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6)

보랏빛 방아쇠

평온을 그리고 있던 시윤의 미간이 불편하게 구겨졌다. 몸이 영 찌뿌둥했다. 목구멍으론 쌉싸름한 약 맛이 났고, 팔다리는 바윗덩이라도 매달린 듯 무거웠다.

약물에 취한 정신으로 과거를 되뇌어 갔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또 어디가 아픈 모양인데. 왜 아프지. 병이 도졌던가. 아니면 다쳤나. 차근차근 생각을 쌓아 가는데,

“시윤아. 정신이 들어?”

나긋한 음성이 이마 위에서 흩어졌다. 어머니인 선화의 목소리였다. 시윤이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희뿌연 시야라 선화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선화가 보드라운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겨 줬다.

“팔은 어때? 아파?”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꿈속에 묻혀 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아, 팔을 다쳤었는데. 독에 감염되어 제법 고생했었다. 시윤이 물속에 잠긴 듯 멍한 정신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 팔이 아직 몸뚱이에 붙어 있나 확인한 거였다.

다행히 손가락은 잘 움직여 줬다. 지끈거리는 통각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반가웠다. 신경 역시 멀쩡하다는 뜻이니까. 조금 몽롱하긴 하나 정신도 올바르고 몸에 따로 연결된 기계가 없는 걸 보아 독의 후유증도 없는 듯했다.

시윤이 느릿하게 턱을 내저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에 잔뜩 긴장했던 선화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빈 잔에 미적지근한 물을 따랐다.

“사흘이나 잤어, 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사흘이요?”

나른하게 풀려 있던 시윤의 눈꺼풀에 더럭 힘이 들어갔다. 사흘이라니.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다니. 저는 이제 자는 것도, 까무러치는 것도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몸이었다. 저의 부재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대장님은요?”

“응?”

“대장님은 괜찮아요?”

“청호 대장 말이니? 글쎄? 청호한테 무슨 일 있니? 너만 다쳤지 청호까지 다쳤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선화가 시윤의 등을 받쳐 일으켰다. 그 후 물 잔을 입가에 대 줬다. 그러나 시윤이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흔들며 거부했다. 선화의 눈가가 대번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왜? 목이 안 말라? 아니면 못 삼키겠어?”

“대장님 출정하셨어요?”

“어……. 모르겠는데. 시훈이한테 전화해 볼까?”

일단 물 좀 마셔. 목소리가 엉망이다. 응? 선화가 시윤의 어깨를 도닥였다. 허나 시윤은 여전히 물 따위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협탁에 놓여 있던 자신의 시계를 낚아채 홀로그램을 뽑았다. 걱정과 달리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으레 있는 부대 단체 문자가 다였다.

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 사이 청호가 폭주하거나 다친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설마 그새 또 출정한 건 아니겠지. 그럼 숙소에 있으려나. 아버지의 무례 때문에 화가 났을 텐데. 얼른 가 봐야 했다.

“어머니. 저 부대로 돌아갈게요.”

시윤이 훌떡 이불을 들쳤다. 그러자 선화가 애달프게 뒤꿈치를 들썩였다. 시윤이 일중독인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크게 다쳐 놓고 또 부대로 간다니. 답답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왜? 나흘은 더 쉬어도 돼. 강의도 없어. 아버지가 너 쉬라고 다 처리해 두셨다.”

“대장님이 혼자 계시잖아요.”

“…….”

선화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청호가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혼자 좀 있으면 어때서. 네가 아파서 끙끙 앓는 내내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은 반려 에스퍼가 뭐 그리 소중하다고.

“갈래요.”

속속들이 타들어 가는 선화의 마음일랑 추호도 가늠하지 않은 시윤이 고집스레 몸을 일으켰다. 빈혈이라도 온 듯 머리가 띵하긴 했지만 두 다리는 멀쩡했다.

침대에서 나온 시윤이 옷걸이에 걸려 있던 군복을 빼냈다. 팔뚝이 찢어진 군복은 어디다 버렸는지, 멀끔한 새 군복이었다. 입을 앙다문 시윤이 그것에다가 팔을 꿰었다.

“밥은? 밥도 안 먹고 가?”

울상을 한 선화가 물 잔을 쥐고 시윤을 졸졸 따라왔다.

“부대 가서 먹을게요.”

“또 영양제로 때우려고!”

“……챙겨 먹을게요. 걱정 마세요.”

시윤이 능숙하게 거짓을 말했다. 목구멍이 약물에 절인 듯 떫은지라 당분간은 식욕이 없을 것 같았다. 억지로 욱여넣어 봐야 굶는 것만도 못하리라.

팔에 둘둘 감긴 붕대 탓에 군복이 뻑뻑하게 느껴졌다. 인상을 쓴 채 어깨를 돌리던 시윤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아, 맞다. 아버지는요?”

“서재에 계시지. 뭘 하는지 가끔 너 자는 것만 보러 나오고 내내 거기 계신다.”

“……별말 없으셨어요?”

“없기는. 모건부터 의사란 의사는 죄 불러서 너 고쳐 놓으라고 아주 난리도 아니셨어.”

“그런 거 말고요. 대장님에 관해서 말씀 없으셨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청호 타령에 선화가 눈초리를 달리했다. 대화 그 어느 곳에도 청호가 등장할 문맥이 없는데, 시윤은 이상하리만큼 청호를 찾아 댔다.

“……너 청호랑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일은 무슨.”

시윤이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선화의 입매가 한일자로 굳었다. 그녀가 시윤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손에 들린 잔 속의 물이 크게 출렁였다.

“왜. 무슨 일인데.”

시윤의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진실을 털어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냥…… 그냥…… 별일 아니에요.”

그러나 시윤은 함구를 택했다. 선화의 반응을 보아하니 제가 청호와 닿으면 아프다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정원이 말을 안 한 모양인데, 부디 유난스러운 형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길 바랐다. 사실을 알면 분명 정원처럼 당장 가이드 관두라며 펄쩍펄쩍 뛸 터였다.

“갈게요. 나오지 마세요.”

“시훈이랑 시준이 곧 올 텐데……. 형들이 걱정 많이 했어.”

“……제가 따로 전화할게요.”

시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선화가 애달픈 시선으로 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당장은 청호가 급했다.

숙소는 조용했다. 항상 거실에 터를 잡는 청호도 보이질 않았다. 거실에 멀뚱히 서 있던 시윤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책상을 뒤져 채혈 기계를 찾아냈다. 사막에서 돌아올 때부터 지금까지 어빌리티 등급을 한 번도 못 쟀다.

마지막 결과는 C였는데. 과연 어떻게 변했을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됐다.

마른 입술을 핥은 시윤이 바늘 위로 엄지를 쿡 눌렀다가 뺐다. 곧 반짝이는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C0]

“…….”

시윤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다친 이후로 청호와의 접촉이 전혀 없었으니 오를 리가 없는데. 욕심 많은 기대가 또 주책맞게 널을 뛰었다.

입술을 삐죽인 시윤이 기계를 짜증스레 책상 서랍에 처박았다. 그 후 팔을 조이는 군복을 벗었다. 그 김에 빡빡하게 묶인 붕대도 슬쩍 풀어 봤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상처는 꽤 봐 줄 만했다.

곱게 꿰매져 있었고, 우둘투둘했던 피부도 멀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치덕치덕 발린 연고가 조금 역겹긴 했지만 원래 어떤 상태였었는지 잘 알고 있는 터라 이만하면 나쁘지 않았다.

숙소를 뒤져 구급 키트를 찾아낸 시윤이 상처 위에 방수 밴드를 붙였다. 그리고 욕실로 향했다. 씻기 위해서였다. 몸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는 약 기운을 털어 내야 정신이 맑아질 것 같았다.

씻고 나온 시윤은 방 안에 있던 전술 배낭을 정리했다. 아마 제가 쓰러진 틈에 청호의 부하 병사가 가져다 놓았으리라. 이런저런 것들을 정리하고, 청호가 준 총도 곱게 수납했다. 마지막으로 배낭을 접는데, 여기저기 묻어 있는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제 피겠지.

“음…….”

시윤이 심각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봤다. 가방은 어떻게 하지? 이것도 세탁해야 하나? 이 정도 핏자국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깔끔한 게 좋으려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딜런 대위님의 가방은 더러웠던 것 같다. 녹은 초콜릿, 피, 진흙 따위가 아무렇게나 묻어 있었지.

잠시 고민하던 시윤은 가방을 그냥 보관하기로 했다. 사실 제 핏자국이 묻은 게 못내 좋았다. 제가 진짜 피 터지는 전장에 있었다는 증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시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물론 제가 없는 동안 홀로 있었을 유리 에펠 탑을 쓰다듬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윤은 널따란 숙소를 크게 한 바퀴 훑었다. 청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즐기던 차도 마시지 않은 건지, 아니면 로봇 청소기가 이미 한 차례 휩쓸고 간 건지…….

그러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복숭아 바구니를 발견했다.

“…….”

출정하기 전, 숙소 앞까지 친히 찾아온 정원이 준 거였다. 혹여 상처라도 날까 곱게 가지고 온 것인데, 며칠이나 됐다고 그새 문드러져 있었다. 예쁜 분홍빛을 뽐내던 복숭아가 퀴퀴한 갈색이 되어 버렸다.

시윤의 눈썹이 내리막을 그렸다. 하나도 못 먹었는데. 아까워라…….

시윤은 썩은 복숭아를 먹을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모건에게 가서 복숭아를 원래대로 돌려 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이라도 해 볼까.

아쉬운 마음에 괜히 라탄 바구니를 매만지고 있는데,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윤이 얼른 현관으로 향했다. 청호가 막 홈 슬리퍼에 발을 꿰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시윤이 애써 해맑게 웃어 보였다.

“오셨어요.”

“…….”

“저도 방금 왔는데.”

“…….”

청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로 시윤을 흘깃 보곤 말았다.

시윤이 허리춤에 숨긴 손을 꼼지락거렸다. 역시, 화났구나. 아버지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화가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다 죽어 가는 저를 구해 놓았더니 가해자 취급이나 당하고. 저라도 울분을 토했을 터였다.

시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청호가 그를 지나쳐 거실로 들어갔다. 시윤이 냉큼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그…… 혼자 계시는 동안 어디 아프진 않으셨어요?”

청호의 미간이 꿈틀 경련했다. 그러더니 우뚝 멈춰 섰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뒤튼 그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팠지.”

그 말에 시윤의 만면에 당혹이 차올랐다.

“폭……주가 왔었습니까? 근데 왜 메시지가 하나도……. 아니, 지금은, 지금은 괜찮으세요?”

시윤이 청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눈으로는 청호를 바지런히 훑었다. 사실 폭주가 왔었대도 눈에 보이는 상처가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항상 속으로 삼키는 그니까. 그래도 자꾸 살피게 됐다. 손가락은 잘 붙어 있는지, 잘생긴 얼굴은 여전한지,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는지.

다행히 육안으로 봤을 때 다친 곳은 없었다. 속은 어떠려나. 또 혀가 피로 담뿍 물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으려나.

“안 괜찮아.”

청호가 단조로운 네 음절을 뱉어 기름으로 범벅된 시윤의 걱정에 불을 질렀다. 시윤이 아랫입술을 통통하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청호의 손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닿지 못했다. 청호가 손을 뒤로 물렸기 때문이다.

“…….”

시윤이 호흡을 멈췄다. 목적지를 상실한 손이 허공에 나부꼈다. 명백한 거부였다. 청호가 제 손을 거부한 것이다.

시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청호에게 제가, 정확히는 제 몸뚱이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던 터라. 조금의 과장을 보태면 목숨과 다름없는데, 그걸 거절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프다면서. 괜찮지 않다면서.

화가 정말 많이 났나 보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시윤은 남을 달래는 데 그다지 재주가 없었다. 항상 달램을 받는 쪽이어서. 지나치게 곱게 자라 온 건 사회생활에 영 도움이 안 됐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손끝만 움찔거리는데, 손목시계가 반짝반짝 빠르게 발광했다. 전화였다. 시윤과 청호의 시선이 동시에 시계로 향했다.

[아버지]

또렷하게 적힌 세 글자는 지금의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시윤이 얼른 시계를 손으로 덮었다. 그러자 홀로그램이 맥없이 꺼졌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더 맹렬히 발광했다.

[아버지]

어째 단어가 전보다 더 굵어진 듯했다. 시윤이 다시 전화를 끄려는데, 청호가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받아.”

“어…… 아, 아니요. 괜찮아요.”

“받으라고.”

“…….”

그건 배려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시윤이 홀로그램을 스와이프했다.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곧 손바닥만 한 화면에 정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뜻 보기에도 만면에 화가 가득했다.

“네, 아버지.”

―말도 없이 나갔니?

“……그렇게 됐습니다.”

―집으로 와라.

“저 이제 괜찮아요. 안 아프다고요.”

―오라면 와.

정원은 강압적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나긋하고 친절하던 아버지였는데. 요즘 들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제가 다친 게 그렇게 큰 충격인가. 전장에 나가면 흔히 있는 일인데. 목이 너덜거리는 채로 복귀하는 병사가 한둘도 아니고. 시훈과 시준 역시 숱하게 다쳐 오거늘.

제가 아무리 평생을 나약한 퓨어로 살아왔다지만 어찌 됐든 그건 이제 과거였고, 가이드가 된 이상 정원은 그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고 민망한 상황들이 반복될 터였다.

“아버지. 저 성인이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준위 박탈시키기 전에 와.

“…….”

찰나, 시윤의 눈동자가 크게 휘청였다. 방금 정원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당황은 곧 짜증으로 바뀌었다. 정원이 이다지도 철저하게 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게 몹시 섭섭했다. 제가 얼마나 능력자가 되고 싶었는지 알면서. 가문의 유일한 퓨어로, 돌연변이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 간신히 가이드가 됐더니 이제 군에서 내쫓겠다고.

시윤의 눈이 화난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벼려졌다. 윗입술도 위로 말려 올라갔다.

“하세요, 그럼. 저 준위 아니라도 가이드는 할 거예요.”

―너…….

시윤은 그대로 시계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손목에서 풀어 바지춤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귓바퀴가 화끈거릴 정도로 화가 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씩씩, 짜증 어린 숨을 내쉬던 시윤이 뒤늦게 앞에 청호가 서 있음을 상기했다. 얼른 표정을 추스른 시윤이 간곡한 음성으로 사죄했다.

“아버지 때문에 화나셨을 거 알아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신데, 제가 다쳐서…….”

“됐어.”

청호가 단칼에 시윤의 사과를 참수했다. 듣고 있기가 매우 거북했다. ‘그런 분’이 아니다, 라. 그렇게 구구절절한 문장도 아니었는데 시윤이 정의하고 있는 정원이 어떠한 존재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타인에게 막말조차 하지 않는 사람. 남에게 적당히 예의를 갖출 줄 아는 사람. 그와 동시에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 그쯤 되리라. 청호가 정의하고 있는 정원과 무엇 하나 부합하는 게 없었다.

무심한 낯의 청호가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했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포트에 물을 올리고 가지런히 서 있는 머그잔 중 하나를 끌어왔다.

시윤은 그런 청호의 뒤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꼭 분리 불안증에 걸린 강아지 같았다.

“아프신 건 제가 어,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글쎄.”

“손……잡을까요?”

조심스레 나온 말에 청호가 가소롭다는 듯 실소했다. 며칠 전만 해도 그 말에 설레고, 기뻐했는데. 이젠 고작 그따위 안온을 위해 시윤과 닿는 게 달갑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않는 청호에 시윤은 안달이 났다.

“아, 아니면 키스할까요?”

시윤 딴에는 최선을 내놓은 거였다. C등급으로 청호와 입을 맞추면 분명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것으로 청호가 편안해진다면 수십 번은 더 할 수 있었다.

청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오늘은 색다른 걸 해 볼까?”

그가 시윤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 순간, 커피포트 스위치가 달칵거리며 올라갔다.

바닥에 꿇어앉은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던 그가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봤다.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선 청호가 머그잔에 담긴 차의 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시윤에겐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시윤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청호의 두툼한 앞섶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호는 ‘색다른 것’으로 구음을 말했다. 속된 말로는 오럴이나 펠라로 칭해지는 그것. 시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건 해 본 적이 없는데. 사실 해 보긴커녕, 상상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 쪽으로는 문외한이었던 터라.

근데 뭐, 첫 관계 때 청호가 저의 전신은 물론, 엄한 곳까지 물고 빨았던 걸 상기하면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그것으로 청호가 편안해질지는 모르겠지만.

“뭐 해?”

지나치게 굼뜬 시윤에 청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 네.”

움찔 어깨를 떤 시윤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청호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마저도 손이 자꾸 엇나가 애를 먹었다. 용케 풀고 나니 검은 드로어즈가 드러났다. 불룩하게 솟은 언덕에 괜히 광대가 화끈거렸다.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왜 이리 남세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입술 끝에 꾸욱 힘을 줬다가 푼 시윤이 조심조심 드로어즈를 내렸다. 그러자 천에 눌려 있던 살덩이가 그 위용을 한껏 뽐내며 바깥으로 쏟아졌다. 발기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크고, 굵었다.

동그란 귀두는 초등학생의 주먹 같았고 기둥은 두툼하고 단단한 게 통 굵은 나무줄기 같았다. 적당히 검붉고 미끈한 것이 청호를 닮아 잘생긴 성기였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마주하니 몹시 낯설었다.

시윤이 다시금 청호를 올려다봤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다. 그냥 자꾸 청호를 바라보게 됐다. 하지만 청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느긋하게 차를 머금으며 시윤의 봉사를 기다렸다.

“…….”

물러날 곳이 없다. 눈을 내리깐 시윤이 벙긋 입을 벌렸다. 그리고 청호의 귀두를 물었다. 통통한 입술이 포근하게 귀두 끝을 감쌌다. 고작 끄트머리만 머금었을 뿐인데 그 생경함이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청호의 냄새가 자욱하게 입 안으로 쏟아졌다. 늘상 느껴 오던 냄새와는 조금 달랐다. 훨씬 짙고 강했다. 완연한 수컷의 냄새였다.

시윤은 야금야금 청호의 성기를 삼켜 갔다. 매우 더딘 속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동그랗고 단단한 귀두만 먹었을 뿐인데 입 안이 가득 찼다. 뭘 더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시윤이 재차 청호를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무감한 낯이었다. 머그잔을 휘휘 돌리며 따분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태 손을 잡거나 포옹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옅은 미소도 띠지 않았고, 저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봐 주지도 않았다.

……이걸로는 부족한가.

시윤이 입을 더 크게 벌렸다. 어떻게든 더 삼켜 보자 발악하는 거였다. 귀두가 완전히 입에 들어오고, 기둥 부분을 3분의 1쯤 삼켜 갔다. 그쯤 되니 코로 숨을 내쉴 때마다 큭큭거리는 소리가 났다. 목젖을 짓누르는 살덩이가 몹시 버거웠다.

그래도 시윤은 참아 냈다. 잠시 적응할 시간을 가지다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머금었다. 목구멍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그때, 청호의 성기가 풍선처럼 훅 부풀었다.

“쿨럭…….”

입술이 찢어지는 듯한 통각에 기겁한 시윤이 얼굴을 빼 버렸다. 고개를 숙인 그가 둔탁한 기침을 거듭했다. 수 초간 그러고 있다가 얼굴을 들었는데, 청호가 짜증 어린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윤이 얼른 다시 성기를 물었다. 비대해진 살덩이는 전보다 훨씬 더 머금기 어려웠다. 그래도 꾸역꾸역 전만큼 삼키려 노력했다. 제 침이 묻어 번들번들한 기둥을 주시하며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었다.

청호의 성기가 이제야 발기한 걸 보니 저 정도는 물어야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훨씬 크고 단단해진 청호의 성기는 넘기 힘든 산이었다. 입이 터질 만큼 물었음에도 남은 부분은 도무지 줄지가 않았다. 눈치 없이 올라오는 구역질도 참기 힘들었다. 생리적인 눈물로 눈알이 축축이 젖어 드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더는 안 될 것 같은데. 이제 어찌해야 하나.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시윤이 흘깃 청호를 바라봤다. 뭐든 좋으니까 다음 명령을 내려 줬으면 했다. 아예 다른 명령이면 더 좋고. 그 모습에 청호가 옅게 실소했다.

“아직 멀었어. 적어도 반은 삼켜야지.”

시윤의 눈을 크게 떴다. 반을 삼키라고? 제가 뱀도 아니고 이렇게 길고 큰 걸 어떻게 삼킨단 말인가. 시윤이 고개를 물렸다. 아무래도 불가능할 성싶으니 다른 걸 하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 순간, 청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러더니 시윤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그대로 훅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컥…….”

시윤이 속절없이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청호의 기둥 끝이 몇 센티만 남겨 둔 채 모두 제 입 안에 있었다. 그걸 멀뚱히 보고 있으면서도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한 탓이다.

멀찌감치 내던져졌던 이성과 사고는 천천히 돌아왔다. 물론 가장 먼저 온 건 통각이었다. 목구멍은 물론 뒤통수까지 뚫린 기분이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윤이 더듬더듬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평소와 달리 팽팽하게 부푼 목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시윤은 이 행위가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머리가 펑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기침은 물론, 큭큭거리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식도부터 기도까지 죄 짓눌려 공기를 들이마실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가이딩인가. 이런 것도 가이딩 효과가 있나.

뻣뻣하게 굳은 시윤이 눈동자만 간신히 들어 청호를 응시했다. 그렁그렁 차올랐다가 떨어지는 눈물에 시야가 희뿌예졌다가 또렷해지길 반복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끈질기게 청호의 얼굴을 찾아냈다.

너무 힘든데, 너무 버거운데, 청호가 만족해하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청호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시윤의 뒤통수를 억세게 움켜쥔 채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꼭 딴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이 행위가 의미 없게 느껴졌다.

시윤이 청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바르작거렸다. 한 손으로는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누르고 있는 청호의 손목을 움켜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청호의 허벅지를 밀어 냈다.

그러자 먼 허공에 떠 있던 청호의 시선이 드디어 시윤에게로 향했다. 시윤이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로 간절히 애원했다. 놔 달라고. 버겁다고. 허나 청호는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더 줬다. 이미 목구멍 가득 차 있던 청호의 성기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우으…….”

눈을 부릅뜬 시윤의 손끝이 쫙 펴졌다가 갈고리처럼 굽었다. 그러다가 다시 펴졌다. 청호를 밀어 내고 싶었다. 오그라든 폐부에 시원한 공기를 넣고 싶었다. 이러다간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청호는 자비롭지 않았다. 시윤의 눈꼬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엄지로 짓이기듯 닦아 냈을 뿐이다.

“큭…….”

눈앞이 점차 흐려졌다. 눈물에 뒤덮였을 때와는 사뭇 다른 흐림이었다. 눈꺼풀도 반쯤 내려왔다. 겨울바람에 언 나뭇가지처럼 뒤틀리던 손가락도 힘을 잃고 아래로 축 처졌다.

그렇게 시윤의 눈동자가 위로 까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청호가 시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확 뒤로 빼냈다.

시윤의 동공이 점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그가 생전 공기를 처음 마시는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오장육부를 쏟아 내려는 기세로 기침했다.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찬 바닥 위로 시윤의 후끈한 숨결이 터져 나갔다. 주책맞게 침이 줄줄 흘렀는데, 그걸 갈무리할 정신이 없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공기가 버거웠다. 웬 괴한이 옹골찬 주먹으로 목구멍부터 폐까지 두들기는 것 같았다.

한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시윤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청호를 바라봤다. 여전히 우람한 성기를 내놓은 그는 시윤과 달리 평온한 낯이었다. 어딘가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헐떡이는 숨을 간신히 갈무리한 시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못 하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못 해요. 죽을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청호가 한발 빨랐다.

“이딴 걸로 안 죽어. 다시 해.”

입천장을 간질이던 말들이 꿀떡 다시 뒤로 넘어갔다.

시윤은 그 후로 근 30분을 청호의 것을 물고 빨아야 했다. 그러나 제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청호는 쉽사리 사정하지 않았다. 컥컥거리며 청호의 것을 물었다가 뱉어 내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시윤의 눈동자에 스멀스멀 악이 차올랐다.

시윤이 전보다 더 뚱뚱해진 청호의 것을 노려보며 손등으로 입을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침에 콧물에 눈물에, 온갖 액체가 뒤섞여 있었으나 그건 나중에 처리할 문제였다.

구음은 정말 지옥 같았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맛본 시윤은 겁에 질린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행동 역시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호는 시윤이 이전처럼 삼키지 못하면 친히 뒤통수를 짓눌러 왔다.

하지만 도통 발전이 없었다. 연습한다고 좁은 입 안과 목구멍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청호의 것은 점점 더 완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고. 첩첩산중이었다.

색색 숨을 몰아쉬던 시윤이 다시 입을 벌렸다. 그래도 이제 반 정도는 무리 없이 삼킬 수 있었다. 시윤은 청호가 다시 뒤통수를 내리누르기 전에 얼른 고개를 움직였다. 한계까지 삼켰다가 빼고, 또 삼켰다가 뺐다.

그 모습에 청호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는 하는데, 썩 색기가 있진 않았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그래, 훈련실에서 훈련하는 병사 같았다. 배운 걸 실습하는 학생 같기도 하고.

그가 시윤의 볼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시윤이 핏발 선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혀를 써.”

시윤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혀를 쓰라니. 살덩이에 짓눌린 혀가 납작하게 짜부라져 옴짝달싹할 수 없는데 어떻게 혀를 쓰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시윤의 머리통을 꿰뚫어 본 청호가 시윤의 볼을 눌러 조였다.

“입 안을 조이고, 혀끝에 힘을 주라고.”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시윤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청호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해가 안 되니 실행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있으니 청호가 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시윤의 머리를 움직이며 허리를 쳐올렸다.

“흐우…….”

시윤은 정말 손톱만큼의 과장 없이 뒤통수가 뚫리는 줄 알았다. 적어도 목젖이 납작하게 짜부라졌거나, 입천장이 갈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시윤이 컥컥거리자 자연히 입이 조여들었다. 바짝 굳은 혀에도 힘이 한껏 들어갔다.

청호가 으음, 목울대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사실 시윤과 어떻게 닿아도 극락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가이딩은 빼고, 육욕에 집중하려 했다.

청호의 허리 짓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목구멍에 쾅쾅 말뚝이 박히는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축축했던 시윤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뒤덮였다. 머리채가 잡혀 드러난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눈알에는 핏발이 섰다. 지속된 마찰에 입가까지 터졌다.

청호는 그 모든 걸 낱낱이, 뚫어지라 바라봤다. 엉망으로 무너지는 시윤을 보고 있으니 가슴 한편이 알싸해지는 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우윽, 큭, 우으…….”

질끈 눈을 감은 시윤이 청호의 무릎과 허벅지를 벅벅 긁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고,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이 무서워 살고자 발악하는 거였다. 그러나 청호는 목구멍 깊숙이 박힌 살덩이를 빼 주지 않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시윤은 사지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청호가 흔드는 대로 나부꼈다. 차라리 이대로 기절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쯤, 청호의 몸짓이 한층 격렬해졌다. 그의 묵직한 고환이 흔들리며 턱을 툭툭 칠 정도였다. 시윤은 어렴풋이 끝이 머지않았음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자욱한 안개 속을 부유하던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큭.”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를 억세게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짧은 신음과 함께 길었던 행위의 마침표를 찍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후끈한 액체가 터졌다. 그것은 삼킨다는 자각도 없이 식도를 타고 숭덩 넘어가 버렸다. 덕분에 맛도,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

근데 다른 게 느껴졌다.

“흐욱…….”

힘없이 풀려 있던 시윤의 눈꺼풀이 바짝 곤두섰다. 배 속으로 넘어가는 청호의 정액이 녹인 철 같았다. 오장육부에 들러붙어 연약한 내벽을 태웠다. 빠질 것 같은 턱과, 쓰라린 입가와, 얼얼한 입 안과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명치께를 움켜쥐었다.

그때, 청호가 시윤을 놓아주었다. 시윤은 기침할 새도 없이 곧장 옆으로 쓰러졌다.

“아흐윽…….”

이 고통은 뭐랄까. 그래, 제가 발현하고 처음 청호의 폭주를 맞이했던 날. 그와 키스했던 때와 비슷했다. 저 없이 전장에 나간 청호에게 폭주가 왔다고 해서 그와 몸을 섞고 정액을 받아 냈을 때와도 비슷했다.

그러니까 제가 C급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라는 거다. 그 사실이 어찌나 서러운지. 오랜만에 감정에 내몰린 눈물이 퐁퐁 샘솟았다. 그 와중에 이 행위가 가이딩이긴 했구나, 싶어 다행이기도 했다.

“흐…….”

시윤은 응축된 청호의 힘이 몸 안에서 방사능처럼 퍼져 나가는 걸 선연히 느꼈다. 처음엔 정액이 넘어가는 식도만 아프더니, 그 후에는 명치가, 다음으론 배가, 그러더니 전신이 아팠다. 종국엔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비릿한 피비린내가 역류했다.

지독한 고통에 몸이 자꾸 동그랗게 말렸다. 누가 속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독을 머그잔에 한가득 따라서 마시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배를 움켜쥔 시윤이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비비고 있는데, 어둑한 그림자 하나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청호였다.

시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시윤은 청호가 자신을 추슬러 줄 줄 알았다. 늘 그랬듯 많이 아프냐고 물어봐 주고, 걱정해 줄 줄 알았다.

근데,

“일어나서 다시 해.”

청호가 내놓은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거였다.

“……네?”

반쯤 쉰 목소리의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 순간에는 눈물은 물론 식은땀까지 다 증발했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청호가 친히 말을 덧붙였다.

“가르쳐 줬으니까 이제 어떻게 하는지 알 거 아냐.”

“…….”

“왜 그렇게 봐? 혼자 할 줄도 알아야지. 내가 언제까지 가이딩을 구걸하듯 받아야 해?”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시윤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구걸하는 가이딩. 그 문장이 가슴께에 쿡 박힌 탓이었다.

시윤이 청호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방금 사정했음에도 여전히 커다란 아랫도리가 시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훌쩍, 울음을 삼킨 시윤이 천천히 청호의 귀두를 머금었다.

“아…….”

욕실 거울 앞에 선 시윤이 자신의 입술을 살폈다. 터진 입가에 피가 붉게 엉겨 붙어 있었다. 약을 듬뿍 바르고 잤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효과가 좋지 않았다.

면봉으로 피딱지를 살살 털어 낸 시윤이 다시 연고를 발랐다. 당장 사흘 후부터 다시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다 나을는지 모르겠다. 따끔거리는 통각에 몇 번이고 눈살을 찌푸리던 시윤이 서투른 치료를 끝냈다.

언젠가 손이 무거울 정도로 잔뜩 사 왔던 연고를 이렇게 쓸 줄이야. 버리지 않고 다 쓰게 되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시윤은 어제, 청호의 정액을 세 번이나 받아먹고야 가이딩을 끝낼 수 있었다. 멍든 것처럼 턱이 뻐근했고, 관자놀이도 아팠다. 혀는 아직도 얼얼하고, 입천장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 후끈거렸다. 목구멍은……

“아아,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거칠게 드나드는 청호의 성기에 그의 정액까지 삼킨 탓에 목젖이 아주 갈기갈기 찢긴 것 같았다. 간단한 문장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속도 아프다. 소화하지 못한 청호의 힘이 명치에 뱀처럼 똬리를 튼 상태였다. 덕분에 어제부터 지금까지 물 한잔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팔을 다쳐서 복귀한 이후로 근 나흘을 쫄쫄 굶은 것이다.

시윤이 푸욱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노려봤다. 눈도 퀭하고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형들이 보면 아사 직전이라며 펄쩍펄쩍 뛸 몰골이다.

좀비 같은 얼굴로 욕실에서 나온 시윤은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영양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통각이 너무 커서 굶주림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은 그게 아닐 테니 영양분을 섭취해 줘야 했다.

영양제 몇 알과 물 한 병을 찾아낸 시윤이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멀끔한 아일랜드 식탁을 보기가 민망했기 때문이다. 저 앞에서 몇 시간이나 꿇어앉아 있었던지. 그때를 상기하자 무릎이 시큰거렸다. 괜히 발목을 턴 시윤이 후다닥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은 시윤이 물병 바닥으로 알약을 으깼다. 손톱만 한 알약을 통째로 삼킬 자신이 없어 가루약처럼 먹을 생각이었다. 사실 물을 마시는 것도 두렵다만, 그건 피할 방도가 없었다.

시윤은 물병에다 으깬 영양제를 타면서도 수시로 가슴께를 문질렀다. 어떻게든 청호의 힘을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이런다고 효과가 있을 리 없지만, 그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물을 삼키는 건 끔찍했다. 입 안에서 찰랑거리는 것도 역했고, 상처 입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흐…….”

눈을 질끈 감고 꿀꺽꿀꺽 물을 삼키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여태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청호의 힘을 소화하는 데 족히 이틀은 걸린다. 그럼 그 이틀 동안 물조차도 이리 고통스럽게 마셔야 한다는 건데……. 미래의 아픔을 가늠했더니 절로 한숨이 올라왔다.

시윤은 매우 느린 속도로 물을 마셨다. 바닥이 보일 때쯤엔 식은땀이 다 났다. 끝내 물을 모두 마신 시윤이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 책상 귀퉁이에 올려진 손목시계와 눈이 마주쳤다.

“…….”

어제 정원과의 통화 이후로 내내 꺼 둔 상태라 다시 켜기가 무서웠다.

아버지는 진짜 저를 군에서 방출할 생각이실까. 어쩌면 이미 모든 처리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분이니까.

형들도 제가 집에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부재중 통화가 적어도 수십 통은 찍혀 있을 것이다. 메시지도 가득 쌓여 있을 게 분명했다. 사이사이 어머니의 걱정도 끼어 있겠지.

그것들을 어찌 처리하나, 고민하니 머리가 띵했다. 그래도 시윤은 시계를 켰다. 미루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는 터라.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메시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다행히 정원의 메시지는 없었고, 대부분 시훈과 시준의 메시지였다. 메시지들에는 걱정과 서운함, 그리고 화도 조금 담겨 있었다.

시윤은 끝나지 않는 활자들을 읽으며 변명을 생각해 냈다. 사실을 낱낱이 고할 순 없고, 적당히 정원의 잘못을 들먹이며 저를 보호할 변명이 필요했다.

시윤이 생각하기에, 어찌 됐든 제 잘못은 아버지에게 무례했다는 것뿐이다. 물론, 청호는 완전히 결백했고. 모두 정원의 오해로부터 연쇄한 일이니 책임 역시 그가 져야 했다.

시윤이 따끔거리는 입술을 움직이며 메시지를 훑는데, 발신인 하나가 시야 깊숙이 들어왔다. 모건이었다.

[집에 갔더니 없더라. 연구실 들러. 밴드 갈게.]

시윤은 그 메시지를 연달아 세 번이나 읽었다.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시윤이 분노의 콧김을 내뿜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쿵쾅쿵쾅 한껏 뒤꿈치를 구르며 방을 나섰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는데, 텅 빈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주름 하나 없는 게 사람이 앉은 흔적일랑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전엔 저기서 청호와 숱하게 같이 밥을 먹었었다. 하루가 멀다고 저녁을 함께했었지. 그의 품에 안겨 책을 읽었던 적도 있었는데.

“……같이 밥 먹은 지도 오래됐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거늘, 매우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괜히 울적해졌다. 청호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틀린 것 같아서.

* * *

시윤은 자그마한 얼굴 가득 분노를 채운 채 모건의 연구실에 들어섰다. 대령이고 뭐고, 제가 아는 비속어란 비속어는 죄다 퍼부어 주겠노라 다짐한 상태였다. 목소리가 엉망이라 제대로 알아들을지 모르겠다만, 이렇든 저렇든 할 말은 해야겠다.

모건도 인간이면 미안해하리라, 생각했는데. 시윤을 본 그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어, 왔어?”

그러더니 보고 있던 홀로그램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

시윤이 터진 입가도 잊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어, 왔어? 라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든 시윤이 쿵쿵 그를 향해 다가갔다.

“대령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아버지께 말씀드렸…… 지금 뭐 보세요?”

시윤이 갸웃, 고개를 뒤틀었다. 모건이 보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며칠 전, 모건의 연구실 복도에서 저와 청호가 정원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아마 CCTV에 찍힌 영상이리라.

모건은 그중에서도 정원이 만들어 낸 원 안에 갇혀 있는 시윤의 모습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시윤이 얼굴을 쭉 앞으로 빼고 동영상을 노려봤다. 이게 뭐라고 그리 열심히 보고 있는 걸까. 딱히 특별할 게 없는데. 혹시 정원의 능력이 신기한가. 아무래도 포스에서 정원만 가지고 있는 능력이니 따로 연구라도 하는 걸까.

모건은 시윤의 질문에도 한동안 동영상만 쳐다봤다. 시윤이 정원의 원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이었다. 3초도 안 되는 그 장면을 반복해 댔다.

“어떻게 했냐, 너?”

모건이 시선을 동영상에 고정한 채 물었다.

“제가 뭘 했는데요?”

시윤이 되물었다.

“네가 푼 거 아니야?”

“뭘요?”

“원수님 원 말이야.”

시윤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말한 ‘원수님’과 ‘원’이 정원의 능력을 뜻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을 ‘풀었다’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원을 풀어? 누가? 내가? 무슨 수로? 아니, 애당초 그게 풀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에이……. 그걸 제가 무슨 수로 풀어요? 아버지가 잠깐 실수하신 거죠.”

“……그래?”

모건이 께름칙한 눈동자로 시윤을 응시했다. 시윤이 곧장 턱을 주억였다. 잠시 침묵하던 모건이 곧 그를 따라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진료 키트가 담긴 이동식 서랍을 끌어왔다.

“그럼 됐다. 팔 보자.”

그 말에 무심코 네, 하고 대답하던 시윤이 뒤늦게 눈을 부라렸다.

“아니, 아니, 대체 왜 그러셨어요. 대령님 때문에 아버지랑 대장님 사이가 얼마나 난감해졌는지 아세요?”

“음…….”

“음? 음, 이 답니까?”

“목소리가 왜 그 모양이냐?”

“…….”

바쁘게 움직이던 시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아, 분노에 차서 오느라 그에 대한 변명을 생각하지 않았다. 등신같이…….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는데, 모건이 시윤의 소매를 톡톡 두드렸다. 옷을 벗으란 뜻이었다.

시윤이 새치름한 눈빛으로 마지못해 옷을 벗었다. 다는 아니었고, 한쪽 팔만 빼내 어깨를 드러냈다. 모건이 매끄럽지 못하게 붙어 있는 방수 밴드를 살살 떼어 냈다.

“잘 아물었네. 이틀 뒤에 실밥 풀자. 근데 입가도 터졌네? 그건 사막에서 다쳐 온 게 아닌 것 같다만?”

“배고파서 음식 때려 넣다가 터졌는데요.”

“그걸 변명이라고…….”

영특하지 못한 변명에 모건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상처를 소독하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모건은 대충 가늠하길, 또 아픈 청호가 이성을 잃고 시윤의 입술을 게걸스레 탐했겠거니 했다. 언젠가 검사하러 왔을 때 청호가 말했다. 시윤과 닿기만 하면 정신이 홀라당 날아간다고. 첫 정사 때는 이성을 다잡을 자신이 없어 그의 손에 총까지 들려 주었단다. 참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모건이 치료를 마무리하는 동안 시윤은 일부러 먼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모건의 기분이 저만큼이나 시궁창이 되려나, 생각하는데 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였다면 아버지를 들먹이며 협박했을 텐데. 지금은 저와 아버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 먹히지 않을 터였다.

시윤의 표정이 더 심술궂어졌다.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그 무엇으로도 모건을 이길 수 없다는 게 몹시 짜증 났다. 푸욱,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는데, 모건이 넌지시 말했다.

“원수님한테 말해서 미안한데. 나도 웬만하면 말하고 싶지 않았거든? 근데 거짓말 아니고, 원수님이 진짜 나 죽이려고 했어.”

정원은 모건이 한창 휴의 머리카락과 시윤의 혈액을 이리저리 뒤섞어 보는 중에 들이닥쳤다. 누구 하나 죽일 듯, 야차 같은 얼굴로 청호가 시윤을 함부로 대하냐, 설마 때리냐, 아니면 싫다는 시윤을 부여잡고 강제로 가이딩을 받냐 캐물었었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모건이 아는 청호는 시윤이 바람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햇볕에 녹진 않을까, 애지중지였으니까. 폭주 때 이성을 잃고 시윤을 험하게 대할 순 있었으나 아마 그 순간뿐일 터였다.

아무튼, 모건이 그렇지 않다 대답했더니 그럼 대체 제 아들이 왜 아프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 만큼 알고 왔으니 그에 응하는 진실을 내놓지 않으면 부대에서 쫓겨날 줄 알라는 엄포도 놨다. 그쯤 되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후부터가 조금 이상한데, 시윤의 능력이 모자라 청호의 힘을 받아 내면 아프다는 소리를 했더니 정원은 그럼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딘가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의 부족함을 안 아버지치고는 지나치게 밝은 얼굴이었다.

“그럼 그냥 죽지 그러셨습니까.”

모건이 당시를 떠올리며 목울대를 움직이는데, 시윤이 한껏 이죽거렸다. 모건이 심통이 잔뜩 난 시윤의 옆모습을 보며 실소했다. 죽으라는 소리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는 걸 보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냥 죽을걸.”

모건은 순순히 죄를 인정했다. 그리고 시윤의 팔뚝에 새로이 밴드를 붙였다.

그에 오리처럼 튀어나왔던 시윤의 입술이 한층 누그러졌다. 모건의 사과에 기분이 조금 풀렸기 때문이다. 시윤은 원체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데 재능이 없었다. 방법 자체를 모른다는 게 맞겠다.

모건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치료를 마무리했다. 시윤이 꼬물꼬물 옷을 다시 껴입었다. 모건이 발로 시윤의 의자를 자신 쪽으로 쑥 당겨 왔다.

“입도 보자.”

“……입은 괜찮습니다.”

“그 꼴로 원수님 만나면, 배고파서 개처럼 처먹다가 입도 터지고, 성대도 맛 갔다는 변명으로는 안 될걸.”

“……개처럼 처먹었다는 말은 안 했지 말입니다.”

시윤이 그래도 슬쩍 몸을 돌려 입술을 내줬다. 모건이 상처를 살피며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키스를 어떻게 했길래 입가가 이리 찢어진 건지. 종일 입술을 비빈 게 아니고서야…….

시윤의 입에 살과 색이 비슷한 밴드까지 붙여 준 모건이 그의 턱을 툭툭 두드렸다.

“입 벌려. 목구멍도 한번 훑어 줄게. 네 목소리 완전 귀신 같아.”

시윤은 군말 없이 입을 벌렸다. 모건이 조그마한 랜턴으로 시윤의 입 안을 살폈다. 붉은 내벽이 여기저기 짓무르고, 헐어 있었다.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청호가 네 입에 침 뱉든?”

그 말에 시윤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진짜 그래 보여서 하는 말이야. 어제오늘 내내 C급이지? 채혈 기계 기록이 그렇던데.”

“예.”

“그럼 키스까지는 무리야. 하지 마.”

“……그럼 대장님이 아프셔야 하잖아요.”

“걔는 괜찮아. 안 죽어.”

“저도…….”

“너는 죽어.”

“…….”

“몸 막 쓰지 마. 알겠냐? 엉?”

윽박지르는 말에 시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건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제 수다는 그만 떨고 입을 벌리란 뜻이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모건이 시윤의 목구멍에다가 분무기 같은 것으로 약물을 분사했다. 알싸하고 텁텁한 게 영 맛이 별로였다. 그래도 통증은 한결 가셨다.

“청호는 어때?”

모건이 의료 기기들을 한쪽으로 대충 밀어 치우며 물었다. 시윤이 모호한 낯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

“손잡아 준다고 그래. 바로 풀릴걸.”

“…….”

시윤이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어제의 청호가 떠올랐다. 괜찮지 않다는 말에 손잡을까요, 키스할까요, 물었더니 조소했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가이딩을 구걸하듯 받아야 해?’

그런 말도 했었지. 잠시 침묵하던 시윤이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 모레 다시 와.”

“예.”

시윤이 힘없이 경례했다. 모건이 됐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시윤은 그렇게 연구실을 나섰다.

“…….”

혼자 남은 모건은 시윤이 앉았던 의자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시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실로 시윤과 청호가 사막에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 일을 어쩌나, 발을 동동 굴렀으니까.

근데 정원과 청호의 만남을 옆에서 지켜보고 나니, 희한하게도 죄의식이 사라졌다.

뭐랄까. 시윤이 다친 게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 같았달까. 당시의 마찰은 시윤을 이유로 하고 있었으나, 모순적이게도 시윤을 배제한 채 이루어졌다. 꼭 정원과 청호,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모건이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제가 모르는 것.

그만큼 짜증 나고, 동시에 설레는 일이 없었다.

* * *

모건의 연구실에서 나온 시윤은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숙소에는 아무도 없고, 그렇다고 집에 갈 수도 없고, 강의는 정원이 모두 휴강시켜 버렸고. 한참 못 했던 클롭스 연구나 할 생각이었다.

연구는 즐거웠다.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이고, 제 본업이기도 했으니까. 오랜만에 집중해서 수십 개의 새로운 클롭스를 등록했다. 등록이 완료되었다는 알림 창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걸 보고 목숨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 후엔 미적지근한 물에 부순 영양제를 타 먹었다. 모건이 한 번 봐준 덕인지 목 넘김이 전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물을 홀짝이며 멍하니 있던 시윤이 포스의 군 사이트에 접속했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보기 위해서였다. 정원이 제 준위 자격을 박탈하겠노라 엄포를 놨으니, 제가 진짜 하루아침에 민간인이 되어 버렸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연구실까지 무난하게 들어온 걸 보면 아직인 것 같기는 한데. 그새 정리됐을지도 몰랐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자신의 이름을 써넣고 서치 버튼을 눌렀다.

[이름: 채시윤]

[계급: 준위(WO)]

[나이: 26]

[종(種): 퓨어 가이드]

“하아…….”

정보를 확인한 시윤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직, 아직은 준위다. 아직은 포스의 군인이란 말이다.

정원에게 할 테면 하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다만,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군에서 방출당하는 건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나이가 차서, 더는 전장에서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어서, 가족에게 사정이 생겨 군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서 등등의 이유로 제대한 거면 모를까.

방출은 명령 불복종, 탈영, 동료 살인 등의 이유로만 행해지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다시 군에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그럼 청호의 가이딩은 어찌한다. 전장에 함께 나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저를 만나기 위해선 친히 부대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면구스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눈을 내리감은 시윤이 의자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언젠가 정원이 선물해 준 고급 의자가 등받이를 부드럽게 젖히며 시윤의 등을 감쌌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됐을까. 무엇부터 잘못됐나. 역시 모건을 그렇게 용서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머리라도 한 움큼 쥐어뜯고 올걸.

“아오…….”

시윤이 몇 시간 전을 후회하며 허공에다 주먹을 내질렀다.

시윤은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연구실에서 나왔다. 예전이었으면 뉘엿뉘엿 땅거미가 질 때쯤 얼른 숙소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청호와 마주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실에서 괜히 이것저것을 찔러 보다 느지막이 나왔다.

어두워진 부대는 낮보다 추웠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가을에 접어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겨울이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추운 건 싫은데. 어깨를 움츠린 시윤이 벅벅 자신의 팔뚝을 문질렀다. 열을 내고자 무심코 한 행동인데, 팔뚝이 찌릿, 뭐 하는 짓이냐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오늘 벌써 네댓 번째 반복하는 실수였다.

“으…….”

시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다친 걸 왜 자꾸 잊는지 모르겠다. 팔뚝을 살살 도닥인 시윤이 멀찌감치 보이는 숙소동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가장 꼭대기 층에 불이 들어왔나 확인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청호는 아직 안 들어왔나. 항상 이맘때쯤에 들어왔었는데. 저녁은 먹었으려나. 폴에게 메시지를 보내 볼까. 식사 전이라면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하면 어떠려나.

응어리진 감정을 풀기 위해선 대화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사과겠지만, 어쨌든.

숙소동 앞에 멈춰 선 시윤이 손목시계를 밝혔다. 그때,

“채 준위?”

익숙한 목소리가 알은체를 해 왔다. 시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딜런이었다. 아니, 딜런을 비롯한 에로아스 부대. 선봉엔 청호가 서 있었다. 그들은 어딘가 상기된 낯에 방금 씻은 듯 축축한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훈련실에서 진탕 구르다 온 모양이었다.

“어, 아…….”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리던 시윤이 뒤늦게 경례했다. 시윤보다 낮은 계급의 병사는 함께 경례했고, 높은 계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시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팔은 괜찮아요?”

지척까지 다가온 알렌이 안부를 물었다.

“아…… 네……. 거의 다 아물었어요.”

시윤이 다친 팔의 소매를 쭉쭉 잡아 늘였다. 이미 상처고 밴드고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든 더 숨기고 싶었다. 그다지 명예롭게 다친 게 아닌지라 부끄럽기만 했다.

“다행이네요.”

알렌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이 그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사이, 청호가 저벅저벅 코앞까지 다가왔다.

“마침 네가 생각났는데.”

“제, 제가요?”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생각이 났다니. 자못 낭만적인 말이었다. 청호의 앞에서 유독 주책맞은 광대가 봉긋, 위로 솟으려는 차였다. 청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기쁨도, 반가움도 없는 낯이었다. 검은 눈동자는 차게 식어 있었고, 입매도 단단히 굳어 있었다. 말과 달리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청호가 말한 ‘생각’이 보고 싶었다거나, 저녁을 같이하려 했다거나, 함께하지 못한 하루를 궁금해했다는 게 아니라, 가이드가 필요했다는 말이라는 걸.

몇 번 의미 없이 눈을 끔뻑이던 시윤이 부러 힘껏 입꼬리를 올렸다. 터진 입술이 따끔거리긴 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저도요. 저도 대장님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청호와는 사뭇 다른 이유였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은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그저 사이좋은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로 보겠지.

“…….”

청호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가소롭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뱀처럼 영악하다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세 개 다일 수도 있지.

시윤은 그걸 오롯이 봐 놓고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청호의 등 뒤에 선 병사들은 시윤의 웃음만 볼 수 있을 테니까. 괜히 서먹한 티를 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입을 모아 우우- 야유했다.

“대장님, 낯섭니다! 우리 대장님 맞습니까?”

“너무 준위님만 챙기시는 거 아닙니까?”

모두 하나같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시윤이 숫기 없는 새색시처럼 고개를 떨궜을 때였다. 빙글 뒤를 돈 청호가 비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부러워?”

“아무렴요.”

“그럼 너희도 가이드로 발현해. 내가 매일같이 품어 줄 테니.”

그 말에 병사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나 큰 박장대소인지 먼발치서 조용히 청호를 구경하던 일반 병사들이 움찔 어깨를 떨 정도였다.

그러나 시윤은 웃지 못했다. 이유는 저도 몰랐다. 한낱 농담일 뿐인데, 그걸 잘 아는데, 기분이 울적해졌다. 반려 가이드가 아닌 저는 청호에게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겠구나, 싶어서. 또 구태여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가이드이기만 하면 되는구나, 싶어서.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 제가 반려 가이드가 아니었으면 청호와 말도 섞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처럼 그의 얼굴을 보겠다고 격납고의 인파 속에서 까치발을 들고 있겠지. 모건과 체스를 두며 청호를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종알거렸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시윤은 병사들의 박장대소가 돌팔매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꾸 어깨를 움츠리게 됐다. 그때, 알렌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듣는 채 준위님 놀라시겠습니다. 대장님 농은 항상 농 같지가 않지 말입니다.”

그 말에 등을 돌린 청호가 시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정하게 물었다.

“놀랐어?”

“아, 아니요.”

시윤이 머리를 흔들어 부정했다.

“아니래.”

청호가 굳이 한 번 더 시윤의 대답을 되뇌며 알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뭐…….” 씩 웃은 알렌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내내 잠자코 있던 폴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대장님.”

“내일은 됐어. 내가 부를 때까지 나타나지 마.”

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은 청호가 이만 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에로아스 병사들이 동시에 착, 뒷발을 붙였다. 가슴을 펴고 턱을 당기고 청호에게 경례했다. 청호는 그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숙소동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의 팔에 감긴 시윤이 끌려가듯 허둥지둥 발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청호가 시윤의 어깨에 있던 팔을 내렸다. 그 손은 그대로 시윤의 허리에 안착했다. 길고 두꺼운 팔이 시윤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러잖아도 목석같이 굳어 있던 시윤이 이제는 아예 시체처럼 딱딱해졌다.

이 정도 스킨십은 자주 해 온 것인데 왜 이리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시윤이 굳은 어깨를 풀기 위해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청호가 엘리베이터 문으로 그런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엘리베이터는 고요하게 비상했다. 소리 없는 청호의 숨결과, 한 것도 없는데 가쁘게 움직이는 시윤의 숨결이 섞이지 못하고 나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띵, 맑은 전자음이 울렸다. 청호가 시윤을 밀 듯 숙소 현관으로 이끌었다. 시윤은 저도 모르게 뒤꿈치를 끌었으나, 그따위 반항으로 청호의 품을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윽고 숙소 문이 열리고, 순식간에 다시 닫혔다. 종일 비워 둔 숙소는 어둡고 추웠다. 시윤이 신발을 벗으며 은근슬쩍 청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홈 슬리퍼에 발을 꿰는데 몸이 쑥 뒤로 밀렸다. 등이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헉…….”

아프진 않았다. 다만 심하게 놀랐을 뿐. 청호의 염력을 몸으로 경험하는 게 오랜만이라 등줄기에 소름이 다 돋아났다. 시윤이 토끼 눈으로 공중에 뜬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 바닥에서 한 뼘쯤 떨어진 발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먼 옛날 천장에 붙어 있던 사이먼이 떠오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건가, 아니면 겁 많은 제 상상력이 지나친 건가.

시윤이 손과 발을 꿈틀거리고 있는데, 청호가 나지막이 명령했다.

“벗어. 하게.”

짧고 간단하고 명확한 명령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벽에 붙들려 있던 시윤이 바닥에 안착했다. 시윤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되물었다.

“지금, 지금요?”

어쩌면 오늘 그와 동침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상하긴 했다. 근데 그게 현실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는 게 맞겠다.

당황 가득한 시윤을 보는 청호의 미간 위로 야트막한 홈이 파였다.

“그럼? 아까부터 네 생각 하고 있었다니까.”

짜증 어린 문장에 시윤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의 혹사 이후 간신히 피딱지가 앉았던 입술이 다시 터져 비릿한 맛을 냈다. 헌 입 안도 따끔거렸고, 목구멍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후끈했다.

거절하고 싶었다. 동시에 거절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프다. 찢어진 팔부터 청호의 성기를 물었던 입, 목구멍과 명치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더군다나 여전히 C급이다. 이대로 청호를 받으면 분명 코피를 쏟으며 까무러칠 터였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 가이드인데. 나만 이 사람을 가이딩할 수 있는데. 거절하면 청호가 다른 가이드를 찾아 밤을 보낼 것 같았다.

‘그럼 너희도 가이드로 발현해. 내가 매일같이 품어 줄 테니.’

그 말이 귓구멍에 웅웅 메아리쳤다. 청호의 품에 제가 아닌 다른 이가 안겨 있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눈알이 다 화끈거렸다. 그건 정말, 정말 끔찍이도 싫었다.

시윤이 따가운 목구멍으로 꿀꺽, 거절을 삼켰다.

“먼저 씨, 씻고 오겠습니다. 종일 바깥에 있어서…….”

그가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등을 돌렸을 때였다.

“그럼 같이 씻지.”

청호가 큰 보폭으로 성큼 뒤에 붙어 섰다. 놀란 시윤이 팩 뒤를 돌아봤다.

“훈련실에서 씻고 오신 거 아녜요?”

빠르게 말을 쏜 그가 숨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이 나갔다.

“…….”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청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었다. 밤보다 더 검은 눈동자였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그의 눈동자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청호가 시윤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의 그림자가 시윤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청호가 턱을 부여잡고 다시 위로 끌어 올렸다. 고압적으로 시선을 맞춘 그가 낮게 으르댔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제대로 말해.”

“…….”

시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청호에게 제 속을 꿰뚫린 것 같아 부끄럽고, 또 미안했다. 어쩔 줄 모르고 눈알만 굴리는데, 청호가 시윤의 턱을 버리듯 놨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멀어지는 청호를 넋 놓고 보던 시윤이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쥐었다.

“싫지 않아요.”

“…….”

“같이…… 씻어요.”

속삭이듯 나온 말에 청호가 옅게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로 손을 비틀어 시윤의 손목을 움켜쥔 그가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아, 흐…… 으읏, 흑…….”

시윤의 손끝이 매끈한 타일 벽을 벅벅 긁어 댔다. 뭐라도 잡고 싶은데, 물방울만 가득한 벽이라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한 상체는 앞으로 휘청거렸다. 그러면 뒤를 헤집던 두툼한 살덩이가 혼이라도 내듯 전보다 더 거칠게 배 속을 뭉갰다.

“아흑!”

그 타격감에 놀란 시윤이 배를 움켜쥐고 몸을 옹송그렸다. 그러자 겨드랑이 아래로 청호의 손이 들어오더니 어깨가 갈고리에 꿰인 듯 잡혔다. 그 찰나, 시윤이 흘끔 자신의 배를 확인했다. 행여나 청호의 성기에 얻어맞은 아랫배가 터져 창자를 쏟아 내진 않았나, 싶어서.

다행히 배는 무사했다. 난도질당하는 듯한 통각은 여전했지만.

청호는 시윤의 상체를 자신 쪽으로 당기며 쿠욱, 쿡 힘차게 성기를 쑤셔 넣었다.

“으읏!”

“하아……. 그만 좀…… 조여.”

청호가 길게 신음하며 시윤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시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목 언저리에 흩어지는 그의 숨결이 어찌나 뜨거운지. 델 것만 같았다.

찰박찰박, 물기 때문에 살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났다. 더군다나 사방이 막힌 샤워 부스 안이라 웅웅 울리기까지 했다.

청호는 지금의 환경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사이사이 스민 시윤의 신음과 울음 역시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촉촉하게 젖어서 반짝이는 시윤의 살결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보기에도 부드럽고 매끄러운 피부는 만지면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유독 탱글탱글한 볼기와 허벅지를 잘 발라내어다가 종일 손안에서 굴리고 싶을 정도였다.

청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손안 가득 시윤을 쥐고 있음에도 부족했다. 가이딩에 대한 갈망은 진즉 충족됐다. 그런데도 만족을 모르고 시시각각 욕심을 키워 갔다.

한 손으로는 시윤의 가슴팍을, 또 한 손으로는 마른 골반을 쥔 청호가 성기를 귀두까지 빼냈다. 뻑뻑한 뒷구멍이 나가지 말라는 듯 달라붙어 왔으나 간신히 떨쳐 냈다.

그리고 시윤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다시 쿠우욱, 깊숙이, 아주 깊숙이 쑤셔 넣었다. 시윤의 엉덩이가 납작해지고, 무릎이 엉키고, 뒤꿈치와 발가락이 스칠 정도로 깊숙이.

“아…….”

시윤이 가녀린 신음 한 줄기를 흘리며 목을 뒤로 꺾었다. 덕분에 그의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청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게 어찌나 투명하고 맑은지, 꼭 보석 같았다. 평소 물욕이라곤 없는 편인데도 매우 탐이 났다. 바닥으로 떨어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시윤의 턱을 움켜쥔 청호가 고개를 조금 더 뒤로 젖히게 했다. 그리고 혀를 내어 개처럼 눈물을 핥았다. 그로도 모자라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도 샅샅이 핥았다.

시윤의 눈물은 전혀 짜지 않았다. 삽입을 시작했을 때부터 흘린 터라 짠 기는 진즉 다 빠지고, 청량하고 성스럽기만 했다.

시윤이 청호의 혀를 피해 고개를 뒤틀었다. 싫다기보다는 두려웠다. 혀가 어찌나 맹렬하게 움직이는지, 곧 눈알을 핥고 그로도 모자라면 눈알을 파내 알사탕처럼 입에서 굴릴 것 같았다.

왜 그렇게까지 겁을 먹냐,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뒷구멍을 헤집는 성기와 몸을 옭아맨 손, 뜨거운 숨결, 창살처럼 내리꽂히는 시선을 온몸으로 마주하고 있으면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맹수에게 깔린 듯한 위압감이 사고를 지배했다.

청호의 혀는 끈질기게 시윤의 눈꼬리를 따라갔다. 그에 시윤의 발버둥이 정도를 모르고 심해졌다. 청호가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러더니 시윤의 골반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성기를 세게 처박았다.

“아흑!”

시윤이 비명 같은 신음을 흘리며 자지러졌다. 머리가 아래로 고꾸라지며 머리칼에 매달려 있던 물들이 방울이 되어 흩날렸다. 청호가 죄 먹어 치웠던 눈물은 금세 다시 얼굴을 적셨다. 벌어진 입으로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타액이 볼썽사납게 흘러내렸다.

“대장……님, 너무…… 흐으, 깊, 어요……. 너무…….”

시윤이 자신의 가슴팍을 감싼 청호의 손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정말 버겁다는 걸 알아 달라는 간절함에서 말미암은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이 행위를 당장에 멈추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직무 유기다. 시윤이 바라는 건 자신이 10분이라도 더, 5분이라도 더 버틸 수 있도록 조금의 여유를 허락해 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청호는 늘 그렇듯, 자비라곤 없었다.

“아직 다 안 넣었어.”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니 구멍 깊은 곳을 파내듯 쿡쿡 힘차게 찔러 올렸다.

“으읏, 흐, 아…… 흐으으…….”

“후우…….”

옹골찬 귀두에 후려 맞은 배 속이 저렸다. 빠듯하게 벌어진 뒷구멍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고, 허벅지는 파르르 떨렸다. 종국엔 무릎이 꺾이며 서 있는 것도 버거워졌다.

시윤이 얼른 다리에 힘을 줬다. 하지만 서기도 쉽지가 않았다. 청호와 키 차이가 워낙 큰 터라 그의 성기에 꿰여 있으면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뒤꿈치를 한껏 추켜올리고 발가락으로 버텨야 하는데, 물에 젖은 바닥이 너무 미끄러웠다. 그 상태로 청호의 성기를 받아 내려니 딱 죽을 맛이었다.

곱게 누워서 고통만 삼키면 됐던 침대 위가 얼마나 편했는지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가지 잃은 나뭇잎처럼 나부끼는 시윤에 청호가 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성기를 단숨에 뽑아냈다. 놀란 구멍이 벙긋 벌어졌다가 오물오물 모여들었다.

분명 안에 있을 땐 그렇게 버겁고, 무겁고, 아플 수가 없었는데 나가고 나면 화끈거리는 통각과 함께 묘한 상실감이 들었다. 벌름거리는 구멍 틈으로 찬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것 역시 적응하기 어려웠다.

엉거주춤하게 선 시윤이 색색 숨을 몰아쉬며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에 묻어나는 물기가 말 그대로 물인지, 아니면 식은땀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때, 허리가 잡히더니 몸이 반 바퀴 빙 돌았다. 저와 마찬가지로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은 청호가 단단한 상체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시윤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거였다.

또 아래를 물라고 지시하려나. 아니면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냐고 꾸지람을 하려나.

“…….”

예상과 달리 청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손으로 시윤의 허벅지를 감싸 쥐었다. 반대 손으로는 엉덩이를 받쳤다. 그리고 그대로 위로 올려붙였다. 시윤의 마른 몸이 속절없이 위로 떠올랐다.

“아!”

놀란 시윤이 본능적으로 청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곧 등 뒤로 차가운 타일이 닿아 왔다. 아예 벽에 붙여 놓고 허리 짓을 할 심산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랑이가 벌어지더니 움찔거리는 뒷구멍에 큼지막한 귀두가 맞물렸다.

“으응…….”

근 한 시간 동안 혹사당했던 뒷구멍은 큰 무리 없이 청호의 성기를 삼켰다. 그렇다고 그 충격과 아픔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예민한 점막이 쓸리고, 벌어지고, 그를 통해 스며오는 청호의 힘은 아마 죽을 때까지 적응하지 못할 터였다.

“흐…….”

미간을 찌푸린 시윤이 어떻게든 고통을 참아 보려 발가락을 꼬물거리는데, 청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흣! 아, 흐, 으읏, 윽…….”

입술을 앙다문 시윤이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귓불이 어깨를 스칠 정도였다. 그러자 청호가 시윤의 뒷머리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고개가 저절로 올라갔다.

시선이 맞닿았다. 청호의 검은 눈동자에 일그러진 시윤이 낱낱이 비쳤다. 청호는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공격 같은 시선이었다. 족쇄 같기도 했고, 폭우 같기도 했다.

그래서 시윤은 그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고통으로 눈물을 줄줄 쏟으면서도 눈조차 깜빡이질 못했다.

“흐윽, 흐, 으읏, 아…… 읏.”

“하…….”

찰박, 찰박,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청호의 성기가 전보다 더 부풀었다. 사정을 준비하는 거였다. 그것을 느낀 시윤이 청호의 목 뒤로 넘긴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지나치게 들어간 힘에 터진 팔뚝이 시큰거렸지만, 뒤를 쑤시는 성기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청호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마른 몸에 그나마 살이 붙어 있는 곳인데, 죄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 청호가 시윤의 받치고 있던 손을 슬쩍 내렸다. 그러자 지지대를 잃은 몸이 쑥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바닥까지는 아니었고, 반 뼘 정도였다. 근데 차라리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나았겠다, 싶을 정도였다. 단단히 곧추선 청호의 성기에 그대로 처박히는 것보다는, 분명 그게 더 나았다.

“우윽!”

뻑뻑한 뒷구멍에 미처 다 들어오지 못하고 있던 청호의 성기가 뿌리까지 모두 들어왔다. 진짜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의 귀두가 명치를 가로질러 목구멍까지 올라온 듯했다. 차라리 몸뚱이에 말뚝이 박히는 게 덜 고통스러울 터였다.

기겁한 시윤이 몸을 바르작거리는데, 그 순간 청호가 정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흐윽…….”

“하아…….”

시윤이 버석하니 굳었다. 깊은 삽입에, 울컥울컥 배 속을 채워 가는 정액에, 핏줄을 타고 흐르는 청호의 힘까지.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심장이 멈추고, 폐가 오그라들었다.

고통을 참지 못한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맞물려 있던 시선이 자연히 빗나갔다.

그게 못내 아니꼬운 청호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더니 혼이라도 내듯, 저돌적으로 입술을 붙여 왔다.

오늘 정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개의 숨결이 뒤엉키는 건. 섹스를 시작한 지 제법 긴 시간이 흘렀으나 키스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전, 청호에게 이끌려 욕실에 들어온 시윤은 바지런히 움직였다. 옷을 벗고, 몸을 적시고, 거품을 내 몸을 닦았다. 그동안 청호는 그런 시윤을 감시하듯 지켜봤다. 훤히 드러난 알몸뚱이가 부끄럽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 후 물로 거품을 헹구는데, 청호가 뒤로 다가왔다. 그대로 둔부가 벌어지고 꽉 아물린 구멍 위로 귀두가 닿았었다. 기겁한 시윤이 “대장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직…….” 애원해 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키스도, 애무도 없는 섹스였다. 아니, 가이딩이었다. 덕분에 시윤의 성기는 정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축 늘어진 채 한 번도 발기하지 못했다.

근데 이상하지. 맞물리는 입술에, 뒤섞이는 혀에 성기가 꿈틀거렸다. 발기라고 하기엔 뭣한 수준이었지만 분명 반응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게, 청호의 키스는 온갖 자극의 집합체이다. 공격적이고, 짙고, 퇴폐적이며 깊다. 질척하게 뒤섞이는 혀와 타액이 야하기 그지없었다. 거칠게 비벼지는 입술 점막은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웠다. 목구멍으로 쏟아지는 힘만 아니었다면, 배 속에서 터진 그의 정액만 아니었다면 좋다고 혀를 빨아 댔을지도 몰랐다.

“으응…….”

목구멍과 뒷구멍으로 스며 오는 청호의 힘에 시윤이 목을 움츠렸다. 명치에 압정이 쌓이는 것 같다. 어제 몇 번이고 받아먹은 그의 정액이 아직 핏줄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거늘. 그 위로 새로운 고통이 쓸데없이 차곡차곡, 가지런히 쌓여 갔다.

정액을 모두 쏟아 낸 청호가 허리를 느리게 움직이며 후희를 즐겼다. 그 몸짓에 용암 같은 정액이 더욱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 왔다. 반절은 구멍 밖으로 삐직삐직 흘러나가 사타구니에 엉겨 붙었다. 청호는 집요하게 움직이면서도 시윤의 혀를 빨았다가, 치열을 훑었다가, 입천장을 뚫겠다는 듯 혀를 놀렸다.

무차별한 공격에 시윤의 눈꺼풀이 가물가물 힘을 잃었다. 몸이 무너지는 게 시시각각 느껴졌다. 곧 까무러치거나, 코피를 쏟을 듯했다.

C급 주제에 이만하면 정말 많이 버틴 거였다. 청호가 평온한 상태라 다행이지, 폭주 중이었거나 힘이 쌓인 상태였으면 진즉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했을 터였다.

마침내 청호의 입술이 떨어졌다. 뒤에 쑤셔박혀 있던 성기 역시 빠져나갔다. 시윤은 지지대 삼고 있던 청호가 멀어지자마자 주르륵 벽을 타고 쓰러졌다. 그래도 볼썽사납게 엎어지진 않았다. 벽에 기대앉은 채로 가쁜 숨을 골랐다.

비록 갈무리하지 못한 다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지만, 뒷구멍에서 청호의 정액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눈꺼풀에 아롱아롱 맺힌 눈물이 무겁기 그지없었지만, 현재로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매우 힘에 부쳤다.

멍하니 바닥을 보던 시윤이 생각 없이 팔뚝을 매만졌다. 시큰거리는 통각이 무시할 만한 수준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손끝에 시뻘건 피가 묻어났다. 시윤이 흘깃 눈만 움직여 자신의 팔을 쳐다봤다. 밴드 위로 스멀스멀 붉은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먹을 너무 세게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팔뚝에 힘이 들어가면서 기워 놨던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리라.

모건 대령님한테 한 소리 듣겠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미동 없던 청호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싶더니 겨드랑이 아래로 쑥 손이 들어왔다. 맥없이 들린 시윤이 그 손에 끌려갔다. 종착지는 세면대였다. 청호는 널찍한 세면대에 시윤을 빨래 걸듯 엎어 놓았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시윤이 느리게 눈을 끔뻑이는데, 엉덩이가 벌어졌다. 퉁퉁 분 탓에 반쯤 감겨 있던 시윤의 눈이 부릅뜨였다.

“아, 또, 또 해요?”

낯빛은 물론, 입술까지 하얗게 질린 시윤이 더듬더듬 말을 절었다.

“응.”

청호가 더할 나위 없이 단조롭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시윤은 할 말을 잃었다.

청호가 농익은 시윤의 엉덩이를 양쪽 엄지로 벌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구멍이 벌름거리며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피는 비치지 않았다. 계속된 혹사로 봉긋하게 부은 구멍은 쓰임새가 아쉬울 정도로 맛깔나게 생겼다.

마른 입술을 핥은 청호가 엄지로 주름을 짓누르듯 쓰다듬었다. 그러다 가끔 제가 싸지른 정액에 미끄러져 엄지가 구멍 속에 푹 파묻히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시윤의 늘씬한 등줄기가 파드득파드득 튀어 올랐다.

그 반응이 꽤나 재미있어 일부러 손가락을 깊숙이 넣어 휘저었다. 손가락에 감겨 오는 내벽이 뜨겁고, 쫀쫀했다. 시윤의 엉덩이가 확 조여들었다. 통통한 볼기가 가운데로 모이며 탱글탱글하게 솟아올랐다.

“싫어?”

청호가 퍽 자비로이 물었다. 꼭 싫다고 말하면 물러나 주기라도 할 것처럼.

시윤이 입술을 겹쳐 문 채 고민했다. 사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제 아버지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나 이리 모질게 구는 것인데, 그걸 회피하면 결국 제자리일 터였다. 또, 청호에게 무능력한 가이드로 낙인찍히는 것도 싫었다.

‘내가 언제까지 가이딩을 구걸하듯 받아야 해?’

그가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께에 쿡 박혀 있었다.

“……아니요. 좋아요.”

시윤이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윤은 제 대답에 청호가 만족스러워할 줄 알았다. 근데 어째서인지 비죽 올라가 있던 청호의 입꼬리가 한일자로 굳었다.

시윤이 갸웃 고개를 뒤트는데, 청호가 찰싹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럼 잘 좀 해 봐.”

예상치 못한 타격에 화들짝 놀란 시윤이 어깨를 튕겼다. ‘잘’ 하라고? 그게 뭔지 모르겠다. 가이드는 A급이면 잘하는 거고, 시험 성적 역시 A면 잘하는 것이고, 사격은 과녁의 중심을 맞히면 잘하는 것이다. 근데 섹스는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걸까. 배운 적이 없어 모르겠다.

시윤이 코를 훌쩍이며 고민하는데, 청호가 구멍 위로 귀두를 가져다 댔다. 답을 원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풀릴 대로 풀린 뒤가 부드럽게 귀두를 감쌌다. 하지만 내벽이 죄 쓸리고 헌 상태라 고통은 엄청났다. 고개를 돌려 청호를 보고 있던 시윤이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으읏…….”

그래도 세면대가 있어 다행이었다. 온전히 홀로 서 있을 땐 후들거리는 다리가 무너지면 어쩌나, 벽에 처박히면 어쩌나,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녔는데. 지금은 세면대에 걸쳐져 발이 공중에 뜨든 말든, 몸이 앞으로 쏠리든 말든 상관없었다.

청호는 처음부터 퍽퍽 빠르게 몸을 치댔다. 질끈 눈을 감은 시윤이 세면대를 세게 움켜쥐었다. 팔뚝의 상처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엇이든 잡고 있지 않으면 그만하자며, 살려 달라며, 너무 아프다며 엉엉 울어 버릴지도 몰랐다.

“아, 읏, 으윽, 큭, 아!”

세면대에 이마를 파묻은 시윤이 얼른 이 행위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가슴 아래로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그대로 상체가 훌쩍 들렸다. 등 뒤로 청호의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뜬 시윤이 천장과 벽의 이음새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청호가 특유의 저음으로 속삭였다.

“앞에 봐.”

……앞?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명령에 시윤이 무심코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큼지막한 거울에 제 모습이 낱낱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섹스 중의 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마 경험이 숱하게 많은 이도 땀에 젖어 신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은 많지 않으리라.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벌겋게 들뜬 얼굴이었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눈물에 짓무른 눈두덩, 실핏줄이 잔뜩 선 눈알, 붉게 익은 코끝, 터진 입가 사이에 고인 피, 벌어진 입술 새로 줄줄이 터져 나오는 신음.

다음으로는 마른 몸이 보였다. 목덜미에는 청호의 잇자국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팔뚝 밴드에서 스며 나온 피는 핏줄기가 되어 손등까지 흘러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언뜻언뜻 보이는 덜렁거리는 성기라니.

천박하고 난잡한 광경이었다. 청호와의 접합부는 보이지도 않는데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시윤이 얼른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청호가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 왔다. 갈라진 틈으로 혀를 넣기도 했다.

“눈 떠.”

“흐으, 읏, 아, 안…… 돼요.”

시윤이 훌쩍거리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눈이 전보다 더 질끈 감겼다. 청호의 미간이 구겨진 건 당연지사였다.

“눈 뜨라고.”

“아흑, 읏! 큭, 윽…… 싫, 싫어요, 흐으, 읏!”

시윤이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시윤도 본디 어느 정도 고통에 익숙했다. 감기에도 잘 걸렸고, 조금만 무리하면 몸살이 왔으며 살짝만 부딪쳐도 멍이 들거나 접질리기 일쑤였으니까. 가이드로 발현하고부터는 청호의 힘을 흡수하면서 하루걸러 하루 아팠다.

막 대해지는 것에는 익숙지 못했지만, 익숙해질 자신이 있었다. 제 몸을 함부로 주무르고 씹는 청호에게도 언젠간 익숙해질 수 있을 터였다.

근데 수치는 아니다. 정말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능력자를 꿈꿔 오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나 이런 장면은 없었다. 제가 지나치게 순수하고 무지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시윤이 머리를 땅으로 내리는데, 청호가 턱을 우악스레 잡아 쥐었다.

“눈 감지 마.”

경고는 짧았으나 강력했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턱이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으면 정말 턱을 부술지도 몰랐다. 턱쯤이야 부서져도 가이딩하는 데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니 말이다.

시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눈을 떴다. 희멀건 몸뚱이가 매가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대, 대장님, 이건 너무 부끄럽, 아우윽…….”

시윤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입술을 달싹이는데, 입 안으로 청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더 이상의 반항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청호의 손가락은 그 주인을 닮아 단단하고 길었다. 마디가 툭 도드라져 있었고, 적당히 두꺼웠다. 그런 손가락 두 개면 시윤의 입 안이 가득 차는 거야 당연지사였다.

청호는 거울 속으로 시선을 집요하게 맞춰 왔다. 수치심에 붉게 달아오른 시윤의 모습을 감상하는 건지, 아니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나 감시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윤은 애써 자신의 모습을 외면했다. 청호만 보려고, 그의 눈동자만 응시하려고 노력했다. 격렬한 섹스 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청호였지만 눈물에 젖은 저의 비참한 얼굴보다야 나았다.

정사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 후로 욕실에서 두 번이나 더 했다. 시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런데도 청호는 끝을 몰랐다.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진 시윤을 들어다 거실 침대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윤은 청호가 저를 재워 주려나 보다, 하고 우매한 생각을 했다.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은 새벽이었으니까. 근데 곧장 다리가 벌어지고, 청호의 성기가 다시 뒤를 채웠다.

정액으로 가득 차 있던 뒤가 울컥울컥 속에 든 걸 쏟아 냈다. 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쯤 되니 청호가 뒤를 쑤시는 게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강렬하게 발광하던 통각점이 고장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스며드는 청호의 힘이었다. 피가 바글바글 끓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데도 몸이 부들부들 경련할 정도였다.

눈앞이 흐려졌다. 찰박찰박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득하니 멀어졌다. 그리고 청호가 네 번째 사정을 시작했을 때, 콧잔등이 후끈해진다 싶더니 코피가 터졌다. 한쪽 콧구멍에서 핏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시윤은 어째서인지 그 코피가 반가웠다. 청호가 저를 불쌍히 여겨 행위를 멈추어 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제가 버티지 못할 터였다. 이미 정신이 깜빡깜빡 점멸하고 있었다.

코피는 일종의 신호다.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신호. 또, 이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신호.

시윤이 힘없는 손으로 코 아래를 훔쳤다. 손바닥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가 가냘픈 시선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이것 보세요. 저 아파요. 코피 나요. 충분히 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인제 그만 해요. 아니면 까무러칠 거예요. 그런 의미가 담뿍 담겨 있었다.

하지만 청호는 늘 예상을 빗나가는 사람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가 시윤의 뒷덜미를 감싸더니 자신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단숨에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됐다.

“정신 놓지 마. 버텨.”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에 시윤의 담갈색 눈동자가 버석하니 굳었다. 버티라니. 여태 버티고 버텼는데 또 버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연구센터로 데려가 줄 테니 그때까지 버티라는 걸까, 하고 희망을 품어 봤으나 뒤를 헤집는 성기가 여전한 걸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

신음조차 상실한 시윤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알 굵은 눈물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이게 진짜 가이딩이 맞나. 꼭 폭주 때만 스킨십을 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게 아니면 조금 적당히 할 순 없나. 혹 가이딩이 아니라 섹스인가. 반려 사이에서 숱하게 이루어지는, 애정과 쾌락이 넘치는 섹스 말이다.

……그럴 리 없지. 안타깝게도 이 섹스에는 애정도, 쾌락도 없었다.

시윤은 애정과 쾌락에 무지하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청호가 가르쳐 준 것이라 잊을 수도 없었다. 가장 처음 그와 몸을 섞었을 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가 우람한 성기로 뒤를 긁어 줄 때마다 전신에 번개가 내려치는 듯 짜릿했었다. 한껏 발기한 성기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퐁퐁 정액을 사출했었다. 다정한 입술이 얼굴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아프진 않냐 괴롭진 않냐 물어주던 음성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이 행위가 뒤틀려 있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애써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

시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늘의 청호는 제가 콧구멍으로 피를 쏟아 내고 또 쏟아 내다 과다 출혈로 죽어 버린다 한들 멈추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걸 깨닫자 신기하리만큼 정신이 맑아졌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던 눈앞이 또렷해지고, 폐에 구멍이 난 듯 식식거리며 새던 호흡 역시 평이해졌다.

시윤이 청호를 직시했다. 그리고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대장님.”

“…….”

“저 아파요.”

“…….”

비록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발음이 불분명하긴 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말에 바쁘게 움직이던 청호가 우뚝 멈췄다. 시윤이 그런 청호의 가슴팍을 힘없이 쓰다듬었다. 마치 심장을 보듬는 것처럼. 어쩌면 제 감정에 공감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너무 아파요.”

“…….”

“그래도 버틸까요?”

시윤의 음성은 나긋하고 친절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식은땀으로 범벅된 이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투였다.

“버티라고 하시면 버틸게요. 저 버티는 거 잘해요.”

시윤이 청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흐린 미소를 지었다.

청호는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그 미소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이 찰박거리며 마찰하는 소리와 두 사람이 내뿜던 신음, 침대가 흔들리는 소리로 요란하던 거실이 단숨에 적막해졌다.

청호의 입술은 더디게 움직였다. 그가 거머쥐고 있던 시윤의 목덜미를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잔혹한 결론을 읊조렸다.

“……버텨. 여태 내가 아팠던 만큼은 버텨야지.”

가늘게 이어지던 시윤의 호흡이 잠깐 끊겼다가 다시 붙었다. 제가 늦게 발현하는 바람에 고통을 홀로 삼켰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건지, 아니면 정원 때문에 상한 기분이 복구될 때까지 이렇게 모질게 굴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청호가 버티라 했으니 버티면 되는 거였다.

“……네.”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청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보다 느린 몸짓이었으나, 배 속 깊은 곳을 쑤시는 건 여전했다. 그것을 느끼던 시윤이 문득 청호의 가슴팍을 짚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청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손등으로 재차 코피를 훔친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뒤로…… 뒤로 할래요.”

“…….”

청호가 설핏 눈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시윤은 그가 모진 말로 제 속을 난도질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청호의 가슴팍을 밀며 하체를 뒤로 물렸다. 뒤를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읏……. 옅은 신음을 흘린 그가 비척비척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무릎을 추슬러 엉덩이를 추켜올렸다.

시윤의 둔부가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머금어 탁하게 반짝였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구멍은 비밀스러운 정원의 꽃처럼 만개한 상태였다. 청호가 날름,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곧 그의 성기가 움찔거리는 뒷구멍 위로 맞춰졌다.

그것을 느낀 시윤이 흐트러진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줄줄 흐르는 코피를, 근육이 죄 녹는 듯한 아픔을 소리 없이 삼켜 냈다.

* * *

시윤은 고통에 내몰려 잠에서 깼다. 대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배앓이, 머리칼이 죄 젖을 정도로 흐르는 식은땀, 숨쉬기 힘들 정도로 후끈한 체온, 저릿한 근육통, 불이라도 붙은 듯 홧홧한 팔뚝, 헐어 버린 뒷구멍, 씹힌 목덜미와 쓸린 허벅지까지. 그 모든 게 지나치게 세세하고 크게 느껴졌다.

시윤은 정신을 차렸음에도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퉁퉁 부어 묵직한 눈두덩이 천근만근이었기 때문이다. 눈꺼풀 속에 숨은 눈동자만 굴리며 여기저기에 흩어진 이성의 파편들을 모았다.

간신히 눈을 뜬 건 일어난 지 수십 분이 지나서였다. 늦은 오후 특유의 불그스름한 햇빛이 눈알을 아프게 찔렀다.

벌써 오후구나. 이렇게까지 늦잠을 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늦잠이랄 것도 없었다. 어젯밤부터 이어졌던 청호와의 정사가 아침까지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종국엔 비명이라도 지르듯 흘러내리던 코피가 먼저 포기하고 멎을 정도였다.

‘내일은 됐어. 내가 부를 때까지 나타나지 마.’

청호가 병사들에게 그리 말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시윤은 청호가 자신의 뒤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용케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가 버티라 했고, 저는 버티겠노라 했으니까. 그리고 청호가 널찍한 등을 뽐내며 욕실로 향하는 것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몇 시지.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더라.

청호는 어디 있지. 침대에도 없고, 시야에도 없는 걸 보니 나갔나.

“흐…….”

한참 동안 멍하니 널브러져 있던 시윤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 결심이 필요한 행동이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아파 죽겠는데, 움직이려니 정말 지옥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청호와 몸을 섞는 건 그 순간에도 고통스럽지만, 끝난 후에는 더 큰 고통이 밀려온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꿈틀거리던 시윤이 배를 움켜쥐고 몸을 옹송그렸다. 배가 너무 아팠다. 창자가 비비 꼬이는 기분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청호의 힘을 받아 냈으니 당분간은 옴짝달싹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씻고 싶은데.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고. 그렇다고 도움을 청할 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 좀 만들어 둘걸. 제 곁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허무할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몸이 고달프니 정신 역시 나약해져 갔다. 주책맞게 코끝이 찡해질 무렵이었다. 이질적인 냄새가 났다. 쌉싸름한 담배 냄새였다. 언젠가 숙소 내에서 맡아 본 적 있었다. 소파에 앉은 청호가 피우고 있었지.

시윤은 청호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청호의 부재를 확신한 게 잘못이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뒤를 돌아봐야 하나, 아니면 자는 척할까.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사실 자는 척하고 싶었다. 청호와 부딪쳐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 말도 없었다. 이 몰골로 좋은 아침이라고 하겠나, 잘 잤냐고 묻겠나, 아니면 제 주제에 원망을 토로하겠나. 그냥 아무 말 없이 이렇게 있는 게 나았다.

문제는 청호가 제가 깨어난 걸 알고 있으리라는 거였다.

잠시 고민하던 시윤이 느지막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욱한 연기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고, 다음으로 소파에 나른히 앉은 청호가 보였다. 근데 어째 잠기운이 전혀 묻어나질 않았다. 설마 한숨도 자지 않은 걸까.

물론, 청호야 며칠 밤을 새워도 너끈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장도 아니고 포스 안에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안…… 주무셨어요?”

시윤이 잠기다 못해 죽어 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청호는 이렇다 할 대답 없이 시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꺼풀이 눈을 반쯤 덮고 있고, 입에 물린 담배도 미동이 없는 게 깊은 상념에 빠진 것 같았다.

그래서 시윤도 말을 더 붙이지 못했다. 입술을 겹쳐 문 그가 꾸물꾸물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괜히 한 공간에 있다가 청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아프더라도 제 방에서 청승을 떨고 싶었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 그가 바닥에 발을 붙이고 무릎에 힘을 줬다. 예상했다시피 일어나는 건 매우 힘들고 고단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경련했다. 오장육부는 가랑이 사이로 쏟아지는 것 같았고, 높아진 시야에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멀미라도 온 듯 메슥거리는 속에 시윤이 소리 없이 헛구역질했다. 역류하는 위액이 역했다. 팔을 다쳐 쓰러져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먹은 거라곤 물에 탄 영양제가 다인지라 그 시큼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침대 프레임에 기대선 시윤이 속을 추스르고 있는데,

“이리 와.”

바닥을 기어 온 낮은 음성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시윤의 마른 어깨가 움칠, 위로 튕겼다. 그가 녹슨 로봇처럼 고개를 돌렸다. 청호가 제게 명령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아니길 바랐지만, 청호는 특유의 서늘한 눈매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념에 잠겼던 전과 달리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한 시선이었다.

시윤은 하는 수 없이 목적지를 변경했다. 그의 앞으로 가는 데에는 근 반나절이 걸렸다. 시간으로는 2분 정도였으나, 시윤은 정말 반나절로 느꼈다. 이를 악물어야 할 만큼 대단한 고통이었다. 알몸뚱이에 대한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청호의 앞에 섰을 땐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손등으로 이마를 닦은 시윤이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청호가 슬쩍 자신의 다리 사이를 내려다봤다. 시윤이 눈치껏 그의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천천히 무릎을 접고 꿇어앉아 청호를 올려다봤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설마 아직도 그 기나긴 정사가 끝을 맺지 못했나. 또 그의 성기를 물어야 하나. 이번엔 정말 목젖이 역류해서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그것도 아니면 목구멍이나 뒤통수가 뚫린다거나. 아무튼 온전하지는 못하리라.

지레 겁을 집어먹은 시윤이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는데, 청호가 입에서 담배를 빼냈다.

“네 아비가 나를 대장 직위에서 해임하겠대.”

“……예?”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아버지가…… 뭘…… 해? 청호를 어떻게 한다고? 분명 제대로 들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청호가 밤새도록 왜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시윤이 충격에 어버버 턱을 움직이고 있으니 청호가 능청히 말을 이었다.

“수족이 와서 그리 통보하던데.”

“……그래서, 그래서 무어라 하셨습니까?”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했지. 근데 그 수족 몸뚱이가 반만 돌아가서 내 말을 잘 전했을지 모르겠어.”

청호가 어제 있었던 일을 되뇌며 가늘게 눈을 좁혔다. 폴과 함께 훈련실로 향하는데, 저보다 한참 아래인 병사가 다가왔었다. 뭣도 아닌 주제에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입을 놀렸었지.

듣고 있기가 영 거북해 통째로 얼려 버렸다. 사실 입만 얼리려고 한 건데, 힘 조절을 못 했다. 그대로 파삭하고 깨져 버려 어찌나 미안하던지. 폴에게 대충 큰 덩어리만 추슬러 보내라고 했는데. 잘 갔을지 모르겠다.

정원은 누가 개국 공신 아니랄까 봐 참 부지런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시윤을 더 미워할 수 있을지 연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문 그가 연기를 깊게 빨아당겼다. 그 후 허리를 숙이고 시윤의 얼굴 위로 연기를 흩뿌렸다.

“당분간 에로아스는 출정하지 않을 예정이야.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네 아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

“앞으로 나와 오붓하게 지내게 될 텐데, 잘 부탁해.”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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