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6)

윤택한 사막

시윤이 콧잔등을 짓누르는 선글라스를 어색하게 올려 썼다. 몸에 걸친 것 중 이질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사막 픽셀로 뒤덮인 군복도, 뙤약볕에 시력이 상하는 걸 막아 주는 선글라스도, 미끄럼 방지를 위해 우둘투둘한 밑창이 달린 전투화도, 모래 먼지를 피하기 위해 쓴 마스크도.

이번 작전지인 사막은 예상했던 것만큼 덥진 않았다. 그렇다고 상쾌한 기온도 아니었으나, 땀이 날 만하면 건조한 모래바람이 살갗을 할퀴고 가 제법 견딜 만했다.

힘든 건 푹푹 빠지는 발과 목적지를 모른다는 아득함이었다. 일단 청호를 졸라 출정만 하자, 했던 터라 이 전투의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듣질 못했다. 이번엔 계속 이동해서 따로 베이스캠프도 만들지 않는다던데. 대체 언제까지 사막을 배회하는 걸까.

시윤이 저 멀리 부대 앞쪽에 있는 청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된데 뚜벅뚜벅 산책하듯 걷고 있는 그가 참 신기했다.

청호의 뒤통수만 보며 걷던 시윤이 아무도 몰래 주위를 크게 두리번거렸다. 행여 휴의 흔적이 보일까 봐. 왜 있잖은가. 사막에 난데없이 핀 빨간 꽃이라든가, 흙바람과 달리 뽀얀 안개라든가, 나른하게 일렁이는 붉은 머리카락이라든가.

그러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모래였다. 황톳빛의 모래, 모래, 모래. 제가 찾는 이는 도통 보이질 않았다. 시윤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뭘 그렇게 봐요?”

낮은 목소리 하나가 예고 없이 튀어나왔다. 알렌이었다. 시윤이 어깨를 움찔 튕겼다. 딴짓하던 게 딱 걸렸다. 그것도 전장에서. 당장 머리를 박으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청호에게 보고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입술을 겹쳐 문 시윤이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해 보였다.

“아, 알렌 중위님. 그게…….”

“사막이라는 게 참 신기하죠?”

“네?”

“저도 작전 때문에 몇 번 와 봤는데, 볼 때마다 놀랍다니까요. 이 많은 모래가 어떻게 한곳에 모여 있는지.”

알렌이 크, 걸걸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막 전경을 바라봤다. 높고 낮은 언덕들, 마치 파도가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한 바람 자국,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 미끈한 모래, 그리고 수만 평을 훨씬 웃도는 어마어마한 면적.

매우 장엄하고 대단한 풍경이었다.

“네. 멋지네요.”

시윤이 뒤늦게 사막의 전경을 감상했다. 알렌의 말마따나 참 신기한 곳이었다.

“근데 이 사막은 가이아께서 만드신 게 아니에요.”

“……네?”

“아니, 따지고 보면 가이아가 만드신 거긴 한데, 오롯이 그분으로부터 말미암은 건 아니고요. 여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도시가 하나 있었어요. 핵전쟁 전에는 분명 큰 도시였을 겁니다.”

“…….”

“근데 핵이 떨어지면서 도시가 완전히 붕괴했고, 바람이 수백 년 동안 망가진 도시의 잔해들을 여기까지 끌어와 사막을 만든 거지요.”

“아…….”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에 시윤이 짧은 감탄을 흘렸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수백 년간 부식되고 부식되며 이렇게 고운 흙이 되었구나. 그저 흙더미로 보이던 사막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런 게 많습니다.”

알렌이 허리를 굽혀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무언가를 들었다. 글자가 다 해지긴 했지만 ‘coffee’라고 적혀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마 자그마한 카페의 간판 정도 되리라.

시윤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모래를 면밀히 살폈다. 어디에 붙어 있던 건지 모를 플라스틱 조각이나 종이 쓰레기, 녹슨 차 번호판과 빨대, 천 조각, 비닐 등이 그제야 보였다.

도시의 흔적, 아니, 어쩌면 인간의 흔적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걸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동시에 어쩌면 포스도 언젠가 이런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꼈다.

그렇게 서글픈 마음으로 한참을 걸었다. 혹사당한 무릎과 발바닥이 아파져 올 때쯤, 알렌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알렌 중위님. 저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물론이죠.”

“저희…… 어디 가는 겁니까?”

“응?”

알렌이 그런 멍청한 질문은 생전 처음 들어 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움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시윤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고는 능청히 거짓을 말했다.

“제가 급하게 투입된 거라서 작전지도 작전 목적도 제대로 듣질 못했지 말입니다.”

“또 강의실에 있다가 끌려왔습니까?”

“뭐…….”

시윤이 말끝을 흐렸다. 그에 상황을 앞서 넘겨짚은 알렌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친절히 상황을 설명했다.

“고위 레벨 클롭스 본거지가 이 근방에 있답니다.”

“본거지가 사막에요?”

“네. 근데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 이 사막에 있다는 것만 알지 말입니다.”

시윤이 으음, 목울대를 움직였다. 대개 클롭스들은 사방이 막혀 있고, 어두우며, 습한 곳을 좋아한다. 물론 특성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에다 똬리를 틀진 않았다. 그들이 투명 바리케이드를 쓸 리도 없고. 하나같이 덩치도 보통이 아닌데 우리 여기 있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닌 이상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정보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함정인가. 시윤이 자신의 턱 아래를 슬슬 문질렀다.

“우두머리가 어떤 클롭스인지는 파악됐습니까?”

“미노타우로스로 추정된다던데요.”

“똑똑한 클롭스군요.”

시윤의 낯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황소 머리에 인간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는 클롭스 중에서 지능이 매우 높은 쪽에 속했다. 이것이 함정이라는 가설에 힘이 실렸다.

그래도 괜찮다. 실로 함정이라 한들,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클롭스의 목적은 포스 부대를 죽이는 것일 테고, 그러기 위해 누군가가 나타나긴 할 터였다. 그들로부터 진짜 본거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시윤은 어떠한 함정이 있어도 에로아스 부대는 굳건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전투가 조금 힘들어질 뿐이다. 그래도 제가 기민하게 주위를 관찰하고 파악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시윤의 눈동자가 한층 또렷해졌다. 휴가 순식간에 뒷전이 됐다. 목적이 있고 없고는 이다지도 큰 차이를 냈다.

에로아스 부대는 한참이나 사막을 배회했다. 드론을 날리고, 지형을 파악하고, 여러 갈래로 찢어져 주위를 탐색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기온은 내려갔다. 팔뚝이 으슬으슬하고 뺨이 차게 식었다. 후덥지근하던 낮이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결국 청호는 큰 언덕이 사위를 두르고 있는 지형에서 비박하기로 했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깔개를 깔고 셸터를 펼쳤다. 여기저기서 작은 불씨가 올라왔고, 투명 바리케이드 역시 즉시 실행됐다.

완성된 임시 베이스캠프는 나쁘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 으레 있던 샤워 시설도, 식당도, 지휘 본부도 없었지만 하룻밤 피곤한 몸을 뉘기엔 충분했다.

“…….”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비박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다.

시윤은 그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친구 없는 섬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청호에게 가야 하는데,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그가 바빠 보여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항상 그가 이리 오라 손짓해 줬었던 터라 먼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아 거리감이 매우 크게 느껴졌다.

모든 병사가 각자의 셸터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시윤은 괜히 전투모 끈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병사 하나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채 준위님.”

“예?”

“대장님 셸터는 저쪽이지 말입니다.”

“아, 네.”

시윤이 냉큼 병사가 가리킨 쪽으로 향했다. 청호의 막사는 여타 셸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니 예닐곱이 들어갈 정도로 넓다는 것뿐이었다.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막사 앞에 선 시윤이 뒤꿈치를 들썩였다. 이상하게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다른 병사들 틈에 끼어 자자니 ‘넌 대체 왜 여기 있니?’라는 시선으로 쳐다볼 게 뻔했다.

울상을 한 시윤이 죄 없는 입술만 씹는데, 문득 셸터 천막이 들썩이더니 청호가 나타났다. 연하게 짜증이 서린 얼굴로 나타난 그가 멀뚱히 서 있는 시윤을 발견하곤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아……. 죄송합니다.”

시윤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근데 어째 꾸지람을 들어 놓고도 입술이 비죽 호선을 그렸다. 청호가 저를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그 말인즉슨, 제가 청호의 셸터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음을 뜻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호가 들어오라는 듯 천막 한쪽을 걷었다. 시윤이 잔걸음으로 셸터 안에 들어섰다.

셸터 안은 별다를 게 없었다. 작은 난로와 침구가 다였다. 청호가 머물기에는 매우 초라해 보였다.

괜히 뾰로통해진 시윤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그렇지. 대장님 숙소를 이렇게 성의 없이 설치하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로아스 부대의 청호 대장이거늘.

시윤이 못마땅한 눈으로 셸터 안을 노려보고 있는데, 청호가 털썩 침구 위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곧장 자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시윤의 안색이 대번에 눅눅해졌다. 종일 돌아다녀서 그런가, 아니면 무언가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나. 평소와 달리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그였다.

고통이 아니라 피곤에 시달리는 청호는 처음 봤다. 사화산을 오르락내리락하고, Z 구역에서 산을 펄쩍펄쩍 뛰어다닐 때도 피곤해하진 않았는데.

오도카니 서 있던 시윤이 넌지시 입을 뗐다.

“저…… 대장님. 제가 다른, 다른 곳에서 잘까요?”

“왜?”

“그게 공간도 좁고, 침대도 없고 불편하실 것 같아서…….”

시윤이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었다. 그러자 청호의 눈썹이 삐뚜름한 사선을 그렸다.

“뭐든 하겠다더니.”

“…….”

시윤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몇 번이나 끔뻑였다. 수 초가 흘러서야 그 뜻을 알아차렸다.

청호는 제가 그와 닿는 걸 피하려 자리를 뜬다고 생각한 듯했다. 할 일을 회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제 딴에는 그를 배려한 거였는데. 그걸 호도하는 청호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여태까지 제가 오죽 못나게 굴었으면 저런 오해를 하나,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필요하신 거면 언제든지…….”

“이리 와, 그럼.”

청호가 흘깃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시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놀란 듯 잠깐 눈이 커졌으나,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시윤이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전투모를 조심히 내려 두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잡다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았다. 총과 탄창, 선글라스, 채혈 기계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섰다.

그리고 겉옷도 벗었다. 고작 한 겹 벗었을 뿐인데 서늘한 밤공기가 몸 여기저기를 함부로 파고들었다. 시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마저 옷을 벗어 갔다.

청호는 그 꼴을 서늘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시윤이 어디까지 하나 보려는 심산이었다.

시윤의 움직임은 더디긴 했으나, 꾸준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덕분에 시윤의 말간 상체가 금세 드러났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그러잖아도 하얀 피부가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며칠 못 본 새 살이 빠져 오돌토돌하게 드러난 갈비뼈와 오목하게 들어간 배가 이상하게 맛깔스러워 보였다. 평소보다 곧추선 분홍빛 유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청호는 시윤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군침을 삼켰을 터였다. 청호에게 시윤은 일종의 무조건 반사였다.

“…….”

날카로이 박혀 오는 청호의 시선에 시윤이 자신의 동그란 어깨를 매만졌다. 한두 번 보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전투화까지 벗은 시윤이 막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됐어. 그냥 와.”

청호가 호응 없는 스트립쇼를 중단시켰다. 시윤은 그 명령에 곧장 반응했다. 그의 옆으로 가 송장처럼 뻣뻣하게 누웠다. 그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꼭 못된 신에게 바쳐진 제물 같은 꼴이었다.

“…….”

“…….”

정적이 흘렀다. 청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삼각뿔 형태로 모이는 셸터의 천장만 바라보던 시윤이 양쪽 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문질렀다. 춥다. 사막의 흙이 뿜어 대는 냉기가 깔개 너머로 스며 왔다. 자그마한 난로로는 갈무리할 수 없는 추위였다. 종국엔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왜 아무것도 안 하지.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하나. 시윤이 눈꺼풀을 바쁘게 깜빡였다. 그러다 청호를 향해 막 몸을 돌아누우려는 찰나였다. 두껍고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왔다.

멀찌감치 걸려 있던 청호의 코트였다. 그것이 시윤 위로 풀썩 내려앉았다. 냉기에 훤히 드러나 있던 시윤이 눈만 빼꼼 나오고 사라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청호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뼘 떨어진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시윤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종일 돌아다닌 거로도 충분히 피곤한데, 긴장한 채로 오감을 곤두세우고 있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차라리 얼른 몰아치고 기절하듯 잠들고 싶었다.

시윤이 꾸물꾸물 코트를 내리고 얼굴을 드러냈다. 박하처럼 화한 추위를 무시한 채 청호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자려는 사람처럼.

“왜……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시윤이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하면 버틸 순 있고?”

청호가 눈을 뜨지 않은 채 되물었다.

“노력하겠습니다.”

“됐어.”

“…….”

청호가 더 이상의 언쟁을 거부하겠다는 듯 시윤을 등지고 누웠다. 시윤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넓고 단단한 등을 보며 항상 멋지다 생각했었는데. 그의 뒤를 닮고 싶고, 좇고 싶었는데. 오늘은 그 뒷모습이 조금, 아주 조금 미웠다. 제 무능력함을 귀찮아하는 듯해 슬프기도 했다.

시윤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청호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가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호의 등에 이마를 묻었다.

호기로운 행동과 달리 그의 허리를 감싸 안진 못했다. 그러다 제대로 화난 청호가 저를 셸터 밖으로 내던져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반 알몸뚱이로 쫓겨나고 싶진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청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댔다.

“가이드가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시윤이 지지 않고 말했다. 그와 닿은 부분을 통해 압정 같은 힘이 흘러왔다. 닿은 것만으로도 아픈 건 참 오랜만이다. 그래서일까. 통각이 보다 무겁고 버거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청호에게 더는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가이드. 부족한 가이드. 그 타이틀과 작별하고 싶었다.

“……시키지 않은 짓은 하지 마.”

청호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재차 경고했다. 그러나 시윤은 물러섬을 몰랐다. 오기, 독기, 그런 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 있었다.

그가 보란 듯이 청호의 등에다 몸을 더 딱 붙였다. 치미는 고통에 등줄기 위로 금세 식은땀이 뱄다. 허나 아집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는 제법 평온히 흘러 나갔다.

“할 겁니다.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언젠가 제가 처음으로 청호의 숙소에 발을 들였을 때, 그가 ‘화목한 방’을 소개하며 했던 말이었다.

‘계급이 아니라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로 있고 싶다는 뜻이었어.’

자기가 먼저 그리 말해 놓고. 그렇게 멋진 다정함으로 나를 길들여 놓고. 그렇게 따스한 친절함으로 나를 녹여 놓고. 이제 와 이리 차갑게 구는 건 반칙이다.

시윤이 청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조곤조곤 듣기 좋은 음성으로 고집을 부렸다.

“저는 제 반려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 겁니다. 해 주고 싶은 건 다 해 줄 거예요.”

“…….”

“저한테 대장님은 정말…… 정말 소중하거든요.”

“…….”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해 주세요. 밀어내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뭐 그리 아프고 서러운 일이라고 꼴사납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쏟아지는 청호의 힘을 참는 것보다 울음을 참는 게 더 힘들었다. 저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

청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윤을 밀어 내지도 않았다.

시윤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그가 작은 품으로 청호를 조금 더 깊이, 더 세게 껴안았다.

아픈데, 아파서 행복했다.

* * *

정처 없이 헤매는 시간이 다시 반복됐다. 병사들이 지쳐 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졌다. 강철 체력인 그들이 왜 벌써 지치냐,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신체가 지치는 게 아니라 지루함에 지치는 거였다.

사막은 다른 듯하면서도 다 같은 풍경이다. 내가 방금 지나온 길이 뒤에 있는지 앞에 있는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수시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언덕에 멀미까지 올라왔다.

시윤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어제와 달리 체력이 금세 바닥났다. 어깨가 자꾸 아래로 처지고, 시선은 황량한 땅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밤새도록 꾸역꾸역 청호와 몸을 붙이고 있던 게 이렇게 돌아오는 모양이다.

“하아…….”

입천장을 간질이며 올라오는 한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명치가 따끔따끔하고 몸은 무겁고 눈꺼풀은 멋대로 움직였다. 시윤이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것 없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안색이 안 좋네?”

무리를 거슬러 내려오며 병사들의 안위를 살피던 폴이 쯧쯧 혀를 차며 알은체를 해 왔다.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전투모를 눌러썼다.

“더워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게 왜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는…….”

폴이 절레절레 턱을 내저었다.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렌은 제가 따라오려 했다는 걸 모르던데. 폴은 어떻게 아는 걸까. 청호가 말한 걸까.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폴은 청호와 꽤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시윤이 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사이 폴은 시윤을 넘어 뒤에 있는 무리로 향하고 있었다. 시윤이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저, 대령님.”

“왜?”

“혹시…… 혹시 말입니다.”

“뭐?”

“최근에 대장님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일이라니? 무슨 일?”

폴이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윤이 한 발자국 그에게 붙어 섰다. 행여 다른 병사가 대화를 들을까, 염려해서 한 행동이었다.

“요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나쁜 일이 있나 싶어서…….”

“…….”

“뭐…… 이를테면 어머니와 관련한 일 같은 거 말입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폴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그가 시윤을 적대적으로 노려봤다. 예고 없이 등장한 주제가 매우 마뜩잖은 듯했다.

“대장님께 들었습니다.”

“…….”

“주동자 찾는 일이 잘 안 되는 겁니까?”

“…….”

“말해 주세요. 저는 알 권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윤이 진중한 낯으로 말했다. 어찌나 사납고 엄한지 꼭 협박 같았다. 폴이 우물우물 문장을 씹었다. 알려 주자니 청호를 배신하는 기분이고, 함구하자니 시윤의 말마따나 그는 알 권리가 있었다. 적어도 폴이 본 청호와 시윤의 관계에서, 청호가 시윤을 대하는 거로 봐선 그랬다.

한참 고민하던 폴이 시윤을 잡아당겨 무리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게,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예.”

“얼마 전에 갑자기 찾는 걸 그만두라 하시더라고.”

“……예? 어째서 말입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냥 관두라고 하셨어. 더 찾을 필요 없다고.”

시윤의 낯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더 찾을 필요가 없다라. 이유가 뭘까. 주동자를 찾았나? 아니, 그건 기뻐할 일인데. 행여 주동자가 이미 사망한 상태일까. 복수할 기회조차 잃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이상하지?”

폴이 물었다. 시윤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기미가 있진 않았냐고 다시 물으려는데, 저 멀리 앞서가던 병사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전방 500미터 앞, 오아시스. 오아시스입니다!”

모두가 동시에 헛숨을 삼켰다. 반가움의 표시였다. 목이 말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목적지가 사막이니만큼 생수는 충분히 준비해 왔다. 에스퍼 어빌리티가 힘인 병사들이 수백 리터씩 이고 걷는 중이었다.

그저 새로운 풍경에 신이 난 것이다. 오아시스. 단어조차 환상적이지 않은가. 황량한 사막에 고인 맑은 물. 척박한 땅의 유일한 생명 줄.

들썩이는 분위기에 폴이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떴다. 시윤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아시스고 뭐고 청호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걱정이 됐다. 역시 어머니와 관련한 이유였구나. 기분이 좋지 않을 만도 하지. 제가 괜히 눈치 없이 치대고 달라붙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바쁘게 이동하는 병사들의 뒤를 따랐다.

심란한 와중에도 오아시스는 멋졌다. 흙 위에 생겨난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쁜 파란색이었다. 오아시스를 수호하듯 둥글게 자라난 식물들 역시 생기 있게 푸르렀다. 폐부에 흙바람이 찬 듯, 갑갑하고 건조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병사 몇몇이 오아시스에 정체 모를 기계들을 집어넣었다. 보고는 곧장 청호에게 전달됐다.

“식용 가능합니다.”

“방사능 수치 양호합니다.”

“최고 수심 2미터 미만입니다.”

“생명 반응 없습니다.”

모든 보고를 들은 청호가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는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전투복을 내던지고 오아시스로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떨어지는 모습은 꼭 소나기 같았다. 병사들이 어찌나 사납게 물장구를 치는지 희미한 무지개가 다 떴다. 하나같이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입가에 미소를 띤 시윤이 오아시스로 향했다. 연어처럼 펄떡펄떡 뛰노는 병사들에게 방해가 될까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발을 옥죄던 전투화를 벗었다. 콧잔등을 짓누르던 선글라스와 마스크도 벗어 가슴 포켓에 집어넣었다.

“하아…….”

눈꺼풀이 절로 나른하게 감겼다. 그렇게 끔찍하던 모래가 지금은 엉덩이를 푹신하게 받쳐 주는 질 좋은 쿠션이 됐다.

시윤은 머리를 뒤로 넘긴 채 넘실거리며 흘러오는 물 냄새를 만끽했다. 첨벙! 물을 튕기는 병사들 덕에 물비린내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따금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이마를 두드리기도 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시윤이 무릎걸음으로 오아시스로 다가갔다. 붙임성이 좋지 않아 병사들 틈에 껴 놀 자신은 없다만, 그래도 생전 처음 마주하는 오아시스를 조금 더 경험해 보고 싶었다.

시윤의 자신의 얼굴을 반사하는 물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손을 폭 집어넣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시원하진 않았다. 미적지근한 온도.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잠시 손가락으로 물결을 헤치던 시윤이 손바닥을 오목하게 좁혀 물을 떴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윤의 입술과 찰랑거리는 물이 마주 닿기 직전이었다. 누가 기다란 총구로 손목을 가볍게 내리쳤다. 아플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놀랐다. 덕분에 기껏 뜬 물이 죄 흩어져 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윤이 총구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사실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을 때부터 누군지 알고 있었다.

“마시지 마.”

청호였다.

“예?”

“이거 마셔.”

그가 반질반질한 은빛 수통을 내밀었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시윤은 반론을 제시하려다 말았다. 병사들은 거리낌 없이 물을 마시지만, 자신과 저들은 다르니까. 저들은 썩은 물을 마셔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고, 저는 아주 약간 오염된 물을 마셔도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를 터였다.

“감사합니다.”

시윤이 꾸벅 묵례하며 수통을 받았다. 진공 수통 안에 든 물은 오아시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시원했다. 관자놀이가 띵할 정도였다. 물을 마신 시윤이 수통을 청호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세수는…… 해도 될까요?”

청호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이 샐쭉 웃었다. 꿉꿉한 땀으로 범벅된 만면을 씻어 내자 기분이 한결 산뜻해졌다. 그 후로는 손을 담갔다가, 노는 병사들을 구경했다가, 억센 풀을 쥐어뜯기도 했다.

청호는 어느새 그런 시윤의 옆에 앉아 있었다. 시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청호에게 온 신경을 모두 쏟고 있었다. 며칠 본 척도 안 하더니 먼저 다가와 준 게 말도 못 하게 고마웠다. 제가 밤새도록 치댄 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바깥에 내놓은 시윤의 발가락이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그러면서 흘깃흘깃 청호를 훔쳐봤다. 선글라스도, 마스크도 없이 훤히 드러난 얼굴이 참…… 잘생겼다. 이마에서 인중으로 이어지는 선이, 높게 우뚝 솟은 콧대가, 적당히 볼록한 턱이 예술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막 픽셀 군복을 입은 건 처음인데, 어쩜 그마저도 잘 어울렸다.

시윤은 조금씩 조금씩 알게 모르게 청호를 훔쳐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종국엔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작품이라도 감상하듯 멍하니 보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청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보지?”

“아, 죄송합니다.”

흠칫 놀란 시윤이 얼른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시윤이 어딘가 야릇한 표정으로 다시 청호를 바라봤다.

“대장님.”

“어.”

“날씨도 더운데…….”

“…….”

“손이나 잡을까요?”

시윤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제가 더위를 처먹기라도 한 모양이다. 입으로 똥을 싸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근데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저는 제 반려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 겁니다. 해 주고 싶은 건 다 해 줄 거예요.’

어젯밤 청호에게 그리 말하면서도 저도 각성이란 걸 했다. 그에게 좋은 건 뭐든 해 줄 것이다. 그게 제 사명이고, 그걸 위해 태어났으니까.

시윤은 청호의 안위가 곧 포스의 안위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청호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든 말든 시윤은 엉덩이를 꼼질거리며 청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물기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청호의 두툼한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시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잡아요. 네?”

“……오늘은 무슨 등급인데.”

“B요.”

시윤은 아주 능청히 거짓을 말했다. 사실 여전히 C였다. 어젯밤 받아 낸 청호의 힘이 오장육부 여기저기에 녹슨 톱니바퀴처럼 끼어 있어 아직도 아팠다. 근데 그게 뭐. 저는 제 몸 상태가 어떻든, 하고 싶은 걸 할 것이다.

“…….”

청호가 자신의 앞에 받쳐진 손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 봤는데, 경험할 때마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마음 같아선 잡기는커녕, 아주 입 안에 통째로 넣고 빨아 먹고 싶었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리고 손끝이 닿으려는 순간,

“어…….”

시윤이 청호의 어깨 너머를 보며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청호가 그 시선을 따라 휙 고개를 돌렸다.

병사 대여섯이 언덕 언저리에 모여 있었다. 그들 사이에 철근 하나가 비죽 솟아 있었는데, 녹이 잔뜩 슬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대충 묘사하자면 가로등 같기도 하고, 조명 같기도 했다.

병사들은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뽑으려는 듯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로 봐선 시답잖은 장난이리라.

금세 흥미를 잃은 청호가 시윤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나 시윤은 어째서인지 철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좀…… 이상해서요.”

“뭐가?”

“어제 알렌 중위님이 이 사막은 바람이 도시의 잔해들을 끌어와 생긴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근데?”

“바람이 끌어오기에 저 철근은 너무 크고 무겁지 않나 싶어서요.”

꽤 타당한 시윤의 말에 청호가 다시 철근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철근을 움켜쥔 병사들의 팔뚝이 울룩불룩하게 요동쳤다. 각양각색의 악쓰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근이 무 뽑히듯 쑥 올라왔다. 박혀 있을 땐 2미터 정도였는데, 뽑고 나니 족히 4미터는 되어 보였다. 아래에는 두툼한 시멘트 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시윤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철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뜨는데, 바닥이 옅게 진동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허나 점차 심해지더니 고운 모래가 가뭄이라도 온 것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며 시야가 희뿌옇게 번졌다.

설마 떨어지는 건가? 라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바닥이 쑥 꺼졌다. 시윤은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눈만 질끈 감는데, 지척에 있던 청호가 시윤을 힘껏 껴안아 품에 숨겼다.

아무리 대단한 청호라도 땅이 꺼지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위가 모래다.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게 없단 뜻이다.

에로아스 부대 전체가 속수무책이었다. 뜰채 위의 밀가루처럼 모래와 섞여 아래로 와르르 쏟아졌다.

몸은 끊임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푸른 하늘이 멀어졌다. 곧 눈이 부실 정도로 밝던 사막 역시 사라지고, 어둠이 도래했다.

“콜록, 콜록.”

시윤이 탁한 기침을 내뱉었다. 기관지 가득 들어찬 먼지가 그렇게 불쾌할 수 없었다. 그러고 있으니 커다란 손이 등을 도닥여 왔다.

“괜찮아?”

“콜록, 콜록. 아으…… 네.”

“다친 데는 없고?”

“그런 것…… 같습니다.”

시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텁텁한 것 말고는 불편한 곳이 없었다. 청호를 깔고 떨어진 터라 정말 손톱만큼의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시윤이 전신을 뒤덮은 흙을 털어 내는 동안 청호는 손목시계를 흔들었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이 떠오르더니 강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손전등이었다.

그것으로 주위를 비췄다. 널브러진 병사들이 시윤처럼 기침하거나,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시윤과 청호야 물에 뛰어들지 않았지만, 오아시스에 있다가 떨어진 병사들은 기름에 튀기기 전의 돈가스 같은 꼴이었다. 곧 청호를 따라 반짝이는 빛이 여기저기서 켜졌다.

“다들 괜찮나?”

“예!”

“예, 무사합니다.”

“아돌프 소대장들은 각자 아돌프 추슬러서 집합해.”

“예!”

사막 아래라고 사막이 아닌 건 아니었다. 온통 푹신한 모래라 다행히 사상자나 부상자는 없는 듯했다. 청호가 무기를 찾고, 나뒹구는 전투화에 아무렇게나 발을 쑤셔 넣는 병사들을 살피는데,

“대장님.”

시윤이 청호를 불렀다. 청호가 그를 바라봤다. 어느새 플래시를 켠 시윤이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넋을 놓은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이거…… 축구장 아닙니까?”

널따란 지붕.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벽체. 얼기설기 겹쳐진 철근. 두꺼운 시멘트. 굵직한 기둥. 무엇보다 ‘Stadium’이라고 적힌 간판. 의심할 여지도 없는 축구 경기장이었다. 최근 포스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작게나마 만든 터라 알고 있었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시윤이 입을 벌리고 축구장을 바라봤다. 사막 아래에 피라미드나 파라오도 아니고 축구장이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건물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으스러졌으나 제법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위로는 전쟁에 파괴된 도시 부속품들이 마구 널려 있었는데, 경기장만큼 높게 쌓인 상태였다.

아마 병사들이 뽑은 철근이 쌓여 있던 부속품들을 무너지게 만들었으리라.

각각의 아돌프를 모은 알렌과 딜런이 빠른 걸음으로 청호에게 다가왔다. 알렌이 오는 길에 주워 온 표지판 하나를 내밀었다. ‘AT&D Stadium’이라고 적힌 표지판이었다.

“축구 경기장 맞습니다. 걷고 걸어서 도시 근처까지 와 버린 모양입니다.”

“어떻게 핵 폭격에도 무사할 수 있었는지, 신기합니다.”

딜런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이렇게 거대한 경기장은 도심 외곽에 위치하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알렌 중위는 그걸 어떻게 압니까? 경기장이 도시 한가운데에 있을 수도 있지.”

“보통 저렇게 큰 경기장은 도시가 어느 정도 발달했을 때 짓기 때문에 이미 빌딩으로 꽉 찬 도심에는 못 짓지 말입니다. <도시 경영과 건설> 교과 시간에 배우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중등 과정입니다.”

“…….”

딜런이 알렌의 아는 척이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두 사람에 익숙한 청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시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청호는 딜런과 알렌이 또 무의미한 말다툼을 반복하기 전에 명령했다. 그의 검지와 중지가 사위를 하나하나 가리켰다.

“일단 탐색부터 시작해. 아돌프 A 후방, 아돌프 B 우측, 아돌프 D 좌측. 나는 전방으로 간다.”

“예!”

간결하게 대답한 병사들이 청호의 손짓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방금까지 물장구를 치며 낄낄거리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전투화를 잃어버려 맨발인 이도 있었고, 정강이까지 걷어붙인 바지를 내리지 못한 이도 있었다. 그래도 하나같이 엄중한 표정이었다.

청호의 아돌프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뒤꿈치를 들썩이는데, 청호가 그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따라와.”

“네!”

바지춤에서 총을 꺼내 든 시윤이 얼른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스타디움 가까이 다가가자 걷는 게 편해졌다. 아스팔트라 발이 푹푹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얕게나마 흙도 깔려 있어 조용히 이동할 수 있었다.

스타디움을 코앞에 두자, 희미하게나마 소음이 들려왔다. 흙이 떨어지고 돌이 부서지는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가 부딪치고 일그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어떠한 생명체가 떼로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렇게 찾던 클롭스의 본거지가 이곳인 듯했다. 선두로 가던 청호가 뒤를 향해 손가락을 천천히 접어 보였다. 그에 맞춰 플래시 밝기가 한층 어두워졌다. 몸은 낮췄고, 총구는 올렸다.

그러나 에로아스가 스타디움에 완전히 다다를 때까지도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보초도 서지 않은 것이다. 아마 흙더미에 깔린 이곳을 누구도 발견할 수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겠지. 사실 이곳을 찾아내 터를 잡은 것도 놀라웠다.

청호는 바보처럼 출입구로 들어가는 짓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수백 명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스타디움 문은 지나치게 컸다. 더군다나 위로 높고, 문을 통해 들어가면 매우 넓은 공간이 나오기 때문에 적이 매복하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그래서 청호는 벽을 기어 올라가기로 했다. 비록 건물 외곽이 미끈한 유리로 뒤덮여 있었으나 깨지고 으스러져서 짚고 올라설 부분이 많았다.

물론, 시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여태 총 쏘는 연습만 했지, 벽 타는 연습은 하지 않은 터라.

부서진 건물 외벽 뒤에 몸을 숨긴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미끄럼 방지 장갑을 찾아 끼고, 서로의 몸을 두꺼운 로프로 연결했다. 시윤이 엉거주춤하게 그들을 따라 장갑을 꼈다. 하지만 로프 묶는 방법은 봐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줄 모르고 로프만 움켜쥐고 있는데, 청호가 구세주처럼 다가왔다. 로프를 채간 그가 익숙하게 자신과 시윤을 둘둘 묶기 시작했다. 시윤이 순식간에 고목의 매미처럼 청호의 등에 딱 붙었다.

“윙 슈트 메고 떨어질 때 기억하지?”

청호가 로프 매듭을 꽈악 당겨 묶으며 물었다.

“예.”

“그때랑 똑같아. 이번엔 올라갈 뿐이야.”

“예. 잘 붙어 있겠습니다.”

시윤이 보란 듯이 청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리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청호는 흠칫 어깨를 떨었으나 별다른 내색 없이 등반 준비를 마무리했다.

폴이 스타디움 지붕을 향해 로프를 단 창살을 날렸다. 휘이익,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그것이 퍽! 지붕 철근에 박혀 들어갔다. 로프를 당겨 안전을 확인한 그가 청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청호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폴을 선두로 병사들이 유리 벽을 타기 시작했다. 표면은 매끄럽고, 깨진 단면은 날카로운 유리들이 두렵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빠르게 올라갔다.

청호는 가장 마지막에 출발했다. 행여 추락하는 병사가 있으면 구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시윤을 뒤에 메고도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벽을 탔다. 스타디움의 벽은 매우 높았다. 모두 날다람쥐처럼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음에도 정상은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았다.

간신히 절반에 다다랐을 때쯤, 청호의 등에 얌전히 매달려 있던 시윤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장님.”

“왜.”

“따라오겠다고 고집부려서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이 정도 움직임으로 청호가 지치거나, 힘들어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도 어쨌거나 거슬리긴 할 터였다. 생각해 보라. 늘 편히 다니다가 물병 하나만 들어도 종일 거슬리고 버리고 싶은데. 하물며 인간을 데리고 다니려니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시윤이 침울한 표정으로 청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닿은 부분부터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스며 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겠다더니.”

죄의식으로 점철된 시윤의 말에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호기롭던 어젯밤과 너무 다른 자세가 아닌가.

“그건 대장님에게 좋은 거라면 뭐든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건 좋은 게 아니라 방해고 피해이지 않습니까.”

시윤이 전과 달리 따박따박 반박했다. 순식간에 바뀌는 말투에 청호가 다시금 웃었다. 그 와중에도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지는 병사를 공중에서 낚아채 벽에 붙여 주었다. 병사가 꾸벅 묵례하더니 청호를 앞질러 갔다.

“……모르지, 또.”

“예?”

“아무것도 아니야.”

청호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냈다. 시윤은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구구절절 이어 가는 것도 방해일 듯해 말기로 했다. 다음 출정부터는 능력 상승이고, 휴고 그냥 기지에 가만히 처박혀 있어야겠다.

스타디움 천장까지 오르는 데에는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깨진 유리 틈으로 안을 살피고, 이따금 정체 모를 소음이 들려오면 움직임을 멈췄다가, 기척이라도 나면 빙 둘러 올라야 했다.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철근 틈에 낀 가시처럼 생긴 머리카락,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퀸 자국, 부러진 돌기 같은 것들. 수집한 것들은 곧장 시윤에게로 전해졌다. 시윤은 어둑한 환경에서도 그것을 면밀히 살폈다.

다행히 답은 금세 나왔다.

“추파카브라로 추정됩니다. 네발 클롭스이고, 가끔 날개가 달리거나 이족 보행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크기는 2미터 내외. 에로아스가 염려해야 할 만큼 힘은 세지 않으나, 손톱과 발톱이 억세고, 어두운 곳에 살아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집단 사냥을 하며 흡혈도 합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흡혈하니 물리고 피가 빨리기 전에 떼어 내는 게 좋습니다. 다른 클롭스는 흔적을 발견하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귓구멍에 꽂힌 이어폰을 누른 시윤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적에 대한 정보를 나열했다.

―아돌프 A copy that.

―아돌프 B copy that.

―아돌프 D copy that.

응답을 확인한 시윤이 마이크를 끄고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작게나마 도움이 된 듯해 기분이 좋았다.

스타디움의 천장은 돔 형태였으나, 완만하고 넓어서 이동하기 어렵진 않았다. 가끔 먼지가 엉켜 미끄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만 주의하면 됐다.

‘AT&D Stadium’. 수십 미터짜리 활자가 굵직하게 적혀 있었고, 돔 천장은 반 정도 열리다 만 상태였다. 그래도 안을 살펴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안에서 은은한 빛까지 뿜어 나오고 있어 관찰자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

“…….”

“…….”

근데, 안을 살펴본 이들이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말을 잃었다. 하물며 청호도 그랬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시윤이 은근슬쩍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대체 안에 뭐가 있길래 볼꼴 못 볼 꼴 다 본 에로아스가 충격을 먹었는지 궁금했다.

“…….”

그리고 안을 살피는 순간, 시윤 역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우글우글 바퀴벌레처럼 움직이는 수천, 아니, 수만의 클롭스.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화염. 텁텁한 수증기. 매캐한 연기와 뒤섞인 클롭스 특유의 악취. 그리고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모를 고함과 비명.

이건 군대였다.

포스에서 ‘클롭스 본거지’라고 명명하는 곳은 어느 정도 몸집이 크고, 체계가 있으며 훗날에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곳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거대한 모습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래의 클롭스들은 무기를 만들고 있었다. 칼, 망치, 도끼 같은 것 말이다. 한쪽에 잔뜩 쌓인 무기 더미가 꼭 산 같았다. 총과 미사일이 난무하는 시대에 무슨 도끼 따위가 무기냐 할 수도 있겠지만, 클롭스 딴에는 그것들이 최선의 무기였다. 그들은 기기를 만지기에 핸디캡이 많은 신체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야 열 개로 나뉜 손가락으로 세심한 조작을 할 수 있지만 앞발, 뒷발, 갈퀴 등을 손으로 쓰는 클롭스는 그게 힘들었다. 그래서 대부분 일차원적인 무기를 썼다. 그런데도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터라 위험했던 거고.

예를 들어 인간이 도끼를 휘둘러 봐야 가느다란 나무 하나 베겠지만, 클롭스가 도끼를 휘두르면 건물이 무너졌다.

그러나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포스는 구 나라들의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채웠다. 직접 만들기도 하나, 군 강대국이었던 구 미국, 구 러시아, 구 중국, 구 인도 등과 주 방위 산업체, 무기 생산 업체 등에서 가져오기만 해도 앞으로 수백 년은 너끈했다.

반면에 클롭스는 인간의 도끼로는 싸울 수가 없다. 너무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야 했는데, 그 수가 항상 모자랐다.

근데 저렇게 많은 무기는 처음 본다. 이 스타디움은 일종의 무기 생산 공장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는 철이 남아돌고, 사막으로 뒤덮여 있어 은폐도 쉽고, 널따란 공터와 다름없는 경기장까지 있으니 무기를 만들기에는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요?”

심각한 표정의 폴이 물었다.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이곳에 답을 아는 이가 있을 리 없으니까.

“뭔진 몰라도 제대로 쳐들어오려나 봅니다.”

병사 하나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청호는 미간을 구긴 채 한참 동안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우리 폭탄 얼마나 가져왔지.”

“C4(군용 플라스틱 폭탄) 약 50개, 수류탄 약 200개, 그리고 박격포도 있습니다.”

폴이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꽤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도 청호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그거로 여기를 통째로 날릴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어……. 오래된 건물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겠습니다만, 설치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측정 장비도 부족하고, 빛이 없어 시야 확보도 어려운 상태라 확률이 높지는 않습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폴의 말에 병사들의 기세가 뚝 반으로 꺾였다. 폭탄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면대면으로 싸우는 난투극이 된다는 말인데. 에로아스가 지진 않겠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은 만큼 피해가 있을 터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잠깐 난색을 표하던 병사들이 총을 말아 쥐었다. 그때, 상황을 잠자코 관망하던 시윤이 슬쩍 말을 얹었다.

“C4를 저기, 쌓인 무기 아래에 설치하면 어떻겠습니까? 연쇄 폭발이 일어나게 수류탄도 몇 개 넣고요.”

“왜 하필 저기지?”

폴이 뾰족한 음성으로 캐물었다. 폭탄이 많지 않다. 신중해야 했다. 아랫입술을 핥은 시윤이 조곤조곤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럼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무기들이 빠른 속도로 사방에 퍼져 나갈 겁니다. 마치 집속탄(한 폭탄 속에 작은 알갱이 폭탄이 많이 들어 있어 폭탄이 터지면 작은 알갱이가 사방으로 날아가서 또 터지는 폭탄)처럼요. 하늘에서 칼과 도끼가 비처럼 쏟아지겠죠. 건물 붕괴에 실패해도 상당수의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무기가 무쓸모해지기도 하고요.”

폴이 시윤과 돔 아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청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충분히 실행 가능합니다.”

“좋아. 아돌프들을 불러. C4를 각각 열 개씩 나누어서 사방에 설치한다. 도망을 막기 위해 출입구 천장에 반드시 하나씩 설치할 것. 다섯 개는 지금 지붕에 설치하고 간다. 수류탄은 핀은 뽑되, C4의 연쇄 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거리에 조심히 엄폐해 두도록.”

“예.”

“나머지 다섯 개는 내가 맡는다. 두 개는 채 준위 말대로 무기 아래에 설치할 거고 남은 건 임의로 붙일 거다.”

“예, 알겠습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통신 상태가 엉망이 될 거야.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지 모르니까 타이머는 지금부터 30분 후로 맞춘다.”

청호가 손목시계를 보며 30분 타이머를 맞췄다. 그를 따라 병사들 역시 시계를 조작했다. 시윤도 꾹꾹 시계를 눌렀다.

“폭탄 설치를 완료하면 즉시 빠져나가서 최대한 멀리 숨어 있도록. 해산.”

“해산!”

병사들이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돔 여기저기에 폭탄을 설치했다. 수류탄은 굴러가지 않도록 검은 테이프로 둘둘 말아 고정했다. 그러고는 무섭지도 않은지, 로프 하나만 매단 채 아래로 번지 점프 하듯 훌쩍 뛰어들었다.

시윤은 청호가 폴이 남기고 간 C4 다섯 개와 수류탄 몇 개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걸 멀뚱히 보고 있었다. 명령받은 게 없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늦게 시윤의 존재를 인지한 청호가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채 준위 너는…….”

내려가서 어디 어두운 곳에 숨어 있어,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바깥에 홀로 두자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혹여 클롭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잡아먹힐 터였다. 아무래도 시윤은 하얗고 말랑말랑한 게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이니까.

“나랑 같이 움직여.”

“……예.”

시윤이 푹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부대에 섞어 놓자니 할 줄 아는 게 없고, 어디다 숨겨 놓자니 걱정이 되겠지. 결국 또 짐짝 신세였다. 진짜, 진짜 다음부터는 따라 나오지 말아야지. 종일 수십 번도 더 다짐한 걸 또 되뇌었다.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쉰 그가 제 몸에 묶인 로프를 조금 더 세게 동여맸다. 꼭 숨통이라도 조이려는 것처럼. 그 꼴을 보던 청호가 굶주린 들짐승에게 먹이라도 던져 주듯 읊조렸다.

“잘했어.”

“……예?”

“무기 아래에 폭탄 설치하자는 아이디어 낸 거. 잘했다고.”

“아…….”

시윤이 벙긋 입술을 벌렸다. 그러다가 싱긋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청호의 다정함이었다. 제가 작전에 도움을 줬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청호가 다시 과거의 청호로, ‘화목한 방’을 만들어 주었던 청호로 돌아온 것 같아 좋았다.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밝은 시윤의 미소에 청호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리 와. 우리도 내려가자.”

“예.”

시윤이 빠르게 달려가 그의 등에 매달렸다.

청호와 시윤은 깨진 유리창을 통해 경기장 안으로 침입했다. 안은 바깥보다 훨씬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갈긴 배설물에 썩어 문드러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들, 끊임없이 불을 지펴 눈까지 따끔따끔하게 만드는 매캐한 연기까지.

시윤이 주머니에 넣어 뒀던 마스크를 찾아 썼다. 물론, 그런다고 악취가 옅어지진 않았다.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인상이 모나게 구겨졌다.

스타디움은 정말 지독하리만큼 넓었다. 분명 다른 길인데 사방이 똑같이 생긴 것도 혼란에 한몫했다. 또 경기장 좌석으로 향하는 길이 수시로 뚫려 있어 언제 어디서 클롭스가 튀어나올까,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청호는 일단 가장 먼저 무기 더미 아래에 폭탄을 설치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여분이므로 빠져나오는 길에 붙여도 충분할 터였다.

문제는 ‘어떻게 붙이냐’다. 복도에 걸린 스타디움 지도를 응시하던 시윤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지도를 오래 보고 있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기 더미는 딱 경기장 한가운데 있었다. 어떤 입구로 들어간다 한들, 비슷한 거리란 말이다. 또 주위에 클롭스가 너무 많았다. 무기 더미까지 들키지 않고 가서 폭발물을 설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윤이 한창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청호가 목을 한 바퀴 크게 돌렸다.

“내가 들어갔다가 올게. 넌 먼저 나가. 폴한테 연락해 둘 테니까.”

“예? 하지만…….”

“들키지 않고 설치할 순 없어. 그러니까 약속된 폭발 시각 직전에 설치해서 바로 터트려야 해. 날 잡으려고 개떼처럼 모이겠지. 그럴수록 효과는 좋을 거야.”

“그럼, 그럼 대장님은 어떻게 빠져나오십니까?”

“……안 죽어.”

“죽진 않더라도 몸이…….”

넝마가 될 게 뻔하잖아요. 사지가 중구난방으로 날아갈 텐데. 더군다나 클롭스를 한 번에 몰살할 수도 없었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청호가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사이, 그들이 청호를 씹어먹고자 이빨을 들이밀겠지.

그렇다고 한들, 청호는 죽지 않을 것이다. 폭발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에로아스가 들이닥칠 거고, 폭발에 많은 상해를 입은 클롭스들은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내놓을 터였다.

근데…… 아프잖은가. 청호가 아무리 불사에 가깝다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최근 전투에서 어깨가 씹혀 피를 줄줄 쏟던 청호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상기할 때마다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근데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머리엔 도끼 같은 게 박힌 청호를 상상했더니 구역질이 다 나올 것 같았다.

“안 됩니다.”

시윤이 단호히 말했다. 그러잖아도 큼지막한 눈을 한껏 홉뜬 채 청호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절대 안 됩니다.”

“네가 날 막을 권리 같은 건 없어.”

“……그래도 안 됩니다.”

청호가 픽,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시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총을 재정비하고 폭탄의 타이머를 새로이 조절했다. 청호의 자살 준비를 코앞에서 보고 있는 시윤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어찌나 답답한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다 차올랐다.

“솔직히…… 솔직히 지금 당장 처리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위치도 알고 병력 수준도 알았으니까, 준비해서 다시 오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너.”

“네?”

“그따위 생각으로 전투에 참여할 거면 앞으론 오지 마.”

“…….”

청호의 호된 꾸지람에 시윤이 입을 딱 다물었다. 어찌나 매서운 말인지, 차오르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시윤이 충격을 받았든 말든 청호는 작은 입구 앞에 붙어 서서 적의 동향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윤이 세상이 멸망한 듯한 표정으로 그런 청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이 좋아 ‘준비해서 다시 오자’이지. 제가 한 말은 후퇴하자, 도망가자, 내빼자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시윤이 벅벅 코끝이 붉게 익을 정도로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저는 아직 한참 멀었다. 청호를 따라가기는 무슨, 일개 병사의 마음가짐에도 못 미쳤다.

제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청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지만 어쨌든 등신 같은 건 등신 같은 거였다.

근데도 청호가 홀로 뛰어드는 게 싫으니 큰일이다. 시윤이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열심히 머리를 굴릴 때였다. 지척에 있는 클롭스 시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는 순간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른 일어난 시윤이 청호의 소맷자락을 잡아챘다.

“제가 갈게요.”

“같잖은 소리 하지 마.”

“안 들키고 갈 수 있어요.”

거듭 이어지는 시윤의 고집에 청호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이번엔 또 무슨 아집으로 저를 화나게 하려나 싶어 그를 바라보는데, 시윤이 검지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거, 저거 뒤집어쓰고 가면 돼요.”

그가 가리킨 건 부패해 거죽만 간신히 남은 추파카브라의 시체였다. 청호가 황당하다는 듯 시체와 시윤을 번갈아 봤다.

“뭘…… 써?”

“추파카브라는 시력이 좋지 않아요. 보통 냄새로 서로를 구분하죠. 그러니 저걸 쓰고 네발로 기어가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내가…….”

“아무래도 대장님이 쓰시기엔 너무 작으니까 제가 쓰는 게 맞겠지요.”

“…….”

한일자로 입을 다문 청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시체를 찾는 거였다. 그러나 거죽을 벗겨 뒤집어쓸 수 있을 만큼 온전한 것은 시윤이 가리킨 것뿐이었다.

이번엔 청호의 패배였다. 시윤이 청호의 손을 꾸욱 세게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저 구해 주실 거잖아요.”

“…….”

“보고만 있지 않으실 거잖아요.”

“…….”

“아무도 안 다칠 거예요. 할 수 있어요, 저.”

시윤이 일부러 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추파카브라의 시체는 정말 역겨웠다. 청호가 가죽을 벗겨 내자 온갖 구더기와 진물이 쏟아져서 토악질을 참느라 진땀을 뺐다. 청호가 불로 한 번 지져 주겠노라 말했지만 그럼 특유의 냄새가 가실 테니 거절했다.

가죽을 쓴 시윤이 네발로 섰다. 그리고 고개만 갸웃 뒤틀어 청호를 올려다봤다. 이만하면 클롭스로 보이냐는 물음이었다. 근데,

“풉…….”

청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대체 왜 귀여운지 모르겠다. 시윤의 눈이 쪽 잡아 째졌다.

“웃지 마십시오. 저는 되게 진지하지 말입니다.”

“아, 흠흠, 괜찮은 것 같아.”

“그래요? 걷는 건요?”

엉덩이를 적당히 추켜들고 무릎을 굽힌 시윤이 제법 그럴싸하게 클롭스 흉내를 냈다.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을 한 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인 제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이질적이지만, 동물과 다름없는 클롭스라면 분명 속을 터였다.

잠시 주위를 배회하며 걷는 모양을 교정하던 시윤이 얼른 폭탄을 챙겼다. 약속한 시각이 이제 20분이 채 안 남았다. 네발로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 한들 경기장 가운데까지는 적어도 10분이 걸릴 텐데. 서둘러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경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한 시윤이 네발걸음으로 관중석 사이를 가로질렀다.

“채 준위.”

청호가 시윤을 불렀다. 행여 적이 들을까, 크게 부르진 못했다. 그래서일까. 시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청호가 쩝, 입맛을 다셨다.

“……조심히 다녀오라고.”

그리고 듣는 이 없는 걱정을 공기 중에 흘려보냈다.

“하아아…….”

시윤이 밭은 호흡을 아주 가늘게 내뱉었다. 네발로 걷는 건 예상보다 더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관중석을 벗어나 죽은 잔디 구장으로 나왔을 땐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숨 한번 허투루 쉴 수가 없었다. 클롭스의 무수한 발들이 주위를 규칙 없이 스쳐 갔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는 것과 달리 경기장 안에는 추파카브라뿐만 아니라 다른 클롭스도 있었다. 트롤이나 키클롭스, 고그마고그 같은 것들이었는데, 모두 하급 클롭스였으나 그들 사이에 저 홀로 인간이라 생각하니 위압감이 폐부를 세게 옥죄어 왔다.

무기 더미는 가까워질 듯하면서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도끼 손잡이로 쓰이는 통나무 틈에 몸을 숨긴 시윤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몸을 더듬어 폭탄과 수류탄의 안위를 확인했다. C4 두 개, 수류탄 다섯 개. 다행히 분실한 것 없이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시윤이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6분이나 지나 있었다. 어금니를 세게 깨문 그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해질수록 두려움은 줄어들었다. 클롭스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멀어지고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귓구멍을 지배했다. 또, 청호가 제게 찰나라도 시선을 떼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무기 더미가 가까워졌다. 지척에서 본 무기들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웠다. 도끼 하나에 100킬로그램이 훌쩍 넘을 것 같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괜히 무기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폭탄을 설치할 곳을 탐색하는 거였다. 와중에도 완성된 무기를 쌓기 위해 오는 클롭스를 피해 고개를 숙였다가 엎드리길 반복해야 했다.

악취에 질식할 것 같고,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덥고, 지나치게 긴장한 심장이 쿵쿵 북처럼 울려 대고, 시야를 스치는 클롭스들의 손바닥만 한 발톱에 오금은 저리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오죽하면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그래도 시윤은 견뎌 냈다. 제가 하지 않으면 청호가 해야 한다. 그에게 진 빚이 몇인데 이번에도 그럴 순 없었다.

입을 앙다문 시윤이 무기 더미에서 틈을 찾았다. 규칙 없이 쌓인 무기 틈으로 폭탄을 설치할 만큼 큰 구멍은 쉽게 보이질 않았다. 최대한 아래에, 최대한 깊숙이 설치해야 효과가 좋을 텐데.

그러다 칼 두 개와 도끼 하나가 엉켜 손바닥만 한 틈을 만들어 놓은 곳을 발견했다. 시윤의 안색이 한층 밝게 개었다. 이만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시윤이 곧장 폭탄을 켰다. 그리고 무기 틈으로 가느다란 팔을 쑤욱 집어넣었다. 깊게, 깊게, 조금이라도 더 깊게. 제 팔을 어깨까지 집어넣어 봐야 그 깊이가 엄청나진 않으나 연쇄 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틈에 수류탄까지 넣으면 그 효과가 제법 괜찮을 터였다.

시윤은 첫 번째 폭탄을 무사히 설치했다. 다음부터는 쉬웠다. 수류탄은 C4에 비해 몸집도 작고 둥글어서 어떻게 집어넣어도 알아서 아래로 떨어질 것이었다.

기쁜 마음 반, 급한 마음 반으로 들뜬 시윤이 손을 얼른 잡아 뺐다. 제가 어디에 손을 넣고 있었는지 자각하지 못한 멍청한 짓이었다. 겹겹이 쌓여 있던 칼날들이 기다렸다는 듯 시윤의 살을 찢어 냈다. 순간 팔뚝이 따끔하더니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윽…….”

시윤이 신음을 억눌렀다. 조심히 팔을 빼내 상처를 확인했다. 팔뚝부터 팔꿈치까지 군복이 찢겨 있었다. 도끼 모서리에 찍힌 채로 팔을 빼내 버려 베였다기보다는 터졌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황톳빛 군복이 금세 시뻘겋게 물들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손바닥까지 점령한 피가 손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피다. 피. 피.

심장이 조금 전보다 곱절로 빨리 뛰었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이 먼저였다. 피는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시윤이 품 안에 있던 수류탄을 대충 무기 더미로 던졌다. 그리고 얼른 뒤를 돌았을 때였다. 쿵, 몸뚱이만큼이나 커다란 발이 앞을 가로막았다.

“…….”

시윤이 헛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태 곁을 지나가던 발과는 조금 달랐다. 움직임 없이 굳건히 서 있는 게 분명 시윤을 막고 선 거였다.

시윤이 죽은 잔디를 꽈악 세게 움켜쥐었다. 거무튀튀하던 잔디가 시윤의 피로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클롭스는 피에 민감하다. 적으로 인지하는 게 아니라, ‘먹잇감’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민감했다. 악취가 풀풀 풍기는 클롭스와 달리 비릿한 철 내음만 폴폴 맛깔스레 풍기는 인간의 피에 매우 빠르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니까 지금 시윤은 굶주린 짐승들에게 던져진 최상급의 고깃덩이였다.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왔다. 그 뒤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줄을 이었다. 꼭 외국어로 대화하는 걸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마 인간의 피 냄새가 난다, 침입자다, 여기서 가깝다, 찾자, 찾아서 먹자, 정도의 대화가 아닐까.

시윤이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얼굴을 담뿍 적시고 있던 땀이 눈물처럼 떨어졌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 당장에 목덜미가 잡혀 올라가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를 악문 시윤이 무작정 앞으로 직진하기 시작했다. 청호가 있던 방향은 진즉 잃어버린 상태였다. 내내 바닥만 보고 기는데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시윤의 움직임을 따라 붉은 피가 길을 만들었다. 그럴수록 피 냄새는 더욱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클롭스들도 코를 벌름거리며 씩씩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빨리 움직였다. 주춤거릴 새가 없었다.

그렇게 널따란 경기장의 반을 가로질렀을 때였다. 문득 사위가 고요해졌다. 캉캉거리며 철을 두드리는 소리, 바쁘게 움직이는 클롭스들의 소리, 그들의 거친 숨소리 같은 게 뚝 끊기듯 멎었다.

그것을 깨달은 시윤이 움직임을 멈췄다. 설마 청호인가. 아니, 그럴 리 없는데. 아무리 그라도 클롭스 수만의 움직임을 한 번에 멈출 순 없었다.

시윤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흘깃 고개를 틀어 주변을 살폈다.

“…….”

모든 클롭스가 시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공이 손톱만 하게 줄어든 그것들이 잇새로 침을 뚝뚝 떨어트리며 시윤을 눈으로 씹어 댔다. 몇몇은 시윤이 지나오며 떨어트린 피에다 얼굴을 처박고 게걸스레 핥고 있었다.

아, 좆 됐다.

떠오르는 생각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아득, 어금니를 짓씹은 시윤이 냅다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추파카브라의 가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클롭스들이 기다렸다는 듯 시윤을 향해 손을, 아니, 발을 뻗었다.

시윤은 자그마한 몸뚱이로 달려드는 클롭스를 쏙쏙 잘도 피했다. 대부분은 운이었다. 엎어졌다가 튕기듯 일어났다가 별별 짓을 다 했다.

그러나 운은 길지 못했다. 넓적한 손 하나가 시윤의 안면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저렇게 큰 손으로 맞으면 얼굴이 물풍선처럼 터져 버릴 터였다. 아니, 고통 없이 갈 테니 차라리 다행인가. 버석하니 굳은 시윤이 힘껏 눈을 감았다.

그때, 무언가가 시윤의 허리를 날쌔게 잡아챘다. 몸이 파도에 휩쓸리듯 옆으로 꺾이더니 등 뒤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한 바람 냄새가 났다.

청호다.

시윤의 만면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멎었던 심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왜 나 안 불러? 살려 달라고 소리쳤어야지.”

청호가 낮은 음성으로 시윤을 꾸짖었다. 그러곤 발로 바닥을 쾅! 내리찍었다. 이글거리는 불기둥이 직선으로 솟구쳤다. 불에 휩쓸린 클롭스 몇몇이 그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개떼처럼 몰려들던 클롭스들은 단번에 뒤로 나동그라졌다.

“폭탄 켰어?”

청호가 시윤을 추슬러 안았다. 시윤이 멀쩡한 팔로 그의 목덜미를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분 남았습니다.”

“잘했어.”

시윤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 청호가 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차게 휘둘렀다. 커다란 불똥 수십 개가 대포처럼 클롭스들에게 쏟아졌다. 쿵, 쿵, 땅이 울리고 귀가 아플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시윤이 아무도 몰래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이럴 거면 폭탄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지…….

청호의 힘은 마주할 때마다 경이로웠다. 가끔은 너무 대단해서 황당하기까지 하다.

청호는 쉬지 않고 여러 개의 불을 폭우처럼 쏟아부었다. 여기저기 불이 붙으면서 매캐한 연기가 사위를 지배했다. 꼭 연막탄을 터트린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들리는 거라곤 불에 타면서 비명을 내지르는 클롭스의 우짖음과 혼란에 물들어 중구난방으로 뛰는 발소리들뿐이었다.

이만하면 빠져나가는 데 어려움은 없을 듯했다. 고개를 슬쩍 내려 시윤의 안위를 확인한 청호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폭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서 나가야 했다. 폭발에 휩쓸리면 저야 어떻게든 살겠지만 시윤은 그렇지 못할 터였다.

펜스를 훌쩍 뛰어넘은 청호가 막 관중석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두툼한 뿔을 가진 소 머리에 인간의 몸뚱이, 굽이 박힌 소의 뒷다리. 미노타우로스였다. 고위 클롭스이자 이곳의 우두머리. 보통 상대가 아니란 뜻이다.

청호가 시윤을 조금 더 세게 껴안았다. 시윤 역시 청호에게 더 바짝 붙었다.

“…….”

못 같은 것이 잔뜩 박힌 도끼를 든 미노타우로스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누런 눈깔로 청호를 응시했다. 찰나 몸을 떨기라도 하면 청호와 시윤을 단번에 두 동강 내 버릴 기세였다.

“몇 분 남았지.”

청호가 미노타우로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윤이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2분 57초 남았습니다.”

“하나 패고 가기엔 충분하네.”

청호가 시윤을 안지 않은 손을 바깥으로 뻗었다. 그러자 무기 더미에 쌓여 있던 무기 하나가 청호의 손으로 와 감겼다. 망치였다. 자동차 타이어만 한 크기의 망치.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청호의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미노타우로스는 다리를 노리는 게 좋습니다. 몸에 비해 다리가 짧고 가는 편이라 한쪽이라도 다치면 무게 중심을 쉽게 잃어요.”

청호는 곧장 시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망치를 곧추세우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두툼한 허벅지에 비해 작은 무릎을 공격했다. 그러나, 쩡! 미노타우로스가 도끼로 망치를 막는 바람에 공격은 실패했다.

하지만 청호는 곧장 다음 공격을 이어 갔다. 몸을 가볍게 뒤틀어 발로 미노타우로스의 툭 튀어나온 턱을 갈겼다. 제대로 얻어맞은 미노타우로스의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갔다. 주춤, 뒷걸음질을 친 그것이 씩씩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청호에게 달려들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거대한 덩치임에도 제법 빠르게 움직였다. 청호를 향해 쾅쾅, 쾅쾅쾅 마구 도끼를 내리찍었는데 그 자리마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땅이 움푹움푹 파였다.

청호는 몇 번 날쌔게 피해 다니다가 미노타우로스가 최후의 일격이라도 하듯 도끼를 두 손으로 잡고 내렸을 때, 허리를 크게 꺾으며 반동을 이용해 망치로 도끼를 올려 쳐 버렸다.

철과 철이 부딪치며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도끼가 와사삭 과자처럼 부서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자루만 남은 도끼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것이 양팔을 벌리고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아예 손으로 잡아 뭉개 버리려는 것 같았다.

“대장님, 폭발까지 1분 10초 남았습니다.”

시윤이 재차 남은 시간을 알렸다. 청호가 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만 놀이를 끝내야 했다. 시윤을 고쳐 안은 그가 관중석 계단을 훌쩍훌쩍 서너 개씩 뛰어올랐다. 미노타우로스가 쿵, 쿵, 쿵 땅을 짓밟으며 따라왔다.

청호는 그대로 입구를 통과해 복도로 들어섰다. 시윤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그가 미노타우로스를 어떻게 처리하려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순간, 청호가 복도에 줄지어 서 있던 철제 쓰레기통 하나를 염력으로 끌어왔다.

이렇게 인파가 많이 몰리는 곳의 쓰레기통은 여타 쓰레기통 크기의 수십 배다. 시윤과 비슷한 체격의 인간 둘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였다. 청호는 그것을 던져 미노타우로스의 머리에 씌웠다.

미노타우로스가 팔을 휘저으며 그것을 벗으려 했다. 그러나 청호가 조금 더 빨랐다. 몸을 날린 그가 쓰레기통 바닥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대로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녹아내린 쓰레기통이 미노타우로스의 얼굴에 철썩 달라붙었다. 아마 털부터 가죽까지 녹아 내린 철이 엉겨 붙었으리라. 어쩌면 눈과 콧구멍에도 화염 같은 철이 파고들었을지도 몰랐다. 꼭 철로 만든 가면을 쓴 꼴이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쿵쾅쿵쾅 발을 굴렀다. 청호는 그것을 가볍게 뒤로 밀어 버렸다. 커다란 몸집이 기우뚱, 기울더니 관중석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청호는 그것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시윤을 감싸 안고 유리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와장창,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몸이 중력을 받아 쑥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시윤이 힘껏 청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청호는 안정감 있게 두 발로 착지했다. 제법 높은 높이였는데 전혀 타격이 없어 보였다. 시윤의 머리칼에 묻은 유리 조각을 툭툭 털어 낸 그가 빠른 속도로 경기장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수 초가 지났을 때.

쿠구구궁. 경기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파리하게 질린 시윤이 새액, 새액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것도 버거워서 자꾸 눈이 감겼다.

경기장이 내려앉은 후, 에로아스 부대는 시멘트 더미에서 기어 나오는 클롭스들을 하나하나 사살했다. 그 후로도 탐색기를 켜고 생체 반응이 남아 있진 않은지 조사해야 했다.

급박한 상황이었다. 클롭스가 어디에 얼마나 더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밑으로 떨어진 터라 나갈 방도를 찾는 데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동안 시윤은 팔뚝을 감싸 쥔 채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대체 얼마나 깊이 베였는지, 압박하고 있음에도 피가 줄줄줄 흘렀다. 그런데도 아프다, 치료해 달라 말할 수가 없었다. 클롭스에게 당한 것도 아니고 제 실수로 다친 거라서. 또 다른 이들이라면 알아서 피가 멎었을 텐데 저만 이 모양인 게 화가 나서.

청호도 정신이 없었다. 시윤이 다친 걸 알고 붕대로 팔을 감싸 주긴 했으나, 치료까지 해 줄 시간이 부족했다. 청호가 일개 병사였다면 다 때려치우고 시윤의 옆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장으로서 수십 병사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고, 통솔하고 이끌어야 했다. 시윤의 곁에서 발이나 동동 구르고 있을 수가 없었단 말이다.

시윤은 괜찮았다. 그런 것에 섭섭함을 느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의료 지식도 있었고, 그 지식으로 말미암기로서니 이건 목숨이 위험한 수준의 상처도 아니었다.

근데 이상하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이만하면 멈출 만도 한데. 왜. 어째서. 시윤은 한참 있다가 모든 게 마무리되고 에로아스를 실어 가기 위한 군용기가 도착했을 때야 자신이 독에 감염되었다는 걸 알았다.

무기에 독을 발라 놓은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작은 상처였다면 주위 피부의 반응이나 무뎌지는 감각 등을 살피며 독에 감염된 것을 알았을 텐데. 옷을 떼어 내기 힘들 정도로 피가 잔뜩 난 데다가 이렇게 큰 상처는 태어나 처음이라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독에 감염된 걸 알았을 땐 손가락 끝이 이미 보랏빛으로 물든 상태였다. 목에도 푸른 두드러기가 돋아났다. 하물며 그건 청호가 발견했다.

“의무병! 의무병!”

군용기 바닥에 시윤을 바로 눕힌 청호가 다급하게 의사를 찾았다. 팔뚝에 붉은 십자가 완장을 찬 병사가 구급상자를 들고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리고 가위로 시윤의 군복을 조심히 잘라 냈다. 곧 피를 콸콸 쏟아 내고 있는 상처가 드러났다. 세모꼴로 뜯어진 살결이 쩍 벌어져 있었다.

의무병이 시윤의 팔뚝에 급하게 주사를 꽂았다. 클롭스가 쓰는 독의 해독제였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이쯤이야 항상 구비하고 다녔다.

문제는, 시윤의 자가 치유력이 제로라는 것이다. 에로아스 부대에는 퓨어가 없다. 그래서 능력자를 위한 약물만 잔뜩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그러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약물로는 시윤을 치료할 수 없단 말이다. 훨씬 강하고 빠른 해독제가 필요했다.

의무병의 얼굴에 난처함이 차올랐다.

청호가 자신의 군복을 둘둘 말아 시윤의 머리 뒤를 받쳤다. 코트로는 덜덜 떨리고 있는 몸을 덮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의무병을 노려봤다.

“그게 다야? 주사면 돼?”

상처가 이렇게 큰데? 피를 줄줄 흘리는데? 조막만 한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한데? 그러잖아도 하얀 얼굴이 이젠 아예 백지장인데? 여전히 아파 보이는데? 그게 다라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청호가 눈으로 의무병을 비틀어 죽일 듯 노려봤다. 의무병이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고꾸라트렸다. 중죄라도 저지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저…… 그게…….”

“뭐. 빨리 말해.”

“구비한 약품들이 모두 에로아스 부대에 맞춰진 것들이라…… 채 준위님께는 너무 강하거나 너무 약한 것들뿐입니다.”

“그래서?”

“독이 퍼지는 걸 완전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의무병이 차라리 죽여 달라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청호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어리석게 그것을 표출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시윤의 핏줄을 타고 푸르딩딩한 독이 퍼져 나가고 있을 것인데. 작고 마른 몸이라 사지 끝까지 퍼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청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슬쩍 핥았다.

“내가 독을 빨아 내면…….”

“안 됩니다. 그건 뱀 따위에게나 물렸을 때 가능한 겁니다. 점처럼 작은 상처 말입니다. 이 정도 상처에서 독을 전부 빨아 낼 순 없습니다. 그 전에 죽을 겁니다.”

“……닥쳐.”

그 말에 청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죽는다니. 누가 죽는단 말인가. 망발을 지껄인 의무병의 목젖을 당장이라도 뜯어 버리고 싶었다.

“…….”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인지한 의무병이 입을 딱 다물었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상황을 관망하던 병사들 역시 몸을 굳혔다. 청호에게 가이드가 어떠한 존재인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에스퍼에게 가이드란 목숨 그 자체이지만, 청호에겐 그보다 더 특별하고 애틋한 존재였다.

의무병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윤의 팔뚝을 압박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질질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복귀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아마도요…….”

“…….”

청호가 주먹을 꽈아악 말아 쥐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이토록 무성의하고 비전문적인 진료라니. 어떻게 에로아스 부대에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참다못한 청호가 고함을 치려는데 작은 손이 청호의 손등을 더듬더듬 쥐어 왔다.

“저 괜찮, 괜찮습니다.”

“…….”

“아직 숨도 쉴 수 있고, 입도 움직이는 걸 봐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운 좋게 독이 거의 묻지 않은 부분에 베였나 봅니다.”

시윤이 빙긋 웃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로 웃으니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더 안쓰럽기만 했다. 청호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시윤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축 늘어져 있었다.

한참 시윤을 쓰다듬고 손발을 주무르던 청호가 폴에게 명령했다.

“모건한테 연락해서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놓으라고 해.”

“예.”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지?”

“38분 31초입니다.”

도무지 줄지 않는 시간에 청호가 꾸욱 눈을 내리감았다. 일그러진 만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걸 보고 있는 시윤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죽어 버리기 직전이었다. 팔이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니고 그냥 살이 좀 터졌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이들의 시선과 청호의 걱정을 받고 있으려니 정말 말도 못 하게 수치스러웠다.

시윤이 청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감싸 쥐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뭘 해 줄까?”

뭘 해야 네가 아프지 않지? 뭘 해야 네가 죽지 않아? 응? 청호가 시윤의 손등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시윤이 음……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씨익 웃으며 멀쩡한 팔을 벌렸다.

“안아 주세요. 추워요.”

“…….”

청호의 눈썹이 모나게 일그러졌다. 시윤은 그것을 부정으로 이해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데 괜히 장난쳤나, 싶어 손을 거두려는데, 청호가 코트째로 시윤을 껴안았다. 커다란 품이 시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잠깐 놀랐던 시윤이 사르르 눈을 휘며 웃었다. 청호의 품은 항상 넓고 따뜻하다. 지금은 뜨거울 정도로 체온이 높다. 독 때문에 시체처럼 차게 식었던 몸뚱이가 그 뜨거움에 물드는 게 시시각각 느껴졌다.

시윤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청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청호도 지지 않고 시윤의 머리칼에 뺨을 비볐다. 이 와중에도 시윤에게서 전해지는 평온이 너무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시윤을 안은 손에 저절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청호는 무서웠다. 엄마를 잃었던 것처럼 시윤도 잃을까 봐. 개 같은 가이아가 시윤마저 앗아갈까 봐.

더는 잃을 수 없었다. 더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시윤만은 오롯이 제 것이어야 했다.

케케묵은 진실을 모르는 척할 테니, 등신처럼 들은 게 없는 척, 본 게 없는 척 살 테니, 시윤만은 제 품에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도 제가 어떻게 미쳐 버릴지 가늠이 안 됐다.

시윤을 안은 청호는 군용기가 바닥에 착륙하자마자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에로아스 해산 명령이고 상부 보고고 하등 중요치 않았다. 초가 멀다고 차가워지는 시윤이 먼저였다.

모건이 환자 베드와 약품을 가지고 격납고에 대기하고 있었다. 청호가 그곳에 시윤을 눕히려는데, 시윤이 간절히 부탁했다. 제발 여기에 자신을 눕히지 말아 달라고.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진 않다고.

그도 그럴 것이, 에로아스의 복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격납고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기서 시윤을 베드에 펼쳐 놓고 치료하면 모두가 알 터였다. 청호 대장의 가이드가 다쳤다는 걸.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소문이냐, 전장에 나가면 다치는 게 당연하지, 할 수도 있지만 청호도 그렇고 시윤도 그렇고 쓸데없이 나도는 말들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이미 충분히 말이 많은데 구태여 씹을 거리를 던져 줄 필요는 없단 말이다.

그런 시윤을 잘 알고 있는 모건은 시윤의 팔뚝에 주사를 연달아 두 개 놓는 것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그리고 청호에게 얼른 연구실로 가자고 눈짓했다.

시윤을 자신의 코트로 꼼꼼히 여민 청호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모건의 연구실로 향했다.

모건의 연구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시윤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건이 놓은 주사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시윤의 몸을 시윤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모건이 오로지 그를 위해 만든 해독제이니 잘 드는 게 당연했다. 그 덕에 청호의 안색도 덩달아 느슨해졌다.

모건이 청호의 코트 틈에서 시윤의 팔을 빼 상처를 확인했다. 이미 사진과 동영상으로 상태를 전달받았지만, 육안으로 보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모건이 이리저리 상처를 살피다 말고 문득 으음, 목울대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 채 준위.”

“예, 대령님.”

시윤이 얼른 대답했다. 모건이 진료한 제 상태가 몹시 궁금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 며칠 입원하면 금방 나을 것이다. 팔을 잘라 낼 필요는 없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못 고치는 병은 세상에 없다. 그런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근데 모건은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시윤의 상처를 살피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있잖아.”

“예.”

“너 출정한 날. 채 원수님이 날 찾아오셨어.”

그 말에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시윤의 표정도, 청호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물론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시윤이 상체를 들썩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요? 왜요?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요?”

“…….”

모건은 쉽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먼저 말문을 튼 것이 그임에도 그랬다. 정적을 견디지 못한 엘리베이터가 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결국 말을 삼킨 모건이 먼저 내렸다. 시윤을 안은 청호가 따라 내렸다. 그리고,

“시윤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해야 했다. 시윤의 아버지인 정원이었다. 집에서 곧장 나온 듯 홈 웨어에 두툼한 니트를 걸친 그가 보필 병사들과 함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시윤에게 뛰어왔다. 뒤통수라도 맞은 듯 넋을 뺀 시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왜…….”

“미안. 너한테 일 생기면 곧장 보고하라고 하셔서. 알지? 명령 불복종이면 영창 가는 거?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별 다섯 개짜리 명령 불복종이면 바로…….”

모건이 빠르게 속삭이며 손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 제스처를 했다. 시윤이 원망의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라고 못된 말이라도 한 문장 쏴 주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정원이 시윤의 몸을 덮고 있던 청호의 코트를 아무렇게나 벗겨 바닥에 던져 버렸다.

“다쳤다니. 응? 다쳤다니! 어디가 어떻게…….”

시윤의 몸을 살피던 정원이 말을 잃었다. 넝마가 된 팔을 발견한 것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막내아들의 팔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걸 보고 있으니 눈앞이 다 아찔해졌다. 정원은 평생 아파 본 적이라고는 없는 S급 에스퍼인데 빈혈이라도 온 듯 현기증이 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정원이 차마 시윤의 팔을 만지지 못하고 허공만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윤이 무어라 변명하나, 고민하는데 모건이 냉큼 답을 대령했다.

“독 발린 클롭스 무기에 찍혔답니다. 방금 해독제 투약했고, 사나흘이면 회복할 겁니다. 귀한 아드님 몸에 흉 질 걱정일랑 마십시오. 흔-적도 남지 않게 제가 신경 쓰고 또 쓰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시윤은 모건이 저렇게 넙죽 엎드린 저자세를 취하는 걸 처음 봤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청호도 함부로 대하면서 아버지한테는 왜. 절레절레 턱을 내저은 그가 정원에게 별로 아프지 않다, 걱정하지 마시라 말하려 입을 뗐을 때였다.

“가이드 관둬라.”

정원이 낮은 음성으로 으르대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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