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無知)
“……네?”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뭘 관둬? 가이드를 관둬? 그것은 관두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테면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인간이지 말라는 소리와 같았다. 적어도 시윤의 관념에선 그랬다.
“관둬. 가이딩하면 아프다면서.”
정원이 다시 한번 말했다.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시윤이 도끼눈으로 모건을 노려봤다. 가이딩하면 아프다는 사실을 제발 함구해 달라 그리 부탁했거늘.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정원에게 흘리다니. 미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밋밋한 벽을 명화라도 보듯 하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시윤이 천천히 사실을 되짚어갔다.
“아니에요. 그건 제가 부족해서…….”
“너는 청호 반려가 아닌 게야. 그냥 다 오류였던 거다. 그래, 오류야.”
“…….”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거 아닌데. 저는 청호 반려가 맞는데. 가이아가 짝지어 준 반려가 맞는데. 오류라니. 돌연변이인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오류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시윤의 눈가가 억울함에 붉게 달아올랐을 때였다.
“씨발, 진짜 못 들어 주겠네.”
음식물 쓰레기라도 씹은 듯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청호가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잖아도 어둑했던 복도가 차게 가라앉았다.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청호라지만, 방금의 언행은 영창감이었다.
헌데 어째서인지 정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 상사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냐며 대로하지도 않았고, 당장에 청호를 끌어내라며 병사들에게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늘한 눈으로 청호를 노려보기만 했다.
“어쩌다 다친 게냐.”
정원이 청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시윤에게 물었다.
“작전 중에 제 실수로…….”
“실수 맞냐? 청호가 널 떠민 건 아니고?”
“……아버지.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듣다 못한 시윤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청호의 품에서 내려오기 위해서였다. 정원과 제대로 대화를 나눠야 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째서 청호가 저를 위험으로 내몰 거라 여기는지 명명백백히 알고 싶었다.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리는 팔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대장님, 잠시만 저 좀, 시윤이 청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청호는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듣지 못한 척을 하는 건지 시윤을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한 시윤이 버둥거리는 사이, 정원은 청호를 모함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잘 생각해 봐라. 다 청호 탓 아니냐? 응? 애당초 네가 거기까지 갈 일이 무어가 있어. 혹시 네 팔도 저놈이 그런 거냐?”
“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이놈이 그런 거지? 이 근본 없는 살인귀 새끼가 그런 거지?”
“…….”
시윤이 턱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정원이 술에 취했나. 아니면 마약이라도 했나. 항상 품위 있고 인자하던 제 아버지는 어디로 사라졌나. 혹 영악한 클롭스가 정원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포스 안으로 들어온 게 아닌가. 별 등신 같은 의심이 다 들었다.
시윤이 꾸욱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간신히 멎어 가던 피가 다시 터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눈앞에 있는 이가 아버지든, 아니든 상관없다. 매일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청호를 폄하하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시윤의 갈색 눈동자가 뾰족하게 벼려졌다.
“더는 안 돼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셔요. 제가 아버지에게 실망하게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나불거리던 정원의 입이 딱 다물렸다. 그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치는 듯했다.
실망이라니. 시윤이 제게 실망하다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는 그저 막내아들을 걱정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일 뿐인데. 자식의 팔이 넝마가 되어서 왔는데, 이 정도 걱정도 않는 아비가 어찌 아비일 수 있겠나.
당혹은 점차 분노로 탈바꿈했다. 제게 실망을 운운하는 시윤이라니. 그 순하던 애가 저렇게 야차 같은 눈으로 저를 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청호와 함께해서 그런 것이다. 저 근본 없는 놈이 제 순진한 아들을 물들여 놓은 것이다. 시윤을 앗아 가려고. 그것으로 치졸한 복수를 하려고.
지금도 보라. 청호가 악귀처럼 비릿하게 웃으며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시윤을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지 않은가. 고작 닿는 거로도 아프다는 애를 걸레 쥐어짜듯 저렇게, 저렇게…….
정원이 어금니를 아득 짓씹었다. 그러고는 냅다 청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보는 눈이 많든, 원수로서 지켜야 할 품격이 있든, 청호가 SS급이든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시시각각 지옥 불에 빠져들고 있는 시윤밖에 보이질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저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구해야 했다.
정원의 주먹이 청호에게 닿기 직전, 그들이 서 있는 땅 위로 보랏빛 원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청호의 단단한 몸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꼭 고장 난 모니터가 그를 비춘 것처럼 픽셀이 묘하게 어긋났다.
영 께름칙한 기분에 청호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어째서인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 덕에 피할 겨를도 없이 정원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 내야 했다.
퍼억. 둔탁한 소음과 함께 청호가 뒤로 세 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안고 있던 시윤을 놓지 않았으나, 시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시윤을 잡고 내주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청호 혼자 뒤로 밀려나야 했다. 정원이 공중에 둥둥 뜬 시윤을 받아 안았다. 그와 동시에 보라색 원이 사라졌다.
“아버지!”
기겁한 시윤이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5분도 안 된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정신이 다 혼미했다.
시윤이 얼른 청호를 살폈다. 퉤, 피 섞인 침을 내뱉고 있는 청호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듯했다.
정원의 어빌리티는 ‘재창조’다. 포스에서 유일무이한 능력이었다. 일정한 크기의 원을 그리면, 그 원 안에서 정원은 일종의 신이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중력을 반대로 흐르게 한다든지, 수심이 수백 미터에 다다르는 바다 한가운데를 떼어 온다든지, 반대로 황무지를 만든다든지, 클롭스를 아기처럼 작고 부드럽게 만들 수도 있었고, 나뭇가지로 로봇을 만들 수도 있었다.
시윤이 어릴 땐 네모난 복숭아가 열리는 복숭아나무를 보여 준다거나, 솜덩이에 불과한 곰 인형을 살아 움직이는 친구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청호도 그의 원 안에 들어가면 무엇이 될지 모른다는 거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대도 정원의 원 안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비록 정원이 만들 수 있는 원의 최대 크기는 지름 20미터 정도에 불과했지만, 청호쯤이야 얼마든지 품을 수 있었다. 결국엔 인간의 몸집인 청호인지라.
정원이 서늘한 눈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이제 청호의 품에 시윤이 없으니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버려도 괜찮다. 무엇으로 만들어 줄까. 보잘것없는 잡초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밟고 또 밟아 줄까. 아니면 물고기로 만들어 방정맞게 펄떡거리다 죽게 해 줄까.
청호의 발아래에 다시 보라색 원이 생겨났다. 그것을 본 시윤이 발작이라도 온 듯 온몸을 뒤틀었다.
“아버지. 이거 놓으세요. 아버지!”
하지만 정원은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작은 원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 시윤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시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분명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방음벽에 갇힌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또, 원을 따라 유리 벽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곳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시윤만 독방 같은 방공호에 들어가 있는 모양새였다.
“……재밌네.”
청호가 은은하게 빛나는 원을 내려다보며 씨익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터진 입가가 쓰라렸으나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치고, 피를 흘리고, 아픈 건 일평생을 함께해 온 것들이라 친근하기까지 했다.
허나 제 품에 있던 시윤을 빼앗긴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청호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의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억세게 말아 쥔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곧 붉은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청호가 싸우려 한다. 진심으로 싸우려 한다.
수많은 걱정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SS급과 S급의 싸움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적어도 이 건물 전체가 날아갈 텐데. 어쩔 줄 모르고 주위를 서성이는 병사들과 모건은 어쩌나. 뒷수습은 어찌하나. 정원보다 낮은 계급인 청호가 모든 걸 뒤집어쓸 게 자명한데.
그리고 아버지나 청호 중 한 명이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다치든 그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제가 죽지. 시윤이 생각하기로서니, 이 모든 상황 중 저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게 없었다.
제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멍청하게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이란 말이다.
그 모든 게 시윤을 못 견디게 했다.
하지만 그런 시윤의 속을 추호도 모를 두 사람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청호의 발아래에 있는 원이 보랏빛이다 못해 시뻘겋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청호도 지지 않고 불을 키웠다. 화염이 붉은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적으로 이글거렸다.
“하지 마…… 하지 마…….”
시윤이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말을 읊조렸다.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귓구멍이 탁하게 울렸다. 심장 박동은 갈수록 느려지는데, 과호흡이라도 온 것처럼 숨은 자꾸만 가빠졌다. 눈알이 따갑고 손발이 저렸다.
그러나 시윤의 바람과 달리 정원의 동공이 확 오므라들었다. 청호 역시 날쌔게 몸을 날렸다.
질끈 눈을 감은 시윤이 악을 내질렀다.
“……하지 말라고!”
그 순간,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엄청난 파열음이었다. 그리고 시윤의 고함이 드디어 바깥으로 터져 나갔다. 모든 이의 시선이 휩쓸리듯 시윤으로 향했다.
“너 어떻게…….”
정원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시윤을 바라봤다. 그의 발아래에 있던 보라색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자신이 청호를 신경 쓰느라 시윤에게 씌워 둔 원을 풀어 버렸나? 아닌데. 그런 실수를 할 리 없는데. 전투에 한두 번 나간 것도 아니고 많을 땐 수십 개의 원을 동시에 만들기도 하거늘 고작 두 개로…….
아니면 설마 청호인가. 제 관심을 다른 곳에 두기 위해 일부러 시윤을……. 정원이 얼른 청호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청호가 퍼붓는 불덩이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정원이 다급하게 원을 만들 때였다. 작은 몸이 정원의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시윤이었다. 두 팔을 한껏 펼친 그가 애절한 눈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무섭게 돌진하는 불덩이가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시윤아!”
기겁한 정원이 시윤의 팔을 잡고 당겼다. 이글거리던 불이 단숨에 사라졌다. 느껴지는 거라곤 공기 중에 흩어지는 후끈한 열기뿐이었다.
시윤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행동이었음을 안다. 까딱하다간 홀라당 타 버렸을지도 몰랐다. 허나 정원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청호가 제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세요, 아버지. 대장님은 절 절대로 다치게 하지 않아요.”
시윤이 자신의 팔꿈치를 쥔 정원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조곤조곤 사실을 짚어 나갔다.
“오늘 다친 건 제 실수로 다친 거예요. 오히려 큰일 날 뻔한 걸 대장님이 구해 주셨다고요. 대장님 아니었으면 살아 있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울었잖니, 너. 양 손목에 멍을 달고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었잖니. 저놈이 그렇게 만들었잖니. 정원은 차마 뒷말을 내뱉지 못했다. 시윤이 그조차 청호의 편을 들며 변명을 내놓을 것 같아서. 그걸 듣고 있으면 속이 문드러져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시윤이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정원의 손을 꼬옥 맞잡았다.
“아버지. 일단 집에 가요.”
“놔라.”
“……저 아파요.”
“…….”
“쉬고 싶어요. 잠도 못 잤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어요.”
시윤이 한껏 불쌍한 척을 해 보였다. 영악한 변명이긴 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정말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땅과 천장이 규칙 없이 만났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당장 치료가 시급했지만, 일단 여기서, 그러니까 청호와 정원을 떨어트려 놓는 게 우선이었다.
“……팔이, 팔이 아픈 게냐? 밥은 먹었고?”
정원이 눈썹을 한껏 어그러트렸다. 시윤의 변명이 통한 모양이었다. 흐릿하게 미소 지은 시윤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집에 가요. 어머니가 해 주신 밥 먹고 싶어요.”라며 정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정원은 순순히 발을 뗐다.
“누구 마음대로?”
그러나 커다란 그림자가 두 사람을 막아섰다. 짙은 눈썹으로 가파른 오르막길을 그린 청호였다. 시윤이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으나 청호는 물러섬을 몰랐다.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안광을 번뜩이며 정원을 노려봤다.
시윤의 입장에선 아주 답답한 상황이었다. 정원도, 청호도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곁에서 봐 온 바로는 두 사람 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이들인데. 자신들의 힘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남발할 사람들이 아닌데. 더군다나 이렇게 시답잖은 이유로.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는 서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관자놀이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속이 메슥거리고, 목구멍이 텁텁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대장님이 좀…… 이해해 주세요.”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청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고개를 든 시윤이 간절한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창백하게 질린 낯에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했다.
“제가, 제가 이렇게 다친 게 처음이라서 놀라신 거예요. 원래 이런 분이 아닌데…… 너무 놀라서…….”
“…….”
“아버지잖아요. 아들이 다쳤다는데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제가 평생 다쳤던 적이 없었거든요.”
“…….”
“그러니까 딱 한 번만 이해해 주세요. 제가 나중에 다 설명할게요. 네?”
청호가 숨을 멈췄다. 시윤이 뱉어 내는 음절들이 화살이 되어 전신을 쿡쿡 관통했다. 사실 그가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근데 청호의 귀엔 이렇게 들렸다.
‘넌 모르잖아. 부모가 없어서 모르잖아. 이런 걱정도, 사랑도 받아 본 적 없잖아. 그러니까 추잡하게 오해하지 말고 비켜.’
비약인데, 실로 그리 들렸다.
시윤은 버석하니 굳은 청호를 내버려 두고 정원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모건을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괜찮냐? 미안하다. 어떻게 알고 오신 건지, 채 준위가 대체 왜 아픈 거냐고 노발대발하셔서…….”
뒤늦게 다가온 모건이 걱정스레 물었다. 청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윤이 사라진 엘리베이터만, 정확히는 닫힌 문 위로 탁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만 바라봤다.
“시윤이 집으로 가 봐. 거기에 청호 네가 찾는 게 있을 거야.”
머지않은 과거, 훈련실에 나타난 휴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청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참담함을 느꼈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휴가 저를 농락하는 것이겠거니. 실로 시윤의 집에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가족이 연관되어 있진 않으리.
근데 만약 연관되어 있으면 누구일까. 시윤은 아닐 것이다. 당시엔 매우 어렸을 테니까. 형들도 아닐 것이다. 청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그들이 그런 걸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부모 중 하나인데. 장의식에서 그리 온화하게 웃던 어미일까. 아니면 식 내내 저를 쳐다보던 아비일까.
“……이걸 나한테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일 뿐이야.”
“개소리.”
“한번 믿어 보렴. 그걸 보고 판단하는 건 네 몫이고, 그 이후로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 것도 네 몫이잖아. 내가 뭘 할 수 있겠니?”
휴가 보기 좋게 웃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호는 그 길로 훈련실에서 나왔다. 창밖으로 밤을 준비하며 소등하는 부대가 보였다. 세상이 시시각각 고요해졌다.
끝내 가로등만 남기고 모든 불이 꺼졌을 때, 머리칼이 촉촉하게 젖은 시윤이 샤워실에서 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볼이 평소보다 더 윤이 났다.
“대장님!”
저를 부르는 소리는 항상 활기찼다. 그 활기가 그날따라 거슬렸다.
“네 집에 밥 먹으러 가도 돼?”
“예? 어디요?”
“너희 집에 말이야. 그때, 장의식 있던 날. 어머니가 먹으러 오랬잖아.”
시윤이 당황한 게 보였으나 청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도 우물쭈물하는 시윤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질 찰나,
“아…… 근데 내일은 아버지가 집에 안 계셔요. 친우분들이랑 포스 동쪽으로 골프 치러 가셨거든요. 한 번 가시면 사흘은 안 오셔서…….”
그 말에 하마터면 박장대소할 뻔했다. 골프를 치러 갔다라. 우습기 그지없었다. 아주 즐거운 삶을 만끽하고 있구나, 싶었다. 배알이 비비 꼬였다. 신물이 올라올 정도였다.
막무가내로 식사 약속을 잡은 청호가 뒤를 돌았다. 흠칫했던 시윤이 곧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따라왔다. 그러더니 통통한 입술을 종알종알 움직였다.
“근데요, 대장님. 오늘 저녁은 파스타 어떠세요? 저 샤워하는데 갑자기 파스타가 너무 먹고 싶…….”
“어쩌지. 나는 저녁 생각이 없는데.”
“아……. 네…….”
풀 죽은 시윤을 알았지만 청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휴가 파 놓은 구렁텅이에 몸을 던졌음을.
시윤의 본가는 화려했다. 돈이 넘쳐 화려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랑과 행복으로 화려했다. 벽마다 걸린 가족사진들이, 그 속에 웃고 있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청호를 조롱했다. 네가 불구덩이에 살 동안 우리는 네 어미의 피를 발판 삼아 이 화목한 집에서, 화목한 가족들과, 화목하게 살아왔노라 놀리는 것 같았다.
저녁은 코로 넘어가는지 목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게 먹었다. 그리고 후식을 거절한 청호는 시윤을 구슬려 2층으로 올라왔다.
시윤의 방은 저택의 그 어느 곳보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치졸한 질투가 들끓었다. 하지만 청호는 그것을 표출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시윤의 방 곳곳에 묻어 있는 사랑의 흔적을 애써 무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원의 서재에서 휴가 말한 ‘힌트’를 찾아냈다.
청호는 자신의 대장실과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출정과 복귀, 출정과 복귀, 그리고 다시 출정과 복귀만 반복하는 삶에 대장실은 딱히 필요가 없었다. 그냥 국가에서 주기에 가지고만 있었을 뿐, 웬만한 보고는 다 숙소에서 폴을 통해 들었다.
근데 손안에 넣은 칩은 숙소에서 들을 수가 없었다. 시윤이 있으니까.
청호는 칩을 복사한 홀로그램 바를 반나절 동안 손안에서 굴리기만 했다. 차마 볼 엄두가 안 났다. 진짜 시윤의 가족이 관련되어 있으면 어쩌나, 제가 시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근데 또 수십 년을 기다려 온 것이라 당장 보고 싶기도 했다.
한참 고민하던 청호는 끝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시윤의 가족이 관련되지 않았을 거란 가설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동영상 속의 정원은 그저 방관자이고, 주도자는 따로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야 했다.
동영상은 여타 동영상처럼 주인공이 똑같았다. 정원을 포함한 포스의 개국 공신들.
월별로, 일별로 분류된 수많은 동영상에는 청호가 찾던 대화도 있었고, 시답잖은 대화도 있었다. 1년 동안 어찌나 자주 만났는지 하나하나 살피는 데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중 청호가 관련된 대화만 고르면 얼마 되지 않았다.
열한 살짜리 청호를 발견한 것부터 그가 포스에 와서 처음으로 출정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비극을 창조할 때까지를 추리면 총 세 시간 정도가 됐다.
우습지 않은가. 고작 세 시간이다. 고작 세 시간, 그들이 말을 주고받은 것으로 청호의 인생이 박살 난 거다.
첫 회의에는 청호의 발견을 기뻐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능력자를 물색하는 레이더에 아주 큰 파장이 잡혔다고, 당장 포스로 데려와야 한다며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어려운 시기인데 참 잘됐다고, 역시 가이아가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 회의는 조금 침울했다. 청호의 나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매우 어렸기 때문이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도어 검사 나이보다 어린데 그 정도 힘을 가졌으니 좋은 일이라며 화색을 표하는 쪽과 당장에 전장에 내보낼 수가 없는데 능력이 좋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쪽이었다.
결론은 그럼 ‘일단 어린 대로 내보내 보자’였다. 겁에 질리고 구석으로 내몰리다 보면 각성해서 능력을 펼칠 수도 있는 거니까. 당근보다는 채찍이 교육에 좋다는 말도 했다. 그 결론으로 열두 살의 청호는 첫 출정을 나가게 된 것이다.
세 번째 회의는 분위기가 더욱 좋지 않았다. 많은 기대를 건 청호가 영 힘을 못 썼기 때문이다. 전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클롭스만 보면 꽁무니를 뺀다,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겁이 많다, 상사를 존중할 줄 모른다.
올라오는 보고마다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개국 공신들의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더 클 때까지 기다리자. 훈련을 시키자. 아니, 이미 늦었다. 전장에서 굴리자. 견해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테이블 가운데로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폭주한 청호가 부대 하나를 몰살했다는 보고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의견이 단숨에 하나로 모였다. 청호를 사지로 내몰자는 거였다.
다음 회의는 퍽 분위기가 좋았다. 청호가 전장에 나가길 거부하며 격납고를 통째로 부쉈다는 보고에는 손뼉까지 짝짝 쳤다. 좋은 소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참 악을 쓰던 청호가 어미의 말 몇 마디에 곧장 전장에 나갔다는 거였다.
―이거 잘 이용하면 청호를 보다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겠는데요?
배가 풍선처럼 부푼 남자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동의합니다.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이왕 이리된 거 빨리 처리하죠. 청호가 복귀하기 전에요.
―뭐…… 다들 생각하고 있겠지만, 어미가 클롭스에게 당한 쪽으로 시나리오를 짜는 게 좋겠죠?
―두려움이 증오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그럼 어미는 어디에 가둬 둘까요?
―……가두다뇨?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정원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러자 의견을 냈던 남자가 설명을 더했다.
―마치 클롭스가 잡아먹은 것처럼 겁을 준 다음에 전장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 다시 만나게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정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어미가 클롭스에게 당해서 다리까지 절단했다는데, 그래도 클롭스를 증오하기보다는 무서워만 하지 않았습니까? 더 큰 충격이 필요해요.
―일리가 있네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후로 정원은 징그럽고 끔찍한 말을 잘도 나불거렸다. 그가 개 같은 계획을 나불거리는 내내 청호는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헛구역질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그래도 그건 좀…… 아직 어린앤데…….
비쩍 마르고 까무잡잡한 남자가 넌지시 정원의 계략에 반대를 표했다. 그러자 정원이 눈을 부라리며 그를 꾸짖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습니까? 우리 좋자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포스 국민이 벌써 백만에 가까워지고 있어요. 우리는 그들을 구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채 원수 말에 동의합니다.
―따지고 보면 희생되는 건 청호의 어미 하나이지 않습니까? 하루에 전장에서 죽는 인원이 수천 명입니다. 청호의 어미 하나 죽여서 포스가 보다 안전해진다면 그리 나쁜 짓도 아닌 듯싶네요.
―뭐…… 다들 그리 생각하신다면, 저도 동의하지요.
―효심 지극한 아들. 어미의 복수를 위해 클롭스를 죽이는 영웅. 추후에 이야기 만들기도 좋지 않습니까?
―청호는 포스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아이가 우리를 지켜 줄 거예요. 길이 되고, 방향을 제시해 주겠죠. 국민은 믿고 따를 자가 필요합니다. 가이아라는 무형의 신으로는 부족해요.
―지극히 맞는 말입니다. 모두가 지쳤어요. 영웅이 등장할 때입니다.
주인공 없는 회의가 끝을 향해 달려갔다. 분위기가 느슨히 풀려 갔다. 대개 이쯤 동영상이 끝났다. 모두가 퇴장하고 홀로 남은 정원이 촬영 중인 카메라를 끄면서 말이다.
그때, 똑똑 짧은 노크가 울렸다. 이따금 울리던 그 어느 노크보다 작은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문밖에 있던 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버지.
청호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동영상을 가까이 끌어왔다. 새로운 등장인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작은 꼬마였다. 하얀 볼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온 게 퍽 귀여운 모습이었다.
누가 왔는지 확인한 정원이 대번에 만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시윤아.
그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청호가 호흡을 멈췄다. 시윤이라고? 저 아이가? 하필 이 타이밍에 등장한 아이가 시윤이라고?
―큰형아가 이거 줬어요.
시윤이 품 안 가득 들고 있던 것을 정원에게 자랑하듯 들이밀었다. 조잡한 장난감 총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꼬옥 쥐고 있는 게 총이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친우들과 대화하는 자리까지 와서 자랑한 거겠지.
―그랬니? 이리 와.
정원이 시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한쪽 옆구리에 총을 낀 시윤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정원을 향해 달려갔다. 정원이 지척까지 다가온 시윤의 겨드랑이를 잡아 안았다. 그러고는 예뻐 죽겠다는 듯 통통한 볼에다 뽀뽀를 퍼부었다.
시윤은 그런 정원이 익숙한지 총을 만지작거리느라 여념 없었다. 아이 주제에 풍성한 속눈썹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막내가 올해 몇 살이지요?
풍채 좋은 남자가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시윤이는 여덟 살이에요!
정원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시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피비린내 가득하던 서재가 단숨에 화창한 봄이 됐다.
―시윤이는 시훈이랑 시준이에 비해 자라는 게 조금 늦는 것 같네요? 여덟 살이 아니라 여섯 살 같습니다.
―뭐, 한창 예쁠 때 모습을 오래 볼 수 있으니 좋은 거지요. 내 아들은 이제 열여섯인데 벌써 시커메. 짐승 같다니까.
마른 남자의 걱정에 퉁퉁한 남자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렴요. 자는 걸 보고 있으면 평생 안 자랐으면 좋겠다, 싶기도 합니다. 근데 또 자란 모습을 얼른 보고 싶기도 하고.
정원이 시윤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갈색 머리칼이 차르르 흩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게 또 예뻐서 볼을 한참이나 물고 빨았다.
그 후로는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졌다. 가족, 자식, 또는 전장에서 발견한 명품 시계, 도자기, 그림 등이 주제였다. 방금 아무 죄 없는 여자 하나를 난도질해 놓고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시윤은 정원의 무릎에 앉아 장난감 총만 만지작거렸다.
청호는 모든 방문자가 떠나가고, 시윤을 품에 안은 정원이 카메라를 끌 때까지 시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지옥 같은 전장에서 돌아와 발바닥이 터지라 어미의 행방을 찾고 있을 동안, 장난감 총을 만지작거리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시윤을.
안타깝게도 청호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시윤을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화목한 가족을 소개하며 싱그럽게 웃던 시윤의 얼굴이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당장에라도 시윤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럽길 바랐다. 그럼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정원 역시 제가 겪었던 고통을 손톱만큼이나마 맛볼 수 있을 테니까.
며칠 대장실에 처박혀 있던 청호에게 폴이 찾아왔다.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청호는 출정 전 새벽에 숙소를 들렀다. 숙소는 고요했다. 달빛만 일렁이는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시윤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공간에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노라, 마음먹으며 달았던 문고리가 청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청호는 요철 하나 없이 반질거리는 문고리를 한껏 비웃었다. 그리고 곧장 시윤의 방을 침범했다.
방 안은 적막했다. 반쯤 옆으로 누운 시윤이 어깨까지 이불을 덮고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호는 그 평화로운 적막 속으로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튀는 부분 없이 매끄럽게 나 있는 눈썹, 처연히 감긴 눈, 동그란 코끝, 가볍게 다물린 입술, 희미하게 솜털이 비치는 볼,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어깨, 이따금 꿈틀거리는 눈꺼풀.
“…….”
청호가 속으로 자조를 삼켰다. 시윤을 보자마자 온갖 나쁜 말을 쏟아부으려 했거늘. 마음대로 움켜쥐고 흔들려 했거늘. 곱게 자는 걸 보니 어째서인지 입도, 손도 움직이질 않았다.
결국 청호는 시윤을 깨워 원망을 쏟아 내지도, 욕을 퍼붓지도, 뺨 한번 시원하게 내려치지도 못했다. 그러다 그냥 그렇게 출정해 버렸다.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청호는 모래를 한 포대나 삼킨 듯 답답한 속을 클롭스를 죽이며 풀었다. 작전이고, 통솔이고 신경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클롭스를 태우고, 얼리고, 부쉈다. 그런데도 속이 풀리질 않았다. 오히려 폐부가 뻑뻑하게 굳었다. 숨쉬기가 힘들었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클롭스의 피에 짜증만 곱절로 났다.
그럴수록 청호는 이를 악물고 힘을 방출했다. 흘러가는 상념으로 그냥 이러다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싸웠다. 개떼처럼 달려드는 클롭스를 피하지도 않고 맨몸으로 받아 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상처가 늘어났다.
긁히고, 터진 상처들은 생김과 동시에 아물었다. 어깨를 크게 다쳤으나 괘념치 않았다. 전장에서 이깟 상처는 다친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리고 폭주가 왔다. 청호는 그 역시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무리할 틈도 없이 뻥뻥 터져 나가는 힘으로 클롭스를 뭉갰다. 그러자 꽉 막힌 속이 조금씩 조금씩 풀리는 것도 같았다.
청호가 막 클롭스의 가슴에서 심장을 뽑아냈을 때였다. 폴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대장님. 더는 안 됩니다. 휴식하셔야 합니다.”
“……비켜.”
“이미 폭주하셨잖습니까.”
“괜찮아. 비켜.”
역겨운 냄새를 뿜어내는 심장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청호가 폴을 지나쳤다. 그러나 폴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청호의 앞을 막았다. 청호가 시뻘건 눈알로 그를 노려봤다. 더 가로막으면 네 목도 뽑아 주겠노라 말할 참이었다.
“지금 채 준위를 호출하겠습니다.”
그 말에 청호가 눈을 부릅떴다.
“……부르지 마.”
“사실 호출했습니다.”
“폴.”
“언제까지 폭주를 삼키기만 하실 겁니까. 이제 어엿한 가이드도 있는데, 여타 에스퍼처럼 살면 안 되시겠습니까?”
여타 에스퍼처럼. 제 인생에 그것이 가능할 날이 올는지 모르겠다. 시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가이아가 이어 준 반려라는 걸 들었을 때만 해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째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 평범함과 멀어지는 느낌이다.
“……돌려보내.”
“대장님. 저는 무섭습니다. 대장님이 이러다 돌아가실까 봐.”
“…….”
“항상 무서워했습니다. 대장님을 모시게 된 그날부터 지금까지 내내요.”
“…….”
“근데 이제 채 준위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제발 제가 더는 무서워하지 않게, 에로아스 부대가 대장님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 말에 청호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병사들에겐 도무지 나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가족을 내버려 둔 채 저만 믿고 온갖 지옥을 뛰어다니는 그들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결국 청호는 피범벅인 몸으로 막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대장님. 저 왔어요.”
하얀 얼굴의 시윤이 나타났다.
청호는 폭주를 이유 삼아 시윤을 마음대로 유린했다. 시윤이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단전에 엉켜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 아파요……. 대장님, 아파요…….”
청호는 시윤이 우는 게 좋았다. 멋대로 움직일 때마다 바짝 굳는 어깨도, 갈무리할 수 없는 아픔에 파르르 떨리는 등줄기도, 흘끔흘끔 저를 보는 공포에 질린 눈동자도, 벌겋게 짓무른 눈가도, 시트를 억세게 움켜쥐어 하얗게 질린 손가락도, 가늘게 흘리는 신음도 좋았다.
고작 육체적인 고통으로 제가 겪었던 아픔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렇게라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원에게 가 제 패악을 냉큼 일러바치길 바랐다.
근데,
“이제, 흐윽, 이제 안 아프신 거죠?”
“…….”
“어, 어깨는요? 끅, 어깨는 다 아물었어요?”
시윤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하도 깨물어서 죄 터진 입술로 내뱉는 게 가해자에 대한 걱정이라니.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이상하게 더 얄미워졌다. 얼마나 여유로이 자랐으면 이런 상황에서도 남을 걱정하나, 싶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예뻤다.
청호는 참지 못하고 시윤의 붉은 입술을 삼켰다. 폭주 때문에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제 피는 비리기 그지없는데, 시윤의 피는 신기할 정도로 달큼했다. 그의 타액과 섞여 끈적한 피를 마시면 그 언젠가 엄마가 타 주던 차를 마실 때처럼 배 속이 뜨끈해졌다.
아아, 또 엄마가 떠올랐어. 꾀죄죄하게 마른 엄마가.
청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다시 시윤의 뒤에다 욱여넣었다. 시윤이 뻣뻣하게 굳었다.
“대장……님, 아파요…….”
가녀린 음성이 흘러왔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윤의 뒤는 좋다. 가히 천국이라 해도 비약이 아니었다. 어쩌면 천국이라도 시윤의 뒤만큼 황홀하지는 않을 터였다.
폭주는 진즉 멎었다. 오장육부를 들쑤시던 고통도 시윤에게 모두 떠넘긴 터라 아픔도 없었다. 남은 건 색욕과 육욕과 시윤에 대한 갈증, 그리고 치졸한 복수심과 파괴 욕구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시윤의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상처 하나 없이 곱게 뻗은 목선, 저도 남자라고 봉긋하게 솟은 울대, 가쁘게 신음할 때마다 일렁거리는 피부.
눈이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저걸 삼키지 않으면 뇌수가 귓구멍 밖으로 줄줄 쏟아질 것 같았다.
청호는 망설임 없이 욕구를 채우려 들었다. 이 아래로 짓눌리는 시윤의 피부가 말도 못 하게 감미로웠다. 이미 입 안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부족했다. 아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쩍쩍 게걸스레 씹어서 배를 채우고 싶었다.
“대장님, 대장님, 흑…… 그러지 마……세요…….”
간절하게 부탁하는 시윤의 목소리는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들리는 거라곤 이성 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속삭임뿐이었다.
먹어, 씹어, 삼켜. 그래도 돼. 피를 맛봐. 달콤할 거야.
청호의 눈동자에서 점점 초점이 사라져 갔다. 그때였다. 시윤이 머리칼에다 볼을 비벼 왔다.
“대장님, 키스…… 키스해 주세요. 네? 키스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번쩍 쳐들렸다. 시윤이 붉게 달아오른 혀를 빼꼼 뺀 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에 엉켜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뭐라고 그렇게 아름다웠다. 허겁지겁 입술을 물고 빨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아, 흣, 대장……님……. 으읏, 흑…….”
길었던 키스 후로 시윤의 울음은 점점 더 거세져만 갔다. 진즉 짓무른 눈가가 금방이라도 피를 비출 듯 벌겋게 익었다. 얇던 눈꺼풀은 퉁퉁해졌고,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올라온 눈동자는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눈물을 채우길 반복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울어야 하는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뭐 얼마나 대단한 고통을 견딘다고 그렇게 서럽게 울어. 그러니…… 그만 좀 울어. 눈이 불어 터지기 직전인데, 숨까지 꺽꺽 뒤틀어 가며 뭐 그리 열심히 울어. 얄미운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눈 감아.”
“……네?”
“우는 거 보기 싫으니까 눈 감으라고.”
“…….”
짜증이 잔뜩 섞인 명령이었다. 근데 미련한 시윤은 그 명령을 이행해 보겠다고 입술을 아득 겹쳐 문 채 울음을 참아 냈다. 그러나 뒤를 들쑤실 때마다 퐁퐁 올라오는 눈물은 억누른다고 억눌리는 게 아니었다.
보다 못한 청호가 커다란 손으로 시윤의 눈두덩을 덮어 버렸다. 그런데도 시윤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시윤의 뜨거운 눈물이 손바닥을 지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시야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은 한결 편했다.
청호는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작전을 끝내고 포스로 돌아왔다. 숙소가 고요한 걸 보니 시윤이 없는 모양이었다.
소파 깊숙이 등을 묻은 청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니코틴이고 알코올이고 마약이고 빌어먹을 제 몸뚱이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언젠가 담배 공장을 발견한 병사들이 잔뜩 쟁여 놓은 담배였고.
텁텁하고 쌉싸름한 담배는 그다지 맛이 없었다. 그래도 청호는 멍하니 허공을 보며 연기를 뿜고 또 뿜었다.
시윤은 강의하러 갔나. 그 몸으로? 며칠 전 저와 정사를 나누다 까무러친 시윤을 상기한 청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신을 잃었든 말든 몸을 흔드는데 코피를 쏟았었다. 아주 세상을 다 적시겠다는 듯 콸콸.
그걸 보다가 정신 차리니 제가 시윤의 뒤처리를 해 주고 있었다. 온갖 액체로 뒤덮인 시윤의 몸을 닦아 주고 이불까지 덮어 줬지. 그런 제 꼴이 어찌나 우습던지.
모든 걸 알고도 시윤이 죽는 건 무서웠나 보다. 그가 없으면 예전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야 하니까.
그게 뭐 대수겠냐, 어차피 미련 없는 인생인데, 싶으면서도 ‘가이드 없는 에스퍼’로 다시 돌아갈 거라 생각하면 관자놀이가 띵했다.
저도 절 모르겠다. 정원이 엄마를 이렇게 저렇게 죽이자며 신나게 입을 놀리던 걸 떠올리면 세상 전체를 몰락시키고 싶은데, 시윤을 보고 있으면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됐다.
저는 아직 피를 무서워하던 열두 살에서 성장하지 못한 모양이다.
청호가 후우우, 한숨처럼 연기를 흘려보냈을 때였다.
“오셨어요.”
“…….”
“죄송해요. 복귀하신다는 소식을 못 들어서…….”
쇳소리 가득한 음성이 담배 연기에 얽혀 들었다. 며칠 새에 비쩍 마른 시윤의 손에는 두툼한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약국을 통째로 털어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약이었다. 그 꼴이 말도 못 하게 짜증 났다. 그냥 모건한테 가서 주사 몇 대 맞으면 나을 것을.
그래서 무어라 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예술이었다.
“모건 대령님이…… 대장님 잘못이라고 화내실 것 같아서 안 갔습니다.”
“…….”
“제가 A급만 되었어도 그런 소리 안 들으셔도 됐을 텐데…….”
시윤은 세상 모든 걸 자신의 죄로 만드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고집스레 차려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꼴도. 칼라와 소매가 젖을 정도로 코피를 쏟아 놓고 아니라고 거짓을 고하는 꼴도. 아파 죽겠는데 제가 욕을 들을까, 걱정하는 꼴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신음 하나 내뱉지 않는 꼴도. 무엇 하나 구질구질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근데 그걸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약해졌다. 저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하는 파렴치한이 된 기분이었다. 사실 시윤의 입장에서는 썩 틀린 말도 아니리라.
청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시윤에게 사실을 털어놓을까. 저에 관한 거라면 항상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시윤이니 저 대신 정원을 벌해 주지 않을까. 제 편에 서서 아비를 헐뜯어 주지 않을까. 저의 아픔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려 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됐다.
“채 준위.”
“네.”
“내가…….”
“예.”
“내가…….”
그러나 정원은 그것이 매우 싫은 모양이었다. 청호가 입을 떼려는 순간, 전화가 온 걸 보면. 청호는 저를 두고 정원의 전화를 받으러 가는 시윤이 못내 미웠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얼른 안 와도 돼.”
그래서 얼른 다녀오겠다는 시윤의 말에 못난 대답을 쏴 줬다.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사막 작전은 지루했다. 뚜렷한 목적도, 적도 없이 걷고 또 걷는 게 반복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프를 끌고 오는 건데. 차에 타고 있으면 공격당하기에 십상이라 걷기로 했거늘. 그 결정이 몹시 후회됐다.
그래도 어려운 작전은 아닌지라 마음은 편했다. 꾸역꾸역 따라오겠노라 고집을 부린 시윤이 못내 거슬리긴 했지만, 제가 끌고 온 것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있겠지, 싶었다.
……그래도 흙 위를 걷는 건 땅을 걷는 것과 다른데. 그 희멀건 피부가 쨍한 햇볕에 화상을 입지는 않을는지, 물은 자주 섭취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사막의 밤은 후끈거리던 피부가 단숨에 차게 식을 정도로 추웠다. 청호는 임시 베이스캠프를 세우는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묵을 곳이 막사가 아니라 셸터인지라 설치는 금세 끝났다. 투명 바리케이드까지 작동되고, 병사들은 각자의 보고를 마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청호 역시 자신의 셸터로 향했다. 시윤이 또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을 풀었다가 싸길 반복하며 절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근데 셸터는 텅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조차 없었다.
설핏 눈살을 찌푸린 청호가 뒤꿈치로 쿡쿡 바닥을 짓이겼다. 어디로 갔나. 이 좁은 베이스캠프에서 길을 잃었을 리도 없고. 설마 다른 병사들 틈에 끼어 잘 생각인가. 제가 몹쓸 짓이라도 할까 봐?
‘소, 손잡아 드릴게요.’
‘…….’
‘물론 다른 것도 괜찮습니다. 버틸 수 있어요.’
그렇게 말했으면서 이렇게 꽁무니를 빼다니. 어이가 없었다. 코트를 아무렇게나 던진 청호가 셸터 밖으로 나왔다. 근데 셸터 앞에 품 안 가득 짐을 껴안은 시윤이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아……. 죄송합니다.”
시윤을 셸터 안으로 들인 청호는 곧장 침구 위에 몸을 뉘었다. 시윤이 사지 멀쩡하니 제 곁에 있으니 됐다. 탈수 증세도 없는 것 같고, 더위도 먹지 않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근데 시윤이 눈치 없이 종알거렸다.
“저…… 대장님. 제가 다른, 다른 곳에서 잘까요?”
“왜?”
“그게 공간도 좁고, 침대도 없고 불편하실 것 같아서…….”
“뭐든 하겠다더니.”
청호는 시윤의 말이 매우 기분 나빴다. 물론 시윤이라면 저를 불편해할 만도 했다. 눈이 불어 터질 정도로 엉엉 울렸는데, 아프게 대했는데, 그러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네 주제에 날 먼저 거부하면 안 되지. 아무리 무지하다 하더라도, 그건 아니지.
청호의 언짢음을 느낀 시윤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필요하신 거면 언제든지…….”
“이리 와, 그럼.”
청호가 무심한 낯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잠깐 눈을 크게 떴던 시윤이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청호는 내심 놀랐다. 또 셸터 구석에 기어들어 가 딴짓을 하며 시간을 때울 거라 예상했던지라.
곧 시윤의 희멀건 상체가 드러났다. 아직 몸 여기저기에 청호가 남겨 놓은 잇자국이 박혀 있었다. 생기라곤 없는 몸뚱이였다. 근데도 어금니 사이로 침이 배어 나왔다. 이대로면 또 눈 뒤집고 시윤의 엉덩이를 헤집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됐어. 그냥 와.”
청호가 애써 눈을 돌리며 명령했다. 그러자 시윤이 조용히 다가와 몸을 뉘었다. 그가 색색 빠르게 뿜어내는 숨에 긴장이 잔뜩 섞여 있었다.
청호가 헛웃음을 삼켰다. 지금도 저리 골골대는 주제에 진짜 저와 몸을 섞겠다는 걸까. 또 코피를 쏟으며 까무러치려고. 저번 정사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이번엔 아예 피를 토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 꼴을 봐도 그다지 통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자려고 했다. 근데 맨몸으로 누워 있던 시윤이 추운지 몸을 꾸물거렸다. 못내 거슬리는 행동이었다. 보다 못해 아무렇게나 던져둔 코트를 끌어와 덮어 줬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다.
“왜……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하면 버틸 순 있고?”
“노력하겠습니다.”
“됐어.”
청호가 시윤을 등지고 누웠다. 지금은 모든 게 귀찮았다. 시윤을 괴롭히는 것도, 정원을 떠올리는 것도, 내일의 작전을 생각하는 것도. 바글바글 끓는 물에 익고 있는 듯한 뇌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근데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닿아 왔다. 그와 동시에 메마른 불모지이던 사막이 단숨에 비옥한 꽃밭이 됐다. 청호는 실로 당황했다. 시윤이 먼저 다가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모든 감각을 등에 집중하던 청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짓이야?”
“가이드가 할 일을 하는 겁니다.”
“……시키지 않은 짓은 하지 마.”
청호가 낮게 으르댔다.
“할 겁니다.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도 시윤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언제 나누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대화를 끌어와 현재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제 능력으로 멀찌감치 밀어 버릴까, 고민하는데 시윤이 보란 듯이 몸을 더 붙여 왔다. 덕분에 청호는 숨 쉬는 것도 잊어야 했다. 시윤과의 접촉은 어느 때든, 어떤 기분이든 황홀하고 경이롭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시윤을 껴안고 싶었다. 품 안 가득 안은 채 그 통통한 입술을 베어 물고 혀를 욱여넣고 싶었다.
청호가 치미는 욕정을 참기 위해 눈을 내리감았을 때였다. 시윤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짐임과 동시에 부탁인 말이었다.
“저는 제 반려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 겁니다. 해 주고 싶은 건 다 해 줄 거예요.”
“…….”
“저한테 대장님은 정말…… 정말 소중하거든요.”
“…….”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해 주세요. 밀어내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시윤의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젖어 가더니, 끝내는 훌쩍이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래서 청호는 시윤을 밀어내지도, 거부하지도 못했다.
‘저한테 대장님은 정말…… 정말 소중하거든요.’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에 쿠욱 박혔다.
결국 청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사위는 전장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데, 머릿속에선 핵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성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이성은 시윤을 밀어내야 한다, 복수해야 한다, 제가 겪었던 아픔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려 줘야 한다, 농성을 벌였으나 마음은 그저 시윤을 품에 안고 싶다는 욕구뿐이었다.
사실 시윤이 저의 과거를 책임질 의무는 없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정원의 죄이지 시윤의 죄는 아니잖은가. 장난감 총에도 헤실거릴 만큼 어린 나이에 있던 일인데. 그가 아비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그냥 태어났더니 아비가 정원이었을 뿐인데 그것으로 무슨 죄목을 명명할 수 있겠나.
하지만 무지도 죄일 수 있지.
근데 또 따지고 보면 그 무지 역시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정원이 기를 쓰고 숨겼으니 알 턱이 있나. 저도 휴가 아니었으면 향후 5년, 10년, 아니, 어쩌면 평생 밝혀 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냥 시윤은 품고 살까. 저를 저리 따르는데 매번 밀어내는 것도 귀찮지 않을까. 시윤이라면 모든 걸 알고도 제 편에 서 줄 것 같은데. 규율을 중요시하고, 정도 많고,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도 명확히 구분할 줄 아니까, 등신 같은 아비를 버리고 제 곁에 있어 주지 않을까.
그리고 다음 날.
“대장님.”
“어.”
“날씨도 더운데…….”
“…….”
“손이나 잡을까요?”
오아시스 앞에 앉은 시윤이 배시시, 싱그럽게 웃는 걸 보고 청호는 깨달았다. 애당초 시윤은 제가 자의로 떼어 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시윤이 다쳤다. 무기 더미에 폭탄을 설치하고 빠져나오다 도끼에 팔이 찢겼다. 다행히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다. 피가 제법 나긴 했으나 과다 출혈까지도 아니었고, 시윤의 안색을 보아하니 조금 놀란 듯할 뿐,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것 같지도 않았다.
청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시라도 빨리 작전을 끝내고 포스로 돌아가 시윤이 양질의 치료를 받게 하는 거였다.
그렇게 살아남은 클롭스들을 죽이고 허겁지겁 돌아왔을 때, 파랗게 질린 시윤과 마주해야 했다.
시윤의 죽음은 한 번도 가늠해 본 적 없었다. 제 죽음이야 항상 목전에 두고 살았던 터라 지루하기까지 했는데, 시윤의 죽음은 그렇지 못했다. 심장이 심연 아래까지 추락하는 것 같았다. 기도가 조여들고 폐부는 시멘트라도 삼킨 것처럼 뻑뻑하게 굳었다.
시윤은 시시각각 창백해졌다. 피는 멈추지 않았고, 동그란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봉숭아 물이라도 들인 것처럼 불그스름하니 예쁘던 손가락 끝은 텁텁한 보라색이 됐다.
멍청한 의무병은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개 같은 소리만 해 댔다. 청호는 딱 미치고 환장하기 직전이었다. 무서웠다. 더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시윤을 품기로 마음먹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이 도래하다니.
신은 제가 지독히도 미운가 보다.
다행히 시윤은 군용기가 포스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 줬다. 이제는 입술도 보랏빛이었지만, 어쨌든 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니 모건이 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신만큼이나 똑똑하다는 그라면 분명 시윤을 살릴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건이 주사를 놓자 시윤의 안색이 금세 편안해졌다. 어딘가 뚝뚝 끊기던 호흡도 자연스러워졌고, 얼음장 같던 체온도 한층 훈훈해졌다.
그런데도 걱정을 놓지 못한 청호는 초가 멀다고 시윤을 살피며 모건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원을 맞닥트렸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다. 청호는 저와 정원의 사이에 선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는 시윤이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줄 알았다. 제 곁에 서서 정원을 노려볼 줄 알았다. 염치도 없이 저를 비난하는 정원에게 욕을 퍼부을 줄 알았다.
근데,
“대장님이 좀…… 이해해 주세요.”
네가 그렇게 말했어.
“아버지잖아요. 아들이 다쳤다는데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제가 평생 다쳤던 적이 없었거든요.”
내 어미의 사지를 찢었던 살인자를 아버지라 칭하며, 가족이 없는 나에게 가족을 운운하며, 나에게 이해를 바랐어.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다 덮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나를 그렇게 쉽게 버렸어. 미련 없이 날 홀로 두고 떠났어.
내 세상엔 너뿐이었는데, 네 세상에 나는 그저 한 부분에 불과했다는 걸 이렇게 깨닫는다. 그 예쁜 입술로 뱉었던 말들이 조악한 거짓이었다는 걸 이렇게 깨닫는다.
청호가 시윤의 온기조차 남지 않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하지만 아주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너는 애당초 내 것이 아니었구나.
……그럼 더는 지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