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성산(積塵成山)
포스의 분위기가 영 어수선했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여파가 컸다. 병사도 많이 죽었고, 정성 들여 키우던 가축들과 농산물 역시 피해가 컸다. 장례식은 며칠에 걸쳐 진행됐다.
슬픔을 갈무리하기 무섭게 불안감이 커졌다. 그 많은 클롭스가 몰려오는데 왜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아무리 미완성이라 한들, 어떻게 수십 년 동안 견고하던 장벽이 뚫릴 수 있었냐. 더는 포스도 안전하지 않은 게 아니냐. 벽을 늘려선 안 된다. 방랑자도 믿을 수 없다. 더는 받지 말자.
의문의 탈을 뒤집어쓴 반발과 이기심이 불꽃놀이처럼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포스의 수장, 즉 정원을 비롯한 원수들은 포스 주변을 새로이 정비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숨겨진 클롭스의 본거지를 찾아 없애고, 10만의 클롭스가 어떤 루트로 어떻게 오게 됐는지 명명백백히 밝혔다.
또 하필 그들이 쳐들어온 날, 장벽에 달려 있던 레이더가 수리 중이었으며, 이로 인해 방어가 소홀해졌음을 인정했다. 이는 장벽 전담 부대의 잘못이었으니 부대장을 해임하기로 했다. 그리고 포스 주위의 클롭스들을 소탕하기 위해 크고 작은 전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시윤은 지나치게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신병들이 죄 전투에 나가 버려 강의가 모두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또 청호와 함께 전투에 나간 거냐고 노발대발할 줄 알았더니. 며칠 전에 만난 시훈과 시준의 말에 따르면, 시윤의 출정에 걱정인지 분노인지 모를 것을 하시다가, 금발의 가이드 대령이 다녀간 후로 조용해지셨단다.
시윤은 대충 그녀가 청호가 클롭스들 틈에서 절 구하는 걸 보고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녀 역시 청호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니 나쁜 말은 하지 않았으리라.
시윤은 이대로 정원이 청호에 대한 모든 오해를 거두고, 감정의 응어리 역시 풀길 바랐다. 청호에게 사과까지 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까진 바라지 않았다.
정원이 더 이상 건드리지만 않으면, 제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와의 관계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를 함께하고,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하며, 손을 맞잡고 웃음을 공유하던 그때로 말이다.
시윤은 자신의 ‘화목한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의도한 여유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시간이 생겼으니 이것저것 하며 보내고 싶었다.
사실 제가 이것저것 한다고 해 봐야 뭘 하겠느냐마는. 책도 읽고, 오랜만에 훈련실도 들르고, 어머니 얼굴도 보고, 형들도 만났다.
청호는 바빴다. 포스 주변에서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전투는 대부분 승리로 끝나지만, 이따금 골치 아픈 적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에로아스 부대는 수렁에 빠진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얼굴은 본다. 아무래도 전장이 포스 근방이라 군용기나 지프를 타고 다녀와도 몇 시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에로아스가 흔히 마주하던 F나 Z 구역에 비하면 매우 약한 적들이라 금방 소탕하기도 했고.
청호와의 관계는, 전적으로 시윤이 판단하기에, 제법 괜찮아졌다. 옛날만큼 훈훈한 온기가 넘실거리는 것도 아니고,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청호가 숙소로 돌아오면 소파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아 주긴 했다. 시윤이 오늘 점심은 뭘 드셨나요, 전장은 어땠나요, 에로아스 병사 중에 부상병은 없나요, 등등을 조잘거리면 청호가 곧잘 대답해 주곤 했다. 좋은 신호였다.
시윤은 근 며칠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시기가 지나가고, 봄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실제로 포스는 완연한 겨울이었으나, 마음은 그랬다.
창가에 앉은 시윤이 느긋하게 책장을 넘겼다. 청호의 만물상에서 꺼내 온 책이었다. 며칠 내내 쉼 없이 읽어서 벌써 열댓 권은 본 것 같다.
책을 읽는 건 즐거웠다. 핵전쟁 전의 세상이 어떠했는지, 당시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무엇을 꿈꾸고 상상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지구에 살던 사람들인데 포스에 사는 저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먹고, 생각했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원에게 근방 도시를 탐색해 책을 모아 도서관 같은 걸 만들면 어떠냐 조르고 싶었다. 이 지독한 세상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즐거워할 수 있을 터였다.
한참 책을 들여다보던 시윤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병사들이 보였다. 전투기와 군용기는 출격과 착륙을 반복했고, 무기 등을 실은 트럭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윤은 이 방이 정말, 정말 좋았다. 여기저기 청호의 관심이 묻어 있기도 했고, 전장의 여운을 가득 담은 제 전투복도 한편에 걸려 있고, 서랍에는 가이드를 나타내는 노란색 명찰도 있고, 책상 위에는 언젠가 청호가 만들어 준 유리 에펠 탑도 있었다.
청호를 동경하던 자신. 능력자가 되길 꿈꾸던 자신. 전장에 나가길 소원하던 자신. 포스 바깥을 상상하던 자신. 이 방은 과거 제가 바란 모든 것들이 현실화된 집합체였다.
책을 덮은 시윤이 책상에 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엎드려 유리 에펠 탑을 바라봤다. 어제 읽었던 책에서 에펠 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어찌나 놀랍고 반갑던지.
‘에펠 탑 앞의 마르스 광장은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이는……’이라는 문장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외관에 대한 묘사나 사진은 없었다. 그래도 충분히 마음이 벅차올랐다. 당시의 사람들도 에펠 탑을 ‘관광’하러 갈 만큼 대단한 곳이구나, 싶어서.
시윤이 검지로 유리 에펠 탑의 모서리를 콕콕 두드렸다.
“얼른 보자, 우리…….”
시윤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그때였다. 띠링, 짧은 알림음과 함께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청호였다.
[저녁 같이 먹을까.]
“…….”
시윤은 그 메시지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발끝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목젖까지 치고 올라와서는 펄떡펄떡 오두방정을 떨었다. 주책맞게 눈시울이 찡해졌다. 얼른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곤 메시지를 보고 또 봤다.
발신자가 청호가 맞나, 수신인은 제가 맞나, 이 메시지에서 말하는 저녁이 식사를 뜻하는 게 맞나.
그렇게 있다가 제가 답을 안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은 ‘좋아요’라는 세 음절도 쓰기 어려워했다. 조핳요, 조하요ㅛ, 좋ㅎ하요, ㅈ하요, 별별 오타를 다 내다 간신히 좋아요, 세 글자를 만들어 보냈다.
그러곤 우당탕 욕실로 뛰어갔다. 몸이 벌겋게 익을 정도로 박박 씻고 나온 시윤은 고심해서 옷을 골랐다. 보드랍고 도톰한 니트에 깔끔한 청바지, 코트는 구겨지지 않게 곱게 접어 팔에 걸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시윤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였다. 현관 앞을 서성이던 그가 소파에 가 앉았다. 아무래도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청호는 언제쯤 오려나. 6시? 7시? 전투는 잘 끝냈나? 하긴 그러니까 제게 메시지를 보냈겠지. 어쩌면 이미 출발했을 수도 있고.
시윤이 자신의 무릎을 손가락으로 바쁘게 두드렸다. 설렘에 입꼬리가 춤을 췄다.
* * *
청호는 지프를 타고 포스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열린 창틀에 팔을 걸친 그가 바쁘게 움직이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요즘 처리하는 클롭스는 시시할 정도로 멍청하고 약했다. 포스 주변은 아주 오래전에 싹 밀어 버린 터라 남아 있는 건 들짐승 수준의 것들뿐이었다.
청호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는 건 당연하거니와 에로아스 부대원들도 영 심심해했다. 저격 총으로 클롭스 머리 터트리기 놀이 따위를 할 정도였으니…….
그래서일까. 상념이 자꾸 빼꼼빼꼼 고개를 쳐들었다. 이를테면 점심 메뉴나, 내일의 일과나, 종일 한 것도 없는데 가이딩해 주겠다고 알짱거리는 시윤 같은 것들 말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사실을 알았을 때와, 시윤이 정원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해를 운운할 때를 떠올리면 뇌가 절절 끓는 듯했다. 근데 제 손을 잡고 헤실헤실 웃는 걸 생각하면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더군다나 장벽 전투에서 시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나니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그의 죽음에서 아주 큰 공포를 맛봤기 때문이다.
시윤이 미운 줄 알았는데, 그가 아프든 죽든 하등 상관없을 거라 믿었거늘.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님에도 그랬다.
폭삭 주저앉은 가이드 막사를 봤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발아래로 큰 구멍이 뻥 하고 뚫려 끊임없이 추락하는 듯했다. 사고는 정지했고, 현실을 부정하는 마음과 희망을 찾는 이성이 충돌하며 멀미가 났다. 석유라도 삼킨 듯 속이 니글거려서 목구멍으로 오장육부를 죄 토해 내고 싶었다.
죽음에 둘러싸여 사는 저라 죽음만큼 익숙한 게 없었는데. 시윤의 죽음은 도무지 무뎌지질 않았다. 결국 그가 제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비가 무슨 짓을 했든, 제가 그에게 그의 아비보다 못한 존재이든, 상관이 없어졌단 말이다.
청호는 이번 장벽 전투에서 아주 많은 걸 경험했다. 앞서 말한 시윤의 죽음도 그렇고, 온갖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와중에 어깨를 다친 제게 입을 맞춘 것도 그랬다.
뇌리에 가장 또렷이 박힌 건 클롭스들에게 둘러싸인 그가 널브러진 부상병 둘을 가로막고 서 있던 거였다. 그 작고 마른 몸으로 무엇을 하겠다고. 부상병들을 가로막고 선 모습은 정원과는 전혀 달랐다.
그 순간, 청호는 정원과 시윤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죄와 시윤을 동일 선상에 놓으면 안 된다는 것 역시도.
그걸 깨닫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청호를 가로막았다. 여태 그에게 한 몹쓸 짓들이 이미 글렀다며 한껏 비아냥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은 그것들을 깡그리 무시했다. 그럴 수도 있지. 어머니를 잃고 피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사는 게 얼마나 외로웠는데. 모든 걸 털어놓으면 시윤도 이해해 줄 터였다. 분명 시윤이라면, 그래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려면 일단 관계부터 회복해야 하는데.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낸 청호가 시윤의 연락처를 띄웠다. 그리고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할 말은 있다만, 그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쪽으론 문외한이라. 더군다나 활자나 말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에 그는 몹시 서툴렀다.
청호가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폴이 넌지시 물었다.
“채 준위한테 명령할 일 있으십니까? 제가 연락할까요?”
“……아니야.”
“무슨 일이신데요?”
거듭 이어지는 폴의 질문에 청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놨다.
“그…… 어…… 저녁이나 같이할까 하고.”
“…….”
폴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도 그럴 게, 최근 그가 본 청호와 시윤은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 냉기가 아주 철철 흘렀지. 아니, 청호만 일방적으로 그랬다. 근데 갑자기 청호가 먼저 손을 내민다니. 장벽 전투에서 시윤이 죽을 뻔한 일이 청호에게 퍽 크게 다가간 모양이었다.
폴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청호가 자꾸 시윤을 밀어내는 게 못내 신경 쓰이던 와중이었다. 청호에게 시윤만큼 필요한 존재가 없는지라.
어쨌든 청호가 시윤을 다시 거두려 하니 도와주는 게 마땅했다. 폴은 눈치가 좋았다. 판단력 역시 좋았고.
“그냥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보내십시오.”
“……그게 다야?”
“예. 구구절절 말 붙이는 건 대장님이랑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알았어.”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대답한 청호가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메시지를 전송했다. 폴이 알 듯 모를 듯 웃었다.
청호는 무릎까지 달달 떨며 답을 기다렸다. 보내자마자 왜 답이 안 오지? 라며 인상을 쓰기도 했다. 폴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조금 기다리라고 했다. 시윤이 일이 없다고 종일 널브러져 있을 인간도 아니고. 뭐든 간에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텐데 답이 금방 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렇게 5분쯤 흘렀을 때, 답장이 도착했다.
[좋아요.]
참으로 시윤다운 메시지였다.
청호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또 답을 보내려 손가락을 꿈틀거리기에 폴이 대신 홀로그램을 꺼 줬다. 시윤을 처음 만났을 때도 아주 엉덩이에 불난 강아지처럼 굴더니. 또 그 모습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청호가 왜 그러냐는 눈으로 폴을 바라봤다. 폴이 수완 좋게 말을 돌렸다.
“저녁 메뉴는 뭐로 준비할까요?”
“나가서 먹을까 해. 종일 숙소에 있었을 테니까.”
“아……. 그럼 식당을 예약할까요?”
“그런 것도 돼?”
“물론이죠. 이따금 에로아스 부대원들끼리 회식할 때도 모두 예약한 식당이었지 말입니다.”
“그랬어?”
청호가 턱 아래를 긁적였다. 그냥 장사가 아주 안되는 식당들인 줄 알았는데. 예약이라니. 별것이 다 되는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대장님은 유명 인사이니 식당을 비우고 두 분이서 오붓하게 식사하는 게 좋겠지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메뉴는 어…… 뭐가 좋을까.”
“다양한 메뉴가 있는 곳으로 예약하겠습니다. 채 준위가 직접 고를 수 있게요.”
청호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포스에 도착했다. 청호가 바쁘게 차에서 내렸다. 경례하는 병사들을 본 척 만 척 하며 뒤를 돌았다. 폴이 멀어지는 청호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숙소동으로 들어온 청호가 빛을 형상화한 포스의 로고를 통과했다.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시윤이 어딜 다녀오기라도 한 모양인지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서 있었다. 버튼을 누른 청호가 줄어드는 숫자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였다.
“어…… 대장님, 안녕하십니까.”
누군가가 인사를 해 왔다. 청호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누가 인사를 하든, 경례를 하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정말 무심코였다.
인사한 이의 얼굴을 확인한 청호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서글서글한 인상. 선한 눈매. 보기 좋은 미소. 종우였다. 언젠가 시윤의 연구실에서 헐벗은 그를 치료해 주던 그 병사 말이다.
“…….”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헌데 어째선지 발도 떨어지질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으니 평소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것을. 이상한 일이었다.
“저번에는 인사를 제대로 못 드렸지 말입니다. 근데 이렇게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종우가 어깨를 한껏 펴고 다시금 경례했다. 청호는 역시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에는 인사 다 했으면 그만 꺼지라는 뜻만 가득했다.
근데 종우가 눈치 없이 가까이 와 섰다. 멀찌감치 서서 흘끔흘끔 눈짓만 하는 여타 병사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한마디로 겁대가리가 없었다.
청호가 이 괘씸한 자신감을 어떻게 눌러 줄까, 고민하던 차였다.
“저 방랑자였습니다. 다 죽어 가는 걸 대장님이 구해 주셨지 말입니다.”
“……그랬군.”
종우의 말에 매섭게 올라갔던 청호의 눈매가 한결 느슨해졌다. 아무래도 ‘방랑자’라는 게 청호에겐 퍽 아픈 단어인지라. 종우는 딱히 주접을 떨러 온 건 아닌 듯했다. 사인을 해 달라느니, 사진을 같이 찍자느니, 에로아스 부대에 소속시켜 달라느니 따위의 말만 아니면 괜찮았다.
청호를 기다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청호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다시 버튼을 누르려는데, 종우가 은근히 버튼을 가리고 섰다.
“비록 조금 늦으셔서 아버지와 동생은 죽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전 살아남았습니다.”
“……내가 사과를 해야 하나?”
“아니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냥 언젠가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감사 인사. 받았어. 그러니까 가 봐.”
청호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종우를 염력으로 옆으로 밀었다. 놀란 종우가 어어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넘어져서 팔이 부러지든 다리가 부러지든 청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시윤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얼른 올라가 봐야 했다.
청호가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기다렸다는 듯 열렸다. 그가 막 한 걸음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근데 에로아스 부대에 신병이 들어왔습니까? 모집한다는 공고는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종우의 질문에 청호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더니 또 그 말인가. 청호가 모집 생각 없으니 냉큼 꺼지라는 말을 하려 입을 뗐다. 허나 종우가 더 빨랐다.
“장벽 전투에서 채 준위님이 붉은 머리칼의 병사와 함께 있는 걸 봤습니다.”
“……뭐?”
청호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덩달아 숨도 멎었다. 빨간 머리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호의 관심에 신난 종우가 바쁘게 입술을 움직였다.
“에로아스 부대에 없었던 분 같아서요. 제가 에로아스 부대를 엄청 존경해서 부대원을 죄 외우고 있지 말입니다. 폴 대령님이랑 딜런 대위님, 알렌 중위…….”
“아니. 그건 됐고. 빨간 머리가 누구였는데?”
“어…… 명찰이나 계급까지는 확인 못 했습니다. 남자셨고, 키도 꽤 크셨고, 꼭 머리카락이 타는 것처럼 움직이는 분이셨는데…….”
순간, 청호의 동공이 확 작아졌다. 타는 듯 움직이는 붉은색 머리카락. 휴였다. 시윤이 휴를 만났다고? 어째서? 아니, 아마 약속된 만남은 아닐 터였다. 휴는 항상 뜬금없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곤 했으니까.
다만, 청호가 놀란 건 휴와 시윤이 만났었다는 걸 제가 모르고 있었다는 거였다. 휴의 존재는 저와 시윤, 그리고 모건만 알고 있다. 먼 옛날 휴를 처음 만났을 때 시윤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대장님. 방금 만났던 남자, 상부에 보고하지 마십시오. 병사들에게도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왜?’
‘대장님 힘이 통하지 않는 존재가 나타난 걸 알면 포스 전체가 혼란에 물들 겁니다.’
‘…….’
‘혼란은 잘못된 판단을 야기하고, 어쩌면 대장님 어, 어머님에게 있었던 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발발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했었지. 근데 둘이 만났다, 라. 썩 유쾌한 사실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휴는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제게 정원에 대한 힌트를 준 이기도 했고.
그 사실을 시윤에게 말했으려나. 아니, 그렇다면 제가 몰랐을 리 없다. 시윤은 거짓말을 하는 데 서툴렀으니까. 매일 저녁 제 손을 잡고 어색하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는 짓도 안 했겠지.
혼란과 불안이 마구 뒤섞였다.
청호가 종우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올라가는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그저 잠깐 조용히 대화를 나눌 곳이 필요했다. 타인이 들어 봐야 좋을 게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채 준위가 그 남자랑 어디에 있었는데.”
청호가 매섭게 종우를 몰아붙였다. 종우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어어…… 가이드 막사에 계시다가 같이 나가셨지 말입니다. 저도 나가는 길이라 우연히 봤습니다. 바깥 벤치에서 이야길 나누셨는데. 친해 보이셨습니다.”
“무슨 이야기.”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주위가 시끄러웠으니까요.”
“얼마나 같이 있었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곧장 전장으로 복귀했거든요.”
“…….”
청호의 눈이 못마땅하게 구겨졌다. 종우에게 더 캐낼 정보가 없는 듯했다. 괜히 애가 달았다.
“다른 건 없었어?”
“예?”
“그 붉은 머리의 남자가 채 준위의 팔을…….”
“팔 말입니까?”
종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청호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팔을 물어뜯었어? 아니면 목이나 다른 곳을 물진 않았나? 시윤에게 피가 났나? 근래 그의 나신을 본 적이 없어 못 보던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못 했다.
그렇다고 팔을 깨물진 않았냐, 물을 수도 없었다. 실상을 모르는 이가 듣기엔 영 괴상한 질문이었으니까.
볼 안쪽 살을 꾹 씹었다가 놓은 청호가 엘리베이터 문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야. 됐어. 가 봐.”
“예.”
종우가 꾸벅 묵례하며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종우가 뒤를 돌았다. 청호가 멀어지는 그를 쳐다봤다. 그때, 다시 등을 돌린 종우가 경례했다.
“좋은 저녁 보내십시오, 대장님.”
그 인사를 끝으로 문이 닫혔다.
청호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재차 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숙소로 향하는 꼭대기 층의 버튼이 아니라, 열림 버튼이었다.
청호는 노크 한번 없이 모건의 연구실에 들이닥쳤다. 모건은 뭘 하는지 책상 위에 올라가 VR 안경을 쓰고 있었다. 손을 휘적거리며 몸을 흔드는 게 춤을 추는 건지, 미지의 생물과 싸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청소? 저기 구석부터 치워.”
인기척을 감지한 모건이 연구실 구석을 가리켰다. 음식물 쓰레기, 아몬드 봉지, 빈 약통, 깨진 실험 도구 등이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염력으로 모건의 한쪽 다리를 훅 앞으로 끌어당겼다. 단번에 무게 중심을 잃은 모건이 쿠당탕 아래로 떨어졌다. VR 안경이 반쯤 벗겨지고, 고통에 구겨진 눈이 드러났다.
“뭐야? 너였어? 무슨 인사를 이렇게 사납게 해?”
모건이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허리를 두드리며 다 죽어 가는 노인 같은 소리를 냈다. 청호가 그런 모건의 앞에 딱 붙어 섰다. 모건도 키가 제법 큰 편인데 청호의 앞에 있으니 묘하게 작아 보였다.
“채 준위가 휴 만난 거 알고 있어?”
“어어. 들었지. 엊그제 연구실 들러서 체스 두고 갔거든. 이번엔 아무것도 안 했다더라. 그냥 왔다가 갔대. 그 새끼는 왜 맨날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나는지 몰라. 정체도 모르는 놈이 그러니까 소름이 다 돋는다, 소름이.”
모건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청호의 눈빛을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봐? 설마 또 나타났어? 언제? 어제? 아니면 오늘? 이번엔 뭐라고 했대? 아니면 또 어디 물었어? 채 준위는 어디 있어?”
모건이 다급하게 청호를 보챘다. 시윤을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신난 건지 분간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안 나타났어. 아마도.”
청호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모건은 시윤이 휴와 만났던 걸 알고 있다. 저는 모르는데, 그는 알고 있다. 시윤이 굳이 그 사실을 모건에게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저 모르게 둘만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청호가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데, 실망을 감추지 못한 모건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가 퀭한 눈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안 나타났어? 그럼 넌 왜 왔어? 어디 아파? 아니면 또 채 준위 괴롭혔냐? 며칠 전엔 멀쩡히 돌아다녀서 안심했는데. 그새?”
비난 섞인 질문에 청호가 손목을 흔들었다. 시답잖은 질문은 집어치우란 뜻이었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휴는 뭐 나온 거 없어? 머리카락 연구 중이었잖아.”
“어? 아…… 그거?”
모건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렸다. 휴의 머리카락은 진즉 다 썼다. 시윤에게는 충분히 설명도 해 주었고. 근데 청호가 묻는다. 그 말인즉슨, 시윤이 청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무슨 이유로 숨겼는진 모르겠으나, 시윤이 숨겼다면 그의 의사를 따라 주고 싶었다. 그다지 시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윤은 이 삭막한 포스 안에서 꽤 똑똑하고, 놀리는 맛도 있고, 순진하기까지 한 보기 드문 인간이란 말이다.
이미 정원과 관련한 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는데, 청호의 일까지 더하고 싶진 않았다.
“뭐…… 딱히?”
모건이 굴러다니는 큐브 하나를 집어 데굴데굴 굴렸다. 그 꼴에 청호가 코웃음을 쳤다. 모건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으나, 어쨌든 인간인지라 서툰 게 있었다. 예를 들면 거짓말 같은 거 말이다.
“모건 너 되게 똑똑한데 거짓말은 진짜 더럽게 못해. 눈알이 풍차처럼 굴러다닌다고.”
“……그래?”
모건이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딱히 진실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비스듬히 선 청호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말해. 아니면 여기 다 박살 내 버린다.”
“딱히 부술 만한 게 없는데.”
“많은데. 이런 거? 아니면 이런 거?”
청호가 염력으로 연구실 구석에 붙어 있던 연구용 냉동고와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묵직한 기계를 들어 올렸다. 기계들에 연결된 전선이 찌지직거리며 뒤틀렸다.
모건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야! 그 안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들어 있는 줄 알아?!”
“몰라.”
“기계도 내려놔! 그거 다시 구하지도 못해. 하나 남아 있는 거 간신히 가져온 거란 말이야!”
“모건 똑똑하잖아. 새로 하나 만들어.”
“그게 씨발, 똑똑하다고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거 만드는 데 또 다른 기계가 필요하고, 그 기계 만들려면 또 다른 기계가…….”
“그러니까 말해.”
“…….”
“안 해?”
청호가 검지를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자 냉동고의 문이 쩍 열렸다. 안에는 수백 개의 연구 표본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건이 수십 년 동안 연구해 온 결과물들이었다.
모건은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청호가 힘만 안 셌으면, 나라의 영웅만 아니었으면 음식에다 독 타 죽였을 텐데.
발을 동동 구르던 모건이 의자에 쓰러지듯 널브러졌다. 이 등신 같은 세상은 똑똑한 것만으로는 승기를 거머쥘 수가 없었다. 모건이 매가리 없는 음성으로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채 준위랑 휴가 접촉하면, 채 준위의 능력이 상승해.”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채 준위가 닿으면 채 준위 능력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휴랑 닿아도 그렇다고.”
“…….”
청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다지 어려운 말은 아니었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째서? 저는 시윤의 반려 에스퍼다. 그래서 유의미한 자극을 주고받는 걸로 알고 있다.
근데 휴는 뭔데? 휴는 뭐기에 시윤에게 그런 영향을 준단 말인가?
청호가 하늘을 떠다니는 기계들을 흘깃 바라봤다. 그러자 그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건이 얼른 기계의 안위를 확인했다. 느슨하게 뽑힌 플러그도 꼼꼼히 꽂았다.
그사이, 청호는 모건의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근데 나는 왜 채 준위 능력이 ‘왔다 갔다’고, 휴는 왜 능력이 ‘상승’한다고 해?”
“…….”
자못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모건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거렸다. 청호가 모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얼른 답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모건이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눈알이 뻑뻑한 게, 피로가 몰려왔다. 청호와의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다.
“너는 채 준위한테 힘을 쏟아붓는 위치야. 에스퍼니까 당연한 거지. 근데 채 준위는 가이드 배수구가 좁잖아. 보통 C급이니까. 근데 네가 SS급짜리 힘을 때려 넣으면…….”
“그건 알아. 채 준위가 내 힘을 배출하지 못해서 능력이 낮아진다는 거.”
“그래. 근데 휴는 채 준위한테 힘을 쏟지 않아. 오히려 뭐랄까, 배수구를 늘려 준달까. 내 추측으론 채 준위의 혈관에 무슨 짓을 해서…… 그냥 뚫는다고 하자. 아무튼 뚫어서 막힌 가이드 능력을 팽창시키는 것 같아.”
일종의 아드레날린, 엑스터시, 촉진제, 뭐 그런 거지. 모건이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구멍을 만들었다가, 두 손바닥으로 더 큰 구멍을 만들며 설명을 도왔다.
청호가 검지와 엄지로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시윤의 능력을 팽창시킨다, 라. 나쁜 건 아니었다. 시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도 아니고, 피를 뽑아 마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능력 상승이면 청호도 환영할 일이었다.
“휴의 능력은 채 준위한테만 통하는 거야?”
“일단은. 다른 가이드 피는 전혀 반응이 없었어. 다 해 보진 않았는데 대충 백 개쯤 해 봤으니까 안 통한다고 결론 내려도 되겠지.”
“…….”
“근데 또 채 준위 한정이라고 할 수 없는 게, 가이드 중 능력이 왔다 갔다 하는 건 채 준위뿐이니까…….”
“그게 채 준위 한정이라는 거잖아.”
“뭐…… 과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아닌데, 뭉뚱그리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영 께름칙한 결론이었다. 청호가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속이 메슥거렸다. 제가 모르는 것들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채 준위도 그걸 알고 있어?”
“뭐? 휴랑 닿으면 능력이 오른다는 거? 알고 있지. 내가 휴 머리카락으로 만든 약을 채 준위한테 주사했거든.”
“……뭐라고?”
청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뭘 주사해? 그 새끼 머리카락을 어떻게 했다고? 청호가 모건을 당장이라도 죽일 듯 바라봤다. 그러자 모건이 탕탕 짜증스레 책상을 두드렸다.
“네가 씨발, 애를 완전 개차반으로 만들어 놨잖아!”
“그건…….”
“시끄러워. 나는 그 순간 당연한 선택을 한 거야. 코피가 안 멈춰서 어쩔 수 없었다고. 효과 좋더라. 넣자마자 채 준위 능력이 A로 올랐거든.”
“…….”
“근데 이제 안 돼. 머리카락을 다 써 버렸어. 나중에 너 폭주 왔을 때 쓰려고 한 건데…….”
모건이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청호가 크게 심호흡했다.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채 준위가 휴를 만나고 싶어 할까?”
“그렇겠지. 너 사막 전투 나갔을 때도 혹시 휴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따라가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청호가 꾸욱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랬구나. 내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함께 출정하고 싶다더니. 손잡아 주겠다더니. 다른 것도 다 괜찮다더니. 반려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 거라더니.
사실 너는 휴를 만나고 싶었구나. 나는 그저 헛된 이유에 불과했구나.
청호가 쓰게 조소했다.
그가 연구실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은 이해했다. 근데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휴는 어째서 제가 못 하는 걸 할 수 있나. 그것도 시윤에게만. 가이아가 짝지어 준 반려는 전데, 인간인지 귀신인지도 모르는 놈에게 어째서 그런 능력이 있나.
혹 휴가 에스퍼일까.
에스퍼 능력은 수천, 수만 가지가 있다. 제가 불을 다루고 폴이 바람을 다루듯, 휴는 가이딩을 극대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는 걸까. 그것 말고도 별별 능력이 다 있었지. 환각을 보여 주는 안개부터 기척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제 능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까지. 어쩌면 SS급인 저보다 더 대단한 에스퍼일지도 몰랐다.
청호가 휙 모건을 바라봤다.
“휴 그 새끼가 에스퍼일 수도 있어?”
“어? 아니야. 휴는 에스퍼가 아니…… 어, 그러게. 에스퍼일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네.”
모건이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인간인가 클롭스인가, 그것만 검사했지 도어 검사는 하질 않았다. 애당초 인간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품고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모건이 심각한 낯으로 턱을 괬다. 더 이상 휴의 흔적이 없는데. 도어 검사를 진행하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았다. 일지를 뒤져 볼까. 뭐든 나오려나.
그때, 청호가 모건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만약 그 새끼가 에스퍼면, 채 준위 반려일 수도 있나?”
“……그게 무슨 등신 같은 소리야. 채 준위 반려는 너야. 가이아가 짝지어 준 건 청호 너라고. 그건 확실해.”
“또 모르지. 채 준위는 뭐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게 없잖아. 반려 에스퍼가 둘일 수도 있지.”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딘가 선득한 미소였다.
채 준위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제게 휴를 숨겼을 수도 있지.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저보다야 휴가 훨씬 더 좋을 테니까.
그래. 그게 훨씬 더 이상적인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였다. 가이딩할 때마다 고통에 엉엉 울고 코피를 쏟는 건 분명 기형적이었다.
휴도 알고 있을까.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주 오래전부터 저와 시윤을 지켜봐 온 것 같던데. 그래서 정원의 비밀을 알려 준 걸까. 제가 시윤과 멀어지길 바라서? 자신의 가이드를 품에 안고 사는 제가 꼴 보기 싫어서? 너희는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려 주려고?
청호의 사고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걸 지척에서 목도한 모건이 설핏 콧잔등을 구겼다.
“……너 지금 좀 이상하다.”
눈깔이 완전 맛 갔는데? 모건이 툭툭 청호의 팔뚝을 두드렸다.
“야. 채 준위가 강해지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야. 너. 너 아니면 뭐 하러…….”
“모건.”
청호가 모건의 말을 뚝 잘랐다.
“뭐. 왜.”
모건이 심술궂게 대답했다.
“채 준위 채혈 기록 보관하고 있어?”
“물론. 그런 게 다 소중한 연구 자료라고.”
“장벽 전투 때 채 준위 등급이 뭐였어?”
청호가 무표정한 낯으로 물었다.
“그때? 왜? 휴랑 무슨 일 있었을까 봐?”
“……어.”
“잠시만.”
모건이 난잡하게 떠 있던 홀로그램을 헤치며 이것저것을 터치했다. 그러더니 알파벳이 빼곡하게 적힌 차트 하나를 띄웠다. 모건이 장벽 전투가 있던 날짜를 기입하고 검색을 눌렀다. 결과는 하나뿐이었다. 그러잖아도 시윤이 채혈 기계를 잃어버렸다고 새로 하나 가져간 터라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날 채혈 기록은 하나밖에 없어. 시간상으론 보자…… 어, 장벽 전투 가는 길이었네.”
청호는 그날, 전투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절 따라가겠다는 시윤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지금 몇 급인데.’
“몇 급인데.”
그리고 시윤은 이렇게 대답했었지.
‘A요.’
“B-.”
청호는 심장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누가 억센 아귀힘으로 심장을 움켜쥐고 걸레 짜듯 비트는 것 같았다.
거짓말이었구나. 거짓말이었어.
청호가 자신의 눈두덩을 꾹 짓눌렀다. 당시 시윤과 나누었던 대화가 웽웽거리며 뇌를 헤집었다.
‘……채혈 기계 어디 있어.’
‘잃어버렸습니다. 시멘트 더미 아래에 있겠지요.’
‘…….’
‘A급 맞습니다. 대장님이랑 키스하고도 멀쩡한 거 보셨잖아요.’
‘……거짓말이면 화낼 거야, 채 준위.’
‘……거짓말 아닙니다.’
그때도 다시 휴를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나. 그래서 저를 따라가려 했나. 그리 생각했더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참 능청스럽게도 나를 속였구나. 그렇게 많은 걸 숨기고도 내 앞에서 그리 싱그럽게 웃었어. 말간 얼굴로 나를 조롱했어.
“…….”
나는.
이따금 네가 역겹다.
* * *
시윤은 소파에 앉아 곱게 청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쯤 오세요, 하고 연락해 볼까 하다가도 말았다. 그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가 오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듯 기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막 7시가 넘었을 무렵이었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난 시윤이 부리나케 현관으로 향했다. 역시나 청호였다.
“오셨어요?”
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시윤이 청호를 반겼다. 눈으로는 분주히 청호의 몸을 확인했다. 행여 어디라도 다치진 않았을까, 싶어서. 근데 눈으로 본다고 알겠는가. 크게 다쳤더라도 오는 길에 다 아물었을 텐데.
“다치진 않으셨어요?”
시윤이 청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청호에게선 바람 냄새가 났다. 그와 잘 어울리는 냄새였다.
“…….”
청호는 아무런 말 없이 시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시윤이 눈꺼풀을 바쁘게 움직였다. 설마 진짜 다쳤나. 예상치 못하게 강한 클롭스를 만났나. 그러기엔 너무 일찍 왔는데.
그때였다.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더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윤이 그대로 청호에게 이끌려 갔다. 놀란 시윤이 부랴부랴 청호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때마침 현관 센서 등이 꺼져 버렸다.
“대장…….”
그리고 입술이 맞물렸다. 당황한 시윤이 목석처럼 굳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입술을 쪽, 쪽, 쪼옥, 가볍게 물었다가 놨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핥기도 하고, 아프지 않게 깨물기도 했다.
잠깐 멈칫했던 시윤이 어색하게나마 청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키 차이가 큰 탓에 까치발을 들어야 했지만, 어쩐지 심장이 살랑거렸다.
꼭 연인 사이 같지 않은가. 저녁을 함께 먹자 약속하고, 함께 사는 공간에서 만나 키스하는 게.
청호가 한층 가까이 시윤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랑한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는 곧장 시윤의 혀와 얽혔다.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분명 감미로운 키스였으나, 시윤에겐 그다지 감미롭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오늘은 C급이었기 때문이다.
휴의 머리카락 효과가 다하는 순간, 꼭 힘을 가불해 쓴 것처럼 등급이 쭉쭉 떨어졌다. 청호와 깊은 스킨십을 한 적도 없는데. 억울하긴 하다만, 그래도 덕분에 장벽 전투를 잘 보냈으니 불만은 없었다.
문제는 지금이지.
목구멍으로 밀려오는 청호의 힘이 벅찼다. 당장 눈 뒤집고 기절할 정도는 아니지만 손끝이 움찔움찔할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시윤은 내색하지 않고 견뎌 냈다.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입술이 촉, 낯간지러운 소리를 끝으로 떨어졌다. 시윤이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이 얼얼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오늘도 청호를 가이딩했다는 혼자만의 충족감이었다.
시윤이 청호를 올려다보며 샐쭉 미소 지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볼을 엄지로 살살 매만졌다. 시윤의 시선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이 묘한 분위기가 쑥스러웠다. 이미 할 짓 못 할 짓 구분하지 않고 다 했음에도 그랬다. 이런 쪽으로는 아마 평생 적응이 어려울 듯했다.
우리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요. 시윤이 그리 말하려 입을 뗐을 때였다. 청호가 번쩍 시윤을 들어 올렸다. 놀란 시윤이 반사적으로 청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청호는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곧장 침대에 도착했다. 그러더니 시윤을 그 위에 내려놨다. 시윤이 당황한 낯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그와 제가 침대에서 할 일이라곤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아니,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지금은 좀…….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 걸음으로 침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청호가 시윤의 발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훅 당겼다. 시윤이 속절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시윤의 가느다란 머리칼이 침대 위로 민들레 씨처럼 흩어졌다.
“대, 대장님…….”
청호가 시윤의 위에 팔 굽혀 펴기 하듯 올라탔다. 그러고는 시윤의 입술을 쪽, 쪽 물었다가 놨다. 시윤의 눈동자가 좌우로 경련했다. 그를 밀어 내야 하나. 밀어 내지 않으면? 이대로 끝까지 버틸 수나 있고? 하지만 밀어 내고 싶지 않은데.
상반되는 이성이 충돌했다. 그 순간, 청호의 손이 윗도리 속으로 쑥 파고들었다. 시윤이 흡 숨을 들이마셨다.
청호의 커다란 손이 시윤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오목하게 파인 배를 매만지고, 허리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가슴까지 다다랐다. 시윤이 얼른 청호의 손목을 잡았다.
“대……장님.”
그가 애타게 청호를 불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청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렇다고 니트 안에서 손이 나온 건 아니었다.
“오늘은 몇 급이야?”
청호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입김이 시윤의 볼을 간질였다. 뒤늦게 부끄러워진 시윤이 옆으로 시선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 C, C요.”
시윤은 자신이 C라는 것을 숨길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C라고 하면 청호가 죄책감을 느낄 테니까. 평소라면 B예요, A예요, 라며 같잖은 거짓을 지껄였을 것이다. 언젠가 청호가 했던 말이 아직 시윤의 명치에 쿡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까지 가이딩을 구걸하듯 받아야 해?’
멍하니 있다가도 드문드문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순순히 진실을 말했다. 포옹이나 키스 정도의 스킨십은 참으면 되지만 섹스는 어떻게든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시윤의 의사와 달리 코피가 터지거나 까무러칠 수 있단 말이다.
“아프겠네. 하지 말까?”
시윤의 예상대로, 청호가 니트 안에서 손을 쑥 빼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하고 싶지 않았다. 청호의 말이 반갑기까지 했다. 근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선뜻 ‘그래요. 하지 마요.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묘하게 구겨진 청호의 미간에 짜증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채고 나니 등신 같은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 어……. 괘, 괜찮아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청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곧장 시윤을 뒤집었다. 시윤이 헛숨을 크게 삼켰다. 제가 만든 상황인데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태 이 침대에서 있었던 일 중 아프지 않았던 것이 없었으니까.
정원과 청호가 한바탕한 이후로 몇 주 내내 청호를 받아 낸 적이 있었다. 온통 눈물로 점철된 밤들이었다. 고통이 몸을 난도질하고 청호의 차가운 눈빛이 마음을 옥죄던 밤들.
잊고 있던 기억인데, 이리 누우니 매우 생생하게 떠올랐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몸이 굳고 있었다.
시윤이 과거의 기억을 떨쳐 내려 애쓰고 있는데, 바지가 쑥 예고 없이 내려갔다. 그것도 드로어즈까지 함께. 엉덩이를 스치는 찬 공기에 시윤이 어깨를 움츠렸다. 공포가 자욱한 안개처럼 밀려왔다.
눈을 꽉 세게 감은 시윤이 청호의 성기를 기다렸다. 아마 건조하게 아물린 뒤를 우악스레 파고들어 올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저는 베개나 시트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삼키겠지.
관계할 때 부드럽고 다정했던 청호는 첫 경험 이후, 시윤의 기억 속에 없었다.
근데 가늠하고 있던 것보다 가느다란 것이 닿아 왔다. 청호의 손가락인 듯했다. 그가 검지로 주름을 살살 펴듯 문지르고 있었다. 전과 다른 이유로 놀란 시윤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청호는 공들여 시윤의 뒤를 풀어 줬다. 건조한 뒷구멍이 도통 열릴 기미가 안 보이자, 자신의 타액으로 손가락을 적셔 주기까지 했다.
“아, 으응…….”
귀까지 올라왔던 시윤의 어깨가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청호의 손가락이 두 개나 들어와 있었다. 이따금 그가 내벽 어느 지점을 꾹꾹 짓누르거나, 긁어 줬는데 그럴 때마다 머리가 절로 번쩍번쩍 쳐들렸다.
발기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랫도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광대에는 발갛게 열이 채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뭉근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록 키스나 다른 애무는 없었지만, 그가 제 몸을 이리 공들여 만져 주는 것 자체가 매우 오랜만이었다. 그게 어찌나 낯간지럽고 설레는지.
시윤이 전과는 퍽 다른 의미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흐응, 아, 흣!”
뒷구멍이 말랑말랑해졌을 무렵, 청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수치도 모르는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곧, 청호의 두툼한 성기가 뻐끔거리는 구멍 위로 다가왔다.
청호는 느린 몸짓으로 시윤의 안에 침입했다. 구멍이 벌어지고, 내벽이 늘어나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노곤하게 풀렸던 시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윽…….”
아프다. 손가락 두 개가 왔다 갔다 했던 구멍으로는 청호의 우람한 성기를 수월히 받아 낼 수 없었다. 아물린 내벽을 꾸역꾸역 헤치고 들어오는 살덩이가 버거웠다.
그러나 그 정도는 참을 만했다. 청호와의 섹스가 처음도 아니고. 이보다 훨씬 더한 상황도 많이 겪었다. 전날의 관계로 퉁퉁 부은 뒷구멍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들어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단 말이다.
진짜 문제는 접합부를 통해 흘러오는 청호의 힘이었다. 그가 드나드는 뒷구멍은 물론, 배 속까지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으로 퍼지겠지.
“…….”
시윤이 이를 악물고 침대에 얼굴을 처박았다. 어떻게든 아픈 티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마침내 청호가 삽입을 마쳤다. 아마 성기를 모두 집어넣은 건 아닐 터였다. 청호는 처음부터 모두 쑤셔 넣는 것보다 절정에 다다랐을 때, 조금 남겨 두었던 성기를 끝까지 욱여넣고 사정하는 걸 좋아했다.
“흐…….”
그런데도 배가 터질 것 같았다. 장벽 전투 전만 해도 하루가 멀다고 받았던 것인데, 몇 주 멀리했다고 이리 낯설게 느껴질 수가.
아아, 그러고 보니 그땐 내내 A에서 B급을 왔다 갔다 했다. 휴의 머리카락을 주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고통이 생경할 만도 했다. 이렇게 오롯이 청호의 힘을 느끼는 건 그 언젠가 사막 작전 후, 청호와 데면데면했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아…….”
청호의 묵직한 신음이 귓바퀴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 뻑뻑하게 뭉쳐 있던 뒷구멍은 착실히 그것에 적응해 갔다. 청호가 공들여 풀어 준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이드 능력은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청호가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삭는 것 같았다.
“아흐, 읏, 윽, 흐읍, 아!”
시윤이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공포가 밀려왔다. 시윤은 숱한 경험으로 앞으로 있을 일들을, 아니, 아픔들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끙끙 앓는 정도이지만 청호가 사정하면 정말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 터였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시윤에게 청호는 버텨야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였다. 제 아픔으로 청호가 평온할 수 있다면, 쾌락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니 청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쾌락에 일그러진 그의 미간과, 도독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과, 저를 뚫을 듯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를 보면 공포가 한결 옅어질 것 같았다.
그런 시윤을 알았을까. 청호가 별안간 성기를 빼내더니, 시윤을 훌떡 뒤집었다. 그러고는 시윤의 사타구니를 벌리고 그 사이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청호가 재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전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찰박, 찰박.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널따란 거실을 공허하게 울렸다.
“흣, 읏, 대장, 대장님……. 아흐, 윽…….”
“…….”
청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시윤을 내려다봤다. 일그러지는 시윤의 미간과,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속눈썹, 발갛게 익은 눈가, 연신 저를 불러 대는 붉은 입술, 그런 것들을 눈에 박아 넣듯 집요하게 살폈다.
상체를 숙인 청호가 혀를 내어 시윤의 턱을 핥았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도 핥고, 이따금 저를 부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했다.
“대……장님…….”
시윤이 어색하게나마 그런 청호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다른 교감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야하게 신음을 흘려 볼까. 키스하자고 혀를 내밀어 볼까.
고통을 참으랴, 우박처럼 쏟아지는 청호의 시선을 감내하랴, 어떻게 하면 섹스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랴. 머리가 복작복작할 무렵, 청호의 허리 짓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옆으로 넘긴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성기가 쾅쾅 무자비하게 내벽을 두드리고, 뭉갰다. 척척, 척척척, 자신의 엉덩이와 청호의 사타구니가 바쁘게 마찰했다.
미처 벗지 못한 니트가 자꾸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 덕에 아래위로 헐떡이는 시윤의 늘씬한 배와 하얀 가슴팍이 죄 드러났다.
청호가 눈으로 그것을 핥으며 쿠우욱, 성기를 깊숙이 처박았다. 배가 뚫린 듯한 느낌에 시윤이 흐익, 기겁하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청호가 골반과 무릎을 당기는 바람에 곧장 끌려가 배 속이 제대로 짓뭉개졌다.
그리고 청호가 사정했다.
“큭…….”
“아아…….”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누가 펄펄 끓는 물을 배 속에 집어넣는 것 같았다. 그저 뜨끈한 점액질일 뿐인 청호의 정액이 염산처럼 느껴졌다. 그 정액이 마찰당해 예민해진 내벽을 할퀴듯 지나갔다. 그러다가 이윽고 배 속 깊은 곳에 고였는데, 그곳에서부터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퍼져 나갔다.
“……후우.”
청호가 자신의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그리고 서너 번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후희를 즐겼다. 그 후에야 시윤의 안에서 빠져나왔다.
“흐윽…….”
뒤늦게 자유가 된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렸다. 몸은 옹송그리고, 목은 안으로 말았다. 그런다고 해소될 청호의 힘이 아님을 알지만, 저절로 그리됐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곁에 누웠다. 한 팔로 시윤의 머리 아래를 받치고, 다른 팔로는 시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살 넘겨 주었다.
“채 준위.”
“흐…… 네, 네, 대장……님.”
시윤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간신히 떴다. 붉게 충혈된 눈이 눈물에 흠뻑 잠겨 있었다. 청호가 그것을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아파?”
“우윽…… 그냥, 조금……. 조금 아파요…….”
시윤이 가당치도 않은 거짓을 말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힌 채로 하기엔 영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청호가 자못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A급이었으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
“…….”
그 말에 시윤이 바쁘게 내뱉던 호흡을 잠시 멈췄다. A급이었으면. 그래, A급만 되었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B급만 되었더라도 참을 만했을 텐데. 어쩌면 여타 에스퍼와 가이드처럼 오르가슴과 환희가 넘실거리는 섹스를 즐길 수도 있었겠지. 오늘의 청호는 아주 부드럽고 친절했으니까.
틀린 말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찌릿했다. C급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제게 A급은 아주 까마득한 등급이기 때문이다. 청호가 제 비루한 등급을 이리 직접적으로 표현한 건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과를 해야 하나. 저를 내치지 말아 달라 빌어야 하나. 노력하겠다고, 어떻게든 등급을 올리겠다고 같잖은 패기라도 보여 볼까.
시윤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는데, 청호가 말랑하게 익은 시윤의 엉덩이를 꽉꽉 주물러 왔다. 벌름거리는 구멍 사이로 청호의 정액이 질질 흘렀다. 청호가 검지로 그것을 주름 위로 짓이기듯 문질렀다.
“더 하고 싶은데.”
“……대장님?”
“네 몸이 너무 좋아, 채 준위.”
청호가 시윤의 갈라진 귓불을 세게 빨았다가 놨다. 그의 짙은 숨소리에 흥분이 서려 있었다. 그것을 느낀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의 청호는 이상하다. 무엇이 어떻게 이상하다고 나열할 순 없지만, 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시윤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바쁘게 움직였다. 제 몸이 좋다는 청호에게, 더 하고 싶다는 청호에게 무어라 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청호의 검지가 녹진하게 풀린 뒤를 쑥 파고들었다. 그러더니 엄한 액체로 범벅이 된 내벽을 손가락으로 느끼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진득하게 매만졌다.
“내 걸 종일 쑤셔 넣고 있으면 좋을 텐데.”
“으으응…….”
그 야릇한 감각에 시윤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명치가 지글지글 끓는 듯 아픈데, 그가 문지르는 내벽 깊은 곳의 쾌감은 느껴졌다. 시윤이 혀를 내어 자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구겨진 니트를 벗어 던졌다. 하얀 상체가 오롯이 드러났다.
“하, 하고 싶으시면 더 하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대장님이 원하시는 만큼요.”
“……정말?”
“네. 저는 그러려고 태어난걸요.”
시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장에 나가는 장수 같은 표정이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스민 미소가 어찌나 멋진지. 시윤이 그를 따라 웃으려는 찰나, 몸이 훌떡 뒤집혔다.
그리고 청호의 두툼한 성기가 내리꽂히듯 들어왔다.
* * *
시윤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잠을 충분히 자서도 아니었고, 배가 고파서도 아니었고, 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속이 너무 아팠다. 누가 내장을 떼어다가 믹서기에 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으…….”
익숙한 통증이다. 늦은 새벽까지 청호를 받아 냈으니 아픈 게 당연했다. 끙끙 소리 죽여 앓던 시윤이 뒤늦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팔을 발견했다. 두툼하고 단단한 팔뚝. 울룩불룩 도드라진 근육에 커다란 손. 청호였다.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청호가 자신을 껴안고 있다니. 숱하게 많은 밤을 함께 보냈는데, 그의 품에서 눈을 뜬 건 처음이었다. 대개 청호는 일찍 사라졌고, 침대엔 저 혼자 남아 있었으니까.
시윤은 아픔도 잊고 자신의 가슴을 덮은 청호의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심장을 옥죄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행여 청호가 깰까, 입술을 겹쳐 문 시윤이 아픔을 삼켰다. 허나 무의미한 노력이었던 모양이다. 청호가 시윤을 제 품으로 더 깊이 끌어당기며 나지막이 속삭여 왔다.
“일찍 일어났네.”
“어, 예. 안녕히…… 주무셨어요?”
시윤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응. 너 안고 잤잖아. 당연히 잘 잤지.”
청호가 시윤을 조금 더 꽉 껴안았다. 곰살맞은 스킨십에 시윤의 광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끔뻑끔뻑 눈만 깜빡이고 있었더니 청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시윤의 머리칼에 가볍게 키스해 주고, 침대에서 나갔다. 욕실로 향하려는 듯했다.
시윤이 다급히 그의 손목을 쥐었다. 청호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시윤을 내려다봤다.
“대장님. 아침, 아침 같이 드실래요?”
“아니. 일이 있어서.”
“아……. 벌써 나가세요?”
시윤이 아쉽게 청호의 손목을 놓았다. 청호가 시윤에게 잡혔던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그 후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시윤이 멀어지는 그를 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러다 나오는 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그럼 오늘 저녁은…….”
“글쎄. 언제 복귀할지 모르는데.”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그냥 혼자 먹어.”
청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거절했다. 시윤의 눈썹이 청승맞게 처졌다.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이불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청호와 조금 진득하니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살을 맞대고 헐떡이는 그런 거 말고,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길 나누고 싶었단 말이다.
시윤이 침대 아래에 널브러진 자신의 니트를 쳐다봤다. 저 옷을 입고 함께 저녁을 먹을 줄 알았거늘. 물론, 그와의 섹스가 싫었다는 건 아니지만 기대한 게 아니었던 터라 아쉽기 그지없었다.
시윤이 짙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문질렀다. 식은땀이 축축하게 묻어났다. 오늘 종일 제 몸에 똬리를 튼 청호의 힘과 싸울 걸 생각하니 폐부가 갑갑해졌다.
침대에 털썩 쓰러지듯 누운 시윤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명치를 살살 문질렀다. 분노한 호랑이처럼 심장을 할퀴어 대는 청호의 힘이 조금이나마 유순해졌으면 하는 생각에 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청호가 복도를 지나 등장했다. 검은 셔츠에 전투복 바지를 입은 그에 시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같이 가겠노라고 말할 참이었다. 시답잖은 적이라 제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음을 안다. 그래도 그와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강의도 없고, 숙소에 있어 봐야 책 읽는 게 다이니 같이 가고 싶었다.
근데 청호가 조금 더 빨랐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마. 명령이야.”
“예?”
“나가지 말라고.”
“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시윤이 청호를 올려다봤다. 숙소에서 나가지 말라니. 생뚱맞은 명령이었다.
청호가 빙긋 멋지게 미소 지었다.
“아프잖아. 쉬어야지.”
“아…… 예.”
시윤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기특하다는 듯 시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바깥에 병사 몇 붙여 둘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시키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에 시윤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런 시윤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호가 등을 돌렸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숙소를 나섰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시윤은 홀로 남았다.
청호는 늦은 저녁쯤 숙소로 돌아왔다. 묽은 수프로 저녁을 때운 시윤이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오늘도 사지 멀쩡히 돌아온 청호에 시윤이 반가운 척을 하는데, 그가 곧장 입술을 맞붙였다. 그 후 어제처럼 다정한, 그러나 아픈 섹스가 반복됐다.
오늘은 어땠나요. 점심은 뭘 먹었나요. 다치진 않았나요. 병사들은 모두 무사한가요. 시윤은 종일 준비했던 질문을 하나도 써먹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시윤은 코피를 터트렸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비슷한 날이 반복됐다. 청호는 부지런히 포스의 근방을 돌며 클롭스들을 사살했고. 밤에는 시윤의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나흘이 지났다. 오후 느지막이 일어난 시윤은 욕실 거울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이 영 낯설었기 때문이다.
다친 곳도 없고, 여기저기 남아 있는 청호의 입술 자국이 아니고서는 이렇다 할 얼룩도 없는 몸인데 지나치게 창백했다. 꼭 죽은 지 일주일쯤 된 시체처럼. 거기다 며칠 새 살도 많이 빠졌다.
멍하니 거울을 보던 시윤이 갑작스레 핑 도는 시야에 몸을 휘청거렸다. 간신히 벽을 짚고 서서 눈을 빠르게 감았다가 떴다. 정전이라도 난 듯 눈앞이 검었다.
그러다 시야가 한결 밝게 개는 순간, 후드득 코피가 떨어졌다. 무감한 낯으로 턱 아래를 받친 시윤이 세면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방울방울 떨어지는 코피를 그저 목도하고 있었다.
익숙한 상황이다. 받아들인 청호의 힘을 모두 배출하기 전에 힘을 또 받고, 또 받으면 이렇게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를 보내곤 했다.
시윤은 줄줄 쏟아지는 코피가 멎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스퍼가 폭주로 입은 상처는 치료가 안 되는 것처럼, 가이딩으로 말미암은 상해 역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다른 약물은 물론, 진통제조차도 듣질 않았다.
시윤은 코피가 멎고 나서야 욕실에서 나왔다. ‘화목한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채혈 기계에 엄지를 꾹 눌렀다가 뗐다.
[C-]
야금야금 떨어지는 등급에 목구멍이 썼다. 청호와의 섹스가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등급 상승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휴를 만나야 하는데.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는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아…….”
시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그때, 홀로그램 바가 가볍게 진동하더니 메시지 하나를 띄웠다.
[뭐 해, 동생.]
시훈이었다. 시윤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는 책 하나를 아무거나 집어다 그것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사진을 찍고, 곧장 시훈에게 전송했다. 답이 늦으면 전화가 올지도 몰랐다. 핼쑥하게 마른 볼을 보면 또 온갖 유난을 떨며 절 찾아올 터였다.
[숙소에서 책 읽어.]
시윤이 메시지를 덧붙여 보냈다. 그 후로 시훈은 별별 시답잖은 말들을 줄줄이 해 댔다. 전장에서 있었던 일, 그의 반려 가이드인 다희와 있었던 일, 등등. 시윤은 옅은 미소를 띤 채 그것들에 일일이 답을 해 주었다.
그렇게 있으니 어쩐지 몸이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 그대로 기분 탓이겠지만, 뭐든 하고 싶었다. 청호도, 시훈도 모두 클롭스와 싸우고 있는데 저만 널브러져 있는 게 몹시 싫었다.
시윤은 나갈 채비를 했다. 연구실에 가 볼 참이었다. 새로운 보디캠들이 그득히 쌓였을 테니 그것도 보고, 강의 일정도 살펴봐야 했다.
가이드임을 나타내는 노란 명찰을 가슴팍에 단 시윤이 신발에 발을 꿰었다. 그리고 문을 여는데.
“…….”
문이 열리지 않았다. 분명 시윤의 손을 스캔하며 푸른빛이 일렁였는데, 그러다 갑자기 뚝 하고 꺼졌다.
시윤은 그것이 단순한 고장인 줄 알았다. 한 시간 전쯤 병사 하나가 점심을 챙겨 주고 나갔거늘. 갑자기 고장이라니. 콩콩 문을 두드리며 바깥에 있을 병사들을 불렀다. 근데 건너편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시윤의 안면에 난색이 스쳤다. 청호는 한창 전장에 있고, 폴을 비롯한 그의 수족들 역시 그와 함께 있을 것이고. 저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모건에게 연락해 볼까, 했으나 그 대단한 사람을 고작 문이 고장 났다고 부르기가 영 송구스러웠다.
현관에 걸터앉은 시윤이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냈다. 도움을 줄 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런 걸 고치는 부서가 따로 있을 텐데.
시윤이 막 관리 부서의 전화번호를 발견했을 때였다. 또 코피가 터졌다.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시윤이 욕실로 뛰어갔다.
시윤은 코피와의 치열한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썩 유쾌하지 못한 승리였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쓰러져 있는데도 힘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호가 나타났다. 시윤이 비척비척 일어나 그를 반겼다. 아니, 반기려 했다. 헌데 청호가 어찌나 위협적으로 다가오는지 소파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어디 나갔다 왔어?”
청호가 물었다. 치켜뜨인 눈에 화가 넘실거렸다.
“……아니요.”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어디 가려고 했어?”
“예?”
“문 열려고 했었잖아. 어디 가려고 했어?”
“아…… 연구, 실이요. 안 나간 지 조금 되어서…….”
시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잘못한 게 없는데 혼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 오늘도 그가 숙소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했던가. 들은 기억이 없는데. 섹스 중에 했나. 그래서 기억이 나지 않나.
시윤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데, 청호가 그의 턱을 거머쥐어 강제로 눈을 맞췄다.
“그래서 나갔어?”
“아니요. 문이…… 잠겨 있어서.”
“…….”
시윤의 부정에 청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가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마치 진실과 거짓을 판가름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청호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러자 청호가 빙긋 어딘가 작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잘했어.”
그가 시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윗도리를 벗으며 뒤를 돌았다. 욕실로 향하려는 모양이었다. 마른 입술을 핥은 시윤이 나지막이 청호를 불렀다.
“대장님.”
“응.”
“내일은 연구실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연구할 것도 있고, 강의 준비도 해야 해서요.”
그 말에 청호의 발이 우뚝 멈췄다.
“안 돼.”
“예? 왜, 왜 안 됩니까?”
“아프잖아. 숙소에서 쉬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시윤이 단호히 부정했다. 그의 말마따나 아픈 건 맞다. 근데 할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피쯤이야 닦으면 그만이다. 내장을 박박 긁어 대는 청호의 힘도 버겁긴 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래? 괜찮아?”
청호가 어딘가 못마땅한 눈으로 시윤을 바라봤다.
“네.”
시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시윤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시윤의 허리를 감싸 쥐고 그의 귓불을 쭉 빨았다.
“같이 씻을까?”
시윤이 번쩍 눈을 떴다. 사위가 검었다. 희미하게 드리우는 달빛으로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거실 침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흐…….”
시윤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프다. 몸속을 나도는 힘이 핏줄과 근육을 뚫고 바깥으로 나오려는 것처럼 발광하고 있었다.
‘같이 씻을까?’ 청호는 그 말 이후로 시윤을 욕실로 안고 들어갔다. 샤워는 당연히 정사로 이어졌고, 이른 저녁에 시작한 섹스는 늦은 새벽에야 끝났다. 또 코피가 터지는 걸 느끼며 정신을 잃었는데. 다시 눈을 뜨니 지금 이 상황이었다.
시윤이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목이 말랐다. 고통 섞인 신음을 연신 터트린 데다가 코피도 쏟고, 엉엉 울기까지 했으니 수분이 부족한 게 당연했다. 이대로 있다간 목젖이 초겨울의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러질 것 같았다.
시윤이 일어나기 위해 꾸물꾸물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몸을 옭아매고 있는 두꺼운 팔 때문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시윤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요 며칠, 청호는 이상하리만큼 저를 꼭 껴안고 잤다. 마치 누가 훔쳐 갈까,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청호의 몸은 단단하고, 크고, 따뜻했으니까. 이따금 숨쉬기가 불편하기도 했으나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
흐읍, 숨을 멈춘 시윤이 청호의 팔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그 후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는데, 갑자기 목이 뒤로 휙 끌려가더니 그대로 침대에 처박혔다.
“큭…….”
분명 푹신한 침대인데도 충격이 매우 컸다. 등이 시트 깊숙이 파묻혔다. 청호가 시윤의 목을 아래로 힘껏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시리게 번뜩거렸다. 꼭 먹이를 물어뜯기 직전의 맹수 같은 눈이었다.
“으윽, 대장……님…….”
확 조이는 숨통에 시윤이 청호의 손목을 잡았다. 다리가 버둥거리고, 허리가 뒤틀렸다. 그러나 청호는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목울대를 납작하게 짜부라트리겠다는 듯 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시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입술은 벙긋벙긋 열심히 움직이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따금 컥컥거리기만 했다.
“어디 가려고.”
청호가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시윤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채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근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러자 청호가 시윤의 목을 살짝 들었다가 쾅, 세게 아래로 처박았다. 뇌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머리가 아팠다. 귓구멍으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뚝 끊긴 산소에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대답해. 누굴 만나려고 그렇게 조심히 움직였느냐고.”
시윤은 청호가 왜 이러는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윤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도리도리 턱을 내저었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으나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
청호가 시윤을 집요하게 내려다봤다. 시윤 역시 청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길지 못했다.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눈알이 위로 쳐들렸다. 그러더니 시야가 검게 죽기 시작했다.
청호의 손목을 쥐고 있던 시윤의 손가락이 힘없이 풀렸다. 버둥거리던 다리도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그리고 시윤의 눈이 감기는 순간,
“허억…….”
청호가 손을 거뒀다. 시윤의 상체가 위로 솟구쳤다. 확 쪼그라들었던 폐부가 빵빵해지며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다. 몸을 옹송그린 시윤이 연신 둔탁한 기침을 토했다. 그렇게 수 분이 지나서야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보기 싫게 실핏줄이 터진 시윤의 눈알이 청호를 올려다봤다.
“물을,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잔뜩 쉰 목소리가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단단하게 굳은 청호의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시윤이 훌쩍 울음을 삼켰다. 정말인데. 정말 목이 말랐던 것뿐인데. 너무 평범하고 단조로운 이유라 덧붙일 말도 없었다.
괜히 서러워진 시윤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데, 청호가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테이블에 있던 물병 하나가 날아왔다. 청호가 그것을 시윤에게 내밀었다.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더는 물이 먹고 싶지 않았다. 목구멍과 목젖이 너무 아팠다. 침조차 삼키기 힘든 상태였다.
그러나 먹지 않으면 청호가 제 말을 거짓이라 여길 것 같았다. 그래서 꾸역꾸역 물을 삼켰다. 아래위로 움직이는 목울대가 말도 못 하게 아팠다.
간신히 두 모금을 삼킨 시윤이 느린 몸짓으로 물 뚜껑을 닫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청호가 이상하다. 근 일주일 내내 말도 없이 섹스하고, 근데 또 거칠지는 않고, 제가 바깥에 나가는 걸 싫어하고, 말은 다정하게 하는데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고. 그 모든 것을 이상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제가 또 무엇을 잘못했나. 제가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청호가 이리도 화가 났나.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물병을 꼭 움켜쥐는데, 청호가 그것을 빼앗아 휙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시윤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뉘었다. 훤히 드러난 시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눈을 감았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려는 모양이었다.
“…….”
시윤은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들이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제가 악몽을 꾼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선연히 느껴지는 통증에 따르면 현실이 맞는데, 이유도 결론도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시윤이 고개를 내려 자신의 가슴팍을 감싼 청호의 손을 바라봤다. 그러다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히 얹었다.
일정하게 이어지던 청호의 호흡이 잠깐 끊겼다가 다시 붙었다. 시윤은 그것을 느끼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 * *
소동 아닌 소동이 있던 밤 이후, 청호는 꼭 가면을 벗은 사람처럼 달라졌다. 차가웠고, 거칠었고, 매몰찼다. 섹스는 반복됐고, 그럴수록 시윤은 물 한 모금, 햇볕 한 줌 받지 못한 식물처럼 죽어 갔다. 언젠가 모건이 장난 섞인 말로 ‘너는 네 생명을 청호에게 쭉쭉 빨리는 거야’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공감될 정도였다.
오늘은 바깥에 나가지 못한 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거실 소파에 기댄 시윤이 느릿하게 책장을 넘겼다. 종일 책만 보고 있으니 눈알이 다 따끔따끔했다.
사실 종일이라고 할 것도 없다. 늦은 새벽까지 청호의 아래에서 흔들리다가 기절하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였다. 가끔은 청호가 출정 나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바깥에 나가고 싶었다. 연구실도 가고 싶고, 모건도 만나고 싶고, 얼굴 까먹겠다며 성화인 형들에게 괜찮아 보이는 사진만 골라 보내는 것도 지쳤다.
근데 나갈 수 있는 몰골이 아니었다. 아직 목에 청호의 손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푸르뎅뎅한 멍으로 시작했던 상흔은 이제 아예 검게 물들었다. 피부도 이상했다. 울긋불긋한 점들이 두드러기처럼 올라왔다. 속을 갉아먹는 청호의 힘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바깥으로 드러날 줄은 몰랐는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당연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문 앞을 지키고 선 병사가 때에 맞춰 음식을 가지고 왔지만, 간신히 주스나 삼키면 다행이었다. 영양 부족으로 눈알은 뻑뻑했고, 허벅지는 고장 난 엔진처럼 덜덜 떨렸다.
시윤이 거칠거칠한 얼굴을 벅벅 쓰다듬었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바지런히 활자를 따라갔다. 그러다 잠이 든다는 자각도 없이 까무룩 옆으로 쓰러졌다.
“채 준위.”
청호의 큼지막한 손이 시윤의 볼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시윤은 좀처럼 깨지 못했다. 미약하게 들썩이는 가슴팍이 아니고서야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청호의 입술이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시윤의 볼을 꾹꾹 짓누르듯 매만지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종착지는 오목하게 파인 시윤의 명치께였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서, 그를 깨우기 위해 가벼운 화상을 입혔던 그곳. 지금은 모건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상처는 흉터조차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청호의 검지가 그곳 위에 곧추섰다. 한 번 했던 짓인데, 두 번 못 할 리 없었다. 청호가 꾸욱 힘을 주려는 찰나.
“아……?”
시윤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잠기운이 그득한 눈동자가 흐리멍덩했다. 눈앞에 있는 게 청호인지 아니면 휴인지 구분조차 못 하는 듯했다.
청호가 미간을 한껏 구겼다. 그제야 청호를 알아본 시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아팠지만 코앞에 있는 청호가 우선이었다. 심장이 쿵, 쿵, 쿵 크고 빠르게 뛰었다. 등줄기에 오한이 들고,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잖아도 창백하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공포였다.
“하루가 멀다고 게을러지네.”
“아, 죄송, 죄송합니다. 금방 씻고 올게요.”
청호의 낮은 목소리에 시윤이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청호가 막아섰다.
“됐어. 바지나 벗어.”
시윤은 자신의 ‘화목한 방’에서 홀로그램을 띄워 둔 채 멍하니 시선을 허비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은근히 정원의 안부도 물었는데,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신단다. 그게 퍽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헌데 그럼 청호는 왜 화가 났나. 의문이 들었다. 정원이 무슨 짓을 한 건 아닌 듯한데. 시윤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책상 위의 채혈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윤이 거기다 쿡 엄지를 눌렀다. 따끔, 하는 통각이 느껴지고 곧 자그마한 알파벳이 떠올랐다.
[D]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D라니. D면 퓨어와 다름없었다. 어제까지는 C이기라도 했는데. D면 제 아픔은 그렇다 하더라도 청호에게 가이딩 효과가 있기는 할는지 의심이 되는 수준이었다.
시윤이 신경질적으로 채혈 기계를 밀었다. 더는 내려갈 곳도 없는데. 그럼 조금이나마 오를 만도 하거늘. 망할 몸뚱어리는 도무지 발전이 없다.
한동안 자괴감 속에서 헤엄치던 시윤이 옆에 있던 책을 집어 들었다. 멋스러운 하드커버가 매력적인 책이었다. 근데 책이 툭 바닥에 떨어졌다. 시윤이 짜증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다시 책을 주웠다. 근데 책이 또 떨어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시윤이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책을 집었다. 그러나 책은 들썩거리기만 할 뿐, 들리지 않았다.
시윤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꾸욱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은 시윤이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주위엔 온갖 물건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시윤이 헤집어 놓은 것들이었다.
책을 들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은 시윤은 방 안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을 들었다가 놨다. 대부분은 들 수가 없었다. 분명 손바닥을 대고, 손가락을 오므리고 팔에 힘을 줬는데, 자꾸만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걷는 것도 힘겨웠다. 침대에서 책상까지 가는 건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지만, 문을 열고 복도를 가로질러 욕실이나 부엌으로 향하는 건 식은땀이 줄줄 쏟아졌다. 사실 문고리를 돌리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근육이 죄 녹아 없어진 느낌.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에 구멍이 난 느낌. 뼈가 실처럼 얇아진 느낌이었다. 하룻밤 새에 여든 먹은 노인이 된 것 같았단 말이다.
몸 상태가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고. 청호의 화가 풀리면,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스킨십을 간간이 이어 가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근데 신체가 이토록 고장 났을 줄이야.
시윤은 무서워졌다. 모건이 ‘너 그러다 죽어. 청호는 괜찮은데 넌 죽어.’ 그런 말을 했을 때 절 겁주려는 거겠거니, 하고 넘겨 버렸는데.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잠들었다가 그대로 심장이 멈추어 다시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시윤은 자신의 방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근래엔 어떤 상황이어도, 몸이 말도 못 하게 아파도 쏟아지는 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꼭 신생아가 된 기분이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몇 시간이 지나 있을 때가 수두룩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시윤이 눈을 뜬 건 검은 어둠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였다. 청호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던 때이기도 했다.
시윤이 흐릿한 눈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대장님…….”
“…….”
청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윤의 바지를 벗기고, 드로어즈를 내릴 뿐이었다. 시윤의 입가에 쌉싸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에게 ‘반려’ 가이드가 아니라 반려 ‘가이드’ 취급을 당하는 건 경험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시큰거렸다.
평소라면 그것도 다 제가 버텨야 할 일이겠거니 하고 아픔을 억눌렀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물속에 잠겨 있는 듯 귓구멍이 멍하고, 시종일관 눈앞이 흐리고, 호흡도 느렸다. 가장 큰 문제는 24시간 종일 저를 괴롭히던 청호의 힘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찌릿찌릿한 통각이 뭉툭하고 둔감하게 느껴졌다.
“대장……님.”
시윤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청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흠칫 몸을 굳힌 청호가 시윤을 쳐다봤다. 냉기 가득한 눈동자에 시윤은 주책맞게 찔끔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아니면 끔찍한 사달이 날지도 모른다. 청호가 다시 가이드 없는 에스퍼로 돌아갈 수도 있단 말이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될까요?”
“뭐?”
“저 아파요. 오늘 하루만…… 쉬게 해 주세요.”
시윤이 간곡히 부탁했다.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채인 눈으로 애절하게 청호를 바라봤다.
“오늘은 정말 버틸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내일부터는 다시…….”
“하고 싶으시면 더 하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대장님이 원하시는 만큼요.”
청호가 낮게 읊조렸다. 꼭 재미없는 책을 낭독하듯, 고저 없는 음성이었다. 시윤이 가녀린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했던 말이었다. 이런 상황이 올 줄 모르고 호기로이 한 말이었지.
시윤의 안색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눈을 내리까는데, 청호가 턱을 잡고 아득바득 시선을 맞췄다.
“네가 했던 말이야. 거짓말이었어?”
“거짓말 아니었……습니다. 허투루 한 말도 아니었고요.”
시윤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에 청호가 비죽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럼 닥쳐.”
그대로 몸이 뒤집혔다. 엉덩이로 다가오는 성기에 시윤이 훌쩍 눈물을 삼켰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자그마한 유리 에펠 탑이 보였다. 어둑한 밤인데도 참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에펠 탑이 괜히 슬펐다.
저걸 주고받을 때의 우리는 이렇지 않았는데. 당시에 비하면 훨씬 가까운 거리에 있거늘. 그도 모자라 청호의 품에 안겨 있기까지 하거늘. 그가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다 이리되었나.
제 아버지 때문인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는지. 그의 오해가 그리도 원망스럽고 미워서 제게 이렇게 모진 건지.
아니면 제가 약하기 때문인가. 뭐만 하면 픽픽 쓰러지고 코피를 흘리는 제가 끔찍해졌을까. 가뜩이나 늦게 발현한 주제에 C급이라 짜증이라도 난 걸까. 싸움도 못하는 제가 너무 갑갑하고 같잖아서 화가 난 거냔 말이다.
그러다 문득, 시윤은 어쩌면 청호와의 관계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청호가 제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제가 미워진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이제 말 섞는 것도 싫고, 얼굴을 마주하고 밥 먹는 것도 싫고, 제가 그의 가이드라는 현실까지 싫어진 게 아닐까.
이제 제 세상엔 청호뿐인데. 그런 청호가 절 미워하다니.
참…… 가슴이 아팠다.
“아, 흐, 으읏, 흐으…….”
시윤은 들썩이는 천장을 초점 없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엔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하물며 아픔도, 공포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느껴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뻐끔 힘없이 벌어진 입술 틈으로 신음이 흘러나오긴 하나 일종의 반사 작용이었다.
며칠 전부터 이런 상태였다. 시체 같은 몸을 부여잡고 부득부득 섹스를 이어 가는 청호가 신기할 정도였다.
청호는 오늘도 어김없이 시윤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하던 시윤이 눈을 내리감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누가 전원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정신이 뚝 하고 끊기려 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청호가 시윤의 턱을 잘근잘근 씹으며 으르댔다.
“정신 잃지 마.”
그 한마디에 시윤이 찬물이라도 맞은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효과는 짧았다. 책 한 권 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몸뚱이가 성난 황소처럼 몰아치는 청호를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점점 눈이 감기는 시윤에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혼자 평온을 부유하는 시윤이 그렇게 밉고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청호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채 힘없이 흔들리던 시윤의 발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꾸욱 힘을 줬다.
손바닥이 후끈해지더니, 그 열기가 곧장 시윤의 발목에 옮겨붙었다. 희끄무레한 연기와 함께 텁텁하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시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흐윽!”
내내 매가리 없이 늘어져 있던 시윤의 몸이 갓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완전히 무뎌진 줄 알았던 통각점이 새로운 자극에 강렬히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대장……님…….”
손가락 끝을 갈퀴처럼 오므린 시윤이 벅벅 시트를 긁어 댔다. 그걸 잠시 방관하던 청호가 천천히 손을 뗐다. 시윤의 하얀 피부가 붉게 일그러져 있었다. 시윤이 줄줄 눈물을 쏟아 냈다.
청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시윤은 정말 온몸으로 울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아프고 서러워서, 또 무서워서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종국엔 끅끅 숨까지 뒤틀렸다.
시윤이 어떻게든 숨을 쉬어 보려 호흡을 고르는데, 콜록, 기침이 올라왔다. 그 순간 시윤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방울진 피들이 청호의 얼굴에 보기 싫게 튀었다.
놀란 시윤이 손으로 더듬더듬 청호의 얼굴을 닦아 냈다.
“아…… 죄송, 죄송해요…….”
코피는 수도 없이 흘렸으나 각혈은 처음이었다. 헌데 놀랍지 않았다. 언젠간 이러리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오장육부에 크고 작은 구멍이 뻥뻥 뚫려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시윤이 조심조심 청호의 얼굴을 닦았다. 정작 자신의 입가에 덕지덕지 묻은 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호가 어딘가 멍한 낯으로 시윤을 쳐다봤다.
“너…….”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대장님. 정말 죄송해요.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죄송해요. 시윤이 고장 난 로봇처럼 사과를 반복했다. 피에 젖어 통렬한 붉은색이 된 입술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시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그러다 뚝 잘린 듯 끊겼다.
* * *
초콜릿 바를 입에 문 모건이 자신의 연구실에 들어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쓰레기 더미 같은 연구실을 헤치고 의자에 앉았다. 한 입 남은 초콜릿 바를 삼키고 봉지는 대충 아무렇게나 뒤로 던졌다.
그리고 홀로그램을 켜는데.
“…….”
매우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은은하게 발광하는 붉은색. 손가락 하나만 한 길이에 실처럼 가느다란 것.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건 휴의 머리카락이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열댓 개.
고개를 푹 숙인 모건이 머리카락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이게 왜 제 책상에……. 청호가 두고 갔나? 아니면 시윤이? 둘 다 못 본 지 꽤 됐는데. 그새 휴를 잡아다 족쳐 머리를 쥐어뜯기라도 했나?
이렇든 저렇든, 이건 매우 귀중한 연구 재료였다. 모건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쓸어 모았다. 그리고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뒤를 돌았다. 머리카락을 보관할 통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때, 낯선 목소리 하나가 부드럽게 귓바퀴를 간질였다.
“안녕?”
흠칫 어깨를 떤 모건이 목소리를 따라 데구루루 눈알을 움직였다. 그곳엔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이였다. 그런데도 모건은 그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주름 하나 없는 하얀 와이셔츠에 슈트 팬츠 차림. 붉게 일렁이는 머리카락. 루비 같은 눈동자. 시윤이 묘사했던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휴다.
인간도, 클롭스도 아닌 미지의 존재.
모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묘한 긴장감과 함께 기대감이 솟구쳤다.
“만나는 건 처음이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휴가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모건이 설핏 미간을 구겼다. 이야기를 듣다니. 누구한테. 시윤에게? 아니면 청호에게? 그와 ‘이야기’라는 것을 나눌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닐 텐데.
“어떻게 여기 있지?”
모건이 뾰족한 눈으로 휴를 바라봤다.
“뭐, 이런저런 방법을 썼지.”
휴가 느릿하게 연구실을 배회하며 대답했다. 그는 마치 박물관에 온 아이처럼 이것저것을 살펴보고 들어 보고 만져 봤다. 모건이 소리 없이 책상 아래를 더듬었다. 언젠가 장난스레 붙여 놓은 총이 만져졌다. 정말 쓸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온 목적은?”
“시윤이가 아파. 가서 구해 주렴.”
“……뭐?”
놀란 모건이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뗐다. 누가 아파? 시윤이? 왜 아파? 아니, 그가 아픈 걸 휴가 어떻게 알지? 많은 의문이 동시에 치솟았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이쯤이면 한창 아플 때가 아닌가, 싶어서?”
휴가 보기 좋게 눈을 휘며 말했다. 개소리였다. 그런데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모건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홀로그램을 켰다. 그리고 시윤의 채혈 기록을 찾아 쭉쭉 아래로 내렸다. 맨 마지막 기록은 어제였다.
[D]
모건이 헛숨을 삼켰다.
“청호 이 개새끼가…….”
D라니. 대체 애를 얼마나 굴려 먹은 거야. 그 위의 기록도 엉망진창이었다. B에서부터 C로, 그리고 결국 D까지. 올랐을 때가 하루도 없었다. 이 말은, 하루도 빠짐없이 짙은 가이딩이 있었단 뜻이다. 분명 시윤의 상태가 말이 아니리라.
모건이 곧장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 흠칫 멈춰 섰다.
“당신 머리카락은…… 채 준위한테 주사하라고 준 건가?”
“응. 시윤이는 죽으면 안 되거든.”
“어째서?”
“아주 중요한 아이니까.”
“…….”
시윤이 중요한 아이라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시윤은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랑받는 막내아들이었고, 이 나라의 안전을 책임지는 최고 에스퍼의 반려 가이드였으며, 제 친구였으니까. 근데 그 말을 휴가 할 이유는 없었다.
모건이 새치름한 눈으로 휴를 쳐다보는데, 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왜 그렇게 봐? 너도 알잖니.”
“내가 뭘 아는데.”
“시윤이가 C급 가이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
그 말에 모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반면에 손가락은 탁탁, 탁탁탁 바쁘게 책상 위를 두드렸다. 모건은 속으로 하는 생각을 바깥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편이었다. 제 생각을 말해 봐야, 그걸 이해하는 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어째서 휴가, 오늘 처음 만난 휴가 제 머릿속을 꿰뚫고 있나.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뮤지컬 배우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돈 휴가 간이 의자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 중얼거렸다.
“항상 의심했겠지. SS급인 청호의 반려인데 어째서 C급일까. 어째서 A급까지 오르는 걸까. 그 한계는 어디일까.”
“…….”
“시윤이는 청호의 반려가 맞아. 그래서 그에 응하는 능력도 당연히, 갖추고 있단다.”
“…….”
“시윤이의 본래 능력이 궁금하지 않니? 날 조금 도와주면, 그걸 볼 수 있게 해 줄게.”
모건이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시윤의 본래 능력. 청호의 반려라면, SS급의 가이드라는 걸까. SS급 가이드라니. 말만 들어도 연구 욕구가 불타올랐다. 아마 그저 가이딩 능력만 있는 건 아니리라. 에스퍼와 또 다른 방식의 능력을 갖추고 있을 텐데. 그게 어떤 것일까.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모건이 애써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내가 그 같잖은 말에 속아 줄 줄 아는 모양인데…….”
“아무도 다치지 않아. 시윤이도, 청호도. 그리고 너도.”
“…….”
“그 셋만 다치지 않으면, 누가 죽든 너한테는 별로 상관없지 않니?”
휴는 매혹적이나 기이한 사람이다. 괴이한 동화 같은 존재라는 시윤의 묘사를 들었을 때 코웃음을 쳤었는데. 진짜 그럴 줄이야.
대체 어떻게 제 마음을 이다지도 꿰뚫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못해 신비할 지경이었다. 그건 과학으로도, 어떠한 기술로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 정체가 뭐야.”
“글쎄. 뭐라고 해야 좋을까. 나도 모르겠네.”
휴가 나른히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건에게 다가가 살짝 허리를 굽히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루비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모건을 직시했다. 모건은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휴가 감미로운 음성으로 조곤거렸다.
“나는 태초이자 마지막이란다.”
“…….”
“인간보다 오래되었고, 가이아보다 너희 가까이에 있는 존재이지.”
“…….”
“때로는 책에도 나오고, 전설에도 나왔다가, 지금은 잊혀진 존재이기도 해.”
제법 길고 친절한 설명이었으나 결국 정체를 알려 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모건은 같잖은 말장난에 속아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도, 환상에 목을 매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헌데 희한하게도 휴의 말이 거짓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휴가 빙긋 웃었다.
“근데 지금은 그냥 시윤이의 힘이 필요한 애달픈 존재, 그런 거로 해 두자.”
휴가 가지런히 선 실린더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유리가 울리며 맑은 소리가 났다. 그가 으음, 목으로 신음하며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검은 혀가 빼꼼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게슴츠레 뜬 모건이 그런 휴를 관찰하듯 살폈다.
“……당신 신이야? 과거 인간들이 떠받들던 예수, 부처, 브라흐마, 그런 거? 그래서 그렇게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야?”
모건답지 않게 허황한 질문에 휴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웃었다.
“오, 아니란다. 나도 들리지 않는 건 들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건 볼 수 없어. 그렇지만 느낄 수 있는 게 있지.”
“…….”
“또, 수천 년간 인간들을 봐 와서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가지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도 잘 알고 있단다.”
“…….”
“그래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거고. 너뿐만이 아니라 시윤이도, 청호도 무슨 생각 하는지 알고 있어.”
휴가 실린더 하나를 가볍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떠오르던 실린더는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그러다 직선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자, 수다는 그만 떨고. 이제 시윤이를 구하러 가.”
파삭. 실린더가 깨졌다. 모건이 부리나케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청호의 숙소 앞은 한눈에 봐도 평소와 달랐다. 건장해 보이는 병사가 둘도 아니고 넷이 숙소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제가 알기론 오늘 에로아스는 출정했다. 그러니 숙소 안에 청호가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청호는 누군가의 지킴이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니 저들은 시윤을 지키고 있다는 뜻인데. 과연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감시하는 것일까.
모건이 숙소 문 앞에 섰다. 그러자 병사들이 모건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모건 대령이다. 비켜.”
“모건 대령님이신 거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는 청호 대장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따로 언급이 있지 않고서는 누가 와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채 준위 안에 있는 거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현재 채 준위님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지랄하네.”
모건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러고는 막무가내로 숙소 안으로 침입하려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모건을 밀어 냈다.
“안 됩니다, 대령님. 돌아가십시오.”
“채 준위가 아파.”
“……압니다.”
병사들이 슬쩍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끼니때마다 시윤이 손도 대지 않는 식사를 가져다주고, 어깨 너머로 본 그의 상태를 매번 청호에게 보고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말에 모건은 눈이 까뒤집히는 걸 느꼈다. 아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물론, 이들이 청호에게 가타부타 말을 얹을 자격도, 그럴 만한 배짱도 없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미친놈들이……. 야! 너희 채 준위가 어떤 애인지 알고 있지?”
“……예?”
“채정원 원수님 아들에 청호 반려 가이드인 거. 알고 있냐고.”
“예.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애가 지금 죽기 직전이야. 이러다 죽어 버리면 너희 감당할 수 있냐?”
“그래도…….”
“그래도는, 씨발, 뭔 그래도. 채 준위한테 무슨 일 생기면 채 원수님이 너희 목 다 따 버릴 거다. 어디 목만 따겠냐. 너희 가족 전부 포스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방랑자로 돌아갈래?”
“…….”
“청호도 가만히 있지 않을걸. 걔가 명령한 건 채 준위를 감시하라는 거였지, 채 준위가 죽는 걸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라는 건 아니었잖아?”
병사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건의 말이 일리 있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모건이 뒤꿈치로 탁탁탁 바닥을 두드리며 그들을 종용했다.
“빨리, 열어, 새끼들아.”
“그럼 대장님께 보고를…….”
“보고하든지 말든지 좆대로 하고. 일단 문부터 열어!”
모건이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고함을 내질렀다.
숙소에 들어온 모건이 여기저기를 바쁘게 헤집었다. 시윤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욕실로 향하는 길목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채 준위!”
시윤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원래 밥을 챙겨 먹는 것에 관심이 없던 그였으나 이렇게 마른 건 처음 봤다. 정말 앙상하게 뼈만 남아 있었다. 거기다 입술과 턱, 목까지 뒤덮인 피로 짐작건대 각혈까지 한 듯했다.
피부도 이상했다. 울긋불긋한 점들이 올라와 있었는데, 이건 안에서 핏줄이 터진 거였다. 그럼 내장 역시 엉망진창일 게 불 보듯 뻔했다.
모건이 다급하게 시윤을 안아 들었다.
“아, 시윤아……. 안 돼. 응? 안 돼…….”
그러나 시윤은 대답이 없었다. 모건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나부끼기만 했다. 처연히 감긴 눈에 묻어 있는 눈물 자국이 어찌나 안쓰러운지. 제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모건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당장 연구실로 데리고 가야 했다.
시윤은 비쩍 마른 몸에 온갖 기계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건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주사가 완성되지 않았다. 항생제, 영양제, 포도당을 놓고 화상 입은 발목에 연고를 발랐을 뿐이었다.
시윤은 손등에 링거 바늘을 꽂는 순간, 잠깐 정신을 차렸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모건은 마음이 급했다. 숙소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분명 청호에게 연락했을 텐데. 아마 전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전속력으로 오고 있겠지. 매우 화난 상태일 게 뻔하고.
마음이 급했다. 정원에게 연락해서 시윤을 빼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
그래. 그러면 되지.
청호는 지금 반쯤 미쳐 버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가이드를 이따위로 대할 리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또 저와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 시윤을 살려야 했다.
모건이 빠른 손놀림으로 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시윤에게 집중했다. 시윤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청호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겉과 속 모두가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창창한 20대 남성의 뼈가 여든 먹은 노인처럼 가늘고 힘이 없어진 건지, 살은 물론 근육까지 죄 내렸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청호는 한 시간이 꼬박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전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리리라. 덕분에 모건은 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약물을 시윤에게 투약할 수 있었다. 이번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연달아 놨다.
‘시윤이를 데리고 오면, 주사 두 대를 놔. 그리고 조금씩 늘려 가. 세 대. 네 대. 그렇게. 시윤이가 자신의 힘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 주렴.’
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모건이 막 주사기를 빼는 순간, 청호가 들이닥쳤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한 그가 쾅, 실험대 하나를 내리쳤다.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실험대가 알루미늄 캔처럼 일그러졌다.
“모건 네가 미쳤구나? 내 숙소에서 채시윤을 빼 가?”
“청호야.”
“깨워.”
“안 돼. 싫어. 앞으로 사흘은 내리 재우기만 할 거야.”
“깨우라고.”
청호가 당장이라도 모건의 목을 비틀어 버릴 듯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모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청호 못지않게 눈을 치켜뜨고 그를 꾸짖었다.
“너야말로 미친 거 아니냐? 애 몸 상태가 이게 뭐야. 가이드 없는 에스퍼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래?”
“안 될 건 또 뭐야.”
“……뭐?”
“깨워, 얼른.”
청호가 한껏 가라앉은 음성으로 재차 명령했다. 모건이 벅벅 짜증스레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싫다고. 안 된다고. 그냥 가. 사흘만, 아니, 일주일만 참아. 너 아프지도 않잖아. 하루가 멀다고 채 준위한테 다 쏟아부었으면서.”
“…….”
“짐승 새끼도 아니고. 애가 코피를 줄줄 흘리다 못해 각혈까지 하는데 거기다 좆질할 기분이 들던?”
“…….”
“네 새끼는 채 준위 반려 에스퍼일 자격이 없어.”
그 말에 청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분노로 점철되어 있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졌다. 청호의 주변을 시작으로 공기가 어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모건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을 때였다.
청호가 모건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대로 쾅, 벽에다 처박았다. 모건의 다리가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큭…….”
청호와 십수 년을 알아 왔지만, 그가 제게 이런 폭력을 행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청호가 이리됐나. 모건은 시윤이 시체처럼 누워 있고, 청호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이 상황을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너…….”
“건방지게 굴지 마. 죽여 버리고 싶잖아.”
저 멀리서 메스 하나가 날아왔다. 그것은 모건의 목젖 바로 앞에 곧추선 채 멈췄다. 잘 벼려진 끄트머리가 살갗을 살짝 베었다. 아주 조금 찔렸을 뿐인데 금세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저 그런 협박이 아니라, 정말 죽일 생각인 듯했다.
모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공포가 느껴졌다. 평생 연구실에 처박혀 안락하게 살아온 모건으로서는 처음 겪는 위협이었다.
그런 모건의 눈동자를 보던 청호가 휙 뒤를 돌았다. 그런데도 모건은 여전히 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메스 역시 여전히 모건의 목 언저리에서 굳어 있었다.
시윤에게 다가간 청호가 시윤의 손등에 꽂혀 있던 링거를 아무렇게나 뽑아 버렸다.
“채시윤은 내 거야. 손대지 마.”
모건에게 경고한 그가 시윤을 안아 들었다. 꼭 짐짝을 이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만큼 조심성이 없었으며, 무례했다.
시윤의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던 모건이 참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청호야.”
“…….”
“왜 그래, 너.”
“…….”
“채 준위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모질게 굴어. 죽기 전에도 네 생각만 하는 앤데.”
“……그게 무슨 말이야.”
문으로 향하던 청호가 우뚝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모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메스 역시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목에 맺힌 핏방울을 아무렇게나 닦아 낸 모건이 시윤의 말을 전했다.
“한 시간 전에 잠깐 일어났었는데 그러더라. 자기가 죽으면 귀걸이로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뭐?”
“네가 지금 귀에 달고 있는 그 귀걸이보다 효과가 좋지 않겠냐고 그러던데. 자기 가족들이 반대하고 반대해도, 꼭 자기를 네 귀걸이로 만들어 달래.”
“…….”
“너 그런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청호의 검은 눈동자가 좌우로 바쁘게 경련했다. 그가 자신의 품에 안긴 시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파리한 안색의 시윤이 색색,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신을 제 귀걸이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고? 왜? 무어를 위해서? 만약 그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제게 있는데. 그런 걸 마지막 유언으로 남겼다고?
청호는 정말, 정말 이해가 안 됐다. 모건이 저를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청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모건을 뒤돌아봤을 때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와 함께 폴이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장님.”
“뭐야.”
“출정 명령입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야.”
청호의 눈썹이 비죽 모나게 올라갔다. 이 순간에 출정 명령이라니. 포스 근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저번처럼 클롭스 수만 마리가 쳐들어왔을 리도 없거늘. 갑작스러운 출정 명령이 있을 리 없었다.
폴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 그대로 갑자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안 간다고 해.”
“…….”
폴이 대답 대신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의 얼굴에 난처함이 서렸다. 모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정원의 짓이구나. ‘채 준위가 청호 대장을 가이딩하다 각혈해서 연구실에 입원 상태입니다.’ 그리 보낸 메시지의 효과가 탁월했던 모양이었다.
잠깐 눈치를 보던 모건이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딘데?”
“Z2 구역입니다.”
“어…….”
모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우 놀랍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였다.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번에 집중시킬 수 있을 만큼 방정맞은 몸짓이었다.
청호가 뾰족한 눈으로 모건을 쳐다봤다.
“왜?”
“휴가 있는 곳이야.”
“……뭐라고?”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청호의 눈매에 힘이 탁 풀렸다.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놀라다 못해 당황한 상태였다. 모건이 책상 위에 떠 있던 홀로그램들을 밀어 치우고, 붉은 꽃이 이미지화된 홀로그램을 새로이 띄웠다.
“그때 Z8 구역에서 가져왔던 꽃. 그중 몇 개에 Z2 구역에 있는 빙하 물질이 검출됐거든. Z8 구역이랑 Z2 구역이랑 수만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는데, 그 물질이 거기서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걸 왜 이제 말해?”
“좀 더 알아보려고 했지. 무서운 놈이니까. 괜히 말했다가 함정이기라도 하면 어째.”
모건이 능청히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데엔 손톱만큼의 재능도 없는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술술 나왔다. 어쩌면 누가 이미 시나리오를 짜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도 그럴 게, 휴가 떠나기 전에 말했었다.
‘시윤이를 데리고 오면, 채 원수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럼 청호에게 출정 명령이 떨어질 거야.’
‘뭐? 갑자기?’
‘그래. 갑자기. 그리고 그 출정은 함정이야. 채 원수가 청호를 죽이려는 함정. 청호를 아주 멀리 보내 놓고, 죽이려는 심산이지. 근데 시윤이 상태가 말이 아니니까 청호는 안 가려고 할 거야.’
‘당연히 안 보내야지.’
‘아니. 어떻게 해서든 보내. 내가 거기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대. 그럼 청호는 갈 거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함정인 걸 뻔히 알면서 보내라니.’
‘청호는 죽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기든, 누가 덤비든 죽겠니? 청호가? 청호는 수백만 년의 인간 역사상 가장 강한 아이야.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그래도…….’
‘그냥 보내. 거기서 두 사람에게 새로운 일이 있을 거야.’
‘잠깐만. 두 사람이라니. 청호랑 채 준위를 말하는 거야? 채 준위도 보내라고?’
‘아니. 넌 청호만 보내면 돼. 시윤이는 항상 그랬듯이, 알아서 길을 찾아갈 거야. 청호에게 맹목적인 아이잖니.’
그 말을 빙긋 웃으며 하는데 어찌나 확신에 차 있는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제 생각을 단번에 꿰뚫어 본 것도 그렇고.
그래서 모건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윤이 강해지면 더는 청호의 힘에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위해 조금의 위험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뭐, 시윤을 저리 모질게 대한 청호가 벌을 조금 받았으면 싶기도 하고.
시윤의 진짜 능력. 그리고 두 사람이 맞이할 새로운 국면. 그 모든 게 모건의 구미를 당겼다.
“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폴이 넌지시 청호를 재촉했다. 손목시계가 붉은 사인을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청호가 재차 부정을 내놓으려 입을 뗐을 때였다. 모건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가.”
“싫어.”
“가서 휴를 만날 수도 있잖아. 만나면, 죽이고 와.”
“…….”
“그럼 시윤이는 오롯이 네 거야.”
그 말에 청호가 잠시 호흡을 멈췄다. 오롯이 제 것인 시윤. 참으로 탐나는 문장이었다.
그런 청호를 보며, 모건이 알 듯 말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