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5권) (19/26)

정의롭지 못한 진실

헌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발, 한 발, 에로아스를 옥죄어 왔다.

“……아버지.”

시윤이 침통한 음성으로 정원을 불렀다. 정원이 눈만 움직여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애원했다.

“그만하세요.”

“…….”

“아버지, 제발요……. 이러지 마세요.”

제가 병실에서 그렇게 도망쳐 왔으니, 돌아가면 정원이 못된 짓을 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근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줄이야. 더군다나 에로아스 전체를 체포하겠다니. 비겁하게 폭탄을 터트린 것만으로도 실망이란 실망은 다 했거늘. 어찌 끝을 모르고 고약해지기만 하시는지 모르겠다.

시윤은 정원이 낯설었다. 평생을 함께 산 아버지인데도 남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꼭 낯선 파렴치한이 아버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원은 시윤의 애타는 음성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뚜벅뚜벅 걸어와 에로아스 부대를 압박했다. 원이 줄어들고, 에로아스 부대는 이제 어깨가 붙을 정도로 다닥다닥 모여 닭장에 갇힌 닭들 같은 꼴이 됐다.

정원이 곁에 서 있던 헌병 대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헌병들이 일제히 에로아스 병사들을 결박하고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굵직한 은빛 수갑은 능력자의 어빌리티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것으로, 모건이 만든 발명품 중 하나였다.

그렇게 병사들이 하나하나 잡혀가더니, 결국은 청호와 시윤만이 남았다.

그 모습에 끌려가는 에로아스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청호의 몸에 손을 대면 다 죽여 버릴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기도 했다.

헌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이, 청호를 둘러싼 헌병들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쉽사리 청호를 건들 수가 없는 것이다. 심기를 건드렸다간 머리통이 통째로 불타거나, 얼거나,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오거나, 아무튼 참상을 면하지 못할 터였다.

그 모습에 시윤이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를 느슨히 내렸다. 그리고 청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이상했다.

“…….”

그러니까,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어디서 개짓거리를 하는 거냐며 불을 내뿜었을 텐데.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정원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꼭 움켜쥔 시윤의 손은 놓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졸개들에게 짜증이 난 정원이 헌병의 손에 들려 있던 수갑을 빼앗듯 낚아챘다. 그리고 청호의 손목을 우악스레 잡아당겼다. 하지만 시윤이 청호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버텼다. 정원의 눈썹이 비죽 못마땅하게 뒤틀렸다.

“채시윤. 놔.”

“싫어요.”

“채 준위. 놔. 명령이야.”

독불장군 같은 정원에 시윤이 그를 노려보며 으르댔다.

“명분이 뭡니까? 어째서 대장님을 체포하시는 거예요.”

“많지.”

“많다니 그게 무슨…….”

“군인 살해, 국가의 개국 공신 위협, 명령 불복종, 가이드 폭행, 가이딩 착취 등. 더 꼽아 주랴?”

정원은 대단한 정의라도 논하는 듯 또박또박 쏘듯 말했다.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었다. 거기다 덧붙은 가이드 폭행과 가이딩 착취는 듣고 있기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콱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아들을 깎아내려서 정원이 얻고자 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저도 체포하세요. 같이 갈래요.”

청호의 손을 놓은 시윤이 두 손을 곱게 모아 정원에게 내밀었다. 정원이 희번덕하게 눈을 치켜떴다. 주름살이 진 그의 눈가가 팽팽하게 펴질 정도였다.

“뭐라?”

“저는 가이드로서 반려 에스퍼를 제대로 가이딩하지 못했고, 방랑…… 방랑자의 죽음을 방관했고, 군인으로서 나라에 이바지하지 못했으니까요.”

시윤이 비참한 낯으로 자신의 죄를 나열했다. 방금 말한 죄로 끌려가면 제가 여태 숨겨 온 모든 비밀을 낱낱이 털어놓아야 할 터였다. 온갖 더러운 시선과 환멸을 받겠지. 청호 가이드라더니 C급이래. 채 원수의 아들이면서 방랑자가 죽는 걸 방관했대. 나약하대 등등.

그래도 괜찮았다. 감옥이든, 어디든 귀걸이도 없는 청호를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시윤이 굳건한 얼굴로 정원을 응시할 때였다. 청호가 시윤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러고는 정원에게 손목을 내미는 것이다.

“채워.”

“…….”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정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장님?”

시윤 역시 얼빠진 표정으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청호는 동요라곤 없었다. 꼭 이 상황을 예상하고 준비한 사람 같았다.

시윤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혹 정원을 속이고 이 아수라장에서 벗어나려는 속셈일까. 그럼 좋을 텐데. 그가 제 손목을 쥐고 도망쳐 주길 바랐다. 다시는 정원의 얼굴을 볼 수 없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턱을 안으로 당기고 청호를 쳐다보던 정원이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묵직한 쇳덩이가 철컥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그리고 능력을 봉인했다는 표시로 새파란 불빛이 반짝였다.

정원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이래야지. 인간과 정에 약한 청호다. 제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 많은 헌병을 몰살하고 도망칠 리 없었다. 정원은 누구보다 청호를 잘 알았다. 그가 열두 살 때부터 계획하고, 창조한 청호였으니까.

정원이 멍청하게 선 헌병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만 끌고 가라는 뜻이었다. 청호의 손에 채워진 수갑에 안심한 헌병들이 성큼성큼 거리낌 없이 다가왔다.

“안 돼, 안 돼…….”

시윤이 청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몇 시간 전에 에로아스 병사가 되찾아 준 보라색 총을 꺼내 헌병을 겨누기도 했다.

헌병들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총 하나쯤을 제압하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상대가 시윤인지라, 정확히는 정원의 아들인지라 영 난감했다.

적막한 대치가 이어지는데, 청호가 수갑이 감긴 손으로 시윤의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길게 쓰다듬었다.

“채 준위.”

“대장님.”

“미안해.”

“……예?”

“미안해. 아프게 한 거.”

“…….”

시윤의 눈코입이 매가리 없이 흘러내렸다. 청호가 왜 이러는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미안한데? 이렇게 짐승처럼 잡혀가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제 잘못이거늘 어째서 사과하는 건데?

혹, 무너지고 으스러지는 제 마음을 알아채고 사과하는 걸까. 저리 평온한 얼굴로?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띤 채로?

혼란에 물든 시윤의 총구가 파르르 떨렸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기더니 촉,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그 도독한 입술에서, 따뜻한 온기에서, 단조롭기 그지없는 키스에서 시윤은 체념을 느꼈다. 청호는 진심으로 수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쉬운 손길로 시윤을 놓아준 청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헌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청호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시윤이 초점 없는 눈동자로 청호가 멀어지는 걸 망연히 응시했다.

저를 이 추운 세상에 덩그러니 내버려 두고 가는 청호라니. 늘 멋지고, 든든하던 넓은 등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치도 않은 원망 하나가 잇새로 흘러나갔다.

“버리지…… 않는다면서요.”

“…….”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리 말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근데 어떻게 이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어떻게 나를 이리 두고, 그렇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뒤를 돌 수가 있어.

“…….”

청호가 잠시 발을 멈췄다. 오도카니 선 시윤이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청호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그냥 그렇게 멀어졌다.

시윤이 눅눅하게 젖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흐릿한 망막에 제 손에 들린 총이 걸려 왔다. 반질반질한 총구가 시윤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것을 보던 시윤이 천천히 총을 들어 올렸다.

어디를 겨누려 했었는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하늘을 겨누려 했을 수도 있고, 저를 버리는 청호의 뒤를 겨누려 했을 수도 있고, 이 상황을 창조한 정원을 겨누려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제 턱 아래였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총구는 어느 한 곳도 겨누지 못했다. 소리 없이 다가온 헌병 하나가 시윤의 목덜미에 주사 하나를 깊숙이 넣었다가 뺐기 때문이다.

차가운 약물이 핏줄을 타고 퍼지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곧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몸이 기울면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청호의 코트가 바닥으로 풀썩 추락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 *

시윤이 눈을 뜬 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폭신한 침대. 널따란 창문. 부드럽게 쳐진 커튼. 꽤 손때가 묻은 책상. 본가에 있는 자신의 방이었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윤이 마지막 기억을 상기하곤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희뿌옇던 눈앞이 칫솔질이라도 한 듯 단숨에 화해졌다.

손등에 두툼한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진 상태였고, 몸도 산뜻했다. 시윤이 다급하게 손바닥을 확인했다. 다행히 청호가 정성스레 붙여 준 밴드는 그대로였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윤이 협탁에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하루가 꼬박 지나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청호는 어디로 갔나. 어떻게 됐나. 궁금한 게 한둘이 아녔다.

링거 바늘을 아무렇게나 뺀 시윤이 곧장 방을 나섰다. 잘 쓰지도 않는 차 키까지 챙겼다. 헌병에 끌려갔다면 있을 곳은 뻔했다. 포스의 질 나쁜 죄수들이 득실거리는 교도소겠지. 포스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당장 출발해도 몇 시간은 걸릴 터였다.

쿵쿵, 발을 구르며 계단을 내려오자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왜 벌써 일어났어?”

형들이 시윤을 가로막고 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염려가 가득한 표정의 선화도 있었다. 정원은 뭐가 그리 평온한지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방으로 올라가. 너 쉬어야 해.”

“그래. 안색이 안 좋다.”

시훈과 시준이 걱정인지 협박인지 모를 것을 내놓았다. 시윤은 대답하지 않고 현관으로 향하려 했다. 시훈이 그런 시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채시윤. 올라가.”

“형. 나 가야 해.”

“안 가도 돼.”

“갈 거라고.”

“네가 왜.”

“내가 대장님 가이드니까! 에스퍼랑 가이드랑 떨어지는 거 봤어?”

시윤이 빽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당연한 걸 설명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지금이 답답해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팩, 고개를 돌린 시윤이 다시 현관으로 발을 뗐을 때였다. 이번엔 시준이 그를 막아섰다.

“그 새끼는 이제 대장도 아니고, 네 에스퍼도 아니야. 그냥 범죄자지.”

그 말에 시윤은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타는 걸 느꼈다. 꼭 휴지에 불을 붙인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누가 머릿속에 수류탄을 던진 것처럼 정신이 펑, 하고 사방으로 조각났다.

이를 악문 시윤이 손안에 숨기고 있던 걸 그대로 휘둘렀다. 링거에서 빼 온 주삿바늘이었다. 제법 날카롭게 벼려진 그것이 시준의 뺨을 길게 쓸고 지나갔다. 길게 터진 피부 사이로 금세 붉은 피가 차올랐다.

“너…….”

진심으로 놀란 시준이 말끝을 흐렸다. 설마 순진한 제 동생이 자신을 공격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형.”

“…….”

“말조심해.”

시윤이 바글바글 끓는 듯한 음성으로 으르댔다.

시윤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청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전쟁터에서 살게 됐는지 안다면 누구도 감히 그를 범죄자라 칭할 수 없었다.

“대체 청호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시훈 역시 시윤의 행동에 적잖이 놀랐다. 폭력적인 시윤이라니. 폭력과 한 문장에 나열되는 시윤이라니. 너무 어색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이질적이었다.

시준과 시훈이 당황에 굳어 있는 사이, 시윤은 그들을 나 몰라라 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시윤의 손이 막 현관문에 닿기 직전이었다.

“시윤아.”

보드랍고 다정한 목소리가 시윤의 발목을 잡아챘다. 시윤이 흠칫, 멈춰 섰다.

“가지 마.”

“…….”

“엄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가지 마.”

“……엄마.”

“엄마는 너 아픈 거 싫어. 우는 것도 싫어. 이렇게…… 이렇게 변하는 것도 싫어. 네가 그럼 엄마 마음이 너무 아파.”

선화의 만면이 우울하게 흘러내렸다. 몸도 성하지 않은 애가 어딜 간다고. 형들과 다툼이라곤 하지 않던 애가 흉기를 휘두르질 않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분노를 표하질 않나. 평생을 애지중지 키워 온 아들인데 제 아들이 아닌 것 같았다.

시윤이 그런 선화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여쁘고, 단아하고, 기품 있고, 포근한 어머니. 항상 저부터 걱정해 주는 어머니. 자식을 낳고부터는 당신보다 자식을 먼저 생각하던 어머니.

그녀가 섞인 기억을 되뇌던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엄마. 가야 해요. 지금은 대장님이 더 중요…….”

그렇게 현관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 시훈이 시윤의 어깨를 쾅 벽으로 밀쳤다.

“윽…….”

“뭐라고 지껄이는지 자각은 하는 거냐, 너?”

호랑이처럼 콧잔등을 구긴 시훈이 으르렁거렸다. 시윤이 반사적으로 시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얼굴이 밟힌 과자처럼 조각조각 구겨졌다. 청호를 껴안고 토끼 굴로 떨어지다 부딪친 날개뼈가 아직 다 낫지 못했다. 금이 간 뼈가 덜거덕거리며 뒤틀리는 듯했다.

자그마한 얼굴이 대번에 창백하게 질렸다. 거대한 통증에 호흡도 꼬였다.

시훈의 눈이 개구리처럼 동그래졌다. 지나치게 아파하는 시윤에 놀란 거였다. 화난 제가 연약한 시윤을 고려하지 못하고 너무 험악하게 대한 모양이었다.

당황한 시훈이 손을 놨다. 시윤이 그대로 털썩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렇게 높은 높이도 아니었는데 온몸의 관절이 찌릿찌릿 요동쳤다. 몸을 옹송그린 시윤이 “흐…….” 아지랑이 같은 신음을 흘렸다.

“어머, 어머. 시훈아. 안 돼. 시윤이 아직 아파.”

시윤만큼이나 백지장이 된 선화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핏자국만 남은 볼을 아무렇게나 닦아 낸 시준 역시 시윤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시윤아. 형 봐 봐. 어디가 아파?”

시윤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짝 마른 어깨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시윤아…….”

시훈이 걱정과 후회가 넘실거리는 낯으로 시윤의 뺨을 매만졌다. 아니, 매만지려 할 때였다. 시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구겨져 있던 얼굴이 서늘한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다 목에 바짝 가져다 댄 링거 바늘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흰자위에는 거미줄 같은 실핏줄이 잔뜩 올라와 있고, 속눈썹은 하늘을 향해 곧추선 게 살쾡이 같았다.

“계속 못 가게 막으면 죽어 버릴 거야.”

시윤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널따란 거실을 울릴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했다.

그 모습을 코앞에서 마주한 시훈과 시준, 그리고 선화가 버석하니 굳었다. 폭력적이다 못해 자해까지 하는 시윤이라니.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다 비켜.”

시윤이 여전히 목에다 바늘을 겨눈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바람에 바늘 끝이 하얀 살결에 살짝 파묻혔다가 나왔다.

“시윤아!”

붉게 차오르는 핏방울에 선화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시준과 시훈이 시윤의 손에서 바늘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바늘은 조금씩 조금씩 시윤의 살을 쑤시고 들어갔다.

“채시윤. 뭐 하는 짓이야.”

“시윤아. 내려놔.”

“제발, 시윤아……. 여보,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 좀 해 봐요.”

죽을 만큼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다. 커터 칼도 아니고 고작 바늘인데. 허나 시윤이 지나치게 흥분 상태라는 게 문제였다. 저러다 힘을 잘못 주면 피부는 그대로 있되, 그 속에 있는 핏줄이 찢겨 나갈 터였다.

“비키라고. 내가 못 할 것 같아?”

시윤이 재차 협박했다. 그에 시훈과 시준은 어쩔 수 없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고, 선화는 눈물만 흘려 댔다. 항상 웃음과 온기가 넘치던 화목한 가족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시윤은 절망으로 문드러진 가족들의 얼굴을 뒤로하고서야 드디어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찬 바람이 쏟아졌다. 자유의 바람이었다. 시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청호를 만나러 갈 수 있겠노라 생각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이었다.

시윤이 한 발을 바깥으로 내디뎠을 때. 몸이 굳었다. 시윤의 입꼬리가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보라색 원이 예쁘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시윤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냥 바늘로 목젖을 죄 뜯어내고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윤은 지금 반쯤 미쳐 버린 상태였다. 사람들이 으레 감탄사처럼 말하는 ‘미치다’가 아니라, 정말 정신이 홀라당 뒤집힌 것 같았다.

평생 1순위로 두고 살아오던 가족이 거슬리는 장애물 같았고, 고통은 두렵지 않았으며, 죽음이 달콤해 보였다.

며칠 전까지는 숙소에 갇혀 청호를 가이딩했고, 그러다 각혈하고 쓰러져서, 눈을 뜨자마자 Z 구역까지 날아갔다가, 거기서 정신을 잃은 청호를 질질 끌고 다니다가, 또 전신이 지끈거릴 만큼 청호를 가이딩하고, 지금 이 꼴이니 제정신인 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아무튼, 시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상태였다. 보랏빛 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손가락 끝에 꾹 힘을 줬다. 체온으로 뜨끈하게 데워진 바늘이 말랑한 근육을 뚫었을 때였다.

“들어오거라.”

어느새 가족들 앞에 선 정원이 명령했다. 시윤이 고장 난 로봇처럼 끼긱, 끽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

“들어와. 너는 더 이상 청호의 반려가 아니야. 군인도 아니고. 이제 그냥 퓨어로 사는 게다. 여타 국민이 그러는 것처럼. 새로운 걸 공부해. 뭐든 시켜 주마.”

“……진짜 왜 이러세요.”

시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물로 일렁이는 눈이 청승맞기 그지없었다. 며칠 피죽도 못 얻어먹은 채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 같은 모습이었다. 그에 동정심이 들 만도 하거늘. 정원은 얄미울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너는 청호와 함께할 수 없어.”

“아니요. 아버지만 아니면 얼마든지…….”

“그래. 나 때문이다.”

정원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다지 쓸모 있는 인정은 아니었다.

“네. 제가 지금 힘든 거, 아픈 거, 슬픈 거. 모두 아버지 탓이에요. 그러니까 이번엔 그냥 보내 주…….”

“내가.”

시윤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릴 때였다. 어금니를 꾸욱 씹었다가 놓은 정원이 구역질하듯 말문을 텄다.

“시윤아, 내가.”

“…….”

“내가 청호 어미를 죽였다.”

그 말에 시윤이 고개를 갸웃, 옆으로 흘렸다. 누굴 죽였다고?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다음으로는 정원이 잘못 말한 줄 알았고. 또 다음으로는 정원이 저를 가로막으려 별별 거짓을 다 꾸며 내는구나, 생각했다.

근데 지나치게 경직된 정원의 표정이며, 경악을 감추지 못한 시훈과 시준의 얼굴, 그리고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듯 하얗게 질린 선화를 보고서야 정원이 한 말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윤이 들고 있던 바늘을 맥없이 떨어트렸다.

“……뭐라고요?”

어느새 사라진 보라색 원에 시윤이 비척비척 정원에게 다가갔다.

정원이 시윤의 팔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목덜미에서 퐁퐁 새어 나오고 있는 피를 검지로 살살 닦아 냈다.

“그래서 너희는 안 돼. 아무리 세상이, 가이아가 너희를 짝지어 줬대도, 내가 그걸 끊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다.”

정원은 손을 다정히 놀리면서도 잔인한 말만 골라 뱉어 댔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버지, 지금 하시는 말이…….”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원의 손을 밀어 냈다. 하지만 정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청호도 알고 있어.”

“……뭘요?”

“내가 제 어미를 죽인 걸.”

“…….”

시윤이 알맹이 없이 텅 빈 눈동자로 정원을 응시했다. 단숨에 영혼이 증발한 듯한 아들의 모습에 정원이 나불나불 같잖은 변명을 덧붙였다.

“시윤아. 내가 미안하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시윤의 귓구멍을 뚫지 못했다. 시윤의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건 먼 과거 청호의 목소리였다.

‘전장에서 구르면서 별별 시체를 다 봤는데. 우리 엄마만큼 찢긴 시체는 한 번도 못 봤어.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꿈같더라고.’

“근데 어쩔 수 없었어. 포스는, 국민은 지쳐 있었고 청호 같은 영웅이 필요했단 말이다.”

‘그래서 전장에서 살았어. 클롭스를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발악했지. 포스가 그토록 원하던 살인귀가 된 거야.’

“대의를 위한 거였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아, 이 개새끼들이 나를 속였구나.’

“근데 네가 청호의 반려 가이드가 될 줄은……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

‘엄마는 병원 지하에서 죽었어. 클롭스가 아니라, 인간한테. 클롭스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려고 부러 엄하게 팔다리를 뜯어내고 난도질했겠지.’

“네가 조금만 더 늦게 발현했으면 청호는 제힘에 휘말려 알아서 죽었을 텐데……. 그것만 기다렸는데…….”

‘……주동자를 찾은 겁니까?’

‘아직. 근데 얼마 안 남았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시윤아. 아비가, 아비가 미안하다. 사과하마. 그러니까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응?”

험상궂게 뒤틀린 정원이 시윤을 마구 흔들었다. 모든 걸 잊으라 독촉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그게 어찌나 역겹고 메스꺼운지. 속이 울렁거렸다. 석유 한 통을 통째로 삼킨 듯 오장육부가 니글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주먹처럼 동그랗게 말린 호흡이, 아니, 원망이, 아니, 증오가 치받았다. 그 와중에도 부지런한 콧구멍은 숨을 계속해서 들이켰다. 자연히 현기증이 올라왔다.

전신의 근육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앞이 새까맣게 죽었다. 시윤이 누군가가 내던진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로 쓰러졌다.

“시윤아!”

“채시윤!”

가족들의 걱정 어린 음성이 죽어 가는 정신을 더욱 짓눌렀다.

시윤은 자신의 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평소라면 멍하니 천장을 보며 정신을 추슬렀을 텐데, 이번에는 뇌보다 신체가 먼저 반응했다. 상체가 크게 튀어 오르더니 토사물이 역류했다. 먹은 거라곤 핏줄을 통해 주입된 약물밖에 없어서 희멀겋고 시큼한 위액만이 줄줄이 뿜어졌다.

“우욱…… 욱…….”

하얀 이불이 더럽게 얼룩졌다. 목구멍은 따갑고 눈물이 속눈썹을 흠뻑 적셨다.

‘내가 청호 어미를 죽였다.’

‘내가 청호 어미를 죽였다.’

‘내가 청호 어미를 죽였다.’

고저 없는 정원의 음성이 귓구멍을 탕탕 하염없이 때려 댔다. 아니라고 머리도 흔들어 보고, 질끈 눈도 감아 봤으나 소용없었다. 그래서일까. 구역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누가 손가락으로 목젖을 콱콱 주무르는 것 같았다.

입술 아래로 지저분한 타액이 늘어졌다. 그것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내고 색색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길었던 구역질을 간신히 멈춘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은 조용했다. 창밖엔 휘영청한 달이 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나. 아니면 며칠이 지났나. 가늠할 수 없었다.

시윤이 협탁을 살폈다. 손목시계를 찾는 거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다. 행여나 허튼수작을 할까, 정원이 치운 거겠지.

“…….”

으득 이를 간 시윤이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으로 못 나가면 창문으로 나가면 되지. 그것도 아니면 이 끔찍한 집을 박살 내서라도 나갈 터였다.

한시라도 빨리 청호를 만나야 했다. 제가 그를 만나 무엇을…… 무엇을 해야,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나야 했다.

정원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 것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청호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처음부터? 아니면 사막 전투에 가기 전? 그것도 아니면 장벽 전투에서?

아, 아아. 그래. 사막 전투 때 폴이 그런 말을 했었다. 청호 어머니의 죽음을 조사하는 데 문제가 생겼냐 물었더니 그랬었지.

‘그게,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예.’

‘얼마 전에 갑자기 찾는 걸 그만두라 하시더라고.’

‘……예? 어째서 말입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냥 관두라고 하셨어. 더 찾을 필요 없다고.’

그때부터였구나.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서 저를 그리 모질게 대했구나. 차갑고 서늘한 눈으로 보며,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원망을 표했구나.

근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와 예전처럼 웃으며 함께 식사하길 바랐다. 가이딩이 필요 없다는 그에게 반려를 운운하며 고집을 부렸고, 언젠가는 모든 갈등이 지나가고 여타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처럼 행복해지길 기대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열여섯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을 때부터, 아니, 정원이 죄를 지었을 때부터 제 인생은 이미 빛이라곤 쬘 수 없는 황폐였거늘.

“우욱…….”

다시 치받는 구역질에 시윤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청호는 왜, 왜 저를 고작 모질게 대하기만 했나. 어째서 저를 움켜쥐고 분노를 쏟아 내지 않았나. 왜 그에 응하는 벌을 내리지 않았나.

모든 순간과 시간이 역겨워서 죽고 싶었다. 무지의 안락함에 취해 했던 말과 행동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전신이 난도질당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흐으, 큭, 흐으윽…….”

시윤이 뚝뚝 눈물을 떨궜다. 저에게 청호는 제 죄를 반절이나 속죄해 준 구원자인데. 저는 청호에게 원수였고, 괴물의 자식이었다. 복수하고 싶으나 복수할 수도 없는 질긴 운명이었다. 차라리 제가 반려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청호가 제 목을 마음껏 조를 수 있었을 텐데.

정원의 말마따나 하필 제가 반려 가이드라 죽일 수도, 그렇다고 품을 수도 없었겠지. 그 간극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등신같이 좋다고 웃어 대는 제 얼굴을 보며 갈가리 찢긴 어머니를 떠올렸겠지. 아프다고 울고, 힘들다고 우는 꼴은 또 얼마나 같잖았을까.

시윤이 훌쩍훌쩍 세상 서러움을 다 모아 울었다. 그러다 헛구역질을 하고, 또 울다가 구역질을 했다.

시윤은 새벽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홉떴다. 머리를 잘 굴려야 한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우울을 반복해 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시윤이 이불을 훌떡 들쳤다.

그리고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하…….”

제 발목을 감싸고 있는 저 쇳덩이가 진정 족쇄가 맞나.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깜빡이고 또 깜빡였다. 그저 건강이 엉망이라 몸이 무거운 줄 알았는데. 진짜 뭐가 달려 있을 줄이야.

시윤이 발목에 엉킨 사슬을 잡아당겼다. 다리가 훅 끌려왔다. 반대쪽은 언제 박아 뒀는지 모를 쇠말뚝과 연결되어 있었다. 시윤의 손목만큼 굵은 쇠말뚝은 시윤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옴짝달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족쇄를 당기고, 뒤틀고, 벌리고 별별 짓을 다 하던 시윤이 순간 엄청난 현기증과 함께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눈앞까지 가까워졌다. 반면 가까이 있던 책상은 멀어지고, 바닥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변했다.

“우윽…….”

또 구역질이 올라오려 했다. 시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정신이 또 검은 세계로 도피하려는 모양이었다.

시윤이 눈꺼풀에 힘을 잔뜩 주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찰나였다. 전신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듯 쏴-한 기분이 들더니 몸이 서늘하게 식었다.

* * *

따뜻한 수프를 뜬 수저가 시윤의 입가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윤의 생기 없는 눈동자는 농홍한 빛을 드리우는 창을 향해 있었다.

“시윤아. 밥 좀 먹어.”

선화가 애원하듯 말했다.

“엄마. 저 보내 주세요.”

시윤이 바짝 마른 입술로 읊조렸다. 집에 갇힌 지 일주일. 하루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 번씩 반복하는 소리였다.

“……밥부터 먹자. 응?”

선화가 그새 식은 수프를 그릇에 넣었다가 다시 떴다. 시윤이 선화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밥 먹으면 보내 주실 거예요?”

“……자꾸 어딜 가겠다는 거야. 네 집은 여긴데.”

결국 수저를 내려놓은 선화가 시윤의 손을 쓰다듬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게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며칠 사이, 아니, 청호를 만난 후부터 지금까지 살이 꾸준히 내린 터라 꼭 해골 같은 모습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눈시울이 찡해졌다.

“대장님한테 가야 해요. 엄마도 들었잖아요.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

“대장님은 그걸 다 알고 계셨단 말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태…….”

주절주절 끝을 모르고 흘러나오는 죄의식에 선화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윤아. 네가 가서 할 수 있는 게 뭔데.”

“뭐든, 뭐든 해 봐야죠. 용서를 빌고, 바라시는 게 있다면 성심성의껏 들어드리고, 또…….”

“왜 네가 용서를 비니. 빌려면 아버지가 빌어야지. 네가 뭘 잘못했어?”

“……엄마.”

“물론, 우리 가족이 모두 무고한 건 아니다. 아버지의 가족으로서, 미안해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맞아. 하지만 그 죄를 온전히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

“시윤아. 그때 넌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아이였어.”

선화는 전적으로 정원이 잘못한 일에 아들을 제물로 바칠 생각일랑 손톱만큼도 없었다. 지금도 상황을 이 꼴로 만든, 아들의 인생을 어그러트려 놓은 정원이 원망스러워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시윤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선화가 그의 볼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그러다 청호가 널 죽이면 어쩌니.”

“대장님이요? 그럴 리 없어요.”

“혹시 모르잖니. 부모가, 부모가 죽은 게 보통 일도 아니고……. 얼마든지 이성을 잃을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아버지가 감옥에 가둬 놨잖아요. 절 죽일까 봐! 정작 대장님 어머님은 그렇게 죽여 놓고!”

시윤이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상기하고 되뇔수록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시윤이 벅벅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런 시윤을 가만히 쳐다보던 선화가 나직이 말했다.

“너…… 청호를 사랑하니?”

“……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주제에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랑해서 그러니?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걱정되고? 네게 그렇게 모진 짓을 했는데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야?”

“보, 보고 싶고 걱정하는 건 맞지만 사랑은…… 어……. 아니지. 다, 당연히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대장님과 저는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인걸요.”

“…….”

어딘가 구질구질한 시윤의 말에 선화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시윤이 쭈뼛쭈뼛 고개를 돌렸다. 절 빤히 쳐다보는 선화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감정 하나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인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괴물 같아요.”

시윤이 어색하게 주제를 옮겼다.

“……나도.”

선화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시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응. 나도 그래.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포스 국민이라면 청호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다 알지 않니. 근데 그게 그 사람 머리에서 나온 거짓말이었다니…….”

선화의 한탄에 시윤이 냉큼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선화라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그녀라면 저를 이 집에서 탈출시켜 줄지도 몰랐다.

“그럼 저 좀 보내 주세요. 대장님이 너무 걱정돼요. 폭주라도 하셨으면 어떡해요.”

“…….”

선화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시윤의 눈동자에 오랜만에 빛이 감돌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선화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그 사람이 저지른 죄랑, 네가 청호를 만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순식간에 만면을 일그러트린 시윤이 선화의 손을 던지듯 놓았다. 그리고 식사는 물론, 대화도 하지 않겠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에 선화가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트레이를 협탁 위에 올려 둔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밥 여기 두고 나갈게. 부족하면 말하고.”

시윤이 숨어든 이불 더미를 쳐다보던 선화가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시윤은 그녀가 나간 후에도 뒤집어쓴 이불을 들치지 않았다. 두껍고 부드러운 이불에 짓눌려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이불에 깔려 죽고 싶었다.

“흐…….”

또 주책없이 눈물이 비죽 새어 나왔다. 집에 갇힌 후로 틈만 나면 울었더니 눈가가 따끔따끔했다. 시윤이 벅벅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이불을 아무렇게나 걷어찼다. 족쇄가 달린 발목이 드러났다.

이를 악문 시윤이 그것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발목은 이미 푸르뎅뎅한 멍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철에 쓸려 생긴 생채기도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시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족쇄를 부술 수 있는 도구를 찾았다.

족쇄는 열쇠로 여닫는 게 아니라 전자식이었다. 큰 충격을 가하거나, 전기를 이용하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침대 아래에 쪼그려 앉은 시윤이 전기 콘센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무엇을 써야 이 벽 너머에 흐르고 있는 전기를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까.

머리에 쥐가 날 만큼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따닥.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잘못 들었나. 아니면 바깥에 비라도 오나. 바보 같은 얼굴로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또 따닥, 소리가 났다.

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기민하게 주위를 훑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창문에다 손톱만 한 돌멩이를 던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창문에 바짝 붙어 선 시윤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박……종우 하사?”

종우가 서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시윤이 아래를 빤히 내려다봤다. 종우는 평소와 사뭇 다른 차림새였다. 늘 군복을 깔끔히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래위로 온통 검은 옷에 푹 눌러쓴 볼 캡마저도 검은색이었다.

사실 저 시커먼 인영이 종우라는 것도 한참 보다가 그가 슬쩍 모자를 벗어 주고서야 알았다.

시윤이 조심조심 창문을 밀어 열었다. 창문은 기본적인 잠금장치를 제외하곤 별다른 게 없었다. 그래서 얼마든지 열 수 있었다. 걱정만 잔뜩이지 감금에는 그다지 전문적이지 못한 가족들인 게 이렇게 티가 났다. 뭐, 창문은 물론 지붕까지 열려 있다 한들 발목에 족쇄가 달려 있어 나갈 순 없지만.

시윤이 여긴 어쩐 일이냐고 표정으로 물었다. 시윤의 집은 저택만 큰 게 아니라 정원도 컸다. 사방에 높다란 벽을 두르고, 대문에서부터 집까지 거리도 제법 됐다.

그러니까, 지금 종우가 서 있는 곳이 시윤의 집 안과 다름없단 말이다. 예의 있게 벨을 누르고 들고 온 것 같진 않고. 담을 넘어서 왔나. 아니면 제집에 저도 모르는 개구멍이 있나.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종우가 큼지막한 홀로그램으로 활자를 띄웠다. 시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종우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은 학생이긴 했으나, 친하다는 말로 포장하긴 조금 어려운 관계인지라. 아무리 봐도 무단 침입인데. 거리낌이 먼저 들었다.

시윤의 침묵에 종우가 홀로그램을 밀어 치우고 새로운 문장을 써냈다.

[청호 대장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시윤은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을 연달아 세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종우는 동그란 갈고리가 달린 등반용 로프를 시윤의 창문턱에 건 후 성큼성큼 빠르게 올라왔다. 그 후 행여 누가 볼까 로프를 돌돌 말아 정리했다. 창문까지 닫은 그가 시윤을 향해 경례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준위님.”

“예……. 박종우 하사. 오랜만이에요.”

시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경례를 받았다. 청호에게 데려다준다기에 일단 들어오라곤 했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던 시윤이 조금 전 선화가 두고 간 트레이 위에서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 종우에게 내밀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종우가 꾸벅 묵례하며 주스를 받았다.

“어렵지 않죠. 대장님이 수용되셨다는데, 원수님 아들인 준위님이 같이 수용되셨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강의를 하시는 것도 아니고. 연구실은 몇 주째 들르지도 않으시니까요. 그럼 집뿐이죠.”

“……그럼 청호 대장님이 어디 계신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건 포스 전 국민이 알고 있지 말입니다. 에로아스 부대 전체가 잡혀 들어갔으니, 모를 수가 없지요. 그래서 분위기가 심상찮습니다. 다들 불안해하고, 청호 대장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부당한 대우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

시윤의 낯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국민이 동요하고 있다, 라.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일이 크게 번져서 청호에게 득이 되면 다행이랴만,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권력도 힘도 무기도 모두 정원이 꽉 잡고 있으니 말이다.

시윤이 긴 한숨과 함께 침대에 걸터앉았다.

“대장님은…… 잘 계세요?”

“그것까진 모릅니다. 능력자 교도소 쪽 감시가 곱절에 곱절은 삼엄해졌습니다. 청호 대장님을 응원하겠다고 여기저기서 시민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요.”

듣기만 해도 골이 지끈거리는 상황에 시윤이 눈을 벅벅 비볐다.

“그런 상황에서 절 어떻게 대장님께 데려다주겠다는 겁니까?”

“계획은 있습니다만,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성공하지 못할 거면…….”

“그래도 뭐든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패한다 한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지 말입니다. 누가 감히 채 준위님을 벌하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설사 시윤이 길 한복판에서 총기 난사를 한다 한들, 법정에도 서지 않을 터였다. 어쩌면 발목에 족쇄를 단 지금이 시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뜻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놓은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음 날 저녁. 시윤은 부지런히 수저를 움직이고 있었다. 혀 위에 찐득하게 들러붙은 죽이 오물 같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식사하는 시윤에 신난 선화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올려 주는 반찬도 복스럽게 먹어 치웠다.

시윤을 중심으로 둘러선 형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작 밥 한번 먹는 게 뭐라고 만세라도 부를 기세였다. 시윤은 그들과도 눈을 맞추며 음식을 보란 듯이 꼭꼭 씹어 먹었다. 이따금 맛있다며 웃기도 하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모두 종우가 시킨 짓이었다.

‘다 잊은 척하세요. 괜찮은 척, 가족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척 말입니다. 그래야…….’

‘방심하겠지요.’

‘네.’

시윤이 시준의 손을 맞잡으며 서글프게 눈썹을 구겼다.

“형. 볼은 괜찮아?”

“그럼, 그럼. 그게 언젠데. 신경 쓰지 마.”

시준이 사랑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시윤을 쓰다듬었다. 시윤이 다행이라는 듯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시윤과 형들 그리고 선화는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과일도 먹었고,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차도 마셨다. 그러다 슬쩍 시훈의 손목시계를 훔쳐봤다.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시윤이 느릿하게 몸을 뉘었다.

“졸려. 잘래.”

“벌써?”

“응. 피곤해.”

시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추슬러 주었다. 시준은 전등 밝기를 줄였다. 두 사람을 보던 시윤이 나직이 말했다.

“형, 나 수면제 좀 줘.”

“왜? 졸린다며?”

“새벽에 깨기 싫어서.”

시준이 군말 없이 협탁에서 수면제 한 알을 꺼냈다. 선화가 시윤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엄마가 옆에 있어 줄까?”

“괜찮아요.”

시윤이 고개를 내저었다. 수면제를 삼키고 물까지 마신 그가 눈을 감았다. 그 후 사지에 힘을 풀고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런 시윤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가족들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조심스레 문이 닫히고, 시윤은 속으로 숫자를 100까지 세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입에 물고 있던 수면제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뱉었다. 그 후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에 붙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스탠드 불을 세 번 껐다가 켰다. 다음으로는 창문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먹만 한 갈고리가 휙 하고 날아오더니 창가에 걸렸다. 시윤이 그것을 단단하게 고쳐 걸었다. 곧 종우가 벽을 기어 올라왔다.

두 사람은 거추장스러운 인사치레도 생략하고 곧장 계획을 실행했다. 시윤은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고, 종우는 그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족쇄를 풀기 시작했다.

동전 크기의 기계를 붙인 종우가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 두드렸다. 족쇄를 부수는 건 안 된다. 아마 가족들에게 알림이 갈 터였다. 시윤이 계속해서 족쇄를 달고 있는 것처럼 혼란을 줘야 했다.

“CCTV는 이전 몇 분간의 영상을 계속해서 반복 재생 하고 있습니다. 센서는 불만 쏠 뿐, 인지는 못 하게 해 놨어요. 나가는 게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종우가 바깥 상황을 전달했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시윤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종우의 손가락이 쉼 없이 홀로그램을 두드리는 게 신기했다.

“이런 건 어떻게 할 줄 알아요?”

“뭐든 배우는 거 좋아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컴퓨터, 홀로그램, 전자 기기, 그런 거 다루는 것도 좋아합니다. 쑥스럽지만 재능도 있는 것 같고요. 뭐든 간에 디지털 형태로 저장만 되어 있으면 다 써먹을 수 있습니다.”

“아…….”

시윤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우는 이것저것을 만지더니 뚝딱 족쇄를 풀었다. 띠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족쇄 아가리가 열리고 시윤이 발을 빼자 다시 다물렸다.

“아흐…….”

시윤이 뻑적지근한 발목을 뒤틀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언제 아파했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한시가 급했다. 머뭇거리다가 가족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이번엔 손까지 묶일지도 몰랐다.

창가에 붙어 선 종우가 로프를 확인했다. 그리고 훌떡 몸을 날려 창턱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가 시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시윤이 그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였다.

종우가 짧게 탄식했다.

“아…….”

“왜요?”

“준위님 신발을 안 챙겨 왔지 말입니다.”

종우가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시윤의 발을 보며 난색을 표했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발을 본 시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아요.”

“제 거라도 드릴까요?”

종우의 선의에 시윤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곱게 자라 온 건 맞지만, 부하 병사의 전투화까지 빼앗아 신을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아요.”

그 말에 종우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시윤이 그 손을 잡고 창턱 위로 올라갔다. 평생을 살아온 방인데, 창턱 위로 올라온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후우…….”

시윤의 긴장한 호흡이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발아래로 쓸데없이 화려한 정원이 보였다. 모두가 잠든 밤인데도 환하게 빛나는 게, 그렇게 징그러울 수 없었다. 저 빛 역시 누군가의 피로 일구어 낸 것일 테니 말이다.

“내려가겠습니다.”

“……네.”

시윤이 종우의 어깨에 원숭이처럼 매달렸다. 이런 것에는 익숙했다. 에로아스와 함께하는 작전 대부분은 이렇게 청호에게 매달려 있었던지라.

종우가 고개를 뒤로 꺾어 바닥을 보며 착지를 가늠했다. 그사이 시윤은 자신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작은 비닐이 바스락거리며 만져졌다. 청호를 위해 쟁여 둔 티백이었다. 아까 식사하다 두엇 남은 티백을 베개 아래에 몰래 숨겨 뒀었다.

잘 봐 달라는, 또는 용서해 달라는 뇌물은 아니었다. 그냥 주고 싶어서 챙긴 거였다. 청호는 차를 좋아했으니까. 분명 감옥에서는 차는커녕 따뜻한 물도 쉽게 마실 수 없을 터였다.

그리 생각했더니 심장이 저몄다. 청호가 정말,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가 너무 걱정되어 핏줄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그 마음을 알았을까, 종우가 훌쩍 몸을 날렸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쉐에에엑.

바람이 귓바퀴를 대차게 할퀴었다.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시윤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무릎을 끊임없이 긁어 댔다. 출발한 지 한참이나 됐는데 긴장한 심장이 아직도 쿵쾅쿵쾅 거칠게 발작하고 있었다. 포스의 수도에서 벗어난 지도 꽤 됐거늘. 혹 형들이, 아버지가, 또는 병사들이 따라오는 게 아닌가 싶어 수시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안 쫓아옵니다. 긴장 푸세요.”

보다 못한 종우가 시윤을 달랬다. 시윤이 고개를 연달아 네 번이나 끄덕였다. 그래 놓고도 안절부절못하며 상체를 들썩여 댔다.

창밖으로는 내내 어둠만이 펼쳐졌다. 수도를 벗어나면 전기가 귀해지기 때문에 대개 이러했다. 가로등도 없어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온전히 의지해 달려야 했다.

시윤은 신비로울 정도로 쨍하게 뜬 달을 바라보며 조금씩 조금씩 평온을 찾아 갔다.

“고마워요. 도와줘서.”

시윤이 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종우가 씩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윤이 그를 따라 웃었다.

짧은 대화가 끝난 후에도 시윤은 종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종우는 그 시선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어둑한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정적을 삼키던 시윤이 조심히 물었다.

“근데 날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이유가 뭐예요?”

“제가 일전에 청호 대장님 동경한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십니까?”

“네.”

“그런 대장님의 반려 가이드이시니 도와드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

“따지고 보면 저는 지금 준위님을 돕고 있는 게 아니라 대장님을 돕고 있는 겁니다.”

“푸흐……. 이유야 어찌 됐든 고마워요.”

시윤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세찬 엔진음과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요란했다. 그것을 가만히 느끼던 시윤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번쩍이는 계기판. 보드라운 시트. 널찍한 실내. 시윤네 가족들이 타는 자동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제법 좋은 차였다.

“차가 좋네요.”

“뭐, 족보 없는 집안 자식이 타고 다니기엔 좀 과분한 차기는 하죠.”

“……비아냥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저도 그런 뜻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운이 좋았지 말입니다.”

“운이요?”

“예. 공부를 잘했거든요. 물론 열심히 하기도 했고요.”

시윤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졌다. 차를 살 만한 부와 운이 무슨 상관이 있나. 현대엔 복권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거늘. 공부는 또 뭔가.

종우는 군인이다. 그것도 고작 하사. 국가는 종우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변별을 두지 않았다. 전쟁에서 얼마나 큰 공을 세웠나, 또 계급이 어떻게 되나, 그 두 가지만 따졌다.

“……그걸 보통 운이라고 하나요?”

“아아. 정확히는 다녔던 학교들이 좋았습니다. 항상 기부금이 넘치는 학교들이어서 전교에서 손에 꼽히면 장학금을 왕창 줬었거든요. 그거로 준위님 집만큼은 아니지만, 따뜻한 집도 구하고, 밥도 먹고, 이 차도 샀습니다.”

“장학금을 그렇게 많이 줬다고요?”

“신기하죠? 저도 신기합니다. 근데 진짜 많이 받았어요.”

시윤이 놀랍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학교는 순전히 국가의 자본으로 굴러간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돈이라 적진 않지만, 그렇다고 많지도 않았다.

이따금 부유한 집안들이 보여 주기 식으로 기부를 하긴 하나, 드문 일이었다. 종우의 말마따나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시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종우가 공부를 잘했구나. 하긴, 제 수업도 곧잘 따라오고, 기계도 잘 만지고, 포스와 군에 꽤나 도움이 되는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모건과 자리를 만드는 것도 좋으리라.

길어지는 이동 시간에 시윤의 상념이 규칙 없이 이어졌다. 물론, 종착지는 항상 청호였다. 그러다 선화의 목소리가 정전기처럼 예고 없이 튀어 올랐다.

‘너…… 청호를 사랑하니?’

‘사랑해서 그러니?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걱정되고? 네게 그렇게 모진 짓을 했는데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거야?’

사랑. 사랑이라. 사실 그렇게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시윤의 가정은 항상 애정이 충만했고 그 덕에 ‘형 사랑해’, ‘아버지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등을 심심찮게 입에 올리곤 했다. 그리고 당연히, 허투루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근데 그 사랑과 청호의 이름 옆에 붙일 사랑은 다른 것이지 않나.

시윤이 차게 식은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먼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랑이라. 정의는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배웠고. 더군다나 반려 사이이니 사랑하는 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이질적이었다.

선화가 말했듯, 저는 청호를 보고 싶어 한다. 보지 못하면 걱정하고. 헌데 그게 사랑인가. 제가 교과서나 책을 보며 활자로 배운 사랑은 훨씬 애틋하고 따뜻했었는데. 설레고, 두근거리고, 때때로 뜨거울 정도로 불타오르며, 서로를 위해 살고 싶으면서도 죽고 싶은 것. 그런 것이었는데.

나열한 예시는 공감되는 것도 있지만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와 저 사이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느낄 새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저는 청호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그 시작이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제 죄를 속죄해 준 게 청호였기 때문이지.

“하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시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갈라진 귓불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차라리 이론 증명이나, 수학 문제를 푸는 거였으면 좋을 것을.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시윤의 한숨을 걱정으로 해석한 종우가 물었다. 시윤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종우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종우도 능력자였다. 에스퍼였고, 아마 B급이었던 것 같다.

“박종우 하사는…… 반려 가이드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 그 사람을 사랑해요?”

“네?”

종우가 처음으로 전방에서 눈을 떼고 시윤을 쳐다봤다. 시윤이 얼른 눈을 피했다.

“……아닙니다.”

괜한 걸 물었다. 당연히 사랑할 텐데. 콧잔등을 한껏 찡그린 시윤이 차창에 이마를 짓이기듯 문질렀다. 그때 종우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으음,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더니 자못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고맙고, 좋은 사람이지만 사랑하진 않습니다.”

“……왜요?”

“보통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천사 같다고들 하죠? 근데 그건 A급쯤 되어야 그렇고, B급이나 C급은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애당초 폭주가 잘 안 오거든요. 와도 그렇게 고통스럽거나 힘들지 않고요. 그래서 스킨십도 크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볍게 손잡는 것으로 웬만하면 해결되죠.”

“아…….”

“그러니까 그 소중함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절실함이라고 할까요. 그게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

“그래도 열에 아홉은 반려끼리 사랑하고 결혼합니다. 어쨌든 가이아가 맺어 준 짝이고, 그게 당연한 이치로 자리 잡았으니까요. 실제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뭐가 있다고들 합니다. 그냥 제가 지나치게 무딘 거죠.”

시윤이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턱을 주억였다. 열에 아홉이라는 비율은 매우, 매우 높은 비율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귀에 담기진 않았다. 시윤은 ‘대개, 보통, 일반적인, 통상적인’과 같은 단어와 항상 반대에 위치했었으니까.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이라곤 ‘그럼 청호가 절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거였다.

당연한 건데. 그의 어머니를 제 아버지가 죽였으니 절 사랑한다는 게 더 괴이한 일인데.

염치도 없이 가슴이 시큰거렸다.

* * *

종우와 시윤이 교도소에 도착했을 땐 새벽 2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교도소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다란 벽이 사방을 두르고 있었고, 쨍한 붉은빛의 레이저가 시도 때도 없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다녔다.

“……여길 어떻게 들어갑니까?”

시윤이 장벽만큼이나 단단해 보이는 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원, 청호를 만나긴커녕 그의 생사나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윤의 걱정에 종우가 씨익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웃었다.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 말에 시윤이 턱을 앞으로 쭉 뺐다.

“문으로요? 대놓고요? 또 정보 조작 같은 걸 한 겁니까?”

제집은 정보 조작, 해킹 뭐 그런 게 가능했다. 아무리 개국 공신이 사는 집이라 한들, 어쨌든 그저 사적인 거주지에 불과한지라. 국가의 중요 기관도 아니었고, A급 에스퍼가 득실거리는 집에 누가 나쁜 마음을 먹고 오겠나.

근데 교도소는 다르다. 범죄자를 관리 감독, 통제하는 곳이니만큼 경비가 삼엄했다.

놀란 시윤에 종우가 자신의 목덜미를 긁적였다.

“청호 대장님은 아무래도…… 청호 대장님이지 않습니까?”

“……뭐요?”

“그러니까 청호 대장님이라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채정원 원수가 경비를 엄청 두긴 했는데, 그 경비들 대부분은 방랑자였을 테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방랑자였던 이의 아들이나 딸이니까요.”

“…….”

“아시다시피, 포스의 방랑자 반 이상은 청호 대장님이 구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명령이라 한들, 여타 죄수를 감시하는 것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는데요?”

시윤의 궁금증에 종우가 별안간 뒷좌석을 가리켰다. 시윤이 상체를 한껏 젖히고 뒤를 바라봤다. 검은 천에 가려진 덩어리가 한가득이었다.

시윤이 종우에게 들춰 봐도 되겠냐, 눈으로 물었다. 종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긴장한 시윤이 조심스레 천을 걷었다. 그곳엔 온갖 음식과 생필품들이 있었다. 감자나 고구마가 주를 이뤘고, 이따금 귀한 과일이나 고깃덩이도 보였다. 칫솔이나 면도기, 하물며 곱게 개켜진 속옷도 있었다.

시윤이 다시 종우를 쳐다봤다. 그러자 종우가 친절히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에로아스 부대에게 갈 조공품들입니다. 진짜 조공품은 아니고, 섞여 들어갈 수 있도록 제가 대충 구색 맞춰 준비한 겁니다. 들은 정보로는 이틀에 한 번, 이 시간에 몰래 들여보낸다고 하더라고요.”

“아…….”

시윤이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주머니에 든 티백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종우는 미리 빼놓은 커다란 세탁물 카트에다가 시윤을 숨겼다. 그리고 그 위에 생체 감시를 피할 포일을 덮고, 챙겨 온 조공품을 와르르 쏟았다. 시윤은 몸을 옹송그린 채 행여 바깥에 제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숨도 억눌렀다.

헌데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는 건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기다랗고 무거운 총을 든 교도관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나, 종우가 무슨 말을 읊조릴 때마다 군말 없이 길을 터 줬다. 몇몇은 마치 축제를 앞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렇게 교도소 면회실에 다다랐을 때였다. 교도관 하나가 그를 막아섰다.

“면회 금지 시간입니다.”

“아아, 제가 너무 늦게 왔군요.”

종우가 성의 없이 대꾸하며 교도관의 왼쪽 가슴팍에 작게 삐져나온 붉은색 리본 끄트머리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아주 작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Looking for Red(붉은색을 찾고 있어).”

“…….”

그 말에 교도관의 눈이 확 가늘어졌다. 잠시 종우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오늘치 붉은색은 다 들어갔는데.”

“이건 개인적으로 준비한 거지 말입니다.”

“프락치 아니고?”

“어, 말을 왜 그렇게 섭섭하게 하시지.”

종우가 능글맞게 어깨를 튕겼다. 그러나 교도관은 웃음이라곤 모르는 로봇처럼 굳은 낯을 유지했다.

“…….”

“…….”

잠시 적막이 흘렀다. 종우가 카트 손잡이를 꾸욱 세게 말아 쥐었다. 그 속에 숨은 시윤은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구역질을 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교도관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벗어 빨래 더미를 쿡쿡 찔렀다.

무른 감자와 고구마들이 속절없이 뭉개졌다. 그래도 다행히 시윤의 머리통이나 어깨가 짓이겨질 만큼 깊진 않았다. 시윤이 조심조심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데, 교도관이 빨래 더미를 휙 들쳤다. 그로도 모자라 조공품들을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은빛 포일이 드러나는 건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교도관이 총의 안전핀을 풀며 주위에서 경비를 서던 교도관 몇을 눈짓으로 불렀다.

“하아…….”

종우가 긴 한숨을 내쉬며 볼 캡을 고쳐 썼다. 그러면서 반대 손으로는 허리춤에 숨겨 둔 총을 매만졌다.

“누가 보냈어?”

“윗대가리들이야?”

“뭐가 들었지? 폭탄? 아예 에로아스 전체를 사살하라는 명령인가?”

교도관들이 종우에게 위협적으로 총구를 들이밀며 추궁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시윤은 이제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어둑한 시야에 들리는 거라곤 총 방아쇠가 철컥거리는 소리와 고함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종우는 평온하기만 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고민하던 그가 냅다 포일을 치워 버렸다. 긴장한 교도관들의 총구가 반은 종우를, 반은 세탁물 카트를 겨눴다. 방아쇠를 감은 검지에 힘이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교도관 하나가 조심조심 세탁물 카트 안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귀신이라도 본 듯 동그랗게 커진 눈. 마른 몸뚱이. 옅은 갈색 머리칼. 잠옷 차림. 어떻게 봐도 에로아스를 작살내러 온 인간 병기는 아니었다. 좀 모자란 소년이 잠잘 곳을 잘못 찾았다는 게 훨씬 신빙성 있었다.

종우를 노려보던 교도관들 역시 시윤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 후 다시 종우를 쳐다봤다. 폭탄도, 병기도 아닌 것을 왜 숨겨서 들어가려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청호 대장님 가이드십니다.”

종우가 나직이 시윤의 정체를 통보했다.

교도관들이 동시에 헛숨을 들이마셨다. 그들이 시윤과 종우를 빠르게 번갈아 봤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지?”

“그럼 같이 들어가든가. 대장님이 자기 가이드를 설익은 복숭아 감별이라도 하듯 쿡쿡 찔러 본 걸 아시면 차-암 좋아하시겠네.”

불필요한 존대를 버린 종우가 나긋한 음성으로 협박했다. 그 말에 시윤이 총구가 닿지도 않았던 정수리를 벅벅 문지르며 아랫입술을 퉁퉁하게 내밀었다. 맞아. 아팠어. 대장님한테 다 이를 거야. 뭐 그런 뉘앙스였다.

그런데도 교도관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에 종우가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쾅 발을 굴렀다.

“시간 없다고! 곧 여기, 이 귀한 가이드님이 없어진 걸 위에서 알 거야. 그럼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감시가 수배로 삼엄해지겠지. 에로아스 병사들은 더 억압받을 거고. 앞으론 조공품은 개뿔, 개미 새끼 하나 못 들어갈 거다.”

큰 파열음에 교도관들이 일제히 어깨를 떨었다. 우르르 다가온 그들이 시윤에게 캐물었다.

“지, 진짜 채시윤 준위님 맞습니까?”

“맞아요. 대장님 뵈러 몰래 온 거예요.”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에서 신뢰가 철철 흘러넘쳤다. 딱 봐도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 온 시윤의 생김새 역시 한몫했고.

잠깐 혼란의 파도 속에서 헤엄치던 교도관들은 종우의 따가운 눈초리에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윤의 위로 다시 포일을 덮고, 널브러진 감자와 고구마 따위를 대충 쓸어 넣은 후 카트를 밀었다.

가는 길은 멀었다. 조금 과장해서 집에서 교도소까지 왔던 길만큼 먼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나 오르내렸고, 두껍고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가 닫았고, 음산한 복도를 한참이나 가로질렀다.

시윤은 이따금 거칠게 들썩거리는 카트 안에서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모아 안은 무릎과 기울어진 골반이 뒤틀리는 듯했지만 참아 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드디어 카트가 멈춰 섰다.

종우가 굴을 파는 두더지처럼 카트 안을 헤치고 시윤과 눈을 맞췄다.

“다 왔습니다. 이 문만 들어가면 돼요. 근데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혼자요?”

“예. 최고 등급 감옥이라 관리자도 한 번에 둘 이상 못 들어간답니다. 수감자를 제외하고 생체 반응이 동시에 두 개가 잡히면 사이렌이 울린대요. 그러니까 카트가 멈추고, 교도관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 포일을 걷고 카트 안에서 나오십시오. 청호 대장님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종우의 말에 시윤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혀를 내어 연신 핥고 있으니 종우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주사기 하나를 내밀었다.

익숙한 주사기였다. 붉은색 액체가 넘실거리는 게, 아마 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이리라. 평소보다 묘하게 더 붉어 보이는 약물에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모건 대령님이 주셨습니다.”

“아…….”

“준위님이 가이딩하실 때 필요할 거라고 하시던데요.”

“고마워요.”

주사기를 받아 캡을 벗긴 시윤이 그것을 망설임 없이 손목에 쑤셔 넣었다. 차가운 약물이 핏줄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괜히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펴고 있는데, 종우가 빈 주사기를 거둬 갔다. 그러고는 다시 포일을 꼼꼼히 덮었다. 그 후 교도관을 향해 고갯짓했다. 교도관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이가 출입 센서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곧 묵직한 경고음이 한 번 울리더니 큼지막한 문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교도관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카트를 밀었다. 대략 스무 걸음마다 열쇠를 넣었다 빼서 특이 사항이 없다는 걸 시스템에 확인시켜 줘야 하는지라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교도소는 이상했다. 온갖 감시망이 득실거리지만, 관리자가 열쇠 하나 꽂아 주면 한 번에 해결되는 아이러니함이 있었다. 탈출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어떻게 보면 문 하나 여는 것만큼이나 쉬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원은 청호를 이곳에 가두면서 그가 국민에게, 병사에게, 이 나라에 얼마나 대단하고 독보적인 존재인지를 전혀 가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트가 멈춰 섰다. 시윤은 교도관이 떠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헌데 어째서인지 교도관이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 숨은 시윤이 당황한 낯으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카트 바로 옆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여기, 카트 아래에 카드를 두겠습니다.”

“무슨…… 카드요?”

“대장님이 계신 곳의 문을 여는 카드요.”

“아…….”

“아무래도 가이딩을 하려면 접촉이 불가피하니 말입니다.”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인지하고 네, 고마워요, 라고 대답했다.

구석 어귀에 카트를 수납한 교도관이 바른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시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연거푸 심호흡했다.

비로소 청호를 만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심장이 쿵쾅쿵쾅 달음박질을 쳤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반대로 이마에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뱄다.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손을 말아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들쑤셔 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기이이잉, 기계 돌아가는 진동이 울리더니 출입구가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시윤이 흡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기다란 복도였다. 생명체는 물론 창문도, 장식도 없이 그저 쭉 뻗어 있는 복도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분위기를 내뿜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광활한 공간이 기이한 공명음을 냈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답 없는 미로에 갇힌 실험용 쥐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이 적막하고 서늘한 곳에 청호가 있다니, 아니, 갇혀 있다니.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시윤이 조심히 카트 밖으로 나왔다. 땅이 내뿜는 찬기가 발바닥을 찌르듯 타고 올라왔다. 괜히 발가락을 한 번 꼬물거린 그가 카트 아래에서 교도관이 두고 간 카드를 집었다. 그 후 희미한 불빛이 흘러오는 복도 끝을 향해 달렸다.

그냥, 본능이었다. 저 복도 끝에, 저 빛의 가운데에 청호가 있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땐 뒤꿈치가 얼얼했다. 몇 번 호흡을 고른 시윤이 상체를 슬쩍 모퉁이 밖으로 뺐다.

“…….”

널찍한 공간이었다. 건장한 성인 열댓이 모여 축구를 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널찍한 공간. 그 공간 가운데에 커다란 유리 상자가 있었다. 아니, 감옥이라 해야겠지. 상자는 환한 백열등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하얀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에 익숙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옆모습이었지만, 분명 제가 찾던 그 사람이 맞았다.

청호. 청호였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그는 한 손으로는 책을 들고, 반대 손으로는 나른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손목에 채워진 두꺼운 수갑이 무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그런데도 주책맞게 젖어 드는 눈동자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가 천천히 유리 벽을 끼고 돌았다. 그렇게 청호의 정면에 서는 순간, 인기척을 느낀 청호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비로소 눈이 마주쳤다.

“너…….”

“……대장님.”

시윤이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청호를 보고 있으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그를 마주하니 돌덩이처럼 뭉쳐 있던 근육이 팬 위의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가장 처음 든 감정은 물론 안심과 안도였다. 청호가 무사하다. 학대당하지 않았다. 고문받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겁이 났다. 정원이 저주 같은 사실을 알려 준 이래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한시도 쉬지 않고 고민했는데 아직 이렇다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실, 종일 변명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나. 어떻게 해야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끊어 낼 수 있나. 어떻게 해야 청호가 제게서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나. 그런 생각 말이다.

“여긴 어떻게 왔어?”

책을 아무렇게나 덮은 청호가 시윤에게 다가왔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유리 너머에서 웅웅 탁하게 울렸다.

“박……종우, 하사가…… 데려다줬, 는데…….”

같이 못 들어와서, 교도관이, 근데 여러 명은 안 된다고 해서, 지금은 혼자, 카드를 받았는데……. 시윤이 말을 웅얼웅얼 녹여 먹었다.

살풋 눈살을 찌푸린 청호가 시윤에게로 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목소리도 작은 데다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어 도통 말이 들리지 않았다. 백열등을 등진 그의 그림자가 시윤의 마른 몸뚱이 위로 길게 드리웠다.

그것을 느낀 시윤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고개를 들려 했다. 묵직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은빛 물체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터였다.

“아…….”

시윤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그 신음은 심장에 총을 맞은 병사가 숨통이 끊기기 직전, 간신히 내뱉은 단말마 같았다. 실제로 쿵쿵쿵 거칠게 뛰던 심장이 뚝 하고 끊기듯 멎었다.

청호의 양쪽 발목에도 굵직한 족쇄가 엉켜 있었다. 시리게 반짝이는 사슬이 족쇄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의 능력을 봉인하고 있는 건지 붉은빛이 일정한 속도로 깜빡였다.

시윤이 검게 죽은 눈동자로 그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손목으로 모자라 발목까지……. 저 끔찍한 짓을 정원이, 제 아버지가 했다니……. 청호의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 모자라 이런 짓까지……. 대체 청호의 삶을 얼마나 짓밟고 깨부술 생각인지, 어떻게 이다지도 악마 같은 짓을 하는 건지…….

“어흐윽…….”

시윤이 끝내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렸다.

“……채시윤?”

청호가 자못 놀란 음성으로 시윤을 불렀다. 그러나 시윤은 고꾸라트린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청호가 막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을 때였다. 시윤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알로 그를 쳐다봤다.

“죄송…… 흐, 죄송해요, 대장님…….”

“…….”

“저는, 흐윽, 몰랐어요……. 정말…… 흑, 몰랐어요…….”

몰라서 죄송해요. 몰랐으면 안 되는 건데. 알았어야 했는데. 눈치챘어야 했는데. 제가 멍청해서……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답답하셨어요. 제가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어요. 근데 왜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어요. 말해 주시지. 그럼 뭐라도 했을 텐데. 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아니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진즉 알았어야 했는데. 어쩜 그렇게 무지해서……. 제가 대장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시윤이 맥락도, 기승전결도 없는 문장을 주절주절 나열했다. 그러면서 큼지막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려 댔다. 찬 시멘트 바닥 위로 검은 타원이 쉬지 않고 생겨났다.

거기다 몸은 또 얼마나 떠는지. 괴한이 쫓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 청호가 먼 복도를 훑어봤을 정도였다.

“채시윤.”

“흐으……. 죄송해요. 정말 죄송…… 큭, 해요…….”

청호의 부름에도 시윤은 앵무새처럼 사과만 반복했다. 종국에는 바닥 위로 엎어져서 쿵쿵 이마를 찧어 댔다. 하얗고 동그란 이마가 바닥과 마찰할 때마다 벌겋게 달아올랐다. 몇 번 더 반복하면 그의 작은 머리통이 수박처럼 파삭, 하고 깨져 버릴 것 같았다.

“채시윤. 나 봐.”

“허어어엉……. 죄송해, 끅, 요……. 죄송해요, 대장니임…….”

청호가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벽이라도 깨부수고 싶다만, 함부로 건드렸다간 천장에서 온갖 약물이 쏟아진다. 저에게는 잠깐 정신을 잃을 수준의 약물이나, 시윤에겐 아닐 터였다.

청호가 꽉꽉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러다 시윤이 움켜쥐고 있는 하얀 카드를 발견했다. 익숙한 카드였다. 청호가 노크하듯 똑똑 바닥을 두드렸다.

“채시윤. 문. 문부터 열어.”

“흐윽, 흐, 대장, 니임……. 죄송해요……. 흐으으…….”

하지만 시윤은 여전히 귀를 닫고 검은 독방 속에서 홀로 속죄 중이었다. 청호가 골치 아프다는 듯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좋은 생각 하나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시윤아.”

“큭, 흐으, 정말 너무 죄송해서…….”

“나 아파.”

“…….”

시윤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번쩍 고개를 쳐든 그가 무릎걸음으로 유리 앞까지 기어 왔다.

“아, 아프시다고요? 어디, 어디가 아픈데요? 폭주하신 거예요? 귀걸이가, 귀걸이가 없어서요?”

시윤이 훌쩍훌쩍 코를 먹으며 청호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바닥에 박은 이마에, 눈물에 젖은 눈가에, 훌쩍이는 코끝에, 물어뜯은 입술까지. 시뻘겋게 물든 얼굴에 청호는 하마터면 눈치 없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마른세수를 하는 척 입가를 눌러 내린 그가 유리 벽 귀퉁이에 달린 잠금장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래. 그러니까 일단 문부터 열어. 그래야 널 만지든 말든 할 거 아냐.”

“아, 네. 네!”

시윤이 튕기듯 일어나 잠금장치 위로 카드를 가져다 댔다. 삐빅. 짧은 전자음이 울리더니 유리 벽에 가느다란 실금이 갔다. 그 실금은 곧 직사각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크기의 구멍이 생겨났다.

시윤이 연신 코를 훌쩍이며 청호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청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 못 나가. 네가 들어와야 해.”

“아…….”

명령을 하달받은 시윤이 냉큼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유리 하나 통과했을 뿐인데 공기가 묘하게 달랐다. 훨씬 정적이고,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 혼자 일주일도 더 넘게 갇혀 있었다니. 묵직한 감정이 또 울컥, 목젖을 쳤다.

큼지막한 눈동자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하얀 볼 위로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건 삽시간이었다.

“대장님…… 흐……. 죄송해요…….”

“울지 마. 대체 뭐가 그렇게 죄송하다는 거야.”

청호가 두 손으로 시윤의 볼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시윤이 청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해야 할 말은 많은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떻게든 막힌 목구멍을 뚫어 보고자 낑낑거렸으나 나오는 거라곤,

“아, 아버지가…… 어머님을, 그러니까 대장님 어머님을 그렇게…….”

따위의 등신 같은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청호의 낯이 대번에 서늘하게 식었다. 그 변화를 코앞에서 목도한 시윤이 제 볼을 쥔 청호의 손을 다급하게 감쌌다. 그가 자신을 쓰레기 버리듯 밀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청호는 시윤을 끌어당겨 침대에 앉히고, 자신 역시 그 옆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어?”

“아,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어요.”

“……왜?”

“제가…… 대장님 못 만나게 하면 죽겠다고…… 그랬거든요.”

“뭐?”

청호의 눈이 부릅뜨였다. 죽겠다고 했다니. 아마 그저 말로만 나불거린 죽음은 아닐 터다. 시윤이 그런 말을 허투루 할 성격도 아니고, 정원 역시 웬만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죄를 제 입으로 까발리진 않았으리라.

청호가 시윤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러다 뒤늦게 그가 홈 웨어 차림임을 인지했다. 거기다 때가 탄 맨발. 시윤을 생판 모르는 이가 봐도 그가 어딘가에서 도망쳐 왔다는 걸 알 수 있는 행색이었다.

청호가 하, 짧게 탄식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시윤을 꾸짖으려는데 푸르뎅뎅한 무언가가 시선을 끌었다. 시윤의 발목에 들러붙어 있는 멍이었다.

청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윤의 몸에 난 상처는 대개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근데 저 멍은 기억에 없다. 쓸리고 할퀴어진 듯한 생채기 몇 개는 아직 딱지도 앉지 못한 상태였다.

청호가 시윤의 종아리를 덜렁 들어 올렸다. 시윤이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너 발목이 왜 이래.”

“어……. 아버지가 족쇄를 채우셔서……. 그래서 일찍 못 왔습니다. 침대에 묶여 있었어요.”

“……미친 새끼.”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 무거운 쇳덩이를 제 발목에 채우다 못해 시윤의 이 가느다란 발목에까지 채워 놨다니. 늙은이가 노망이 든 건지, 아니면 악마가 씐 것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미간을 찌푸릴 대로 찌푸린 청호가 심각한 낯으로 시윤의 발목을 살폈다. 텅 빈 이곳에는 약도, 밴드도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시윤이 손을 잡아 왔다. 이깟 발목, 지금 당장 잘린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단 말이다.

“대장님.”

“왜.”

“제가 뭘 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무슨 소리야.”

“제가 무얼 해야 제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아니, 용서받을 생각 없어요. 그래도 뭐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는 게 없어서……. 제가 여기서 당장 혀를 깨물고 죽는다 한들, 대장님이 그걸로 통쾌하실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죽어 버리면 대장님은 또 가이드 없는 에스퍼가 되는 건데…….”

“……내가 바라는 건 뭐든 해 줄 거야?”

“예, 그럼요.”

시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동공이 길게 째졌다. 마치 뱀 같은 시선이었다.

“날 위해서 네 아비를 버릴 수 있어?”

“버린, 다는 게…….”

“날 위해 네 아비를 죽일 수 있냔 말이야. 그놈 머리통에 총알을 박고, 나이프로 목젖을 가를 수 있겠어?”

“…….”

시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요. 당연하죠. 얼마든지요. 물론이에요. 혀끝을 간질이는 문장은 많았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바깥으로 나와 주질 않았다.

정원의 수많은 모습이 눈앞을 스쳐 갔다. 제 작은 품에 곰 인형을 안겨 주던 아버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아버지. 새벽마다 방에 들어와 이불을 정리해 주던 아버지. 능력자든 아니든,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던 아버지.

누구보다 저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 줄 아버지.

하지만 청호의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 그래 놓고 죄악감도, 수치심도 없이 청호를 이곳에 가둬 둔 아버지.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운 아버지.

시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의 볼을 타고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청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치미는 더러운 욕구를 눌러 보려 한 행동이었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그대로 입술을 붙였다. 그의 손목에 달린 사슬이 뒤엉키며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청호의 건조한 입술이 울음에 젖어 눅눅한 시윤의 입술을 통째로 삼켰다.

놀란 시윤이 입술을 벌리자 슬픔에 잠긴 숨결이 흘러나왔다. 청호는 그것을 기껍게 받아 삼켰다. 딱딱하게 뭉쳐 있던 근육이 단숨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Z 구역에서 내내 시윤과 접촉하고 있었던 덕에 몸이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귀걸이가 없는 여파가 제법 큰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스며 오는 시윤이라니. 환상적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니 열과 성을 다해 시윤의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데. 어째 입꼬리가 자꾸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키스하는 데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이 순간은, 청호가 치밀하게 준비해 온 순간이다. 시윤이 모건의 연구실에 누워 있을 때부터. 정원이 저를 난데없이 Z 구역으로 보내려 했을 때부터 말이다.

청호라고 정원의 만행을 밝히고 싶지 않았을 리 없었다. 시윤은 물론, 온 세상에다 저 개새끼가 내 어머니를 갈가리 찢어 죽였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무의식에서, 꿈에서는 수백 번도 더 했다. 모든 이가 보는 앞에 정원을 개처럼 끌고 와 그의 얼굴 가죽을 뒤집으며 그가 인간의 가죽을 쓴 악마라는 걸 만천하에 알려 주었다.

그 후에는 팔다리를 잘라 낸다. 아니, 뜯어냈다. 그가 제 어미에게 했던 것처럼. 다음으로는 배를 갈라 그 안에서 징그럽게 펄떡거리고 있는 내장을 그의 입에 쑤셔 넣는다.

그런 상상을 매우 세세하게 했다. 사실 상상으로 끝낼 필요는 없었다. 청호는 그것을 언제든지,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었고, 그럴 의사도 차고 넘쳤다.

근데 그러지 않았다. 그리해 버리면, 저는 시윤에게 또 다른 원수가 되어 버리니까. 더군다나 시윤은 그의 가족을, 아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다. 그런 꼴을 보였다간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바닥에 멍하니 퍼질러 앉아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겠지.

뭐, 그 모습도 그 나름대로 아름답긴 할 터였다. 시윤은 아플 때도, 엉엉 울 때도, 코피를 흘리거나 피를 토할 때도 사무치게 아름다우니 말이다.

하지만 청호는 온전한 시윤을 가지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 원했다. 신 따위가 짝지어 준 에스퍼, 가이드, 반려 그런 것들을 죄 집어치우고 오롯이 시윤 그 자체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제가 정원을 벌하거나, 제 입으로 시윤에게 그의 죄를 파헤쳤다면 시윤은 가장 먼저 혼란을 경험했을 터였다.

정말? 진짜로? 내 아버지가? 가끔 엄하셔도 ‘그럴’ 분은 아닌데. 설마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짓을 하셨으려고. 대장님이 오해한 거겠지. 뭔가 잘못됐겠지. 뭐 그런 혼란 말이다.

그렇게 고민하다 저를 믿어 주면 다행인데, 혹시라도 그러지 못한다면. 제가 아닌 정원을 선택하고 그의 세 치 혀에 놀아난다면. 퍽 끔찍한 상황이 도래했겠지. 저는 정원을 죽였을 테고, 피와 눈물을 뒤집어쓴 시윤의 발목을 꺾어 제 곁에 뒀을 터였다.

그럴 순 없었다. 제 목적은 온전한 시윤을 가지는 거였으니까.

청호는 자신과 시윤의 사이에 계속해서 잡음이 생기면 보다 못한 정원이 손을 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이 구르고, 다치고, 피를 쏟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다 정원이 찰나 이성을 잃고 과거를 까발려 버리면, 시윤이 저를 택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윤은 지나치게 정의롭고, 또 나약하다. 타인의 죽음을 못 견뎌 하고, 보잘것없는 이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고작 방관의 죄로 평생을 시달려 왔다.

그러니 정원의 죄를 고스란히 내려받아 제게 영원을 바치려 할 터였다.

정의로운 자를 유혹하는 건 어렵다. 허나 죄책감을 이용하는 건 쉽다.

시윤이 가는 길에 널찍하고 퀴퀴한 진흙탕을 만들어 두고,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그럼 저는 그런 시윤을 주워다 깨끗이 씻어 주고, 보듬어 주고, 사랑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보라. 실로 시윤이 제 품에 들어오지 않았나. 마귀 같은 아비의 세상에서 도망쳐서는, 저를 위해 그의 목을 자르겠다고 하지 않나.

시윤의 혀를 깊게 빨았다가 놓은 청호가 느긋하게 물러났다.

“그거면 됐어.”

그가 엄지로 시윤의 아랫입술을 누르듯 매만졌다. 청호는 지금이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정원과 휴의 존재를 처리하는 건 차차 해 가면 될 일이고, 당장은 시윤과 함께인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시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청호의 양쪽 팔뚝을 움켜쥐었다.

“……왜요? 어떻게 그걸로 될 수가 있어요?”

당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는데. 그 죽음은 거짓으로 더럽혀졌고, 이용됐고, 그 때문에 당신은 평생을 피가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고작 그것으로 나를 용서해 주겠노라 말할 수가 있어?

내가 아무리 당신에게 아버지의 목숨을 바치겠노라 했지만, 그저 말뿐이잖아. 더군다나,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일이 있을 거래도 두 손으로 손수 내 눈을 가려 줄 거면서.

“……내가 됐다는데 왜 그래.”

청호가 시윤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시윤이 버릇처럼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볐다. 늘 그렇듯, 뜨겁고 단단한 손바닥이었다. 시윤이 그 자세 그대로 청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리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장님, 혹시…… 저 사랑하세요?”

“……뭐?”

어딘가 남세스러운 질문에 청호가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시윤이 그의 손목을 옥죄듯 잡아챘다. 별 볼 일 없는 힘이었지만, 굳은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작 이따위 것으로 괜찮다고 하실 수 있어요? 여기서 당장 제 목을 비틀어 버리셔도 괜찮아요. 그리고 제 시체를 아버지께 던져 주세요. 그 정도는 되어야 대장님의 슬픔이 조금이나마 해갈되지 않을까요?”

“너는 도대체가…….”

시윤은 이따금 낯설 만큼 잔인해지곤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자신에게는 항상 독하고 모질었다. 그렇게 사랑이 충만한 가정에서 자라 왔으면 좀 무디고 해이해질 만도 하거늘. 늘 한계까지 자신을 내몰았다.

청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는 너는? 너는 날 사랑해?”

“……모르겠어요.”

“…….”

모호한 대답이나, 분명 긍정은 아니었다. 청호가 자신의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도 뚜렷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만, 제 감정을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저는 시윤을 사랑한다. 이 괴이한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서야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꽤 오래되기도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되짚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시윤과 처음 포옹했을 때인지, 폭주 상태에서 시윤과 입을 맞췄을 때인지, 귀걸이를 빼 주겠다며 당차게 말했을 때인지, 저를 보며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잡자고 해 줬을 때인지 모른다.

어쩌면 그 모든 순간이었을 수도 있겠지. 허나 그게 무어가 중요한가. 어찌 됐든 결론은 제가 시윤을 사랑한다는 거였다.

시윤이 같은 감정이 아닌 건 슬프지만, 제 주제에 그걸 바라는 것도 이상했다. 제가 시윤에게 한 짓을 누구보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지라.

사실 시윤은 모든 진실을 알았다고 한들, 사죄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과분한 벌을 받았다. 제 치졸한 복수심으로, 제 알량한 질투와 아둔한 오해로 울고, 아파하고, 피를 쏟지 않았던가.

헌데 시윤은 그 모든 시간이 하등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리 절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시윤이 청호의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근데 대장님을 걱정해요. 아프실까 봐, 다치실까 봐.”

“그건 네 그 망할 죄책감 때문에…….”

“아니에요.”

시윤이 단호히 부정했다. 그러다 눈을 뚝 아래로 떨어트렸다.

“……사실 처음엔 그랬어요. 대장님이랑 반려로 매칭되었을 때만 해도 대장님을 걱정하는 게 열여섯 살에 저지른 그 일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달라요.”

“…….”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달라요. 훨씬 깊고 애틋하단 말이에요. 대장님의 몸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슬프실까 봐 우울하실까 봐, 그런 것도 걱정이 돼요.”

“……”

“또 대장님과 떨어져 있으면 대장님이 보고 싶어요.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고,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하고 그래요. 가끔 멍하니 있으면 대장님 얼굴이 아른거리기도 해요.”

시윤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끊임없이 되뇌던 생각들이라 쏟아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목울대가 따끔해졌다. 시윤이 시선을 먼 허공으로 던지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그리고 대장님이 다른 가이드를 만나는 게 싫어요.”

“뭐?”

“제가 부족해서 다른 가이드와 세, 섹스할 거라고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져요.”

그 말에 청호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저 조그마한 머리통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청호가 어떤 대답을 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시윤이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말을 이었다.

“이게 사랑일까요? 책에서 사랑이라는 건 아픈 거라고도 하고, 가슴이 터질 만큼 설레는 거라고도 하고, 눈물에 잠겨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슬픈 거라고도 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시윤은 나름대로 진지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 또 인생, 삶, 목적, 세상의 이치, 그런 답 없는 것을 고민하는 어린 소년 같았다. 그게 참 답답하기도 하고, 어금니가 간지러울 정도로 귀엽기도 하고.

청호가 시윤의 갈라진 귓불을 살살 주물렀다.

“내가 알려 줄까?”

“네.”

“당장 내일부터 네가 내 반려 가이드가 아니라고 하자.”

“……네?”

시윤의 눈이 굴러떨어질 듯 커졌다. 그의 오해를 쉽게 간파한 청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아니라고 한다면, 모든 게 오류였다고 한다면, 나는 네가 버린 그 방랑자들을 구한 적도 없고, 네 아비 역시 나의 엄마를 죽인 것도 아니었다면.”

“…….”

“그래서 우리가 다시는 볼 필요도 없고, 볼 이유도 없다면. 내 곁에서 떠날 건가?”

시윤의 눈꺼풀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상황을 상상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 청호의 손은 시윤의 귓불에서 턱선을 타고 내려와 가느다란 목에 다다랐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그의 턱 끝에 촉 입술을 붙이고야 말았다.

길어지는 적막에 시윤의 잠옷 상의를 어떻게 좀 들춰 볼까, 고민하는 찰나 시윤이 되물었다.

“그건…… 답이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어째서?”

예상치 못한 답에 청호의 진한 눈썹이 가파른 오르막을 그렸다. 시윤이 손등으로 벅벅 자신의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러잖아도 불그스름했던 눈가가 곧 피라도 비출 듯 새빨개졌다.

“제가.”

“…….”

“제가 대장님 반려 가이드가 아니면…… 그럼 대장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지 않나요?”

“뭐?”

“저는 그저 그런 C급 가이드일 뿐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대장님 곁에 있을 수 있죠?”

“…….”

“그 가정이 어떻게 사랑을 도출하는 데 도움을 주나요? 저한테 선택권이 없는데……. 저는 그냥…… 너무 슬프기만 한걸요.”

시윤의 눈망울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시윤은 자신이 퓨어였을 때, 청호와 자신의 거리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격납고에서 인파에 휩쓸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얼굴을 보고자 발악했고, 모건의 도움으로 그와 마주했을 땐 몸뚱이가 딱딱하게 굳어서 어리벙벙했었지.

시윤에게 청호는 아주, 아주 먼 사람이었다. 아니, 그저 멀다고만 하기엔 부족하고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반려라는 매우 번지르르한 명목이 시윤을 이 자리에 있게 해 주고 있었다.

근데 그 명목이 사라진다니. 시윤의 세상에 떠 있던 해가 비스킷처럼 와사삭 부서지는 것 같았다.

시윤의 목이 점차 아래로 내려앉았다. 청호가 저를 내치려는 모양이다. 어디서 사랑 따위를 운운하냐며 꾸짖는 듯했다.

그런 시윤에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시윤의 양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나는 네가 내 가이드가 아니라 해도, 보내지 않을 거야. 반려고 뭐고 상관없어.”

“……왜요?”

“사랑하니까.”

나지막한 다섯 음절에 시윤의 호흡이 뚝 끊겼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청호가 그것을 엄지로 살살 닦아 냈다.

“가이드가 없어서 당장 일주일 뒤에 피를 토하며 죽는다 한들, 네 곁에서 죽으면 꽤 행복할 것 같아.”

“…….”

시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럽고 의아했다. 사랑한다고? 나를? 왜? 어째서? 저의 간악하고 비겁했던 과거를 모조리 알면서? 거기다 제 아버지의 끔찍한 죄를 옴팡 뒤집어쓰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나? 저는 역겹고, 더럽고, 악취가 풀풀 풍기는 죄인인데.

“하지만…… 하지만 제 아버지가 대장님 어머니를…….”

“그딴 거 다 상관없어.”

“…….”

시윤의 입술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어떻게든 반론하려 하는데, 나오는 말이 없었다.

혹 청호가 착각한 게 아닐까. 제가 가이드라, 제 능력이 주는 환각에 잠시 홀려서. 제 눈물 젖은 사죄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의심도 해 봤지만 제가 아는 청호는 그런 것 따위에 일희일비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신중하고 또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청호가 정말, 저를 사랑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염치도 없이 기뻤다.

시윤은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에 예민한 눈물은 추적추적 비처럼 떨어졌다.

“울지 마, 좀.”

미간을 아프게 찌푸린 청호가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시윤의 눈물을 촙촙, 훔쳐 먹었다. 그런데도 시윤은 쉽게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행여 탈수증이라도 올까, 걱정된 청호가 구석에 놓인 식수대에서 물을 뜨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시윤이 청호의 검지를 어린아이처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대장님.”

“……왜.”

“저 대장님 사랑하나 봐요.”

“…….”

청호의 입이 한일자로 길게 다물렸다. 시윤이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대장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 기쁜 걸 보면, 저도 분명 대장님을…….”

시윤은 문장을 마치지 못했다. 그의 턱을 가볍게 움켜쥔 청호가 입술을 맞물려 왔기 때문이다. 그 저돌적인 입술을 이기지 못한 시윤이 그대로 발라당 뒤로 넘어갔다.

청호가 민첩하고 유연한 맹수처럼 시윤의 위에 올라탔다. 발목과 손목을 옥죈 족쇄 따위는 문제가 안 됐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끔뻑이던 시윤이 곧 사르르 눈가를 휘며 청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청호가 그의 응함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꺾고 보다 깊숙이 입술을 섞었다.

청호는 시윤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진득이 빨았다. 그러다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뻐끔 입을 벌린 시윤이 그 혀를 극진히 받아들였다.

혀가 끈적하게 뒤엉켰다. 타액이 넘나들고, 서로의 숨결이 목구멍으로 밀려왔다. 간간이 후끈한 신음이 입천장을 간질이기도 했다.

“으응…….”

시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청호의 힘이 뭉근하게 쏟아졌다. 아프진 않았다. 들어오기 직전에 붉은 약물을 주사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청호와 제 마음을 확인한 이 순간이 고통에 방해받지 않아서. 오롯이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청호는 혀를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손을 가만두지 않았다. 욕구에 충실한 손이 시윤의 윗도리를 파고들었다. 오목하게 파인 배와 늘씬한 허리를 한 손으로 훑었다. 그의 손목에 묶인 족쇄가 피부를 시리게 긁으며 올라왔다.

그것에 흠칫 놀란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청호의 입 안으로 끌려갔던 혀가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청호가 틈 없이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거둬 갔다. 그리고 걱정이 범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파?”

“아니요.”

“아프면 안 할게.”

“괜찮아요. 안 아파요.”

“…….”

연거푸 이어지는 시윤의 부정에 청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도무지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시윤은 몸이 댕강 반으로 잘려 죽어 가더라도 아프지 않다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위인이었다.

굳은 청호의 표정에 시윤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정말 아프지 않아요. 들어오기 전에 휴 머리카락으로 만든 주사를 맞았거든요.”

“정말이야?”

“네. 그리고 설사 아프다 한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아프지 않으면 대장님이 아프시잖아요.”

“그런 말 하지 마. 듣기 싫어.”

시윤의 윗도리 속에 있던 손을 쑥 빼낸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에 시윤이 끔뻑끔뻑 눈꺼풀을 움직였다. 지극히 맞는 말인데 뭐가 듣기 싫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낯이었다.

“하지만 대장님이 아픈 것보다 제가 아픈 게 나은걸요.”

청호는 아프면 안 되는 몸이다. 그가 아프면 에로아스 병사가 위험하고, 국민의 안전이 위태로워진다. 그러나 제가 아프면 고작 가족 서넛이 걱정할 뿐이다. 청호의 고통은 인류의 미래에 위협이었고, 제 고통은 아주 사사로운 것이었다. 분명 그랬고, 그게 맞았다.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을 한 청호에 시윤이 은근히 자신의 장점을 어필했다.

“……저 참는 거 잘해요.”

“알아. 그래도 이제 참지 마.”

청호가 시윤의 앞머리를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아까 울면서 바닥을 들이박은 이마 위로 벌써 푸르뎅뎅한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그곳에다 아프지 않게 입술을 비볐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고.”

“그래도…….”

“채시윤.”

청호가 엄한 목소리로 시윤을 불렀다. 호되기로 유명한 교관 같은 얼굴이었다. 덕분에 시윤의 입이 딱 다물렸다. 대번에 죽어 버린 시윤의 기에 청호가 실수했다는 듯 뻑뻑한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그가 시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또 나긋하게 읊조렸다.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아프면 아프다고 해.”

청호의 목소리는 절절하다 못해 구슬프기까지 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윤이 어깨를 꿈지럭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청호가 고개를 들었다. 시윤이 그의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채 또박또박 말했다.

“대장님이 뭘 잘못하셨는데요.”

“…….”

“대장님은 잘못하신 거 없어요.”

“…….”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시윤이 판단하기로서니, 청호는 정말 손톱만큼의 죄도 없었다. 고결하고 무고한 존재란 말이다. 설마 가이딩하면서 있었던 일로 죄책감을 가지는 거라면 하등 그럴 필요 없다. 그건 제가 부족해서 아팠던 거였다.

비록 청호가 조금 거칠긴 했지만,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자식인데. 혀를 뽑거나 갈비뼈를 아작 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경외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

단호하고 굳건한 시윤의 표정에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고집불통의 모습이 답답하지 않다면. 분질러 주고 싶지 않다면. 이겨 먹고 싶지 않다면. 하물며 사랑스럽기까지 하다면 제가 미친 거겠지.

청호는 쓸데없는 말씨름을 관두기로 했다. 제가 조금 더 주의하면 되는 것이다. 시윤이 어디가 불편하진 않은가, 아프진 않은가, 괴롭진 않은가,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세밀하게 보살피면 됐다.

청호가 다시금 시윤의 입술을 쭙 빨았다가 놨다. 그리고 예쁜 눈코에도 키스로 한 번씩 인사를 해 주고는 목선을 따라 내려왔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셔츠 형태인 시윤의 홈 웨어를 풀어 갔다. 보들보들한 홈 웨어는 단추마저 부드럽게 풀렸다.

곧 시윤의 살결이 온전히 드러났다.

“아…….”

광대를 붉게 물들인 시윤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감옥이 이리도 환한 건지. 청호의 숙소는 늘 적당히 어두웠던지라 지금 같은 환경이 매우 낯부끄러웠다. 꼭 사방이 트인 바깥에서 뙤약볕을 쬐며 섹스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예뻐.”

청호가 시윤의 보드라운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시윤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예쁘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건 아니었고,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알아들은 청호가 씨익 멋들어지게 웃었다.

참…… 오랜만에 보는 청호의 웃음이었다. 그래서 시윤은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대, 대장님!”

뒷구멍 위로 후끈한 숨결이 닿아 왔다. 그 생경함에 시윤이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청호가 긴 시간을 들여 애무해 준 몸이 단숨에 무용지물이 됐다.

그러나 청호는 시윤의 비명 같은 고함에도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시윤의 몸을 반으로 접듯 밀어붙인 채,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둔부를 사과 쪼개는 것처럼 옆으로 벌리곤 냅다 얼굴을 처박았다.

“아응!”

시윤이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오그렸다. 그러자 청호의 한쪽 눈썹이 비죽 못마땅하게 추켜 올라갔다. 혀로 주름을 길게 핥아 올린 그가 낮은 음성으로 명령했다.

“시윤아. 눈 떠야지.”

그에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절대 뜨지 않겠다는 듯 눈을 더 세게 감기까지 했다. 청호가 제 그, 그곳을 빠는 걸 오롯이 보고 있을 바엔 차라리 눈을 뽑을 터였다.

그런 시윤에 청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줍음과 수치, 그리고 미약한 쾌락이 일렁이는 시윤의 눈동자가 보고 싶긴 했지만, 그것을 강요할 생각일랑 없었다. 궁지에 몰린 시윤이 ‘안 할래요. 하기 싫어요.’라고 해 버리면 그런 낭패가 또 없는지라.

청호는 아쉬운 대로 일그러진 시윤의 낯을 바라보며 다시 사타구니 사이에 코를 묻었다.

“아흣! 으응, 아…….”

청호의 혀는 음탕하고, 저돌적이었으며, 부끄러움이라곤 몰랐다. 주름을 세듯 핥고, 혀를 납작하게 펴서 삭삭 문지르기도 했으며, 마치 뒷구멍과 키스라도 하듯 입술 전체를 붙인 채 쭉쭉 빨기도 했다.

엄청난 자극이었다. 쾌락, 쾌감, 그런 것에 서툰 시윤에게는 더더욱.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입으로는 남세스러운 신음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천박하게 꺼떡거렸다. 아, 성기는 수십 분 전, 청호가 분홍색이었던 유두를 진홍색이 될 무렵까지 빨았을 때부터 저 꼴이었다.

그러다 청호가 혀끝에 바짝 힘을 주고 구멍 사이를 파고들었을 때, 시윤은 참지 못하고 찔끔 하얀 탁액을 지리고야 말았다. 청호가 귀엽다는 듯, 시윤의 귀두를 엄지로 꾸욱 밀어 올리듯 문질렀다.

“아앙!”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거센 자극에 시윤의 허리가 붕 위로 솟구쳤다. 고집스레 감겨 있던 눈도 번쩍 떠졌다. 경악 어린 눈동자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청호가 큭큭 목으로 웃으며 시윤의 뒷구멍을 보다 집요하게 빨기 시작했다.

혀를 뿌리까지 쑤셔 넣고 긴장으로 팽팽해진 내벽을 마구 핥았다. 벌름거리는 주름을 이로 갉아 대기도 하고, 장난스레 후우 바람을 불어 넣기도 했다.

“대, 대장니임……. 흐응, 아, 으힛!”

시윤이 자지러지며 허리를 뒤틀었다. 어떻게든 청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데, 그게 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청호의 손과 발에 힘을 봉인하는 족쇄가 채워져 있다 한들, 완력 차이가 하늘과 땅 수준이었다.

청호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시윤의 뒤를 물고 빨았다. 뱀처럼 내벽을 파고드는 혀를 견디지 못한 시윤이 거나하게 사정하고 또 발기할 만큼이나 긴 시간이었다.

츄우웁. 낯부끄러운 소리와 함께 청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어찌나 센 흡입력으로 빨아 댔는지, 구멍이 다 얼얼했다. 만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볼 수도 없고. 이유 모를 서러움에 시윤이 코를 훌쩍이는데, 청호가 눈가에다 촉촉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왜 울어.”

그 말에 시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가 놓은 청호가 이번엔 시윤의 뒷구멍에다 검지를 가져갔다.

시윤이 싸지른 정액에, 자신의 타액에, 또 시윤의 뒷구멍에서 나온 액체로 축축한 주름이 청호의 손가락을 반기듯 오물오물 모여들었다.

“아읏…….”

청호는 시윤의 표정을 또렷이 직시하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시윤은 움칠 몸을 떨기만 했을 뿐, 다행히 아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청호가 기특하다는 듯 시윤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사실 시윤의 머리칼을 쓸어 주고 싶었는데, 한 손이 뒷구멍에 물려 있는지라 사슬의 길이가 거기까지 닿질 않았다.

청호의 손가락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내벽 깊숙이까지 들어와서는 작은 원을 그리면서 차근차근 내벽을 늘려 갔다. 그렇게 하나였던 손가락은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됐다.

“흐, 으응, 아…….”

간질간질한 쾌감에 시윤이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청호의 혀와 손가락으로 녹을 대로 녹아내린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개폐를 반복했다. 청호가 짙은 눈동자로 그것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미 하체는 통제권을 잃은 지 오래였다.

청호가 성마른 입술을 연신 핥았다. 몸이 달아 미칠 것 같았다. 아랫도리는 터질 듯하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뱄다. 얼른 시윤이 제공하는 환락에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그의 체온과 체취에 정신을 파묻고 뒤엉킨 근육과 핏줄에게 평온을 주고 싶었다.

그때. 그의 손가락 끝이 볼록하게 올라온 내벽을 긁어내렸다.

“아아응!”

전신을 관통하는 쾌락에 시윤이 휙 고개를 뒤로 꺾었다. 청호의 안광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순간 확 움츠러들었던 내벽이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풀어졌다.

휙 손가락을 뺀 청호가 훌떡 윗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셔츠가 족쇄에 대롱대롱 걸렸다. 그것을 짜증스레 잡아 뜯어 버리고 아래는 성기가 드러날 정도만 내렸다. 그 후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성기를 구멍 위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시윤의 몸이 꽁꽁 언 것처럼 굳었다. 애써 덮어 두고 있던 과거가, 그러니까 과거의 고통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뒤를 헤집던 커다란 성기. 골반을 움켜쥔 우악스러운 손아귀. 비수처럼 쏟아지던 시린 눈길. 핏줄을 할퀴던 힘. 그 모든 게 시윤을 겁이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런 시윤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청호가 덩달아 몸을 굳혔다.

“하지 말까?”

그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시윤이 쓸데없이 대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요. 괜찮아요.”

“……무서우면 안 할게. 나는 그냥 너 안고만 있어도 좋아.”

청호가 시윤의 유두를 빨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그의 가슴팍에 뺨을 묻었다. 보드라운 피부 너머로 쿵쿵쿵, 세차게 뛰고 있는 시윤의 심장이 느껴졌다. 제 곁에 있는 그의 온기, 숨소리, 맥동하는 심장, 그 모든 게 말도 못 하게 좋았다.

한 치의 거짓 없이, 청호는 정말 시윤을 안고만 있어도 만족할 수 있었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청호의 뒤통수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정말 괜찮아요. 하고 싶어요, 저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청호의 정수리 위로 축복처럼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청호가 시윤을 가만히 바라봤다. 또 시윤이 거짓말을 하는 건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시윤의 낯엔 거짓이라곤 없었다. 약간의 긴장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긴 했으나, 이기적인 마음은 그것을 모른 체하기로 했다.

청호가 다시 시윤의 뒷구멍에 성기를 맞췄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꾸욱, 꾹, 눌렀다가 떼길 반복했다. 구멍이 오목하게 파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또 오목하게 눌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따금 시윤의 성기를 아래위로 흔들어 주기도 했다.

“하으, 으응…….”

반복되는 행위에 바짝 긴장해 있던 시윤의 어깨가 한층 느슨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청호가 허리에 힘을 주고 본격적인 삽입을 시도했다.

시윤의 미간이 속절없이 구겨졌다. 아무리 몸이 풀리고 근육이 이완되었다고 한들, 청호의 성기가 지나치게 우람한지라 받아들이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가랑이가 째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청호가 주름진 시윤의 미간과 눈가에 쪽쪽 키스했다.

“후우……. 미안. 오늘은 아프면 쏴 버리라고 들려 줄 총이 없네.”

“……네?”

“아니면 아쉬운 대로 눈이라도 찔러.”

그 말에 시윤은 분위기도 모르고 푸흐흐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청호가 덩달아 미소 지었다. 시윤과 이리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저는 절대 대장님을, 읏,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니까요.”

시윤이 청호의 팔뚝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작고 마른 손으로 때리고 할퀴어 봐야 상처 하나 나지 않을 텐데, 참으로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청호가 그 손을 채 가 다섯 손끝에다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물론, 손바닥도 잊지 않았다. 시윤이 간지럽다는 듯 곰살맞게 눈을 휘며 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청호의 성기는 시윤의 안에서 차근차근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성기가 반쯤 들어왔을 때. 시윤이 심호흡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판판한 가슴팍이 크게 부풀면서 갈비뼈가 오돌토돌하게 드러났다.

“으읏, 윽……. 하으으…….”

“하아…….”

청호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가늘어졌다. 그가 허리를 살짝살짝 좌우로 흔들며 시윤의 내벽 여기저기를 긁어 댔다. 시윤이 청호 몰래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었다. 그러지 않고는 ‘그만해요!’라고 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청호의 성기가 3분의 2쯤 들어왔을 때였다. 청호의 귀두가 다른 부분에 비해 봉긋하게 올라온 내벽을 확 긁었다.

“흑……!”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속눈썹이 부르르 경련했다. 통각에 휘말려 반쯤 구부러졌던 성기가 단숨에 발기했고, 가느다란 허벅지에는 마른 근육이 곤두섰다.

그와 동시에 청호가 으득 어금니를 씹었다. 그 후 성기를 귀두까지 빼냈다가, 단번에 박아 넣었다. 좁은 내벽을 터트릴 듯 채운 성기가 시윤의 전립선을 짓뭉갰다.

시윤의 작은 얼굴에 사색이 깃들었다. 다섯 손가락을 단풍잎처럼 펼친 그가 청호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번개처럼 전신을 관통하는 쾌락에 뇌가 줄줄 녹는 것 같았다.

“대장님, 잠, 잠깐, 잠깐만…… 흐앙, 아!”

하지만 청호는 들은 체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시윤이 아프지 않으면 된 거지. 다른 이유까지 돌봐 줄 이성이라곤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윤의 골반을 양손으로 움켜쥔 그가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기며 퍽, 퍽 허리를 놀렸다.

“아흑, 아! 으흥, 흣, 흐잇!”

시윤이 몸을 뒤틀며 자지러졌다. 비명 같은 신음이 유리 벽에 부딪혔다가 세 갈래, 네 갈래로 갈라져 돌아왔다.

청호는 목줄이 끊긴 개처럼 제멋대로 허리를 놀렸다. 그의 골반이 찰박찰박 시윤의 엉덩이를 빠르게 치댔다. 묵직하게 올라붙은 고환은 회음부를 턱턱 아프게 내리쳤다.

시윤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비집고 나왔다. 청호의 성기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여태 수십 번도 넘게 받아 왔는데도 그랬다. 더군다나 오늘의 섹스는 쾌락까지 동반되어 더했다. 차라리 고통뿐이면 베개를 씹고 시트를 쥐어뜯으며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청호는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전립선만 북북 긁어 댔다. 예민한 곳을 두들겨 맞다시피 한 시윤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흐윽, 앗, 으응…… 흐앙!”

“하아, 하, 시윤아…….”

시간이 지날수록 시윤은 배 속 전체가 전립선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청호가 어디를 쑤시고 쳐올리든, 몸이 파드득파드득 경련했다. 귓구멍이 먹먹하게 탁해졌고, 신음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쩌렁쩌렁하게 높아져만 갔다. 종국엔 호흡이 턱 끝에 걸려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눈치챈 청호가 힘이 바짝 들어간 시윤의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잠깐 자세를 고쳤는데, 시윤의 안에 파묻혀 있던 성기가 약간 옆으로 뒤틀렸다.

“시윤아. 숨 쉬어, 숨.”

청호 딴에는 그를 걱정해서 한 행동이었다. 이대로 시윤이 기절이라도 하면 영 찝찝한 상황이 도래한단 말이다. 근데 어째서인지,

“아흐윽!”

시윤이 눈을 부릅뜨더니 찌익- 정액을 싸질렀다. 덜거덕덜거덕 고장 난 마차처럼 올라오던 호흡은 아예 뚝 끊겼다. 발가락은 안으로 곱았고, 목이 꺾이며 마른 쇄골이 도드라졌다.

“흐우…….”

시윤의 몸이 덜덜 경련했다. 청호가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그 순간이 잔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뜨거운 손바닥. 단단하고 묘하게 거친 손가락 끝. 하물며 그의 지문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실로 그러했다. 거기다 꼬이듯 비틀어지는 내벽이라니.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 너 진짜…….”

청호가 자신의 볼에 튄 시윤의 정액을 손으로 닦아 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허벅지가 예민한 줄은 몰랐네.”

“으…….”

시윤은 청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직 절정의 여운에서 부유하며 몸을 간헐적으로 떨어 댔다. 그러면서 뒤를 쥐어짜는데, 청호가 그걸 그저 두고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성난 맹수처럼 콧김을 뿜었다. 성기를 옴팡지게 조이는 내벽에 관자놀이 위로 핏줄이 불룩 올라왔다.

청호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시윤의 몸을 추슬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깊숙이 아물려 있던 성기를 뒤로 물렸다. 쫀쫀한 내벽이 어딜 가는 거냐며 붙잡아 왔지만,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임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윤이 울룩불룩한 청호의 복근을 열심히 밀어 냈다.

“대장님, 잠, 잠시만, 방금 갔, 아앙! 윽…… 으응!”

시윤의 부탁은 신음과 함께 허공으로 나부꼈다. 시윤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단단히 거머쥔 청호가 성기를 꾸우욱 깊숙이 집어넣었다가 단번에 잡아빼고, 또 깊숙이 넣었다가 빼길 반복했다.

시윤의 잇새에서 한층 높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쾌락으로 노곤히 익은 얼굴이 청호를 올려다보며 훌쩍훌쩍 눈물을 흘려 댔다.

“흐앙, 읏, 으응, 대장……니임…….”

그걸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던 청호가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러고는 시윤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잡아채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나머지 손으로는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위로 올려 삽입을 보다 깊숙이 할 수 있도록 했다.

찰박찰박. 방금 시윤이 싼 정액으로 접합부가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한층 음란해졌다.

“아…… 흐으, 읏, 응! 아으응, 조, 좋아요…….”

좋아요, 대장님. 좋아해요, 대장님. 청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시윤이 울음과 신음으로 흠뻑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씨발…….”

지그시 눈을 감은 청호가 시윤을 따라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온몸으로 넘어오는 시윤의 체온. 덩달아 그에게로 넘어가는 비죽비죽 모난 힘. 편안하게 이완되는 근육과 갈비뼈 속에서 피어나는 듯한 꽃봉오리들. 그리고 귓가를 적시는 그의 목소리. 마음을 뭉근하게 녹이는 고백.

완벽한 순간이었다. 감히 말하길, 어머니의 포궁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평화로운 것 같았다.

시윤을 조금 더 세게 껴안은 청호가 쿠욱, 쿡 허리를 쳐올렸다.

“아흣, 응, 아으응…….”

거칠게 후벼 파이는 뒤에 시윤은 전신의 땀구멍이 활짝 열린 듯 땀이 배어 나왔다가, 소름이 돋으며 단숨에 증발하는 걸 1분에도 몇 번씩 느껴야 했다. 눈앞이 새까맣게 죽었다가 청호의 얼굴로 가득 찼다. 저를 응시하며 묵직한 신음을 흘리는 그가 참 야했다.

청호와 시윤은 집요할 정도로 서로를 바라보며 몸을 흔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청호의 몸짓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시윤이 본능적으로 청호의 목을 껴안았다.

철벅철벅, 척척, 찰박찰박. 살과 살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잡하게 울렸다. 그 사이사이에는 달뜬 신음과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아, 흐윽, 읏, 응…….”

“후우…….”

청호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시윤의 이마에다 꾹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엄지만큼 남아 있던 성기를 죄 욱여넣었다. 고환이 회음부를 짓이기듯 눌러 오고, 허벅지와 엉덩이 역시 납작하게 눌렸다.

“으욱…….”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조금의 거짓 없이 청호의 성기가 명치께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속이 더부룩하고, 배는 터질 듯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내벽이며 뭉개진 전립선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근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성기가 맥없이 주르륵 정액을 토해 냈다.

허벅지는 부들부들 떨렸고, 눈알 가득 눈물이 차올랐으며, 입을 한껏 벌리고 있음에도 숨을 내쉬지 못했다. 귓가에는 큰 폭격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삐이이- 하고 이명이 울렸다.

“큭…….”

청호라고 다른 건 아니었다. 성기를 쥐어짜듯 조이는 내벽에 속절없이 절정에 다다랐다. 뜨겁고 탄력 있는 구멍에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해일처럼 밀려오는 안온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꼭 따뜻한 심연에서 새로이 태어난 기분이었다. 모든 죄악과 피를 깨끗이 씻어 내고 완전무결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하아…….”

청호는 그 황홀경에서 헤엄치며 느릿하게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 후희를 즐기는 거였다. 제 성기를 달래듯 우물우물 움직이는 구멍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사랑을 담뿍 담아 시윤의 만면에 키스를 온통 난자했다.

“으응……. 흐, 읏…….”

시윤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더듬더듬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전까지는 온전히 쾌락뿐이었는데. 청호의 정액을 받고 나니 속이 따끔따끔했다.

주사도 맞았고, 청호가 폭주한 상태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의 힘을 억눌러 주던 검은 귀걸이가 없으니 아픈 모양이었다.

그래도 끙끙 앓을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예전에는 염산이라도 삼킨 듯 속이 삭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뭐랄까……. 아, 그래. 가벼운 위염이나 배앓이 정도였다. 과거와 비교하면 아픈 축에도 못 꼈다.

시윤이 배에서 손을 떼고 다시 청호의 목에 팔을 두르려는데, 어째 청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파?”

청호가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요.”

시윤은 당연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프구나.”

청호의 눈썹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가 조심히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 시윤의 아래를 살폈다. 가이딩으로 인한 고통은 칼에 베이거나 총에 맞은 상처처럼 본다고 보이는 게 아닌데도 뚫어지라 바라보게 됐다. 실로 시윤의 뒤는 붉게 달아올라 막 봉오리를 틔운 꽃잎처럼 만개해 있을 뿐, 피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청호가 양 엄지로 구멍을 슬쩍 벌렸다. 안으로 스며 오는 찬 공기에 기겁한 시윤이 버둥버둥 다리를 휘저었다.

“보, 보지 마세요.”

미꾸라지처럼 청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시윤이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워 덮었다. 할 거 다 해 놓고 수줍은 새색시처럼 구는 그에 청호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시윤이 아픈 걸 뻔히 아는데, 눈치 없는 아랫도리가 들썩거리며 다시 발기를 준비했다.

“예쁜데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시간만 있으면 온종일 물고 빨고 싶은데.”

청호가 시윤의 발목을 움켜쥐곤 자신 쪽으로 쭉 당겼다. 무슨 이유든 간에 시윤과 떨어지는 것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청호가 이불로 시윤을 둘둘 말아 그 채로 꼭 껴안았다.

“무슨,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광대를 발갛게 물들인 시윤이 고개를 푹 고꾸라트렸다. 남세스러운 말을 하는 건 청호인데 왜 듣는 제가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청호가 시윤의 목덜미에 쪽쪽, 짧게 입을 맞췄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

난데없는 사과에 잔잔히 들썩이던 시윤의 가슴팍이 잠시 멎었다. 시윤이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였다. 청호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까지 아프게 했던 것들도 미안해.”

“…….”

“근데 앞으로도 아프게 하겠지. 내가 네 에스퍼고, 네가 내 가이드인 이상, 평생을 아프게 할 거야.”

“…….”

“예전에는 네가 내 가이드인 게 그저 좋기만 했는데. 지금은 좋으면서도 슬퍼. 내가 널 아프게 해야만 하는 운명인 것 같아서.”

잔잔하게 이어지는 청호의 목소리에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우리는 참 많이 아팠다. 청호는 제가 늦게 발현하는 바람에 상상도 못 할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매 순간을 버텼고. 저는 청호를 만난 이후 그 고통을 넘겨받아 아팠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앞으로도 아파야 하겠지.

그 신체적인 고통으로도 피눈물이 날 것 같은데, 신은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인지 우리에게 또 다른 시련을 던져 주었다. 그건 청호와 시윤의 의사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시련이었다. 고통과 달리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쯤 되니 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와 저를 이어 놨는지 알 수가 없다. 함께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길 바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죽이려 악을 쓰길 바랐을 수도 있겠지.

뭐가 됐든, 어떠한 결론이 찾아오든, 시윤은 다 괜찮았다. 다 버틸 수 있었다. 청호는 감옥에 있고, 제 아비는 그의 어머니를 죽였고, 무지한 저는 그 죄로 청호의 고통을 대신 감내하고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제 반려가 청호라서 좋았고, 제가 아픈 이유 역시 청호라서 좋았다.

“그런 소리 마세요.”

시윤이 자신을 감싼 청호의 손등을 도닥거렸다. 그리고 청호의 너른 가슴팍에 깊숙이 안겼다.

“저는 행복해요. 대장님을 위해 아플 수 있어서. 그리고 언젠가는…… 아프지 않을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그래도 당장 네가 아픈 게 싫어.”

“저도 대장님이 아픈 게 싫어요.”

두 사람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잠깐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먼저 입을 뗀 건 시윤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청호와 눈을 맞춘 채 조곤조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이딩을 구걸하지 마세요. 부탁하지도 마세요. 지극히 당연한 거고, 제가 해야 할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건데요.”

그 말에 청호의 눈썹이 침울하게 내려앉았다.

“그건, 그건 거짓말이었어. 구걸이라니, 가당치도 않아. 넌 나한테 기적이란 말이야.”

“…….”

“그냥 짜증 한번 부려 본 거야. 같잖은 복수 같은 거였다고.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청호는 시윤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가 여전히 기적 같다. 제 피비린내 나는 삶의 유일한 축복이고, 안식처다. 손만 잡아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충만했고, 안고 있으면 과거의 모든 일이 연소하여 사라졌다.

정원이 장수하든 단명하든,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클롭스가 인간을 모조리 씹어먹든 말든, 하등 상관없으니 시윤을 안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청호의 낯에 시윤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웃어?”

“그런 게 복수였다니……. 씁쓸해서요. 그냥 분 풀리실 때까지 따귀라도 날리시지.”

“……내가 때리면 네 머리통이 터져 버릴지도 몰라.”

청호가 심각한 낯으로 말했다. 그러잖아도 작은 머리인데. 피부도 하얗고, 상처도 없고, 볼도 말랑말랑한데. 무식하게 크고 힘센 제 손으로 때렸다간 물풍선처럼 터져 버릴 게 분명했다.

진지한 청호의 말에 시윤이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웃음은 전과 달리 퍽 해맑았다.

시윤은 청호가 언제까지 자신이 가이딩을 구걸해야 하냐고 했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 앉아 입 안이 죄 터지고 목구멍이 헐 때까지 그의 것을 빨아야 했었지. 고작 그따위 것을 복수라 운운하는 청호가 모순적이게도, 사랑스러웠다.

시윤이 청호의 목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청호가 순순히 이끌려 왔다. 그의 입술을 새처럼 쪽, 쪼아먹은 시윤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가이딩으로 말씨름하지 말아요. 제가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아직 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약도 남아 있고, 당분간은 괜찮아요.”

“……그래.”

청호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시윤의 몸을 훌떡 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후 제가 하도 물고 빨아 체리처럼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시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섹스하면서 했던 키스와 달리 감미롭고 잔잔한 키스였다. 입술 점막이 붙었다가 떨어지고, 따뜻한 입김이 느릿하게 오고 갔다. 그 입김이 이따금 인중이나 턱 아래에 닿으면 간질간질했다. 그 간지러움에 시윤이 킥킥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청호는 웃지 못했다. 지나치게 바지런한 아랫도리가 벌떡 일어나서는 시윤의 허벅지를 쿡쿡 찔러 댔기 때문이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청호가 한 번 더 하자면 못 할 건 없지만, 이번엔 퍽 아플 터였다. 아마 삽입하는 순간부터 오장육부가 바글바글 끓겠지.

“안 할 거야.”

청호가 시윤의 귓불을 쭉 빨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만지기만, 만지기만 할게.”

어느새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온 청호의 손이 시윤의 둔부를 살살 주물렀다. 허벅지를 쓰다듬기도 했고, 따끈따끈한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말랑말랑한 고환을 조물거리기도 했다.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며 몰려오는 쾌락에 시윤이 나른히 눈을 감았을 때였다.

청호가 굳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이불을 크게 펼쳐 시윤을 감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윤이 괜히 긴장해 청호의 품으로 꼬물거리며 들어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기다란 복도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스며 왔다. 돌돌돌,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도 들렸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익숙한 카트였다. 시윤이 몸을 숨기고 들어왔던 세탁물 카트.

그리고 종우가 나타났다. 청호의 눈이 가늘게 째졌다. 반면, 시윤은 안도의 탄식을 내쉬었다.

“박종우 하사가 저를 여기까지 데려다줬어요.”

시윤이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적의가 담긴 청호의 시선은 뭉그러질 줄 몰랐다.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하사 박종우입니다.”

뒤꿈치를 착 붙인 종우가 청호를 향해 경례했다. 청호는 늘 그렇듯, 그 경례를 가볍게 무시했다. 종우가 인사를 무시당해 놓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카트를 유리 감옥에 바짝 붙였다.

“이만 가야 합니다. 곧 해가 떠요. 더 지체했다간 준위님 아버지께서 들이닥치실 겁니다.”

종우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에 시윤이 헛숨을 삼키며 벌떡 일어났다.

“같이 가요, 대장님.”

“…….”

“어디든 가요. 포스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대장님과 떨어지기도 싫어요.”

시윤이 간절하게 청호의 손을 움켜쥐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시윤의 눈가에 촉 짧게 키스했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이라나요?”

“나 혼자 갈 순 없어. 이 감옥에 날 기다리는 부대원들이 너무 많아.”

“그럼 그 사람들도 구해서…….”

“그리고 걔들을 다 구해서 나가면…….”

“…….”

“나는 네 아버지를 죽여야만 해.”

그 말에 시윤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호가 교도소에서 탈출하면, 분명 내전이 일어날 터였다. 아니, 쿠데타라 명명해야 할지도. 아무튼, 피가 터지고 총알이 날아다니겠지. 승리는 보나 마나 청호가 할 것이다. 실존하는 인간 중에 그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없으니까.

그럼 청호의 말마따나 모든 일의 주동자인 시윤의 아버지를 비롯해 원수들이 처형될 터였다. 어머니는 까무러치고, 형들은 절 원망하며 청호의 반대 세력에 서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미 청호에게 아버지의 목숨을 바치겠노라 다짐했는데도 그랬다.

“그럼…… 그럼 어떡합니까?”

“때를 기다려. 너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잘 먹고, 잘 자면 돼.”

“…….”

“이번엔 네가 왔으니까, 다음엔 내가 데리러 갈게.”

청호가 시윤의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시윤이 뚝뚝 눈물을 떨어트렸다. 이 상황이 너무 아프고 버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심장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누가 목구멍에 주먹을 욱여넣고 있는 듯 속이 갑갑했다.

“울지 말고. 응?”

청호가 시윤의 눈가를 살살 쓸어내렸다. 시윤은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이 춥고, 황량하고, 외로운 감옥에 청호를 홀로 두고 가려니 마음이 미어졌다. 멈출 줄 모르는 시윤의 눈물에 청호가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준위님.”

기다리다 못한 종우가 넌지시 시윤을 재촉했다. 시윤이 눈물에 흠뻑 젖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청호가 그런 시윤과 종우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시윤을 감싸고 있던 이불을 살짝 내리며 종우를 흘겨봤다. 뒤를 돌라는 뜻이었다. 종우가 얼른 등을 돌렸다.

청호는 손수 시윤의 옷을 하나하나 입혀 주었다. 그러면서 사이사이 시윤이 떨구는 눈물도 닦아 줘야 했다.

금세 옷을 갖춰 입은 시윤이 유리 벽을 향해 다가갔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청호의 손을 꼭 움켜쥐고 놔주질 않았다. 종우가 카트를 반쯤 유리 감옥 안으로 들이밀었다. 꿈지럭꿈지럭 몸을 뒤틀던 시윤이 마지 못해 카트 안으로 들어갔다.

청호가 시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라고 이별이 쉬운 건 아니었다. 더 꾸물거렸다간 시윤의 말마따나 그를 쏠랑 데리고 도망쳐 버릴 것 같아 얼른 보내려는 거였다.

종우가 막 포일을 덮으려는 찰나였다. 시윤이 동글동글한 눈을 한껏 크게 뜨고 다급하게 물었다.

“어, 언제 데리러 오실 건데요?”

“……금방. 금방 갈게.”

청호가 시윤의 이마에 꾸욱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시윤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아쉽게 몸을 옹송그렸다. 종우가 흘끔흘끔 청호의 눈치를 보며 포일을 덮었다. 그리고 카트를 바깥으로 밀려 할 때였다. 청호가 먼저 카트 손잡이를 쥐고 휙 밀어 버렸다.

시윤을 실은 카트가 돌돌 굴러 멀찌감치로 멀어졌다. 종우가 멀어지는 카트를 당황한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청호가 길게 손을 뻗어 종우의 멱살을 쥐고 감옥 안으로 훅 끌어당겼다. 엄청난 힘에 종우는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청호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발끝이 동동 공중에 떴다.

청호의 새까만 눈동자가 종우를 뚫을 듯 직시했다.

엄청난 위압감에 종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 *

종우와 시윤을 태운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새벽을 가로질렀다. 시윤은 한 시간가량 달리는 내내 찔끔찔끔 눈물을 짜냈다. 종우는 군말 없이 글로브 박스에서 휴지를 찾아 줬다. 그에 시윤이 민망하게 웃으며 휴지로 눈물을 찍어 냈다.

“고마워요. 데려다줘서.”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했을 겁니다. 교도관들 보셨지 않습니까.”

“……그래도, 결국 날 도와준 건 박종우 하사잖아요. 정말 고마워요.”

시윤이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빙긋 웃어 보였다. 울음 탓에 발갛게 익은 눈가가 사르르 접히고, 통통한 입술은 예쁘게 벌어졌다. 지나치게 싱그러운 미소였다. 보고 있으면 괜히 심술이 날 만큼이나 싱그러운, 미소.

종우가 비죽 그를 따라 웃었다. 시윤과 달리 그다지 싱그러운 미소는 아니었다.

“근데 아까 대장님이랑 무슨 말 했어요? 꽤 오래 대화했던 것 같은데.”

시윤이 물었다. 제가 카트 안에 들어가고, 갑자기 카트가 세게 굴러가더니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는데. 청호와 종우가 대화를 나눈 것 같았으나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종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한 박자 늦게 답을 내놓았다.

“아……. 그냥, 채 준위님 안전을 부탁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아아…….”

시윤이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제 걱정을 했구나, 싶어 미소를 띠기도 했다. 그러면서 차창 밖을 살피는데, 어째 풍경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근데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요? 여기는 동쪽인데.”

올 때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어 몰랐는데, 어슴푸레하게 해가 뜨고 나니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시윤은 평생을 포스 안에서 살아왔고,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다녔다. 지금 자동차는 포스의 중심부를 뒤로 두고, 정반대로 달리고 있었다.

“아, 다른 곳으로 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종우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경비를 피해서요?”

시윤이 재차 물었다.

“아니요.”

종우가 부정했다. 시윤은 그가 다른 설명을 덧붙이길 기다렸다. 아니라면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근데 종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전방만 응시하고 있었다.

시윤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더 캐묻지 않았다. 종우에게 다른 생각이 있겠지. 저를 집에서 빼내 올 때처럼 모든 계획을 세워 두고 있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의심일랑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시윤은 종우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시윤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아침 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비싯 웃음을 흘렸다.

청호가 저를 사랑한단다. 다음엔 자신이 데리러 와 주겠다고 약속도 해 주었다. 제 얼굴에 온통 키스도 해 주었고, 저를 쓰다듬고 만지는 손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근 몇 시간이 꿈 같았다. 제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과, 저의 죄는 잠깐만, 아주 잠깐만 뒤로 제쳐 두기로 했다. 이 순간을 오롯이 기뻐하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솔솔 잠이 왔다. 며칠 전 종우가 저를 처음 찾아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긴장 탓에 제대로 자질 못했다. 그리고 오늘은 청호와 끈적하니 섹스도 했고, 저는 간만에 세 번이나 절정에 다다랐고, 울기까지 했더니 피로가 극에 다다라 있었다.

시윤의 눈이 가물가물 길게 감겼다가 짧게 뜨길 반복할 때였다. 창밖으로 영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새카만 몸체.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 장벽이었다.

시윤이 탁한 눈동자로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장벽이라면, 포스의 끝에 왔다는 건데. 어째서 포스의 중심으로 향하지 않고……. 설마 감시를 피해 바깥으로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안 된다. 그러다 클롭스라도 만나면 어쩌나.

잠이 확 깬 시윤이 다급하게 종우를 부르려 할 때였다.

“준위님.”

종우가 한발 빠르게 시윤을 불렀다.

“네, 박종우 하사.”

시윤이 대답했다.

“글로브 박스에서 검은색 상자 하나만 꺼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부탁에 시윤은 곧장 허리를 숙였다. 달칵, 글로브 박스를 열자 상자 하나가 덜렁 드러났다. 시윤이 그것을 꺼냈다. 적당히 묵직한 상자는 무엇이 들었는지 가늠하기가 영 어려웠다.

시윤은 상자를 열지 않고 곧장 종우에게 내밀었다. 종우가 빙긋 웃으며 다시금 부탁했다.

“제가 지금 운전 중이라……. 열어 주실래요?”

“아, 네.”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 뚜껑을 열었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상자는 퍽 고급스러웠다. 값비싼 시계나 목걸이 따위가 들어 있을 것 같은 생김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뚜껑을 열자 검은색 실크로 만들어진 천이 나타났다. 무언가를 둘둘 감싸고 있는 실크를 벗기자 놀랍게도 총이 드러났다. 권총이었다.

부대 내에서 흔히 쓰이는 권총은 아니었다. 그런 거였으면 애당초 이런 상자에 보관해 놓지도 않았겠지.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게 리폼을 공들여 한 것 같았다. 햇살을 받으면 어렴풋이 녹색 빛을 띠었다. 손잡이 부분도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근데 어째 생김새가 익숙했다. 시윤에 눈에 ‘무기’가 익숙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청호가 만들어 준 보라색 총이 아니고서야 다 거기서 거기 같았는데. 이렇게 리폼된 권총이 익숙하다니.

흘끔 종우의 눈치를 본 시윤이 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사방으로 돌려 가며 관찰했다. 그러다 손잡이 아래에 박혀 있는 이니셜을 발견했다.

[C.S.H]

그것을 보는 순간 폐부가 확 쪼그라들었다. 채시훈. 제 형의 이름이었다. 시훈의 이니셜이 박힌 총은 많다. 그는 부대 하나를 이끄는 A급 에스퍼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 총은 전장에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아주 먼 옛날. 정원이 그의 입대를 축하하기 위해 선물해 준 기념비적인 총이었지.

그리고 열여섯의 시윤은 이 총을 훔쳐 들고 포스 바깥으로 나갔었다. 도어 검사 결과로 퓨어가 나온 것에 불만을 품고 등신 같은 짓을 했던 그때 말이다. 저를 도와주려다 목숨을 잃은 방랑자 가족을 뒤로하고 도망치며 잃어버렸던 것이기도 했다.

시윤이 불이라도 쥔 것처럼 다급하게 총을 떨어트렸다.

“이걸, 이걸 박종우 하사가 왜……. 어떻게…….”

상자 위에 널브러진 총을 멍하니 보던 시윤이 종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헌데 자동차는 언제부터인지 멈춰 있었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종우는 시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손에는 바늘이 유독 길어 보이는 주사기를 든 채였다.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시윤이 등을 뒤로 뺀 채 차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잠금장치는 덜컥거리기만 할 뿐, 열리지 않고 헛돌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시윤이 팔로나마 종우를 밀려 했으나 완력 차이가 상당했다. 종우가 손을 길게 뻗어 시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 후 주삿바늘을 시윤의 심장께에 쿠욱 찔러넣었다. 날카로운 바늘은 보드라운 홈 웨어를 손쉽게 뚫고 시윤의 피부와 근육을 관통했다.

“큭…….”

시윤이 단말마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희번덕거리는 종우의 눈을 애처로이 바라봤으나, 종우는 비릿한 웃음까지 띠고 있었다.

차가운 약물이 뭉근하게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근육이 녹아내린 듯 느슨해졌다. 종우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손은 바람을 탄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르르 풀어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눈꺼풀도 나른하게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종우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더니 빈 주사기를 바깥으로 내던졌다. 챙그랑. 주사기가 돌과 수풀이 멋대로 엉킨 틈에 파묻혔다.

열린 창문으로 새벽 특유의 찬 공기가 밀려왔다. 종우가 그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왜…… 왜…….”

의자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윤이 탁하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질문에 종우가 탄식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서늘하게 표정을 굳힌 채 턱을 안으로 당기고 시윤을 노려봤다.

“왜? 왜냐고 물었어?”

“…….”

“내가 누군지 눈치챘잖아. 근데도 그런 질문이 나와?”

그 말에 시윤이 꾸욱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그인 모양이다. 제가 죽음으로 떠밀었던 그 가족의 아들이, 종우인 모양이다.

‘조금만 더 가면 포스라는 곳이 있다더구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야. 그곳은 안전할 거라고 들었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걸어왔어. 내가 이만할 때부터.’

포스로 오기 위해 오륙 년은 걸어왔다는 그 남자아이가 종우였다니.

‘항상 기부금이 넘치는 학교들이어서 전교에서 손에 꼽히면 장학금을 왕창 줬었거든요.’

그 기부금이 제가 그의 가족에게 속죄하려 보냈던 기부금이었다니.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었나.

종우와는 제법 길게 알아 왔다. 그와 단둘이 있었던 적도 꽤 많았다. 종우가 복수를 마음먹었다면 얼마든지 저를 죽일 수 있었다. 미간에 총을 쏘거나, 연구실에 묶어 두고 때려죽였을 만도 한데.

지금도 보라. 칼로 제 목을 쑤신 게 아니라 고작 약물을 주사했을 뿐이지 않은가.

혹, 저를 어디로 데려가 사지를 하나하나 공들여 조각내려는 걸까. 그렇다 한들 반항할 생각은 없었다. 제가 저지른 죄가 있는데.

시윤은 당시의 상황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독오독 씹히던 종우의 아버지. 알사탕처럼 꿀꺽 넘어가던 그의 어린 여동생.

아마 종우가 잔잔한 음성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오늘 너를 잡아다 살점을 얇게 저미고, 내장은 깔끔하게 발라서 널어 놓을 거라 했어도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터였다.

한 번 더 앞머리를 쓸어 올린 종우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네 아비는 청호 대장님이 널 빼돌렸다고 생각할 거야. 대장님은 네 아비가 널 빼돌렸다고 생각할 거고.”

종우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계획을 말했다. 그러나 시윤은 전혀 듣질 않았다. 사실 귀가 웅웅 울리고 있어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질 않았다. 눈앞도 누가 우유를 쏟아부은 듯 탁해지고 있었다.

시윤이 시시각각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도 오므라드는 목구멍 사이로 한 문장은 내뱉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그 말에 종우가 부릅뜬 눈으로 시윤을 노려봤다. 시윤은 재차 사과하려 했다. 고작 사과 따위로 제 죄의 무게를 줄여 보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기력을 잃어 가는 몸뚱이로 할 수 있는 게 입을 나불거리는 것밖에 없어 그랬다.

정말 미안해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읊조린 시윤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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