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의 꽃
시윤이 옆으로 몸을 뒤척였다. 푹신한 이불이 몸을 포근하게 감싸 왔다. 오늘따라 유달리 보드라운 침구가 기상을 말렸다. 볼을 비비적거리며 게으름을 즐기던 시윤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번쩍 눈을 떴다.
잠들기 직전의, 아니,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을 상기했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난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윤은 자신이 다시 눈을 뜨면 손발이 칭칭 묶여 있거나, 아니면 이미 죽은 상태라 눈을 못 뜨거나, 것도 아니면 종우가 톱으로 제 허벅지를 썰고 있을 줄 알았다.
근데 몸은 멀쩡했다. 집에서 나왔던 홈 웨어 차림 그대로였다. 주삿바늘이 박혔던 가슴을 괜히 쓰다듬은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짧은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허…….”
이 궁전은 무엇인가. 전혀 상상치 못한 풍경에 시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헤벌렸다.
정말 궁전이라 표현해도 하등 비약이 아닐 곳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 정도로 큰 공간은 운동장만 했다. 그 가운데에 시윤이 누운 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양옆으로는 굵직한 기둥 수십 개가 박혀 있었는데 온통 금이었다. 아아, 자세히 보니 금으로 만들어진 각양각색의 조각상이었다. 그 조각상들이 크고 작은 촛불을 접시처럼 떠받치고 있었다. 또 여기저기 깨진 유리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니, 유리가 아니라 거울 같기도 하고.
돔 형태의 천장에는 자동차만 한 샹들리에 열댓 개가 달려 있었는데, 쓰지 않은 지 오래된 듯, 자욱하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가장 압권은 천장 빼곡히 그려진 그림이었다. 촛불이 뿜어내는 빛이 전부인지라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알 순 없었으나, 엄청난 대가의 작품이라는 건 그 기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윤이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는 또 어찌나 높은지. 발이 닿질 않아 뛰어내리다시피 해야 했다. 맨발바닥으로 닿아 오는 땅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박……종우 하사?”
시윤이 허공에다 종우의 이름을 던졌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윤이 살금살금 가까운 여신 조각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던 촛불 중 하나를 빼내 주위를 훑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조각상들과 샹들리에, 그리고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거울들의 반복이었다.
한참을 걸어 벽에 다다른 시윤이 막 모퉁이를 돌려 할 때였다.
“멋지지 않니?”
감미로운 목소리 하나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기겁한 시윤이 휙 뒤를 돌았다.
“옛날 인간들은 이곳을 베르사유 궁전이라고 불렀단다.”
나른하게 일렁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인간이 창조한 것 중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곳이지.”
알 듯 모를 듯 짓는 미소와,
“내가 좋아하는 곳이기도 해.”
말할 때마다 언뜻언뜻 검은 혀도 보였다.
“……휴?”
휴였다.
놀란 시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갈 곳을 찾아 눈알을 바지런히 굴리는데, 휴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오, 네가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건 처음이구나.”
“…….”
“나 역시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네.”
휴가 나지막이 웃었다. 어딘가 기쁜 얼굴이었다. 꼭 이름이 처음 생긴 사람처럼. 그러나 그런 건 시윤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이곳은 포스가 아니다. 포스 안에는 ‘베르사유 궁전’이라고 불리는 곳이 없었다. 즉, 포스 바깥이란 말인데. 언제 어디서 클롭스가 나타날지 몰랐다. 거기다 저를 데리고 온 종우는 보이지 않는다. 난데없이 휴가 눈앞에 있고, 저는 오롯이 혼자다.
무엇 하나 혼란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무심코 중얼거리던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곳은 바깥이니 내가 어떻게 여기, 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아아, 그것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박종우 하사는…… 어디에 있어요?”
시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종우도, 종우의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하물며 어떠한 생명체의 흔적도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포스 바깥 특유의 황량함과 삭막함이 넘치는 곳이었다. 서늘한 바람, 매캐한 먼지 냄새, 꿉꿉한 어둠.
소름이 끼칠 정도로 화려한 폐허였다.
“종우는 포스로 돌아갔어.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자리를 지켜야 하거든.”
그리 말한 휴가 빙그르르 뮤지컬 배우처럼 뒤를 돌았다. 그러더니 가지런히 선 조각상들의 볼이나 콧잔등을 두드리며 나른한 걸음걸이로 여기저기를 배회했다.
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박종우 하사를 알아요?”
“그럼. 종우는 내 친구야. 날 도와주는 착한 아이지.”
“친구……라고요?”
“응. 원하는 바가 같아서 이런저런 일을 함께한단다.”
원하는 바. 그 말에 시윤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휴가 원하는 바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헌데 종우가 원하는 바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저에게 복수하는 것. 궁극적인 목표는 저를 죽이는 것일 테고. 시윤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죽일 거예요?”
그 말에 휴가 시윤을 뒤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시윤을 가만히 보던 그가 빙긋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윤은 그 웃음에서 긍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그것을 깨닫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초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뒤를 돌아 뜀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길고 어두운 복도가 시윤을 향해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시윤은 망설임 없이 그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정말 궁전이라 칭하는 게 하등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운 좋게 핵미사일을 피해 간 건지 뼈대와 크기가 굳건했다. 비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여기저기 이끼와 풀이 올라와 있고, 벽과 모서리가 깨지고, 지하수가 발목까지 올라온 곳도 있었으나, 그 화려한 위엄은 여전했다.
하지만 시윤은 그런 것들을 구경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김새의 복도를 한참이나 지났고, 계단을 올라갔다가 내려갔고, 땅에 떨어진 샹들리에나 깨진 유리 조각에 발이 찔리기도 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았으나 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시윤이 체스판처럼 검은색과 흰색 타일이 겹쳐진 복도 구석에 몸을 숨겼다. 몸뚱이가 반쯤 부식된 조각상 아래였다.
“하아, 하아…….”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고개는 숙인 시윤이 밭은 호흡을 토해 냈다. 발바닥이 너무 아팠다. 무릎은 덜거덕거렸고, 차가운 냉기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널따란 창문으로 스며 오는 달빛에 닿는 족족 어는 것 같았다.
시윤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떻게 해야 휴를 피해 도망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포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거였다.
제 목숨을 줘도 괜찮다고 생각한 건 종우지 휴가 아니다. 그러니 일단 도망치고, 다시 종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쯤이면 가족들이 제 부재를 알아차렸을 텐데.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청호를 압박할 게 분명했다. 그 계기로 청호 역시 제가 위험에 휘말렸음을 알게 될 것이고. 종우가 ‘네 아비는 청호 대장님이 널 빼돌렸다고 생각할 거야. 대장님은 네 아비가 널 빼돌렸다고 생각할 거고.’라고 말해 주지 않았던가.
청호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계획이고 뭐고, 당장 교도소를 부수고 탈출할 게 뻔했다. 아버지는 어쩌려나. 아마 그런 청호를 죽이려 별별 방법을 다 쓰겠지.
“아…….”
엉망진창이었다.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저인데, 저는 이곳에 처박혀 있고, 할 수 있는 건 없다. 총은 당연히 없고, 연락할 수 있는 홀로그램 패드나 손목시계 역시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날짜도, 시간도 모르겠다. 푸른 달빛이 세상을 지배한 것으로 보아 밤인데, 시차 탓에 포스는 밤이 아닐 수도 있었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는, 똑똑한 머리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시윤이 찔끔 스며 나오는 눈물을 무릎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면서도 발바닥을 축축이 적시고 있는 피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가이드로 발현한 후, 꽤 통렬한 시간들을 견뎌 온 터라 이제 피 따위로는 겁을 먹지 않았다.
그래도 막막한 상황이 주는 공포는 대단했다. 포스 바깥에 홀로 고립된 건 열여섯 이후로 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시윤이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팔뚝을 세게 주물렀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시윤아.”
정수리 위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흡 숨을 참았다. 그런다고 제 몸뚱이가 사라지는 것도,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리됐다.
“춥지 않니?”
어느새 다가온 휴가 시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다정한 목소리에는 퍽 진실된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시윤은 살쾡이처럼 치켜뜬 눈을 거두지 않았다.
“발도 다쳤어? 그러게 뭣 하러 도망치니?”
휴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더니 시윤의 발목을 잡았다. 발의 상처를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윤이 손에 쥐고 있던 걸 휘두름으로써 불발됐다. 깨진 유리 조각이었다. 어찌나 세게 쥐고 휘둘렀는지, 시윤의 손바닥이 다 파였다.
날카로운 유리 끝이 휴의 볼을 길게 째고 지나갔다. 아니, 쨌었다. 쩌억 갈라졌던 피부가 순식간에 다시 엉겨 붙었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아무는지, 피조차 나질 않았다.
시윤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 상처가 청호보다 더 빠르게 아물다니. 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
휴가 짜증스레 콧잔등을 찡그렸다. 혀로 볼 안쪽을 살살 훑던 그가 시윤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시윤아. 네가 뭘 할 수 있니?”
“…….”
“네가 어떻게 도망쳐서, 어떻게 포스로 갈 건데?”
“…….”
“그 연약하고 가느다란 다리로 걸어갈 거니? 몇 년을 걷고 또 걸어서? 달려드는 클롭스를 피해 가며? 방사능에 물든 나무뿌리를 캐 먹고, 먼지를 덮고 자면서?”
“…….”
“설사 그런다 한들, 내가 그걸 방관만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신이 내 발을 자르더라도 나는…….”
“오, 시윤아. 나는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하지 않아도 널 이곳에 묶어 둘 수 있단다.”
휴가 목울대를 일렁이며 웃었다. 시윤의 아랫입술이 달달 떨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휴가 시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네가 도망치면, 나는 죽일 거다.”
“누굴, 누구를…….”
“포스에 모여 사는 인간들을 죄 죽일 거야.”
“…….”
“그들의 피가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걸 보여 주마. 그 피엔 네 가족의 것도 있을 거고, 모건과 청호의 것도 있을 거란다.”
시윤이 쥐고 있던 유리를 떨어트렸다. 피에 젖은 유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음이 울렸다. 휴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자 유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빠르게 돌았다. 질척하게 묻어 있던 시윤의 피가 방울방울 바깥으로 튕겨 나올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휙 위로 솟구쳤다. 퍼걱. 듣기 께름칙한 소리가 났다.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유리가 조각상의 목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조각상 위로 많은 이의 얼굴이 겹쳤다. 어머니, 아버지, 형들, 모건, 그리고 청호. 시윤의 눈가를 타고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투둑 흘러내렸다.
시윤은 고요하게 울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제게 닥치는지 모르겠다. 아직 아버지 일도, 청호 일도, 종우의 일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휴까지 저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떠밀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윤이 손등으로 벅벅 눈물을 닦아 냈다. 그래도 이겨 내야지. 저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고,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어떻게든 청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렵게 맞닿은 마음인데, 그를 혼자 둘 순 없었다.
시윤이 휴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마치 짐승이 으르대는 듯한 목소리로 캐물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저번에 만났을 때 그랬지. 내가 필요하다고. 당신 같은 존재한테 내가 왜 필요해. 내가 뭘 해 주면 되는데.”
그 말에 휴가 길게 입을 째며 웃었다. 그의 검은색 혀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미안. 딱히 네가 먹을 만한 게 없어서. 그래도 와인은 괜찮지?”
휴는 시윤을 또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공간에 길게 놓인 테이블, 사치스러운 촛대와 식기.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다이닝 룸쯤 되는 듯했다. 자욱하게 앉은 먼지며, 거미줄 탓에 식사 같은 건 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휴는 어디서 멀끔한 와인 잔과 와인 한 병을 가져오더니 제법 솜씨 좋게 와인을 따랐다. 시윤은 구태여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종우에게 주사를 맞고 눈을 떴을 때부터 어마어마한 갈증에 시달린 터라.
뭐, 설마 와인에 독을 탔겠나. 그렇게 쉽게 죽일 거였으면 진즉 죽였겠지.
시윤이 빈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휴가 멋들어지게 눈을 휘며 재차 와인을 따랐다.
시윤은 술을 아주 진탕 마셨다. 목은 마르고, 배는 고프고, 먹을 건 없고, 상황은 끔찍하고, 눈앞에선 휴가 잘난 얼굴로 비실비실 웃고 있고. 술이 당기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태어나 처음으로 와인을 두 병이나 비웠다. 그러고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시 일어나면 이 모든 상황이 끝나 있길 바라면서.
물론 같잖은 바람이었다. 시윤은 반나절 전에 눈을 떴던 그 침대에서 그대로 아침을 맞이했다. 발바닥에는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었고, 먼지투성이인 홈 웨어 차림은 여전했다.
만면을 있는 대로 구긴 시윤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속은 메슥거렸고, 명치는 답답했다. 이렇게 드센 숙취는 처음이었다.
“아흐…….”
다시 쓰러진 시윤이 화려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천장 가득한 그림이 시윤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옷을 반쯤 헐벗은 사람들이 하프와 나팔을 연주하며 시윤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날이 밝으니 더 사치스럽고 화려한 궁 내부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눈살을 찌푸린 시윤이 끙끙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
“안녕.”
익숙한 음성이 눈치 없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 왔다. 시윤은 대충 흘깃 눈동자만 움직여 인사의 주인을 쳐다봤다. 역시나 휴였다.
그가 시윤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덩굴과 과일이 새겨진 컵에 시원해 보이는 물이 들어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시윤이 그것을 낚아채서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알코올 찌든 내로 가득한 목구멍과 식도가 씻기니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텅 빈 잔을 내려다보던 시윤이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허공에서 빙그르르 두 바퀴쯤 회전한 컵이 딱딱한 대리석 바닥과 만나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휴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예쁜 컵인데.”
그건 시윤이 알 바가 아니었다. 애당초 조금이나마 휴의 심기를 거슬러 보려 한 행동이라. 근데 평생 이런 식으로 패악을 부려 본 적이 없어서, 고작 컵 하나 던지는 것도 영 어색했다. 그래도 시윤은 꿋꿋이 휴를 노려보려 애썼다.
“나한테 바라는 거, 언제 알려 줄 거예요. 손이나 발 같은 걸 떼 가려는 거면 얼른 하고 치워요.”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해. 종우가 연락을 줄 거야.”
휴가 재킷 주머니에서 익숙한 모양새의 손목시계를 꺼내 들었다. 포스 군인들이 쓰는 손목시계였다.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별걸 다 가지고 있네. 저것도 종우가 구해다 준 걸까.
“왜 기다려야 하는데요? 뭘 기다리는 건데요?”
“음……. 그건 비밀. 알려 주면 네가 싫어할 것 같아.”
휴가 빙긋 눈을 휘며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멋들어지게 웃는데, 시윤은 저 얼굴에 주먹이나 한번 거나하게 박아 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휴, 네 좆대로 하세요.
속으로 질퍽한 비속어를 중얼거린 시윤이 다시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에 휴가 침통한 낯으로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자게?”
“…….”
“그만 자. 나 심심해.”
시윤은 휴를 완전히 무시했다. 보란 듯이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 모습에 휴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안 일어나면 네 가족 죽인다. 선화? 아니면 시훈이?”
“……개새끼.”
눈알이 벌겋게 충혈된 시윤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에 휴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랑 놀러 가자.”
시윤이 으득 이를 갈았다. 미친놈이다. 진짜 미친놈이야.
* * *
정원이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꾸욱 힘을 줬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금장이 박혀 있던 만년필이 알루미늄 캔처럼 우그러졌다. 정원이 그것을 짜증스레 집어 던졌다. 보고를 위해 왔던 병사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시윤이 사라진 지 벌써 이틀째였다. 대체 누구의 도움을 어떻게 받았기에 CCTV를 해킹하고, 족쇄를 풀고, 센서까지 피해 나간 건지. 도무지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청호의 짓이겠지. 그걸 아는데, 증거가 없었다. 시윤이 사라진 전후로 청호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힌 청호는 내내 시답잖은 책을 읽고, 잠만 잤다. 타인과의 접촉도 없었다. 꼭 누가 같은 장면을 살짝만 다르게 해서 녹화해 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청호를 비롯한 에로아스 부대에 같잖은 조공품이 들어가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그건 시윤과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걸 빌미로 추궁할 수도, 필요도 없었다.
물론, 어디 감히 죄수에게 조공품을 바치냐며 교도관을 비롯한 몇몇 국민을 잡아넣을 수야 있지만 그럼 반발이 엄청날 터였다. 그러잖아도 청호의 수감으로 민심이 좋지 않은데, 괜히 건드렸다간 긁어 부스럼이었다.
하지만 청호 말고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없는데. 아니, 시윤의 부재가 청호의 짓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정원은 시윤만 찾으면 됐다. 찾아다가 제가 일구어 놓은 이 나라에, 이 평온한 가정에 다시 귀속시켜 놔야 했다.
근데 아무리 찾아도 행방이 묘연하다. 포스는 중심부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행적을 쫓기 힘들었다. 부족한 전기 탓에 가로등도 없는데, 길마다 CCTV 같은 건 언감생심인지라.
그래도 결국은 포스 안에 있을 텐데. 청호가 클롭스가 득실거리는 바깥에다 시윤을 숨겨 놨을 리 없었다.
허나 어떻게 찾나. 청호의 끄나풀은 제가 모두 교도소에 가두어 뒀다. 탈출한 인간이라곤 없었다. 또 다른 이의 도움이란 말이다.
혹 모건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라면 CCTV를 해킹하고, 소리 없이 족쇄를 풀고, 센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시윤을 조용히 숨기는 게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찾아가 추궁해 본 결과,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시윤의 부재에 매우 놀란 눈치였다. 그러더니 심히 걱정하며 시윤을 찾을 이런저런 조언과 방법을 제시했다. 혹 청호가 아니냐며 그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정원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곧 밤이 온다. 이대로면 또 소득 없이 하루가 지나고 말 터였다. 가족들의 걱정이 범람하고 있었다. 선화는 며칠 새 비쩍 말라서는 제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쌍둥이 아들들도 어떻게 티 낼 방법을 몰라 그렇지 절 멀리했다.
정원은 그것에 담담했다. 제가 잘못을 저지른 게 맞는데 어쩌겠나. 뭐, 청호만 아니었다면 들키지 않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일은 시윤이었다.
정원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청호가 시윤을 어떻게 해 버릴까 봐.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까 봐. 하얗고 맑은 제 아들의 미소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허벅지를 달달 떨던 정원이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차, 아니, 헬기 준비시켜.”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교도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부하 병사가 빠르게 뒤를 돌았다.
* * *
청호는 오늘도 어김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딱히 글 읽는 것에 취미는 없었는데, 시윤이 좋다고 달고 사는 걸 보다 보니 자연히 손이 갔다. 사실 이 백지장 같은 감옥에서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청호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손가락 끝에서 사그락거리며 넘어가는 종이가 참으로 평화로웠다. 정갈하게 인쇄된 활자는 단조로웠고, 여기저기 묻은 시간의 흔적은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교도관 하나가 복도를 허겁지겁 뛰어왔다. 살짝 흐트러진 모자와 바쁘게 내뱉는 숨을 보아하니 꽤 멀리서 뛰어온 듯했다.
“…….”
흔한 상황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까지 끝난 시간에 교도관이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청호가 책을 덮었다. 혹, 제가 기다리던 때가 왔나 했다.
장벽 전투 때처럼 클롭스가 쳐들어와 에로아스 부대의 힘이 필요하게 됐다든가, 불안감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국민이 정원에게 정식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든가, 뭐 그런 거.
제가 부대원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 간악한 정원을 무찌르고, 시윤을 품에 안게 될 날이 드디어 도래했길 기대했다.
근데,
“대장님. 채 원수님이 오셨습니다.”
“…….”
영 께름칙한 소식이었다. 청호가 짜증스레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대충 알았다는 뜻으로 교도관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바른 자세로 경례한 교도관이 또 후다닥 뛰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도관 말대로 정원이 나타났다. 수십의 헌병을 거느리고 아주 콧대 높게 행차하셨다. 침대에 앉은 청호가 그런 정원을 감흥 없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또 무슨 말로 제 속을 뒤집으려 하나, 나름대로 기대해 주는 중이었다.
“…….”
“…….”
정원은 기껏 와서는 꽤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꿉꿉하고 불쾌한 정적이 이어졌다. 기다리다 못한 청호가 다시 책이나 읽을까, 하고 책을 펼쳤을 때였다.
“시윤이가…… 사라졌어.”
정원이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청호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가 눈만 들어 정원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전과 달리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네 짓이냐?”
정원이 물었다. 심문을 한다거나, 말을 둘둘 돌리며 심리전을 할 생각일랑 없었다. 당장에 시윤의 행방이 중요했다. 제 아들이 잘 자는지, 잘 먹는지, 추위에 떨고 있진 않은지. 그게 중요했다.
“…….”
그러나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이 유리 벽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어딘가 핼쑥한 몰골이 몹시 볼품없었다.
“대답해. 네가 숨겼냐?”
“…….”
“어디 있어? 아니, 잘 있긴 한 거냐? 안전한 곳에 있는 게 맞아? 혼자 있는 건 아니고? 믿을 만한 놈을 붙여 두긴 했겠지?”
정원의 말은 가면 갈수록 빨라졌다. 시종일관 여유롭고, 고집 있으며, 독불장군 같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청호가 손끝으로 책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입을 뗐다. 정원이 눈을 부릅뜬 채 그 입이 내뱉는 말에 집중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청호가 비아냥거렸다. 정원이 기대한 답은 아니었다. 어딘가 실망한 듯한 정원의 모습에 청호가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채시윤을 팔면 내가 교도소에서 탈출할 줄 알았어? 그 명목으로 나를 처형이라도 하려고?”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정원이 원한 건 이런 대화가 아니었다. 청호가 시윤의 목숨으로 저를 협박해 주길 바랐다. 그 말인즉슨, 청호가 시윤을 데리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헌데 지금 청호는 제 말을 거짓이라, 같잖은 계략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됐다. 이건 아니었다.
정원이 벅벅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청호가 덩달아 미간을 구겼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정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머저리 같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침대에서 일어난 청호가 유리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정원의 몰골이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며칠 잠도 못 잔 듯 눈알은 붉었고, 입술은 부르텄으며 피부도 거칠어 보였다. 타고 난 귀족처럼 반질반질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청호가 눈을 부릅떴다.
“뭐야.”
“…….”
“뭔데, 그 얼굴.”
“…….”
“진짜 채시윤이 사라졌어?”
청호가 쏘는 듯한 목소리로 캐물었다. 정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안과 혼란이 넘실거리는 눈알을 바쁘게 굴리기만 했다.
청호가 폐부가 가득 찰 정도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윤이 사라졌다. 그냥 사라진 것도 아니고, 포스에서 최고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정원이 찾지 못할 정도로 아주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원은 분명 포스를 이 잡듯이 뒤졌을 터였다. 흔적이란 흔적은 죄 쫓았겠지. 의심되는 인간을 족치고, 심문했을 거고. 그런데도 찾지 못해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다.
청호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저는 시윤에게 도피를 명령한 적도, 부탁한 적도 없다. 시윤이 그런 걸 제게 알리지 않고 홀로 감행했을 리도 없고,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정원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었다.
즉, 시윤이 누군가에게 끌려갔다는 결론이 난다. 그것도 제게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범인은 뻔했다. 휴. 언젠가 시윤이 필요하다던 그놈이겠지. 공범은 시윤에게 복수심을 가진 종우일 테고.
청호가 으득 이를 짓씹었다. 청호는 종우가 누구인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얼음 동굴에서 시윤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을 때부터.
언젠가 숙소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종우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저 방랑자였습니다. 다 죽어 가는 걸 대장님이 구해 주셨지 말입니다.’
‘……그랬군.’
‘비록 조금 늦으셔서 아버지와 동생은 죽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와 전 살아남았습니다.’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야기였다. 얼마 있지 않아 잊어버린 이야기기도 했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고, 뇌리에 또렷이 남을 만큼 놀랍지도 않았으니까.
근데 한참 후, 얼음 동굴에서 시윤이 그런 말을 했다.
‘그렇게 도망친 다음 날, 에로아스 부대가 복귀했습니다. 대장님이 수십 명의 방랑자를 구해 오셨는데…….’
‘그런데?’
‘거기에 제가 버리고 온 그 어머니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종우의 말이 중요해졌다. 언젠가부터 시윤의 주위를 맴돌던 종우.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휴와 시윤의 만남을 알려 주던 종우.
청호는 어렵지 않게 시윤과 종우에게 얽힌 케케묵은 사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시윤을 데리고 왔다가, 다시 데리고 가려 했을 때. 시윤이 숨은 카트를 저 멀리 밀어 버리고 그의 멱살을 쥐었었다.
‘채시윤한테 손대지 마.’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에 종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옅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네 아비와 동생이 죽은 게 채시윤 탓이라고 믿고 살아왔을 텐데. 그건 네 아비가 오지랖을 부렸기 때문이지, 채시윤 때문은 아니야.’
청호는 말을 돌리는 법을 몰랐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 말에 종우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긴 듯 사라졌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하지.’
청호가 종우의 멱살을 던지듯 놨다. 종우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더니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채 청호를 노려봤다.
‘비약이십니다. 채시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주장이시고요. 제 아버지와 동생은 채시윤 때문에 죽은 게 맞습니다.’
분노가 바글바글하게 들끓는 종우의 목소리에 청호가 비죽 조소했다.
‘그래서? 그게 사실이라 한들, 네가 어쩔 건데?’
‘…….’
‘내 가이드인 채시윤을 죽이기라도 할 거야? 그럼 나도 죽는데? 널 살린 내 목숨은 안중에도 없나 보지?’
‘…….’
종우가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짓씹었다. 청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종우를 한껏 내려다보며 특유의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를 메다꽂다시피 했다.
‘포스에 이바지하고자 열심히 농사일하는 네 어미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걸 어떻게…….’
‘이미 아문 상처를 왜 굳이 헤집으려 하지? 네 어미는 착실히 잊어 가고 있던데. 마음 맞는 남자도 생겼더군. 서글서글하고 부지런하다지. 아, 이따금 식사도 같이하는 사이이니 너도 알고 있겠네. 너와도 퍽 친해 보이던데.’
‘…….’
‘근데 네가 채시윤을 건드리면, 네 어미의 모든 행복이 깨질 거야. 넌 내 손에 죽거나, 채 원수 손에 죽을 거고. 네 어미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죄로 함께 죽거나, 포스에서 쫓겨나겠지.’
종우의 얼굴은 끊임없이 창백해져 갔다. 청호가 암담하게 가정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청호가 친히 허리를 숙이고 파르르 경련하는 종우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한 음절, 음절을 또박또박 종우의 미간에 박아 넣었다.
‘내가 너와 네 어미를 살린 걸 후회하게 하지 마.’
‘…….’
‘다시 말하는데. 채시윤한테 손대면. 너도, 네 어미도 죽일 거야.’
‘…….’
‘내가 살린 목숨, 내가 다시 거두는 건 일도 아니지.’
말을 마친 청호가 나른하게 눈꺼풀을 내리깔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멀찌감치 선 세탁물 카트를 바라봤다. 저 속에 무릎을 오그린 시윤이 색색 숨을 내쉬고 있을 거라 상상했더니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그러니 그냥, 잊고 살아.’
마지막으로 덧붙여진 청호의 말에 종우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의 입술 끝과 광대가 꿈틀꿈틀 경련했다.
‘그래서 대장님은…… 잊으셨습니까? 대장님의 어머니를? 채정원을?’
종우라고 청호의 사연을 모르지 않았다. 정원의 서재에 숨겨져 있던 칩을 휴에게 알려 준 것도 종우였다. 그래서 청호라면 절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고작 반려 가이드가 뭐라고 제게 이리 모진 말을 쏟아 낸단 말인가.
청호를 평생 존경해 왔다.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을 동경하고 찬탄해 왔다. 그래서일까. 꼭 믿었던 이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 기분이 더러웠다.
종우는 자신의 질문에 청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어디 감히 어머니를 운운하냐며 고성을 내지를 줄 알았다. 근데 청호는 침대 아래에 떨어진 책을 주우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못 잊겠지.’
‘근데 어째서 저한테는…….’
‘하지만 난 잊은 척은 할 수 있어. 그렇게 살 거야.’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당시를 회상하던 청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대화가 끝나고, 종우의 표정이 어땠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다 제 잘못이다. 종우가 일을 칠 걸 예상했으면서도 그렇게 보냈다. 어미의 목숨으로 협박했으니, 시윤에게 해코지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안일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래선 안 됐는데. 제가 시윤과 마음이 통한 것으로 지나치게 들떠 있었던 모양이다.
길게 한숨을 내쉰 청호가 멀뚱히 서 있는 정원을 바라봤다.
“박종우 하사를 찾아.”
“……뭐?”
“박종우 하사. 그 새끼가 시윤이를 데리고 갔을 거야.”
정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박종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이 영 불쾌했다. 제가 모르는 걸 청호가 알고 있는 것 역시, 불쾌했다.
“그놈이 누군데 내 아들을 데리고 가?”
“그건 찾아서 직접 물어보고. 지금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시간이 없을 텐데.”
청호가 짜증이 한껏 묻어난 얼굴로 정원을 꾸짖었다. 정원은 매우 수치스럽고 분했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당장 시윤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종우라는 인간이 무슨 의도를 가진 놈팡이인지 모르겠으나 청호의 표정을 보아하니 위험한 듯했다.
마음이 급해진 정원이 바쁘게 뒤를 돌았을 때였다. 열 맞춰 서 있던 헌병들이 “어…….” 바보 같은 탄성을 흘리며 주춤거렸다. 정원이 고개를 갸웃, 뒤틀며 다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너…….”
청호가 손목에 달린 족쇄를 아귀힘으로 부수고 있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족쇄가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더니 발목에 달린 건 아예 불로 활활 태워 버렸다. 엄청난 온도에 족쇄가 물처럼 줄줄 흘러내리더니 바닥에 찰랑거리며 고였다.
“어떻게…….”
정원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건 그냥 족쇄가 아니다. 능력자의 능력을 막는 특수한 족쇄이다. 효과는 누구보다 정원이 잘 알고 있었다. 이 교도소에 갇힌 능력자 중 저것을 뺀 자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근데 청호는 뭔데 저걸 저리 쉽게 풀어 버리나. 어떻게 능력을 저리 자유자재로 쓸 수 있나.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멍청한 정원의 표정에 청호가 큭큭 목젖을 움직이며 웃었다. 그러고는 손목에 달려 있던 족쇄를 유리 벽을 향해 던졌다. 쾅! 엄청난 소리가 울렸다. 귓구멍이 찌릿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헌병들이 동시에 어깨를 튕겼다.
유리 벽에 박힌 족쇄 주위로 쩌저적 실금이 가더니, 곧 유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서 도망 방지를 위한 약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청호에게 단 한 방울도 닿지 못했다.
청호는 끝끝내 정원의 앞에 섰다. 얼마나 놀랐으면, 시도 때도 없이 만들던 보라색 원조차 만들지 않고 멍하니 선 그의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이런 건 나한테 하등 걸림돌이 안 돼.”
“근데 왜 여태까지…….”
“그냥 갇혀 있어 준 거지.”
청호가 그걸 굳이 내가 말로 해야겠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옥에 있었던 건 일종의 속죄였다. 제가 시윤을 의심하고, 그를 아프게 하고, 그를 울린 것에 대한 가벼운 속죄. 그래서 정원에게 잡혀 준 것일 뿐이었다.
근데 시윤이 위험에 처했다. 속죄고 뭐고, 더는 감옥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이치였다.
청호가 정원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구석에 멀뚱히 선 교도관을 염력으로 끌어와 에로아스 병사들에게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교도관이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그렇게 막 복도 모퉁이를 돌던 청호가 무언가를 깜빡했다는 듯,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그의 만면 가득 웃음이 떠 있었다.
“그거 알아?”
“……뭐?”
“시윤이가.”
“…….”
“날 위해 당신 머리에 총알을 박아 주겠대.”
“…….”
그 말에 정원은 마치 방금, 머리에 총알이 박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고, 턱은 힘없이 뻐끔 벌어졌다. 그런 정원의 모습에 청호가 한껏 조소했다.
“넌 이제 채시윤의 가족도, 아비도 아니야.”
정원의 정수리 위로 절망이 떨어졌다.
시윤은 휴와 ‘베르사유 궁’의 정원에 있었다. 사실 정원이라 표현하기엔 조금 민망했다. 수백 년 전 과거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냥 마구잡이로 자란 풀과 나무가 엉켜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숲 특유의 풀 냄새가 났고,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사부작사부작 속삭이는 소리가 좋았다. 비록 녹슨 티 테이블 위엔 아무것도 없고, 의자는 삐걱거렸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시윤이 우거진 나뭇잎 사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잘 보면 일그러진 조각상이나 깨진 분수대 같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감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시윤은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정원을 둘러보며 청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막연히 그가 보고 싶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조금 뜨겁다 싶은 품과, 커다란 손이 그리웠다. 다시 이틀 전의 그날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윤이 주책맞게 붉어지는 눈시울을 억누르려 눈을 꾹 세게 감았다가 떴다.
“슬프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휴가 물었다. 시윤은 흘깃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는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의 모든 시발점인 그가 저리 물으니 짜증만 났다.
“너무 슬퍼하지 말렴. 곧 청호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시윤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리며 올라갔다. 휴가 자못 자애롭게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또 정작 중요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은 함구했다.
시윤이 속에서 치받는 비속어들을 입 밖으로 낼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다.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
휴가 어린아이처럼 신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시윤이 코웃음을 쳤다.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죽여서 모건과 함께 뇌를 연구해 보리라, 벌써 수십 번째 하는 다짐을 거듭 반복했다.
휴는 팔을 괴이하게 휘적거리더니 반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렇게 3초 정도 시윤을 등지고 있다가, 다시 반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만 한 붉은색 보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끝이 가느스름해지는 물방울 모양에, 꽤 무거워 보였다.
그다지 화창하지도 않은 하늘 아래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거기다 손바닥만 한 크기라니. 언뜻 봐도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디서 났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 온갖 진귀한 보석이 깔린 시윤은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그냥, 휴의 루비 같은 눈동자와 똑 닮은 보석이네. 그런 생각만 했다.
“어디서 났게?”
다시 의자에 앉은 휴가 물었다. 그가 보석을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놨다. 보석은 꼭 자력으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사위에 붉은빛 그림자를 만들었다.
“글쎄요.”
시윤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휴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 가슴에서 꺼냈어.”
“뭐요?”
“내 심장이라고.”
“……뭐라고요?”
놀란 마음에 턱을 살짝 앞으로 뺀 시윤이 되물었다. 심장이라고? 이 미친놈이 이제 저랑 말장난까지 하자는 건가. 휴에겐 별별 능력이 다 있다. 시윤이 목도한 것만 해도 다섯 손가락이 훌쩍 넘어섰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보석을 만들어 내는 능력 같은 게 없으리란 법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거늘. 난데없이 심장이라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괴이하게 일그러지는 시윤의 표정에 휴가 즐겁다는 듯 큭큭거리며 웃었다.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러렴.”
“…….”
이상하게도, 휴가 저리 말하니 진짜 이 붉은 보석이 그의 심장인가 보다, 하는 믿음이 생겼다. 시윤이 전과 달리 흥미로운 시선으로 보석을 바라봤다.
심장. 심장이라. 그럼 이걸 깨트리면 휴가 죽나.
시윤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움직였다. 손으로 깰 순 없을 것 같고, 힘껏 내던지면 되려나. 아니면 의자로 내리찍을까.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 보이진 않는데.
시윤의 머릿속이 뱅글뱅글 빠르게 굴러갈 때였다. 휴가 그의 기대를 박살 냈다.
“이걸 깨도 난 죽지 않아. 애당초 네 힘으로 깰 수도 없겠지만.”
“…….”
시윤이 입꼬리를 씰기죽거렸다. 하여튼 참, 재수 없는 존재다. 진짜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눈을 가늘게 뜬 시윤이 휴를 쳐다보며 속으로 별별 욕설을 읊조렸다.
신경질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시윤의 표정에 휴는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웃었다. 그가 시윤을 놀리기 위해 다시금 입을 뗐을 때였다.
삐빅.
휴의 주머니에서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 휴가 손목시계를 꺼냈다. 작은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 종우가 보낸 메시지이리라. 휴의 눈동자가 짧은 문장을 찬찬히 따라갔다. 시윤도 그것을 보려 고개를 앞으로 쭉 뺐는데,
“때가 됐네.”
휴가 나른한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시윤의 손목을 부드럽게, 허나 힘주어 잡았다.
“갈 곳이 있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윤의 몸이 붕 허공으로 떠올랐다.
휴가 시윤을 데리고 온 곳은 매우 독특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철근.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크기.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는 생김새. 까무잡잡하게 탄 데다가 삭거나 어그러진 곳도 있고, 억세고 질긴 덩굴과 미끈거리는 이끼들로 뒤덮인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도 시윤은 그 건축물 아닌 건축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독보적인 생김새에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거 설마…….”
“맞아. 에펠 탑이야.”
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윤은 한참이나 에펠 탑을 보고 있었다. 청호가 만들어 준 유리 에펠 탑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여서일까. 아니면 상상하던 것만큼 아름답거나 멋지지 않아서일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번뜩 깨달았다.
“……당신과 보고 싶진 않았는데.”
청호와 함께 봤으면 이 부식된 에펠 탑이 매우 멋졌을 거라는 걸.
‘되게…… 징그럽게 생겼는데, 또 보다 보면 괜찮은, 그런 탑이 있어.’
‘…….’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청호와 함께 보기로 했었는데. 휴가 선수를 쳤다. 그러잖아도 밉던 휴가 더 미워졌다. 시윤이 큰 눈을 잔뜩 치켜뜨고 휴를 노려봤다. 아주 중요한 것부터 별별 하찮은 것까지 죄 알고 있는 휴가 에펠 탑에 얽힌 저와 청호의 추억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 너무 상심하진 말렴. 곧 청호와 함께 보게 될 거란다.”
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더니 시윤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쥐고는 비눗방울처럼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종착지는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에펠 탑의 가운데쯤이었다.
에펠 탑은 전망대 같은 것으로도 사용됐던 모양인지 계단이 있었고, 식당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다. 무엇 하나 온전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신기하긴 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은 시윤이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수백 년 전에는 왕성한 도시였을 텐데. 지금은 벽이 죄 날아가 초라한 건물 뼈대와 비죽비죽 모나게 자란 풀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휴가 시윤의 곁에 앉았다. 시윤은 흘깃 그를 바라봤다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듣기 좋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예요? 머리만 심겨 있던 꽃밭도 그렇고, 궁이 아름답니, 잔이 예쁘니 하는 걸 봐선 심미적인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나도 이런 곳에서 죽이려고요?”
비난과 비아냥이 적당히 섞여 있는 말에 휴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뭐, 예쁜 걸 좋아하는 건 맞아. 클라이맥스이니만큼 아주 멋진 걸 준비하는 것도 맞는단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건데요?”
“…….”
휴가 대답 대신 시윤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찌나 집요하고 길게 바라보는지, 견디다 못한 시윤이 그만 좀 보라며 짜증을 내려 할 때였다. 휴가 나지막이 시윤을 불렀다.
“시윤아.”
“왜요.”
“나는, 죽고 싶단다.”
“……뭐라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에 휴는 저 멀리까지 펼쳐진 장대한 자연을 초연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죽고 싶어. 너무 오래 살아왔어. 이제는 사는 게 버겁다. 시간이 끔찍해.”
“…….”
눅눅하기 그지없는 문장의 연속이었다. 시윤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절 죽이려 드는 줄 알았더니. 자기가 죽고 싶단다. 너무 황당한 말이라 목구멍이 다 막혔다.
시윤의 반응이 어떠하든, 휴는 막힘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근데 나는 죽지 않는 몸이야. 원하지 않는 축복이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살아왔단다.”
“…….”
“없던 산이 생기고,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넘실거리고, 그 바다가 범람하고, 인간이 태어나고, 발전하고, 이 땅을 정복하고, 그러다 자멸하는 그 모든 역사를 두 눈으로 봐 왔지.”
“…….”
“긴 시간이었다. 정말 긴 시간이었어. 그러다 보니 나도 늙더구나. 몸이 약해지고, 뼈가 무뎌지는데 죽진 않아. 그래서 영혼이 붙어 있는 생명을 흡수하며 살아왔다. 그러지 않고는 아사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기만 해야 하거든.”
시윤이 어렵지 않게 그가 흡수한 생명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화산의 알들. 머리만 묻힌 꽃밭. 그런 것들이 지구 곳곳에 퍼져 있으리라. 끔찍한 풍경을 상기한 시윤이 콧잔등을 찌푸리자 휴가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떠올리는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일부가 되었지.”
“…….”
“나라고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란다. 자연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그래서 계속해서 믿어 왔어. 언젠가는, 먼 훗날에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어떠한 존재가 나타날 거라고.”
“…….”
“인간이든, 귀신이든, 또 다른 형식의 신이든. 하지만 인간은 아닌 것 같더구나. 그들은 무르고, 간악하고, 나약하니 말이야.”
뭐…… 그래도 예쁜 존재긴 했지. 귀엽고, 앙증맞고, 때로는 따뜻하고, 누군가를 지키기도, 희생하기도 하는 게. 구경할 맛이 있는 존재였어.
자신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간을 떠올린 휴의 눈동자가 탁해졌다. 잠시 그렇게 있던 그가 상념을 떨쳐 내려는 듯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가려 했다.
“잠깐만. 그럼 당신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시윤이 그의 말을 가로질렀다. 인간이 아닌 건 알고 있었는데, 분명 그의 머리카락을 연구했을 때 인간이라는 결과가 나왔었단 말이다. 오래된 인간. 있을 수 없는 결과긴 했지.
“음……. 인간의 모습일 땐 인간이란다.”
“…….”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고 께름칙한 눈으로 휴를 보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어느 날 청호가 나타났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기운이 남다르던 아이였어. 나는 그 아이가 나를 죽여 줄 존재라 생각했지.”
“…….”
“기뻤다. 정말 기쁘기 그지없었어. 그래서 청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라봐 왔는데, 안타깝게도 청호는 날 죽여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더라고.”
갑작스레 등장한 청호의 등장에 긴장했던 시윤이 코웃음을 쳤다. 아쉬워라. 청호가 그를 죽여 주면 더할 나위 없이 통쾌할 것 같거늘. 시윤은 금세 휴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었다. 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였으니 당연했다.
시윤이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말끔한 하늘에 은은하니 노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종일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하루가 끝나려는 모양이었다. 근데 어째 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시윤이 무심코 휴를 바라봤다. 헌데 눈이 딱 마주쳤다. 휴가 일렁이는 붉은색 눈동자로 시윤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니?”
휴가 물었다.
“뭐가요?”
시윤이 되물었다.
“청호가 아니면 날 죽일 존재가 누구일 것 같냔 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
귀찮다는 듯 성의 없이 대꾸하던 시윤이 입을 합 다물었다.
“설마…….”
“그래. 청호가 아니라, 청호의 짝인 너였지.”
시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눈을 반짝이며 휴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죽이는데요? 여기서 할 수 있는 거예요? 알려만 주면 지금 당장 해 줄 수 있어요.”
휴만 죽으면 다음은 쉽다. 그의 재킷 속에 포스에서 쓰는 손목시계가 있으니 누구에게든 연락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돌아가서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나 일단 청호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못 할 게 무엇이랴.
“아아, 지금의 너는 날 죽이지 못해.”
하지만 늘 그렇듯, 시윤의 기대는 단번에 충족되지 않았다. 시윤이 자신의 어금니를 잘근잘근 질긴 고기 씹듯 씹어 댔다. 그럼 왜 말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제발 뭘 하려거든 둘둘 돌리지 말고 결론만 말하라고 따질 참이었다.
휴가 빙긋 웃으며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 은밀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시윤아. 내가 힘을 주마.”
“……힘?”
“그래. 힘. 네가 원래 가졌어야 하는 힘. 네 안에서 부득부득 고개를 들지 않고 숨어 있는 그 힘을 깨워 주마.”
“…….”
시윤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 안에 숨어 있는 힘이라. 그런 게 있나? 시윤이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하얗고 유약한 손은 힘이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근데 휴가 ‘원래 가졌어야 하는 힘’이라고 했다. 시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휴를 보는데, 휴가 웬일로 곧장 답을 알려 주었다.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어. 괜히 청호의 반려가 아니란다.”
“……근데 왜 지금까지 C급이죠?”
“네 몸이 거부하고 있어서 그래. 청호도 자신의 힘에 휩쓸려 고통받았던 것처럼, 너 역시 그럴 테니까. 그걸 아는 영악한 몸이 부러 조금씩 조금씩 힘을 풀어놓는 거지.”
“…….”
“그래서 내가 네 몸을 자극한 거란다. 기생충이나, 모기나, 머리카락으로 말이다. 청호가 네 힘을 떨어트려 놓으면 높이고, 또 떨어트려 놓으면 높이면서 네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해 준 거야.”
“그럼 지금은 내 몸이 내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끝났겠네요. 당신이 그리 말하는 걸 보니.”
“그렇지.”
시윤의 뺨에 옅은 흥분이 감돌았다. 청호의 반려에 걸맞은 힘이 있다니. 그럼 저는 본래 몇 급일까. A? 혹시 S? 시윤은 지금 이 상황이 까무러칠 정도로 좋았다. 광대를 동그랗게 올린 시윤이 손을 쥐었다가 펴며 신나 있는데, 휴가 그런 시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윤아.”
“네.”
시윤이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휴를 쳐다봤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끌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힘이 오롯이 창궐하거든…….”
“…….”
“나를 죽여 주렴.”
“…….”
“그래 주겠니?”
“…….”
시윤이 잠깐 숨을 멈췄다. 당연하죠. 그리 말하면 되는데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혹 휴의 말이 거짓은 아닐까. 제가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닐까. 제가 아니더라도 청호가 위험해지면 어쩌나. 그의 말을 믿었다가 그나마 있는 가이드 능력도 사라져 버리면?
시윤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는데, 휴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너는 강해질 거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청호만큼. 청호의 반려라는 위치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
“그럼 더 이상 가이딩에 고통받을 일도 없고, 청호 역시 한결 편해지겠지. 너희 둘은 세상 그 어떠한 존재보다 완벽한 한 쌍이 될 거란다. 어쩌면 종말할 뻔했던 인간들이 너희 둘로 인해 다시 지구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지.”
“…….”
“거짓이 아니야.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진즉 너를 죽였겠지. 뭐 하러 네 능력을 야금야금 올리며 시간을 끌었겠니. 나한테 시간만큼 괴로운 게 없는데.”
퍽 논리 정연한 말들이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괜히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린 그가 곧 결심한 듯 휴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어렵지 않단다.”
“…….”
“그저 잠깐…….”
휴가 어딘가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잠깐?”
기다리다 못한 시윤이 어깨까지 위로 올린 채 그를 재촉했다. 동그랗게 커진 눈망울에 기대와 환희가 가득했다. 그 예쁜 얼굴을 마주한 휴가 자신의 가슴팍에서 붉은 보석을 꺼냈다. 몇 시간 전, 정원에서 봤던 그 보석이었다. 자신의 심장이라고 했던 그 보석 말이다.
시윤이 의아한 낯으로 그걸 쳐다봤다. 그때, 물방울 모양이던 보석이 길고 가늘어졌다. 꼭 뿔 같은 생김새였다. 솜씨가 별로인 조각가가 마구잡이로 깎아 놓은 뿔.
지금 이 순간에 등장하기엔 어딘가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시윤이 이게 뭐냐고 물으려 하는데, 휴가 그것을 시윤의 가슴팍에다 쿠욱 찔러 넣었다.
“잠깐…….”
“아흑…….”
“죽기만 하면 돼.”
시윤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그가 본능적으로 휴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당황과 공포로 점철된 눈동자로 휴를 바라봤다. 왜, 왜, 왜……. 입은 벙긋거리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휴가 뿔을 더 깊숙이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살과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는 게 지나칠 정도로 선연히 느껴졌다. 끝내 뿔의 끄트머리가 심장을 찔렀다. 그로 모자라 관통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들어왔다. 몸속에 피가 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싶더니 목구멍 너머로 비릿한 혈향이 역류했다.
“쿨럭…….”
시윤이 둔탁한 기침을 토했다.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휴의 손과 제 손을 물들인 피를 망연히 보고 있는데, 시야가 조금씩 조금씩 흐려졌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윤은 여태 꽤 많은 죽음과 마주했지만, 이렇게 또렷하고 짙은 죽음은 처음이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체온이 시시각각 증발하고 있었다. 숨은 쉬어지지 않았고, 사지에선 힘이 빠졌다. 10초 전만 해도 심장에 박힌 뿔이 고통스러웠는데,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쉬……. 괜찮아.”
휴가 그런 시윤의 등을 받치고 천천히 몸을 눕혔다. 시윤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휴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볍게 훔쳤다. 그러더니 시윤을 버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시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어디로 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눈동자가 언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그래서 시윤은 어쩔 수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농홍한 노을이 하늘을 물들여 갔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까맣게 검어졌다.
밤이 온 건지, 아니면 밤보다 검은 죽음이 도래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 *
에로아스 부대원 모두를 교도소에서 빼낸 청호는 곧장 시윤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정원이 발을 동동 구르며 찾았음에도 나오지 않았던 시윤의 흔적인데, 제가 찾는다고 짠- 하고 나와 줄 리 없었다.
거기다 종우도 행방이 묘연하단다.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농작물을 담당하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그걸 보면 그녀는 종우의 꿍꿍이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종우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설마 겁도 없이 제가 한 말을 그저 그런 협박으로 치부한 걸까.
청호는 당장 종우의 어미를 죽이지 않았다. 그저 병사 하나를 붙여 두고 멀리서 감시하게 했다. 혹시나 종우가 그녀의 앞에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럴수록 청호는 초조해졌다. 사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실종된 병사들을 찾아본 적이 있어 잘 알았다. 그래도 그들은 대부분 GPS 기능이 있는 시계를 차고 있으며, 그게 무용지물이더라도 ‘전장’으로 명명하는 구역이 한정되어 있어서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시윤은 아무런 실마리가 없다. 하물며 포스 안에 있는지, 바깥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찾아야 한다면 지구를 죄 뒤져야 하는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10년, 50년이 걸릴지 몰랐다. 그 긴 시간 동안 시윤이 살아 있을 확률은 매우 희박했고.
청호의 초조함이 공포가 될 무렵, 병사 하나가 주사기를 찾아왔다. 장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발견했는데 주사기에는 종우의 지문이 묻어 있고 바늘 끝에는 시윤의 혈흔이 검출되었단다. 주사기 안에 든 약물은 진정제의 일종이었고.
이로써 시윤이 종우에게 납치된 게 확실해졌다. 청호가 으득 이를 갈며 일어섰다. 종우에게 했던 협박을 친히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하나하나 착실히 행해서 종우가 시윤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또 다른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청호를 향해 다가왔다.
“대장님. 채 준위님 손목시계가 켜졌습니다.”
아주 반가운 소식과 함께.
시윤의 위치가 찍힌 곳은 청호도 잘 알았다. H 구역. 몇 년 전 클롭스 소탕 작전을 수행하러 갔었다. 에펠 탑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철근 건축물이 서 있고, 온갖 예술이 범람하는 곳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건물이 부식되어 있었지만 꽤 아름다운 풍경이라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언젠가 시윤에게 유리로 에펠 탑의 모형을 만들어 주기도 했었지.
근데 시윤이 거기 있다니. 대체 어떻게. 왜.
아니, 이유와 목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윤을 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청호를 비롯한 에로아스 부대는 곧장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시간은 길었다. 근 아홉 시간이 걸렸다. 청호는 초조해서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시윤의 GPS가 움직이지 않아 다행인데, 움직이지 않아 불안했다.
어째서 긴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있나. 시계만 떨어져 있는 걸까. 그래, 함정일 것이다. 함정이 아닐 리가 없었다. 교도소로 찾아왔던 시윤은 시계를 차고 있지 않았으니까.
아마 종우나 휴가 시계를 따로 챙기고 있다가, 때에 맞춰 켰을 확률이 높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가는 것이고.
함정이라면 뭐든 있겠지. 시윤은 없더라도 종우나 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을 어떻게든 잡아다 시윤의 행적을 캐물어야 했다.
청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목구멍은 텁텁했고, 심장은 쿵쾅쿵쾅 제멋대로 뛰었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없는 듯 조용했다가, 다시 세차게 뛰길 반복했다.
치미는 걱정을 이기지 못한 청호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 채 눈을 감았을 때였다.
“대장님. 도착 3분 전입니다.”
폴이 시윤과의 만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려 왔다.
군용기에서 내리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세차게 반겨 왔다. 병사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 올렸다. 탐색병은 큼지막한 홀로그램에 시윤의 위치를 띄웠고, 드론이 하늘로 떠올랐다.
청호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주위를 훑어봤다. 황량한 풍경은 몇 년 전에 왔을 때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근데 무언가가 이질적이었다. 무엇이다 뚜렷하게 말할 순 없는데, 분명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게 있었다.
미간을 세모꼴로 찌푸린 청호가 흐음, 어딘가 못마땅한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번뜩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
꽃 냄새. 꽃 냄새가 지나칠 정도로 자욱하게 났다. 대충 훑어본 주위에는 꽃밭이라고 칭할 게 없었다. 이 황량한 폐허에 꽃밭이 있는 게 더 이상하지. 밀림이 여기저기 우거져 있긴 했지만, 그럼 꽃향기가 아니라 풀 내음이 나야 했다.
꽃이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휴. 청호가 냄새의 시발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을 때였다.
“……대장님.”
폴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청호가 눈짓으로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에 우물쭈물하던 폴이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그러고는 말끝을 흐렸다. 청호가 께름칙하게 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온통 붉은 꽃으로 물들어 있는 에펠 탑이 있었다. 그 에펠 탑 한가운데에 시윤이 있었다. 마치 화려한 트리에 장식된 별처럼.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시윤이.
시윤은 팔과 다리, 허벅지와 허리 등에 덩굴 꽃을 감고 있었다. 눈은 처연히 감겨 있었고, 입술과 턱에는 꽃보다도 빨간 핏물이 번져 있었다. 한껏 오므라든 손에는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목시계가 쥐여 있었다. 누가 손바닥에다 두고 손가락을 구부려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거기다 왼쪽 가슴에 박혀 있는 붉은색 흉기. 은은히 발광하는 흉기는 척 보기에도 날카롭고 두꺼워 보였다.
얼굴은 이전에 본 적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그를 사지로 내몬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아픈 시윤은 정말이지 수도 없이 봐 왔다.
헌데 이렇게 창백한 시윤은 처음 봤다. 꼭 몸에 피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하얗디하얀 시윤은 손을 대면 파삭하고 깨져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고…… 숨도 쉬지 않았다.
“…….”
청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시윤을 만개한 꽃들에게서 구해 냈다. 그 후 시윤의 몸 여기저기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있는 꽃도 짜증스레 뜯어냈다. 그러다가도 억센 줄기에 행여 시윤이 아플까 싶어 조심조심 하나하나 빼냈다.
비로소 시윤이 온전한 시윤이 됐다. 흉기도 빼내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잘못될까 싶어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청호가 모건이 새로이 만들어 준 코트로 시윤을 감쌌다. 얇은 홈 웨어 하나만 입고 있는 시윤이 어찌나 추워 보이는지. 몸에 열을 올리고 그를 조심히 품에 안았다.
“시윤아.”
그리고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
하지만 시윤은 대답이 없었다. 네, 대장님. 항상 들려오던 목소리가 귓구멍에서 메아리치는데, 실재는 아니었다.
청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수 초 있다가 눈을 뜬 청호가 재차 시윤을 불렀다.
“시윤아.”
“…….”
시윤은 이번에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평화로이 감긴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청호는 시윤이 뒤늦게 제게 화가 났나, 했다. 그간 아프게 했던 거로.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숨겼던 거로. 끝끝내 그를 혼자 보낸 거로.
화날 만했다. 그가 어떠한 복수를 한다 한들, 어떠한 벌을 내린다 한들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한 번만 눈을 떠 주면 좋으랴만. 한 번만 저의 부름에 대답해 주면 좋으랴만.
청호가 떨리는 손으로 시윤의 볼을 더듬었다. 여전히 부드럽고 말랑한 볼은 시윤의 것 같으면서도 시윤의 것 같지 않았다. 그의 피부는 이렇게 차갑지 않은데. 항상 따뜻했는데. 만지고 있으면 은은한 상쾌함과 싱그러움이 저를 감싸는데. 어찌 이리도 아무런 느낌이 없나.
청호의 눈에 거미줄 같은 실핏줄이 올라왔다. 누가 기도를 움켜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속은 돌멩이라도 주워 먹은 듯 갑갑했고, 관자놀이가 깨질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곧 심장이 딱딱하게 굳는다 싶더니 해일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쏟아지는 총알보다 고통스럽고, 핏줄을 할퀴는 제 힘보다 거대한 슬픔이었다.
“우윽…….”
청호가 시윤을 보다 세게 껴안았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겁이 많은 아이인데. 이 낯설고 황량한 곳에서, 이리 매섭고 건조한 바람을 어찌 받아 내고 있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여린 피부로 저 흉악한 흉기가 파고드는 걸 온전히 느끼고 있었을 텐데. 살이 갈라지고 피가 터지는 것에 면역이 없는 아이인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아파했겠지. 마지막 숨을 토해 내는 그 순간까지 피를 쏟았겠지.
저를 만난 이후로 하루도 아프지 않았던 적이 없었거늘. 또 이리 아프게 해 버렸다. 거기다 이번엔 함께 있어 주지도 못했다.
청호가 시윤의 찬 이마에다 꾹 입술을 눌렀다.
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함께 도망가자는 말에 고개를 젓는 게 아니었는데.
뭐가 됐든 너보다 중요한 게 없는데.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온통 후회였다. 후회되지 않는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대체 왜 네가 죽어야 하나. 왜 이다지도 잔인하고 외롭게 죽어야 하나. 범람하는 사랑 속에서 웃기만 해도 모자란 네가 왜. 네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혹 악마 같은 나를 반려로 두었기 때문에 죽었나. 아니면 네 아비의 죄를 물려받아 죽었나. 이제는 그마저도 내 탓 같다. 나에게 이런 끔찍한 힘이 없었다면 네 아비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 우리는 훨씬 평범하고, 행복했겠지.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이 아니라 적당히 황폐하고 적당히 평화로운 곳들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을 텐데.
신은 어째서 너를, 그리고 나를 이리 사지로 모나. 왜 괴롭히지 못해 악을 내지르나. 왜 기어코 끝을 보나. 우리가 마주하고 웃었던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어찌하여 그것을 만회할 시간조차 앗아가나.
그리고 왜.
어째서.
나만 이리 살려 두나.
“으흑…… 시윤아…….”
청호의 어깨가 서럽게 들썩였다. 그 와중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살랑살랑 부드럽게 움직이는 시윤의 머리칼이 간지러워서 등신같이 웃기도 했다.
그때였다. 묵직한 프로펠러 소리가 허공을 찢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다른 군용기였다. 청호와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한 채 애도를 표하던 에로아스 병사들이 총을 재정비했다. 반면, 청호는 고개 한번 들지 않았다.
군용기가 오든, 폭풍이 오든 하등 상관없었다. 뭐가 됐든 나타나서 제 목숨을 끊어 준다면 차라리 감사할 지경이었다. 청호는 그저 묵묵히 시윤을 껴안은 채 조막만 한 얼굴을 연신 쓰다듬고, 애틋하게 쳐다보고, 또 입을 맞추길 반복했다.
군용기는 가까운 곳에서 착륙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허겁지겁 내리는 이는 정원이었다. 시윤의 시계가 켜진 걸 그라고 몰랐을 리 없었다. 그가 수많은 헌병과 함께 땅에 발을 디뎠다.
에로아스 병사들이 눈을 한껏 치켜뜬 채 정원을 노려봤다. 총구 역시 그를 향했다. 자신들을 비롯해 청호까지 교도소에 가두어 놓았던 인물이니 그가 개국 공신이고, 원수고 따질 게 아니었다. 헌병들 역시 에로아스 부대를 향해 총을 겨눴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누구 하나가 총을 쏘면 곧장 총알 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정원이 그런 병사들 사이를 저벅저벅 가로질렀다. 그의 망막에는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청호의 뒷모습이 맺혀 있었다.
청호가 왜 저리 앉아 있나. 시윤의 GPS가 켜졌으면 냉큼 찾으러 가야지, 왜 저리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나. 그리고 안개처럼 가라앉아 있는 이 적막함과 우울함은 또 무엇인가.
정원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애써 무시했다. 근육이 암담한 미래를 가늠이라도 한 듯 수축했지만 그 역시 무시했다.
정원이 터벅터벅 청호를 향해 다가갔다. 병사들이 그에게 총을 겨눈 채 함께 걸었다.
정원은 청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가 무언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빼꼼 나온 발이며 축 늘어진 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정원이 숨을 멈췄다.
정원은 아버지였다. 제 아들이 수백 수천 명 사이에 끼어 있어도 단번에 찾을 수 있는 아버지. 그런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의 손과 발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정원이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추슬러 청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꺼운 흉기로 심장이 꿰뚫린 제 아들을 마주했다.
“아……. 시윤아…….”
정원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그가 시윤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잠을 잘 때와 똑같은 얼굴이다. 제가 새벽마다 방에 들러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해 줄 때 봤던 그 얼굴이었다.
“아……니지?”
정원이 허공에다 대고 물었다. 청호를 바라보고 있진 않았으나, 청호에게 한 질문이었다.
“흐윽…….”
청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억누르고 억누르다 터져 나온 그의 울음 한 줄기가 답을 대신해 주었다.
“…….”
정원의 어깨가 탁 풀렸다. 팔이 땅으로 툭 떨어졌다. 그러더니 꼭 전 재산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멸망하는 세계를 홀로 목도하고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내 아들이 죽다니. 어떻게 키웠는데. 얼마나 사랑해 줬는데. 이렇게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정원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누가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피가 역류하고, 호흡이 더뎌졌다.
“…….”
정원은 한동안 청호의 품에 안긴 시윤을, 그의 가슴에 꽂힌 흉기를, 축 늘어진 하얀 손을, 무엇 하다 다친 건지 피로 범벅된 발바닥을 찬찬히 훑어봤다.
“…….”
청호는 시시각각 사라져 가는 시윤의 냄새를 열심히 들이켜고 있었다. 온기는 진즉 증발한 상태였다. 제가 아무리 몸에 열을 올려도 시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청호는 시윤의 머리칼에 코를 처박고 꾸역꾸역 체온을 높여 갔다.
“…….”
그리고 시윤은…… 그냥 그렇게 죽어 있었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 세 사람을 크게 훑고 지나갔다. 메마른 나뭇잎이 굴러가다 바스러지는 소리와, 사위를 둘러싼 병사들의 옅은 한숨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클롭스의 울음소리 같은 게 규칙 없이 뒤섞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정원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청호의 앞에 서서 바글바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댔다.
“내놔.”
“…….”
“내 아들, 내놔.”
정원은 청호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그를 마구잡이로 깨부수고 싶었다. 이 모든 게 청호의 탓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제 아들이 청호의 반려 가이드만 아니었어도, 청호에게 홀려 집에서 빠져나가지만 않았어도 이 비극이 도래하지 않았을 텐데. 시윤은 여전히 그 예쁜 미소를 지으며 살아 있었겠지.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그날 있었던 일을 나누고,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제게 아버지, 아버지, 했을 텐데.
정원은 청호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했다. 아니, 아니다.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시윤을 집으로 데리고 가야 했다.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다. 아마 울음과 슬픔이 범람할 테지만, 그 역시 가족의 몫이었다.
청호의 몫이 아니란 말이다.
“…….”
청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정원을 쳐다봤다. 검은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거렸다. 눈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꽤 오래전부터, 청호는 정원을 죽일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포스를 통째로 뒤엎어 개 같은 원수들의 목을 꺾고 왕 아닌 왕으로 군림할 수도 있었다.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은 클롭스의 먹이로 던져 주고 또 다른 에덴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근데 그러지 않은 건, 온전히 시윤 탓이었다. 시윤이 싫어할 테니까. 제가 그런 행동을 하면 무서워할 테니까. 절 미워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시윤이 없지 않은가. 제가 다쳐도 걱정해 줄 사람이, 어떠한 패악을 부려도 나무랄 사람이 없어졌다.
그 말인즉슨, 청호가 여기서 정원의 목을 베어다가 저 에펠 탑 꼭대기에 꽂아 두어도 누구도 감히 무어라 할 수 없다는 거다.
시윤을 안은 청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결심한 것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눈이 서늘하게 번뜩거렸다. 이왕이면 목만 자르지 말고 정원이 제 어머니에게 했듯, 팔다리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시윤이 연하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부릅뜬 청호가 품속의 시윤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시윤은 전과 다름없이 미동이라곤 없었다. 심장에 꽂힌 흉기 역시 여전했다.
하지만 분명 숨을 쉬었는데. 가벼운 몸이 잠깐 들썩인 것 같았는데. 제가 착각했나. 제 움직임에 덩달아 흔들렸을 뿐인가. 그것도 아니면 바람을 오해했나.
아니, 그럴 리 없다. 제가 시윤의 숨결 하나 골라내지 못할까 봐. 이 삭막하고 퀴퀴한 바람과 청량하기 그지없는 시윤의 숨결조차 분간하지 못할까 봐.
청호가 고개를 숙이고 시윤의 코로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소리에 집중하려는데,
“내놓으라고, 내 아들!”
“…….”
머저리 같은 정원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청호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노친네가 눈치도 없고, 상황 파악도 못 하고, 고집과 아집은 넘치고. 역시 죽을 때가 된 모양이다.
살아 봐야 이 지구에, 그리고 저와 시윤에게 하등 도움일랑 되지 않는 인간. 악마가 싸지른 배설물 같은 놈. 방사능보다 못한 쓰레기.
“누가 네 아들이야. 채시윤 이제 네 아들 아니야.”
비릿하게 조소한 청호가 정원을 쏘듯 노려봤다. 그러자 정원이 붕 뒤로 날아갔다. 투명한 거인이 집채만 한 주먹으로 정원을 내리친 듯했다. 큰 트럭에 받힌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이 능력을 쓸 틈도 없었다. 청호가 자신을 공격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터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널따란 광장을 가로지른 정원은 저 멀리 있는 건물에 부딪치고 나서야 비행 아닌 비행을 멈출 수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 갑작스러운 충격에 무너지며 정원 역시 함께 휩쓸렸다. 구르릉, 땅이 흔들리는 소리 뒤로 희뿌연 모래 먼지가 올라왔다.
그것을 보던 청호가 시윤을 고쳐 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군용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자 헌병들이 눈치 없이 다가왔다. 청호가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걸리적거리지 마. 다 죽여 버릴 거야.”
진심이었다. 그저 그런 협박이 아니라, 정말 그들의 심장이나 머리를 죄 불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들이 정원의 명령을 마지못해 따르는 허수아비든, 누군가의 가족이든, 참혹한 세상의 피해자든 다 상관없었다.
분노가 득실거리는 청호의 목소리에 헌병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더니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청호가 군용기에 훌쩍 올라탔다. 에로아스 병사들이 그를 따라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대장님. 어디로 갑니까?”
폴이 물었다. 정원을 공격했고, 청호를 비롯한 자신들은 탈옥범 신세이다. 포스로 돌아가면 퍽 난감할 상황이 펼쳐질 터였다.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시윤이 죽었고, 그로 인해 청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저 멀리 Z 구역 같은 곳에 가서 슬픔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청호는 무슨 생각인지,
“포스.”
라고 대답했다. 그가 의무병이 깔아 놓은 시트 위에 시윤을 조심히 눕혔다. 폴이 반박을 제기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청호가 시윤을 잃었다. 폴은 청호에게 시윤이 어떠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포스로 돌아가려는 건 아닐 터였다. 무슨 계획이 있겠지. 뭘 하려는 거겠지.
청호가 결정했고, 폴은 따르면 될 일이었다.
“예.”
짤막하게 긍정한 폴이 조종석에 명령을 전했다.
“시윤아.”
“…….”
청호가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겼다. 그러면서 시윤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어린 소년이 신에게 기도하듯, 또는 주문을 외우듯 간절하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시윤아.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으면 한 번만 더 해 봐.”
“…….”
“응? 한 번만 더. 제발.”
한 번만 더 내게 희망을 줘. 청호가 시윤의 관자놀이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하지만 시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굳게 감긴 눈은 뜨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호가 어금니를 지그시 씹었다. 그러고는 시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온기라곤 없는 시윤의 피부에 두드러기 같은 소름이 전신에 돋아났다. 연하게나마 붙어 있던 시윤의 냄새 역시 사라지고, 완전한 무(無)향이 느껴졌다.
“시윤아……. 제발…….”
청호의 절절한 음성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건 불가능하다. 청호는 그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경험해 왔고, 그래서, 그러므로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게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근데 도무지 포기가 안 됐다.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시윤인데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평생 시윤의 식은 몸뚱이를 부여잡고 미련에 미련을 이어 갈지도 몰랐다.
심장에 저리 큰 흉기가 박혀 있는데, 자가 치유력이라곤 없는 시윤이 살아나는 건 말도 안 되지. 근데 이상하단 말이다. 기이한 풍경과 꽃, 그리고 은은하게 발광하는 붉은색 흉기로 말미암아 이것은 분명 휴의 소행인데.
휴는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했나. 그가 가져간 것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분명 시윤이 그랬다. 휴가 언젠가 시윤이 필요할 거라 했다고.
대체 무엇이 필요했기에. 시윤의 피가 필요했나. 아니면 주먹보다 작은 그의 심장이? 그것도 아니면 시윤의 영혼이 필요했나. 그걸 앗아가고 시윤을 이리 끔찍하게 전시해 놓았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왠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는 아직 원하는 것을 가져가지 못했고, 시윤 역시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물론, 저의 희망이 만들어 낸 같잖은 의심일지도 모른다. 그럴 확률이 높기도 했고.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걸 어쩌나. 앞으로의 삶에서 시윤이 홀라당 사라진다 생각했더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근데 끔찍하게도, 쉽게 죽을 수 있는 몸조차 아니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시윤을 살려 내야지.
모건에게 가면 무슨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라면, 시윤의 친구이며 세상에 둘도 없을 천재라는 그라면, 어떻게든 시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연구실에 있을 휴의 머리카락이 어떠한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시윤의 몸을 껴안은 청호가 구질구질한 생각들을 이어 가고, 또 이어 갈 무렵이었다.
“하아…….”
시윤이 긴 숨을 내쉬었다.
청호가 버석하니 굳었다. 확실히 들었다. 시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있던 터라 그 숨소리가 천둥보다도 크게 들렸다. 청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윤은 언제 숨을 쉬었냐는 듯 가만히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호가 자신이 또 잘못 들었나, 기대와 희망으로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을 때였다.
“대장님, 방금…….”
폴이 청호가 들은 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듯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왔다. 가까이에 있던 딜런과 알렌 역시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경악 가득한 세 사람의 낯에 청호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것 보라. 역시 제가 맞지 않는가. 그래, 시윤이 이리 죽을 리 없지. 제 반려인 그가 이다지도 쉽게 제 곁을 떠날 리 없지.
청호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시윤을 쳐다봤다. 그리고 시윤의 뺨과 입술에 꾸준히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모건한테 연락해.”
* * *
모건은 간호병 몇 명과 함께 온갖 수술 도구와 의료 기기를 꺼내 둔 채 청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폴에게 듣기론 시윤이 죽었다가 살아났단다. 심장에는 정체 모를 붉은 뿔이 박혀 있고, 수십 분에 한 번씩 숨은 쉬는데 눈은 안 뜬단다. 심장 박동도 딱히 느껴지지 않고 체온도 낮다고 했다.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은 게 없는 보고였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어쩌자고 시윤을 죽였나. 언젠가 시윤이 말했던 그 꽃밭 속의 병사들처럼 기생충으로 시윤을 조종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모건의 한쪽 다리가 달달달 초조하게 떨렸다. 휴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저도, 청호도, 시윤도 다치지 않는다고 해 놓고. 시윤을 죽이다니.
모건이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이래서야 원. 청호의 얼굴을 어찌 보나 싶었다.
그때, 수술실 너머의 복도가 시끄러워졌다. 모건이 튕기듯 일어났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시윤을 안은 청호와 에로아스 병사 몇몇이 들이닥쳤다.
모건이 청호를 침대로 안내했다. 청호가 조심스레 시윤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를 감싸고 있던 자신의 코트를 거둬 갔다. 온전히 드러난 시윤의 모습에 모건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시윤의 행색은 ‘시체’라고 명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진짜 숨을 쉬었다고?’였다. 청호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시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단체로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뭐 해?”
모건이 멍하니 굳어 있자 기다리다 못한 청호가 짜증을 냈다.
“어? 어…….”
모건이 허둥지둥 홀로그램으로 시윤을 스캔했다. 역시나 시윤의 몸은 정상적인 게 없었다. 심장도 멈춘 상태였고, 피는 돌지 않았으며 몸을 순환하는 산소도 없었다. 죽음. 그 자체였다.
근데 흉기가 꽂힌 가슴 부분이 이상했다. 그곳만 미미하게 열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연결된 핏줄이 마치 맥동하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움직임 때문이다. 시윤이 숨을 쉰 건 호흡한 게 아니라 체내에 맺혀 있던 공기가 저 자극으로 인해 바깥으로 흘러나왔던 것 같았다.
모건이 가위로 시윤의 윗도리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그런 모건을 보던 청호가 병사들을 죄 물렸다. 그리고 모건의 곁에 딱 붙어 섰다.
“휴가 시윤이를 원하는 이유가 뭐야?”
“그것까진 몰라.”
“그것도 모르는데 그 새끼를 도와줬어? 나를 부추겨 Z 구역으로 보내고, 시윤이는 채정원 손에 넘기고?”
“……청호야.”
모건이 한숨을 내쉬며 청호를 바라보는데, 청호가 서늘한 목소리로 “멈추지 말고.”라며 치료를 종용했다. 모건이 다시 손을 움직이며 팽글팽글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해야 청호의 분노가 가라앉으려나, 고민하는데.
“잘 생각해. 또 거짓말을 했다간 다시는 말을 못 하게 해 줄 거야.”
목젖을 자르든, 혀를 뽑든. 청호가 으르댔다. 모건이 시윤의 가슴께에 박힌 흉기로 스탠드를 비췄다. 그러면서 머지않은 과거에 휴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했다.
“나도 잘 몰라. 그냥, 시윤이 힘을 바라는 것 같았어.”
“힘? 무슨 힘?”
“시윤이한테 힘이 있대. 네 반려이니만큼 그에 걸맞은 힘이 있을 거라고 했어. 그리고 자긴 그 힘이 필요하대. 힘을 빼앗아 가겠다는 뉘앙스는 아니었고, 음, 그 힘을 빌려 뭘 하려는 것 같았어.”
“…….”
“내가 판단했을 땐, 분명 나쁜 건 아니었어. 너도, 나도, 시윤이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했고.”
뭐, 결과적으로는 시윤이가 이런 꼴이 됐지만. 모건이 서글픈 얼굴로 시윤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붉은색 흉기를 뽑기 위해서였다. 의료용 장갑을 낀 모건의 손끝이 막 그것에 닿으려는 순간,
“시윤아!”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시윤의 모(母)인 선화였다. 파랗게 질린 그녀의 뒤로는 시훈과 시준도 있었다. 아마 정원의 연락을 받고 왔으리라.
청호가 바깥에 선 자신의 병사들을 노려봤다. 그들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시윤의 가족들이라 함부로 밀치고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들이, 동생이 저 꼴로 수술실에 누워 있는데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 훨씬 비인간적이었다.
차게 식은 시윤을 발견한 선화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시훈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으나, 제 다리 역시 풀려 벽에 기대야 했다. 시준은 꿈이라도 꾸는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최악을 달려가는 상황에 청호가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마음은 이해한다만, 일단은 치료부터 해야 했다. 시윤의 심장에 박힌 저 흉악스러운 것을 뽑아내지 않으면 제 심장도 덩달아 찢어질 것 같았단 말이다.
청호가 가족들을 향해 다가갔다. 적당히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켜 달라 말할 참이었다. 싫다고 하면 힘을 쓸 의향도 있었다. 아무리 시윤의 무고한 가족이라도 시윤보다 중요하진 않았으니까.
이윽고 청호가 가족들 앞에 섰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선화와 쌍둥이 형들이 복잡한 표정으로 청호를 봤다. 원망하기도, 그렇다고 미안해하기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시윤이는…….”
청호가 막 입을 뗐을 때였다.
“악!”
모건이 난데없이 괴성을 내질렀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를 향해 갔다. 그리고 그들 역시 괴성을 지를 듯한 표정이 됐다.
시윤이…… 주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스탠드, 수술 도구, 침대, 각종 기계, 의료 약품 등 공간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원래 모습을 잃고 가루가 되었다. 액체든 고체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덜 진동하더니 아주 작은 입자로 부서졌다. 그러고는 매우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시윤에게 빨려 들어갔다.
마치 블랙홀 같았다. 아니, 실로 작은 블랙홀이었다.
“어어, 어어…….”
시윤의 지척에 서 있던 간호병 하나가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그의 손이 가루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간호병이 멍청한 얼굴로 흩어지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은 금세 사라졌다. 그러더니 손목, 팔꿈치, 끝내는 팔뚝까지 흩날렸다.
청호가 그 간호병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쿠당탕, 거세게 넘어진 병사가 민둥민둥해진 어깨를 움켜쥐고 뒤늦게 꽥꽥 비명을 질러 댔다.
그와 동시에,
“허어억…….”
시윤이 번쩍 눈을 떴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체를 들썩였다. 그 모습을 본 청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이 무슨 상황이든 간에 그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근데 조금 이상했다.
시윤의 눈동자가 푸른색이었다. 정확히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에메랄드색.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숲에서 볼 수 있는 색. 또는 하얀 모래사장이 깔린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색 같기도 했다.
정말…… 지독히도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 눈동자에 홀린 청호가 잠시 넋을 잃은 사이, 시윤의 얼굴이 콰직 구겨졌다. 그가 허리를 굽히며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붉은 흉기가 박힌 그곳이었다.
“아흐윽…….”
뼈가 부러지고 살이 파이는 고통을 참지 못한 시윤이 그것을 아귀힘으로 빼내려 했다. 하지만 붉은색 보석은 점점 안으로 파고들었다. 꼭 시윤의 몸속에 똬리를 틀려는 것처럼. 그럴수록 사위에 존재하는 것들이 더 맹렬한 속도로 시윤에게 빨려 들어갔다.
“나가세요! 나가요, 당장!”
모건이 병사들과 시윤의 가족들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가족들이 얼떨결에 수술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청호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시윤아.”
청호가 뚜벅뚜벅 시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시윤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부식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청호만 멀쩡했다.
“흐…… 대장님?”
시윤이 푸르게 물든 눈동자로 청호를 쳐다봤다.
“응, 나 여기 있어.”
청호가 그런 시윤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시윤이 자신의 뺨을 감싼 청호의 손을 거머쥐었다.
“대장님……. 저 아파요……. 너무, 흐, 아파요…….”
시윤의 눈에서 동그란 눈물이 뚝뚝 하염없이 떨어졌다. 일그러진 눈썹에 아픔과 서러움,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공포가 가득했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죽는 그 순간의 두려움이 여전히 저를 감싸고 있는데, 다시 눈을 떴고, 가슴에는 여전히 ‘휴의 심장’이 박혀 있고, 갑자기 괴물이라도 된 것처럼 주위를 빨아 당기고 있으니.
청호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를 달래야 하는데, 보듬어 줘야 하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시 정적을 잇던 청호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
시윤에게서부터 전해지는 황홀함이 대단했다. 여태 받아 왔던 그 어떠한 가이딩보다도 짙고 힘이 셌다. 귀걸이가 없어 명치께부터 독처럼, 곰팡이처럼 퍼져 나가던 고통이 단숨에 자취를 감췄다. 근육과 뼈 사이에 끼어 있던 케케묵은 통각 역시 말끔하게 증발했다.
지옥 같은 전장의 한복판에 있다가 단숨에 천국으로 솟구친 기분이었다.
그저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라, 신에게 새로운 몸을 내려 받은 것 같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세상에, 아름다운 축복 아래에서, 또 다른 삶을 맞이하는 듯한 순간이었다.
파르르 속눈썹을 떨던 청호가 시윤을 꽉 껴안았다.
그에 시윤이 흠칫 몸을 굳혔다. 청호와 닿은 부분을 통해 그의 힘이 벌컥벌컥 들이닥쳤다. 뻥 뚫린 가슴팍이 메워지는 것 같았다. 차게 식었던 근육과 핏줄이 후끈해지고, 이승 저 너머에서 부유하던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허겁지겁 청호를 마주 안았다. 더없이 간절하고, 필사적으로 안았다. 청호가 그런 시윤에 응하듯 몸을 더 바짝 붙여 왔다.
시윤의 연둣빛 눈동자가 바쁘게 일렁였다. 부족하다. 청호를 온 힘을 다해 껴안고 있지만, 부족했다. 청호의 힘을 죄 빨아먹고 싶었다.
“대장님…… 대장님…….”
시윤이 청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욱여넣다시피 했다. 손으로는 더듬더듬 청호의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주물렀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몸 어디에 아주 크고 깊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다른 것으로는 메꿔지지 않는 구멍이다. 오직 청호만이 채울 수 있었다. 시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응, 나 여기 있어.”
청호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시윤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면서 은근히 붉은색 흉기를 감싸 쥐었다. 시윤의 녹색 눈동자도, 주위를 빨아들이는 것도, 늘 그를 아프게 했던 저의 힘을 축복인 것처럼 원하는 것도 처음 본다.
모두 이 흉기로부터 발발한 현상이었다. 그러니 빼내야 했다.
“시윤아. 이거 뺄게. 응? 이것만 빼자.”
청호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슬쩍 흉기를 잡아당겼다. 그것이 손톱만큼 빠져나왔다. 그러자 시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거칠게 몸을 들썩거렸다.
“하으윽……. 시, 싫어요……. 싫어요, 대장님…….”
아파요, 너무 아파요……. 시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흉기에 달라붙은 피부와 근육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 모습에 청호가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서럽게 울며 아프다 하니 차마 뺄 수가 없었다. 으득 이를 짓씹은 청호가 시윤의 가슴을 쳐다봤다. 하얀 가슴에 박힌 붉은 흉기. 말라붙은 핏자국. 은은하게 발광하는 주위.
분명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무엇 하나 시윤과 어울리는 게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휴가 창조했다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청호의 힘이 뭉근하게 흘러나갔다. 버둥거리던 시윤이 목구멍을 활짝 열고 청호의 힘을 받아 삼켰다. 고통에 짓눌려 구겨졌던 말간 얼굴이 한층 편안해졌을 때였다.
청호가 흉기를 단숨에 잡아 빼냈다. 고여 있던 피가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아……!”
시윤의 목이 뒤로 확 꺾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손가락은 시린 겨울에 언 나뭇가지처럼 구부러졌고, 무릎은 비대칭을 그리며 뒤틀렸다. 검게 뚫린 가슴팍은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시윤이 경악과 충격이 일렁이는 눈으로 청호를 쳐다봤다. 청호가 흉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철그렁. 바닥으로 떨어진 그것은 쓰임새를 다했다는 듯 물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청호가 시윤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꾹 내리눌렀다.
“미안해, 시윤아. 미안해, 아프게 해서.”
청호가 흠뻑 젖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하지만 시윤은 그 사과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시체처럼 차게 식어 있던 몸이 갑자기 터질 듯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제 몸을 큰 냄비에 집어넣고 불을 때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치받는 열기와 자신뿐이었다.
그때, 움푹 파였던 시윤의 가슴팍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다쳐서 갈라진 귓불도 달라붙었으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다친 발바닥 역시 말끔하게 아물었다.
청호가 얼떨떨한 눈으로 시윤의 가슴팍을 바라봤다. 시윤에게는 자가 치유 능력이 없는데……. 하얗고 보드라워 보이는 피부는 제가 수십 번이나 얼굴을 비비고 입술을 묻었던 시윤의 가슴이 맞았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상처가 사라졌음에도 시윤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으, 으……. 아아…….”
시윤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거렸다.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거센 몸부림이었다. 청호가 곧 죽어 버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파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런데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청호가 시윤의 팔다리를 내리눌렀다. 발작하다 또 다른 상처가 생기면 안 되니까.
“시윤아. 어디가 아파. 응? 어디가 아파?”
“너무 뜨거워요……. 몸이, 타는 것, 흑, 같아…….”
시윤이 울먹이며 말했다. 청호가 곧장 손에 힘을 줬다. 뜨거운 물을 차게 식힌다는 느낌으로, 그렇다고 얼 정도는 아니게, 적당히를 유념하며 시윤에게 제 능력을 흘려보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짓씹었는데. 눈치 없는 입술이 툭 터졌다. 찢어진 피부 사이로 피가 스며 나왔다. 청호가 혀를 내어 그것을 핥았다. 헌데 한 방울이 차마 잡기도 전에 아래로 낙하했다. 붉은 핏방울이 시윤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
그와 동시에 시윤의 몸부림이 뚝 멎었다. 청호도 덩달아 몸을 굳혔다.
깜빡깜빡. 눈을 깜빡이던 시윤이 입술 새로 새빨간 혀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입술에 떨어진 청호의 피를 날름 핥았다. 곧 시윤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러자 환하게 발광하던 시윤의 눈동자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 광경을 코앞에서 목도한 청호가 가늘게 눈을 좁혔다. 그러고는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러 피를 묻힌 다음 그것을 시윤의 입가로 가져갔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혀를 내어 청호의 피를 삭삭 핥아 먹었다. 꼭 목마른 강아지가 물을 마시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청호가 반대 손으로 시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물었다.
“이거? 이게 좋아?”
시윤이 끄덕끄덕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없었고, 그저 좋냐는 물음에 긍정한 것뿐이었다. 실로 좋았다. 여전히 몸이 뜨겁고 핏줄은 꼬였지만, 청호의 피를 삼킨 목구멍만은 평화를 찾았다.
청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바닥에 널브러진 메스 하나를 발견했다. 손을 뻗자 메스가 그의 손으로 꽂히듯 날아왔다. 그것을 바투 쥔 청호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목을 찍었다. 메스의 칼날 부분이 죄 청호의 손목 안으로 사라졌다. 청호는 그대로 메스를 아래로 쭉 내리그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행위에 살이 그대로 쩍 갈라지더니 피를 콸콸 쏟아 냈다. 청호가 손목을 얼른 시윤의 입가로 가져갔다. 시윤이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꼴깍꼴깍 피를 삼켰다.
한 모금 삼켰을 땐 몸이 개운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모금에는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던 고통이 사라졌고, 세 모금에는 절절 끓던 피가 식었다. 그리고 청호의 상처가 아물었다. 시윤이 아쉬운 마음에 핏자국만 남은 손목을 핥아 대고 있으니, 청호가 손목을 거둬 갔다.
시윤의 혀가 빼꼼 배웅을 나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청호가 다시 메스를 들어 손목을 찍었다. 피가 쏟아졌다. 시윤이 입을 뻐끔 벌린 채 그것을 기다렸다. 그렇게 청호의 손목은 아물었다가 갈라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이깟 상처와 출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시윤과 온몸을 겹치고 있는 터라 의도치 않게 가이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시윤의 만면에 시시각각 안온이 물들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싶었다.
세 번째로 청호의 손목이 아물었을 때, 시윤이 축 몸을 늘어트렸다. 더 이상 몸이 아프지 않았다. 괴롭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만이 자욱하게 몰려왔다.
“이제 괜찮아?”
청호가 자신의 피로 물든 시윤의 입가를 살살 닦아 내며 물었다. 시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는 그간 서러웠던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듯 꼬물꼬물 청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꽉 껴안았다.
“혼자 둬서 미안해. 혼자 아프게 해서 미안해. 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청호가 시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담긴 마음만큼은 아주 크고 무거웠다. 시윤이 괜찮다는 말 대신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시윤의 냄새가 났다. 그의 따뜻한 체온도 느껴졌고, 맥동하는 심장 박동도 은은히 스며 왔다. 색색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그 모든 게 그렇게 감동적일 수 없었다.
아아, 나의 채시윤이 살아 있다.
나를 홀로 두지 않고, 죽음에서 돌아왔다.
청호가 온 마음을 다해 미소 지었다.
시윤은 금세 잠이 들었다. 교도소에 있던 청호를 만나기 위해 집에서 빠져나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청호는 반쯤 헐벗은 시윤 위에 코트를 덮어 준 채, 그를 껴안고 함께 누워 있었다. 그가 시윤의 가슴팍을 천천히 도닥였다. 그러면서도 5분에 한 번씩 시윤이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모든 상황이 끝나자, 모건이 쭈뼛쭈뼛 들어왔다. 수술실 창밖으로는 온갖 감정으로 점철된 시윤의 가족들과 병사들이 보였다. 걱정, 놀라움, 경악, 공포, 뭐 그런 감정들이었다. 동물원 원숭이를 구경하는 꼴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청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씰기죽거렸다.
다 치워 버렸으면 좋겠다. 지금은 시윤과 저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뭐.”
청호가 모건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시윤이 좀 보자. 내 수술실이 이 꼴이 된 이유는 알아야지.”
모건이 난장판이 된 수술실을 가리켰다. 시윤에게 빨려 들어가 반만 남은 기계들, 움푹움푹 파인 바닥과 벽, 뼈대만 남은 스탠드, 여기저기 떨어진 청호와 시윤의 핏방울 등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광경이었다.
“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걸로 시윤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아야 해.”
“…….”
청호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윤의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헌데 모건의 손에 시윤을 넘겨주기가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그렇다고 모건이 아닌 다른 이에게 시윤의 상태를 검진받는 것 역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청호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쉬운 몸짓으로 시윤과 떨어지는데, 그와 동시에 시윤이 번쩍 눈을 떴다. 푸른색 눈동자가 다시 발광했다.
“으…….”
시윤이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주위 것들이 가루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시윤아?”
청호가 눈을 크게 떴다. 잘 자던 애가 왜 갑자기. 호흡도 고르고, 체온도 정상이었는데.
“다시 안아.”
모건이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저것에 휩쓸리면 어깻죽지가 죄 사라진 간호병처럼 제 몸뚱이 역시 빨려 들어갈 터였다.
“뭐?”
“손을 잡든, 뭐든, 스킨십하라고. 가이딩할 때처럼.”
모건이 손을 마구 흔들며 청호를 재촉했다. 청호가 얼른 시윤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침대 위로 훌쩍 올라가 시윤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시윤이 봄날에 눈사람이 녹듯 사르르 눈을 감았다. 구겨졌던 미간도 펴졌고, 진동하던 사물들도 잠잠해졌다.
두 사람을 관찰하며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던 모건이 한 발 한 발 조심히 침대로 다가갔다.
“내가 검사할 때까지 절대로 시윤이한테서 떨어지지 마.”
“……얘 왜 이래?”
“능력이 안정화 상태가 아니라 그래. 몸이 자기 힘에 적응을 못 한 거야.”
“자기 힘이라니. 이게 시윤이 힘이라는 거야?”
청호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모건을 바라봤다. 모건이 엉망이 된 수술실을 뒤지고 뒤져 간신히 멀쩡한 홀로그램 기계 하나를 찾아냈다. 그 후 그것으로 시윤의 몸을 스캔했다.
“응. 시윤이는 C급이 아니야. 너처럼 아주 센 힘을 가지고 있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휴가 알려 줬어.”
그 말에 청호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오르막길을 그렸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잡놈이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고? 라는 표정이었다. 모건이 어깨를 으쓱이며 바쁘게 홀로그램을 두드렸다.
“나도 그전부터 의심은 했었어. 시윤이가 가끔 사지에 몰리거나 지나치게 흥분할 때마다 요술 같은 걸 썼거든.”
모건이 언젠가 시윤이 정원의 원을 깨고 나왔던 걸 떠올렸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아느냐고, 정원이 실수했다고 말했었지.
“……요술?”
청호의 낯이 더욱 괴상하게 뒤틀렸다.
“응. 왜 째끄마한 요정들이 지팡이 들고 뾰로롱, 하는 거 있잖아. 옛날 인간들 동화에 보면 드레스도 만들어 주고 호박 마차도 만들어 주고 나쁜 마녀한테서 구해도 주는 그런 거.”
모건이 검지를 휘두르며 지팡이를 흉내 냈다. 그 괴상한 모습에 청호가 독 사과라도 씹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그게. 시윤이한테 지팡이가 있어? 노친네들이 쓰는 지팡이 같은 거?”
“……아니,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였어. 나도 뭔지 모르고, 시윤이도 뭔지 모르는 힘이라 요술 같다고.”
“…….”
청호가 흐음, 목울대를 움직이며 시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모건도 시윤도 모르는 힘이라. 근데 휴는 알고 있다라.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그쯤, 모건이 스캔을 마쳤다.
“지금 시윤이 몸은 지극히 정상이야. 체온도 정상, 신체 기능도 정상, 큰 상처도 없고, 타박상도 없어.”
“근데 왜 이래?”
“어빌리티 곡선이 엉망진창이라 그래.”
모건이 자신이 보던 홀로그램을 180도 돌려 청호에게 보여 줬다. 폭주가 없으면 대부분 직선에 가까운 곡선이 그려지는데, 시윤의 것은 꼭 고슴도치 가시처럼 비죽비죽 솟구쳐 있었다. 지진의 파동 같기도 했다.
“몸은 정상인데 힘이 정상이 아닌 거지.”
“…….”
“그래서 힘을 무작정 발산하기만 하는데, 네가 붙어 있으면 널 가이딩하는 데 힘을 쓰면서 자연히 방출되는 힘이 줄어드는 거야.”
다시 홀로그램을 가져간 모건이 이것저것을 눌러 댔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수치를 보고, 그래프도 봤다. 연구할 게 한둘이 아녔다. 오랜만에 머리가 간질간질했다. 시윤의 변화와 관련한 모든 것들을 조사하고 싶어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시윤이 피 좀 뽑을게.”
모건이 수술실 바깥에 서 있던 의료진을 향해 손짓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의료진이 옆방에서 주사기를 비롯한 의료 도구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시윤의 가족들과 눈을 마주쳤으나, 모건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딱히 할 말이 없는지라.
모건이 주사기 캡을 벗겼다. 축 늘어진 시윤의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 바늘을 쑤시려는데,
“조금만 뽑아. 조금만.”
청호가 눈을 부라리며 으르댔다. 모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네 새끼 밑에 깔려서 흘린 코피나, 각혈한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러면 청호가 제 혀를 뽑아 버릴 것 같아 차마 내뱉지 못했다.
모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주사기 하나만큼의 피를 뽑아 갔다. 바늘이 빠지고 찔끔 핏방울이 올라왔다. 청호가 알코올 솜으로 그것을 손수 닦아 내려 할 때였다.
모건이 “잠깐만.”이라며 청호를 만류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익숙한 기계를 꺼냈다. 시윤이 등급을 확인할 때마다 엄지를 쑤시던 채혈 기계였다. 모건이 기계의 바늘 끄트머리에 시윤의 피를 살짝 가져다 댔다.
곧 손바닥만 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온갖 알파벳들이 마구 휘몰아쳤다. 모건과 청호가 잠깐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결과가 나타났다.
[-]
공백이었다. 청호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뭐야? 고장이야?”
반면 모건은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했다.
“……아니.”
“근데 왜 나오는 게 없어?”
“기계가 판단할 수 있는 수치를 넘어서 그래.”
그 말에 청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어온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거 되게…… 익숙한 말이네.”
“그렇지. 넌 검사할 때마다 들었던 말일 테니까.”
“그럼 시윤이도…….”
“그래. SS급이 됐나 봐.”
청호가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자신의 품에서 잠든 시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SS급이라고. 시윤이가. C급이었던 시윤이가. 한순간에 SS급이 됐다고. 저처럼 기형적일 정도로 센 힘을 가지고 있다고.
“좋아?”
“……글쎄.”
좋은 건가. 청호가 모호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힘이 센 건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현세에 힘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근데 또 그렇게 좋지만도 않았다. 여태 청호가 살아온 삶이 그렇게 반짝이지도, 멋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시윤 역시 지게 될 터였다. 찬탄과 감사를 듣다가 어느 순간에는 원망의 대상이 되고, 종국엔 악마 취급을 당할지도 몰랐다.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전장에서 눈을 감고 눈을 뜨는 삶을 반복하게 되겠지.
그게 좋은 건가. 시윤은 비명과도, 피와도, 죽음과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청호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모건이 그런 청호의 팔뚝을 툭툭 장난스레 두드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좋아해. 더 이상 시윤이가 널 가이딩하다가 아플 일이 없다는 뜻이니까.”
“…….”
청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희소식이었다. 그런데도 가슴께가 묵직한 건 나아지지 않았다.
모건이 사방에 뻗어 있던 홀로그램을 정리했다. 주사기와 피도 챙기고, 병사들에게 병실을 새로이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일단 오늘은 쉬어. 내가 연구해 보고, 정확한 결과는 내일 알려 줄게. 넌 밤새 시윤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일랑 말고.”
“그럴 생각 없어.”
“알아. 아는데, 한 번 더 말한 거야.”
마지막으로 시윤의 안색을 살핀 모건이 느릿하게 수술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내 바깥에 서 있던 선화와 쌍둥이 형들이 모건에게 달려들듯 다가왔다.
“모건. 시윤이, 시윤이 좀 만나게 해 주세요.”
“지금은 안 됩니다. 시윤이 상태가 불안정해서 반려인 청호만…….”
모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덕분에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청호가 시윤을 조심히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저들과 시윤은 피로 연결된 혈연관계이나, 그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건 저뿐인 듯해서. 가족도 반려도 모두 신이 이어 준 관계이자 인연인데, 제가 가장 대단한 것 같아서.
같잖은 우월감이었다.
* * *
시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뭉근한 빛이 느껴졌다. 근데 보이는 건 없었다. 눈알이 너무 건조하고 뻑뻑해서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수십 초간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주변이 전보다 조금 또렷해졌다.
아주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공간이었다. 모건의 연구동에 있는 병실. 모건이 도움을 요청해 연구진으로 왔을 때도 있었고, 청호를 가이딩하다 다쳐 환자로 온 적도 있었다.
시윤이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연신 깜빡이며 기억을 반추하는데.
“더 자도 돼.”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잔잔히 간질여 왔다. 흠칫 놀란 시윤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청호가 보였다. 제게 팔베개를 해 준 채 옆으로 누워 있는 청호가.
“……대장님?”
시윤이 공중에 붕 뜬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눈을 번뜩였다. 청호의 얼굴을 마주하니 그간의 기억이 속속들이 떠오른 탓이다.
시윤이 더듬더듬 자신의 가슴을 매만졌다. 하얀 가운 너머로 느껴지는 가슴팍엔 그 어떠한 요철도 없었다. 혹시나 해 가운을 슬쩍 들춰 보기도 했다. 역시나 미끈했다. 분명 휴가 제 심장에 붉은 보석을 찔렀었는데 어째서…….
다 나았나?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흐른 건가? 제가 죽은 줄 알았는데. 아주 아팠던 기억도 있거늘. 이건 꿈인가? 언제부터 꿈인 건가? 종우는 어찌 됐고? 아니, 아니. 청호는 또 왜 여기 있나. 교도소에 있지 않았나?
시윤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지만 누가 마구잡이로 뚝뚝 잘라 놓은 듯한 기억은 도무지 정리가 안 됐다.
“이거 꿈인가요?”
시윤이 답지 않게 멍청한 질문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청호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가 시윤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으며 부정했다.
“……그럼 제 앞에 있는 대장님이 진짜 대장님이란 말씀이시죠?”
“그렇지.”
“…….”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청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의 아랫입술이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처럼 씰룩거렸다. 눈썹 위로 오목한 홈이 파이더니 청호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마른 팔이 청호를 억척스레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청호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시윤이 웅얼웅얼 그리움을 토로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청호가 버석하니 굳었다. 그러다 한껏 미소 지으며 시윤을 마주 안았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