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4권) (15/26)

비밀의 비밀

선화는 거실 여기저기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을 다 주고 나면 타르트를 구울 생각이었다. 냉동실에 얼려 둔 복숭아로 잼을 만들어 올리면 참 맛깔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시윤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사흘 내내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간 막내가 여태 연락 한번 없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에 답장도 안 하고. 부모의 마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원의 낌새를 보아하니 둘이 싸우기라도 한 것 같은데. 일평생 서로 좋아 죽고 못 살던 부자 관계에 무슨 일이 생겼길래 저러나 싶었다. 정원은 물어도 대답도 안 해 주고. 내심 서운한 티도 내 보고, 아픈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화도 내 봤으나 먹히지 않았다.

시훈과 시준도 아는 게 없는 듯하고, 이제 남은 방법은 시윤을 구슬리는 것뿐이었다. 시윤이 말해 줄 때까지 아예 그의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버틸 작정이었다. 그래서 미리 화분에 물을 듬뿍듬뿍 주고 있었다. 어쩌면 며칠 동안 물을 못 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움직이던 선화가 물뿌리개를 내려놓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선화의 고개가 갸웃 옆으로 돌아갔다. 올 사람이 없는데. 쌍둥이 아들 둘은 전장에 나간 상태였고, 정원은 집에 있었다. 설마…….

선화가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윤이 홈 슬리퍼에 발을 꿰고 있었다. 선화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머, 시윤이 왔니? 어떻게 연락도 없이……. 밥 먹으러 왔어?”

“아니요. 아버지 뵈러요. 집에 계시죠?”

후드를 푹 뒤집어쓴 시윤이 선화를 쌩하고 지나치며 물었다. 선화가 얼른 그를 뒤따랐다.

“응, 계시지. 근데 너 목소리가 왜…….”

선화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다. 시윤은 보들보들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연하게 아이 티가 남아 있어서 또박또박 말할 때마다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헌데 지금은 갈라질 대로 갈라져서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제 아들이 맞나, 싶어 후드 그림자에 가려진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근데 얼굴도 영 이상했다. 피부가 하얗게 질려 있고 입술은 창백했는데, 눈알과 광대는 붉었다. 어떻게 봐도 운 얼굴이었다. 아파 보였고, 힘들어 보였다.

“어디 아프니? 팔이 덧났어? 염증이라도 생긴 거야? 모건이 그럴 리 없다고 했었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시윤이 애써 선화를 무시하며 2층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하지만 선화는 포기를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몸이 약해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다. 온갖 잔병치레를 다 겪었는데 이런 몰골은 처음 봤다. 더군다나 아프면 아팠지, 우는 일은 극히 드물었던 터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윤아.”

선화가 시윤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후끈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놀란 선화가 헛숨을 들이켰다.

“너 왜 이렇게 뜨거워?”

시윤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복도 끝에 있는 정원의 서재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부터 만나고요.”

“…….”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시윤이 선화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러곤 성큼성큼 서재로 향했다. 선화가 멀어지는 시윤을 아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시윤은 노크 한번 없이 벌컥 정원의 서재 문을 열어젖혔다. 정원은 책상에서 무언갈 보고 있었다. 예고 없는 방문객에 그가 사방에 떠 있던 홀로그램을 한 번에 치워 버렸다. 그 후에야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누가 감히 이따위로, 가파른 사선을 그렸던 정원의 눈썹이 시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완만해졌다.

“……이 무슨 무례냐.”

그가 낮게 으르댔다. 시윤은 망설임 없이 서재를 가로질러 정원의 앞까지 다가갔다. 눈을 한껏 홉뜬 그가 정원을 태울 듯 노려봤다.

“청호 대장님을 대장 직위에서 해임하겠다고 협박하셨다면서요.”

시윤은 청호에게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직설적으로 사실을 전달받았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청호가 여태 나라에 헌신한 게 얼마고, 구한 목숨이 몇인데 해임이라니.

구태여 그의 잘못을 꼽아 보자면 첫째, 가이아가 맺어 준 반려 가이드가 약하다는 것이고, 둘째, 그 가이드가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할 때마다 아프다는 것과, 셋째, 그 가이드의 아비가 너무 지극하게 아들을 아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그 아비가 지나치게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하나같이 시윤으로부터 발발한 문제들이었다. 정원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청호에게 패악을 부린 것이고.

“협박이 아니라 통보였다.”

정원이 눈치 없이 말했다. 그에 시윤이 하, 짧게 조소했다.

그 아무리 정원이라 할지라도 청호를 마음대로 해임할 순 없다. 청호를 해임한다는 건 신을 해고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반발이 엄청날 것이다. 군은 물론, 민간인까지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그의 복귀를 주장할 터였다. 어쩌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포스 안에서 청호는 전쟁의 신도, 승리의 신도 아니다. 안전을 관장하는 신이지. 그가 있으므로 내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고, 나의 자식이 안전하게 잘 수 있고, 나의 미래가 안전하게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즉, 청호가 없다는 건 안전하지 않다는 뜻과 직결된다. 밤마다 불안에 떨어야 하고, 총을 껴안고 다녀야 하고, 아침에 나간 자식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클롭스 배 속에 들어간 건 아닌지 전전긍긍해야 했다.

지금이야 모두 멀쩡한 인간인 척 살지만, 트라우마 하나 없는 이가 없었다. 두려움은 금세 과거를 까뒤집을 것이다. 견고히 유지되어 오던 포스의 질서가 무너지는 건 한순간일 터였다.

정원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단번에 일을 처리하지 않고 ‘통보’ 따위나 했겠지. 치졸한 짓이었다.

“아버지께는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어요. 대장님 괴롭히지 마세요. 그분께 그 어떠한 명령도 하지 마세요.”

“내가 왜 자격이 없냐? 나는 원수고, 청호를 대장직에 임명한 것도 나야.”

“아니요. 대장님은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신 거예요. 아버지가 하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전장에서 싸운 것도 대장님이시고, 클롭스를 죽인 것도 대장님이시고, 방랑자들을 구한 것도 대장님이세요.”

시윤이 으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전쟁터에서 살게 됐는지 모르면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는지 모르면서. 그 끔찍한 지옥 속에서 굳건히 버티는 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지 모르면서.

물론, 정원도 그 못지않게 싸워 왔음을 안다. 그러니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시윤이 알던 정원이라면 그 누구보다 청호를 두둔하고 지지했어야 했다. 고작 아들의 아픔 따위에 그를 내치고 폄하해선 안 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윤의 눈동자에 정원이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만든 포스다. 나라가 없으면 대장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지금 그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게 대장님이시잖아요!”

“……말이 안 통하는구나.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청호는 대장직에서 해임될 거다.”

정원이 더 이상 말을 말겠다는 듯 대화를 끝마치려 했다. 독불장군 같은 그에 시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잖아도 몸에서 펄펄 열이 끓는데, 정원과 대화하고 있으니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애써 호흡을 고른 시윤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럴 명분 없으시잖아요.”

“없었지. 근데 내 수족을 죽였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 아니요. 그것으론 안 됩니다. 알고 계시잖아요.”

“…….”

“아니면 절 파실 거예요? 청호 대장의 C급 가이드가 약해서, 가이딩할 때마다 아픈 게 이상하니 해임하겠다고 말하실 거예요?”

“…….”

“그럴 수 있으세요? 그렇게 슬하의 아들이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만천하에 알리실 거예요? 공적으로 저를 짓밟으실 거냔 말이에요!”

“너…… 내가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하냐?”

“지금 하시는 행동은 그와 다른 바가 없으신 걸요.”

시윤이 침울하게 말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속이 메스껍고, 짙은 피로가 해일처럼 몸을 덮쳤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몸을 끌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했다. 근데 역정까지 내고 있으려니 뇌가 줄줄 녹는 기분이었다.

크게 심호흡한 시윤이 음산하게 말했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정원이 청호에게 했던 협박보다 훨씬 강력하고 치명적인.

“저 진짜 죽어 버릴 거예요.”

“……뭐?”

내내 견고하게 굳어 있던 정원의 표정에 금이 갔다. 지금 시윤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으레 하는 혼잣말이었어도 기함할 판에, 그걸 제 면전에다 대고 하다니. 제 아들이 맞는지, 맞는다면 어째서 이다지도 변한 것인지……. 황당함과 함께 분노가 치솟았다.

정원이 어버버, 턱을 떠는데 시윤이 멈추지 않고 폭격을 퍼부었다.

“저 이제야 좀 사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대된다고요. 제가 평생 능력자를 꿈꿔 온 거 아시잖아요. 근데 왜 자꾸 어깃장을 놓으세요.”

“…….”

“대장님이 없으면, 저는 가이드인데도 가이드가 아니에요. 그럼 어쩌죠? 제가 열여섯 살의 채시윤으로 돌아가길 바라세요? 저는 싫어요. 그럴 바엔 죽을래요.”

시윤이 정원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문장 하나하나, 음절 하나하나 모두 거짓인 게 없었다. 정말 열여섯 당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능력도 없는 퓨어 주제에 아비의 권력을 무기 삼아 사는 것도 싫었다.

정원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시윤의 인생은 꽤 평화롭고 안온했지만, 그렇다고 위기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제법 깊은 절망도 경험했고, 아프기도 자주 아팠다.

근데 저런 얼굴은 처음 본다. 며칠 새에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몰골로 나타나서는, 시궁창에서 구르다 구르다 악에 받쳐 올라온 놈팡이처럼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정원은 시윤을 저리 키운 적이 없었다. 평생을 알아 온 아들이 낯설 지경이었다.

설마, 설마. 설마…….

정원이 아랫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너…… 뭘 알고 그러는 거냐.”

“…….”

의미 모를 질문에 시윤의 미간에 야트막한 홈이 파였다. 뭘 아냐니. 그런 질문이 지금 나오는 이유가 뭔가.

“제가 뭘 알고 있는데요?”

되돌아온 질문에 정원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러곤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리며 부정했다.

“……아니다.”

시윤이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겼다. 이 무슨 무의미한 대화인가. 설마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그것도 정원과 청호 사이에? 찰나, 가늠했을 뿐인데 앞이 아득해졌다. 보통 일이 아니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뭉치고 뭉쳐 있던 스트레스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우욱…….”

치받는 구역질에 시윤이 얼른 입을 막았다.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크게 휘청거렸다. 이곳에 오기 전 진통제란 진통제는 죄 씹어 먹었더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일어날 수도 없는 몸을 끌고 왔으니 여태 버틴 것도 용했다.

“시윤아!”

놀란 정원이 무심코 시윤의 팔뚝을 잡아챘다. 클롭스들의 도끼에 찢긴 그 팔뚝이었다. 길게 이어진 청호와의 섹스에 덧나 버린 그 팔뚝 말이다.

“아!”

시윤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정원이 얼른 손을 놨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피가 묻어 나오진 않았으나 절절 끓는 온도는 여실히 느꼈다.

정원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아직도 덜 나은 게냐?”

시윤이 집에서 나간 지 며칠이나 된다고, 벌써 다 나았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윤이 치료받고 갔다는 모건의 보고를 듣기도 했고. 하지만 어느 정도 아문 상태여야 했다. 잡는 것으로 저리 소스라치게 아파할 만큼 심각하면 안 된단 말이다. 거기다 이 열은 또 무엇인가.

정원이 뒤늦게 시윤을 살폈다. 그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언젠가 복숭아를 전해 주러 그를 찾아갔을 때. 목을 죄 덮는 옷을 입고, 양 손목에 멍을 달고 있던 그때. 창백하게 질려선 짓무른 눈가를 숨기던 그 얼굴과 같았단 말이다.

정원의 만면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또 울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제 말 알아들으셨을 거라 생각하고 이만 가 볼게요.”

시윤이 다급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뒤를 도는데, 정원이 반대 손을 잡아당겼다. 찰나, 시윤은 손목이 몸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나간 줄 알았다. 그만큼이나 센 힘이었다. 그 순간 정원은 아버지가 아니라 분노한 에스퍼였다.

시윤을 코앞까지 끌고 온 그가 부릅뜬 눈으로 캐물었다.

“……청호가 그런 게지?”

“……아니에요.”

“청호가 가이딩을 착취하냐?”

“아니에요.”

“그 짐승 같은 놈이 너를 밤마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제가 하겠다고 했어요!”

시윤이 팔을 마구 휘둘러 정원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의 눈알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 순간, 끊임없이 오르막을 달려가던 호흡이 명치에서 턱, 하고 얹혔다.

“아흑…….”

가슴께를 움켜쥔 시윤이 몸을 숙였다. 숨쉬기가 힘들다. 가슴에 얽매여 있던 청호의 힘이 갈퀴처럼 콱콱 심장을 난도질했다.

시윤의 안색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 갔다. 정원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선화를 불러서, 아니, 모건을 부르는 게, 집에 약이, 온갖 생각이 산발적으로 치솟았다. 수 초 뒤에야 정신을 다잡은 그가 홀로그램을 켰을 때였다. 어느새 일어난 시윤이 그것을 밀어 치워 버렸다.

“아버지. 저 힘들어요.”

“…….”

“아버지가 대장님을 곤란하게 하면 할수록 저는 더 힘들어질 거예요.”

“……시윤아. 나는 널 위해서…….”

“절 위하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발요. 제발, 제가 혼자 해결하고, 혼자 설 수 있게 두세요. 방관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요.”

시윤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리한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얼른 돌아가야 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정원이 옳다구나, 하며 몸을 동동 묶어 둘지도 몰랐다. 청호에게 돌아갈 수 없도록 어떻게든 수를 쓸 게 분명했다.

“…….”

정원의 입이 마침내 한일자를 그렸다. 그것을 포기로 읽은 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거추장스러운 인사까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시윤이 비척비척 서재를 벗어났다. 곧 문이 닫히고, 정원 홀로 남았다. 그는 시윤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방관. 방관이라.

시윤을 방관하라니. 불가능한 일이다. 정원은 알고 있었다. 지금 시윤이 저 모양 저 꼴이 된 게 그에게 하찮은 능력을 준 가이아도 아니고, 금수 같은 청호도 아니고, 다름 아닌 저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니 방관할 수 없었다. 제가 지은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속죄할 시윤을 어찌 방관하겠나.

다시 책상에 앉은 정원이 홀로그램을 켰다. 그리고 분주하게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 * *

본가에서 나온 시윤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연구동으로 향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아마 청호를 피하기 위한 본능적인 회피겠지.

밖은 이미 어둑했다. 선화를 떼 놓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몰골이 왜 그 모양이냐. 청호와 관련되어 있냐. 아버지와 청호 사이에 있는 일이냐. 꼬치꼬치 캐묻는데, 무엇 하나 날카롭지 않은 질문이 없었다.

시윤은 잠시 망설였다. 모든 걸 털어놓을까. 선화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현명하고 이해심이 많았으며, 정원에게 절대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근데 제가 청호와 닿을 때마다 아프다는 건 차마 밝힐 수가 없었다. 선화만은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모르길 바랐다. 누구보다 가슴 아파할 걸 알기 때문이다.

시윤은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연구동 건물에 들어섰다.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진짜 아파 죽겠다.

“진통제는 개뿔…….”

몇 알을 씹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어찌 이리도 아픈지 모르겠다. 아랫입술을 꽈악 짓이긴 시윤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거울 앞에 웬 해골 하나가 서 있었다.

시윤이 허망한 눈으로 거울 속 자신과 눈싸움을 했다. 그러다 눈이 빠질 것 같을 때쯤, 엘리베이터가 띵, 목적지에 다다랐다.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질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이 지옥 같은 열을 낮출 것이다.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마음껏 아파할 생각이었다.

허나 시윤의 계획은 연구실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어그러졌다.

“어…… 준위님?”

오랜만에 보는 종우였다.

“박종우 이병, 아니, 하사가 왜 여기…….”

뒤늦게 명찰을 확인한 시윤이 얼른 호칭을 변경했다. 안 본 지 얼마나 됐더라.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하사였다. 전장에서 어떤 공을 세웠기에. 신병 교육 담당이니만큼 많은 신병을 봐 왔으나 이렇게 빠른 진급은 처음 봤다. 혹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이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 없는데. 그럼 제가 종우를 모를 수가 없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시윤이 무례하게 종우의 명찰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종우가 한껏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저 진급했습니다.”

“어, 아…… 네. 그렇네요.”

“자랑하러 온 건 아니고요.”

“아…… 아아…….”

시윤이 다른 곳으로 급하게 눈을 돌렸다. 종우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준위님 강의 때문에 왔습니다.”

“강의요?”

“출전 휴강인 줄 알았는데, 병가라서 말입니다. 혹시 크게 아프신가 싶어서……. 메일 보내도 답이 없으시고. 그래서 혹시나 하고 와 봤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났지 말입니다.”

“아……. 네. 제가 어딜 좀 다쳐서…….”

시윤이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었다. 아픈 건 그다지 자랑이 아닌데, 어째 종우에게까지 고하게 됐다.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시윤이 후드 모자를 조금 더 아래로 눌러썼다.

“어디요? 많이 다치신 겁니까?”

종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시윤이 도리도리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다음 주부터는 강의할 수 있을 거예요.”

“아……. 다행입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시윤이 애써 웃어 보였다. 종우는 기특한 학생이지만, 지금은 불청객에 가까웠다. 얼른 쓰러지고 싶었다.

“그럼 이만…….”

바쁘게 인사한 시윤이 개인 연구실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에 막 손을 가져다 대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더니 검게 죽었다. 긴 어둠은 아니었다. 찰나 눈을 감았다가 뜬 것과 같았다. 근데 시야가 바닥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몸이 기운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거늘.

모든 걸 포기한 시윤이 바닥과 둔탁한 만남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어어…….”

종우가 시윤을 감싸 안았다. 그 덕에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종우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열이 많이 납니다.”

“……괜찮아요. 약 먹을 거예요. 잡아 줘서 고마워요. 잘 가요.”

시윤이 빠르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줘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종우를 털어 내려 팔을 뒤트는데, 종우가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피가…… 나지 말입니다.”

시윤이 무심코 코 아래를 문질렀다. 당연히 코피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헌데 종우의 시선은 훨씬 더 아래에 있었다. 시윤의 손등이었다. 시윤이 얼른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가느다란 핏줄기 몇 개가 손등을 지나 손가락까지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출처는 뻔했다. 시윤이 팔뚝을 살폈다. 검은색 후드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팔뚝 부분이 묘하게 번들거렸다.

기워 놨던 상처가 기어코 터진 모양이다. 어찌한다. 간단한 치료면 모를까, 터진 상처는 혼자 갈무리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이 꼴로 모건을 찾아가면 아버지의 충복이 된 그가 제 상태를 낱낱이 고할 텐데. 그럼 정원이 또 청호의 심기를 거스를 게 뻔했다.

씨발, 씨발, 씨발.

갈수록 엉망이 되는 상황에 시윤이 속으로 비속어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팔을 다치신 겁니까?”

종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시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냥…… 도끼에 좀…….”

“도끼요?”

종우가 눈을 크게 떴다. 차라리 클롭스 발톱 같은 것에 찍혔다는 게 더 현실성 높았다. 도끼라니. 정말이지 시윤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괜찮아요. 치료하면 금방 나을 상처예요.”

여상스레 대꾸한 시윤이 연구실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문이 열리는 순간 종우에게 작별을 고할 참이었다. 근데 종우가 희한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모건 대령님께 안 가시고…….”

“…….”

시윤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강의 도중에도 불쑥불쑥 찾아오기 일쑤이던 모건이라 그와 친하다는 건 시윤의 강의를 들은 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의사를 친구로 둔 이가 복도 한복판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다니.

시윤이 또 무어라 거짓을 말하나, 고민하는데 눈치 좋은 종우가 넌지시 말했다.

“제가 좀…… 봐 드릴까요?”

잠깐 사라졌던 종우는 어디서 큼지막한 구급 키트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필요한 것들을 척척 솎아 냈다. 시윤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거절해야 하는데, 현재 상황에서 그 말고는 제 팔을 맡길 이가 없었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하필 다친 곳이 팔뚝이라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팔을 하나 덧대어 입고 나올걸. 두툼하고 무거운 후드 하나만 껴입은 게 문제였다. 소매를 걷어붙여도 팔꿈치까지 간신히 올라가는 게 다였다.

남자끼리 옷 벗는 게 뭐 그리 꺼릴 일이겠느냐마는, 오늘 샤워할 때 본 제 몸은 남에게 드러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소파에 걸터앉은 시윤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데, 의료용 장갑까지 낀 종우가 나지막이 그를 채근했다.

“옷 벗어 주세요.”

그 말에 시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허공 한 번, 종우 한 번, 또 허공 한 번 보던 시윤이 어쩔 수 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시윤의 마른 몸이 훤히 드러났다. 하얀 피부에 얼룩덜룩 남겨진 청호의 잇자국도 드러났다. 목덜미부터 가슴께, 등허리, 명치, 하물며 손목까지 온통 씹어 놔서 신종 피부병에라도 걸린 듯한 행색이었다.

거기다 청호가 움켜쥐었던 손목, 팔꿈치, 허리는 푸르뎅뎅한 멍이 올라와서 무슨 짓을 하다가 몸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

종우가 잠깐 숨을 멈췄다. 가까운 거리라 그 찰나가 매우 또렷이 느껴졌다. 시윤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거울을 본 저도 놀랐었는데 종우야 오죽하겠나.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시윤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장…… 나갔다가 다친 거예요.”

“……네. 그렇겠죠. 힘든 전투였나 봅니다.”

종우가 능청맞게 대꾸했다. 그러더니 시윤이 팔뚝에 대충 붙여 놓은 밴드를 살살 떼어 냈다. 상처는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꿰맨 곳이 군데군데 터져 있었고, 피가 담뿍 새어 나왔으며 상처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었다.

종우는 일단 봉합 실을 제거했다. 그 후 피를 닦고, 소독하고, 상처 주위에 마취 주사를 찔렀다가 뺐다. 몇 번 콕콕 찍으며 아프냐고 묻더니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모건만큼 깔끔하고 빠르진 않았으나, 퍽 숙련된 솜씨였다. 시윤이 바쁘게 움직이는 종우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런 건 어떻게 할 줄 알아요?”

“어……. 저처럼 B급 에스퍼가 주를 이루는 부대는 전장에서 다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근데 의료병은 부족하고, 클롭스는 몰려오고. 그래서 어디가 째지거나 절단되면 직접 기우고 붙여야 할 때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됐습니다. 뭐…… 이것저것 배우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채 준위님 강의 듣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종우가 씨익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치료는 오래 이어졌다. 팔이 보통 길게 찢어진 게 아닌지라 손이 많이 갔다. 긴장이 풀린 시윤의 눈이 가물가물 무거워질 때였다.

종우가 넌지시 시윤을 불렀다.

“준위님.”

“……네.”

“청호 대장님 가이드면, 청호 대장님 매일 보실 수 있는 겁니까? 아침에도 보고, 밤에도 보고?”

“푸흐……. 아무래도 그렇죠.”

시윤이 눈을 감은 채 웃음을 흘렸다. 종우의 말을 들으니 새삼 청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각하게 됐다. 그래, 대단한 사람이지. 저도 퓨어일 땐 청호의 시답잖은 소문에 귀 기울이고, 그의 승전보에 함께 기뻐하곤 했다. 언젠가 만날 수만 있다면, 악수할 수 있다면, 그런 순진한 꿈을 꿨던 것도 같다.

“와. 부럽습니다. 저 청호 대장님 정말 동경하거든요.”

종우가 밴드를 길게 붙이며 감탄했다.

“……저도 동경해요. 청호 대장님.”

동경하다 못해 그를 대신해 죽을 수도 있지. 시윤이 뒷말을 조용히 삼켜 냈다. 종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도 말입니까? 반려 에스퍼인데도요?”

“그럼요. 가까이서 보면 음…… 더 멋지고 대단한 분이시거든요.”

시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어둠에 잠긴 듯 초점이 없었다. 전장에서 싸우는 청호를 떠올리고 있어 그랬다. 위험한 순간에는 항상 선두를 자처하는 청호. 병사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청호.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자책하는 청호.

청호는 알면 알수록 더욱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다. 물질적 거리는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음에도 그랬다. 최근에는 더더욱 멀어졌고. 하물며 그와 몸을 섞고 있을 때도 멀게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시윤이 뒤늦게 치료가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고마워요, 라는 감사 인사를 전하려는데 종우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런 것도 참으시는 겁니까?”

시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모호한 질문이었는데, 그 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시윤이 뾰족한 눈길로 종우를 노려봤다.

“……그건 좀 무례한 참견 같은데.”

“…….”

종우도 지지 않고 시윤을 쳐다봤다. 직선을 긋고 있는 눈이 낯설었다. 종우는 항상 부드러운 눈매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잠깐이었다. 종우가 민망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꾸벅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오지랖이었네요.”

시윤은 그 사과에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벗어 둔 후드로 손을 뻗었다. 피에 흠뻑 젖어 있었으나 그대로 껴입을 참이었다. 연구실 서랍에 옷이 몇 벌 있을 텐데, 그것까지 찾아 입을 체력이 없었다.

시윤의 손끝이 막 후드에 닿았을 때였다. 친절한 종우가 또다시 선의를 베풀었다.

“그…… 괜찮으시면 멍든 곳에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 멍이면 많이 아프실 것 같은데 약을 바르는 게 좋을 겁니다.”

“…….”

시윤은 잠시 고민했다. 평소였다면 생각도 않고 거절했겠지만, 그의 말마따나 몸이 매우 아팠다. 속에서 규칙 없이 튀는 청호의 힘으로도 딱 죽을 맛인데, 시큰거리는 근육통에 따가운 상처들이 못내 거슬렸다.

“금방이면 됩니다. 누우세요.”

종우가 시윤의 후드를 둘둘 말아 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간이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뚝딱 만들어진 침대에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결국 몸을 뉘는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시윤이 “그럼 부탁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스르륵 고단한 몸을 눕혔다.

눕고 나자 억누르고 있던 피로와 고통들이 해일처럼 시윤을 덮쳤다. 아주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연구실의 쨍한 조명이 빠른 속도로 흩어졌다.

종우는 멍 위로 조심조심 연고를 발라 갔다. 불쾌하지 않은 손길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치료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몸이 자꾸만 노곤해졌다. 이대로면 잠든다는 자각도 없이 까무룩 정신을 놓을 듯했다.

그때, 종우가 감미로운 음성으로 조곤조곤 걱정을 내놓았다.

“밥은 드셨어요? 안 드셨죠? 링거도 가져올 걸 그랬네요. 사실 눈에 보이긴 했는데, 그건 해 본 적이 없어서 안 가져왔거든요. 그래도 영양제 몇 알은 가져왔는데 그거라도 드세요.”부터, “얼른 나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하사로 진급한 것도 준위님 강의 잘 들어서지 말입니다. 고위 클롭스 하나를 사살했거든요.”까지.

퍽 듣기 좋은 말들이었다. 반쯤 눈을 감은 시윤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보니 입술이 간질간질해졌다. 종우가 놓은 마취제가 전신을 잠식하고 뇌까지 무디게 만든 모양이다.

“……제가 죄가 많아요.”

시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신은 이미 구름 저 너머로 날아가고 없었다.

“죄요?”

종우가 놀랍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시윤은 뭐랄까, 남에게 모진 말 한마디도 못 할 것처럼 생겼다. 불쌍한 이가 있으면 무엇 하나 더 주지 못해서 마음 아파할 것 같단 말이다. 유순하고 처연하고 순진하고. 그런 단어들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근데 그런 시윤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을까.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엄청…… 치졸하고 간악한 죄요. 그래서 이런 고통은 가이아가 내리는 벌이려니…… 하고 버텨요.”

시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시윤은 고통에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다 제가 모자라서 아픈 것이다. A급만 되었어도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저의 모든 죄를 알고 있는 가이아가 일부러 저를 부족하게 만든 게 틀림없었다.

“…….”

종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윤의 상처를 치료했다.

시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기절했다고 표현해도 다르지 않겠다. 종우는 빠르게 치료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몇 분간 시윤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드시면 곤란한데…….”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종우는 고민했다. 간다고 인사를 해야 하나. 아니면 굳이 깨우지 않고 조심히 나가야 하나. 아무래도 후자가 좋을 듯해 몸을 일으켰다. 구급 키트를 대충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희멀건 상체를 훤히 내놓은 시윤이 눈에 걸렸다. 저리 있으면 감기에 걸릴 텐데. 저런 몸 상태로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까지 이어질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지. 시윤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소리 없이 양해를 구하고 연구실을 뒤졌다. 담요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옷가지만 있을 뿐, 담요는 없었다.

종우가 아쉬운 대로 도톰한 니트를 들고 시윤에게 다가갈 때였다. 난데없이 띠릭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청호가 서 있었다.

종우가 끔뻑끔뻑 눈꺼풀을 움직였다. 진짜 청호인가, 싶어서. 키가 태산만큼 크고, 두툼하고 단단한 몸집에 잘생긴 얼굴은 분명 청호가 맞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눈앞의 이가 청호라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자각했거늘 멍청한 몸뚱이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감과 카리스마에 납작하게 짓눌린 상태였다.

“…….”

“…….”

청호도 마찬가지로 종우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소파에 널브러진 시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웃통을 훤히 까고 누워 있는 시윤. 무슨 짓을 했는지 식은땀으로 뒤덮인 이마. 색색 가쁘게 몰아쉬는 숨.

그리고 현장에서 잡힌 도둑처럼 새하얗게 질린 종우. 그의 손에 들린 시윤의 옷.

누가 봐도 오해할 상황이었고, 실로 청호는 오해하는 중이었다. 청호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다. 그러자 멀찌감치 서 있던 종우가 그의 앞까지 단숨에 끌려갔다.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생전 처음 경험한 움직임에 종우가 바보같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자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청호가 특유의 저음으로 으르댔다.

“넌 뭐야?”

“어…… 아…….”

“뭔데 여기 있어?”

“아, 저, 저는 준위님 강의 듣는 하사 박종우라고 합니다.”

종우가 뒤늦게 경례했다. 뒤꿈치를 착 모으고 어깨를 한껏 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상황과 썩 어울리지 않는 말도 덧붙였다. 근데 정말 너무너무 영광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여기 있냐고.”

허나 그런 말에 이골이 날 대로 난 청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종우가 뒤늦게 서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슬쩍 손을 내린 그가 청호와 시윤을 번갈아 봤다. 그러고 있으니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종우가 더듬더듬 변명을 내놓았다. 마음이 급하니 단어가 중구난방으로 널을 뛰었다.

“아, 아아, 준위님이 병가를 내셔서 걱정되는 마음에 찾아왔는데, 팔에 상처가 덧나셔서……. 피가 막 뚝뚝 떨어지는데 혼자 치료하실 수가 없어서……. 근데 그게 또 옷을 입고는 치료가 불가능해서, 어쩔 수 없이…….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인데 추워 보이시길래……. 저 몸으로 감기에 걸리시면 중병이 될 수도 있지 말입니다. 아무튼, 담요가 없어서 이거라도 덮어 드리려고, 예. 그랬습니다. 다른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

청호가 종우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마치 송곳 같은 시선이었다. 어찌나 따갑고 아픈지, 종우는 뒤틀리는 몸을 막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이런 시선을 받고 사는 시윤이 존경스러워질 정도였다.

묵직한 정적이 정수리를 짓눌렀다. 참다못한 종우가 번쩍 고개를 쳐들곤 다시 경례했다.

“그,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아니, 가 봐도 되겠습니까?”

“…….”

청호가 반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종우는 들고 있던 니트를 슬쩍 소파에 걸쳐 놨다. 그리고 행여나 청호가 저를 잡을까, 아니, 잡아 죽일까 헐레벌떡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시윤과 둘이 남은 청호는 한동안 멀뚱히 서 있었다. 헌데 눈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시윤의 파리한 얼굴을 살폈다. 숙소에서 봤던 것보다 더 핼쑥해지기만 했을 뿐,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음으론 훤히 드러난 상체를 살폈다. 정확히는 얼룩덜룩한 입술 자국들을. 혹여 제가 남기지 않은 것을 묻히고 있는 건 아닌가 샅샅이 살폈다.

다행히 눈에 거슬리는 게 없었다. 바지 버클도 꼼꼼히 잠겨 있었다. 그래, 제게 답답할 정도로 맹목적인 시윤인데 설마 남의 손을 탔을까.

청호가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그 후 허리를 숙이고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

말간 얼굴을 보고 있으니 비죽, 못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맹목적인 시윤이라도 또 모르지. 근래 제가 함부로 대했으니 마음이 변했을지도. 작은 의심이 피어올랐다. 본디 믿음은 어렵되, 의심은 쉬운 것이다. 거기에 치졸한 질투가 조금 가미되면 의심은 산불처럼 단숨에 몸집을 키웠다.

사실 연구실까지 찾아온 것도 시윤이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에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윤의 연구실에 출입 기록이 떴다는 폴의 보고가 아니었으면 그가 본가로 도망갔다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근데 여기서 새파란 병사 놈이랑 시시덕거리고 있었단 말이지. 낯이란 낯은 다 가리면서 웃통까지 까고.

청호의 입술이 비죽, 비릿하게 뒤틀렸다.

“채 준위.”

청호가 낮은 음성으로 시윤을 불렀다.

“…….”

그러나 정신을 잃은 시윤은 대답이 없었다. 눈꺼풀 한번 떨리지 않는 걸 보아 아주 먼 꿈속을 방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채 준위. 일어나.”

청호가 다시 시윤을 불렀다.

“…….”

시윤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조금 더 허리를 숙인 청호가 보다 또렷하게 시윤을 불렀다.

“채시윤.”

“…….”

시윤은 고집스레 묵묵부답을 유지했다. 청호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하게 솟구쳤다.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그가 시윤의 명치로 검지를 가져갔다.

청호의 검지가 시윤의 명치 위에 직각으로 곧추섰다. 펄떡펄떡 맥동하는 시윤의 심장이 손끝에서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손끝이 부드러운 살결에 폭 파묻혔다. 피부를 뚫고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고 아프지 않은 선에서 멈췄다.

시윤을 닮아 연약한 근육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끼던 청호가 손끝에 작은 열기를 틔웠다. 살가죽이 죄 녹을 만큼 강하지는 않되, 미약한 화상을 입을 정도로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윤의 가슴팍이 볼록 위로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허억…….”

시윤이 깊은 물에서 올라오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자신이 깨어난 걸 상기하는 듯했다. 그러다 화끈거리는 명치를 부여잡고 몸을 옹송그렸다.

“아흐윽…….”

갑자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아직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고가 둔하게 움직였다. 시윤이 느리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곧 저를 뒤덮은 그림자의 주인을 발견했다.

“아…… 대장, 대장님?”

놀란 시윤이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청호가 왜 여기……. 시윤은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청호가 왜 여기 있는지, 이게 현실이긴 한지,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당황해서 파르르 경련하는 시윤의 눈동자와 달리 청호의 눈동자는 단단히 굳어 있었다. 서로 다른 모양새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얽혀 갔다.

시윤이 왜 여기까지 오셨냐고 묻기 위해 입을 달싹였을 때였다. 청호가 시윤의 어깨를 눌러 넘어트렸다. 시윤이 풀썩 힘없이 소파로 쓰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는데, 청호의 반대 손이 바지 너머 엉덩이로 쑥 들어왔다.

“대장님!”

기겁한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청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청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꽉 아물린 둔부를 헤치고 주름까지 단숨에 다다랐다.

시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또, 또 아프신 겁니까?”

난처와 걱정, 거리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게, 더는 청호를 받아 낼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힘에 부쳐 정신이 깜빡깜빡 점멸하는데 청호의 성기를 받아 냈다간, 그의 거대한 몸에 깔렸다간, 옹골찬 손아귀에 잡혀 흔들렸다간 정말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어제도 그렇게 했는데. 아니, 어제도 아니다. 오늘 아침까지 그의 성기가 제 뒷구멍을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헌데 어째서 또 아프단 말인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청호는 참으로 여유로웠다.

“그렇다면?”

“어…… 아…….”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는 사이, 청호의 손끝이 주름진 뒷구멍을 문질렀다. 청호는 확인하고 있었다. 제가 아닌 타인이 이 환상적인 구멍에 침입한 게 아닌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흔적을 남기고 간 건 아닌지 말이다.

다행히 시윤의 구멍은 매우 건조하고, 꽉 아물려 있었다. 퉁퉁 부어서 말랑하긴 했으나, 오늘 아침에도 이러했다. 제가 나간 후로 그 누구도 침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납게 올라가 있던 청호의 눈매가 한결 유순히 풀어졌다.

그러나 시윤은 그렇지 못했다. 뒷구멍을 짓누르는 손가락에 너무 놀라 자지러지기 직전이었다. 손으로는 청호의 가슴팍을 밀어 냈고, 허리는 어떻게든 그의 손을 피해 보고자 위로 붕 떠올랐다.

시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채였다. 그가 눅눅한 음성으로 자비를 구걸했다.

“저, 저 오늘은 버틸 자신이 없습니다.”

“…….”

“몸이 엉망이라서…… 그다지 좋지도 않으실 거예요.”

거짓일랑 없었다. 정말 버틸 자신이 없었다. 바지가 벗겨지는 순간 눈 뒤집고 까무러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시윤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청호가 물러나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근 며칠은 제가 간절히 부탁해도, 엉엉 울며 빌어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던 청호였으니까. 그냥, 나약한 정신에 힘들다 푸념해 본 거였다.

근데 놀랍게도 바지춤에서 청호의 손이 쑥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시윤을 짓누르고 있던 손 역시 거둬졌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시윤이 눈을 끔뻑였다. 그런 시윤을 잠시 바라보던 청호가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물렸다. 멀어지는 그가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윤은 매우 많은 생각을 했다. 저를 왜 놔주는 거지. 제가 못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넝마짝이 된 몸에다 성기를 쑤시자니 영 흥이 안 나서? 약해 빠진 제게 신물이 나서? 근데 아프다며? 그럼 설마…… 다른 가이드를 찾아가려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시윤이 냅다 팔을 뻗어 청호의 손을 움켜쥐었다.

“……가지 마세요.”

“뭐?”

“가지 마세요.”

뜬금없는 말에 청호의 눈이 설핏 구겨졌다.

“……내가 어딜 가는데?”

“다, 다른 가이드 찾으러 가시는 거 아니에요?”

청호가 픽,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가이드라니. 시윤을 만난 이래로 그딴 건 찰나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A급 가이드와 밤새 몸을 섞는대도 시윤과의 입맞춤 한 번을 못 따라올 텐데 뭣 하러 그러겠나.

하지만 청호는 그 사실을 함구하기로 했다. 눈이 울먹울먹하게 젖어서, 버림받은 개처럼 구는 시윤이 퍽 볼만했기 때문이다.

청호가 특유의 무감한 시선으로 시윤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벌떡 상체를 일으킨 시윤이 청호의 손을 꾹꾹 아래로 잡아당겼다. 꼭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포, 포옹은 괜찮을 거예요. 안아 드릴게요. 가지 마세요.”

“…….”

“아니, 아니다. 우리 그냥 해요. 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

“진짜 버틸 수 있어요.”

“…….”

대답이 늦어지는 청호에 붉게 충혈된 시윤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러더니 대뜸 몸을 뒤집으려 들었다. 손수 엉덩이를 까고 구멍까지 들이밀어 줄 심산인 듯했다.

그 모습을 상상한 청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세게 빨았다가 놨다. 사실 시윤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말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게 괘씸해서 직접 찾으러 온 것일 뿐이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혹 제 것을 누가 탐하진 않았나 점검했던 거고.

근데 뭐, 구태여 버티겠다는데 그러지 말라 할 필요는 없었다. 평온하던 아랫도리가 기다렸다는 듯 지끈거리는 걸 보아하니 내심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

시윤은 만면 가득 고통을 담은 채 꾸역꾸역 몸을 돌렸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팔꿈치를 잡아 소파 등받이로 밀었다.

시윤이 눈을 크게 뜨고 청호를 바라봤다. 다리는 다소곳하게 접혀 있고 등은 꼿꼿이 세우고 있고. 이런 자세로는 청호를 받아 낼 수 없었다.

시윤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못했다. 그대로 턱이 잡히고, 입술이 부딪쳤기 때문이다.

“응…….”

청호의 키스는 오랜만에 감미로웠다.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하는 입술은 ‘키스’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엊그제, 어제 부딪쳤던 입술은 키스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으니까.

청호는 시윤의 아랫입술 한 번, 윗입술 한 번, 또 가끔은 입술 전체를 빨았다가 놨다. 서정적인 키스가 이어질수록 바짝 긴장했던 시윤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던 속눈썹 역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청호의 엄지가 턱을 누르고, 입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뜨끈한 혀가 밀려오는 순간, 그의 힘이 목구멍으로 숭덩숭덩 넘어오기 시작했다.

“흐…….”

시윤이 눈을 질끈 세게 감았다. 아프다. 오늘은 C-였으니까 아픈 게 당연했다. 바지 내릴 생각을 했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고통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청호의 혀는 느리면서도 집요하게 움직였다. 혀를 얽고, 입천장을 긁고, 치열을 훑고, 입술을 잘근거렸다. 가끔은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깊숙이 혀를 욱여넣기도 했다.

“으응…….”

축축한 마찰음이 연구실을 고요히 울렸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 혀가 얽히는 소리, 억눌린 신음 같은 것들은 조용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렁찼다. 시윤이 온전히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귓바퀴를 발갛게 물들였을 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윤의 정신은 점점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있었다. 청호가 등장하기 전에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상태였다. 헌데 명치가 화끈거리는 화상에 청호의 힘까지 더해지니 시야가 뿌옇게 탁해졌다.

“우……윽.”

시윤의 손끝이 소파를 할퀴듯 파고들었다. 키스가 농밀해지면 농밀해질수록 오므라들던 손은 결국 주먹이 됐다. 내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참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종우가 열심히 기워 줬던 팔뚝이 다시금 팽팽해졌다. 그러나 시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목구멍으로 화염을 들이켜고 있는데, 터진 상처가 대수랴. 나중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뭉툭한 손톱인데도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그때, 청호가 시윤의 손목을 세게 잡아챘다. 그대로 손목을 부러트리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센 힘이었다.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자연히 주먹이 풀리고, 팔에 힘이 빠졌다.

그것을 흘깃 곁눈질로 확인한 청호가 시윤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옮겼다. 그대로 마른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시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제가 엉덩이를 붙였다. 시윤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혀 놨다.

낯선 자세에 시윤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거렸다. 청호가 짜증 어린 표정으로 시윤의 아랫입술을 세게 빨았다가 놨다. 그 후 한 손으로는 시윤의 등허리를 받치고, 반대 손으로는 자그마한 뒤통수를 감쌌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겹치려는데, 시윤이 얼굴을 푹 아래로 내렸다. 청호의 눈썹이 사나운 오르막을 그렸다. 이제 와 내빼려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청호가 막 시윤의 머리채를 잡으려는데, 단단한 물방울 하나가 시윤의 턱 끝에서 뚝 하고 떨어졌다.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엔 우는 줄 알았다. 시윤은 눈물이 헤펐으니까. 근데 어깨도 떨리지 않았고,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도 어째 둔탁했다.

청호가 시윤의 턱을 쥐어 올렸다. 그렇게 시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잠시 호흡을 멈춰야 했다.

“……채 준위?”

시윤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코에서 시작된 얇은 핏줄기가 도톰한 입술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 실눈은 뜨고 있으나 정신은 이미 이곳에 없는 듯했다.

“채 준위.”

청호가 재차 시윤을 불렀다. 그러나 시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던 눈조차 감더니 푹, 청호의 가슴팍으로 쓰러졌다.

“…….”

청호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윤이 흘리는 코피로 가슴팍이 축축이 젖어 갔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온몸의 피를 죄 쏟아 낼 기세였다.

그가 어금니를 으득, 짓씹었다. 그러곤 자신의 재킷으로 시윤을 감싸 안고 연구실을 나섰다.

* * *

청호는 모건의 연구실에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어찌나 우렁차게 들어오는지, 실험 중이던 모건이 화들짝 놀라 스포이트를 떨어트렸다. 연약한 스포이트가 산산이 조각나 바닥을 더럽혔다.

“뭐, 뭐야, 너?”

“…….”

청호는 기껏 모건에게 찾아와 놓곤 그에게 찰나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눈짓으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진료 베드를 끌어왔다. 그러더니 그 위로 짐처럼 안고 들어온 것을 내려놓았다.

대충 상황을 눈치챈 모건이 서랍에서 의료용 장갑을 찾아 꼈다. 발로는 깨진 스포이트를 아무렇게나 슥슥 옆으로 밀었다. 그러면서도 툴툴거리는 입을 쉬지 않았다.

“뭔데, 그건. 네 병사야? 왜 병동으로 안 가고 여기로 왔어? 내가 아무나 진찰하는 사람이냐? 이렇게 보여도 아-주, 몹시, 매우 바쁜 사람이란…….”

청호의 재킷을 들치고 그 속에 있던 사람을 발견한 모건이 버석하니 굳었다.

“……채 준위?”

시윤이었다. 얼굴 반절이 피에 젖어 있긴 했지만, 그 예쁘장한 생김새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을 의심해야 했다. 시윤이 왜 이런 꼴로…….

평생 말갛고 곱게 자라 온 애가 근래엔 자꾸 피를 본다. 정확히는, 청호를 만난 후부터.

모건의 만면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나 얘 이틀 전에 봤는데, 그새 전장에 나갔다가 복귀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가 비죽 입꼬리를 뒤틀며 이죽거렸다.

“……그런가 보지.”

청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모건의 손에 들린 제 재킷을 쑥 뺏어 갔다.

하, 짧게 탄식한 모건이 시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윤의 상태는 눈으로만 봐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과 식식 바람이 새는 듯한 숨소리, 얼룩덜룩한 피부, 여기저기 든 멍, 명치에 화살처럼 박힌 화상, 갈비뼈가 오돌토돌하게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까지. 팔은 누가 어쭙잖게 붙여 놓은 밴드를 들춰 봐야 알겠지만, 굳이 제가 붙여 놓은 것을 떼어 새로운 것을 붙였다는 건, 상처가 다시 터졌다는 거겠지.

모건이 여전히 줄줄 흐르고 있는 시윤의 코피를 엄지로 꾹 눌러 닦았다.

“네가 이랬어?”

“…….”

“어? 네가 이랬냐고.”

모건이 눈을 부릅뜨고 청호를 추궁했다. 청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무심한 방관자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시윤을 직접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나 그가 죽어도 그다지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얘 코피 언제부터 흘렸어?”

“글쎄……. 어젯밤부터였나.”

“…….”

모건이 뻐끔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지금껏 알던 청호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장 시윤을 고치라고 펄펄 뛰었겠지. 그러다가 제가 또 안온에 넋 놓고 시윤을 이리 만들었다며 자책했을 거고. 마치 열두 살, 전장을 무서워하던 때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시윤이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터였다.

그래서일까. 모건은 지금 시윤이 넝마가 되어 누워 있는 게 청호의 소행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분명 청호가 한 짓이긴 하나 고의는 아닐 거라 믿었다. 청호는 진심으로 시윤을 아꼈으니까.

모건은 아주 똑똑했으나, 결국엔 인간이었다. 감정에 휩쓸리고 과거의 기억을 단번에 떨쳐 버리지 못하는 그런 인간 말이다.

사정이 있었겠지. 갑작스레 폭주가 왔었겠지. 하필 시윤이 C급이나 D급이었겠지.

청호가 아무리 막무가내고 유아독존이기 하나 자신의 사람을 이리 대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할 줄 알았단 말이다.

모건이 청호의 손목을 꾹 움켜쥐었다. 청호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모건을 바라봤다. 모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호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폭주는 가이딩만 잘하면 짧은 시간 안에 진정된다. 그러나 그 여파는 꽤 오래 몸에 남았다. 심장이 빨리 뛴다거나, 근육통이 남는다거나, 미열이 오래간다거나. 청호는 열이 오래 남는 체질이었고.

근데 그의 손목은…… 전혀 뜨겁지가 않았다. 보통 인간의 체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그가 오늘 폭주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모건의 얼굴이 대번에 서늘하게 굳었다.

“너. 폭주한 것도 아닌데 애를 이렇게 만들었어? 미쳤냐?”

“안타깝게도 아직 안 미쳤어.”

청호가 여상스레 대꾸했다. 모건이 참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다 벅벅 마른세수를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원수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이러냐. 아들 생각 끔찍이 하시는 거…….”

한창 나불거리던 모건의 입술이 갑작스레 다물렸다. 청호가 음산한 낯으로 모건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빛 한 점 없는 검은 눈동자에 냉기 어린 분노가 가득했다.

“내가, 요즘.”

“…….”

“기분이 좋지가 않아.”

“…….”

“그래서 같잖은 잔소리까지 들어 주고 싶지가 않네.”

그가 으르대듯 읊조렸다.

모건이 자신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저보다 어린 청호라지만 이럴 땐 더할 나위 없이 SS급의 면모를 뽐낸다. 가끔, 정말 가끔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언제더라. 그래, 스무 살이 막 넘었을 때, 어머니의 죽음이 이상하다며 찾아왔었을 때 딱 이런 얼굴이었지.

모건은 그때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실상을 처음 알았다. 공공연하게 알려진 건 ‘클롭스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다였으니까. 그 전엔 청호도 딱히 어머니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었고. 아니, 이건 지금 상관없는 일이니 넘어가자.

모건이 청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청호가 화가 난 이유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윤을 만난 후로 기분 좋은 티를 못 내서 안달이더니. 에로아스 부대에 크게 사상자가 발생했던 작전 때문에 그런가. 아닌데. 그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럼 설마…… 정원 때문인가. 시윤이 팔을 다친 걸 제게 뒤집어씌워 화라도 난 걸까. 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시윤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모건이 알기로 청호는 그런 것에 일일이 화를 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사소한 오해에 감정을 표현하길 귀찮아한다는 게 맞겠다. 부대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청호를 음해하고 깎아내리길 좋아하는 종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반응하다간 화병으로 죽을지도 몰랐다.

모건이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청호가 뒤를 돌았다.

“고쳐. 내일까지.”

“……내일? 내일까지 어떻게 고쳐. 애가 정신도 못 차리는데. 사흘은 푹 쉬어야…….”

“싫어. 내가 내일 당장 폭주할지도 모르잖아.”

청호는 단호하게 모건의 말을 잘라 냈다. 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을 나섰다. 멀뚱히 서서 눈을 끔뻑이던 모건이 으득 이를 갈았다.

“……지랄하네.”

시윤의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 한 달은 폭주 같은 거 안 하겠구먼. 저거 왜 저래, 진짜? 모건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쿵쿵 발을 굴렀다. 그러다 뒤늦게 시윤을 바라봤다.

모건이 홀로그램을 끌어와 시윤을 스캔했다. 시윤의 차트는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타박상 따위야 연고만으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지만 오장육부와 핏줄에 온통 얽혀 있는 청호의 힘은 모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에스퍼의 ‘폭주’나 가이드의 ‘배수구’는 신의 영역이다. 약물도 듣지 않았고, 수술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모건이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러다 슬쩍 구석에 위치한 냉동고를 바라봤다. 온갖 종류의 샘플과 약물이 들어 있는 냉동고였다.

그러곤 다시 시윤을 바라봤다. 정신을 잃었음에도 미간을 구기고 끙끙 앓고 있는 시윤을.

잠시 고민하던 모건이 성큼성큼 냉동고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붉은색 액체가 찰랑이는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곧장 주사기로 흡입한 후 시윤에게로 돌아왔다.

“아…… 이렇게 빨리 쓸 줄 몰랐는데…….”

이렇게 쓰려고 한 것도 아닌데. 훨씬 더 중요한 순간에, 위급한 상황에 쓰려고 했는데. 청호 저 등신 같은 새끼가 다 망쳤다.

쯧, 혀를 찬 모건이 주삿바늘을 시윤의 손목에 찔러 넣었다.

* * *

진찰 베드에 걸터앉은 시윤이 물을 홀짝였다. 따뜻한 물이 바짝 마른 목구멍을 적시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시윤은 오전 중에 정신을 차렸다. 난데없이 모건의 연구실에서 눈을 떠 잠시 당황했으나, 청호가 데려다 놨다는 말에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죽는 걸 방치하진 않았구나, 싶어 안심하기도 했다.

모건은 시윤이 달고 있는 영양제 링거를 확인했다. 밤새 꼬박 시윤의 곁을 지킨 그의 눈알이 분홍빛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밥 안 먹은 지 며칠이나 됐어.”

“어…… 팔 다쳤던 날부터요. 한…… 일주일 됐나?”

“……뭐? 그때부터 지금까지 밥을 한 번도 안 먹었다고? 네가 방랑자야?”

“그래도 영양제는 몇 번 챙겨 먹었지 말입니다.”

시윤이 참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모건이 실소했다.

“그러니까 네 꼴이 이 모양이지. 그건 최소한의 영양만 채워 줄 뿐이야. 아사하지 않기 위해 먹는 거라고.”

“음…… 네. 그러니 제가 아직 살아 있는 거겠죠.”

어이없는 시윤의 대답에 모건이 자신의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이럴 때 보면 지나치게 풍족하게 살아온 것도 마냥 좋은 건 아니다. 굶주림과 결핍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말이다.

“밥 먹어. 네가 청호의 힘을 소화하려면 영양제로는 한참 부족해. 에스퍼들은 전장에서만 싸우지. 가이드들은 에스퍼 곁에 있는 모든 순간이 전장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

“그러니까 매일 전장에 있는 것처럼 전투 식량, 고칼로리, 어? 그런 거 열심히 챙겨 먹으란 말이야. 너희 집에 깔리고 깔린 게 음식일 텐데, 손 뻗어서 입에 넣기만 하면 되는 게 그리 어렵던?”

줄줄이 이어지는 꾸지람에 시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이유든 간에 혼나는 건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 잘못이면 응당 감수하겠으나 고작 끼니 따위로 혼나고 싶지 않았다. 대충 흘려듣고 은근히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간이 의자를 끌어온 모건이 시윤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모건이 본격적으로 자신을 꾸짖으려나 보다,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근데 모건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신경질 섞인 표정도 아니었고, 화가 난 표정도 아니었다. 매우 진중하고, 진지했다.

“채 준위.”

그가 나지막이 시윤을 불렀다.

“예, 대령님.”

심상찮은 분위기에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은 시윤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청호가 또 이러면 하기 싫다고 말해.”

“…….”

“못 하겠다고, 아프다고, 폭주가 온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러냐고 소리쳐. 그래도 하면 신고해. 아무리 청호라도 징계를 받을 거야.”

모건 딴에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청호도 아끼고, 시윤도 아끼지만 이번 일은 전적으로 청호의 잘못이었다. 아니, 잘못이라기보다는 행패라고 부르는 게 맞지. 죄 없는 이에게 화풀이하는 꼴이 정말이지 그답지 않았다.

“…….”

시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그잔의 주둥이를 문지르며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러다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하기 싫지 않아요.”

“……미쳤냐?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돌았네?”

모건의 낯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어이가 너무 없으려니, 혹 시윤에게 마조히스트 기질이 있었나 의심까지 됐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얽혀 있기에 청호는 청호대로 미치고 시윤은 시윤대로 돌아 버린 건지. 답답해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경악 가득한 모건에 시윤이 쌉싸름한 미소를 흘렸다.

“대장님한테 빚이 많다니까요. 이런 것쯤은 버틸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빚이 뭐냐고!”

“…….”

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멀뚱히 모건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물린 입에 아집이 가득했다. 네가 내 이를 뽑고 혀를 뽑는다 해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뜻을 줄줄 뿜어 댔다.

모건이 아우…… 짜증 어린 신음을 흘리며 벅벅 얼굴을 문댔다. 그에 시윤이 넌지시 말을 돌렸다.

“……근데 어떻게 몇 시간 만에 저를 고쳐 놓으셨습니까? 대장님 힘이 하나도 안 느껴지지 말입니다. 역시 대단하세요.”

말을 돌리려는 같잖은 수작이었다. 모건이 헛웃음을 흘리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세게 두드렸다.

“갑갑하다, 갑갑해.”

시윤은 욕을 들어 먹고도 뭐가 좋은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정말 신기했다. 어제는 숨 쉬는 것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지끈거리는 근육통과 쓰라린 뒷구멍, 뻐근한 허벅지, 따끔거리는 화상 자국은 여전했지만 청호의 힘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이만하면 일상생활에도 큰 지장은 없으리라.

시윤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가슴팍을 슥슥 문질렀다. 모건이 대단한 천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체감할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통제를 뒤지게 놔서 그래.”

모건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시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로 이렇게 됩니까? 제가 어제 먹은 진통제는 별로 효과가 없던데요. 그 진통제 저도 좀 주십시오.”

어제 본가에 들르기 전에 진통제 열댓 개를 씹어 먹었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근데 모건은 대체 뭘 썼길래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낸 걸까.

순수한 시윤의 표정에 모건이 절레절레 턱을 내저었다.

“진통제 때문만은 아니고, 밤새 네 등급이 A로 올라갔거든. 커진 배수구로 청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거지.”

“……A요? 제가요? 갑자기요?”

시윤은 오랫동안 C를 유지해 왔다. 마지막으로 B였을 때는 청호가 폭주했다는 소식에 헬기를 타고 그가 있는 전장으로 가는 도중 쟀을 때였다. 그 후로 휴와 접촉하지도 않았고, 청호와는 너무 지나치게 많이, 또 깊이 접촉했으니까. 등급이 올라가려야 올라갈 수가 없었다. 이따금 D로 떨어지기만 했지.

그러니 갑자기 A로 올라간 게 기쁘기보다는 황당했다. 더는 바닥을 찍을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된 몸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진화라도 했나.

시윤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모건이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다 순순히 진실을 털어놓았다.

“너한테 휴 머리카락으로 만든 약을 주사했어.”

“……뭐라고요?”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그의 귀가 고양이처럼 쫑긋 올라갔다. 얼마 만에 듣는 휴의 이름인지 모르겠다. 요즘 이래저래 심신에 문제가 많았던 터라 그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다. 근데 이런 희소식이 있을 줄이야!

시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저번엔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랬지. 그땐 연구가 안 끝난 상태였으니까.”

“지금은 끝났고요?”

“응. 덕분에 여태 채혈해 둔 네 피 다 썼다. 또 뽑아야 해.”

“아니, 그건 문제가 안 되지 말입니다. 그래서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네 몸이 결과잖아.”

“어…… 아…….”

시윤이 두 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컴컴하던 제 미래에 드디어 빛이 드나 싶었다. 가이아가 자비롭게도 저를 용서해 주려나 보다. 기분이 들떴다.

“그럼 앞으로도…….”

“안 돼.”

“왜 안 됩니까?”

“휴 머리카락이 없어.”

“……네?”

“우리가 이것저것 실험하느라 이미 반이나 쓴 후였잖아. 요만큼 남은 거로 간신히 하나 만든 거라고.”

모건이 검지와 엄지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길이를 묘사했다. 그에 시윤은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아……. 그럼 효과는 얼마나 지속됩니까.”

“내 계산상으로는 2주. 근데 네가 청호와 어떻게 접촉하냐에 따라 달라져. 2주보다 짧아질 수도 있고, 길어질 수도 있고. 쭉 A급일 수도 있고, B로 떨어질 수도 있고.”

변수가 매우 많다. 가장 좋은 건 2주 내내 A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터였다. 제 인생은 항상 좋은 쪽보단 나쁜 쪽에 무게가 실렸으니까.

시윤이 이해했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A급인데 기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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