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6)

무너진 장벽

대대적으로는 평화로우나, 상세히 보면 평화롭지 않은 나날들이 반복됐다. 팔이 완전히 나았고, 시윤은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청호는 이전에 말했던 대로 전장에 전혀 나가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알렌에게 듣기론, 에로아스 부대원 모두 오랜만의 진득한 휴식에 신이 난 상태란다. 그 말에 시윤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다 정원으로부터 발발한 일인데, 누구든 기쁘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청호와의 스킨십은 하루에 한 번꼴로 이어졌다. 구음으로 끝날 때도 있었고, 정사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여전히 아프고 힘들었다. 그러나 모건이 주사한 약 덕택에 못해도 꾸준히 B등급이 이어지고 있어 이전만큼 고통스럽진 않았다. 코피도 흘리지 않았고.

처음 가이드로 발현했을 때와는 자못 달랐다. 그땐 B급이더라도 그와 키스하면 식도가 찌릿찌릿할 만큼 아팠는데. 지금은 같은 B급이지만 키스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금 센 척해 보자면 섹스도 괜찮은 것 같다.

그새 제가 조금 성장했나, 싶었는데 모건이 그건 아니란다. 꾸준히 이어진 가이딩에 힘이 범람하는 상태였던 청호가 안정 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같은 스킨십을 하더라도 예전만큼 힘을 배출할 필요가 없어져서 자연히 고통이 준 거라고. 만약 청호와 제가 두어 달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나면 예전만큼 아플 거라고도 했다.

퍽 실망스러운 말이긴 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 말인즉슨, 청호가 지금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었으니까. 끙끙 앓으며 그를 받은 게 영 헛수고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신체적인 고통은 여전하나 그건 진통제로 어떻게든 가릴 수 있었다. 청호의 힘은 진통제로 가려지지 않지만, 그냥 몸이 아픈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러다 진통제로 약물 중독에 접어드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지만 일단 아프지 않으니 좋기만 했다.

정원은 내내 조용했다. 또 청호를 괴롭히면 죽어 버릴 거라고 협박한 게 먹힌 듯했다. 자식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임을 알지만, 당시엔 정말 답답하고 속상해서 어쩔 수 없었다.

형들과는 바깥에서 따로 만나 식사했다. 모건의 도움으로 말끔히 나은 팔을 보여 주며 별일 없었다고 안심시켰다. 청호의 아래에 깔려 밤새 고통을 내지른 목 상태가 엉망이긴 했지만, 오랜만의 강의에 신나서 나불거리다 쉬었다고 대충 둘러댔다.

정원과 관련해서는 반 정도만 사실을 털어놨다. 아버지가 제 실수로 다친 팔을 청호의 탓으로 돌렸고, 그것으로 모자라 청호를 대장직에서 해임하려 했다고. 가이딩 관련해서는 입을 싹 닦았다.

시준과 시훈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에게도 정원은 이성적이고 멋진 아버지였으니까. 그래서 시윤의 마음과 늦은 방황을 이해해 주었다.

형들과 식사를 마치고, 번지르르한 레스토랑에서 나왔을 땐 하늘이 붉은색으로 뭉근하게 물들어 있었다. 시윤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아이스크림 사 줄까? 아니면 도넛 먹을래? 아, 과일은 어때? 복숭아가 지금도 나오나? 목에 좋은 건 뭐지? 약국 가서 물어보자.”

시윤의 옆에 딱 달라붙은 시훈이 바쁘게 종알거렸다. 동생 배를 터트려 죽이는 게 오랜 염원인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무엇 하나라도 더 먹이겠다고 성화였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배불러. 지금은 물 한 모금도 더 못 먹어.”

“그럼 사서 들고 가. 부대 들어가서 먹어.”

“됐어.”

한사코 거부하는 시윤에 시훈의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볼 때마다 마르는 동생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대 밥이 영 먹을 게 못 되는 건 알지만 그래도 청호 곁에 있으면 꽤 괜찮은 메뉴가 나올 텐데. 아니면 함께 먹는 이가 불편해서 소화를 못 하는 건가.

시훈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을 때였다. 미끈한 자동차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시준이었다.

“시윤아. 데려다줄게. 타.”

“걸어갈래. 금방 가.”

“뭐가 금방이야. 30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데. 타.”

“배가 너무 불러서 그래.”

시윤이 거절을 거듭했다. 실로 배가 부르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나치게 좋은 시준의 차가 매우 눈에 띄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고급 차는 있다. 물론 군용 지프나 시민들의 주 이동 수단인 오토바이처럼 자가 생산을 하는 건 아니다. 핵 폭격에 살아남은 과거 자동차 공장에서 가져오는데 아무래도 크기와 무게가 제법 나가고, 배송에 신경 쓸 것도 한둘이 아닌지라 내로라하는 가문이 아니고서는 꿈도 못 꿨다.

특히나 스크래치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시준의 스포츠카는 정말 보기 드문 것이라 타고 갔다간 모든 이의 시선을 독점할 수 있을 터였다. 시훈에게도 차가 있긴 하지만, 그는 차보다 오토바이를 좋아해서 그나마 눈에 덜 띈다.

시윤이 재차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시준과 시훈은 포기를 몰랐다.

“그래도 타고 가.”

“그래.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도 먹고. 어?”

“아니면 한 바퀴 드라이브라도 할까?”

“좋은 생각이다. 그러자, 그러자.”

시준이 시윤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시윤이 주춤주춤 조수석 앞에 멈췄을 때였다. ‘삐-’ 하는 사이렌 음이 우렁차게 울렸다. 소리의 시작점은 시준과 시훈의 손목시계였다.

붉은색 알림 창, 간결한 메시지. 포스의 군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메시지다. 긴급 출정 명령. 근데 시준과 시훈의 시계가 동시에 울리는 건 처음 봤다. 그들은 각기 다른 부대 소속이기 때문이다.

“출정 명령이야. 가야겠다. 미안해.”

메시지를 확인한 시준이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시윤이 괘념치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얼른 가야지.”

“밥 잘 챙겨 먹어. 응?”

어느새 시준의 옆자리에 올라탄 시훈이 또 걱정을 내놓았다. 시윤이 그러겠다며 빙긋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바쁘게 떠났다. 멀어지던 차를 바라보던 시윤이 흐으읍,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도 얼른 부대에 돌아가 봐야겠다.

내일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클롭스 연구도 해야 했다. 시윤이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삐-.

삐-.

삐-.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주위 군인들의 손목시계에서 손바닥만 한 붉은 알림 창이 번쩍거렸다. 잠깐 멈칫했던 병사들이 일제히 부대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시윤이 그들을 따라 덩달아 달음박질쳤다.

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지프를 타는 부대도 있었고, 군용기에 오르는 부대도 있었다. 열 맞춰 서 있던 전투기들 역시 비행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어디서 큰 전투가 일어난 모양이다. 시준과 시훈은 물론 부대 전체가 들썩들썩할 정도로 대단한 적이 쳐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연구실로 가려던 시윤은 곧장 숙소로 향했다. 이런 일에 청호가, 그러니까 에로아스 부대가 빠질 리 없었다. 함께 가든, 여기 남든 어쨌든 그를 봐야 했다.

숙소 앞은 바글바글했다. 많은 병사가 출정하기 위해 터진 댐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시윤은 열심히 그들을 거슬렀다. 어깨를 마구 치고 가는 병사들이 버거웠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때, 스쳐 가던 병사의 목소리가 귓구멍에 창살처럼 내리꽂혔다.

“장벽이 무너지다니. 진짜야?”

……뭐라고? 뭐가 무너져? 놀란 시윤이 발을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보이는 거라곤 와글와글한 뒤통수들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시윤을 떠미는 병사들이 이런저런 문장들을 버리듯 던지고 갔다.

“벌써 민간인 사상자가 만 명이나…….”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와서…….”

“이 정도 침입은 한 번도…….”

똑바로 들리지도 않았으나 무엇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장벽이 무너져, 민간인 사상자, 밀고 들어와. 조각난 단어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잠깐 넋을 놓은 사이, 발이 엉켰다.

“헉…….”

시윤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덩치 좋은 병사들은 시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밀어붙였다. 몸이 순식간에 기울고, 눈앞이 뒤집혔다. 전투기가 휙휙 날아다니는 하늘이 시야에 들어찼다.

시윤이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버둥버둥 팔다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하늘이 멀어지고, 병사들의 머리가 보이더니 곧 어깨가, 흔들리는 팔이 보였다. 군화가 땅을 짓밟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왔다.

이대로 바닥으로 넘어지면 분명 크게 다칠 텐데. 수백 개의 군화가 저를 뭉개고 가겠지.

“잠깐만, 잠깐만……!”

시윤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으나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모든 걸 포기한 시윤이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커다란 손 하나가 하늘을 가리며 다가왔다. 그 손이 시윤의 팔꿈치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휙 당겨 시윤을 어둠 속에서 구해 냈다.

인파 밖으로 얼굴을 내민 시윤이 깊은 수심에 있다가 뭍으로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깐 놀란 마음을 추스르다 뒤늦게 자신을 구해 낸 이를 바라봤다.

청호였다. 오랜만에 전투복을 입은 그가 시윤을 짐처럼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폴을 비롯한 에로아스 병사 몇몇이 보였다.

“대, 대장님…….”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청호는 알은체 한번 않고 격납고를 향해 걸었다. 시윤에게는 모진 파도 같던 인파였는데, 청호 앞으론 불도저로 민 것처럼 길이 만들어졌다. 청호를 알아본 이들이 알아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 덕분이다.

가끔 청호를 구경하느라 멀뚱히 선 병사들은 폴이 짜증스레 툭툭 밀어 냈다.

청호와 시윤은 금세 격납고에 다다랐다. 에로아스 전용으로 붉은 띠가 둘린 군용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호가 그제야 시윤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시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청호는 흘끔 시윤을 한 번 보고는 뒤를 돌았다. 에로아스의 출정 준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멀어지는 청호를 보던 시윤이 후다닥 그를 따라갔다.

“저도, 저도 같이 갑니까?”

“그럼?”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청호의 반응에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가는 걸 싫어할 줄 알았는데. 아니, 저와 함께 있는 걸 싫어할 줄 알았다는 게 맞겠다. 근데 갑자기 왜……. 모건이 ‘하루걸러 하루씩 떡 치는 탓에 근 한 달은 폭주할 일 없을 거다’라고 했는데.

모호한 시윤의 표정에 청호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벽이 뚫렸어. 부대 80프로가 전투지로 이동 중이고. 여기 혼자 있으면 클롭스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겠지. 그래도 가기 싫다면 강요할 생각 없어. 돌아가.”

“아니요, 아닙니다. 대장님과 함께 가고 싶어요.”

시윤이 팩팩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원하는 답을 들은 청호가 등을 돌렸다. 그의 뒤에 서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병사들이 밀린 보고를 줄줄이 읊었다.

시윤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멀뚱히 서서 청호의 널따란 등을 바라보는데 폴이 다가왔다. 그가 두툼한 짐 꾸러미를 내밀었다. 시윤의 배낭이었다. 간단한 의료 키트와 연구용품, 그리고 보라색 총이 들어 있었다.

“다른 건 됐고, 무기만 한 번 더 점검해. 수류탄은 쓸 줄 알지?”

“예.”

“저기서 몇 개 챙겨. 나이프 같은 것도 챙기고.”

폴이 격납고 한가운데에 산을 이루고 있는 무기 더미를 가리켰다. 동시에 출정하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아예 상자째로 쌓아 놨다.

“예.”

시윤이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하면 곧장 뒤로 빠져. 가이드들이 대기하는 곳이 있을 거야. 거기서 기다려. 대장님께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폴이 툭툭 시윤의 어깨를 두드리곤 자리를 뜨려 했다. 시윤이 슬쩍 그의 소매를 잡았다가 놨다.

“저…… 대령님.”

“왜.”

“벽이 무너졌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아직 정식 소속 부대가 없어서 출전 명령 메시지를 못 받았지 말입니다.”

“동쪽 끝에 장벽 새로 짓던 거 알지?”

“예. 압니다.”

“거기로 들어온 모양이야. 예상 클롭스가 10만이래. 어쩌면 더 많을 수도 있고.”

“아…….”

시윤이 신음 같은 한탄을 흘렸다.

시초의 포스는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군사는 적은데 땅이 넓으면 방어에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추후 방랑자를 구하고 포스에 귀속시킴으로써 몸집을 키워 갔다. 자연히 병력이 늘어나고, 토지가 모자라졌다. 그럴 때마다 벽 한 부분을 터 영토를 확장했다.

에스퍼가 많아지고 영토를 확장, 관리하는 노련함이 늘면서 이제는 땅이 부족하지 않아도 장벽을 밀고, 새로이 짓곤 했다. 더 크고 단단하게 짓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산과 들, 바다 등 자연을 소유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포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렇게 차츰차츰 영토를 늘려 가다가 언젠가 인간이 다시 지구의 주인이 되는 거였다.

근데 그 벽이 뚫린 것이다. 시윤이 알기론, 벽이 뚫린 건 수십 년 전, 포스 개국 초기에 한 번 있었던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직 완공되기 전이라 약한 벽이긴 하지만, 아무튼 클롭스가 포스까지 쳐들어온 건 매우 이례적이었다.

더군다나 10만 클롭스라니. 온 병사들에게 긴급 출동 명령이 올 만도 했다. 시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보통 일이 아닐 거라 가늠은 했다만, 이런 상황일 줄이야.

“그쪽에 터를 잡은 민간인들이 대거 죽었나 봐. 먹히거나, 밟히거나, 찢기거나 그랬겠지.”

더해진 폴의 말은 시윤을 심각하다 못해 암울하게 만들었다. 무참히 학살당했을 것이다. 벽을 새로 짓던 곳은 한적한 들판이 펼쳐진 지역이었다. 소,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을 키우던 곳인데 아무래도 중요 지역이 아니고, 병사들을 배치하기도 모호한 환경이라 안전에 구멍이 많았다.

시윤이 배낭을 꽉 움켜쥐었다.

“확인된 클롭스 종은 무엇입니까?”

“없는 걸 찾는 게 빠를걸.”

“아…….”

시윤이 바보 같은 얼굴로 감탄했다. 하긴, 몇백도 아니고 10만이면 시윤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클롭스가 있을지도 몰랐다.

폴이 준비 끝나면 군용기에 탑승하라는 말을 끝으로 시윤의 곁을 떠났다. 잠시 멍하니 있던 시윤이 무기 더미에서 이것저것을 챙겼다. 그리고 군용기로 향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청호가 보였다.

정원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당분간 출정하지 않겠노라 했던 그가 왜 이리 급하게 출정하나 했더니. 사람들이 죽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 그랬겠구나, 싶었다.

군용기는 금세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전 작전처럼 먼 타지가 아니라 포스 내이다 보니 이동 시간이 길지 않았다. 청량하던 창밖이 퀴퀴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쿵쿵, 알 수 없는 굉음도 들려왔다. 군용기의 엔진 소리도 매우 큰데, 그것을 뚫고 들어올 정도면 대체 아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자욱한 연기에 가려 땅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 두려웠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시윤이 주머니에서 채혈 기계를 꺼냈다. 꾹 엄지를 눌렀다가 떼자 ‘B-’라는 알파벳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괜찮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 청호를 보필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을 터였다.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채혈 기계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때, 도착 1분 전을 나타내는 사이렌이 웽웽 세차게 울렸다. 바르게 앉아 있던 병사들이 착륙 준비를 시작했다. 총의 안전핀을 풀고, 탄환을 확인하고, 전투모를 바짝 조였다.

에로아스의 군용기는 전장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격추될 확률이 높고, 착륙 도중에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내리자마자 열 맞춰 섰다. 에로아스를 기다리던 병사 몇몇이 청호에게 달려가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멀찌감치 선 시윤이 심각한 표정의 청호를 바라봤다. 그러고 있으니 낯선 병사 하나가 시윤을 이끌었다.

“채 준위님. 따라오십시오. 가이드 막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시윤이 얼른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면서도 눈은 자꾸만 청호를 좇았다. 인사도 못 했는데. 다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해 주고 싶었는데.

큰 전투이니만큼 위험한 상황이 많을 것이다. 병사들을 지켜야 한다는 중압감도 만만치 않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은 당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늦어지는 시윤의 발걸음에 병사가 나지막이 재촉했다. 눈썹을 들썩인 시윤이 미안해요, 짧게 사과하며 발을 빠르게 놀렸다.

에로아스 부대에서 가이드 막사로 이동하는 건 시윤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로아스 부대의 가이드들은 일반 가이드들과 다르다. 비록 신체 능력이 에스퍼만큼 뛰어나진 않지만, 무기를 다루는 데에는 매우 능통했다.

아무래도 에로아스는 다른 부대에 비해 소수로 움직이고, 그런 만큼 가이드들을 따로 모아 지킬 수 없었으니까. 가이드라는 역할보다는 병사의 역할에 충실히 임했다.

시윤은 그들처럼 전투에 임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괜히 전장에 뛰어들었다간 피해만 줄 게 뻔했다. 청호는 공격은 개뿔, 저를 지키느라 온 신경을 쏟아야 할 터였다.

시윤이 앞서가는 병사를 따르며 가방을 앞으로 멨다. 그리고 청호가 손수 만들어 준 보라색 총을 꺼내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어쨌든 이곳도 전장이긴 하니까. 남을 지키진 못하더라도 지켜지고 싶진 않았다.

자그마한 나이프 하나까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시윤이 가방을 다시 뒤로 메려 할 때였다. 어깨 위로 따뜻하면서도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화들짝 놀란 시윤이 뒤를 돌아봤다. 청호가 서 있었다. 제 어깨에 얹힌 것은 그의 코트였고. 붉은색 견장이 서늘한 바람에 휘날렸다.

“……대장님?”

“입어.”

“예?”

“모건이 만든 거라서 타지도, 찢기지도 않아. 입어.”

“그럼 대장님은…….”

시윤이 주제넘게 반론을 뻐끔거렸다. 그러자 청호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곧 배시시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무슨 이유든 간에 제가 죽지 않길 바라는 청호의 마음이 느껴졌다. 전장인 것도 잊을 만큼 좋았다.

“감사합니다.”

시윤의 감사 인사에 청호는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흘끔 시윤의 곁에 선 길잡이 병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청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경례하고 있던 그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누가 척추를 위로 당기는 듯 복부에 힘이 들어갔다. 대단한 위압감이었다.

“며, 명령하실 일 있으십니까?”

그의 시선을 참다못한 병사가 먼저 입을 뗐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청호가 명령하는 거라면 목숨을 바쳐 완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그러나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병사는 그가 하려던 말을 알 수 있었다. 시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물어 너 역시 죽게 될 거라는 말을 하려 했음이 틀림없었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시윤과 잠깐 눈을 맞춘 청호가 뒤를 돌았다. 기다리던 병사들이 그를 따라 우르르 멀어졌다.

가이드 막사는 막사라기보다는 널따란 창고 같았다. 실로 여기저기 사료 포대와 갈퀴 등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 도시 자체가 그랬다. 시윤은 머지않은 과거에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놀러 온 적이 있었다. 넓은 들판에서 뛰노는 양을 구경하고, 승마도 배웠다. 집은 대부분 2층에서 3층 정도였고, 붉은색의 지붕에 아이보리색 벽이 매우 조화로운 도시였다. 집 앞마다 크고 작은 꽃밭이 있었고, 나무로 만든 그네가 걸려 있는 곳도 있었다.

지금은 폭격으로 인해 재가 뒤덮이고, 건물도 부서지고 그을려 전과 같은 곳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음이 착잡했다. 포스의 중심부와 달리 느긋하게, 또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그럼 가 보겠습니다.”

시윤을 막사까지 안내하는 임무를 마친 병사가 경례했다. 시윤이 흐리게 웃으며 경례를 받았다.

시윤은 입구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손목시계만 만지작거렸다. 매우 넓은 공간이고 전투에 참여한 에스퍼가 많으니 가이드 역시 잔뜩 있겠지만, 섣불리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낯선 이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

근데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다가왔다.

“채 준위.”

“네, 네?”

시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대령 계급의 병사가 시윤의 앞에 서 있었다. 노란 명찰로 보아 가이드였고, 샛노란 금발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대령이라면 못해도 A급은 되는 가이드이리라. 계급을 확인한 시윤이 벌떡 일어나 경례했다.

“주, 준위 채시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으로 들어와.”

“어…… 아…… 어째서입니까?”

“원수님 지시야. 최대한 안전을 보장할 것.”

“아…….”

아버지가 또……. 시윤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다지도 열심히 저를 수치스럽게 만드시는지 모르겠다.

말을 마친 대령이 뒤를 돌았다. 시윤이 쭈뼛쭈뼛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막사 안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막사 안은 예상했던 것처럼 사람이 많았다.

……근데 희한하지. 모두가 이상하리만큼 시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한둘이 아니고 모두가. 사실 시윤은 쏟아지는 시선에 익숙한 편이었다. 강의실에 서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세 시간씩 수백 개의 눈알을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근데 지금 이 시선들은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강의실에서 받는 시선은 뭐랄까, 알맹이가 없다. 시윤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시윤이 하는 말에 집중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의 시선은 오롯이 시윤 그 자체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윤의 얼굴, 시윤의 몸, 시윤의 몸짓, 시윤의 걸음걸이. 헌데 그게 또 혐오 어린 시선은 아니었다. 호기심과도 비슷하고, 동경과도 비슷했다.

동경이라니. 그런 시선은 받아 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받을 일이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모든 이가 제가 누군지 알 수도 없……. 거기까지 생각하던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제 어깨에 걸쳐진 코트가 누구의 것인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두툼한 붉은색 견장. 금색 체인. 양쪽 어깨에 박혀 있는 별 네 개의 반짝이는 엠블럼. 누가 봐도 에로아스 청호 대장의 코트였다. 제가 온몸으로 청호의 가이드라 외치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

시윤이 속으로 낭패를 삼켰다.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 했거늘. 물 건너간 듯했다.

대령이 안내해 준 자리는 창고 깊숙한 곳이었다. 창고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길었다. 중간중간 문이 따로 나 있을 정도였다. 의자는 앞서 앉아 있던 간이 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안락감이 달랐다. 밀집된 사람들 덕에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령은 몸조심하라는 통상적인 말과 함께 떠났다. 이제 시윤은 많은 시선과 홀로 싸워야 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이따금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고, 묵직한 폭발음이 공기 중으로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여기저기서 걱정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윤이 청호의 코트 소맷자락을 매만지며 두려움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채……시윤 준위님 맞습니까?”

옆에 앉아 있던 병사 하나가 넌지시 말을 붙여 왔다. 벌써 수십 분 전부터 저를 훔쳐보던 이라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그녀는 어린 티가 줄줄 흘렀다. 시윤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 맞아요.”

“와…… 영광입니다. 저는 M5 부대 소속 상사 소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를 만나 영광일 게 뭐가 있나. 사람 하나 구해 본 적 없는 애송이일 뿐인데. 청호의 위상을 빼먹는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청호 대장님 가이드십니까?”

병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가 감탄하며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다.

“진짜…… 대단하십니다.”

“딱히……. 제가 하는 게 별로 없어서요.”

“에이, 대장님 가이드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 말입니다. 가이아가 청호 대장님 가이드로 아무나 창조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분명 대단한 일을 하실 겁니다.”

“…….”

민망할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다. 시윤은 쥐구멍에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가 타고나기를 C급이라는 걸 알면 그런 말 못 할 텐데.

시윤은 어떻게 이 난감한 대화를 끝내나, 고민했다. 헌데 소피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는 게 맞겠다. 반려 에스퍼가 폭주했다는 알림이 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그녀 말고도 많은 가이드들이 불려 나갔다가 돌아왔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자도 있었다. 빈틈없이 차 있던 의자에 듬성듬성 구멍이 생겼다.

그럴수록 시윤의 뒤꿈치가 위로 들렸다. 청호는 무사하려나, 왜 가이드들이 돌아오지 않나, 이 전투는 언제쯤 끝나려나, 하는 의문이 웽웽 모기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의미한 기다림이 괴로워질 무렵이었다. 창고 한편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끌리고,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다가 모이길 반복했다. 시윤을 비롯한 가이드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뺐다.

그 순간, 인파 틈에서 피로 물든 병사가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피에 흠뻑 젖은 간호복을 입은 의무병도 있었다.

“임시 병동이 가득 찼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를 벽 쪽으로 죄 밀어 환자를 눕힐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부상병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중상이었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없거나, 배가 찢겨 내장을 자기 손으로 받치고 있거나, 얼굴 가죽 반절이 벗겨졌거나, 클롭스가 쏜 염산과 독 등에 맞아 피부가 타들어 갔다.

건조하던 흙바닥이 그들의 피로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고요하던 창고가 고통에 짓눌린 비명으로 가득 찼다.

한쪽으로 모인 가이드들이 어쩔 줄 모르고 동동 발을 굴렀다. 각자의 반려 에스퍼를 걱정하고, 혹 부상병 중에 아는 얼굴이 있는 게 아닌가 열심히 눈알을 굴려 댔다.

잠시 그들과 같이 행동하던 시윤이 흠칫 몸을 굳혔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의무병이 지나치게 모자랐다.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병사가 너무 많았다. 하긴, 병동도 가득 찼는데 의무병이 남을 리 없지.

시윤이 망설임 없이 가까운 의무병을 향해 다가갔다.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치료할 줄 아십니까?”

“잘……은 못하는데 지혈이나 붕대 정도는 감을 수 있어요.”

“아, 그거라도 부탁드립니다.”

의무병이 종아리가 썩어 가는 병사의 허벅지를 꽉 동여매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시윤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청호의 코트에 팔을 꿰었다. 그리고 기다란 소매를 둘둘 접어 올렸다. 다음으론 의료용 장갑을 찾아 끼고 지혈제와 붕대 등을 한 아름 챙겼다.

시윤은 열심히 움직였다. 서툰 손놀림이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전장에서 사망하는 병사의 가장 흔한 사인은 과다 출혈 쇼크사이다. 그러니 의무병이 올 때까지 병사를 살려 놓는 게 최우선이었다.

시윤은 미처 자신의 손이 닿기도 전에 죽어 버린 병사들은 애써 못 본 척했다. 지금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이 없었다. 그럴 틈에 하나라도 더 살려야 했다. 돌아가면 의료 관련 공부를 시작하겠노라 마음먹기도 했다.

멀뚱히 서 있던 가이드들도 혈액 팩, 알코올 등 의료용품을 챙겨 의무병의 수발을 들었다. 병사들은 비명을 질렀고, 사방에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창고는 또 다른 방식의 전쟁통이 됐다.

시윤이 턱 끝에 맺힌 핏방울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가끔 혈관이 잘못 찢긴 병사들은 피를 분수처럼 쏟아 냈다. 그 탓에 시윤은 사화산 전투 이후로 처음, 피로 샤워한다는 게 뭔지 경험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훌떡 지났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상황에 시간이 지나치게 빠르게 흘렀다.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여기저기 뛰어다닌 탓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딱 5분만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시윤을 향해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까 시윤에게 자리를 안내해 준 금발의 대령이었다.

“저…… 채 준위.”

“예?”

“청호 대장님이 오셨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님이요? 왜요? 설마 폭주하셨습니까? 아니면 전투가 끝났나요?”

“그게 아니라…… 다치셨어.”

시윤의 심장이 쿵,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눈동자는 좌우로 파르르 경련했다. 얼마나 다쳤는데. 얼마나 다쳤기에 그 대단한 청호가 치료를 받으러 여기까지 온 건데. 시윤이 쥐고 있던 붕대를 툭 놓쳤다.

대령이 그런 시윤의 팔꿈치를 쥐고 앞으로 이끌었다. 비척비척 끌려가던 시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샌가 대령보다 앞서가고 있었다.

청호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분명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구석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시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곳에 청호가 있다는 걸.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람들을 헤쳤다. 제발, 제발, 제발. 속으로는 의미 없는 단어를 반복해 외쳤다. 청호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처음엔 다가오지 말라고 시윤을 밀어 냈다. 그러다 시윤의 얼굴을 확인하곤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청호를 발견한 시윤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청호는 오른쪽 어깨부터 심장 바로 위의 가슴까지 길게 썰려 있었다. 정말 썰려 있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이 안 됐다. 시윤의 몸뚱이만 한 도끼에 내려 찍힌 듯한 상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호의 셔츠가 여기저기 난도질되어 있었다. 이미 무수한 상처가 그의 몸에 생겼다 사라졌음을 뜻했다.

그것들은 아마 적당히 심각한 상처들이었을 것이다. 딱히 병동에 들르지 않아도 금세 아물었을 상처. 허나 지금처럼 큰 상처는 아무리 청호라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 봐야 한 시간 정도겠지만, 전장에서 한 시간은 승패가 결정 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아…….”

시윤이 가녀린 탄식을 흘렸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 의무병에게 어깨를 맡기고 있던 청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잠깐 주위의 모든 소음이 증발하고, 인영 역시 사라졌다. 오롯이 둘만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윤의 눈썹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핏자국이 여기저기 튄 청호의 얼굴을 보니 바깥이 얼마나 지옥 같을지 손톱만큼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시윤이 청호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다치셨습니까?”

“다쳤어?”

똑같은 질문이 서로의 입에서 나왔다. 시윤의 눈썹이 위로 봉긋하게 올라갔다. 다쳤냐니. 내가 여기서 다칠 일이 무어가 있나.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까지 생각하던 시윤이 피범벅인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아마 얼굴도 청호 못지않게 피범벅일 터였다.

“아니요. 제 피 아닙니다. 치료를 돕고 있었어요.”

“아아, 그래.”

매섭게 곧추섰던 청호의 눈매가 한결 느슨해졌다. 그가 의무병을 바라봤다. 얼른 끝내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사실 청호는 어디가 어떻게 다쳐도 의무병의 손을 빌리는 법이 없었다.

근데 이번엔 하필 어깨를 다쳐서 어쩔 수 없었다. 근육이 잘려 오른팔이 아예 움직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오른팔을 움직이지 못하면 총이나 칼을 쓰는 데에 제한이 많았다. 클롭스의 역겨운 면상에 주먹을 꽂아 줄 수도 없었다.

능력만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저를 노리고 덤벼드는 숫자가 매우 많으므로 결국 팔을 쓰지 못하면 방어에 심히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머리가 똑 떨어져 버리기라도 하면 아무리 저라도 살아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온 것이다. 대충이나마 기워 놓아야 몇 분이라도 빨리 붙으니까. 그 후 제 어깨에 도끼를 박은 놈을 아주 공들여 조각내 줄 생각이었다.

헌데 시윤이 여기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청호를 안내한 병사가 이곳을 임시 병동이라 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윤이 청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니.”

청호가 시윤의 손을 털어 냈다. 시윤이 살풋 미간을 구겼다. 그가 제게, 정확히는 제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어깨가 너덜너덜해진 채면서 굳이 저를 밀어 내야 하나. 어차피 당신을 가이딩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난데?

원망과 동시에 짜증, 그리고 오기가 솟구쳤다. 시윤이 눈을 부릅뜨고 청호를 노려봤다. 그 시선에 청호가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반항기 가득한 시윤의 눈동자가 영 낯설었다. 낯선 시윤이라니.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청호가 모진 말을 쏘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시윤이 냅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대로 입술이 맞물렸다.

병사들이 헛숨을 삼키며 얼른 뒤를 돌았다. 청호의 어깨를 치료하던 의무병은 상처에 얼굴을 처박을 듯 고개를 숙이고 치료를 이어 나갔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스킨십에 청호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 시윤은 그러든 말든, 청호의 목을 감싸고 적극적으로 입술을 쪼아먹었다. 내쳐질 각오도 했다.

청호가 길게 숨을 내뿜었다. 그의 목젖이 꿀렁거리는 게, 어금니를 짓씹는 게, 맞붙은 입술을 통해 선연히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 그것 말고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제 딴에는 나름대로 가이딩이라고 한 건데. 별로였나.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시윤이 슬쩍 눈을 뜨려 할 때였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싸더니 몸이 훌쩍 위로 떴다. 종착지는 청호의 무릎 위였다. 그 후엔 뒤통수가 잡혔다.

놀란 시윤이 입을 뻐끔 벌렸다. 그 틈으로 청호의 뜨끈한 혀가 쏟아졌다.

키스는 이런 곳에서 이루어지기 뭣할 만큼 진득하고 격렬했다. 시윤은 자신의 입 안 여기저기를 공격적으로 들쑤시고 다니는 혀를 피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할 거였으면 먼저 덤비지도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당장 이곳에서 바지를 벗을 의향도 차고 넘쳤다.

“으응…….”

청호가 시윤의 아랫입술을 쪽쪽 빨았다. 그러다 고개를 꺾고 입술을 보다 깊숙이 섞기 시작했다. 타액이 얽히고 숨결이 엉겨 붙었다. 혀가 거칠게 비벼졌다. 가끔은 청호가 혀를 통째로 쭉쭉 빨아 뿌리가 시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윤은 청호의 키스에 이제 꽤 적응한 상태였다. 그의 혀에 응해 주며 목덜미를 쓰다듬거나, 귀를 매만졌다. 여전히 그의 귓불에 상주하고 있는 귀걸이가 손가락 끝에 걸려 왔다. 그것을 살살 문질렀다.

언젠가 빼 주겠다고 했는데. 그 언젠가가 과연 와 줄는지 모르겠다.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이따금 숨이 모자란 시윤이 툭툭 청호의 가슴팍을 두드렸으나 청호는 물러나 주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전투 중엔 체온이 올라간다. 뇌가 부글부글 끓고,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앞에 있는 적을 잡아 죽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전신을 옥죄었다. 그렇게 한참 전장에서 구르다 보면 오감은 죽고 기이한 욕구들이 몸을 지배한다.

뭐든 움켜쥐고 싶고, 입에 넣고 싶고, 파괴하고 싶은 그런 괴이한 욕망 말이다. 매우 강렬한 욕망이라 목구멍이 바짝바짝 마르고 핏줄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런 와중에 만지는 시윤은 정말이지…… 황무지에 내리는 세찬 비 같았다. 아주 차갑고, 상쾌하고, 청량한 비. 팔과 입을 벌리고 어떻게든 더 받아 내고 싶은 그런 환상적인 비. 그래서 청호는 도무지 시윤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춥,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시윤이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빵빵하게 부푼 폐가 괴로웠다. 청호가 집요하게 물고 빤 입가는 홧홧했다. 그래도 다행히 B급이라 그의 힘을 삼키는 게 아프진 않았다.

청호와 코를 맞댄 시윤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다치지 마세요.”

“……안 죽어.”

“압니다. 금방 낫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다치지 마세요.”

시윤이 피를 콸콸 쏟아 내는 청호의 어깨 주위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시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그렇게 수 초가 흘렀을 때였다. 갈라진 살을 능숙하게 꿰매던 의무병이 말했다.

“대장님. 치료 끝났습니다.”

그 말에 청호가 어깨를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아직 근육이 완벽히 붙진 않았으나 팔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거기다 예상치 않게 시윤에게 가이딩까지 받았으니, 이 정도면 다시 전장에 복귀할 때쯤 모두 아물어 있으리라.

시윤이 눈치껏 청호의 무릎 위에서 내려왔다. 청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걸레짝이 된 셔츠를 벗고, 병사가 내미는 새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시윤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를 도와 단추 몇 개를 채워 주기도 했다.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요.”

“…….”

청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윤은 괜찮았다. 그가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긍정을 봤기 때문이다. 시윤이 미련 없이 뒤로 물러났다. 청호는 다시 세상을 구하러 떠나야 하고, 저는 제 자리에서 하찮게나마 최선을 다하면 됐다.

눈을 내리깐 시윤이 막 뒤를 돌려 할 때였다. 큼지막한 손이 볼을 감싸왔다.

“피 묻히지 마.”

“네?”

“너랑 안 어울려.”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볼을 닦아 냈다. 시윤의 피가 아님을 알았을 때 안심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타인’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도 영 꼴 보기가 싫었다.

시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시키는 것이라면 뭔들 못 하겠나.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피를 묻히지 말라는 건데, 못 지킬 이유가 없었다.

청호는 시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막사를 나섰다. 그를 따라 움직이는 병사들 덕에 그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런데도 시윤은 청호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아…….”

그렇게 청호가 떠나고, 시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기지개도 한 번 켰다. 그 후 뒤를 돌아 피가 낭자한 부상병들에게로 뛰어들었다.

부상병은 끝없이 밀려왔다. 피에 휩싸여 몇 시간이 지났는지, 전장 상황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드문드문 아는 얼굴도 만났다. 시훈과 시준 부대의 병사도 있었고, 종우도 봤다. 다행히 다쳐서 온 건 아니었고, 다친 병사를 끌고 왔다. 바빠서 알은체도 제대로 못 했다.

벽에 기대선 시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물병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미적지근한 물이 목구멍을 적시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잠시 쉬는 김에 영양제도 몇 개 집어 먹었다.

그렇게 숨을 고르고 있는데, 그림자 하나가 다가온다 싶더니 누군가가 시윤을 향해 쓰러졌다. 시윤이 먹던 물병도 떨어트린 채 그를 받쳐 안았다. 일렁이는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병사였다.

“어딜 다쳤어요? 걸을 순 있어요? 여기 누워 볼래요?”

시윤이 가까운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조심히 눕히고,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피가 보이진 않는데. 어디가 부러졌나. 시윤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는데,

“안녕?”

병사가 난데없이 인사를 해 왔다. 시윤이 턱을 앞으로 뺐다. 전장에서든, 부대 내에서든 제게 ‘안녕?’이라고 인사할 이는 형들과 모건이 다인데, 그들은 붉은 머리가 아닐뿐더러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리 없었다.

시윤이 뒤늦게 병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깐 숨을 멈춰야 했다.

“당신…….”

휴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휴가 어버버, 멍청한 표정을 한 시윤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시윤은 눈을 깜빡이고 또 깜빡였다. 진짜 휴인가. 어떻게 여기에. 제가 여기 있는 건 또 어찌 알고.

시윤이 멍하니 굳어 있으니, 휴가 시윤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음, 내 머리카락 먹었구나?”

“머, 먹은 건 아니고…….”

“모건이 만들어 줬니?”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는 이상하고 나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단단히 굳은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근데 희한하지. 도무지 밉지가 않았다. 제 능력을 높여 줄 수 있는 이라 그런가. 이렇게 나타난 게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꽃밭에서 본 댕강 잘린 머리들을 기억한다. 분명 죽었음에도 기생충에 조종당해 움직이던 병사들도 기억한다. 청호의 능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던 상황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휴는 매우,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윤이 뾰족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왜 왔어요? 또 사람들을 죽일 건가요?”

시윤이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구태여 휴가 손쓰지 않아도 당장 죽을 이들이 가득했다. 그래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휴의 노리개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시윤의 적의에 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오늘은 별로. 시체가 즐비한 날이잖니.”

“그럼 왜 왔어요?”

“너 만나러.”

“날 왜요.”

“자세히 말하면 널 구하러 왔다는 게 맞겠구나.”

휴가 시윤의 옷깃을, 그러니까 청호 코트의 옷깃을 매만졌다. 시윤이 매섭게 그 손을 쳐 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절 만나러 왔다니. 절 구하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또 손목에 이를 박겠다는 뜻일까? ……그래 주면 고맙겠는데.

시윤이 그 몰래 입맛을 다셨다. 그러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쳐다봤다.

“구하러 왔다니. 무슨 말이에요?”

“음…… 여기서 할 말은 아니고, 잠깐 나갈까?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지 않니.”

휴가 보란 듯이 사위를 훑었다. 북적이고, 시끄럽고, 굴러다니는 눈이 많다. 시윤만 집요하게 관찰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없으란 법도 없었다.

“……싫어요.”

시윤이 부정을 내놓았다. 사실 조금 혹하긴 했으나, 그가 제 능력을 높여 주기 위해 왔을 리는 없고.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라 께름칙했다.

시윤의 단호한 거절에 휴가 빙긋 보기 좋게 미소 지었다. 잘생긴 눈이 휘고, 도독한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고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안 나가면 여기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일 거야.”

“……뭐?”

“도륙을 낼 수도 있고, 산 채로 불을 지를 수도 있고, 아니면 저번처럼 꽃밭을 하나 만들까?”

인자를 뒤집어쓴 잔인한 질문이었다. 시윤이 바위처럼 굳었다. 거짓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그저 협박이겠지. 겁을 주려는 속셈이겠지. 애써 그리 생각했으나 휴의 잔잔한 붉은 눈동자엔 농담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실로, 휴는 그 모든 걸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벌떡 일어난 시윤이 서늘한 눈으로 휴를 바라봤다.

“나가요. 당장.”

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시윤을 따라 일어섰다. 흙이 묻은 옷을 툭툭 턴 그가 시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윤이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았다. 휴가 기다렸다는 듯 시윤을 품으로 당겼다.

휴는 신기하리만큼 빠르고 조용하게 움직였다. 꼭 땅을 딛는 게 아니라 공기를 딛으며 걷는 것 같았다. 잠시 멍하니 있다 보니 금세 바깥이었다.

휴가 시윤을 내려놓은 곳은 막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멀쩡한 건물이 많은 게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은 듯했다. 사위는 고요했다. 주민들은 모두 대피한 모양이었다.

거무튀튀한 하늘 너머로 새벽 특유의 푸른 기가 넘실거렸다. 이제 막 일출을 앞둔 시각이었다. 화약 가루와 재가 섞인 공기가 몹시 탁했다. 목이 간질간질하고 눈알도 따끔따끔했다.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던 시윤이 휴를 바라봤다.

“자. 나왔어요. 이제 말해요. 날 구하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더니 큼지막한 나무 아래의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윤이 콰득 얼굴을 구겼다. 휴는 얄미울 정도로 모호한 존재다. 생김새도, 하는 행동도, 정체도, 말도. 뭘 알려 주려면 제대로 알려 줘야지. 두루뭉술하게 말을 돌리는 꼴이 정말이지 별로였다.

입을 앙다문 시윤이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휴는 그 시선을 기껍게 받아 냈다. 시윤이 허리춤에 꽂아 놓은 총을 만지작거리는 걸 모르는 듯했다. 어쩌면 총 따위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

“…….”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 낙엽이 뒹구는 소리, 저 멀리서 쿵쿵 무언가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규칙 없이 뒤섞였다.

휴는 그 이후로 별다른 말이 없었다. 딱히 시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없는 듯했다. 그에 시윤은 괜히 안달이 났다. 저는 휴에게 원하는 게 명확히 있었기 때문이다.

정적이 길어지고, 시윤의 뒤꿈치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휴가 이대로 떠나면 어쩌나. 쉽게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청호를 가이딩해야 하는데. 하루 이틀 후면 저는 다시 C급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시윤이 청호의 코트를 바짝 여몄다. 그리고 넌지시 입을 뗐다.

“저…….”

“응.”

“저, 그…….”

“응.”

벤치에 앉아 길게 다리를 꼰 휴는 눈을 감고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붉은 머리칼이 불처럼 일렁였다. 시윤이 흘깃흘깃 그 모습을 훔쳐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러다 이내 주먹을 꾹 말아 쥐고 또박또박 말했다.

“머리카락 좀 주세요.”

“……뭐?”

“세, 세 개만, 아니, 다섯 개만…….”

휴가 눈을 크게 떴다. 시윤은 꼭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결의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잠시 굳었던 휴가 푸하하, 박장대소했다.

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웃지.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물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머리카락을 좀 달라고 하면 황당하고 우스울 것이다. 그러나 휴는 아니다. 절 살피다 머리카락을 ‘먹었다’라고 표현한 걸 보면, 그가 제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땐 달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줘 놓고.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가. 지금 와서 저리 호쾌하게 비웃는 건 뭔가.

평생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 본 적 없는 시윤이라 지금 이 상황이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휴는 한참이나 웃었다. 그러다 찔끔 맺힌 눈물을 닦으며 시윤을 바라봤다.

“세상에, 시윤아. 어쩜 이리도 사랑스럽니.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우면 누가 널 미워할 수 있겠어.”

“……미워해요?”

이건 또 무슨 문맥에 어긋나는 말인가. 누가 절 미워하는데? 아니, 꼭 누가 절 미워해야 한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휴가 이상한 건 진즉부터 알았지만, 오늘은 유독 괴이한 말을 많이 했다. 절 구하러 왔다면서 그 원인을 알려 주지 않는 것도 그랬다.

해괴하게 구겨진 시윤의 낯에 휴가 됐다는 듯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다리를 반대로 꼬곤 벤치 옆자리를 토닥였다. 이리 와 앉으라는 뜻 같았다.

쭈뼛거리던 시윤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쨌든 저는 부탁을 하는 처지였으니 밉보여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청호 때문이야?”

“네.”

시윤이 간결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아니고서야 제가 강해질 이유가 무어겠는가. 만약 제 반려 에스퍼가 그저 그런 C급이었다면, 저는 늦게나마 가이드가 된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벅차게 보냈을 터였다. 지금처럼 아파하지도, 하찮은 능력에 자책하지도 않았겠지.

허나 가이아가 저를 청호의 반려로 맺어 줬으니, 저는 강해질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휴의 머리카락이 필요한 것이고. 그의 머리카락 다섯 개면 총 열 개의 약을 만들 수 있었다. 청호에게 폭주가 올 때마다 찔끔찔끔 꺼내 쓰면 제법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간절한 시윤의 표정에 휴가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벤치 등받이에 팔을 괸 그가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머리카락을 주면 널 뭘 줄 건데?”

“바, 바라는 게 뭔데요?”

“내가 바라면 주게?”

“뭔데요.”

일단 들어나 보자 싶었다. 돈이나 특정한 물건이면 충분히 구해다 줄 수 있으니까. 시윤은 그런 쪽으론 매우 부유하고 너그러웠다. 그러나 휴는 항상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너.”

“……뭐라고요?”

“나는 네가 필요해, 시윤아.”

휴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런데도 눈동자는 마치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시윤이 엉덩이를 꾸물꾸물 뒤로 물렸다. 네가 필요해. 청호가 했다면 퍽 낭만적이고 저를 충만하게 해 주는 말이었겠지만, 휴가 하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날 먹겠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 꽃밭처럼 내 머리를 잘라서…….”

“오, 아니야. 내가 필요한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란다. 조금 더 훗날의 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휴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시윤이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래서 머리카락을 준다고, 만다고. 당장 내가 필요한 게 아니면 머리카락도 필요해졌을 때 주겠다는 거야 뭐야.

시윤이 다시 한번 부탁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콰광!

엄청난 굉음이 귓구멍을 후려쳤다. 시윤이 그대로 벤치 아래로 나동그라졌다. 땅이 파르르 경련하고, 태풍이라도 온 듯 바람이 몰아쳤다. 시야가 단숨에 뿌옇게 죽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다, 싶더니 삐이이- 하는 이명이 뇌를 울렸다.

잠시 그로기 상태에 빠졌던 시윤이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폈다.

“아…….”

시윤이 있던 가이드 막사가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넋을 놓은 시윤이 막사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막사였던 시멘트 더미를 바라봤다.

눈앞의 광경이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귀에선 여전히 이명이 몰아쳤고, 몸이 심연에 가라앉은 듯 무거웠으며 자욱한 먼지 때문에 가슴은 답답했다.

저 안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다친 병사들과, 그들을 치료하던 의무병과, 반려 에스퍼를 걱정하던 가이드들까지. 적어도 100명은 됐는데.

한동안 무호흡 상태를 유지하던 시윤은 폐가 터질 것 같을 때쯤에야 숨을 토해 냈다. 목젖을 치며 솟구치는 호흡이 아팠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윤이 휴를 노려봤다.

“설마 당신이 한 짓…….”

그러나 옆은 텅 비어 있었다. 휴가 앉아 있던 자리엔 뿌연 먼지만이 가득했다. 그가 범인일까. 그 붉은 꽃밭처럼 또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폭격을 미리 알고 ‘구해 준다’는 같잖은 말로 저를 바깥으로 빼낸 것이냔 말이다.

아니, 아니. 실로 휴가 그랬든 아니든, 이렇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시윤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폭격을 직접적으로 맞은 것도 아닌데 전신의 마디마디가 시큰거렸다. 커다란 트럭에 받힌 듯한 느낌이었다. 저는 폭격의 여파만으로도 이런데 저 시멘트 더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시윤이 눈을 꽉 세게 감았다가 떴다. 후, 후, 바쁘게 심호흡하고는 막사로 달려갔다.

가까이서 본 현장은 훨씬 더 참혹했다. 붉은 꽃밭과는 또 다른 참혹이었다. 멀리서 봤을 땐 그저 회색빛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온통 핏빛이었다. 인간의 몸에는 으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피가 있다. 100개가 넘는 몸에는 아마 연못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은 피가 있을 것이다.

시윤은 시멘트 사이로 줄줄 흐르는 피를 울먹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큰 시멘트 덩어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산…… 산 사람 있나요?”

제발 누구든 소리를 내 봐요. 제발. 시윤이 여기저기 솟은 사람들의 흔적을, 그러니까 팔이나 발 또는 머리를 살폈다. 토막 난 사지는 이제 하도 봐서 무감했다. 팔이 팔로 끝나지 않고 몸이 딸려 나오는 것에 감사하기도 바빴다.

종말이 온 세상에 홀로 남은 생존자처럼 여기저기를 배회하던 시윤이 뒤늦게 손목시계의 존재를 상기해 냈다. 도와줄 이를 불러야 했다. 얼른 손목을 살피는데,

“아아…….”

시계는 산산이 조각난 상태였다. 액정에 새끼손톱만 한 돌이 박혀 있었다. 어떻게 누르고 문질러 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손목시계를 푼 시윤이 그것을 짜증스레 집어 던졌다.

타닥 탁, 나뒹군 시계가 바위틈으로 쏙 사라졌다. 그때였다.

“으…….”

시계가 떨어진 틈에서 가녀린 신음 한 줄기가 흘러나왔다. 시윤이 헐레벌떡 그곳으로 향했다.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병사 하나가 매몰된 바위틈에 끼어 신음하고 있었다. 온갖 먼지로 얼굴이 새까맸는데, 그래도 어린 티가 났다. 갓 스무 살을 넘겼으려나.

“저, 정신 차려요. 정신 잃으면 안 돼요. 내가, 내가 구해 줄게요.”

시윤이 자신의 몸뚱이 반만 한 바위를 손으로 밀어 냈다. 그러나 제가 에스퍼도 아니고, 바위가 꿈쩍할 리 없었다. 손끝이 헤질 만큼 힘을 주던 시윤이 포기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넓적하고 단단한 철근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을 바위틈에 끼우고, 지렛대 삼아 반대쪽에서 온 체중을 다해 눌렀다.

바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시윤이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나긋하고 부드럽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병사가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올 수…… 있어요?”

“아…… 모, 모르겠어요.”

“무릎, 무릎을 오른쪽으로 조금만 움직여 봐요. 허벅지가 눌려 있는 거니까 다리만 빼면 나올 수 있을 거예요.”

“못 하……겠어요.”

“할 수 있어요. 해야 해요. 다리만 빼면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시윤이 부드럽게 그를 타일렀다. 사람이 더 있으면 좋으랴만. 지금은 저뿐이었다. 바위를 받친 상태에서 그를 도와줄 방법은 입을 나불거리는 것뿐이란 말이다.

시윤은 열심히 병사를 위로하고, 채근하고, 달랬다. 팔꿈치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간 바위를 놔 버릴지도 몰랐다.

그때, 병사가 몸을 꿈틀거리더니 조금씩 조금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시윤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3분쯤 흐르자 병사의 다리가 돌 밑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시윤이 비로소 돌의 무게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시윤은 쉴 틈 없이 곧장 병사를 바깥으로 끌어 냈다. 저보다 큰 덩치의 병사라 질질 끄는 것도 몹시 힘에 부쳤다. 그러나 2차 폭격이 있을 수도 있고, 시멘트 더미가 무너질 수도 있으므로 최대한 멀리 옮겨야 했다.

시윤은 병사를 50미터쯤 떨어진 건물 아래에 눕혀 놓았다. 더 멀리 가고 싶지만, 진즉 한계에 다다른 체력으론 불가능했다. 병사의 머리 상처를 확인한 시윤이 자신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붕대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의무병을 돕느라 코트 주머니에 붕대와 지혈제 등을 마구 욱여넣어 둔 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시윤이 둘둘 감긴 붕대를 통째로 병사의 손에 들려 줬다.

“풀어서 반은 허벅지에 감고, 반은 머리에 대고 있어요. 꽉 눌러야 해요. 최대한 꽉.”

“아…….”

“폭발음이 크게 났으니까 곧 다른 사람들이 와 줄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

“나는 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다시 가 봐야 해요.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금방 돌아올게요.”

시윤이 손등으로 병사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무서울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저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폭격 속에서,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죽다 살아났으니 그 공포가 엄청날 터였다.

수 초간 시선을 맞추고 있던 시윤이 몸을 일으켰다. 막 뒤를 도는데,

“감사합니다, 준위님.”

병사가 감사 인사를 전해 왔다.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당연한 거죠.”

맞아. 당연한 거지. 어딘가 쌉싸름한 미소를 띤 시윤이 무너진 막사를 향해 뛰었다. 오랜만에 귓불이 간지러웠다.

시윤은 첫 병사를 시작으로 두 명을 더 발견했다. 둘 다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한 명은 원래 부상병으로 왔던 이였고, 또 하나는 안면이 있는 금발의 대령이었다.

대령은 복부에 굵직한 철근이 박힌 상태였는데, 그건 시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닌지라 방관이 최대의 치료였다. 다행히 숨은 잘 쉬는 걸 보아하니 폐에 문제도 없고, 철근 덕에 출혈도 크지 않아 포스로 돌아가면 충분히 살 수 있을 듯했다.

대령의 머리 뒤로 전투모를 받쳐 준 시윤이 재차 막사로 돌아왔다. 또 다른 생존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근데, 시멘트 더미 위에 큼지막한 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떠한 생명체의 뒷모습이었다. 거실 커튼만큼이나 큰 날개. 돌로 만들어진 듯 우둘투둘한 피부. 구부정하게 굽은 척추. 울룩불룩하게 도드라진 등 근육. 훤히 드러난 엉덩이. 각진 다리. 시윤의 손바닥만큼이나 커다란 발톱들. 머리 위로 두툼하게 솟아난 갈고리 모양의 뿔.

가고일이었다. 방금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은 가고일.

그것은 무언가를 먹고 있었는데 첩첩첩, 까드득까드득, 듣기 거북한 소리가 났다. 그의 가랑이 사이로 질질 흐르는 피를 보아, 시체를 먹는 중인 듯했다.

시윤이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조심 뒷걸음질을 쳤다. 가고일은 고위 클롭스다. 머리도 좋은데, 심보도 고약했다. 인간이 주식이었고, 어린아이를 먹는 걸 즐겼다. 똑똑하면서도 잔인하단 말이다.

시윤이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었다. 도망쳐야 했다. 시윤은 정말 신중히 물러섰다. 흘끔흘끔 뒤를 확인하며 밟으면 소리가 날 돌부리나 나뭇가지, 쓰레기들을 피했다. 그렇게 막 모서리를 돌기 직전이었다.

키에에엑!

가고일이 휙 시윤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붉은 안구가 시윤을 직시했다. 폭주한 청호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나 휴의 루비 같은 붉은 눈동자와는 전혀 달랐다. 흰자와 눈동자의 구분이 없이, 안구 전체가 붉었다. 입에는 사람의 허벅지로 추정되는 게 물려 있었다.

시윤이 얼른 허리춤에서 총을 빼내 가고일을 겨눴다. 그러나 시윤은 알고 있었다. 총으로는 가고일을 죽일 수 없다는 걸. 돌 같은 피부로 이루어진 가고일이다. 총을 아무리 쏴 봐야 흙먼지만 일어날 뿐,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을 터였다.

물론 무른 눈알이나, 돌 가죽이 얕은 무릎 따위를 노리면 제압이 가능하다. 허나 안타깝게도 시윤은 움직이는 상대의 눈을 노릴 만큼 사격 솜씨가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근엔 청호와 몸을 섞는 빈도가 늘어나며 훈련장에 발도 들이지 못했단 말이다.

그래도 하나 정도면, 하나 정도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찬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키에에엑.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가고일의 울음소리가 났다. 생존자들을 눕혀 둔 건물 쪽이었다.

시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 안 돼…….”

시윤이 곧장 그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고일이 빠른 속도로 따라왔다. 그것의 발톱이 시윤의 목덜미를 낚아챌 듯 말 듯 했다.

저 멀리 생존자들이 보였다. 그 앞엔 또 다른 가고일이 있었다. 머리를 다친 병사의 몸뚱이를 발톱으로 쿡쿡 내리찍으며 노는 가고일이. 그 모습에 시윤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아아, 어떻게 살린 생명인데. 이리 허무하게…….

발아래가 늪 같았다. 달리고 있는 이 순간이 현실인지 몽중인지 구분이 안 됐다. 수십 시간 동안 부상병의 수발을 들고, 폭격을 겪고, 바위 아래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고, 뜀박질을 치고 있는 지금, 시윤의 체력과 정신은 해질 대로 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두 명은 살아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그들이 땅을 기며 살려 달라 우짖고 있었다.

시윤이 몸을 날려 그들을 가리고 섰다. 가고일이 그르륵거리며 시윤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좌우로 뒤틀며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새로이 생긴 장난감을 관찰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것의 뒤로 시윤을 따라오던 가고일이 멈춰 섰다.

가고일들은 저들끼리 컥컥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눴다. 그러더니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정확히는 시윤이 입고 있는 청호의 코트를 바라보는 거였다.

“…….”

“…….”

잠깐 정적이 흐르고, 가고일 하나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다. 귓구멍이 아릿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에 총을 쥔 시윤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사이사이로, 골목 사이사이로 클롭스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급부터 중급까지 각양각색의 클롭스였다.

“아…….”

시윤의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가고일 둘만으로도 눈앞이 새까맸는데 클롭스들 수십 마리라니. 시윤은 자신이 이렇게 죽나 보다, 예감했다.

그래도 아주 비참하고 쓸모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죽는 게 어디인가. 누구라도 살리려, 구하려 한 게 어디냔 말이다.

……홀로 남을 청호가 걱정이었다. 이렇게 많은 클롭스에게 먹히면 살점 하나 남지 않을 텐데. 그럼 모건도 어찌할 방법이 없을 텐데.

그러나 시윤은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묘책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챙겨 온 수류탄도 모두 가방 안에 있었다. 지금은 아마 시멘트 더미 아래에 있겠지. 어쩌면 연쇄 폭발로 사라졌을지도 모르고.

클롭스들이 온갖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대령과 부상병이 꽥꽥 오리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시윤은 마지막까지도 그들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다 가고일 하나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순간, 눈을 부릅뜨곤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직선으로 뻗어 나간 총알 두 개가 가고일의 볼에 박혔다. 나쁘지 않은 저격이었다. 눈만큼 무르진 않지만, 몸에 비하면 훨씬 가죽이 얇은 곳이었다.

키야아아아악!

가고일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쥐 새끼처럼 덜덜 떨던 시윤이 볼을 맞히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가고일의 비명에 클롭스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눈을 번뜩이고 잇새로 침을 질질 흘렀으며 발로는 땅을 쿵쿵 두드렸다. 그러고는 일제히 시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 * *

목과 주둥이가 긴 익룡 형태의 콩가마토가 병사들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날아갔다. 청호가 그것을 염력으로 끌어왔다. 그 후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을 때,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뒤로 꺾어 버렸다. 콩가마토는 비행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래저래 거슬리는 클롭스라 발견 즉시 죽이는 게 좋았다.

청호가 콩가마토의 부러진 목을 쥐고 떼를 지어 몰려오는 추파카브라를 향해 던졌다. 언젠가 사막 아래에서 만났던 클롭스 종이었다. 시윤이 가죽을 뒤집어썼던 그 클롭스 말이다.

수백 킬로그램에 다다르는 콩가마토의 사체에 깔린 추파카브라들이 바퀴벌레처럼 터져 나갔다. 역겨운 광경에 청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후, 그는 죽은 트롤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클롭스들을 가로로, 세로로 단번에 잘라 냈다. 그러다 팔이나 손이 물리기도 했는데, 그럴 땐 목을 쳐 버리곤 했다. 가끔 수십 마리가 달려들면 근방 몇 미터를 통째로 불태워 버렸다.

“……씨발.”

청호가 짜증스레 욕을 짓씹었다. 끝나지 않는 전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장기전이야 수도 없이 해 왔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클롭스를 이렇게 한순간도 쉬지 않고 죽이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클롭스들의 최대 강점은 인간의 수 배에 다다르는 힘도, 하늘을 나는 날개도, 입으로 뿜는 불도 아니다. 수다. 포스는 한 부대에 많으면 천 명이지만, 클롭스는 적어도 천 마리였다. 만에서 10만에 이르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청호가 아직도 새카맣게 남은 클롭스들을 혐오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염산성 액체가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염산을 쏘는 클롭스가 비행하는 클롭스의 등에 타고 뿌리는 거였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구분하지 않는 무차별한 공격이었다.

건물 하나 크기의 포탄이 날아오기도 했다. 청호가 열두 살, 처음 전장에 나갔을 때의 클롭스는 뭉툭한 무기들을 그저 휘두를 줄밖에 몰랐는데. 지금은 활도 쏘고 포탄도 던지고 조악한 폭발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징글징글한 새끼들.

아득 이를 짓씹은 청호가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대장님!”

건물 옥상에 있던 폴이 청호를 불렀다. 그의 뒤로 스나이퍼 총을 겨누고 있는 딜런이 보였다.

청호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근데 어째 폴의 안색이 영 시궁창이었다.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에로아스 부대의 누군가가 다쳤나. 아니면 죽었나.

도끼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가 깨진 창문을 계단 삼아 성큼성큼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5층짜리 건물의 옥상에 다다르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뭔데.”

청호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그게…….”

“뭐.”

“저길 좀 보십시오.”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던 폴이 검지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날아오는 클롭스 하나를 얼려서 아래로 떨어트린 청호가 무심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봤다. 도시 끄트머리에서 매캐한 연기 한 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전장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라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곳인데 이상하게 그곳만 박살 나 있었다.

“가이드 막사가 있던 곳입니다.”

폴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청호가 그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폴과 딜런이 그를 뒤따랐다.

폐허가 된 막사 앞에 도착한 청호가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막사는 열댓 시간 전에 왔던 곳과 같은 곳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어 있었다.

대충 봐도 살아 있는 생명일랑 없었다. 거기다 여기저기 낭자한 살점들이라니. 폭격 때문이 아니라, 누가 먹다 남긴 음식 같은 꼴이었다. 이미 클롭스가 사체로 한바탕 식사하고 떠났단 뜻이다.

저 고깃덩어리 사이에 시윤의 것이 없어야 할 텐데. 청호가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팔을 휘둘러 허공을 길게 갈랐다. 그러자 무너진 건물의 크고 작은 잔해들이 휙휙휙 옆으로 가 처박혔다.

깔린 시체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허나 시윤은 보이질 않았다. 청호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채시윤 시계 찾아.”

“예.”

청호를 뒤따라온 폴이 자신의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냈다. 그리고 시윤의 시계를 추적했다. 시계는 그 자체가 GPS다.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거나 망가지더라도 GPS는 따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전장에서 시체를 쉽게 찾기 위함이었다.

삑, 삑, 삑.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그램 위로 붉은 점이 떠올랐다.

“…….”

폴이 헛숨을 들이켰다. 붉은 점이 나타나는 지점이 시멘트 더미였기 때문이다. 그건 시윤이 저 아래에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만난 청호의 가이드인데. 이렇게 쉽게……. 암담한 현실에 폴이 버석하니 굳어 있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딜런이 붉은 점을 향해 다가갔다. 바위를 헤집는 손길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어…… 대장님.”

탄성처럼 청호를 부른 딜런이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주웠다. 시윤의 시계였다.

그것을 본 청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체에서 액세서리가 빠지는 일은 드물다. 반지면 또 모를까 귀걸이, 목걸이, 시계 같은 건 몸이 난도질당해도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근데 시계만 저리 덩그러니 있다고? 그럼 몇 개의 추론이 가능했다.

폭격이 일어나기 전, 병사들을 치료하던 시윤이 시계가 거슬려 풀어 놨다든가. 아니면 운 좋게 폭격에 살아남은 시윤이 무슨 이유로 손수 풀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누군가가 시윤을 데리고 가면서 추적될 수 있는 것들을 제거했다거나.

후자의 두 개 중 하나이길 바라야 했다.

눈을 부릅뜬 청호가 기민하게 주위를 훑었다. 어떻게든 시윤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그때,

타탕!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전장에서 흔하디흔하게 듣는 총격음인데, 묘하게 달랐다. AR처럼 연발로 발사되나 총소리는 권총과 같다.

언젠가 청호가 직접 시윤의 손에 들려 줬던 그 총소리였다.

시윤은 눈을 꼭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롭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그긱, 끅, 끽, 컥 따위의 괴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윤이 조금 더 세게 눈을 감았다. 식사 전에 입이라도 푸나. 그런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뭐, 병사들의 보디캠으로 알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모를 수도 있었다. 살아남는다면 추후 클롭스 정보에 추가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워라.

그 순간에도 등신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이상하지. 수십 초가 지났는데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이 물리거나, 팔이 뜯기는 느낌도 없었다. 뒤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던 생존자들의 괴성도 뚝 끊기듯 사라졌다.

한참 동안 굳어 있던 시윤이 찔끔 한쪽 눈을 떴다. 그리고 상상치도 못한 참혹한 광경과 마주했다.

수십 마리의 클롭스들이 마구잡이로 뭉쳐 있었다. 한곳에 모여 있었다는 게 아니라, 꼭 커다란 공룡이 밟고 지나간 것처럼 바닥에 껌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거인이 찰흙 놀이라도 한 듯 공처럼 뭉쳐 있는 것도 있었다. 척추뼈가 다 튀어나오고, 머리는 터져 있었으며,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꺾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청호가 서 있었다.

“……대장님?”

시윤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큰 키에 넓은 어깨,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게 분명 청호인데. 그가 아니고서야 이 많은 클롭스를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겁에 질린 제가 만들어 낸 환영일까 봐 무서웠다.

헌데 청호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리고 시윤과 딱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진짜…… 대장님이십니까?”

시윤이 매가리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청호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윤의 볼에 난 눈물 길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흙먼지가 자그마한 얼굴을 죄 뒤덮고 있어 눈물 길이 유독 뚜렷했다.

“울었어?”

“…….”

의심의 여지 없이 청호의 목소리였다. 시윤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진짜 청호다. 정말 청호였다. 심장이 쿵, 하고 멎었다가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굳어 있던 시윤이 그의 품으로 몸을 날렸다. 허리를 꽉 껴안고 단단한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그리고 흐어엉,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흐으으…… 무서웠어요. 너무, 흑, 너무 무서웠습니다.”

시윤이 온 힘을 다해 청호를 끌어안았다. 나이도 잊고 엉엉 울고 있는 제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청호를 안고 있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이 유리처럼 와장창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시윤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 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렇지 청호도 매우 놀란 상태였다. 하나뿐인 제 가이드가 죽었을까 봐 겁을 집어먹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막사가 무너졌다는 폴의 말에 설마 아니겠지, 멀리서 봐서 헷갈린 거겠지. 애써 그런 생각을 했다.

그 후 폭삭 주저앉은 막사를 보고는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시윤이 죽다니. 시윤이 이렇게 죽어 버렸다니. 목구멍이 콱 막혀서 말은 물론,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딜런이 찾아낸 시계를 보고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시윤의 총소리를 들었을 땐 환희를 내지를 뻔했다. 그렇게 발견한 시윤은 수십의 클롭스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허나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호는 그 클롭스들의 명줄을 단번에 끊어 냈다. 그리고 간신히 시윤을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환영은 아닌지, 이 순간이 꿈은 아닌지.

먼저 입을 뗀 건 시윤이었다. 청호의 가슴팍에 턱을 댄 채 고개만 올린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인 순간에 나타난 청호가 신기했다. 그래서 더욱 이 순간을 믿기가 힘들었다. 또 어디서 휴가 안개를 퍼트리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괴이한 능력의 클롭스가 저를 농락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총소리 듣고.”

청호가 시윤의 속눈썹에 동글동글 맺혀 있는 눈물을 살살 털어 내며 말했다.

“아…….”

그래. 청호가 제게 총을 줬을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소음기는 일부러 안 달았어. 그래야 네가 어디서 총을 쏘든, 내가 들을 수 있으니까.’

그걸 상기하고 쏜 총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들었다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괜히 가슴이 벅차진 시윤이 조금 더 세게 청호를 끌어안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한다. 제가 진짜 청호의 반려 가이드가 맞을까. 이 하찮은 능력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모건이 잘못 판단한 것이면 어쩌나. 그런 불안과 걱정이 시윤을 야금야금 좀먹어 갔다.

근데 이럴 때 보면 정말 가이아가 맺어 준 운명임이 틀림없었다.

시윤이 색색 힘껏 청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러고 있으니 정신이 희뿌옇게 탁해졌다. 긴장이 풀린 탓이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 싶더니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채시윤?”

청호가 시윤을 받쳐 안았다. 그러나 축 늘어진 시윤의 사지는 움직임이 없었다. 청호가 시윤의 코 아래로 귀를 가져다 댔다. 다행히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몸에 이렇다 할 상처도 없고. 피곤과 충격이 겹쳐 잠깐 기절한 듯했다.

청호가 시윤을 꼭 껴안았다. 시윤의 정신이 어떠하든, 부지런한 가이드의 몸은 청호에게 달콤한 가이딩을 제공했다. 그것을 잠시 느끼던 청호가 딜런을 바라봤다. 딜런이 얼른 청호의 곁에 와 섰다. 청호가 시윤을 딜런에게 넘겨줬다.

“데리고 있어.”

“제가 말입니까?”

“마무리할 때가 됐어. 이만하면 충분히 싸웠지. 금방 올 테니까 채 준위랑 여기 있어.”

“…….”

딜런이 벙긋, 입을 뗐다. 그러나 “예.”라는 짧은 대답으로 응했다. 청호가 딜런의 품에 안긴 시윤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코트를 여며 주고, 둘둘 말린 소매를 펴 주기도 했다.

“폴.”

“예, 대장님.”

“병사들한테 후퇴하라고 해.”

그 명령에 폴의 눈썹이 한껏 위로 올라갔다. 청호가 후퇴를 명령하는 건 이유가 딱 하나이기 때문이다.

“……혼자 처리하시게요?”

“응.”

“하지만…….”

“괜찮아. 많아 봐야 2만 마리 정도 남았을 거야. 모아 놓을 테니까 미사일이나 제대로 날리라고 해. 남은 건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청호 특유의 무감한 낯에 폴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청호는 전장에서 이따금 괴이한 짓을 한다. 이를테면,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클롭스와 한 시간 동안 싸운다거나. 불에 특화된 클롭스를 어떻게든 불에 태워 죽이려 한다거나. 또는 클롭스 사이에서 유명 인사인 자신을 미끼로 쓴다거나.

아마 이번에 하려는 짓은 미끼가 되는 것일 터였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클롭스들을 모으고 모아 한 번에 처리하려는 거겠지.

클롭스는 청호의 존재를 매우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인간을 정복하는 데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적. 어쩌면 포스의 우두머리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클롭스들은 청호가 시야에 들어오면 앞뒤 재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곤 했다.

청호는 그 사실을 영악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어쩌면 무모하게 이용하는 걸 수도 있고. 그래서 주변 이들이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게 아니라…… 그렇게 능력을 쓰시면 폭주하실 텐데요.”

“채 준위 있잖아. 다녀와서 가이딩하면 돼.”

“…….”

폴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시윤은 기절해서 있으나 마나 한 상태거늘. 뭐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청호가 저리 무모하게 나올 때마다 심장이 줄줄 녹는 기분이었다.

폴이 자신의 머리를 벅벅 마구 헝클였다.

“말씀하신 대로 많아야 2만 남았습니다. 대여섯 시간만 더 싸우면 승리로 끝날 전투란 말입니다.”

“그동안 죽는 병사들은?”

“…….”

“이미 죽을 만큼 죽었어. 가이드 막사는 날아갔고, 병동은 꽉 찼어. 우리가 약해진 틈을 타서 클롭스가 일주일 뒤에, 아니면 당장 내일 다시 쳐들어올지도 몰라. 얼른 끝내고 회복할 시간을 가져야 해.”

논리적인 청호의 주장에 폴이 입을 딱 다물었다. 맞는 말이나, 이대로 청호를 홀로 보낼 순 없었다. 폴이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누군가가 폴의 말을 가로챘다. 청호와 폴이 휙 뒤를 돌아봤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모를 시윤이 일어나 있었다. 그의 뒤에 있던 딜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돼.”

청호가 단칼에 부정했다. 시윤이 간절한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기절해 있던 주제에 제법 호기로운 눈빛이었다.

“같이 갈래요. 데리고 가 주세요. 그냥 곁에 있기만 할게요.”

“안 된다고.”

“그럼 대장님도 가지 마세요.”

“……뭐?”

청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시윤이 기절했다가 깨며 회까닥 미친 줄 알았다. 군인더러, 부대 하나를 이끄는 대장더러 전투에 나가지 말라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하물며 먼 옛날,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청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있는데, 시윤이 작은 새처럼 바지런히 입을 놀렸다.

“다른 병사들은 죽으라 하세요. 죽는 게 뭐 어때서요. 저는 대장님만 살면 됩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저한텐 그래요. 그러니까 저 데리고 가실 거 아니면 대장님도 가지 마세요. 그냥 가시면 저 혼자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겠죠. 아마 100미터도 못 갈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대장님 아니었으면 10분 전에 죽었을 텐데요.”

“…….”

청호는 끝내 말을 잃었다. 시윤이 왜 이리 떼를 쓰는지 모르겠다. 여태 전투에 함께 가고 싶다는 의사 표현은 자주 해 왔지만, 이토록 막무가내로 밀고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홀로 전장에 나가는 것에 염려를 하는 모양이다만. 시윤과 만난 후로 그런 일이 없었다뿐이지, 청호는 종종 홀로 작전을 수행하곤 했다.

청호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면 다시는 전장에 데리고 나오지 않을 거라며 엄포를 놓으려던 참이었다.

“데리고 가시지 말입니다.”

은근히 시윤의 곁에 선 폴이 말을 얹었다. 청호가 폴을 노려봤다. 폴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했으나, 여전히 시윤의 곁에 서 있었다.

청호가 뒤꿈치로 꾸욱 바닥을 지르밟았다. 시윤을 포기하게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청호가 염력으로 시윤을 코앞까지 끌어왔다. 그리고 비릿한 미소를 띤 채,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몇 급인데.”

“…….”

시윤의 눈꺼풀이 꿈틀 경련했다. 청호의 의도를 눈치챈 탓이었다. 숨을 가볍게 들이마신 그가 청호를 똑바로 직시했다.

“A요.”

참으로 뻔뻔한 거짓이었다. 휴와 만나긴 했지만, 접촉은 없었다. 아마 여전히 B일 터였다. 그러나 진실을 순순히 털어놓으면 청호가 그따위 능력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게 뻔했다.

시윤은 정말, 정말 청호를 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청호가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폴이 폭주를 걱정할 정도로 힘을 쓴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청호가 시윤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A라고. 하필 A라고. B만 됐어도 온갖 이유를 만들어 내쳤을 텐데. A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었다. 최근 시윤은 높은 등급을 쭉 유지해 왔으니까. 모건의 연구실에 다녀온 이후로 정사 중에 코피를 쏟는 일도 없었다. 즉, 내내 A 전후였단 말이다.

“……채혈 기계 어디 있어.”

“잃어버렸습니다. 시멘트 더미 아래에 있겠지요.”

“…….”

“A급 맞습니다. 대장님이랑 키스하고도 멀쩡한 거 보셨잖아요.”

시윤은 말하면서도 자신의 뻔뻔함에 놀랐다. 제가 이런 쪽으로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청호가 시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묵직하고 잔잔한 검은색 눈동자에 시윤이 가득 담겼다. 그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거짓말이면 화낼 거야, 채 준위.”

“…….”

그 순간, 시윤은 심장이 쿵 아래로 추락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고른 호흡을 유지하고, 떨지 않았으며, 청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거짓말 아닙니다.”

시윤은 청호가 화내는 게 무섭지 않았다. 아니, 사실 무섭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절 보는 그를 상상하면 오금이 다 저렸다. 다만 그가 저 없는 곳에서 아픈 게 훨씬, 훨씬 더 무서웠을 뿐이다.

헬기 아래로 높다란 장벽이 보였다. 시윤을 한 팔로 안은 청호가 로프를 잡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착륙 지점은 벽의 꼭대기였다.

청호의 계획은 자신을 잡기 위해 몰려드는 클롭스들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선 근방의 시야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은 곳이어야 했고, 불을 내도 상관없는 곳이어야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 구역은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았고, 있는 것도 도심이라 불을 질러 버리면 추후 재건에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래서 장벽을 선택한 것이다. 벽은 불이 잘 붙지 않는 난연재였고, 높았으며, 단단했으니까.

청호는 장벽에 착지하자마자 머리 위로 신호탄을 쐈다. 탄창을 갈고, 또 하나 쐈다. 그렇게 연달아 세 발을 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붉은빛이 상공을 가로질렀다. 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전장임에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

“…….”

조금씩 사그라들던 신호탄이 끝내 멎었다. 사위는 고요했다. 그 많던 클롭스가 금세 증발이라도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근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이 울리는 거였다. 수백 미터 높이의 장벽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청호는 무심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만 마리의 클롭스가 자신을 죽이려 몰려오는데, 두려워하긴커녕 긴장조차 하지 않은 듯한 행색이었다.

장벽이 더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클롭스 특유의 울음소리와 발톱이 장벽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클롭스의 형상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리고 클롭스 하나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청호가 손목시계의 옆구리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상공 저 멀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투기들이 일제히 미사일을 쏘기 시작했다.

장벽 아래로 쿵, 쿵쿵, 큼지막한 폭발이 일어났다. 클롭스들의 비명도 들려왔다. 퍽 통쾌한 소리였다. 근데 이상하지. 벽 아래는 폭발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데, 장벽에 붙은 클롭스들은 미사일을 직격으로 맞고도 멀쩡했다.

장벽 위에 납작 엎드려있던 시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에다 쏘는 건 미사일이 아닙니까?”

“기름통이야.”

“……기름이요?”

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보란 듯이 벽에 손을 대고, 불을 뿜었다. 그러자 벽에 붙은 클롭스들이 삽시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대한 산 하나가 통째로 불타는 듯한 모습이었다.

“장벽은 불에는 버티지만 폭격에는 못 버텨. 그러니까 태우거나 얼려야 해.”

“아…….”

시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뿜는 불에 활활 탄 클롭스는 재가 되어 흩날리거나, 말라비틀어진 통나무 같은 모습으로 퍼걱퍼걱 아래로 추락했다. 꾸역꾸역 살아서 기어 올라오는 건 불에 강한 피부를 가진 클롭스들이었다.

청호는 그것들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주거나, 입 안에 수류탄을 넣어서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럼 한동안은 조용했다. 날개가 달린 클롭스들은 알렌과 딜런이 열 감지 스코프를 통해 멀리서 저격으로 처리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되면 청호가 다시 신호탄을 쐈다. 클롭스들이 가까워지면 전투기에 사인을 보내고, 벽에 붙은 클롭스들에게 불을 붙이고, 올라온 것들은 죽였다.

그 행위들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시윤은 청호가 신호탄을 쏜 후 클롭스가 몰려올 때까지의 시간 동안 청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최대한 많은 가이딩을 하려 했다. 그리고 청호가 불을 지를 때쯤엔, 청호가 죽인 클롭스의 사체 뒤에 숨어 청호의 코트를 뒤집어썼다.

그렇게 몇 번쯤 반복하니 클롭스들도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올라오는 선두로 불에 강한 클롭스들을 배치한 것이다. 자연히 불에 타 죽는 클롭스 수가 줄었다. 반대로 벽 위까지 도착하는 클롭스는 많아졌고.

코트 안에 숨어 있던 시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고위 클롭스 열댓이 청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청호는 염력을 이용해 그들을 메다꽂거나, 심장을 비롯한 내장을 뜯어 버리거나, 흉하게 난 뿔을 움켜쥐고 발로 턱주가리를 날렸다.

그런 청호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클롭스가 하나 있었다. 도롱뇽을 닮은 샐러맨더였다. 불에 사는 클롭스라 칭해지는 만큼 가죽 곳곳에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몸집은 시윤의 세 배에 다다를 정도로 컸고, 꼬리는 뱀처럼 움직였다.

샐러맨더는 주특기가 불을 이용한 공격이지만, 아가리 힘도 셌다. 물어서 통째로 삼켜 버리기도 했다.

시윤이 불안한 눈으로 청호와 샐러맨더를 번갈아 봤다. 청호가 얼른 샐러맨더를 발견해야 할 텐데. 그러나 청호는 우람한 클롭스와 싸우느라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듯했다.

시윤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 허리춤을 더듬었다. 총과 나이프 하나가 만져졌다.

샐러맨더는 피부가 무른 편이다. 나약한 시윤이라도 있는 힘껏 나이프를 휘두르면 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이다. 총으로 머리를 날려도 죽겠지만, 그건 안 된다. 청호가 제 총소리에 놀랄 테니까.

나이프를 꺼낸 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호의 코트를 어깨에 두르고, 살금살금 샐러맨더를 향해 다가갔다.

머리를 노려야 한다. 머리를. 다른 곳은 찔러 봐야 흥분만 부추길 터였다. 정수리를 찔러 단번에 숨통을 끊어야 했다.

그러나 두툼한 꼬리 때문에 다가가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시윤의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방법을.

그 순간, 시윤의 속눈썹이 바짝 위로 솟아올랐다. 좋은 방법이 떠오른 덕분이다.

시윤이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그것을 들고 샐러맨더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살랑거리는 꼬리가 닿기 직전에 멈춰 서서 샐러맨더의 대가리를 향해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크이이이익!”

샐러맨더가 휙 빠르게 목을 돌렸다. 도롱뇽에서 변화한 종답게 상체는 앞을 향해 두고 얼굴만 돌렸다. 잇새로는 붉은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윤과 샐러맨더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시윤이 곧추세우고 있던 나이프로 샐러맨더의 정수리를 콱! 내려찍었다. 잘 벼려진 칼날이 샐러맨더의 무른 피부를 파고들어 그대로 뇌를 꿰뚫었다.

“…….”

샐러맨더의 눈이 부릅뜨였다. 시윤이 호흡을 멈춘 채 그 눈을 바라봤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전투기가 날리는 미사일 소리와, 클롭스의 울음소리 등이 시끄럽게 넘쳐나는데, 샐러맨더와 시윤 사이에만 정적이 흘렀다.

시윤이 나이프를 단번에 뽑았다. 피가 하늘을 향해 분수처럼 솟구쳤다. 곧 샐러맨더의 입가에서 불이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잇달아 형형하던 눈동자가 탁하게 죽더니 위로 휙 까뒤집혔다.

쿵! 샐러맨더가 그대로 쓰러졌다. 시윤이 혀를 베 하고 내민 샐러맨더를 가만히 바라봤다. 죽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클롭스를 죽이다니. 가슴이 벅찼다. 흥분으로 숨이 다 가빴다. 그 환희에 몸을 떨던 시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 코트를 뒤집어썼다.

첫 승리에 취해 날뛰다 보면 청호에게 피해를 줄 것이 분명했다. 그가 망나니처럼 뛰노는 저를 지키려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클롭스의 수는 확연히 줄어갔다. 벽을 기어 올라오는 속도 역시 더뎌졌다. 전투기도 미사일 대신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승패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한참 코트 아래 숨어 있던 시윤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청호가 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시윤의 시선을 느낀 듯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윤이 샐쭉 미소 지었다. 청호가 다치지 않았고, 저는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웃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저를 보고 청호가 웃어 주었던가, 웃지 않았던가. 모르겠다. 순간 자욱한 연기가 그와 저 사이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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