정보를 얻든 지금보다는 덜 답답할 듯했다.
시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응시했다. 커다란 군용기 하나가 막 상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어…….”
문득, 휴를 만날 방법이 떠올랐다.
방문 앞에 붙어 선 시윤이 귀를 가져다 댔다. 별다른 소음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새 폴이 떠난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은 시윤이 슬쩍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복도 끝을 애달프게 바라봤다. 그러다 곧 결심한 듯 청호가 있을 거실로 나갔다.
청호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쇠구슬 여러 개가 그의 앞을 뱅글뱅글 돌며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시윤이 쭈뼛쭈뼛 벌받는 학생처럼 그의 앞에 가 섰다.
“대장님. 출정…… 나가십니까?”
“어.”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
시윤을 보지 않던 청호가 비로소 그를 직시했다. 네가 대체 그게 왜 궁금하냐는 표정이었다. 시윤이 푹 고개를 고꾸라트렸다.
“……함께 출정하고 싶습니다.”
“지금 몇 급이지?”
“……C요.”
다 죽어 가는 목소리에 자신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제가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긴 했다. 고작 C 주제에 전장에 나가니 마니 운운한다는 게 우습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소롭기 그지없다는 웃음이었다.
“네가 가서 뭘 할 수 있는데?”
“소, 손잡아 드릴게요.”
“…….”
“물론 다른 것도 괜찮습니다. 버틸 수 있어요.”
같잖은 객기임을 안다. 청호가 넌 대체 전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며 화를 낼지도 몰랐다. 아니,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나가야 했다. 휴가 나타날지 말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시윤은 절박했다.
더는 아프고 싶지 않았다. 청호의 아픔을 완벽히 거둬 주지 못하는 것도 싫었고, 아침저녁으로 성적표처럼 받는 알파벳에 안도와 실망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데리고만 가 주세요. 뭐든 할게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시면, 그것도 지키겠습니다.”
시윤이 간절히 부탁했다. 어찌나 안달이 나는지, 예의 없이 청호의 손을 덥석 움켜쥐기까지 했다. 순간, 청호의 검은 동공이 점처럼 움츠러들었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시윤이 보다 세게 손을 잡았다. 청호의 힘이 따끔한 정전기처럼 핏줄을 타고 올라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기와 짜증이 치밀었다. 고작 손잡는 것으로도 고통을 느끼는 제가 혐오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시윤이 눅눅하게 젖은 눈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마음대로 해.”
내리막을 그리고 있던 시윤의 입술이 대번에 상승 곡선을 그렸다. 보기 좋은 웃음이 꽃이 만개하듯 방긋 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장님.”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시윤이 미련 없이 청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후다닥 방으로 향했다. 출정하려면 챙길 게 많았다. 만약 휴가 나타난다면, 그에게 부탁할 말도 준비해야 했다. 무어라 구슬려야 순순히 제 바람을 들어주려나.
시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라지고, 홀로 남은 청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볼일 끝났다고 홀라당 가 버린 시윤도 시윤이지만, 손 한번 잡혔다고 냉큼 원하는 것을 쥐여 준 저도 참…… 답이 없다.
청호가 텅 빈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시윤이 남기고 간 안온을 부수려는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갑갑했던 속이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